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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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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용의는 전연의 군주 모용황의 손자로, 서연의 연왕으로 옹립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살해된 인물이다. 370년 전연이 전진에 의해 멸망한 후 관중으로 이주했으며, 384년 모용홍이 서연을 건국하자 이에 참여했다. 386년 단수가 살해된 후 연왕으로 옹립되어 건명으로 개원하고 고향으로 향하던 중 모용도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자치통감에는 모용의(慕容顗), 위서에는 모용개(慕容凱)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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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의
인물 정보
이름모용의
한자 표기慕容顗
로마자 표기Murong Yi
생몰
사망 년도386년
통치 정보
작위서연의 군주
재위 기간386년
이전 통치자단수
다음 통치자모용요
왕조서연
연호건명
연호 기간386년
묘호(없음)
시호(없음)
가계
성씨Mùróng (慕容)
씨족(알 수 없음)
의 (顗)
아버지모용환

2. 생애

384년 모용홍서연을 건국하자 모용의도 이에 참여하였다. 386년 3월, 서연의 군주였던 단수가 좌복야 모용항, 상서 모용영에게 살해되자 모용의가 연왕에 옹립되었다.

모용의는 건명으로 개원하고 모용항, 모용영 등을 따라 선비족 40만 명을 이끌고 장안을 떠나 고향으로 향했으나, 임진(臨晉)에서 모용항의 동생 호군장군 모용도에게 살해되었다.[1]

2. 1. 초기 생애 및 전연 멸망

모용의는 전연의 군주 모용황의 손자로, 아버지는 의도왕 모용환이다. 370년 전연이 전진에 의해 멸망당한 뒤, 전진의 부견선비족 모용부를 대대적으로 관중으로 이주시켰는데, 모용의도 이때 관중으로 이주하였다.

자치통감》에는 모용의(慕容顗)로, 《위서》에는 '''모용개'''(慕容凱)로 기록되어 있다.

2. 2. 서연 건국과 옹립

370년 전연이 전진에 의해 멸망당한 뒤, 전진의 부견선비족 모용부를 대대적으로 관중으로 이주시켰는데, 모용의도 이때 관중으로 이주하였다.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패배하자 384년 모용홍서연을 건국하였고, 모용의도 이에 참여하였다. 386년 3월, 당시 서연의 군주였던 단수가 좌복야 모용항, 상서 모용영에게 살해되고 모용의가 연왕(燕王)에 옹립되었다.[1]

모용의는 건명으로 개원하고 모용항, 모용영 등을 따라 선비족 40만 명을 이끌고 장안을 떠나 고향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동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臨晉)에서 모용항의 동생 호군장군 모용도에게 살해되었다.[1]

2. 3. 연왕 즉위와 최후

386년 3월, 서연의 군주였던 단수가 좌복야 모용항, 상서 모용영에게 살해되고 모용의가 연왕(燕王)에 옹립되었다.[1] 모용의는 건명(建明)으로 개원하고 모용항, 모용영 등을 따라 선비족 40만 명을 이끌고 장안을 떠나 고향으로 향했다.[1] 그러나 이동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에서 모용항의 동생 호군장군 모용도에게 살해되었다.[1]

자치통감》에는 모용의(慕容顗)로, 《위서》에는 '''모용개'''(慕容凱)로 기록되어 있다.

3. 이름에 대한 이설

자치통감》에는 모용의(慕容顗)로, 《위서》에는 '''모용개'''(慕容凱)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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