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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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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흥은 오호 십육국 시대 후진의 황제이다. 요장의 장자로, 후진 건국 후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며, 부등을 격파하고 관중을 통일하여 후진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는 불교를 장려하여 구마라습을 국사로 초빙하고 사원을 건립했으나, 불교에 심취하여 국정을 소홀히 하고 유발발의 하 건국으로 후진이 쇠퇴하는 원인이 되었다. 말년에는 요필의 쿠데타 시도와 황위 계승 문제 등으로 혼란을 겪다가 416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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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흥
기본 정보
칭호황제/천왕
요흥
자략
시호문환황제 (文桓皇帝)
묘호고조 (高祖)
생년366년
몰년416년
능묘우릉 (偶陵)
통치 정보
재위 기간394년 - 416년
연호황초 (皇初): 394년 - 399년
홍시 (弘始): 399년 - 416년
가족 관계
아버지요장
어머니(정보 없음)
배우자장황후 (후진)
제황후
자녀요홍
요씨 (후진)
기타 정보
왕조후진
전임자요장
후임자요홍

2. 생애

393년 말, 요장이 병으로 사망하자 요흥은 요장의 상을 숨기고 지방의 동요를 막았다. 394년, 부등이 후진을 공격했으나 요흥은 이를 물리치고 마모산에서 부등을 사로잡아 죽였다. 이후 요흥은 요장의 상을 발표하고 황제에 즉위했다.[4] 요흥은 숙부 요서(姚緖)와 요석덕(姚碩德)의 의견을 따라 정치를 행하여 국내 안정에 힘썼고, 북위·후연과 사신을 교환하며 주변 세력과 우호관계를 맺었다.[4]

396년 상규를 점령하고, 399년 낙양을 점령하여 한수회수 이북의 군현들이 후진에 항복했다. 400년 농서를 공격하여 서진을 멸망시켰고, 401년 후량을 공격하여 복속시켰다. 같은 해 구마라습을 장안으로 데려와 국사로 삼고 불경 번역과 사원 건설을 지원했다. 402년 시벽에서 북위를 공격했으나 패배했지만, 이후 북위와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403년 후량을 멸망시키고 서량, 북량, 남량을 모두 속국으로 만들었으며, 405년 구지도 복속시켰다. 407년 말, 모용초남연으로 모친과 부인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자, 요흥은 그 대가로 태악(太樂)을 바치고 속국이 될 것을 요구하여 이를 받아들였다.[7]

405년 말, 유유가 한수 일대의 12개 군을 송환할 것을 요구하자, 요흥은 유유와의 대결을 피하기 위해 이를 승낙했다. 406년 남량에 고장을 빼앗기며 사실상 남량, 북량, 서량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다. 407년 유발발이 하를 건국하며 반란을 일으키는 등 내분에 시달렸고, 후진은 하와 장기간 전쟁을 치르면서 쇠퇴했다. 409년 서진과 구지가 독립했고, 410년 후촉과 연합하여 동진을 공격했으나 패배했다. 413년 북위와 인척 관계를 맺어 대응하려 했다.

414년 요흥이 총애하던 아들 요필이 권력을 잡으려 모반을 일으켰으나 실패했고, 415년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어 장안 성내에 유폐되었다. 416년 요흥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요필의 추종자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요흥은 병든 몸으로 이 반란을 진압하고 요필을 처형했다.[8][9] 그리고 바로 다음날 사망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아버지 요장 치세 (366년 ~ 394년)

366년, 요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요장이 전진 황제 부견 휘하에서 복무할 때 요흥은 태자의 사인(舍人)으로, 전진의 황태자 부굉을 보좌했다.[4]

384년 요장이 후진을 건국하자 장안을 탈출하여 요장에게 갔고, 요장은 그를 태자로 책봉하였다.[4] 요장이 전진부등과 전쟁을 벌일 때 요흥은 장안을 지키면서 후방을 안정시켰다.

392년, 요장이 전쟁에 나가 있는 동안 요방성의 헌언에 따라 포로로 잡힌 전진의 장군 몇 명을 죽였다. 요장은 겉으로는 이것에 노했지만, 속으로는 요흥이 이 포로들의 위험성을 간파한 것을 기뻐했다고 한다.[5] 같은 해, 선비족에게 도망쳤던 흉노 철불부의 혁련발발(하의 창건자)을 후진에 귀순시키고, 그의 용모에 심취하여 삭방을 맡겼다.[6]

393년, 전진의 잔당 부등이 후진을 공격하자, 요장은 윤위의 헌언에 따라 태자 요흥에게 군대를 지휘하게 하여 방어에 나서게 했다. 요흥은 쉽게 부등을 물리쳤다. 같은 해 요장은 병상에서 요흥에게 요황, 요대목, 적백지 등 대신들을 중용하라고 유언했다. 요황이 부등을 멸망시키는 방법을 묻자, 요장은 질문에 답하지 않고 요흥이라면 해낼 수 있다고만 말했다고 한다.[5] 요장이 죽은 후 장남인 요흥이 뒤를 이어 즉위하자, 요서, 요석덕, 요숭 등을 신임하여 전진에 대비했다.

2. 2. 황제 즉위와 후진의 전성기 (394년 ~ 407년)

393년 말, 요장이 병으로 사망하자 요흥은 요장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지방의 동요를 막았다. 394년, 요장의 사망 소식을 들은 부등은 후진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부등을 물리친 요흥은 요장의 죽음을 알리고 황제에 즉위하였으며, 마모산에서 부등을 사로잡아 죽였다. 요흥은 숙부 요서(姚緖)와 요석덕(姚碩德)의 의견을 따라 정치를 행하여 국내 안정에 힘썼다. 또한 주변 세력과 우호관계를 맺어 북위·후연과 사신을 교환하였다.[4]

395년 (황초(皇初) 2년) 초, 후진은 후연(後燕)과 동맹을 맺었지만, 같은 해 후연의 모용보(慕容寶)가 북위(北魏)의 탁발규(탁발규)를 공격했을 때(참합피 전투), 후진은 북위를 지원했다. 이 전투에서 후연은 크게 패했다. 또한, 397년, 모용수(慕容垂)의 뒤를 이어 즉위한 모용보가 북위의 공격을 받았을 때, 후진은 지원하지 않았다.

  • 396년 - 올도스를 점령했다.
  • 399년 (홍시 원년) - 동생인 요숭(姚崇)과 양불숭(楊仏嵩)이 동진(東晋)으로부터 낙양을 빼앗았다.


399년, 요흥은 천체의 이변을 불길하게 여겨 황제 칭호를 버리고 "천왕"(''Tian Wang'')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4]

  • 400년 - 요석덕(姚碩徳)이 서진과 싸웠다. 처음에는 서진이 요석덕의 보급로를 끊는 데 성공했지만, 요흥이 원군을 이끌고 오자 형세가 역전되어 걸복건귀(乞伏乾帰)에게 승리했고, 그 군대의 대부분이 항복하여 서진의 영토를 차례로 손에 넣었다. 패주한 걸복건귀가 남량의 탁발리록고(禿髮利鹿孤)에게 의탁했으므로, 서진은 일시적으로 멸망했다. 같은 해 가을, 탁발리록고에게 살해당할 것을 두려워한 걸복건귀는 후진에 망명했다. 요흥은 그를 우대하여 귀의후(歸義侯)로 삼았고, 다음 해에는 부락을 돌려주어 원천진수(苑川鎮守)에 임명했다. 이곳은 원래 서진 영토였고, 걸복건귀는 사실상 반독립 상태였다.
  • 401년 - 요석덕의 건의에 따라 후량을 공격했다. 남량의 탁발리록고는 전투를 피하기 위해 길을 열었으므로, 요석덕은 쉽게 후량의 수도 고장에 도달하여 점령할 수 있었다. 남량, 북량, 서량은 모두 후진에 사신을 보내 속국이 되었다. 2개월 후, 천왕 려륭(呂隆)도 항복하여 후량은 후진의 속국이 되었다.
  • 402년 초 - 북위가 원래 서진의 몰익간(沒弈干)을 공격한 것으로 인해, 북위와 후진은 적대 관계가 되었다. 황제가 된 북위의 탁발규(도무제)는 정략 결혼을 통해 후진과 관계를 맺으려 했지만, 요흥은 탁발규가 이미 후연의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하고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같은 해 여름, 요흥은 황하 이북의 후진 영토를 빼앗은 북위에 대한 공격에 친정했다. 같은 해 가을, 후진의 요평(姚平)이 채벽에서 탁발규에게 포위되었다. 요흥과 요평은 저항했지만, 북위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고, 같은 해 겨울에는 요평과 그 군대가 북위에 포로로 잡혀, 요흥의 원정은 종료되었다 (채벽 전투).

2. 3. 쇠퇴와 죽음 (407년 ~ 416년)

407년 말, 모용초가 요흥에게 남연으로 모친과 부인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자, 요흥은 그 대가로 태악(太樂)을 바치고 속국이 될 것을 요구하여 이를 받아들였다.[7] 시벽 전투 이후, 유발발의 독립과 함께 후진은 점차 쇠퇴해 갔다. 요흥은 요홍을 황태자로 삼고 싶어 했지만, 몸이 약하여 망설였다.[7]

  • 408년 - 남량이 주변 국가들의 공격을 받고 있음을 파악한 요흥은 남량을 멸망시키기 위한 작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요흥의 아들 요필과 요현은 독발녹단에게 패했고, 요흥은 남량과 평화 조약을 맺어야 했다. 더 큰 문제는 제난이 유발발의 함정에 빠져 군대와 함께 포로로 잡힌 것이다. 이로 인해 오늘날 북부 산시 성 지역이 하의 손에 넘어갔다.
  • 409년 - 멸망시켰던 서진이 독립하였고, 구지도 자립하였다. 같은 해, 요흥의 형제들과 아들들이 권력을 빼앗으려는 움직임이 커졌다.
  • 410년 - 후촉과 연합하여 동진을 공격했으나 패배하였다.
  • 413년 - 북위와 인척 관계를 맺어 대응하고자 했다.
  • 414년 - 요흥이 총애하던 아들 요필이 권력을 잡으려고 모반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요흥은 요필을 처벌하지 않았다.
  • 415년 - 요흥이 다시 병에 걸리자 요필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도 진압되었고 요필은 장안 성내에 유폐되었다.
  • 416년 - 요흥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요필의 추종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요흥은 병든 몸으로 이 반란을 진압하고 요필을 처형하여 후계자 다툼을 끝냈다.[8][9] 그리고 바로 다음날 사망하였다.

3. 요흥의 통치와 정책

요흥은 불교를 독실하게 믿었으며, 적에게도 자비로운 태도를 보이려 노력했다. 구마라집을 신처럼 존경하며 그의 설법을 자주 들었고, 구마라집은 요흥의 요청으로 300여 개의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했다. 요흥은 많은 탑과 사찰을 건립하여 불교를 장려했으며, 그 결과 인구의 90%가 불교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1]

요흥은 401년에 후량(後涼)을 항복시키고 구마라집을 장안으로 초빙하여 국사로 대우했다. 그는 구마라집에게 『실상론』, 『유마경주』 등을 번역하게 했으며, 동생 요현과 요숭도 구마라집을 신봉했다. 405년에는 구마라집의 제자 승조를 대승정으로 임명하여 불교 승려 집단을 관리하게 했다.[1]

395년, 후진은 후연(後燕)과 동맹을 맺었으나 참합피 전투에서 후연이 북위(北魏)에 패배하자 북위를 지원했다. 399년에는 동진(東晋)으로부터 낙양을 빼앗았다.[4] 400년에는 서진(西秦)을 공격하여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고, 걸복건귀를 귀의후로 삼아 우대했다. 401년에는 후량을 공격하여 속국으로 만들었다.

402년, 북위와 적대 관계가 된 후 요흥은 북위 공격에 직접 나섰으나 채벽 전투에서 패배했다.[4] 404년, 남량(南涼)의 독발녹단이 후진에 복속하는 척했으나 실제로는 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했다. 405년, 동진의 요구로 회하 이북의 12개 군을 반환했고, 남량으로부터 많은 공물을 받자 옛 후량 영토를 모두 주었다.

407년, 걸복건귀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상안에 머물게 하고 상서로 임명했다. 같은 해, 북위와 화평을 맺고 포로를 교환했다. 또한, 후진의 장수 유발발(혁련발발)이 독립하여 하를 건국하면서 후진은 게릴라 공격으로 피해를 입었다. 같은 해, 남연의 요구를 받아들여 정비를 돌려보냈다. 408년, 남량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하에게 올도스를 빼앗겼다.

요흥은 군사적 재능도 뛰어나 여러 차례 원정을 통해 후진의 영토를 넓혔다.[4] 주요 군사 활동은 다음과 같다:

연도사건
395년후연과 동맹, 참합피 전투에서 북위 지원
396년올도스 점령
399년동진으로부터 낙양 점령
400년서진 공격, 걸복건귀 항복
401년후량 공격, 속국화
402년북위 공격 (채벽 전투), 패배


3. 1. 내정

요흥은 승려 구마라집의 영향으로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었다. 그는 많은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결정적인 행동을 피하고, 적에게도 부드럽게 대하려 노력했다. 405년에는 구마라집에게 존칭을 하사하고 신처럼 대우했으며, 종종 신하들을 이끌고 구마라집의 설법을 들었다. 그의 요청에 따라 구마라집은 300개 이상의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했다. 요흥은 또한 많은 탑과 사찰을 건립했다. 그의 영향력으로 인해 인구의 90%가 불교 신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1]

요흥은 홍시 2년(401년)에 후량을 항복시키고, 구자 승려 구마라습을 수도 장안으로 초빙했다. 요흥은 구마라습을 국사로 받들고 각지에 사원을 건립하여 두텁게 보호했다. 요흥 자신도 열심으로 불전을 추구하여, 구마라습에게 요청하여 특히 『실상론』, 『유마경주』를 번역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요흥의 동생인 대장군 요현과 좌장군 요숭도 독실하게 구마라습을 신봉하여, 종종 설법에 참여했다고 한다. 홍시 7년(405년)에 요흥은 거대해진 불승 집단을 정비하기 위해, 구마라습의 제자 승조를 초대 대승정에 임명하여 이를 통제했다.[1]

3. 2. 외교

395년 (황초(皇初) 2년) 초, 후진은 후연(後燕)과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같은 해 후연의 모용보(慕容寶)가 북위(北魏)의 탁발규를 공격했을 때 (참합피 전투), 후진은 북위를 지원했다. 이 전투에서 후연은 크게 패배했다. 또한, 397년, 모용수(慕容垂)의 뒤를 이어 즉위한 모용보가 북위의 공격을 받았을 때, 후진은 지원하지 않았다.[4]

399년 (홍시 원년), 요흥은 동생인 요숭(姚崇)과 양불숭(楊仏嵩)을 보내 동진(東晋)으로부터 낙양을 빼앗았다.[4]

400년, 요석덕(姚碩徳)이 서진(西秦)과 싸웠다. 처음에는 서진이 요석덕의 보급로를 끊는 데 성공했지만, 요흥이 원군을 이끌고 오자 형세가 역전되어 걸복건귀(乞伏乾帰)에게 승리했고, 그 군대의 대부분이 항복하여 서진의 영토를 차례로 차지했다. 패주한 걸복건귀가 남량(南涼)의 탁발리록고(禿髮利鹿孤)에게 의탁했으므로, 서진은 일시적으로 멸망했다. 같은 해 가을, 탁발리록고에게 살해될 것을 두려워한 걸복건귀는 후진에 망명했다. 요흥은 그를 귀의후(歸義侯)로 삼고 우대했으며, 다음 해에는 부락을 돌려주어 원천진수(苑川鎮守)에 임명했다. 이곳은 원래 서진 영토였고, 걸복건귀는 사실상 반독립 상태였다.

401년, 요석덕의 건의에 따라 후량(後涼)을 공격했다. 남량의 탁발리록고는 전투를 피하기 위해 길을 열어주었고, 요석덕은 쉽게 후량의 수도 고장에 도달하여 점령했다. 남량, 북량, 서량은 모두 후진에 사신을 보내 속국이 되었다. 2개월 후, 천왕 여륭(呂隆)도 항복하여 후량은 후진의 속국이 되었다.

402년 초, 북위가 원래 서진의 몰익간(沒弈干)을 공격하면서 북위와 후진은 적대 관계가 되었다. 황제가 된 북위의 탁발규(도무제)는 정략 결혼을 통해 후진과 관계를 맺으려 했지만, 요흥은 탁발규가 이미 후연의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하고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같은 해 여름, 요흥은 황하 이북의 후진 영토를 빼앗은 북위에 대한 공격에 친정했다. 같은 해 가을, 후진의 요평(姚平)이 채벽에서 탁발규에게 포위되었다. 요흥과 요평은 저항했지만, 북위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고, 같은 해 겨울에는 요평과 그 군대가 북위에 포로로 잡혀, 요흥의 원정은 종료되었다 (채벽 전투).

404년, 남량의 독발녹단은 왕을 칭하는 것을 그만두고 후진에 복속할 것을 표명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해 있었다.

405년, 동진의 장수 유유의 요구에 따라, 동진이 환초와 싸우던 403년에 후진에 항복한 회하 이북의 12개 군을 반환했다. 같은 해, 남량의 독발녹단이 말 3000필과 양 30000마리를 공물로 바치자 감격한 요흥은, 구 후량 영토를 모두 주고 그 지역에 대한 후진의 지배를 포기했다.

407년, 걸복건귀의 세력이 너무 크다고 생각한 요흥은, 상안(장안)에 머물게 하고 상서로 임명했다. 그의 군대는 후계자 걸복치반에게 맡겼다. 같은 해, 후진과 북위가 화평을 맺고 서로의 포로를 풀어주었다. 또한, 후진의 장수 유발발(후의 혁련발발)은 삭방을 맡고 있었지만, 391년에 북위에 아버지 유위진을 살해당했기 때문에 독립하여 하를 건국했다. 유발발의 게릴라 공격은 후진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그 쇠퇴의 빛깔을 강하게 했다.

407년, 남연의 황제 모용초는 후진에 있던 처자식을 보내라고 요구했으므로, 요흥은 만약 남연이 번진이 되어 전진의 악대나 진인 1000명을 헌상한다면 좋다고 했다. 모용초는 이 요구를 받아들여 악대를 보내고 정비를 선물과 함께 돌려보냈다. 같은 해, 동진에서 독립한 초종의 후촉이 성도왕을 칭하고, 후진의 속국이 되었다.

408년, 남량이 하를 포함한 이웃 국가의 습격(양무 전투)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남량을 멸망시키기 위해 출병했다. 쉽게 멸망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 위종은 반대했지만 듣지 않고 요흥은 아들 요필, 걸복건귀, 렴성에게 싸우게 했다. 동시에, 제난을 하로 향하게 했다. 요필과 요현은 독발녹단에게 패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남량과 화평을 맺었다. 이듬해, 독발녹단은 속국으로서의 지위를 부활시키고 량왕을 칭했다. 제난의 패배는 더욱 심하여, 유발발의 계략에 빠져 전군과 함께 사로잡혔고, 올도스를 빼앗겼다(청석원 전투).

3. 3. 군사

姚興|요흥중국어은 정무에 힘쓰고, 군사적 재능도 뛰어나 후진(後秦)의 영토와 영향력을 크게 넓혔다. 그는 여러 차례 국경 지역에서 원정을 벌여 후진의 세력을 확장했다.[4]

  • 395년 (황초(皇初) 2년) 초 - 후진은 후연(後燕)과 동맹을 맺었으나, 같은 해 후연의 모용보(慕容寶)가 북위(北魏)의 탁발규(훗날 도무제)를 공격했을 때 (참합피 전투), 후진은 북위를 지원했다. 이 전투에서 후연은 대패했다. 397년, 모용수(慕容垂)의 뒤를 이어 즉위한 모용보가 북위의 공격을 받았을 때도 후진은 지원하지 않았다.
  • 396년 - 올도스를 점령했다.
  • 399년 (홍시 원년) - 동생 요숭(姚崇)과 양불숭(楊仏嵩)이 동진(東晋)으로부터 낙양을 빼앗았다.
  • 400년 - 요석덕(姚碩徳)이 서진(西秦)과 전투를 벌였다. 처음에는 서진이 요석덕의 보급로를 끊는 데 성공했지만, 요흥이 직접 원군을 이끌고 오면서 전세가 역전되어 걸복건귀(乞伏乾帰)에게 승리했다. 걸복건귀 군대의 대부분이 항복하면서 서진의 영토를 차례로 점령했다. 패주한 걸복건귀는 남량(南涼)의 탁발리록고(禿髮利鹿孤)에게 의탁하여 서진은 일시적으로 멸망했다. 같은 해 가을, 탁발리록고에게 살해될 것을 우려한 걸복건귀는 후진에 망명했다. 요흥은 그를 귀의후(歸義侯)로 우대하고, 이듬해에는 부락을 돌려주어 원천진수(苑川鎮守)에 임명했다. 이곳은 원래 서진의 영토였고, 걸복건귀는 사실상 반독립적인 상태였다.
  • 401년 - 요석덕의 건의에 따라 후량(後涼)을 공격했다. 남량의 탁발리록고는 전투를 피하고자 길을 열어주었고, 요석덕은 손쉽게 후량의 수도 고장에 도달하여 점령했다. 남량, 북량(北涼), 서량(西涼)은 모두 후진에 사신을 보내 속국이 되었다. 두 달 후, 천왕 여륭(呂隆)도 항복하여 후량은 후진의 속국이 되었다.
  • 402년 초 - 북위가 원래 서진의 몰익간(沒弈干)을 공격하면서 북위와 후진은 적대 관계가 되었다. 황제가 된 북위의 탁발규(도무제)는 정략 결혼을 통해 후진과 관계를 맺으려 했으나, 요흥은 탁발규가 이미 후연의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하고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같은 해 여름, 요흥은 황하 이북의 후진 영토를 빼앗은 북위에 대한 공격에 친정했다. 같은 해 가을, 후진의 요평(姚平)이 채벽에서 탁발규에게 포위되었다. 요흥과 요평은 저항했지만, 북위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고, 같은 해 겨울 요평과 그 군대는 북위에 포로로 잡히면서 요흥의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채벽 전투).

4.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요장(요흥 무성황제)
어머니사황후
생모손비요흥이 황제가 된 후 황태후로 추존. 사황후에게 길러졌을 가능성이 있음.
부인장황후402년 책봉
부인기황후412년 책봉
자녀요홍태자 (402년 책봉), 이후 황제
자녀요의태원공 (402년 책봉)
자녀요필광평공 (402년 책봉, 416년 자결 강요당함)
자녀요광진류공 (402년 책봉)
자녀요선공 (402년 책봉, 416년 요소에게 처형)
자녀요심공 (402년 책봉)
자녀요음남양공 (402년 책봉, 416년 요홍에게 처형)
자녀요박평원공 (402년 책봉, 유유에게 417년 처형)
자녀요질공 (402년 책봉)
자녀요규공 (402년 책봉)
자녀요유공 (402년 책봉)
자녀요국아공 (402년 책봉)
자녀요경아
자녀요황미북위 롱시공
자녀서평 공주후궁 북위 명원제의 첩


참조

[1] 서적 Early Medieval China: A Sourcebook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4-03-11
[2] 간행물 Patronage of Buddhist Buildings and Sovereignty in Medieval China: Four Cases from the Northern Wei Dynasty https://www.academia[...]
[3] 간행물 A Reexamination of the Influence of Kumārajīva's Thought on His Translation of the Vimalakīrtinirdeśa https://www.jstor.or[...] 2016
[4] 문서 『晋書』「姚興載記上」巻117
[5] 문서 『資治通鑑』「晋紀」巻108
[6] 문서 『晋書』「赫連勃勃載記」巻130
[7] 문서 『資治通鑑』「晋紀」巻112
[8] 문서 『晋書』「姚興載記下」巻118
[9] 문서 『資治通鑑』「晋紀」巻117
[10] 문서 『晋書』「列伝第六十五 - 芸術 - 鳩摩羅什伝」巻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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