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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1세 드 부르고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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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샤를 1세 드 부르고뉴 공작은 필리프 3세의 아들이자 부르고뉴 공작으로, 프랑스 왕 루이 11세에 대항하며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를 확장하려 했다. 그는 네덜란드, 로렌 등을 지배하며 강력한 군사력을 구축했고, 프랑스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스페인, 나폴리와 동맹을 맺었다. 야심찬 영토 확장을 시도했으나 스위스 용병과의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하고, 낭시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그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그의 외동딸 마리가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하면서 부르고뉴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가 되었고, 샤를 1세의 죽음은 부르고뉴 공국의 붕괴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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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1세 드 부르고뉴 공작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샤를 용담공은 1460년경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에 의해 [[황금 양모 기사단]]의 목걸이를 한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샤를 용담공은 1460년경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이 그린 그림으로, 황금 양모 기사단의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다.
칭호부르고뉴 공작
전체 이름샤를 마르탱 드 발루아-부르고뉴
출생일1433년 11월 10일
출생지부르고뉴 공국 디종
사망일1477년 1월 5일 (43세)
사망지로렌 공국 낭시
매장지브뤼헤 성모 교회
서명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통치
즉위1467년 6월 15일
퇴위1477년 1월 5일
이전 통치자필리프 선량공
다음 통치자마리
가족 관계
가문발루아-부르고뉴 가문
아버지필리프 선량공
어머니이사벨 드 포르투갈
배우자카트린 드 프랑스 (1440년 결혼, 1446년 사망)
이사벨 드 부르봉 (1454년 결혼, 1465년 사망)
마거릿 오브 요크 (1468년 결혼)
자녀마리
언어별 표기
프랑스어샤를 드 발루아-부르고뉴
프랑스어 별칭샤를 르 테메레르 (Charles le Téméraire)
기타
별칭용담공 (Charles the Bold)

2. 생애

필리프 3세(선량공)와 포르투갈의 이자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두 형이 일찍 사망하여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이었으며, 1467년 아버지 필리프 3세가 사망하자 부르고뉴 공작위를 계승했다. 다음 해인 1468년에는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4세의 여동생 마거릿을 세 번째 아내로 맞이했다.

샤를은 프랑스의 통일을 추진하던 루이 11세에 대항하는 프랑스 내 가장 강력한 군주였다. 그는 부르고뉴 공국 본토와 부르고뉴 백작령(프랑슈-콩테) 외에도 리에주 주교령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 네덜란드 지역을 통치했다. 호화로운 궁정 생활을 유지하면서도, 프랑스 내 독립적인 귀족들을 모아 루이 11세에 대항하는 공익 동맹을 결성하여 여러 차례 싸웠고, 군사적으로 프랑스 왕군을 압도하기도 했다. 1473년에는 인접한 로렌피카르디를 공략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부르고뉴 본토와 네덜란드 영토를 연결하려 시도했다.

샤를은 역대 부르고뉴 공작들의 목표였던 반(反)프랑스 정책과 뫼즈강, 모젤강 사이 영토 확보를 계승하여 프랑스를 약화시키고자 스페인나폴리의 트라스타마라 가문과 동맹을 맺었다. 그는 단순한 영토 확장을 넘어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3세에게 접근하여 자신을 로마 왕(차기 황제)으로 추대해달라고 요청하며 황제위까지 넘보는 야심을 드러냈으나, 프리드리히 3세가 이를 회피하고 떠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올리비에 드 라 마르슈에 따르면 샤를의 궁극적인 목표는 "다른 군주들의 지도자가 되어 불신자 정벌에 나서는 것"이라는 이상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야심찬 계획은 군사적 실패로 좌절되었다. 1476년, 루이 11세가 고용한 스위스 용병에게 그랑송 전투와 무르텐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했다. 결국 1477년, 로렌 공 르네 2세와의 낭시 전투에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싸우다 전사했다. 샤를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외동딸 마리가 유일한 상속자였다. 마리는 훗날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하게 되면서, 부르고뉴 공국의 광대한 영지 중 네덜란드를 포함한 저지대 국가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샤를이 이루지 못한 황제 즉위의 꿈은 그의 이름을 물려받은 증손자 카를 5세(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 대에 가서야 실현되었다.

2. 1. 어린 시절

샤를 마르탱은 1433년 11월 10일 디종에서 선량공 필리프 3세와 이사벨라 드 포르투갈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1] 그는 유아기를 넘겨 생존한 유일한 자녀였다. 그의 어머니 이사벨라는 아들을 잃을까 염려하여 태어난 지 며칠 만에 성체에 봉헌했다. 아버지 필리프 3세는 그의 탄생을 축하하며 1430년에 자신이 창설한 금양모 기사단의 기사로 삼았고,[1] 부르고뉴 공작의 후계자에게 주어지는 칭호인 샤롤레 백작위를 수여했다. 그는 11월 20일 세례를 받았으며, 대부는 네베르 백작 샤를 1세와 앙투안 1세 드 크루아였다. 이름은 필리프 3세의 두 번째 부인 아르투아의 본느의 의붓아들인 네베르 백작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1]

1434년 초봄, 흑사병을 피해 어머니와 함께 탈랑의 산악 요새로 이주했다가 1435년 4월에 돌아왔다. 이후 파리로 가던 중 브뤼헤에서 필리프 3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 1436년 도시를 떠나려던 이사벨라와 샤를 일행이 반군에게 잠시 억류되기도 했다. 이 반란은 1438년 필리프 3세가 도시를 봉쇄하고 항복을 받아내면서 진압되었다.

소피 프레미에의 '브뤼게의 문 앞에서 체포된 부르고뉴 공작부인'. 이사벨라 드 포르투갈, 아들 샤를, 그리고 그들의 수행원들이 브뤼게의 문에서 체포된 19세기의 묘사


유아 시절 샤를은 튼튼한 아이였으며,[2] 어릴 때부터 무술과 군사 작전에 큰 관심을 보였다. 두 살 때 이미 나무 말을 타며 승마 훈련을 받았다. 아버지 필리프 3세는 루뱅 대학교 수사학 교수 앙투안 아네론 등 여러 가정교사를 두어 그를 가르쳤다. 샤를은 아버지를 닮아 역사, 연대기, 역사 로맨스를 즐겨 읽었으며, 특히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같은 정복자가 되기를 열망했다. 자신과 알렉산드로스 대왕 모두 아버지가 필리프라는 점에 영감을 받았다.[3] 그는 또한 훗날 프랑스의 왕 루이 11세가 되는 도팽 루이와 친구로 지내며 프랑스식 교육을 받았다. 루이는 왕위에 오르기 전 5년간 부르고뉴에서 망명 생활을 하기도 했다.

6세까지는 사촌인 클레베 공작 요한 1세와 그의 부인 아녜스에 의해 양육되었는데, 특히 아녜스의 역할이 컸다. 1441년(8세)에는 오시르샤토 영주 장 도시가 후견인으로 임명되었다. 12세가 된 1445년에는 아버지를 따라 네덜란드와 제란드를 방문하며 공무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검은색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있는 선량한 필립, 그 옆에는 머리를 드러내고 금양모 기사단의 목걸이를 착용한 샤를이 있다
샤를, 12세 또는 13세, 아버지 부르고뉴 공작 필립 옆에 서 있음; ''장 와켈랭이 필립 선공에게 '에노 연대기'를 바치는 모습'', 1447


1435년 아라스 조약으로 아버지 필리프 3세가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와 화해하면서, 샤를 7세의 딸과의 혼담이 오갔다. 필리프 3세는 당시 6세였던 샤를의 신부로 샤를 7세의 10살 된 딸 카트린 드 프랑스를 선택했다. 두 사람은 1439년 6월 11일 생토메르에서 화려한 축제와 함께 결혼식을 올렸다. 어린 부부는 유모의 보살핌 아래 각자 나이에 맞는 활동을 하며 지냈다.[4] 샤를은 아내 카트린과 금세 친해졌으며, 서로 선물을 주고받기도 했다. 1440년, 카트린은 음악에 관심이 있던 샤를에게 하프를 선물했다. 그러나 1446년 카트린은 병에 걸려 쇠약해졌고, 샤를과 어머니 이사벨라는 그녀의 곁을 지켰다. 샤를은 아내를 위해 직접 하프를 연주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같은 해 아라스에서 열린 토너먼트 관람을 위해 이동하던 중 카트린의 병세는 악화되었고, 결국 1446년 7월 30일 쿠덴베르크 궁전에서 사망했다.

17세 때 브뤼셀에서 열린 연습 토너먼트에서 부르고뉴의 유명 기사 자크 드 라랭과 첫 마상 시합을 벌였다. 아버지 필리프 3세는 샤를이 봐주지 않고 싸우도록 독려했고, 샤를은 실제 토너먼트에서도 16개 또는 18개의 창을 부러뜨리며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5] 1449년 소금세에 반발한 헨트 시가 부르고뉴 통치에 대항하여 겐트 반란 (1449–1453)을 일으키자 샤를도 전투에 참여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의 안전을 위해 어머니가 에서 위독하다는 거짓말로 그를 전장에서 빼냈다. 샤를은 1453년 결정적인 가베르 전투 직전에 전장을 떠났다. 하지만 릴에서 어머니 이사벨라는 오히려 아들에게 돌아가 상속을 위해 싸우라고 격려했다.

카트린 사후 8년간 홀로 지내다 1454년 부르봉의 이자벨과 두 번째로 결혼했다. 이자벨은 그의 사촌이자 부르봉 공작 샤를 1세의 딸로, 어릴 때부터 부르고뉴 궁정에서 자랐다. 필리프 3세는 아라스 조약을 갱신할 목적으로 이 결혼을 추진했으며, 샤를은 결혼식 전날 밤에야 아버지의 뜻을 알았지만 받아들였다. 이 결혼으로 시농 마을이 이자벨의 지참금으로 부르고뉴 영토에 편입되었다.

2. 2. 공작 즉위

아버지 필리프 3세가 1467년 사망하자 샤를은 부르고뉴 공작위를 계승했다. 그는 자신의 소유지를 확장하여 하나의 독립된 주로 만들고 프랑스의 통제에서 벗어나 왕국으로 만들려는 야망을 품었다. 당시 부르고뉴 영토는 루이 11세가 솜강 연안 지역을 장악하면서 둘로 나뉘어 있었는데, 샤를은 이 지역을 되찾아 영토를 하나로 합치려 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자신의 영지를 프랑스로부터 독립된 왕국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러한 샤를의 움직임은 프랑스 왕 루이 11세와의 갈등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루이 11세는 경제 봉쇄 등 다양한 방법으로 샤를을 견제했다. 이에 맞서 샤를은 루이 11세에게 반대하는 프랑스 내 유력 귀족들의 연합인 공익 동맹의 주요 지도자가 되어 평생에 걸친 투쟁을 시작했다.

1465년 10월, 콩플랑스 조약을 통해 루이 11세는 샤를에게 솜 강 연안 영토를 돌려주고, 자신의 딸 안(Anne)과 샤를의 결혼을 약속하며 샹파뉴를 지참금으로 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디낭리에주의 시민들을 부추겨 부르고뉴에 반기를 들도록 했다. 샤를은 1466년 디낭을 약탈했고, 공작위를 계승한 1467년 이후에는 리에주 주민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그들의 자치권을 박탈했다.

샤를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와 동맹을 맺어 루이 11세를 압박했다. 1468년 7월에는 에드워드 4세의 누이인 요크의 마거릿과 세 번째로 결혼했다. 이에 루이 11세는 같은 해 10월 페론에서 샤를과 협상을 시도했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샤를은 리에주가 루이 11세의 지원을 받아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루이 11세를 배신자로 여기면서도 협상을 계속하여, 루이 11세로부터 플랑드르, 강(헨트), 브뤼주를 파리 고등법원의 관할에서 제외시키고 리에주 반란 진압에 협력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결국 리에주는 파괴되었고 주민들은 학살당했다.

그러나 휴전은 오래가지 않았다. 1470년부터 1471년 사이 루이 11세는 샤를에게 파리 고등법원 출두를 명령하고 솜 지역의 일부 도시를 점령했다. 샤를은 1471년부터 1472년까지 노르망디일드프랑스를 침략하여 보복했고, 루앙까지 진격하며 프랑스를 공격했으나 보베 공격에는 실패했다. 1472년 11월 다시 휴전이 이루어졌고, 샤를은 에드워드 4세의 지속적인 지원을 기다리며 자신의 영지 동쪽 국경 문제 해결에 집중하기로 했다.

2. 3. 영토 확장 시도

샤를은 아버지 필리프 3세로부터 물려받은 방대하지만 분열된 영토를 하나로 통합하고 더욱 확장하려는 야심을 가졌다. 이는 역대 부르고뉴 공작들이 추구해 온 "반(反) 프랑스" 정책과 뫼즈강과 모젤강 유역 전체를 장악하려는 목표를 계승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프랑스의 통일을 추진하던 루이 11세에 맞서 국내 최대의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는 부르고뉴 공국 본토와 부르고뉴 백작령 (프랑슈-콩테) 외에도 리에주 주교령의 지배권을 확보하고 네덜란드 지역을 통치했다. 프랑스를 무력화하기 위해 스페인나폴리의 트라스타마라 가문과 동맹을 맺기도 했다.

샤를은 프랑스 내 독립적인 귀족들을 규합하여 루이 11세에 대항하는 공익 동맹(Ligue du Bien public프랑스어)을 결성하고 세 차례에 걸쳐 전투를 벌였으며, 매번 프랑스 왕군을 압도하는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 1473년에는 인접한 로렌피카르디 지역을 공략하여 주요 요새들을 넘겨받고 해당 지역에서의 자유로운 군대 통행권을 인정받았다. 이는 부르고뉴 본토와 네덜란드 영토를 육로로 연결하려는 전략의 일환이었다.

나아가 샤를은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을 호화로운 연회에 초대하여, 자신의 외동딸 마리와의 혼담을 제안하는 동시에 자신을 로마 왕(차기 신성 로마 황제)으로 추대해 줄 것을 요구하며 황제위까지 넘보았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3세는 명확한 답변을 피한 채 아들과 함께 서둘러 자리를 떠나면서 샤를의 야심은 실현되지 못했고, 이후 그의 운세는 기울기 시작했다. 역사가 에 따르면, 샤를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은 "다른 군주들의 지도자가 되어 불신자 정벌에 나서는 것"이라는 이상적이지만 막연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의 황제 즉위 소망은 훗날 그의 이름을 계승한 증손 카를 5세(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에 의해 실현된다.

영토 확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샤를은 당대 최고의 군사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중장기병, 쇠뇌병, 수총병을, 잉글랜드에서는 기마 궁병을 용병으로 고용했으며, 플랑드르의 가신들로부터는 창병을 동원했다. 병사들에게는 붉은 성 안드레 십자가가 새겨진 청색과 백색의 통일된 제복을 입히고 체계적인 군기와 부대 편제를 도입했다. 1471년부터는 매년 군대 배치에 관한 칙령을 발표하며 군제를 정비했다. 그는 서로 다른 병과를 조합하여 각 부대가 서로를 지원하도록 편성했는데, 예를 들어 창병은 궁병과 함께 배치되어 수총병의 엄호를 받았고, 기마 궁병은 기병과 함께 기동하며 공격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부르고뉴 군 팔콘포


또한 1453년 카스티용 전투의 교훈을 참고하여 효과적인 야전포 개발을 지원했고, 그 결과 '팔콘포'라고 불리는 바퀴 달린 장포신 야전포를 대량으로 도입하는 데 성공했다. 샤를이 구상한 군대는 여러 병과의 유기적인 협동과 야전포의 활용 면에서 시대를 앞서나갔지만, 복잡한 전술 운용은 당시의 통신 및 병참 능력의 한계로 인해 실제 전투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긴 파이크로 무장하고 1만에서 2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방진을 형성하는 스위스 용병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만한 충분한 수의 숙련된 창병을 갖추지 못한 것이 샤를 군대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결국 샤를의 영토 확장 시도는 군사적 실패로 끝났다. 1476년, 그는 루이 11세가 고용한 스위스 용병 부대에게 그랑송 전투와 무르텐 전투에서 연이어 참패했다. 이듬해인 1477년, 로렌 공 르네 2세와의 낭시 전투에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싸우다 전사하면서 그의 야심찬 계획은 완전히 좌절되었다. 샤를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외동딸 마리가 유일한 상속자가 되었고, 그녀가 훗날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하면서 부르고뉴 공국의 광대한 영지 중 네덜란드를 포함한 저지대 국가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2. 4. 행정 및 군사 개혁

샤를은 부르고뉴 공국의 행정기구와 군대를 재편하는 데 힘썼다. 1473년 티옹빌에서 공표된 법률에 따라 기병대를 창설하고, 훈련과 전술에 관한 규율을 제정했다. 또한 우수한 총기를 다수 확보하고 용병을 고용했으며, 특히 이탈리아 출신 용병대장들을 자신의 군대에 영입했다.

정부 중앙집권화를 목표로 여러 기구를 설치했다. 네덜란드 지역 공작령의 재정을 통합 관리하는 회계청(chambre des comptesfra), 샤를 개인 영지의 행정을 감독하는 이재청(chambre du trésorfra), 세금 징수를 담당하는 총무청(chambre des générauxfra)을 두었다. 또한, 상설화된 신분제 의회를 통해 과중한 세금을 부과했다. 사법 분야에서는 메헬렌에 대심의회(grand conseilfra)라는 최고 법정을 설치하여, 파리 고등법원의 사법권을 넘어서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와 별도로 과 돌에서 번갈아 열리는 법정도 운영했다.

이러한 개혁을 통해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킨 샤를은 왕의 칭호를 얻고자 했다. 잠시 신성 로마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기도 했으나 포기하고, 대신 부르고뉴 왕이 되려 했다. 이를 위해 1473년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트루아에서 만나 동의를 얻고자 설득했다. 왕의 휘장까지 준비되었으나, 프리드리히 3세는 샤를의 야심을 경계하여 그해 9월 밤중에 몰래 떠나버렸다. 결국 왕이 되려던 샤를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후 쾰른의 도시 노이스를 점령하려 했으나, 1474년 7월부터 1475년 6월까지 11개월에 걸친 공성전 끝에 실패로 돌아갔다.

3. 부르고뉴 전쟁

부르고뉴의 영토를 확장하고 프랑스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왕국을 세우려는 야심을 가진 샤를 1세에게 부르고뉴 전쟁은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당시 부르고뉴 영토는 프랑스 왕 루이 11세솜강 연안 지역을 장악하면서 남북으로 분단된 상태였고, 샤를은 이 지역을 되찾아 영토를 하나로 합치고자 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자신의 영지를 왕국으로 승인받으려 시도하며 루이 11세와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이에 맞서 루이 11세는 경제 봉쇄 등 다양한 방법으로 샤를을 견제했다. 샤를 역시 루이 11세에 대항하는 프랑스 귀족들의 공익 동맹에 가담하여 평생에 걸친 투쟁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샤를이 우세를 점하는 듯 보였다. 1465년 10월 콩플랑스 조약을 통해 루이 11세는 샤를에게 솜강 연안 영토를 돌려주고, 자신의 딸 안(Anne)과의 결혼을 약속해야 했다. 그러나 루이 11세는 뒤에서 디낭리에주를 부추겨 샤를에게 반기를 들게 했다. 샤를은 1466년 디낭을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아버지 필리프가 사망한 1467년 이후에는 리에주 주민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그들의 자치권을 박탈했다. 나아가 잉글랜드에드워드 4세와 동맹을 맺고, 1468년 7월에는 에드워드 4세의 누이인 요크의 마거릿과 결혼하며 루이 11세를 압박했다.

궁지에 몰린 루이 11세는 1468년 10월 페론에서 샤를과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협상 도중 리에주가 루이의 사주를 받아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분노한 샤를은 루이 11세를 배신자로 몰아붙이면서도 협상을 강행하여, 플랑드르, 강(헨트), 브뤼주를 파리 고등법원의 관할에서 제외시키고 리에주 반란 진압에 루이 11세가 직접 협력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리에주는 다시 한번 파괴되고 주민들은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짧은 휴전 이후 1470년 ~ 1471년 루이 11세는 샤를에게 파리 고등법원 출두를 명령하고 솜 지역의 도시들을 점령하며 다시 충돌이 시작되었다. 샤를은 1471년 ~ 1472년 노르망디일드프랑스를 침공하여 루앙까지 진격하며 프랑스 영토를 유린했으나, 보베 공격에는 실패하며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1472년 11월 다시 휴전이 이루어지자, 샤를은 프랑스와의 직접적인 충돌보다는 잉글랜드의 지속적인 지원을 확보하고, 자신의 영토 동쪽 변경 문제 해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는 라인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룩셈부르크, 네덜란드와 접경한 땅을 확보하여 분단된 영토를 하나로 통합하고자 했다. 이러한 야심은 이후 알자스, 헬더란트 등 동쪽 영토 획득 시도로 이어졌으나, 동시에 스위스, 로렌 공국 등 새로운 적들과의 충돌을 야기하며 부르고뉴 전쟁의 양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3. 1. 콘스탄츠 동맹 결성

샤를은 자신의 영토를 라인 지역까지 확장하려 했으며, 부르고뉴룩셈부르크, 네덜란드에 접한 변경 지역의 땅을 손에 넣어 영토를 하나의 단위로 통합하고자 했다. 그는 기회를 포착하여 1469년 알자스 변경백의 영지인 페레트 주(州)와 오스트리아의 지기스문트 대공으로부터 몇몇 도시들을 사들였다. 1473년에는 헬더란트의 아르놀트 공작의 유산을 확보하여 영토를 더욱 넓혔다. 샤를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스위스 지방과 쾰른을 정복하고, 르네 2세로부터 로렌을 얻어내려는 야심을 품었다. 이러한 거침없는 팽창 정책은 주변 세력과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3. 2. 노이스 포위전

샤를은 자신의 영토를 라인 지역까지 확장하려 했으며, 부르고뉴, 룩셈부르크, 네덜란드에 접한 변경 지역의 땅을 손에 넣어 영토를 하나로 통합하고자 했다. 그는 1469년 알자스 변경백의 영지인 페레트 주(州)와 오스트리아의 지기스문트 대공으로부터 몇몇 도시를 사들였다. 1473년에는 헬더란트의 아르놀트 공작 유산을 확보했다. 그의 다음 목표 중 하나는 쾰른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영토 확장을 위해 샤를은 강력한 군대를 조직했다. 그는 프랑스 왕을 타도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당시 최고의 병사들을 고용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중장기병, 쇠뇌병, 수총병을, 잉글랜드에서는 기마 궁병을, 플랑드르에서는 창병을 모집했다. 병사들은 붉은 성 안드레아 십자가가 새겨진 청색과 백색 제복을 입고 체계화된 군기와 창기를 사용했다. 1471년부터는 매년 군대 배치에 관한 칙령을 발표했다.

샤를은 서로 다른 병과를 조합하여 서로 지원하도록 편성했다. 창병은 궁병과 조합되어 수총병의 지원을 받았고, 기마 궁병은 기병과 함께 행동하며 기동성 있는 사격 공격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1453년 카스티용 전투의 교훈을 바탕으로 효과적인 야전포 개발을 지원하여, 바퀴 달린 긴 포신을 가진 팔콘포(Falconet)를 대량으로 도입했다.

샤를이 구상한 군대는 테르시오, 마우리츠 판 나사우, 구스타브 2세 아доль프의 군사 개혁에 앞서는 선구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여러 병과의 복잡한 연합과 야전포의 조합은 당시의 정보·통신 기술 및 병참 능력의 한계로 인해 실제 운용에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긴 파이크로 무장한 1만에서 2만 명에 달하는 스위스 용병의 대규모 방진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는 충분한 창병을 확보하지 못한 것은 샤를 군대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지적된다.

3. 3. 그랑송 전투

샤를은 자신이 상속받은 영토를 통일하고 확장하기 위해 프랑스 왕을 타도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 당시 모든 면에서 최고의 병사들을 고용하여 강력한 군대를 조직하고자 했다. 이탈리아 용병으로부터는 중장기병과 쇠뇌병, 수총병을, 잉글랜드로부터는 기마 궁병을, 플랑드르의 가신으로부터는 창병을 모았다. 병사들은 붉은 성 안드레 십자가를 단 청색과 백색의 제복을 입고, 체계화된 군기와 창기를 사용했으며, 1471년부터는 매년 군대 배치에 대한 칙령을 발표할 정도로 군 편제에 공을 들였다.

샤를은 서로 다른 병과를 조합하여 각 병과가 서로 지원하도록 편성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예를 들어, 창병은 궁병과 조합되어 수총병의 지원을 받았고, 기마 궁병은 기병과 함께 행동하며 기동성을 활용한 공격을 시도했다. 또한, 1453년 카스티용 전투의 경험을 바탕으로 효과적인 야전포 개발을 지원하여, '팔콘포'라고 불리는 바퀴 달린 긴 포신의 포를 대량으로 도입하는 데 성공했다.

샤를이 구상한 군대는 여러 병과의 유기적인 협동과 야전포 활용 면에서 시대를 앞서 나가는 선구적인 측면이 있었으며, 후대의 테르시오나 마우리츠 판 나사우,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군제 개혁을 예견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한 여러 병과의 연합과 야전포의 조합은 당시의 정보·통신 기술 및 병참 능력의 한계로 인해 실제 전장에서 원활하게 운용되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특히, 긴 파이크로 무장하고 강력한 밀집 대형을 이루는 스위스 용병 보병대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만큼 충분한 수의 창병을 확보하지 못한 점은 부르고뉴 군대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군사적 약점은 이후 스위스와의 전투, 특히 그랑송 전투에서 부르고뉴군이 고전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3. 4. 모라 전투

샤를은 자신이 상속받은 거대하지만 분단된 영토를 통일하고 확대하기 위해서는 프랑스 왕을 타도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 당시 모든 면에서 최고의 병사들을 고용했다. 이탈리아 용병으로부터는 중장기병과 쇠뇌병, 수총병을, 잉글랜드로부터는 기마 궁병을, 플랑드르의 가신으로부터는 창병을 모았다. 병사들은 붉은 성 안드레 십자가를 단 청색과 백색의 제복을 입고, 체계화된 군기와 창기를 가지고 있었다. 1471년부터는 군대 배치에 대한 칙령이 매년 발표되었다. 그리고 샤를은 서로 다른 병과를 조합하여 각 병과가 다른 병과를 지원할 수 있도록 편성했다. 이 때문에 창병은 궁병과 조합되어 수총병의 지원을 받고, 기마 궁병은 기병과 함께 행동하여 돌격하여 쏘는 공격이 가능해졌다.

또한, 1453년의 카스티용 전투를 참고하여 효과적인 야전포 개발을 지원한 결과, 팔콘포라고 불리는 바퀴 달린 긴 포신을 가진 포를 대량으로 도입하는 데 성공했다. 샤를이 구상한 군대는 150년 후의 테르시오나, 마우리츠 판 나사우,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군제에 선구적인 것이었지만, 복잡한 여러 병과 연합과 야전포의 조합은 군의 완전한 협조가 필요하다는 점 등, 이 시대의 정보·통신 기술 및 병참 등 기초적인 인프라의 한계로 인해 실제 운용에는 장애가 되는 문제가 많았다. 게다가, 긴 파이크로 무장한 1만에서 2만 명에 달하는 스위스 용병의 대규모 대열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의 창병을 갖추지 못한 것이 샤를 군의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3. 5. 낭시 전투와 죽음

1476년 샤를은 로렌 공국의 수도 낭시르네 2세의 군대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포위했다. 한겨울이라는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샤를은 르네 2세가 구원군을 이끌고 도착하기 전에 서둘러 공성전을 마무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어진 낭시 전투는 혼전 양상으로 흘러갔고, 결국 샤를의 군대는 패배했으며 샤를 자신도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25] 그의 시신은 전투가 끝난 지 이틀 후에 발견되었으며, 처음에는 낭시에 매장되었다가 이후 브뤼허로 옮겨졌다.

4. 사후

샤를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외동딸 마리의 상속 문제를 일으켰고, 이는 결국 부르고뉴 공국 영토의 분할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생전에 샤를은 합스부르크 가문을 넘어 신성 로마 황제 자리에 오르려는 야심을 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를 위해 1473년 트리어에서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3세 및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과 만나, 자신의 딸 마리와의 혼담 및 자신을 로마 왕(차기 황제)으로 추대해 줄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3세는 명확한 답변을 피하고 밤중에 몰래 도망쳤으며, 이 사건 이후 샤를의 위세는 점차 기울기 시작했다. 비록 샤를 자신은 생전에 그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가 이루고자 했던 강력한 군주로서의 염원은 훗날 그의 이름을 물려받은 증손 카를 5세(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와 동일 인물)에 의해 실현되었다.

4. 1. 부르고뉴 분할

용담공 샤를1477년 낭시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적법한 아들 없이 외동딸 마리만을 남겼다. 당시 부르고뉴 공국은 왕자령(Apanage)으로서 상속자가 없을 경우 프랑스 왕실로 영지가 귀속되는 전통이 있었다.[26] 이를 근거로 프랑스의 루이 11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부르고뉴를 왕실 영토로 편입시키려 했으며, 동시에 자신의 아들인 도팽 샤를(훗날 샤를 8세)과 마리를 결혼시키려 시도했다.

그러나 마리는 프랑스의 위협에 맞서 자신의 상속 영지를 지키기 위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1477년 8월에 그와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인해 부르고뉴 영지를 둘러싼 프랑스 왕실과 합스부르크 가문 간의 무력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1479년 8월에 벌어진 긴가트 전투에서 막시밀리안 1세가 이끄는 군대가 프랑스군을 격파하면서,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 대부분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 아래로 넘어가게 되었다.[27]

상황은 1482년 마리가 낙마 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다시 급변했다. 마리의 죽음으로 부르고뉴 영지를 둘러싼 분쟁이 재점화되자, 막시밀리안 1세는 루이 11세와 협상을 통해 1482년 12월 23일 아라스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통해 양측은 영토 분쟁을 일시적으로 마무리 지었으며, 막시밀리안 1세의 두 살 된 딸 마르가레테와 루이 11세의 아들인 도팽 샤를의 약혼이 결정되었다. 결과적으로 아라스 조약은 부르고뉴 공국 영토가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문 사이에서 분할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4. 2. 역사적 평가

샤를 (17세기, 페테르 파울 루벤스 그림)


샤를은 현실적인 계산이나 건설적인 사색보다는 정열과 사명감에 이끌려 행동했던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이러한 성향은 결국 그를 파멸로 이끌었지만, 동시대 연대기 작가인 Philippe de Commines|필리프 드 코민영어이나 Georges Chastellain|조르주 샤텔랭영어 등은 그의 생애를 "공익을 위한 진실하고 대담한 투사"의 전형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역사가 요한 호이징가 역시 그의 저서 『중세의 가을』 등에서 샤를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하며 그의 복합적인 면모를 조명했다.

샤를은 자신이 상속받은 방대하지만 분열된 영토를 통일하고 확장하기 위해 프랑스 왕을 타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실현하고자 당대 최고의 군사력을 구축하려 노력했다. 그는 이탈리아 용병에게서 중장기병, 쇠뇌병, 수총병을, 잉글랜드로부터 기마 궁병을, 플랑드르의 가신들로부터 창병을 모집하여 군대를 구성했다. 병사들에게는 붉은 성 안드레 십자가가 새겨진 청색과 백색의 통일된 제복을 입히고, 체계화된 군기와 창기를 사용하게 했다. 1471년부터는 매년 군대 배치에 관한 칙령을 발표하며 군 조직을 정비했다.

특히 샤를은 서로 다른 병과를 조합하여 상호 지원이 가능하도록 부대를 편성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창병은 궁병과 함께 배치되어 수총병의 지원을 받도록 했고, 기마 궁병은 기병과 함께 행동하며 기동성을 살린 공격을 시도했다. 또한, 1453년 카스티용 전투의 교훈을 바탕으로 효과적인 야전포 개발을 지원하여, '팔콘포'라 불리는 바퀴 달린 긴 포신의 야전포를 대량으로 도입하는 데 성공했다.

샤를이 구상한 이러한 군사 시스템은 훗날 16세기의 테르시오나, 마우리츠 판 나사우,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 등이 시도한 군제 개혁의 선구적인 형태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여러 병과의 복잡한 연합과 야전포의 효과적인 운용은 당시의 정보·통신 기술 및 병참 능력의 한계로 인해 실제 전투에서 완전한 협조를 이루기 어려웠다. 더욱이, 긴 파이크로 무장하고 대규모 방진을 형성하는 스위스 용병에 효과적으로 맞설 만한 충분한 수의 창병을 확보하지 못한 점은 샤를 군대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군사적 한계는 결국 부르고뉴 전쟁에서의 연이은 패배로 이어졌다.

5. 결혼과 자녀

샤를은 공작위를 계승하기 전 두 번, 계승 후 한 번, 총 세 번 결혼했다.

순서부인결혼 연도자녀비고
첫 번째프랑스 국왕 샤를 7세의 딸 카트린 (1428년 ~ 1446년)1440년없음1435년 아라스 조약에 따른 정략결혼이었으나, 카트린은 1446년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사망했다.[4] 샤를은 카트린이 병상에 있을 때 그녀가 선물한 하프로 음악을 연주해주기도 했다.
두 번째부르봉 공작 샤를 1세의 딸 이자벨 드 부르봉 (1436년 ~ 1465년)1454년마리 (1457년 출생)샤를의 사촌. 샤를의 아버지 필리프 3세가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추진한 결혼이었다. 이 결혼으로 샤를은 유일한 상속녀인 딸 마리를 얻었으나, 이자벨 역시 1465년에 사망했다.
세 번째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의 여동생 마거릿 오브 요크 (1446년 ~ 1503년)1468년없음샤를이 공작이 된 후 이루어진 결혼이다. 마거릿은 샤를 사후에도 부르고뉴에 남아 의붓딸 마리와 그녀의 남편 막시밀리안 1세를 도우며 공국에 헌신했다.



샤를에게는 두 번째 부인 이자벨에게서 태어난 외동딸 마리가 유일한 자녀이자 상속녀였다. 마리는 훗날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하여, 부르고뉴 공국의 광대한 영토, 특히 네덜란드 지역이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가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참조

[1]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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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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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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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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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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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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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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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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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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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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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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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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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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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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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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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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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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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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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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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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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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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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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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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웹사이트 Charles {{!}} duke of Burgundy https://www.britanni[...] Britannica 2024-11-10
[25]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26]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27]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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