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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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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라 전투는 1476년 6월 22일, 부르고뉴 공작 샤를 1세가 이끄는 부르고뉴 군대와 스위스 연방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샤를 1세는 그랑송 전투에서의 패배 후 모라를 공격했으나, 스위스군의 기습으로 인해 부르고뉴 군대는 대패했다. 이 전투로 부르고뉴 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샤를 1세의 남부 연합에 대한 복수 계획은 좌절되었으며, 부르고뉴 공국의 몰락을 가속화했다. 모라 전투는 중세 시대의 군사 전술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으로, 스위스 보병의 활약을 통해 보병 중심 전술의 중요성을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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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고뉴 전쟁은 1474년부터 1477년까지 용담공 샤를의 부르고뉴 공국과 스위스 연방을 비롯한 여러 세력 간의 분쟁으로, 샤를의 패배와 전사, 부르고뉴 공국의 분할, 스위스 용병의 명성, 보병 중심 전술의 부각을 가져왔다.
모라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분쟁부르고뉴 전쟁
날짜1476년 6월 22일
장소프리부르주 무르텐 근처
결과스위스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부르고뉴 공국
사보이아 공국
교전국 2로렌 공국
구스위스 연방
오트랭
지휘관
지휘관 1샤를 용담공
자크 드 사부아
장 드 룩셈부르
지휘관 2한스 폰 할빌
한스 발트만
아드리안 폰 부벤베르크
르네 2세 드 로렌
병력 규모
병력 1약 12,000–20,000명
병력 2약 25,000명
사상자
사상자 16,000–10,000명
사상자 2410명
이미지
취리히 실링의 삽화 (1480/1484)
취리히 실링의 삽화 (1480/1484)

2. 배경

1476년 3월 그랑송 전투에서 구스위스 연방에 패배한 부르고뉴 공작 샤를 1세로잔에서 군대를 재편성하고, 5월 말 베른을 공격하기 위해 남쪽으로 진군했다.[5]

샤를 1세의 첫 번째 목표는 모라 호수 동쪽 해안에 위치한 전략적 호숫가 마을 모라였다. 1476년 6월 11일, 부르고뉴 군대는 베른 장군 아드리안 폰 부벤베르크가 지휘하는 모라에 대한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6] 초기 공격은 격퇴되었지만, 부르고뉴 군대의 포격으로 성벽은 점차 파괴되었다. 6월 19일까지 남부군 소집은 거의 완료되었고, 취리히에서 온 약 4,000명의 분견대만이 6월 22일까지 도착할 예정이었다.

2. 1. 샤를 1세의 전략

샤를 1세모라에서 약 2km 떨어진 지점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구스위스 연방 군대를 맞이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지형을 이용하여 포병과 보병을 배치하고, 기병대를 활용하여 스위스 군대의 측면을 공격하려 했다.[5]

샤를 1세는 마을 주변의 언덕이 많은 지형을 이용해, 부르크그라벤 시내가 가로막은 급경사 협곡에 왼쪽 측면에 포를 배치했다. 중앙에는 그룬하크로 알려진 정교한 도랑과 성곽 참호 뒤에 모라를 포위하는 데 관여하지 않은 대부분의 보병과 포병이 배치되어 스위스 연맹의 장창과 할버드에 맞서 싸울 준비를 했다. 오른쪽에는 무리를 이룬 장다름 기병대가 전방에서 교전 중인 스위스 군대의 측면을 공격하여 탈출구가 없는 죽음의 땅으로 만들 계획이었다.[7]

2. 2. 스위스 연방의 준비

1476년, 그랑송 전투에서 샤를 1세에게 패배한 구스위스 연방군은 취리히에서 오는 지원군을 기다리며 샤를 1세의 공격에 대비했다. 스위스 군대는 장창병과 할버드병을 중심으로 편성되었으며, 숲을 이용하여 부르고뉴 군대에 기습 공격을 가할 계획을 세웠다.[7]

3. 전투

1476년 6월 22일, 스위스 연방군은 숲에서 나와 부르고뉴 군대를 기습 공격했다.[8][9] 스위스군은 선봉대, 본대(게발투트), 후위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갑작스러운 공격에 부르고뉴군은 혼란에 빠졌다. 샤를 1세는 방어를 지휘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후퇴를 명령했다. 이 과정에서 부르고뉴 군대는 큰 피해를 입었고, 특히 모라 남부를 포위하고 있던 이탈리아 사단은 호수로 쫓겨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보았다. 반면 사보이아 사단은 무사히 퇴각했다. 스위스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많은 전리품을 획득했으며, 이는 현재 스위스 그뤼예르성에 보관되어 있다.

3. 1. 스위스 군대의 기습

전투에 나서기 전에 스위스 사람들이 기도하던 상크트 우르반 1세 예배당.


1476년 6월 22일 오전, 샤를 1세는 남부 연합군이 계속 지연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재무관에게 군대 전체에 비용을 지불하라고 명령했다. 이로 인해 부르고뉴 군대는 질서 정연한 전선이 흐트러지고, 병사들은 급여를 받고 점심을 먹으며 비를 피하느라 진영 곳곳에 흩어졌다. 이때 그룬하크에 남아 있던 소수의 부르고뉴군은 전투 명령을 받은 스위스 군대가 전선에서 1,000m도 안 되는 숲에서 나타나자 크게 놀랐다.[8][9]

약 6,000명의 척후병과 1,2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남부 동맹의 선봉대가 모라 서쪽의 비르헨발트 숲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는 샤를 1세가 예측했던 바로 그 지점이었다. 선봉대 뒤에는 장창병의 본대인 게발투트(중군)가 있었다. 약 10,000명에서 12,000명의 병력이 중앙에 칸톤 표준을 가진 큰 쐐기 모양을 형성했고, 측면에는 미늘창과 창병의 외부 고리가 있었다. 6,000명에서 8,000명의 더 빽빽한 장창병과 미늘창병으로 이루어진 후위대가 게발투트를 따라 인원이 거의 없는 그룬하크로 향했다.

스위스군이 부르고뉴 진지로 돌격하자, 부르고뉴 포병은 몇 발의 일제 사격을 가해 수백 명의 로렌군 병사들을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룬하크의 수비수들은 잠시 스위스군을 막아냈고, 스위스 분견대는 부르크그라벤 근처 수비진의 왼쪽 측면을 돌파하여 전체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스위스군은 빠르게 진군하여 모라와 포위군 진영으로 진격했다.

부르고뉴 진영에서는 스위스군이 목격된 후 큰 혼란이 일어났다. 병사들은 서둘러 대열을 재편성하고 전투를 준비했다. 모라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인 도밍그 숲 꼭대기의 천막에서 샤를 1세는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재빨리 무장하고, 말을 타고 달려가 진영의 방어를 조정하려 했다. 그러나 부대가 신속하게 결성되어 스위스군에 맞서 전진하기는 어려웠고, 여전히 소규모였던 남군 전투 진형에 대한 비협조적인 공격이 이루어지면서 휩쓸려 버렸다. 로렌 공작 르네 2세를 포함한 로렌군을 패주시킨 공작 가문의 중대로부터 약간의 저항이 있었지만, 겐다메(기병대)가 퇴각할 수밖에 없었던 파이크(장창병) 부대의 도착으로 구원받았을 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3. 2. 부르고뉴 군대의 패배

1476년 6월 22일 오전, 샤를 1세는 남부 연합군이 지연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군대에 급여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부르고뉴 군대는 급여를 받고 점심을 먹으며 비를 피하는 동안 혼란에 빠졌다. 이때, 스위스 군대가 숲에서 나타나 부르고뉴 군대를 기습했다.[8][9]

모라 서쪽의 비르헨발트 숲에서 약 6,000명의 척후병과 1,200명의 기병으로 이루어진 남부 동맹의 선봉대가 나왔다. 그 뒤를 이어 10,000명에서 12,000명의 장창병으로 구성된 본대(게발투트)가 나타났고, 6,000명에서 8,000명의 장창병과 미늘창병으로 구성된 후위대가 그 뒤를 따랐다.

스위스군은 내리막길로 돌격하며 포병 사격을 가했고, 부르고뉴 군대는 혼란에 빠졌다. 샤를 1세는 방어를 지휘하려 했지만, 스위스 군대의 공격에 밀려 후퇴 명령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조직적인 저항이 무너지면서 부르고뉴 군대는 패주했다.

많은 부르고뉴 병사들이 호숫가를 따라 약 4.8km(3마일) 동안 도망치다 사망했다. 특히 모라 남부를 포위하고 있던 이탈리아 사단은 스위스 후위병에게 차단되어 호수로 쫓겨나 큰 피해를 입었다. 반면, 사보이 백작 로몽의 지휘 아래 있던 사보이아 사단은 북쪽과 서쪽으로 후퇴하여 로몽으로 무사히 탈출했다.

이 전투에서 스위스 군대가 노획한 전리품 중 일부는 스위스의 그뤼예르성에 보관되어 있다. 여기에는 샤를 1세의 황금양모 기사단 상징이 새겨진 망토 등이 포함되어 있다.

3. 3. 전투의 결과

프랑스의 시인이자 연대기 작가인 장 몰리네는 샤를의 군대가 약 6,000~7,000명의 병사를 잃었다고 보고했다.[10] 후대의 작가들은 9,000에서 10,000 사이의 더 높은 숫자를 계산했다.[11]

모라 전투에서 샤를 1세는 남부연합에 대한 복수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적들과 6개월 동안 계속해서 고군분투했지만, 이 패배는 실제로 부르고뉴 국가의 종말의 시작을 알렸고, 공작의 적들은 매우 기뻐했다. 샤를 1세는 모르주를 거쳐 퐁타를리에로 탈출하여 몇 달 동안 머물렀으며, 깊은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나중에 낭시 전투에서 전사했다.

모라의 방어탑에는 여전히 부르고뉴 대포 자국이 남아있다.

4. 여파

모라 전투에서 패배한 샤를 1세는 모르주와 퐁타를리에로 후퇴하여 우울증에 빠졌다고 전해진다. 이후 낭시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부르고뉴 공국은 몰락했다.

4. 1. 부르고뉴 공국의 몰락

프랑스의 시인이자 연대기 작가인 장 몰리네는 샤를의 군대가 약 6,000~7,000명의 병사를 잃었다고 보고했다.[10] 후대의 작가들은 9,000에서 10,000명 사이의 더 많은 병력을 잃었다고 추정했다.[11]

모라 전투에서 샤를 1세가 패배하면서 남부연합에 복수하려던 꿈은 끝났다. 샤를 1세는 이후 6개월 동안 적들과 계속해서 고군분투했지만, 모라에서의 패배는 부르고뉴 공국의 종말을 알리는 시작이었고, 공작의 적들은 매우 기뻐했다. 샤를 1세는 모르주를 거쳐 퐁타를리에로 탈출하여 그곳에서 몇 달 동안 머물렀으며, 깊은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나중에 낭시 전투에서 전사했다.

모라의 방어탑에는 여전히 부르고뉴 대포 자국이 남아있다.

5. 한국의 관점에서의 의의

모라 전투는 한국 역사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The Panorama of the Battle of Murten - The Battle of Murten, 1476 https://www.murtenpa[...]
[2] 서적 Charles the Bold : the last Valois Duke of Burgundy https://books.google[...] The Boydell Press
[3] 백과사전 Murten, Battle of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2-10-10
[4] 문서 Vaughan pg. 391
[5] 서적 The artillery of the Dukes of Burgundy, 1363–1477 https://books.google[...] Boydell Press
[6] 문서 Vaughn pg. 389
[7] 문서 Vaughan pg. 392
[8] 문서 Smith pg. 193
[9] 문서 Vaughan pg. 392
[10] 문서 "[[Jean Molinet]] (I:146-47) quoted in Smith pg. 196"
[11] 서적 Histoire de l'organisation militaire sous les ducs de Bourgogne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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