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백상
1. 개요
민백상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74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동래부사, 경상도 관찰사, 대사성 등을 역임했다. 신임사화 당시 소론에 대한 중벌을 주장하다 유배되었으나 석방 후 대사헌,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1761년 장헌세자 평양원유사건으로 인해 영의정 이천보, 좌의정 이후와 함께 자살했으나, 실록에는 병사로 기록되어 논란이 있었다. 고종 대에 자살로 결론 났다.
-
조선의 경상도관찰사 -
방유령
방유령은 1460년에 태어나 1529년에 사망한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김종직의 문인이며 갑자사화로 파직되었으나 복귀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훈구파이면서 사림파를 두둔하는 등 복잡한 정치적 행보를 보였다. -
조선의 경상도관찰사 -
김성일 (1538년)
김성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이황의 제자이며, 조선통신사 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후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하여 임진왜란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고,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병사, 경상도 초유사,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했다. -
1761년 사망 -
새뮤얼 리처드슨
새뮤얼 리처드슨은 18세기 영국의 소설가이자 인쇄업자로, 서간체 소설의 선구자이며, 『파멜라, 또는 미덕의 보상』, 『클라리사』, 『찰스 그랜디슨 경의 역사』 등의 작품으로 18세기 영국 소설 발전에 기여했고, 도덕적 가치와 여성의 지위에 대한 통찰, 섬세한 심리묘사로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 -
1761년 사망 -
신후담
신후담은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성리학자로 이익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서학을 비판적으로 연구했고, 천주교 교리를 비판한 《서학변》을 저술했으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쓰며 남인 공서파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며 조선 후기 학문 발전에 기여했다. -
1711년 출생 -
라우라 바시
라우라 바시는 1711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볼로냐 대학교 최초의 여성 과학 교수로 임명되어 뉴턴 역학, 실험 물리학 등을 연구했으며, 교황의 후원을 받고 볼테르 등과 교류하다가 1778년 사망 후 금성 분화구 등으로 기념되었다. -
1711년 출생 -
도쿠가와 이에시게
도쿠가와 이에시게는 에도 막부 제9대 쇼군으로, 건강 문제와 언어 장애에도 불구하고 쇼군직을 계승하여 일부 경제 정책을 추진했으나 사회 불안을 겪었고, 측근을 중용했으며, 아들에게 쇼군직을 양위한 후 사망하여 그의 능력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2. 생애
1740년 증광문과에 급제, 1745년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왕래했다. 그 뒤 동래부사, 경상도관찰사, 대사성 등을 지냈다. 신임사화 때 아버지에게 신원(伸寃)을 입힌 소론에 대해 중벌을 주장하다가 역으로 탄핵을 받고 경상남도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1751년 석방되었다. 이후 대사헌,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으로 특진했다.
1761년 장헌세자 평양원유사건이 터지자, 당시 노론 대신이었던 민백상은 이에 대해 책임을 지고 영의정 이천보, 좌의정 이후와 함께 동반자살했다. 그러나, 실록에는 병사로 기록돼 있어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다. 고종 36년 사도세자에 대한 장조 추존문제로 전면재조사를 벌인 결과 자살설이 확정돼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2.1. 초기 생애 및 관직 생활
1740년 증광문과에 급제, 1745년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왕래했다. 그 뒤 동래부사, 경상도관찰사, 대사성 등을 지냈다. 신임사화 때 아버지에게 신원(伸寃)을 입힌 소론에 대해 중벌을 주장하다가 역으로 탄핵을 받고 경상남도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1751년 석방되었다. 이후 대사헌,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으로 특진했다.
2.2. 신임사화와 유배
1740년 증광문과에 급제, 1745년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왕래했다. 그 뒤 동래부사, 경상도관찰사, 대사성 등을 지냈다. 신임사화 때 아버지에게 신원(伸寃)을 입힌 소론에 대해 중벌을 주장하다가 역으로 탄핵을 받고 경상남도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1751년 석방되었다. 이후 대사헌,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으로 특진했다.
2.3. 복귀와 정치 활동
1740년 증광문과에 급제, 1745년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왕래했다. 그 뒤 동래부사, 경상도관찰사, 대사성 등을 지냈다. 신임사화 때 아버지에게 신원(伸寃)을 입힌 소론에 대해 중벌을 주장하다가 역으로 탄핵을 받고 경상남도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1751년 석방되었다. 이후 대사헌,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으로 특진했다.
1761년 장헌세자 평양원유사건이 터지자 이에 대해 책임지고 영의정 이천보, 좌의정 이후와 함께 동반자살했다. 그러나, 실록에는 병사로 기록돼 있어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다. 고종 36년 사도세자에 대한 장조 추존문제로 전면재조사를 벌인 결과 자살설이 확정돼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2.4. 장헌세자 사건과 죽음
1740년 증광문과에 급제, 1745년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왕래했다. 그 뒤 동래부사, 경상도관찰사, 대사성 등을 지냈다. 신임사화 때 아버지에게 신원(伸寃)을 입힌 소론에 대해 중벌을 주장하다가 역으로 탄핵을 받고 경상남도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1751년 석방되었다. 이후 대사헌,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으로 특진했다.
1761년 장헌세자 평양원유사건이 터지자 이에 대해 책임지고 영의정 이천보, 좌의정 이후와 함께 동반자살했다. 그러나, 실록에는 병사로 기록돼 있어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다. 고종 36년 사도세자에 대한 장조 추존문제로 전면재조사를 벌인 결과 자살설이 확정돼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3. 가족 관계
민진원(閔鎭遠, 1664 ~ 1736)의 손자이자, 민형수(閔亨洙)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용인 이씨로, 이세항의 딸이다. 동생은 민백흥(閔百興, 1714 ~ 1774)이다. 부인은 우봉 이씨로 이구의 딸이며, 슬하에 아들 민홍섭(閔弘燮)을 두었다. 민홍섭은 손자 민치삼(閔致三)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