30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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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0년 전쟁은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벌어진 종교 전쟁이다.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화의의 불완전함, 칼뱅주의의 등장, 신성 로마 제국 내 개별 통치자들의 자치권 강화 등이 배경이 되었다. 보헤미아-팔츠 전쟁, 덴마크 전쟁, 스웨덴 전쟁, 프랑스-스웨덴 전쟁 등 여러 단계로 진행되었으며, 스페인, 프랑스, 스웨덴 등 주변 국가들이 참전하여 국제전 양상으로 확대되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종결되었으며, 이 조약은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를 가속화하고, 프랑스의 강대국 지위 확립, 스웨덴의 발트해 지역 영향력 확대, 네덜란드와 스위스의 독립 승인 등 유럽의 정치 지형을 변화시켰다. 또한, 종교적 갈등이 주요 원인이었던 마지막 대규모 유럽 전쟁으로 기록되며, 이후 유럽의 전쟁은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위한 세력 다툼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독일 지역은 인구 감소와 경제적 황폐화를 겪었고, 베스트팔렌 조약은 현대 국가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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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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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분쟁 | 30년 전쟁 |
일부 | 유럽 종교 전쟁 및 프랑스-합스부르크 라이벌 관계 |
날짜 | 1618년 5월 23일 – 1648년 10월 24일 (30년 5개월 1일) |
장소 | 중앙 유럽 |
결과 | 베스트팔렌 조약 |
영토 | 프랑스, 데카폴 및 준트가우 합병 스웨덴, 비스마르, 볼린, 서포메라니아, 브레멘-페르덴 획득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포메라니아 획득 스위스 연방,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 |
교전 세력 (1635년 이전) | |
대립 연합 (1635년 이전) | 보헤미아 왕국 스웨덴 제국 팔츠 선제후국 사보이아 공국 트란실바니아 네덜란드 공화국 덴마크-노르웨이 헤일브론 연맹 헤센-카셀 방백국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작센 선제후국 |
제국 연합 (1635년 이전) | 합스부르크 군주국 스페인 제국 바이에른 선제후국 가톨릭 동맹 |
교전 세력 (1635년 이후) | |
대립 연합 (1635년 이후) | 프랑스 왕국 스웨덴 제국 네덜란드 공화국 헤센-카셀 방백국 |
제국 연합 (1635년 이후) |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제국 덴마크-노르웨이 |
지휘관 (대립 연합) | |
지휘관 |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악셀 옥센셰르나 요한 바네르 렌나르트 토르스텐손 칼 구스타프 브랑엘 알렉산더 레슬리 루이 13세 리슐리외 마자랭 대 콩데 튀렌 마우리츠 판 오라녜 프레데리크 헨드리크 마르턴 트롬프 프리드리히 5세 페터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 인드르지흐 마티야시 투른 크리스티안 폰 안할트 크리스티안 4세 크리스티안 빌헬름 폰 브란덴부르크 요한 게오르크 1세 베른하르트 폰 작센-바이마르 크리스티안 폰 브라운슈바이크 베틀렌 가보르 게오르크 빌헬름 폰 브란덴부르크 |
지휘관 (제국 연합) | |
지휘관 | 페르디난트 2세 페르디난트 3세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마티아스 갈라스 레오폴트 빌헬름 멜히오르 폰 하츠펠트 페터 멜란더 폰 홀차펠 오타비오 피콜로미니 펠리페 4세 올리바레스 백작 코르도바 암브로조 스피놀라 페르디난트 추기경 막시밀리안 1세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 파펜하임 샤를 4세 드 로렌 프란츠 폰 메르시 라이몬도 몬테쿠촐리 요한 폰 베르트 |
병력 규모 (대립 연합) | |
최대 실제 병력 (대립 연합) | 100,000–140,000 스웨덴군 27,000 덴마크군 (1626년) 70,000–80,000 프랑스군 80,000–90,000 네덜란드군 |
병력 규모 (제국 연합) | |
최대 실제 병력 (제국 연합) | 110,000 제국군 90,000 스페인군 20,500 바이에른군 |
사상자 (대립 연합) | |
전투 사망자 | 스웨덴군 복무 중 110,000명 프랑스군 복무 중 80,000명 덴마크군 복무 중 30,000명 기타 50,000명 |
사상자 (제국 연합) | |
전투 사망자 | 제국군 복무 중 120,000명 바이에른군 복무 중 30,000명 기타 30,000명 |
사상자 (총합) | |
질병으로 인한 군인 사망자 | 700,000–1,350,000명 |
총 민간인 사망자 | 3,500,000–6,500,000명 |
총 사망자 | 4,500,000–8,000,000명 |
추가 정보 | |
다른 명칭 |
2. 배경
1552년 파사우 조약과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화의는 신성 로마 제국 내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간의 종교 갈등을 종식시키고, ''쿠이우스 레지오, 에이우스 렐리지오'' 원칙에 따라 통치자의 종교를 따르도록 했다. 그러나 이 합의는 프로테스탄트의 확장과 칼뱅주의의 성장으로 훼손되었고, 제국 내 통치자들의 자치권 확대로 중앙 권위는 약화되었다.
제국은 단편적인 성격으로 인해 이러한 문제들을 관리하기 어려웠고, 제국 의회는 주로 토론의 장으로 기능했다. 이론적으로 황제는 선출되었지만, 1440년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이 황제 자리를 차지했으며,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헝가리 등 광대한 영토를 통치했다. 카를 5세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로 분리되었지만, 여전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제국 내 영향력을 행사했다.
종교적 통일성이 사라지면서, 루터교 작센과 가톨릭 바이에른 등 야심찬 제국 국가들과 프랑스 등 외부 세력들이 제국 내 분열을 야기했다. 1608년 선제후 프리드리히 4세는 프로테스탄트 동맹을 결성했고, 막시밀리안은 1609년 가톨릭 동맹을 설립하여 대응했다.
1583년부터 1588년까지의 쾰른 전쟁은 통치자 게브하르트 트룩세스 폰 발트부르크가 칼뱅주의로 개종하면서 발발했다. 1606년 도나우뵈르트에서는 루터교 다수파가 가톨릭 종교 행렬을 막는 폭동이 일어났고, 황제 루돌프는 가톨릭 막시밀리안의 개입을 승인하여 도시를 합병하고 종교를 가톨릭으로 바꾸었다.[49]
1608년 제국 의회에서 루터교와 칼뱅교는 아우크스부르크 조약의 재확인을 추구했지만, 대공 페르디난트는 1555년 이후 가톨릭 교회에서 빼앗긴 모든 재산의 반환을 요구하여 의회를 마비시키고 제국의 중립성에 대한 인식을 제거했다.[50] 중앙 권력에 대한 신뢰 상실은 도시와 통치자들이 요새와 군대를 강화하게 만들었다.[51]
1609년부터 1614년까지의 율리히 계승 전쟁은 제국 전역의 긴장을 고조시켰다.[52] 이 전쟁을 30년 전쟁의 시작으로 보는 역사가들도 있으며,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는 가톨릭 후보를, 프랑스와 네덜란드 공화국은 프로테스탄트 후보를 지지했다.[53]
'''보라색''': 스페인 속령
'''녹색''': 오스트리아 통치
'''갈색''': 스페인 통치
스페인과 네덜란드 공화국 사이의 80년 전쟁을 중단시킨 1609년 12년 휴전이 만료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외부 세력이 독일 내부 분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스페인은 스페인 길을 확보하여 군대와 보급품을 육로로 이동시키려 했고, 1618년까지 선제후 팔츠를 통과하는 구간만이 스페인이 통제하지 못하는 유일한 부분이었다.[54]
황제 마티아스에게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스페인의 필리프 3세는 1617년 7월 페르디난트의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 선출을 지지하기로 합의했다. 그 대가로 페르디난트는 북부 이탈리아와 알자스에서 스페인에 양보하고, 네덜란드 공격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황제 선출은 보장되지 않았고,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은 작센, 팔츠와 연합하여 자신의 후보를 지지하려 했다.[55]
칼뱅주의자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는 1613년 영국과 스코틀랜드 제임스 1세의 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와 결혼하여 프로테스탄트 황제 선출 가능성을 높였다. 1617년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 왕이 되면서 선거권을 장악했지만, 그의 보수적인 가톨릭 신앙은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이러한 요인들이 결합되어 1618년 5월 보헤미아 반란을 일으켰다.[56]
2. 1. 종교 개혁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1552년 파사우 조약은 슈말칼덴 전쟁을 종식시켰는데, 이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사이의 종교 갈등이었다.[40]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화의는 ''쿠이우스 레지오, 에이우스 렐리지오'' 원칙을 사용하여 두 종교 사이의 경계를 고정함으로써 재발을 막으려고 시도했다. 이는 통치자의 종교에 따라 개별 국가를 당시 가장 일반적인 프로테스탄트 형태였던 루터교 또는 가톨릭으로 지정했다. 다른 조항들은 도나우뵈르트와 같은 도시의 상당한 종교적 소수자들을 보호하고 파사우 이후 가톨릭 교회로부터 몰수된 재산에 대한 루터교의 소유권을 확인했다.이러한 합의들은 1555년 이후 프로테스탄트의 확장으로 인해 이전에 가톨릭으로 지정된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훼손되었다. 또 다른 요인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인정받지 못한 프로테스탄트 종파, 특히 루터교와 가톨릭 모두에게 적대적으로 여겨진 칼뱅주의의 성장이었다.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화의는 또한 제국 내 개별 통치자들에게 더 큰 정치적 자치권과 그들의 영토에서 행해지는 종교에 대한 통제권을 부여하면서 중앙 권위를 약화시켰다. 경제적 및 정치적 목표에 대한 갈등은 종종 종교를 능가했으며, 루터교인 작센, 덴마크-노르웨이, 스웨덴이 서로 경쟁하고 칼뱅주의 브란덴부르크와 발트해 무역을 놓고 경쟁했다.
2. 2. 신성 로마 제국과 주변국 상황
1610년대 초, 스페인 제국의 몰락이 가속화되면서 유럽의 정세는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펠리페 2세의 지나친 중앙집권화와 개신교 탄압은 네덜란드 독립 전쟁을 야기했고,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네덜란드 연합군에 격파당하면서 스페인의 위신은 추락했다.[40] 한편, 프랑스 왕국은 앙리 4세의 통치 아래 중앙집권의 기틀을 마련하고 낭트 칙령을 통해 국내 종교 분쟁을 종식시키며 성장했다. 앙리 4세는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의 고립을 피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고, 스위스의 독립을 인정했으며,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독립군을 지원하는 등 실리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41]북유럽에서는 스웨덴 제국, 엘리자베스 1세의 잉글랜드 왕국, 덴마크-노르웨이가 중앙집권화를 이루며 강국으로 부상했다. 잉글랜드는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해상 통제권을 확보했으며,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령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구빈법을 시행하는 등 내치에도 힘썼다.[42] 스웨덴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지휘 아래 발트해 공략 작전을 개시하여 한자 동맹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다.[43] 덴마크-노르웨이의 크리스티안 4세는 카테카트 해협과 스카게라크 해협을 장악하여 통행료를 징수하고 왕실 권위를 강화했다.[44] 덴마크는 홀슈타인 영주로서 신성 로마 제국 북부 요충지를 차지하고 있었다.[45]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역시 강성한 세력을 자랑하며 신성 로마 제국의 패권에 도전할 정도였다. 지그문트 3세 바사는 가톨릭 국가 및 신교 국가들과 두루 관계를 맺고 유럽 내 사태를 주시했다.[46]
종교 갈등이 심화되면서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의 신성 로마 제국은 서로를 고립시키기 위해 동맹 체제를 강화했다. 프랑스는 교황 바오로 5세, 베네치아 공화국 등과 동맹을 맺었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이후, 루터교회로 개종하는 도시들이 늘어났다.[47] 1526년 슈파이어 제국 의회에서 신성 로마 제국은 영주들의 루터교 신앙을 인정했지만, 1529년 빈 공방전 승리 후 황제 카를 5세는 《보름스 칙령》을 다시 발표해 루터교를 탄압하려 했다.[48] 이에 개신교도 영주들은 1531년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하고 저항했다. 슈말칼덴 전쟁은 1552년 파사우 조약으로 종식되었고,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화의에서 ''쿠이우스 레지오, 에이우스 렐리지오'' 원칙이 확립되어 통치자의 종교에 따라 국가의 종교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 합의는 프로테스탄트의 확장과 칼뱅주의의 성장으로 인해 훼손되었다.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화의는 제국 내 통치자들에게 더 큰 자치권을 부여하며 중앙 권위를 약화시켰다.
이러한 문제들은 제국의 단편적인 성격으로 인해 관리하기 어려웠다. 제국 의회는 불규칙하게 소집되었고, 주로 토론의 장으로 기능했다.
이론적으로 황제는 선출되었지만, 1440년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헝가리 등 광대한 영토를 통치했다. 카를 5세가 1556년에 제국을 나누기 전까지 스페인 제국도 통치했다. 이러한 유대는 빈번한 혼인으로 강화되었고, 스페인은 스페인 네덜란드, 밀라노, 프랑슈콩테와 같은 제국 영토를 유지했다.
아우크스부르크 이전에는 종교의 통일성이 중앙 권위의 부족을 보상했지만, 종교의 통일성이 사라지자 중앙 권위는 더욱 약화되었다. 여기에는 루터교 작센과 가톨릭 바이에른과 같은 야심찬 제국 국가뿐만 아니라 국경에 있는 합스부르크 영토와 맞서 싸우는 프랑스도 포함되었다. 많은 외국 통치자들이 제국 왕자였기 때문에 제국 내 분열은 외부 세력을 끌어들였다.
1608년 선제후 프리드리히 4세는 프로테스탄트 동맹을 결성했고, 막시밀리안은 1609년 가톨릭 동맹을 설립하여 대응했다.
2. 3. 쾰른 전쟁과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계승 전쟁
1583년부터 1588년까지 지속된 쾰른 전쟁은 쾰른 대주교이자 선제후였던 게브하르트 트루흐제스 폰 발트부르크가 칼뱅주의로 개종하면서 발발했다. 이 전쟁은 가톨릭 세력의 승리로 끝났고, 이는 반종교개혁이 가속화되는 계기가 되었다.[16]1609년,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공작이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이 사건은 신성 로마 제국 내 종교적, 정치적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다. 같은 해, 가톨릭 제후들은 가톨릭 동맹을 결성하여 프로테스탄트 동맹에 대항했다.
3. 보헤미아-팔츠 전쟁 (1618년 ~ 1623년)
1619년 10월 뮌헨 조약에서 페르디난트는 팔츠 선제후의 선거권을 바이에른에 양도하고 막시밀리안이 상팔츠를 합병하도록 허용했다.[17] 많은 프로테스탄트 통치자들은 합법적으로 선출된 보헤미아 국왕을 폐위하는 것에 반대했기 때문에 페르디난트를 지지했다. 같은 이유로, 그들은 프리드리히의 축출을 "독일의 자유" 침해로 간주했고, 가톨릭교도들에게는 1555년 이후 상실된 토지와 재산을 되찾을 기회를 제공했다. 이러한 조합은 제국의 상당 부분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12]
동시에, 네덜란드에서의 전쟁에 대한 스페인 도로의 전략적 중요성과 팔츠와의 근접성은 스페인을 끌어들였다. 코르도바가 이끄는 군대가 1619년 10월 하팔츠를 점령했을 때, 제임스 1세는 그의 사위에 대한 이 공격에 대응했다. 영국의 해군은 아메리카와 지중해의 스페인령을 위협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제임스는 1621년 봄까지 스페인군이 철수하지 않으면 전쟁을 선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러한 행동은 주로 그의 친스페인 정책을 프로테스탄트 대의 배신으로 간주한 의회의 반대자들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13] 그러나 스페인의 수상 올리바레스는 이것을 공개 협상을 위한 초대로 정확하게 해석했고, 영국-스페인 동맹을 대가로 프리드리히를 그의 라인란트 소유지로 복귀시키겠다고 제안했다.[14]
프리드리히의 토지와 칭호의 완전한 반환 요구는 뮌헨 조약과 양립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협상된 평화에 대한 희망은 빨리 사라졌다. 보헤미아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의 동맹국에는 바덴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와 브룬스비크의 크리스티안이 포함되었고, 네덜란드는 80년 전쟁이 1621년 4월에 재개된 후 그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으며, 그의 장인 제임스는 만스펠트 지휘하에 용병 군대에 자금을 지원했다. 그러나 그들의 효과적인 조정 실패는 빔프펜(1622년 5월)과 회흐스트(6월)를 포함한 스페인과 가톨릭 동맹군의 일련의 패배로 이어졌다. 1622년 11월까지, 제국군은 프랑켄탈(호레이스 베어 경 지휘하의 소규모 영국 수비대가 방어)을 제외한 대부분의 팔츠를 장악했다. 만스펠트 군대의 잔여 세력은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피난했고, 프리드리히도 마찬가지였으며, 그는 1632년 11월 사망할 때까지 헤이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15]
1623년 2월 제국 의회 회의에서 페르디난트는 프리드리히의 칭호, 토지 및 선거권을 막시밀리안에게 이전하는 조항을 강행했다. 그는 스페인뿐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회원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동맹의 지원을 받아 그렇게 했다. 팔츠는 분명히 상실되었고, 3월에 제임스는 베어에게 프랑켄탈을 항복하도록 지시했고, 8월 슈타트론에서 틸리의 브룬스비크의 크리스티안에 대한 승리는 군사 작전을 완료했다.[16] 그러나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이 전투 참여는 전쟁의 국제화에 중요한 단계였고, 프리드리히의 제거는 다른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이 자신의 권리와 영토를 보존하기 위해 무장 저항을 논의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12]
4. 덴마크 전쟁 (1625년 ~ 1629년)
1625년,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는 북독일 개신교 보호와 발트해 영향력 확대를 위해 전쟁에 개입하였다.[19] 그는 원래 북독일 세력 확장과 발트해, 북해의 패권 확립을 노리고 있었다.[26] 덴마크 국왕은 니더작센 제국 관구(크라이스) 장관으로 오랫동안 공석이었던 두 개의 제국 내 주교직에 자신의 아들을 임명하려 했으나, 틸리 백작의 군대가 니더작센에 주둔하여 황제에게 거절당했다. 이로써 덴마크 국왕은 개입할 구실을 얻었다.[19] 1625년 12월 헤이그 조약에 따라 영국과 네덜란드로부터 지원을 받았다.[19]
황제 마티아스는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을 등용하여 덴마크군을 상대하였다.[16] 1626년 4월 25일 데사우 다리에서 발렌슈타인이 에른스트 폰 망스펠트를 격파했다.[21] 1626년 8월 27일 루터에서 틸리 백작이 이끄는 황제군이 덴마크군을 격파하고, 발렌슈타인 군대도 덴마크를 압박하였다.[16][21][19]
1628년 여름, 발렌슈타인이 제국 해군 기지 확보를 위해 폼멜른의 슈트랄준트 항을 포위하게 되자, 스웨덴은 개입을 결정했다.[19] 그러나, 발렌슈타인 군을 추격하려 크리스티안 4세가 재상륙하여 역습을 당하고, 1629년 5월 22일 뤼베크 조약이 성립되어 덴마크는 전쟁에서 이탈하였다.[21] 덴마크는 영토는 몰수되지 않고 유지되었지만, 제국에 대한 개입을 금지당했다. 이로써 덴마크는 북유럽의 패자로서의 지위가 흔들리게 되었다.[26]
1629년 3월 6일,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복구칙령을 발표하여 1552년 이후 개신교 세력에게 몰수되었던 교회령을 가톨릭 측에 반환하도록 명령하고, 황제의 허가 없이 동맹을 맺는 것도 금지하여 개신교 세력을 더욱 압박하였다.[21]
5. 스웨덴 전쟁 (1630년 ~ 1635년)
발렌슈타인이 발트해·대서양 제독에 임명된 것은 스웨덴의 발트해 패권을 위협했다.[16]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1631년 1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베르발데 조약)[19] 프랑스의 재정 지원을 받아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여[16] 포메른, 메클렌부르크에서 황제군을 격퇴했다.[21]
1629년 9월, 프랑스의 리슐리외는 스웨덴과 폴란드 사이의 알트마르크 휴전 협정을 협상하는 데 도움을 주어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전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개신교를 지원하려는 진정한 욕망과 함께 스웨덴의 수입의 상당 부분을 제공했던 발트해 무역의 지분을 극대화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브란덴부르크, 작센 선제후는 참전을 주저했고, 마그데부르크는 함락되었다(마그데부르크 전투)[21].오데르 강변 프랑크푸르트를 약탈하여 브란덴부르크에 압력을 가했고, 1631년 5월의 마그데부르크 약탈은 황제의 승리의 결과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제공했다.
틸리가 복구 칙령 집행을 위해 작센으로 진군하자, 황제파였던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는 스웨덴 측으로 돌아섰다.[21] 스웨덴군은 1631년 9월 17일, 라이프치히 북쪽 브라이텐펠트에서 황제군과 대치하여, 신식 군제, 장비, 전술을 갖춘 스웨덴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브라이텐펠트 전투)[21].
1631년 베어발데 조약은 스웨덴과 작센, 브란덴부르크를 포함한 개신교 동맹국들에게 자금을 제공했다. 이는 연간 또는 와 1630년 추가 에 달했다. 프랑스 총수입의 2% 미만이었지만, 이 지불액은 스웨덴의 수입을 25% 이상 증가시켰고,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36,000명의 군대를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더 나아가 스웨덴군은 뷔르츠부르크를 공략했고, 11월에는 아르님이 이끄는 작센군이 프라하를 공략했다.[21]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도 스웨덴군과 동맹을 맺게 되었다.[16]
1632년 2월 스웨덴군은 뮌헨으로 남하하여, 4월 15일 레히 강 전투에서 황제파 바이에른군에 대해 포병의 효과적인 운용으로 다시 한번 스웨덴군이 압승했다(레히 강 전투)[21]. 부상당한 총사령관 틸리 백작은 곧 전사했고, 황제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황제 측은 보헤미아에 은퇴해 있던 발렌슈타인을 다시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4만 명의 군대를 편성하여 반격을 시도했다.[21][16] 1632년 여름 발렌슈타인은 보헤미아에 주둔하고 있던 작센군을 격퇴하고, 뉘른베르크에서 스웨덴군을 격파하고 작센으로 향했다.[21]
11월 16일, 양측은 라이프치히 교외 뤼첸에서 전투를 시작했다. 전투 초반, 전황은 황제군에 불리하게 움직였고, 원군 사령관도 도착하자마자 전사했지만,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도 전사했다.[16] "스웨덴 국왕 전사"라는 소식은 황제군의 사기를 높였지만, 스웨덴군은 용병 대장 베른하르트 폰 작센-바이마르가 지휘를 이어받았고, 결국 황제군은 이 전투에서 패했다(뤼첸 전투).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에서는 공주 크리스티나가 국왕에 즉위했다. 어린 여왕 밑에서 스웨덴의 실권은 재상 옥센셸나가 이어받았다.[21][26]. 그러나 이는 스웨덴군과 프로테스탄트 제후들 사이의 분열을 초래했다.
옥센셸나는 1633년 4월, 독일 제후들의 자유 회복을 요구하던 남부 독일의 제국 크라이스, 쿠어라인, 오버라인, 슈바벤, 프랑켄과 하일브론 동맹을 체결했다.[21] 이를 받아들여 프랑스의 리슐리외는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스웨덴과 거래를 했고, 가톨릭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도 이 동맹에 참가했다.
한편, 스페인군이 이탈리아에서 스위스를 거쳐 라인 강 상류 지역으로 진출했다.[21]
발렌슈타인은 독단적으로 스웨덴군과 평화를 맺고, 1634년에는 장교들에게 그 자신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게 했기 때문에 암살당했다.[16]
황제는 장남 페르디난트 대공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1634년 9월 넬트링겐 전투에서 스웨덴·프로테스탄트 제후 연합군을 격파했다.[21] 스웨덴군은 큰 피해를 입고 30년 전쟁의 주도권을 잃었다. 이 승리로 남부 독일을 되찾고 프로테스탄트로부터 주도권을 되찾은 페르디난트 2세는 제후들과의 화해에 움직였다.
페르디난트 2세는 막시밀리안 1세와 요한 게오르크 1세, 게오르크 빌헬름 등 선제후들과의 화해, 스페인의 참전에 고무되어, 한편으로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30년 전쟁 종결을 향해 복구령 철회와 맞바꿔 제후들의 화해를 도모하여, 1635년 프라하 조약을 체결했다.[21][29]
6. 프랑스-스웨덴 전쟁 (1635년 ~ 1648년)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항하여 1631년부터 메츠, 로렌, 알자스를 확보한 뒤 1635년 스페인에 선전포고하였다(프랑스-스페인 전쟁).[21] 황제에 대한 선전포고는 1638년이었다.[21] 렌나르트 토르스텐손이 이끄는 스웨덴군은 반격을 시도했다. 이 전쟁에서는 프랑스 재상 리슐리외, 스웨덴 재상 악셀 옥센셰르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의 전략이 맞부딪혔다. 튀렌느와 콩데 공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주로 스페인군과, 스웨덴군은 황제군과 싸웠다. 그러나 독일 영토는 황폐해졌고, 전쟁은 지역적으로 분산되었다.[21]
황제군은 1636년 비트슈톡 전투에서 스웨덴군에게 패배했고, 승리한 스웨덴군은 다시 독일로 침공했다. 이후 반합스부르크 세력의 상황은 호전되었다. 네덜란드에서는 네덜란드가 스페인을 무찌르고 브레다 요새를 함락시켰다. 이 승리는 네덜란드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고, 반대로 스페인의 패권 쇠퇴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637년 페르디난트 2세가 사망했다. 새로운 황제로는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명성을 얻은 로마 왕 페르디난트가 페르디난트 3세로 즉위했다.
프랑스군의 용병 대장이 된 베른하르트는 1638년 라인펠덴, 프라이부르크, 브라이자흐를 함락시켜 알자스를 점령하고, 스페인 회랑을 단절시켰다. 하지만 베른하르트는 프랑스와 불화를 일으켰고, 1639년 그가 급사하자 그의 부하들은 프랑스군에 편입되었다. 한편 요한 게오르크 1세와 게오르크 빌헬름은 황제 측에 남았고, 후에 작센군과 프랑스군은 교전하게 된다.
같은 해, 스웨덴군은 하일브론 동맹에서 배신한 작센군을 켐니츠에서 무찔렀다. 이후 보헤미아에 침공했지만, 스웨덴군 지휘가 혼란스러워져 격퇴되었다. 1639년, 에르푸르트에서 프랑스군, 스웨덴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군이 만났다. 다만 브란덴부르크군은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1640년 게오르크 빌헬름의 뒤를 이어 선제후가 되자 방어전으로 전환하여, 1641년 스웨덴과 화의를 맺고 사실상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1640년경부터 황제는 평화를 위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그의 고압적인 태도에 호응하는 세력은 없었다. 스페인군은 프랑스와 네덜란드에 연이어 패배하며 몰락하기 시작했다.[21] 이 해,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난 포르투갈 왕국이 독립하고 (포르투갈 왕정 복고 전쟁), 카탈루냐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스페인은 곤경에 처했다.[21] 또한 프랑스군이 피레네 산맥으로 진출하여 독일 쪽으로 군대를 파병할 수 없었다.[21] 제국 가문들은 황제군에서 잇따라 이탈했고, 1640년에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빌헬름이 스웨덴과 휴전 조약을 체결했다.[21] 바이에른 공작은 같은 해 뉘른베르크에서 선제후 회의를 열었고, 이듬해 레겐스부르크 제국 의회에서는 황제와 제후들에게 프랑스와 스웨덴과의 협상을 위임했다.[21] 1641년 12월에는 프랑스와 스웨덴과의 강화 회의가 결정되었지만, 조정과 권리 요구로 의사 진행은 되지 않았다.[21]
1642년, 황제군은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다시 스웨덴군에 패배하고, 더욱 궁지에 몰린 황제는 평화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에는 제국 전체에 전쟁 혐오 분위기가 만연했다. 1642년 말에는 라인강 양안에서 평화 회의가 설치되었지만, 1644년에 이르러서야 협상이 시작된다. 그러나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투가 더욱 격화되는 모순된 상황이 되었다.
국제 회의가 설치되었지만, 전쟁의 주도권을 되찾은 스웨덴이 평화 회의도 장악해 나갔다. 프랑스에서는 1642년에 리슐리외 추기경이, 1643년에는 프랑스 왕 루이 13세가 연이어 사망했다. 리슐리외의 정책은 새 추기경 쥘 마자랭에게 계승되었지만, 새 국왕 루이 14세는 아직 어렸고 프랑스 내부는 불안정해졌다. 그 때문에 마자랭은 "국왕을 신성 로마 황제로" 하는 야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1643년 앙귈렘 공 루이 드 부르봉(콩데 공)가 로크루아 전투에서 스페인을 격파하고, 1644년 프라이부르크 전투에서 가톨릭군의 중심인 바이에른군을 무찌른 것으로 프랑스는 30년 전쟁에서의 승리를 확실하게 했다.
한편 스웨덴은 독일에서 전투를 치르는 스웨덴군을 후방에서 위협하는 덴마크와 전쟁을 시작했다. 신성 로마 황제군에게 패배한 덴마크는 황제군에게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며 세력을 확장하는 스웨덴의 영향력 회복을 꾀하며 황제에게 접근하거나 에레순 해협세를 인상하는 등 스웨덴을 견제했기 때문에 양국의 긴장이 고조되었다.[26] 해협세 인상은 네덜란드와 스웨덴의 접근을 허용하게 되었다.[26] 1643년, 스웨덴은 유틀란트 반도에 침공했고, 네덜란드 해군도 편에 서서 스웨덴-네덜란드 연합 함대는 덴마크 함대를 제압했다. 1645년 8월 브레메뢰데 조약에서 덴마크는 노르웨이 일부와 고틀란드섬을 할양하게 되어 발트해의 패권을 스웨덴에게 빼앗겼다.[26] 또한 이 전쟁에서 구스타프 호른 장군이 복귀했다. 황제군은 덴마크 지원에 나섰으나 참패했다. 이 전쟁은 스웨덴군 사령관 렌나르트 토르스텐손의 이름을 따서 토르스텐손 전쟁이라고 불린다.[26]
스웨덴은 30년 전쟁의 승리를 확실히 하기 위해 다시 보헤미아를 침공했다. 1645년, 프라하 근교 얀카우 전투에서 또다시 황제군은 대패했다. 이때 프라하에 있던 황제 페르디난트 3세는 당황하여 빈으로 도망쳤는데, 이는 옛날 프리드리히 5세의 도망과 매우 흡사하여 “페르디난트의 도망”이라고 조롱받았다. 이 사건은 합스부르크가의 패배를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바이에른 군도 뇌르틀링겐 전투(1645년)에서 프랑스군에게 패배하여 사령관 프란츠 폰 메르시를 잃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프랑스와 화해했고, 고립된 요한 게오르크 1세도 1645년 스웨덴과 휴전 조약을 체결했다.
이러한 일련의 전황으로 평화 회담은 급속히 진전되었다. 국제 회의에는 잉글랜드, 폴란드, 러시아, 오스만 제국을 제외한 모든 유럽 국가들이 참가했다. 그러나 1646년에 황제군이 바이에른에 합류할 것을 우려한 스웨덴이 바이에른에 재차 침공한다. 프랑스는 이를 월권 행위로 간주하고 스웨덴 견제를 위해 튀렌느 장군을 파견했다. 양측에 끼인 막시밀리안 1세는 1647년에 항복·휴전했지만, 바이에른군 장군 요한 폰 베르트가 반란을 일으켜 황제군에 합류하고, 얀카우 전투에서 타격을 입었던 황제군은 놀라운 부활을 이룬다.
1648년1월 31일, 뮌스터 조약으로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개별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21]
열세를 만회한 황제·바이에른 연합군은 1648년 추스마르스하우젠 전투에서 카를 구스타프 뷜랑겔과 튀렌느가 이끄는 스웨덴·프랑스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대패한다. 그러나 스웨덴은 여전히 보헤미아 정복과 프로테스탄트화를 포기하지 않고, 1648년 7월 26일 이후에도 프라하에서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제 가톨릭의 마지막 보루가 된 프라하는 격렬하게 저항하며 항복하지 않았다. 후에 스웨덴 국왕이 되는 카를 10세(스웨덴군 총사령관·크리스티나의 사촌)도 원군으로 달려왔고, 포위전은 3개월에 달했다(프라하 전투). 더욱이 황제 측의 구세주였던 스페인도 랭스에서 콩데 공이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패배하고(랑스 전투), 대세는 결정되었다. 추스마르스하우젠에서 승리한 스웨덴군은 프라하를 포위, 점령한 후 제국 수도 빈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7. 베스트팔렌 조약 (1648년)
1648년 10월 24일,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서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면서 30년 전쟁이 종결되었다.[16] 전자는 프랑스와, 후자는 스웨덴과 관련된 내용이었다.[21] 전쟁 종결을 축하하며 70문의 대포 일제 사격이 이루어졌고, 11월 2일 프라하에 조약 체결 소식이 전해졌다.
조약에 따라 메츠, 투르, 베르당의 주교령, 알자스의 즌트가우 등이 프랑스에 할양되었고, 스웨덴은 서포메라니아(전 포메라니아[26]), 뤼겐섬, 비스마르 시, 브레멘 대주교령과 더불어 제국 의회 의석을 얻었다.[21] 이러한 점에서 프랑스와 스웨덴은 30년 전쟁의 승자로 불린다.[16] 또한 스위스와 네덜란드 공화국의 독립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16] 반면 스페인은 평화 대상에서 제외되어, 스페인과 프랑스의 대립은 1659년 피레네 조약까지 이어졌다.[16]
제국 내에서는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평 조약의 유효성이 확인되었고, 대립의 원인이었던 "성직자에 대한 유보" 조항은 폐기되었다. 1624년의 종파 분포를 기준으로 여러 영역의 소속 종파가 결정되었으며,[21] 칼뱅파도 공인되었다. 제국 의회에서는 신구 양측의 합의에 따라 결정하도록 하여, 종교 문제가 제국 내 분쟁의 원인이 되는 것을 기본적으로 막았다.[16] 다만, 신앙의 자유는 영방 군주에게만 허용되었고 개인의 자유는 인정되지 않았다.[16] 황제의 권한은 후퇴하고 제국 제후의 권리가 강화되어, 외국과의 전쟁 및 법 발포에 제국 제후의 동의가 필요하게 되었다.[16][21] 이로써 "독일의 자유"는 "제국 제후의 자유"가 되었다.[16]
8. 결과 및 영향
30년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을 사실상 해체시키고, 제후국들의 주권을 강화하여 독일 지역의 분열을 심화시켰다.[30] 프랑스는 유럽의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한 반면,[31][32] 스페인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 스웨덴은 발트해 지역의 강국으로 떠올랐지만, 그 영향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 전쟁은 유럽 경제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스웨덴에는 네덜란드로부터 자본이, 리에주로부터 광산 개발 기술이 유입되었고, 스웨덴에서 네덜란드로 대량의 무기가 수출되었다.[34] 독일에서의 경제는 1619년부터 1623년의 인플레이션으로 몰락했고, 한자 동맹의 여러 도시와 금융 거래에 휘말린 남독일의 여러 도시들도 대부분 멸망했다.[19]
장기간에 걸친 전투와 용병에 의한 약탈로 독일의 국토는 황폐해졌고,[16] 당시 유행하던 페스트(흑사병)의 영향으로 인구는 격감했다. 전쟁 전 1,600만 명이 전쟁 후에는 600만 명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지만,[16] 이는 사망자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사람들의 수도 포함된 것이며,[16] 지역에 따라 피해는 달랐다.[21] 총인구는 전반적으로 증가했다고도 한다.[19] 당시 사람들은 전쟁으로 인해 끊임없이, 그리고 종종 무작위적으로 벌어지는 유혈 사태를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절망의 광란'을 이야기했다.
전시에는 용병을 유지하기 위한 과세로 사람들은 고통받았다.[16] 게다가 과세는 적군과 아군의 구별 없이 현지에서 조달되었고, 물자도 폭력적으로 징발되었으며, 용병군에 의한 약탈이 행해졌다.[16] 또한 당시는 소빙기(1560년~1700년)였고, 보덴 호와 라인 강도 결빙하여 흉작을 가져왔다.[16] 더욱이 페스트, 콜레라, 티푸스 등의 전염병이 만연했다.[16] 농민들은 약탈로부터 재산을 지키기 위해 도시로 피난했기 때문에, 1650년 이후 도시는 성장했다.[21]
30년 전쟁은 종교적 갈등이 주요 원인이었던 마지막 대규모 유럽 전쟁으로 기록되며, 이후 유럽의 전쟁은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위한 세력 다툼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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