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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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은 317년 서진 멸망 이후 강남에서 건국된 왕조로, 약 100년간 존속하며 11명의 황제가 통치했다. 서진의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으로 혼란해진 중국 상황 속에서 서진의 낭야왕 사마예가 건업에 정착하여 동진을 세웠으며, 화북의 유민과 강남 호족의 협력으로 유지되었다. 초기에는 왕도와 같은 유력 가문의 영향력이 컸으며, 이후 북벌 시도와 환온의 권력 장악 시도를 겪었다. 383년 비수 대전에서 승리하며 전진의 침략을 막았으나, 내부의 혼란과 유유의 등장으로 420년 멸망하고 남조 송나라가 건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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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진 - 건강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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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장성은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이 1955년 대천도 철수까지 현재의 저장성 대부분을 관할했던 행정 구역으로, 국공 내전 패배 후 타이완으로 철수하여 도서 지역을 관할하다 폐지되었으며, 청나라 절강성의 행정 구역을 계승하여 도제와 행정독찰제도를 시행했다. - 저장성의 역사 - 강남도 (당)
강남도는 당나라 시대 중국 남부의 광대한 지역을 관할했던 행정구역으로, 733년 강남동도와 강남서도로 분할되었으며, 당나라 말기에는 절도사와 관찰사들이 등장하여 후대 봉건 체제에 영향을 미쳤다.
동진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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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2. 1. 건국 배경
265년 12월, 위(삼국)로부터 선양을 받아 건국된 서진은 280년 3월, 강남의 손오를 멸망시켜 중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시조 무제가 290년 4월에 죽자, 후계자인 사마충(혜제)이 어리석었던 탓에 황족 간의 유혈 내분인 팔왕의 난이 시작되면서 서진은 대혼란에 빠졌다. 304년에는 흉노의 대수장 유연에 의해 한(후의 전조)이 하북에 건국되었고, 촉에서도 성한이 건국되는 등 이민족의 반란, 이른바 영가의 난이 심해졌다.팔왕의 난은 최종적으로 306년 11월, 동해왕 사마월에 의해 혜제가 독살되고(병사설도 있으나 독살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12월에 그의 이복동생인 회제 사마치가 제3대 황제로 옹립됨으로써 종식되었다. 이후 서진에서는 사마월이 주도하여 체제 재건을 도모하였고, 강남에는 그의 명령으로 강남군 방면 사령관·안동장군·도독양주제군사에 임명된 황족인 琅邪王 사마뢰가 화북 제일의 귀족 왕도와 함께 적은 수행원과 일부 황족을 데리고 부임하였다.
손오가 멸망한 후의 강남은 서진의 지배 아래 각 지역의 호족들이 결속되어 있었고,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이 화북에서 심해지는 가운데 비교적 평온했기에, 전화를 피해 난민들이 이동하는 피난처가 되었다. 사마뢰 부임 전에는 서진의 하급 관리인 진민이 독립의 기색을 보였으나, 강남의 호족들은 협력을 거부하고 수춘에 있던 서진군과 호응하여 307년에 진민을 토벌하고 서진에 복종하여 사회 안정에 힘썼다.
사마월은 한(전조)·성한 등 이민족 국가와 반도의 토벌, 서진 체제 재건에 힘썼으나,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독재권을 집중시키기 위해 위조 칙서를 발하여 스스로 승상을 자칭하고, 회제의 측근과 친족을 숙청하는 등 회제와 사마월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311년 1월, 양자의 대립은 정점에 달했고, 사마월은 낙양에서 항성으로 이동하여 대치하였으나, 회제는 3월에 제후들에게 사마월 토벌의 칙명을 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마월은 분노 속에 병사하였다.
사마월의 죽음으로 팔왕의 난 이후 간신히 정권을 유지하고 있던 서진은 대혼란에 빠지는 한편, 한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4월에 한의 장수 석륵은 구 사마월 배하의 10만 명의 장사를 공격하여 이를 격파하고 왕연 등 10만 명을 살해하였다. 이로써 서진군의 주력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전년에 유연이 죽은 후 우여곡절 끝에 즉위한 아들 신제 유총은 311년 6월, 일족인 유요, 장수 왕미, 석륵에게 명하여 대거 낙양을 공격하여 약탈과 폭행을 저질렀다( 영가의 난).
이 영가의 난으로 낙양은 파괴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으며, 회제는 옥새와 함께 전조의 수도인 평양으로 납치되었고, 혜제의 황후인 양씨는 유요의 아내가 되었다. 회제는 살아남았지만, 유총에 의해 노예의 옷을 입혀지고, 연회에서 술을 따르는 역할이나 잔을 씻는 일, 유총이 외출할 때는 양산을 드는 일 등 굴욕을 당했으며, 사람들로부터 진 황제의 최후라고 조롱당하고 굴욕을 겪은 후 313년 1월에 처형되었다. 이렇게 서진은 사실상 멸망하였다.
회제가 처형됨에 따라 장안에 있던 회제의 조카 사마엽(민제)는 313년 4월에 즉위하여 한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장안도 한의 유요에 의해 공격받았고, 진군은 저항하였으나 연패하였다. 또한 이 민제의 정권은 화북에 남아 있던 서진의 잔당에 의해 건국된 매우 취약한 정권으로, 지배력은 장안 주변에만 미치는 관중 지역 정권에 불과했고, 장안은 팔왕의 난으로 이미 황폐해졌기 때문에 통치력도 없었으며, 게다가 서진의 제후들도 원군으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316년에 장안이 함락되어 낙양과 마찬가지로 약탈과 살육의 현장이 되었고, 민제는 한에 항복하여 평양으로 납치되었다. 이렇게 서진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민제는 살아남았지만, 회제와 같은 대우를 받은 후 317년 12월에 한의 유총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로써 사마염의 계보였던 서진의 황통은 단절되었다.
2. 2. 동진의 건국
306년 서진 말기에, 영가의 난으로 낙양이 함락되었고, 회제가 포로가 되어 서진은 멸망하였다. 진의 낭야왕인 사마예는 건업으로 피하여 낭야의 호족 왕도(王導)의 힘을 빌려 이 땅에 동진을 건국했다. 약 100년간 11대에 걸쳐 지속되었고, 화북으로부터 피해 온 북쪽 세력과 강남 토착의 호족 세력과 협력으로 운영되었다.사마 睿(원제)는 민제로부터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민제가 항복하자 317년 3월에 진왕(晋王)을 자칭하고 건무(建武)로 개원하였다. 그리고 민제가 살해되자 318년 3월에 황제에 즉위하여(원제), 건강에 도읍을 정하고 진을 재흥시켰다(동진의 성립). 수도의 옛 이름은 건업(建業)이었으나, 민제의 휘(諱)인 “예(鄴)”와 중복되므로 건강으로 개명되었다.
원제는 강남에서의 정권 확립을 위해 왕도(王導)의 정치력을 빌리고, 또한 화북에서 망명해 온 황족과 귀족 등의 인재를 등용하게 된다. 이는 원제가 즉위 전에 명성을 얻지 못하고 강남의 민중을 복종시키지 못했던 것이 한 원인이다. 다만 원제와 왕도는 정권 확립 과정에서 장군부의 요직을 지방의 강남인이 아닌 북쪽에서 온 망명자들로 독점하는 체제를 취했기 때문에, 지방의 강남 호족들의 불만을 샀다. 강남 제일의 호족인 주씨(周氏)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강남 호족들도 결코 하나로 뭉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반란들은 진압되었다. 이후 왕도의 주도하에 동진 정권은 확고한 기반을 쌓게 된다.
이러한 가운데 충용한 군인들에 의한 북벌, 중원 회복 운동이 행해졌는데, 그 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것은 조척(祖逖)이다. 조척은 화북에 쳐들어가 후조(後趙)와 맞서 싸우며 하북(河北) 남부를 탈취하기에 이르렀으나, 당시 동진의 군사력 부족과 원제의 소극적인 정책, 그리고 내란 등으로 인해 북벌은 결국 실패하였다.
2. 3. 동진의 발전과 혼란
원제(元帝)는 화북(華北) 출신으로,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이 없었다. 왕돈(王敦)은 반란 진압으로 군권을 얻어 "왕과 말과 천하를 함께 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세력이 강대해졌다. 원제는 왕돈과 왕도(王導)를 멀리하고 왕씨 일족의 세력을 억누르려 했다. 이에 분노한 왕돈은 322년 1월, 유외(劉隗)·조협(刁協) 등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무창(武昌)에서 거병, 석두성을 함락시키고 정부군을 격파했다. 원제는 왕돈에게 사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승하했다.원제의 장남 명제 사마소(司馬紹)가 즉위했다. 명제는 용감하고 결단력 있는 인물로 명성이 높아 왕돈과의 관계가 다시 긴장되었다. 왕돈의 부하들의 난폭한 행위는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샀고, 왕도는 왕돈을 버렸다. 명제는 조약(祖約)과 소준(蘇峻) 등을 소환하여 왕돈 토벌을 명령했다. 324년 왕돈은 병사하고 왕돈 일파는 주살되었다(왕돈의 난(王敦の乱)).
명제는 황제 권력 강화를 꾀했으나, 325년 젊은 나이로 붕어했다. 명제는 어린 아들 성제 사마연(司馬衍)을 지명하고, 왕도(王導), 유량(庾亮), 온교(温嶠) 등에게 보정(輔政)을 유조(遺詔)했다. 유량은 황후의 오빠로 외척으로서 조정을 전단(專斷)하게 되었다. 유량은 엄격한 법치주의를 행하여 왕도의 온건 정책과 대립, 인심을 잃어갔다.
군인 조약(祖約)과 소준(蘇峻) 등은 유량의 시정에 불만을 품고, 327년 유량이 소준의 군권을 해제하려 하자, 소준은 조약과 사마양(司馬羕)을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켰다(소준의 난(蘇峻の乱)). 소준은 력양에서 거병하여 건강(建康)을 점령,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으나 유량을 놓치고 백성을 괴롭혀 인심을 잃었다. 유량은 온교, 도간(陶侃), 사검(郗鑒) 등과 협력하여 329년 소준을 죽이고 반란을 평정했다. 건강은 황폐해져 천도(遷都) 의견이 나왔으나 왕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339년 왕도, 340년 유량, 344년 유빙(庾冰), 345년 유익(庾翼), 346년 하충(何充) 등 유력 인물들이 잇달아 사망했다. 342년 성제가 붕어하고 강제 사마악(司馬岳)이 즉위, 344년 강제가 붕어하고 목제 사마담(司馬聃)이 즉위한다.
환온(桓温)은 345년 경주(荊州) 자사(刺史)가 되어 쇠퇴하던 성한(成漢)을 공격, 347년 멸망시켜 동진의 영토를 확장하고 권력을 강화했다. 화북의 후조(後趙)가 혼란에 빠지자 인호(殷浩) 등이 북벌을 시도했으나, 352년 요양(姚襄)에게 대패하여 유배되었고, 환온이 군권을 장악했다.
환온은 장안(長安)을 공격하고 낙양(洛陽)을 함락, 356년 개선하여 권력을 확고히 했다. 토단(土斷) 실시 등 내정 개혁에도 힘썼다. 361년 목제(穆帝)가 붕어하고 애제(哀帝) 사마비(司馬丕)가 즉위, 365년 애제가 붕어하고 폐제(廢帝) 사마익(司馬奕)이 즉위한다. 환온은 전연(前燕)에 의해 낙양이 함락되자 다시 북벌을 감행했으나 무용수(慕容垂)에게 대패, 서주(徐州)로 귀환하여 권위가 손상되었다.
환온은 371년 폐제를 폐위시키고 간문제(簡文帝) 사마욱(司馬昱)을 옹립했다. 간문제는 사안(謝安)의 반대로 젠양을 이루지 못하고 붕어, 효무제(孝武帝) 사마요(司馬曜)가 즉위했다. 환온은 373년 실의 속에 사망했다.
환온 사후, 사안(謝安)이 정권을 장악했다. 사안은 관용적인 정책과 정치적 균형으로 정권을 운영했다. 환곽(桓豁)과 환충(桓沖) 등에게 형주(荊州) 군권을 부여하여 내란을 피하고, 사현(謝玄)을 북부(北府) 총수로 등용했다.
376년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이 화북(華北)을 통일, 동진(東晋)을 위협했다. 383년 부견의 대군 공격을 사현, 유로지(劉牢之)],
2. 4. 동진의 멸망
효무제 때 전진의 남하로 위기를 맞았으나, 383년 비수대전에서 승리하여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잦은 반란으로 대장 환현이 거병하여 집권하였다. 유유가 이를 진압하고 북벌을 성공시켜 집권한 뒤, 420년 새로운 왕조 송을 건국하여 제위에 오르면서 동진은 멸망하였다.사안의 사후, 효무제의 동생 사마도자(司馬道子)가 권력을 장악했으나, 그 또한 사치와 향락에 빠져 동진은 내부로부터 부패하였다. 396년 효무제가 암살당하고 안제가 즉위하면서 사회 불안이 커졌고, 399년 손은(孫恩)의 종교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유유(劉裕)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군벌에 의해 황제가 좌우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환현은 손은군 진압을 명분으로 건강을 함락시키고 사마도자를 살해했다. 환현은 안제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초(楚)로 하였다. 그러나 유유가 거병하여 환현을 무찌르고 수도를 탈환, 안제를 복위시켜 동진을 재흥시켰다.
동진 재흥 후, 유유가 정권과 군권을 장악했다. 유유는 남연을 멸망시키고, 노순(盧循)의 반란을 진압했다. 417년에는 후진(後秦)을 멸망시켰으나, 강남의 상황을 우려하여 귀환했다.
유유는 안제(安帝)를 죽이고 공제를 옹립했다가, 420년 공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남조 송을 건국하고, 동진은 멸망했다.
3. 정치
동진은 황제의 권력이 매우 제한적이었고, 토착 세력과 서진의 망명 귀족들이 사마씨를 추대하는 형식이었다. 초대 원제(元帝) 자신이 화북(華北) 출신의 이방인이었고, 토착 세력의 협력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원제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측근을 얻고 서진과 마찬가지로 요직을 독점하고 있던 북래 귀족 출신인 왕씨(王氏), 사씨(謝氏), 환씨(桓氏) 등 유력한 종족을 배척하려 했으나, 오히려 왕씨의 반란을 일으켜 “왕과 사마 두 종족이 천하를 함께 다스린다”, “즉시 군사를 그만두어라. 나는 랑야(琅邪) 땅으로 돌아가겠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원제 사후에도 황제는 유력자에게 좌우되어 폐립을 반복했고, 때로는 그 유력자에게 수도를 빼앗기기도 했다. 이는 동진 황제에게 권력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위(魏)에서 황위를 찬탈한 사마씨의 역사도 황실 권위의 저하로 이어졌지만, 원래 동진 황족이 서진 황제의 직계가 아닌 방계라는 점도 한 원인이다.
동진의 권력 구조는 크게 황제 권력(帝権), 재상 권력(相権), 방진 권력(方鎮権, 군사 권력)으로 나뉜다. 황제 권력의 장악자는 물론 황제였지만, 재상 권력의 장악자는 반드시 승상(丞相)에 오른 자가 아니었고, 녹상서사(録尚書事) 또는 중서령(中書令)이며, 양주(揚州) 자사(刺史)에 취임한 자, 즉 중앙의 최고 권력자였다. 방진 권력의 장악자는 지방 군단의 장관이었다. 이처럼 권력 기관이 분립된 원인은 동진 왕조의 유구 정권(流寓政権)이라는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 권력 분립 속에서 왕도(王導), 우빙(庾冰), 환온(桓温), 사안(謝安) 등 역대 재상 권력 장악자들은 일족에게 방진 권력을 쥐게 함으로써 군사력을 확보하고, 문무 양면에서 약화된 황제 권력을 억제했던 것이다.
군사적으로는 국방상의 필요에 따라 수도 주변과 형주 북부에 2개의 주요 주둔지가 설치되었고, 왕돈(王敦)과 소준(蘇峻)의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계감(郗鑒)·도간(陶侃)이 각각 그곳에 군단을 배치하였다. 이 두 사람의 군대를 모체로 하여 전자를 북부(北府), 후자를 서부(西府)라 칭하였다. 이 중 북부군의 장관 즉 총사령관은 진북장군(鎮北將軍)·정북장군(征北將軍)에 임명되어 동진의 북방 방위를 담당하였고, 서부군의 총사령관은 안서장군(安西將軍)·정서장군(征西將軍) 등에 임명되어 호남·호북 등 비옥하고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며 군정(軍政)과 민정(民政) 기관으로서 큰 권력을 쥐었다. 이러한 양부(兩府) 체제는, 분열되어 혼성적인 정권이었던 동진을 두 개의 주요 군사 세력의 미묘한 균형에 의해 뒷받침되는 안정된 정권 구조로 변화시켜 나갔다.
4. 경제
한나라 시대에는 강남(장강 유역)은 중원(황하 유역)에 비해 인구가 적은 후진 지역이었다. 그러나 삼국 시대부터 화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에 의해 인구 증가가 시작되었고, 영가의 난으로 화북이 황폐해진 서진 말기에는 그 기세가 더욱 커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동진은 이들 유민들에 대해 초년(初年)을 면세로 하는 등 세제상의 우대 조치를 베푼 뒤 호적에 올리고(토단), 그들의 고향의 현과 군을 강남 각지에 재건(교립, 그러나 토단 과정에서 차츰 병합됨)하는 동시에 개간을 장려하였다. 결과적으로 원래부터 온화한 기후와 수자원이 풍부했던 것도 있어, 강남 지역은 경제적으로 화북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5. 사회
6. 문화
7. 역대 황제
묘호 | 시호 | 성명 | 재위 | 연호 | 능묘 | |
---|---|---|---|---|---|---|
1 | 중종 | 원제 (元帝) | 사마睿 (司馬睿) | 317년 - 322년 | 건무 (建武) 317년-318년 대흥 (大興) 318년-321년 영창 (永昌) 322년-323년 | 건평릉 (建平陵) |
2 | 숙조 | 명제 (明帝) | 사마소 (司馬紹) | 322년 - 325년 | 태녕 (太寧) 323년-326년 | 무평릉 (武平陵) |
3 | 현종 | 성제 (成帝) | 사마연 (司馬衍) | 325년 - 342년 | 함화 (咸和) 326년-334년 함강 (咸康) 335년-342년 | 흥평릉 (興平陵) |
4 | 강제 (康帝) | 사마악 (司馬岳) | 342년 - 344년 | 건원 (建元) 343년-344년 | 숭평릉 (崇平陵) | |
5 | 효종 | 목제 (穆帝) | 사마담 (司馬聃) | 344년 - 361년 | 영화 (永和) 345년-356년 승평 (升平) 357년-361년 | 영평릉 (永平陵) |
6 | 애제 (哀帝) | 사마비 (司馬丕) | 361년 - 365년 | 륭화 (隆和) 362년-363년 흥녕 (興寧) 363년-365년 | 안평릉 (安平陵) | |
7 | 폐제 (廢帝) (해서공 海西公) | 사마익 (司馬奕) | 365년 - 371년 | 태화 (太和) 366년-371년 | 오릉 (吳陵) | |
8 | 태종 | 간문제 (簡文帝) | 사마욱 (司馬昱) | 371년 - 372년 | 함안 (咸安) 371년-372년 | 고평릉 (高平陵) |
9 | 열종 | 효무제 (孝武帝) | 사마요 (司馬曜) | 372년 - 396년 | 녕강 (寧康) 373년-375년 태원 (太元) 376년-396년 | 륭평릉 (隆平陵) |
10 | 안제 (安帝) | 사마덕종 (司馬德宗) | 396년 - 403년 | 륭안 (隆安) 397년-401년 원흥 (元興) 402년 륭안 (隆安) 402년 대형 (大亨) 402년-403년 원흥 (元興) 403년-404년 | 휴평릉 (休平陵) | |
동진의 중단[1] | ||||||
환초 | 무도제 (武悼帝) | 환현 (桓玄) | 403년 - 404년 | (楚)건시 (建始) 403년 (楚)영시 (永始) 403년-404년 | ||
동진의 부활[2] | ||||||
10 | 안제 (복위) | 사마덕종 (司馬德宗) | 404년 - 418년 | 원흥 (元興) 403년-404년 의희 (義熙) 405년-418년 | 휴평릉 (休平陵) | |
11 | 공제 (恭帝) | 사마덕문 (司馬德文) | 418년 - 420년 | 원희 (元熙) 419년-420년 | 충평릉 (沖平陵) |
8. 계보
서진의 랑야공왕 근(琅邪恭王覲)[3] |
I중종 원제(中宗元帝) 예(睿) |
II숙조 명제(肅祖明帝) 소(紹) |
III현종 성제(顯宗成帝) 연(衍) |
VI애제(哀帝) 비(丕) |
VII폐제 해서공(廢帝海西公) 혁(奕) |
IV강제(康帝) 악(岳) |
V효종 목제(孝宗穆帝) 담(聃) |
VIII태종 간문제(太宗簡文帝) 욱(昱) |
IX열종 효무제(烈宗孝武帝) 요(曜) |
X안제 덕종(安帝德宗) |
XI공제 덕문(恭帝德文) |
참조
[1]
문서
403년 桓玄(무도제)이 안제를 폐하고 楚를 건국하여 동진 멸망
[2]
문서
404년 桓玄이 살해당하고 楚 멸망, 동진 부활
[3]
문서
司馬懿의 넷째 아들인 琅邪武王 司馬伷의 장남이자 서진 무제의 종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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