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양모 기사단
1. 개요
황금양모 기사단은 1430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가 포르투갈 공주 이자벨 드 아비스와의 결혼을 기념하여 플랑드르 지역에 설립한 기사단이다. 이 기사단은 부르고뉴 공국 시대, 합스부르크 왕가 시대,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분리 시대를 거치며,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두 분파로 나뉘어 현재까지 존재한다. 스페인 분파는 스페인 국왕이, 오스트리아 분파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주관하며, 한국은 스페인 분파의 기사단을 역대 4명의 일본 천황이 수여받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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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훈 대상 | 스페인 국왕 및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수장 |
|---|---|
| 유형 | 기사단 |
| 설립일 | 1430년 1월 10일 |
| 모토 | "Pretium Laborum Non Vile라틴어" (노력에 대한 보상이 하찮지 않다) "Non Aliud라틴어" (다른 것은 없다) |
| 현재 상황 | 현재 존재 |
| 설립자 | 필리프 3세 (부르고뉴 공작) |
| 단장 | 펠리페 6세 (스페인 국왕)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
| 등급 | 기사 |
| 하위 훈장 | 스페인 왕립 카를로스 3세 훈장 신성 로마 제국 성 게오르기우스 훈장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 |
| 프랑스어 | Ordre de la Toison d'or프랑스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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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토 | Pretium Laborum Non Vile (우리들의 노동에 보상이 없는 것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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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 펠리페 6세 (스페인 국왕) |
|---|---|
| 오스트리아 | 카를・합스부르크=로트링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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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양모 기사단 -
쇼와 천황
쇼와 천황은 메이지 천황의 손자로 태어나 124대 일본 천황으로 즉위하여 사망할 때까지 재위하며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 침략 전쟁에 관여했다는 논란이 있으며, 전후에는 상징적인 천황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고 그의 전쟁 책임 문제는 논쟁의 대상이다. -
황금양모 기사단 -
콘스탄티노스 2세
콘스탄티노스 2세는 그리스 왕국의 마지막 국왕로, 재위 기간 중 정치적 혼란과 군사 쿠데타, 왕정 폐지를 겪었으며, 올림픽 요트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하다. -
합스부르크가 -
테르시오
테르시오는 16세기에서 18세기 초까지 스페인 군대의 핵심 보병 부대로, 파이크병, 총병 등으로 구성되어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나 군사 개혁으로 인해 1704년 연대와 대대 체제로 개편되면서 소멸되었다. -
합스부르크가 -
마리아 아말리아 폰 외스터라이히 (1701년)
마리아 아말리아 폰 외스터라이히는 신성 로마 황제 요제프 1세의 딸로 태어나 바이에른의 카를 알브레히트와 결혼하여 황후가 되었으며, 사후에는 자선 활동을 펼치다 사망했다. -
스페인의 역사 -
테르시오
테르시오는 16세기에서 18세기 초까지 스페인 군대의 핵심 보병 부대로, 파이크병, 총병 등으로 구성되어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나 군사 개혁으로 인해 1704년 연대와 대대 체제로 개편되면서 소멸되었다. -
스페인의 역사 -
무어인
무어인은 어원적으로 "검다"는 의미를 가지며, 역사적으로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을 지칭했으나,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이슬람 정복 시대의 아랍인, 베르베르인, 이슬람교도를, 현대에는 모로코, 모리타니 주민을, 필리핀에서는 무슬림 주민을 가리키는 등 시대와 지역에 따라 의미가 다양하게 변화되어 사용된다.
2. 역사
황금양모 기사단은 부르고뉴 공국, 합스부르크 왕가,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분리 시대로 그 역사를 구분할 수 있다.
1430년 선량공 필리프가 포르투갈 공주 이자벨 드 아비스와의 결혼을 기념하여 창설했다. 초기에는 기사단원 수가 제한되었으나 점차 늘어났다. 성모 마리아와 성 안드레아에게 헌신하고, 로마 가톨릭교회 수호와 기사도 전통 유지를 목적으로 했다.
1477년 마리와 막시밀리안 1세의 결혼으로 기사단장 자리는 합스부르크 왕가로 넘어갔다. 카를 5세는 기사단에 사법권을 부여했고, 펠리페 2세에게 기사단장 자리가 세습되었다.
1700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 단절 후, 스페인 부르봉 왕가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는 기사단장 자리를 두고 분쟁을 벌였다. 이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이어졌고, 기사단은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로 분리되었다.
스페인에서는 웰링턴 공작이 최초의 개신교 신자로 훈장을 받았고, 이후 비기독교인에게도 수여되었다. 1833년 이사벨 2세가 살리카법을 무시하고 여왕이 되면서 위기가 있었지만, 현재까지 스페인 왕실의 권위 아래 유지되고 있다.
2.1. 부르고뉴 공국 시대 (1430년-1477년)
1430년 부르고뉴 공국의 선량공 필리프는 잉글랜드의 가터 기사단을 본떠 황금양모 기사단을 창설했다. 성모 마리아와 성 안드레아를 수호성인으로 삼았으며, 처음에는 기사단원 수를 24명으로 제한했으나, 1433년에는 30명, 1516년에는 50명으로 점차 늘려나갔다.
이 기사단은 이단을 배격하고 가톨릭 신앙을 수호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삼았으며, 기사도 정신을 강조했다. 기사단 명칭은 그리스 신화의 황금양모와 구약성서 기드온의 양털에서 유래했다. 이는 십자군 원정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
기사단원들은 반역, 이단 등의 혐의를 받으면 다른 기사들에게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기사단원들이 저지른 모든 범죄에 대한 재판권을 기사단에 부여하기도 했다.
부르고뉴 궁정은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고, 황금양모 기사단은 축제, 의식 등을 통해 기독교 기사도의 모범으로 여겨졌다.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비잔티움 제국을 지원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구체적인 성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1477년 용담공 샤를이 사망하면서 부르고뉴 가문이 단절되었고, 기사단은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갔다.
2.2. 합스부르크 왕가 시대 (1477년-1700년)
1477년 부르고뉴의 마리와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1세의 결혼으로 기사단장 자리는 합스부르크 왕가로 넘어갔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기사단에 소속된 기사들이 저지른 모든 범죄를 재판할 수 있는 사법권을 부여했고, 기사단장 자리를 아들인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에게 물려주었다. 1600년에는 교황 클레멘스 8세가 펠리페 2세의 후계자들이 기사단장 자리를 세습하는 것을 승인했다.
1700년 카를로스 2세가 사망하면서 스페인-합스부르크 가는 단절되었다.
다음은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 역대 기사단장 목록이다.
2.3.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분리 시대 (1700년 이후)
1700년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단절되자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기사단 단장 자리를 놓고 분쟁을 일으켰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는 1713년 빈에 이 기사단을 창설했고, 그 후 오스트리아의 군주와 스페인의 군주는 서로를 단장이라고 내세웠다.
부르고뉴 영토가 스페인 합스부르크 제국에 흡수되면서, 기사단의 주권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로 넘어갔고, 마지막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인 카를로스 2세가 1700년에 사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는 펠리페 5세인 부르봉 가문이 계승했다. 펠리페와 스페인 왕위 요구자인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 카를 대공 사이의 분쟁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이어졌고, 기사단은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지부로 분할되었다. 어느 경우든 주권자는 부르고뉴 공작으로서 임명장을 프랑스어로 작성했다.
스페인이 프랑스 군대에 점령된 동안 나폴레옹과 그의 형제 조제프에게 금양모 기사단을 수여한 것은 논란이 되었고, 프랑스 망명 국왕인 루이 18세를 분노하게 하여 그의 훈장을 반납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훈장과 조제프가 수여한 다른 훈장은 1813년 부르봉 왕정 복고 후 페르난도 7세에 의해 철회되었다. 나폴레옹은 1809년 8월 15일 칙령으로 오스트리아, 스페인, 부르고뉴에 대한 주권을 고려하여 금양모 기사단을 창설했다. 이에 호세 1세가 반대했고, 새로운 기사단에 대한 임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812년 스페인의 임시 정부는 웰링턴 공작에게 금양모 기사단을 수여했으며, 이는 권력을 되찾은 페르난도에 의해 교황 비오 7세의 승인을 받아 확정되었다. 따라서 웰링턴은 금양모 기사단의 훈장을 받은 최초의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이후 태국의 국왕 라마 9세와 같이 비기독교인에게도 수여되었다.
1833년에는 이사벨 2세가 여성이 국가 원수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살리카법을 무시하고 스페인 여왕이 되면서 또 다른 위기가 발생했다. 그녀의 금양모 기사단 수여 권한은 스페인 카를주의에 의해 도전받았다.
공화정(1931–1939)과 프랑코 시대(1939–1975)에도 주권은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수장에게 있었으며, 현재는 스페인의 국왕인 펠리페 6세가 보유하고 있다. 1972년 프란시스코 프랑코에게 금양모 기사단을 수여한 것에 대한 혼란이 있었다. 이 기사단은 하이메 공작이 그의 아들의 독재자의 손녀인 카르멘과의 결혼식에 그에게 불법적으로 제공했다. 프랑코는 정통성과 장자 상속을 근거로 금양모 기사단을 정중히 거절하며 금양모 기사단은 스페인의 재위 중인 국왕만이 수여할 수 있다고 밝혔다. 더욱이, 훈장을 수여할 권리는 어쨌든 아버지 알폰소 13세에 의해 스페인 왕위 계승자로 지정된 하이메의 동생인 후안 공작의 특권이었다.
기사단 기사들은 이름 앞에 "각하(His/Her Excellency)"라는 경칭을 사용할 수 있다.
| 스페인 금양모 기사단의 현 기사단 문장 | ||||||||||||
|---|---|---|---|---|---|---|---|---|---|---|---|---|
| 스페인 국왕 | 아스투리아스 공녀 레오노르 | 전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 |
| 하비에르 솔라나 | 빅토르 가르시아 데 라 콘차 | 엔리케 V. 이글레시아스 |
; 분열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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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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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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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상징과 의례
황금양모 기사단의 상징은 황금 양모이며, 이는 그리스 신화의 이아손 이야기와 구약성서 사사기의 기드온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필리프 3세는 십자군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아손만 언급되었으나, 가톨릭에서 볼 때 그리스 신화, 즉 이교에 기원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져 나중에 기드온 이야기가 추가되었다.
기사단의 모토는 "Pretium Laborum Non Vile" (우리들의 노동에는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따른다)이다.
"황금 양모피"는 연금술 달인의 상징이기도 하다. 다만, 필리프 선량공이 왜 황금 양모를 의장으로 정했는지는 기사단 규약에도 명확히 기재되어 있지 않다.
기사단 의상은 은회색 테두리가 있는 무릎 길이의 진홍색 로브와 진홍색 망토로 구성되며, 망토에는 부싯돌 금과 부싯돌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 문양은 필리프 3세가 장 무구공에게서 계승한 것으로, 적대 관계였던 오를레앙 가문의 문장인 곤봉을 깎고 불태운다는 표어에서 유래한다.
기사단 집회는 1431년부터 성 안드레아 축일인 11월 30일에 단장이 지정하는 도시에서 개최되었다. 이후 3년마다 5월 2일로 변경되었다. 종교 행사, 기사단 재판, 신입 단원 선출 등이 1주에서 1개월 동안 진행되었으며, 부르고뉴 공국의 화려한 의식 중 하나였다.
| 목걸이(스페인, 오스트리아 공통) |
| 스페인 금양모 기사단 | 오스트리아 금양모 기사단 | |
|---|---|---|
| 주권자용 수장 | 단원용 수장 | 수장 |
수장은 크기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며, 목 중앙에 착용하는 중수장이 초상화나 사진에 많이 나타난다.
4. 한국과의 관계
대한민국과 스페인의 관계는 1950년 수교 이후 꾸준히 발전해 왔으며, 2023년에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되었다. 양국은 민주주의, 인권, 법치주의 등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며 국제 무대에서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 경제, 문화, 교육, 관광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를 확대하고 있으며, 특히 K-팝, K-드라마 등 한류 콘텐츠가 스페인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황금양모 기사단은 스페인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존재이며, 한국에서는 역대 4명의 천황이 이 기사단을 수여받았다. 메이지 천황은 1883년에, 다이쇼 천황은 황태자 시절인 1896년에, 쇼와 천황은 1928년에, 아키히토 상왕은 황태자 시절인 1985년에 수여받았다.
1994년 10월, 당시 아키히토 천황이 미치코 황후와 함께 스페인을 방문했을 때, 궁내청 직원의 실수로 금양모 훈장을 일본에 두고 오는 바람에 스페인 측에서 훈장을 빌려 착용해야 했다. 게다가 일본에서 급히 보낸 훈장마저 분실되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이는 한일 양국 간 외교 문제로 비화될 뻔한 해프닝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궁내청 장관 후지모리 쇼이치의 답변에 따르면, 담당 직원이 카를로스 3세 훈장만 챙기고 금양모 훈장을 잊은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이후 일본에서 훈장을 급히 보냈으나, 이베리아 항공을 통한 "기장 탁송" 과정에서 훈장이 분실되었다. 당시 관방 장관 이가라시 히로조는 이 문제에 대해 천황과 스페인 정부에 사과했다.
5. 분파별 현황
현재 황금양모 기사단은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두 분파로 나뉘어 존재한다.
--
| 스페인 분파 | 오스트리아 분파 | |
|---|---|---|
| 군주 목 장식 | 목 및 옷깃 장식 | 목 장식 |
* 스페인 황금양모 기사단: 카를 5세의 상속 분할로 스페인 계열에 계승되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스페인 부르봉가가 기사단장직을 맡고 있으며, 현재는 펠리페 6세가 단장이다. 종교와 성별에 관계없이 수여된다.
* 오스트리아 황금양모 기사단: 카를 5세의 상속 분할로 오스트리아 본가에 계승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 군주제 붕괴에도 불구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주최하며, 가톨릭교도 남성에게만 수여되는 명예 훈장으로 존속하고 있다. 현 단장은 카를 폰 합스부르크이다.
두 분파 모두 활발하게 활동하며, 각 분파별 현존 단원 명단은 스페인 분파와 오스트리아 분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래 표는 현존하는 분파별 단원 명단의 요약이다.
| 분파별 현황 | |||
|---|---|---|---|
| 스페인 분파 | 오스트리아 분파 | ||
| 사진 | 이름 (출생년도) | 사진 | 이름 (출생년도) |
| 펠리페 6세 (1968년) | 카를 폰 합스부르크 (1961년) | ||
| 후안 카를로스 1세 (1938년) | 프란츠 폰 바이에른 (1933년) | ||
| 칼 16세 구스타프 (1946년) | -- | 알베르 2세 (1934년) | |
| 아키히토 (1933년) | 안드레아스 잘바토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1936년) | ||
| 베아트릭스 (1938년) | -- | 카를 잘바토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1936년) | |
| 마르그레테 2세 (1940년) | 로렌츠 폰 에스터라이히-에스테 (1955년) | ||
| 알베르 2세 (1934년) | -- | 미하엘 콜로만 합스부르크-로트링겐 (1942년) | |
| 하랄 5세 (1937년) | -- | 미하엘 잘바토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1949년) | |
| 시메온 2세 (1937년) | 한스 아담 2세 (1945년) | ||
| 앙리 (1955년) | 두아르테 피우 드 브라간사 (1945년) | ||
| 하비에르 솔라나 (1942년) | 게오르그 합스부르크-로트링겐 (1964년) | ||
| Víctor García de la Concha스페인어 (1934년) | -- | Charles-Christian de Habsbourg-Lorraine프랑스어 (1954년) | |
| 니콜라 사르코지 (1955년) | 카렐 슈바르첸베르크 (1937년) | ||
| Enrique V. Iglesias스페인어 (1930년) | -- | 요제프 합스부르크-로트링겐 (1960년) | |
| 레오노르 데 보르본 (2005년) | Alois Konstantin zu Löwenstein-Wertheim-Rosenberg독일어 (1941년) | ||
| Mariano Hugo, Prince of Windisch-Graetz영어 (1955년) | |||
| -- | 게오르크 아담 슈타르엠베르크 (1961년) | ||
| -- | 알렉산더 쇤부르크-할텐슈타인 (1930년) | ||
| -- | 쿠브라트 삭스코부르크고츠키 (1965년) | ||
| -- | 앙리 (1955년) | ||
| 필리프 (1960년) | |||
| Michel, Prince of Ligne영어 (1951년) | |||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1997년) | |||
| 니콜라우스 폰 리히텐슈타인 (1947년) | |||
| Ferdinand Trauttmansdorff영어 (1950년) | |||
| Alexander, Margrave of Meissen영어 (1954년) | |||
| -- | 에두아르트 합스부르크-로트링겐 (1967년) | ||
| -- | Emanuel zu Salm-Salm (Jurist)독일어 (1961년) | ||
| Semjén Zsolt헝가리어 (1962년) | |||
5.1. 스페인 황금양모 기사단
카를 5세는 스페인과 네덜란드를 장남 펠리페 2세에게,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를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상속했다. 이로 인해 합스부르크가는 오스트리아 본가와 스페인 계열(아부스부르고 가)의 두 계통으로 분열되었다. 부르고뉴 공작위와 황금양모 기사단의 지위도 펠리페 2세가 물려받았다. 펠리페 2세는 교황그레고리오 13세의 허가를 얻어, 기사단 집회에서의 선출 외에 기사단장만의 서임을 할 수 있게 했다.
이후, 근친 결혼도 원인이 되어 카를로스 2세는 선천적으로 허약했고, 스페인 합스부르크가는 단절되었다. 이때 카를로스의 이복 누나이자 프랑스 왕비인 마리 테레즈 도트리슈의 손자인 펠리페 5세가 후계자로 지명되었지만, 신성 로마 황제레오폴트 1세는 막내아들 카를 6세(후에 신성 로마 황제 카를 6세)를 지지했기 때문에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최종적으로 펠리페가 펠리페 5세가 되는 것으로 결정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스페인 부르봉가(볼본가)가 흥기했다. 한편, 네덜란드와 부르고뉴 공작위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로 오스트리아 측으로 넘어갔다.
그 결과, 18세기 초 이후 스페인 및 오스트리아 양측에서 서임(수여)되는 기사단 훈장이 되었다. 스페인 황금양모 기사단은 현재 펠리페 6세가 단장(그랜드 마스터)을 맡고 있다. 과거에는 가톨릭 남성에게만 수여되었으나, 현재는 종교와 성별에 관계없이 수여된다.
다음은 스페인 황금양모 기사단의 역대 단장(그랜드 마스터) 목록이다.
| 이름 | 재임 기간 |
|---|---|
| 펠리페 5세 | 1700년-1724년 |
| 루이스 1세 | 1724년 |
| 펠리페 5세 | 1724년-1746년 |
| 페르난도 6세 | 1746년-1759년 |
| 카를로스 3세 | 1759년-1788년 |
| 카를로스 4세 | 1788년-1808년 |
| 페르난도 7세 | 1808년-1833년 |
| 이사벨 2세 | 1833년-1841년 |
| 발도메로 에스파르테로 | 1841년-1843년 |
| 호아킨 마리 로페즈 | 1843년 |
| 이사벨 2세 | 1843년-1868년 |
| 프란시스코 세라노 도밍게스 | 1868년-1870년 |
| 아마데오 1세 | 1870년-1873년 |
| 알폰소 12세 | 1874년-1885년 |
| 알폰소 13세 | 1885년-1941년 |
| 후안 데 보르본 이 바텐베르그 | 1947년-1977년 |
| 후안 카를로스 1세 | 1977년-2014년 |
| 펠리페 6세 | 2014년-현재 |
5.1.1. 현존 단원 (스페인)
| 사진 | 문장 | 군주 호칭 이름 (생년) (재위) | 서임일 | 비고 |
|---|---|---|---|---|
| ]] | ]] |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 (1968년 출생) (2014년 즉위 - 재위 중) | 1981년 | 2014년부터 기사단 주권자 |
| ]] | ]] | 전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 (1938년 출생) (1975년 즉위 - 2014년 퇴위) | 1941년 | 전 주권자 |
| ]] | ]] |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 (1946년 출생) (1973년 즉위 - 재위 중) | 1983년 | |
| ]] | ]] | 전 일본 천황 아키히토 (1933년 출생) (1989년 즉위 - 2019년 퇴위) | 1985년 | 서임 당시 황태자 |
| ]] | ]] | 전 네덜란드 여왕 베아트릭스 (1938년 출생) (1980년 즉위 - 2013년 퇴위) | 1985년 | |
| ]] | ]] | 전 덴마크 여왕 마르그레테 2세 (1940년 출생) (1972년 즉위 - 2024년 퇴위) | 1985년 | |
| ]] | ]] | 전 벨기에 국왕 알베르 2세 (1934년 출생) (1993년 즉위 - 2013년 퇴위) | 1994년 | |
| ]] | ]] | 노르웨이 국왕 하랄 5세 (1937년 출생) (1991년 즉위 - 재위 중) | 1995년 | |
| ]] | ]] | 전 불가리아 국왕 시메온 2세 (1937년 출생) (1943년 즉위 - 1946년 폐위) | 2004년 | 1946년에 불가리아 왕위 폐위 불가리아 총리(2001-2005) |
| ]] | ]] | 룩셈부르크 대공 앙리 (1955년 출생) (2000년 즉위 - 재위 중) | 2007년 | |
| ]] | ]] | 하비에르 솔라나 (1942년 출생) | 2010년 | 스페인 정치인 |
| ]] | ]] | Víctor García de la Concha스페인어 (1934년 출생) | 2010년 | 스페인 문헌학자 |
| ]] | ]] | 전 안도라 공동 대공(전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 (1955년 출생) (2007년 즉위 - 2012년 퇴위) | 2011년 | |
| ]] | ]] | Enrique V. Iglesias스페인어 (1930년 출생) | 2014년 | 우루과이・스페인 경제학자・정치인 |
| ]] | ]] | 아스투리아스 여공 레오노르 데 보르본 (2005년 출생) | 2015년 10월 30일 | 펠리페 6세의 장녀 상속인 |
5.2. 오스트리아 황금양모 기사단
thu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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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황금양모 기사단은 스페인 쪽 기사단과 달리 정치적 어려움을 겪지 않고, 가톨릭 왕족과 귀족에게만 수여되는 명예로운 훈장으로 남았다. 1740년 마리아 테레지아가 즉위하면서 여성 상속 문제가 발생했지만, 훈장의 주권은 그녀가 아닌 남편 프란츠에게 넘어가면서 해결되었다.
훈장의 모든 보물은 빈 보물창고에 보관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부르고뉴의 마지막 공작의 "아인큠른 검"과 진정한 십자가 조각을 담은 오래된 맹세 십자가 등이 포함된다. 기록 보관소와 오래된 휘장 역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소유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 군주제가 붕괴되자, 알베르 1세는 훈장의 주권과 보물을 자신에게 이전할 것을 요청했으나,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의 개입으로 무산되었다. 나치 독일은 훈장을 국가에 적대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모든 보물을 몰수하려 했으며,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대표인 막스 폰 호엔베르크는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53년,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훈장이 자체 법적 인격을 가지며, 훈장에 대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권리를 오스트리아 영토 내에서 계속 인정했다. 훈장의 보물과 기록 보관소는 훈장 자체의 소유로 남았다.
오스트리아 지부의 주권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에게 유지되었으며, 2000년 11월 20일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장남 카를 폰 합스부르크에게 넘겨주었다.
매년 11월 30일 (성 안드레아 축일)은 훈장의 날로, 새로운 회원들이 훈장에 가입한다. 빈 보물창고와 오스트리아 국립 기록 보관소에는 매우 귀중한 보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새로운 기사단원과 장교들은 빈 보물창고에 보관된 "맹세 십자가" 앞에서 맹세한다. 이 십자가는 보석으로 장식된 금 십자가로, 중앙에 성 십자가 조각이 있어 성유물 십자가로 여겨진다.
현재 오스트리아 황금양모 기사단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주최하며, 합스부르크 일족, 구 독일 제후 가문 등이 단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현역 국가 원수로는 벨기에 국왕, 룩셈부르크 대공, 리히텐슈타인 공 등이 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합스부르크가의 카를 1세가 제위를 잃으면서 국가나 군주에 의한 기사단 훈장으로는 소멸되었으나, 전 황태자 오토를 거쳐, 그 장남 카를에게 기사단 주권자가 계승되어 오늘날에도 합스부르크가에 의한 "명예"로서 존속하고 있다.
제정 시대부터 현재까지 단원 자격은 가톨릭교도 남성으로 한정되어 있어, 유럽의 왕족이라도 비가톨릭교도는 원칙적으로 단원이 될 수 없다. 다만,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영국의 조지 섭정 태자 (후에 국왕)가 예외적으로 수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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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분파 | 오스트리아 분파 | |
|---|---|---|
| 군주 목 장식 | 목 및 옷깃 장식 | 목 장식 |
5.2.1. 현존 단원 (오스트리아)
| 사진 | 이름 (출생년도) | 서임일 | 번호 | 비고 |
|---|---|---|---|---|
| 합스부르크 가 당주 카를 폰 합스부르크 (1961년) | 1961년 | 1269 | 2000년부터 기사단 주권자 | |
| 비텔스바흐가 당주 프란츠 폰 바이에른 (1933년) | 1960년 | 1262 | ||
| -- | 전 벨기에 국왕 알베르 2세 (1934년) | 1962년 | 1274 | 서임 당시 리에주 공 |
| 안드레아스 잘바토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1936년) | 1972년 | 1277 | 후베르트 잘바토르 폰 에스터라이히-토스카나의 차남 | |
| -- | 카를 잘바토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1936년) | 1972년 | 1278 | 테오도르 잘바토르 폰 에스터라이히-토스카나(프란츠 대공의 삼남)의 아들 |
| 오스트리아에스테 대공 로렌츠 폰 에스터라이히-에스테 (1955년) | 1977년 | 1290 | 아내는 벨기에 공주 아스트리드 | |
| -- | 미하엘 콜로만 합스부르크-로트링겐 (1942년) | 1980년 | 1296 | 요제프 프란츠 대공의 넷째 아들. 주 바티칸 헝가리 대사 에두아르트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의 아버지 |
| -- | 미하엘 잘바토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1949년) | 1980년 | 1297 | 후베르트 잘바토르 폰 에스터라이히-토스카나의 다섯째 아들 |
| 리히텐슈타인 공 한스 아담 2세 (1945년) | 1981년 | 1300 | ||
| 브라간사 왕가 당주 두아르테 피우 드 브라간사 (1945년) | 1982년 | 1302 | ||
| 게오르그 합스부르크-로트링겐 (1964년) | 1987년 | 1306 | 오스트리아 전 황태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차남 | |
| -- | Charles-Christian de Habsbourg-Lorraine프랑스어 (1954년) | 1991년 | 1308 | 카를 루드비히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의 차남 |
| 슈바르첸베르크 가 당주 카렐 슈바르첸베르크 (1937년) | 1991년 | 1309 | 체코의 정치인 | |
| -- | 요제프 합스부르크-로트링겐 (1960년) | 1992년 | 1310 | |
| 뢰벤슈타인-베르트하임-로젠베르크 가 당주 Alois Konstantin zu Löwenstein-Wertheim-Rosenberg독일어 (1941년) | 1996년 | 1314 | ||
| 빈디쉬-그레츠 가 당주 Mariano Hugo, Prince of Windisch-Graetz영어 (1955년) | 2000년 | 1318 | ||
| -- | 슈타르엠베르크 가 당주 게오르크 아담 슈타르엠베르크 (1961년) | 2001년 | 1323 | |
| -- | 쇤부르크-할텐슈타인 가 당주 알렉산더 쇤부르크-할텐슈타인 (1930년) | 2002년 | 1325 | |
| -- | 쿠브라트 삭스코부르크고츠키 (1965년) | 2002년 | 1326 | 불가리아 왕국 마지막 국왕 시메온 2세의 셋째 왕자 |
| -- | 룩셈부르크 대공 앙리 (1955년) | 2006년 | 1328 | |
| 벨기에 국왕 필리프 (1960년) | 2008년 | 서임 당시 브라반트 공 | ||
| 리뉴가 당주 Michel, Prince of Ligne영어 (1951년) | 2011년 | |||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1997년) | 2011년 | 합스부르크가의 후계자 | ||
| 니콜라우스 폰 리히텐슈타인 (1947년) | 2011년 | 리히텐슈타인 공 요제프 2세의 셋째 아들 | ||
| Ferdinand Trauttmansdorff영어 (1950년) | 2011년 | 주 프라하 오스트리아 대사, 전 백작가 | ||
| 작센-게사페 가 당주 Alexander, Margrave of Meissen영어 (1954년) | 2012년 | |||
| -- | 에두아르트 합스부르크-로트링겐 (1967년) | 2016년 | 헝가리 주 바티칸, 몰타 기사단 대사 | |
| -- | Emanuel zu Salm-Salm (Jurist)독일어 (1961년) | 2016년 | ||
| Semjén Zsolt헝가리어 (1962년) | 2022년 | 헝가리 부총리 (2022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