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용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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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용초는 전연의 북해왕 모용납의 아들로, 370년 전연 멸망 후 숙부 모용덕을 따라 장액으로 이주했다. 이후 후량, 후진을 거쳐 405년 모용덕의 뒤를 이어 남연의 황제가 되었다. 즉위 후 측근 정치를 펼치며 모반을 진압하고 독재 체제를 구축했으나, 태악을 되찾기 위해 동진을 공격한 것이 유유의 북벌을 불러왔다. 린취 전투 패배 후 수도 광고에서 농성하다 410년 함락되어 포로로 잡혀 건강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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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초 | |
---|---|
기본 정보 | |
이름 | 모용초 |
한자 표기 | 慕容超 |
가문 | 모용 |
왕조 | 남연 |
즉위 정보 | |
직위 | 남연 황제 |
재위 기간 | 405년 9월 19일 – 410년 3월 25일 |
이전 통치자 | 모용덕 |
후임 | (없음) |
생애 | |
출생 | 385년 |
사망 | 410년 |
사망 장소 | 건강, 동진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모용납 |
어머니 | 단태후 |
배우자 | 호연황후 |
통치 | |
연호 | 태상 (太上) |
연호 기간 | 405년 9월 19일 – 410년 3월 25일 |
2. 생애
모용초는 전연의 북해왕 모용납의 아들로, 385년에 태어났다. 370년 전연이 멸망한 후, 아버지 모용납은 전진에서 벼슬을 하다가 장액으로 이주했다. 모용납의 동생 모용덕은 전진 부견의 명에 의해 동진 토벌군에 참가했다. 383년 전진이 비수 전투에서 패배하자, 모용납, 모용덕 형제는 형 모용수가 자립한 후연 정권에 참가했지만, 모용납과 모용덕의 자식들은 살해당했다. 이때 모용납의 아내인 단씨가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사형 집행이 중지되어 투옥되었다. 옥졸 호연평은 전에 모용덕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어 단씨의 강족 (후진)으로의 도주를 도왔고, 단씨는 모용초를 출산했다.
그 후 후량으로 도망갔지만, 후량이 후진에 의해 멸망하자 장안으로 이주했다. 여기서 모용초는 호연평의 딸과 결혼했다. 모용초는 후진의 의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신 이상자인 척하며 거지 행세를 했다. 당시 이미 남연을 건국하여 황제가 된 숙부 헌무제 모용덕이 이것을 듣고 사자를 보냈다. 남연에 도착한 모용초는 북해왕에 봉해졌다.
건평 6년, 헌무제(모용덕)가 죽자 황제에 즉위하여 태상으로 개원했다. 즉위 후, 공손오루의 참언을 받아들여 공신들을 모두 숙청했으며, 향락에 빠져 민중을 괴롭혔다고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태상 3년, 생모 단씨와 정비 호연씨가 후진에 머물러 있었기에, 후진의 번신(藩臣)을 칭하고 생모와 정비를 돌려받았다. 후진에 신종(臣從)한 후, 모용초는 남진하여 회북을 공격하며 동진에 대항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태상 5년에 동진 장령 유유의 군세에 의해 반격을 받아, 이듬해(410년)에는 도성인 광고(산둥성칭저우시)가 함락되었고, 모용초는 포로가 되어 동진의 도읍 건강(장쑤성난징시)으로 보내져 참수되었으며, 남연은 멸망했다.
2. 1. 어린 시절 (385년 ~ 405년)
모용납의 아들로 385년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단씨(段氏)이다. 370년 전연이 멸망하자 모용납의 동생 모용덕은 전진의 부견에 의해 장액의 태수로 임명되었고, 모용납은 모용덕을 따라 온 가족을 이끌고 장액으로 이주하였다.[1]383년 부견이 비수대전을 일으키자 모용덕은 형 모용수를 따라 종군하였는데 가족들을 모두 장액에 남겨두었다. 모용덕은 떠나면서 어머니 공손씨에게 금으로 만든 칼을 증표로 남겨주었다.[1]
비수대전에서 부견이 몰락한 이후 384년부터 모용수가 후연을 건국하고 전쟁을 벌였다. 이 소식이 장액에 전해지자 장액을 지키던 부창은 모용덕의 일족을 모두 처형하였다.[1]
모용납, 모용덕 형제의 어머니 공손씨는 나이가 많아 처형을 면했고, 모용납의 부인 단씨는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처형을 결정하지 못해 감옥에 남아 있었다. 이때 감옥을 관리하던 관리인 호연평은 과거 모용덕의 은혜를 받은 일이 있어 공손씨와 단씨를 탈출시켜 주었고, 함께 강족 부락으로 도망쳤다.[1]
호연평의 보호 아래 단씨는 모용초를 낳았다. 모용초가 10여 세가 되었을 때 공손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모용초에게 모용덕이 증표로 남긴 금칼을 물려주었다.[1]
얼마 후 이들은 후량의 고장(姑臧)으로 이주하였으며 후량이 멸망하자 다시 후진의 장안으로 이주하였다.[1]
호연평이 죽자 모용초는 어머니 단씨의 뜻에 따라 호연평의 딸과 결혼하였다. 모용초는 자신의 숙부가 남연의 황제였기 때문에 정체가 탄로날 것을 두려워하여 미친 척 하여 후진의 천왕 요흥에게 등용되지 않도록 하였다.[1]
405년, 모용초는 모용덕이 보낸 밀사를 통해 모용덕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가족들을 남겨둔 채 단신으로 밀사를 따라 모용덕을 찾아갔다. 이 과정에서 모용초는 모용덕의 부하 모용법(慕容法)과 알력을 가졌다.[1]
2. 2. 남연 황제 즉위 (405년)
405년, 모용덕이 보낸 밀사를 통해 모용초는 모용덕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족들을 남겨둔 채 단신으로 밀사를 따라 모용덕을 찾아갔다. 이 과정에서 모용덕의 부하 모용법과 알력을 가졌다. 모용덕은 모용초가 조카인 것을 확인하고 곧 태자로 삼았으며 얼마 뒤에 사망하였다. 모용초는 모용덕의 뒤를 이어 남연의 황제로 즉위하였다.2. 3. 남연 통치 (405년 ~ 410년)
405년, 모용덕이 보낸 밀사를 통해 모용덕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안 모용초는 가족들을 남겨둔 채 단신으로 밀사를 따라 모용덕을 찾아갔다. 이 과정에서 모용초는 모용덕의 부하 모용법(慕容法)과 알력을 가졌다.[1] 모용덕은 모용초가 조카인 것을 확인하고 곧 태자로 삼았으며 얼마 뒤에 사망하였다. 모용초는 모용덕의 뒤를 이어 남연의 황제로 즉위하였다.[1]모용초는 모용덕의 옛 부하들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자신의 친우인 공손오루(公孫五樓)를 중용, 측근 정치를 실시하였다.[1] 이에 불만을 품은 모용법, 모용종(慕容鐘), 단굉(段宏) 등은 406년에 모반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1] 모용초는 모반을 진압하여 불만세력을 일소하고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1]
407년, 모용초는 후진에 사신을 보내 어머니와 부인 호연씨를 송환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후진의 요흥은 모용초의 요구에 대한 조건으로 남연이 후진에 신속할 것과 태악(太樂)을 바칠 것을 걸었다.[1] 이에 모용초는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태악을 바치고 어머니와 부인을 돌려 받았다.[1]
409년, 모용초는 태악을 다시 구하기 위해 동진(東晉)을 공격하여 악공들을 약탈하였다. 이에 동진의 권력자 유유가 북벌군을 일으켜 남연을 침공하였다.[1]
모용초는 험한 곳을 지키자는 신하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유유의 북벌군을 영내로 끌어들여 단기 결전을 벌이려고 하였다.[1] 그러나 전투에서 패하여 모용초는 수도 광고(廣固)에서 6개월 여를 농성하였다.[1]
410년에 성이 함락되고 포로로 잡힌 모용초는 건강(建康)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1]
모용초는 즉위하자마자 변덕스럽고 비판을 들으려 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자격 미달이라는 평이 자자했음에도 불구하고 측근인 공손오루를 즉시 대장군으로 임명했고, 모용덕이 막중한 책임을 맡긴 관리들인 북제 왕 모용종과 단굉과 거리를 두었다. 그는 아첨꾼들에게 둘러싸여 사냥과 순행에 시간을 보내며 이에 반대하는 모든 충고를 거절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는 또한 얼굴에 문신을 새기고, 코를 베고, 발을 자르고, 거세하는 형벌을 부활시키려 했으나, 대중의 반대에 부딪혀 실행하지 못했다. 그는 또한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과 노동 부담을 부과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406년, 공손오루는 권력을 더 잡기 위해 모용종을 모반 혐의로 거짓 고발했다. 모용종, 모용파, 단홍은 이에 얽혀 섭정 단태후(段太后)와 봉숭(封嵩)도 연루되었지만, 단태후는 두려움에 휩싸여 결국 음모를 모용초에게 폭로했다. 봉숭은 처형되었고, 모용초는 계림왕 모용진(慕容鎮)과 한범(韓範)을 보내 모용종, 모용파, 단홍을 공격하게 했다. 단홍은 북위로 도망쳤고, 모용종과 모용파는 후진으로 도망쳤다.
407년, 모용초는 관리 봉개(封愷)를 후진에 보내 요흥에게 그의 어머니와 아내를 돌려줄 것을 협상했다. 요흥은 그가 신하가 될 것을 요구하고 전진의 궁중 음악가(이들은 여러 차례 이동한 끝에 이 시점에는 남연에 정착했다) 또는 동진의 포로 1,000명을 후진에 넘길 것을 요구했다. 모용초는 기꺼이 신하가 되기로 동의했지만 두 가지 요구 사항 모두에 망설였다. 결국, 동진의 보복이 두려워 그는 120명의 음악가를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요흥은 그의 어머니 단부인과 아내 호연부인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408년, 그는 단부인을 태후로 받들고 호연부인을 황후로 책봉했다.
음력 설 409년, 모용초는 전통적인 황실 행사를 열었고, 황실 음악가가 부족한 것을 한탄하며 음악가로 훈련시킬 사람들을 포획하기 위해 동진을 공격할 것을 제안했으나, 한범의 형제(이름은 유니코드에 없음)인 한탁의 반대에 부딪혔다. 한 달 뒤, 모용초는 장군 모용흥종(慕容興宗), 곡곡제(斛穀提), 공손귀(公孫歸, 공손오루의 형제)를 보내 동진을 공격하여 수예(宿豫, 현대의 쑤첸, 장쑤)와 남녀 2,500명을 포획하여 악사에게 음악을 가르치게 했다. 성공에 힘입어 모용초는 동진에 대한 약탈을 더 감행했다.
한 달 후, 당시 동진 정부의 지도자였던 진(晉) 장군 유유는 남연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제안했고, 반대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에 상관없이 작전을 시작했다. 공손오루와 모용진은 남연 군대가 대현산(大峴山, 현대의 웨이팡, 산둥)을 방어하고 동진군이 통과하지 못하게 할 것을 제안했다. 지나치게 자신만만했던 모용초는 대신 동진군이 대현을 지나가게 한 다음 대현 북쪽 평원에서 그들과 교전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또한 동진군이 식량으로 사용할 수 없도록 작물을 불태우라는 제안을 거부했다. 모용진이 한탁에게 이로 인해 제국이 멸망할 것이라고 말하자 모용초는 모용진을 감옥에 가두었다.
유유는 모용초가 두려워했던 대현을 방어하지 않은 것에 매우 기뻐했다. 동진과 남연군은 린취 근처에서 교전했고(臨朐, 역시 웨이팡에 위치), 모용초는 린취 시에서 대기했다. 동진 장군 호번(胡藩)은 린취를 기습 공격하여 점령했고, 모용초는 도망쳐야 했다. 모용초가 도망치자 유유는 남연의 주력 부대와 교전하여 그들을 격파했고, 모용초는 광고로 도망쳤다. 유유는 뒤따라와 도시 외곽을 빠르게 점령했고, 광고를 포위했다. 모용초는 모용진을 석방하고 도시 방어를 도울 것을 요청했지만, 모용진이 광고를 방어하는 것보다 마지막 전투를 벌일 것을 제안하자 주저했고, 대신 한범을 후진에 보내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요흥이 장군 요강(姚強)이 지휘하는 군대로 지원할 의향이 있었지만, 그 자신도 반란군 장군 유발발(하)에게 패배한 후 요강의 군대를 철수시켰다. 한범은 유유에게 항복했고, 광고 수비대는 더욱 절망에 빠졌다. 많은 관리들이 모용초에게 동진에 항복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는 거절하고 그런 제안을 하는 사람을 모두 처형했다.
410년 봄, 광고가 함락되었고 모용초는 포로로 잡혔다. 유유는 항복을 거부한 그를 꾸짖었지만, 그는 유유에게 전혀 대답하지 않고 그의 어머니를 이전에 그의 숙부 모용덕의 신하였던 동진 장군 유경선(劉敬宣)에게 맡겼다. 모용초는 동진의 수도 건강으로 끌려가 처형되었고, 약 3,000명의 남연 관리와 귀족 또한 처형되었다.
2. 4. 몰락과 죽음 (410년)
409년, 모용초는 동진을 공격하여 악공들을 약탈하였다. 이는 동진의 권력자 유유가 북벌군을 일으켜 남연을 침공하는 계기가 되었다.[1]모용초는 험한 곳을 지키자는 신하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유유의 북벌군을 영내로 끌어들여 단기 결전을 벌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패하여 수도 광고(廣固)에서 6개월 여를 농성하였다.[1]
410년 성이 함락되자 모용초는 포로로 잡혀 건강(建康)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1]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아버지 | 모용납 |
어머니 | 단씨 황태후 |
배우자 | 호연씨 |
후궁 | 위비 |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서적
Book of Jin
[3]
웹사이트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http://db1x.sinica.e[...]
2010-05-22
[4]
서적
Zizhi Tongj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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