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즙 파동
1. 개요
무즙 파동은 1964년 서울특별시 중학교 입시 자연 과목 시험 문제의 정답 시비를 둘러싸고 발생한 사건이다. 엿 제조 과정에서 엿기름 대신 넣을 수 있는 것을 묻는 문제에 대해, 서울시 공동출제위원회는 '디아스타제'를 정답으로 발표했으나, '무즙'도 정답으로 주장하는 학부모들의 반발이 거세지면서 교육 당국의 혼란스러운 대응을 초래했다. 이 사건은 과열된 교육열을 보여주며, 중학교 무시험 전형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결국 1969년 중학교 입시가 폐지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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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건 개요
1964년 12월 7일 서울특별시 중학교 입학 시험에서 출제된 엿 문제와 관련된 논란이다. 이 사건은 엿을 만들 때 엿기름 대신 '무즙'을 넣어도 되는지를 두고 벌어졌다.
당시 서울시 공동출제위원회는 '디아스타제'만 정답으로 인정했으나, 일부 학부모들은 무즙으로도 엿을 만들 수 있다며 반발했다. 교육 당국은 초기에는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다가, 반발이 거세지자 문제 무효화, 정답 변경 등 오락가락하는 행보를 보여 혼란을 가중시켰다.
결국 이 문제는 법정 소송으로 이어졌고, 서울고등법원은 무즙도 정답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로 인해 불합격 처리되었던 학생들이 구제되었지만, 교육 당국의 미숙한 대처는 큰 비판을 받았다.
2.1. 문제 내용 및 초기 논란
1964년 12월 7일에 치러진 서울특별시 지역 전기(前期) 중학교 입시 자연 과목 18번 문제는 다음과 같았다.
"다음은 엿을 만드는 순서를 차례대로 적어 놓은 것이다.
# 찹쌀 1kg가량을 물에 담갔다가
# 이것을 쪄서 밥을 만든다.
# 이 밥에 물 3L와 엿기름 160g을 넣고 잘 섞은 다음에 60°C의 온도로 5∼6시간 둔다.
위 3.에서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은 무엇인가?"
서울시 공동출제위원회는 보기 1번 '디아스타제'가 정답이라고 발표했으나, 2번 '무즙'을 답이라고 선택한 학생들의 학부모들이 초등학교 교과서에 '침과 무즙에도 디아스타제가 들어 있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무즙도 답이라고 강력하게 반발했다. 실제로 일부 학부모들은 무즙으로 엿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 무즙도 정답이라고 주장했다.
2.2. 교육 당국의 대응
1964년 12월 8일, 서울시 공동출제위원회는 시험 다음 날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무즙'을 답으로 선택한 학생들의 학부모들이 반발하자, 12월 9일에는 해당 문제를 무효화한다고 발표했다. 이후 '디아스타제'를 정답으로 선택한 학부모들이 반발하자, 다시 원래대로 디아스타제만 정답으로 인정한다고 발표하는 등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2.3. 법적 분쟁
무즙을 정답으로 선택한 학생들의 학부모들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침과 무즙에도 디아스타제가 들어 있다는 내용이 있어 무즙도 답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일부 학부모들은 무즙으로 엿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며 무즙도 정답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 사건은 법적 분쟁으로 이어졌다. 1점 차이로 명문 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게 된 약 40여 명이 소송을 제기했다. 1965년 3월 30일, 서울고등법원 특별부는 무즙도 정답으로 봐야 하며, 이 문제로 인해 불합격된 학생들을 구제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때 구제받은 학생은 다음과 같다.
| | 구제받은 학생 수 | |
|---|---|
| 경기중학교 | 약 30명 |
| 서울중학교 | 4명 |
| 경복중학교 | 3명 |
| 경기여자중학교 | 1명 |
당시 교육위원회는 추가 입학을 반대했지만, 학부모들이 다시 시위를 벌였고 판결이 나온 지 약 1달 뒤인 1965년 5월 12일에 전입학 형식으로 등교할 수 있게 되었다.
3. 사건의 영향
이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과열된 교육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으며, 중학교 무시험 전형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4년 12월 22일, 서울특별시교육위원회(시교위)에 낙방생 학부모 20여 명이 난입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12월 21일 김원규 교육감이 '무즙으로도 엿을 만들 수 있다면 자연 18번의 복수정답을 인정하고, 탈락자들을 구제하겠다'고 약속했다고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학부모들은 "이 엿을 먹어보라"는 구호를 외치며 실제로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 오는 등 시교위와 김 교육감의 무책임한 자세를 비난했다. 이 시위는 12월 23일까지 이어졌으며, 학부모 두 명이 졸도하고 김원규 교육감이 휴가를 내고 수일간 출근하지 못하는 등 혼란이 빚어졌다.
이후 창칼 파동 등 중학교 입시에 대한 문제가 계속해서 드러나자, 결국 1969년부터 중학교 입시가 폐지되었다.
3.1. 중학교 입시 폐지
이 사건은 지나칠 정도로 과열된 대한민국의 교육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 무렵부터 중학교 무시험 전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뒤를 이어 창칼 파동 등 중학교 입시에 대한 문제가 계속 드러나자 1969년부터 중학교 입시가 철폐되었다.
3.2. 사회적 논란
1964년 12월 22일, 서울특별시교육위원회(이하 시교위)에 낙방생 학부모 20여 명이 난입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이 시위는 23일까지 이어졌으며, 학부모 두 명이 졸도하고 김원규(金元圭, 재직 1964년~1965년) 당시 교육감이 휴가를 내고 수일간 출근하지 못하는 등 혼란이 빚어졌다.
학부형들은 12월 21일 오후에 김 교육감이 '무즙으로도 엿을 만들 수 있다면 자연 18번의 복수정답을 인정하고, 탈락자들을 구제하겠다'고 약속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 엿을 먹어보라는 구호와 함께 실제로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 오는 등 시교위와 김 교육감의 무책임한 자세를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