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릉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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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목릉은 조선 왕릉으로, 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의 능이 각각 다른 언덕에 조성된 동원이강릉 형태를 띤다. 1600년 의인왕후의 유릉 터로 시작하여, 선조 사후 숙릉으로 조성되었으나, 숙릉(정숙왕후)과 이름이 같아 목릉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인조 대에 현재 위치로 이장되었으며, 인목왕후의 능을 합쳐 목릉으로 불리게 되었다. 2011년 12월에는 정자각이 보물 1743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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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릉은 경기도 구리시에 위치한 조선 왕실의 능으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을 비롯하여 총 9기의 왕릉과 왕비의 묘가 있는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왕릉군이며, 여러 왕과 왕비의 능과 초장지, 개경사터, 연지 등 다양한 유적이 남아있어 조선왕조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 목릉 (조선) | |
|---|---|
| 기본 정보 | |
![]() | |
| 이름 | 동구릉(東九陵) |
| 소재 국가 | 대한민국 |
| 유형 | 사적 |
| 지정 번호 | 193 |
|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인창동 68-2) |
| 제작 시기 | 조선 1600년 |
| 지정 연월일 | 1970년 5월 26일 |
| 비고 | 조선 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 |
2. 역사
목릉은 1600년(선조 33년) 의인왕후 박씨가 승하하면서 왕비릉인 유릉(裕陵)의 터로 처음 정해졌다. 이후 1608년(선조 41년) 선조가 승하하자 건원릉 서편에 능을 조성하였으나, 능호 변경과 이장을 거쳤다. 1630년(인조 8년)에는 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면서 기존의 유릉과 합쳐져 '''목릉'''(穆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1][2]
1632년(인조 10년)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목릉 동쪽 언덕에 능을 추가로 조성하였고, 이 역시 목릉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이로써 목릉은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 세 사람의 능이 각각 다른 언덕에 자리한 독특한 형태인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 되었으며, 이는 조선왕릉 중 유일한 사례이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현재의 목릉이 완성되었다.
2. 1. 조성 과정
1600년(선조 33년) 의인왕후 박씨가 승하하자 왕비릉인 유릉(裕陵)의 터로 이곳이 정해졌다.1608년(선조 41년)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능을 건원릉의 서편에 조성하고 능의 이름을 숙릉(肅陵)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 능호는 정숙왕후의 능인 숙릉(淑陵)과 발음이 같아 곧 목릉(穆陵)으로 고쳐졌다.[1][2] 이후 1630년(인조 8년), 심명세(沈命世)가 능 자리에 물기가 차고 터가 좋지 않다고 상소를 올렸다. 이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능을 옮기고, 기존의 유릉과 새로 옮긴 목릉을 합쳐 '''목릉'''(穆陵)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1632년(인조 10년)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왕릉 동쪽 언덕에 계비의 능을 조성하고 처음에는 혜릉(惠陵)이라 불렀다. 하지만 세 능역 사이의 거리가 매우 가깝다는 이유로 이를 모두 합하여 목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처럼 세 개의 각각 다른 언덕에 능이 조성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태는 조선왕릉 중에서 목릉이 유일하다. 2011년 12월, 문화재청에서는 목릉의 정자각을 보물 제1743호로 지정하였다.
2. 2. 동원이강릉
1600년(선조 33년) 의인왕후 박씨가 승하하자 왕비릉인 유릉의 터로 정해진 곳이다.1608년(선조 41년)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능을 건원릉의 서편에 조성하고 능호는 숙릉(肅陵)이라 하였다. 그러나 능호가 숙릉 (淑陵, 정숙왕후의 능)과 음이 같아 이내 목릉으로 고쳤고[1][2], 1630년(인조 8년) 물기가 차고 터가 좋지 않다는 심명세(沈命世)의 상소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고 유릉과 목릉의 능호를 합쳐 '''목릉'''(穆陵)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1632년(인조 10년)에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계비의 능을 왕릉의 동편 언덕에 조성하고 처음에는 이를 따로이 혜릉(惠陵)이라 이름붙였다. 그러나 세 능역 간의 거리가 매우 가깝다고 하여 이를 모두 합하여 목릉이라 했다. 조선왕릉 중 세 개의 각각 다른 언덕에 조성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은 목릉이 유일하다. 2011년 12월, 문화재청에서는 목릉의 정자각을 보물 제1743호로 지정하였다.
2. 3. 정자각
2011년 12월, 문화재청에서는 목릉의 정자각을 보물 제1743호로 지정하였다.3. 구조
참조
[1]
서적
광해군일기[정초본] 4권, 광해 즉위년 5월 19일 갑진 3번째기사
[2]
서적
광해군일기[중초본] 5권, 광해 즉위년 6월 4일 기미 2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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