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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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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밀양읍성은 경상남도 밀양시에 있었던 조선 시대 읍성이다. 조선 성종 10년(1479)에 축조되었으며, 임진왜란 이전 시기에 만들어진 읍성 중 하나이다. 읍성은 약 1.4km의 둘레와 약 2.7m의 높이로, 우물 4개와 연못 1개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02년 경부선 철도 부설 공사로 인해 성문과 성벽이 헐려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현재는 성문의 위치와 일부 성곽만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 읍성이 철거되면서 민족 문화 유산이 훼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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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읍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밀양읍성 근경
밀양읍성 근경
유형경상남도의 기념물
지정 번호167
지정일1997년 12월 31일
주소경상남도 밀양시 영남루1길 16-11, 3필 (내일동)
면적75,746m2

2. 역사

읍성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읍성은 지방의 관청과 민가를 보호하기 위해 그 주변을 둘러쌌으며,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고려 말과 조선 초에 활발히 쌓았다. 조선 왕조 마지막까지 존속되었으나, 1910년 한일병합과 함께 일제가 읍성 철거령을 내리면서 전국의 읍성 대부분이 헐렸다.[1] 밀양읍성은 현재 아동산과 아북산을 잇는 산등성이에 성곽 일부만 남아 있다.

2. 1. 축성 및 조선시대

경상남도 밀양시 밀양읍성은 조선 성종 10년(1479)에 축조되었는데, 이는 다른 읍성들이 임진왜란 직전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에 비하면 100년 이상 빠른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밀양읍성은 둘레가 4,670척, 높이 9척이며 성 안에 우물 4개와 연못 1곳이 있었다고 한다.[1][2]

1590년(선조 23년)에 전국의 성곽을 정비하면서 밀양부사 신잡(1541~1609)이 성 둘레에 못을 깊이 파고 물을 끌어들여 성을 방어하려 하였고, 이후 연못 1개와 우물 8개를 추가로 만들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함락되어 성이 무너졌으나, 전쟁이 끝난 뒤인 1606년(선조 39년)에 다시 복원하였다.[1]

밀양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읍성은 성 바깥쪽이 절벽을 이루며, 절벽 아래로 남천강이 흘러 방어 시설 역할을 하였다. 이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지금도 남천강을 해천이라고 부른다.[1]

이 성과 성 내부에는 4대문, 아사, 동헌, 객사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되었고, 현재는 영남루 등의 건물과 일부 유적만 남아 있다.[2]

2. 2. 임진왜란과 훼손

밀양읍성은 조선 성종 10년(1479)에 축조되었는데, 다른 읍성들이 임진왜란 직전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에 비하면 100년 이상 일찍 만들어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함락되어 크게 소실되었고, 전쟁이 끝난 뒤인 1606년(선조 39년)에 다시 복원하였다.[1] 4대문, 아사, 동헌, 객사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되었고, 지금은 영남루 등의 건물과 일부 흔적만 남아 있다.[2]

2. 3. 일제강점기와 근대화

1902년 경부선 철도 부설 공사 때 성문과 성벽을 모두 헐어 철도 부설 공사에 이용하면서, 성문의 위치와 일부 성곽만 남게 되었다.[1] 헐린 성벽의 석재는 1934년 밀양교 가설과 1950년 한국전쟁 때 진지 구축을 위해 사용되었다.[1] 1910년 한일합병과 함께 일본이 읍성 철거령을 내리면서 전국의 읍성 대부분이 헐렸다.[1]

3. 구조

밀양읍성은 조선 성종 10년(1479)에 축조되었는데, 다른 읍성들이 임진왜란 직전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에 비하면 100년 이상 일찍 만들어진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밀양읍성은 둘레가 4,670척, 높이 9척이며 성 안에 우물이 4개, 연못이 1곳 있었다고 한다.[1]

1902년 경부선 철도부설 공사 때 성문과 성벽을 모두 헐어 철도부설공사에 이용하였고, 지금은 성문의 위치와 일부 성곽만 남아 있다. 아동산과 아북산을 잇는 산등성이에는 성곽이 남아 있다.[1] 밀양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읍성은 성 바깥이 절벽을 이루며, 절벽 아래로 남천강이 흘러 방어시설을 대신하였다. 이곳 사람들은 지금도 남천강을 해천이라고 부른다. 1902년 성이 헐리고 난 뒤 그 석재는 1934년 밀양교 가설과 1950년 한국전쟁 때 진지를 쌓기 위해 옮겨갔다고 한다.[1]

이 성과 성내에는 4대문·아사·동헌·객사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많이 소실되었고 지금은 영남루 등의 건물과 일부 유구만 남아 있다.[2]

4. 현재 상태

1902년 경부선 철도 부설 공사 때 성문과 성벽을 모두 헐어 철도 부설 공사에 사용하였다. 현재는 성문의 위치와 일부 성곽만 남아 있으며, 아동산과 아북산을 잇는 산등성이에는 성곽이 남아 있다.[1]

밀양읍성은 성 바깥이 절벽이고 절벽 아래로 남천강이 흘러 방어 시설을 대신하였다. 이곳 사람들은 지금도 남천강을 해천이라고 부른다. 1902년 성이 헐린 뒤 그 석재는 1934년 밀양교 가설과 1950년 한국전쟁 때 진지 구축을 위해 사용되었다.[1]

5. 현지 안내문

읍성은 지방의 관청과 민가를 보호하기 위해 그 주변을 둘러싼 성이다. 읍성은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가장 활발히 쌓았다. 조선 왕조 마지막까지 존속되었으나, 1910년 한일합병과 함께 일본이 읍성 철거령을 내리면서 전국의 읍성 대부분이 헐렸다. 밀양읍성은 조선 초기인 1479년(성종 10)에 축조되었으나, 1902년에 경부선 철도를 건설하면서 파괴되었다. 동북쪽으로 자연 지형을 이용하고 서남쪽의 평지에 성벽을 쌓은 밀양읍성의 규모는 길이 2.1km, 높이 27m였다고 하며, 성안에는 동헌과 객사를 비롯한 많은 관아와 연못 1개, 우물 4개가 있었다고 한다. 1590년(선조 23) 밀양부사 신잡(1541~1609)이 성 둘레에 못을 깊이 파고 물을 끌어들여 물을 이용해 성을 지키려 하였고, 뒤에 다시 연못 1개와 우물 8개를 만들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함락되어 성이 무너진 것을 전쟁이 끝난 뒤인 1606년(선조 39)에 다시 복원하였다.[1]

밀양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읍성은 성 바깥이 절벽을 이루며, 절벽 아래로 남천강이 흘러 방어시설을 대신하였다. 이곳 사람들은 지금도 남천강을 해천이라고 부른다. 1902년 성이 헐리고 난 뒤 그 석재는 1934년 밀양교 가설과 1950년 한국전쟁 때 진지를 쌓기 위해 옮겨갔다.[1]

밀양읍성은 조선 성종 10년(1479년)에 쌓았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석축의 길이 4,670자, 높이 9자, 성내에 우물이 넷, 못이 하나"라는 기록이 있다.[2]

이 성과 성내에는 4대문·아사·동헌·객사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많이 소실되었고 지금은 영남루 등의 건물과 일부 유구만 남아 있다.[2]

참조

[1] 문서 현지 안내문1 인용
[2] 문서 현지 안내문2 인용
[3] 간행물 梁山 架山里遺蹟 Ⅴ. 고찰 https://www.cha.go.k[...] 경상남도 양산시 2015-09-01
[3] 간행물 양산석산지구 文化遺蹟 地表調査 報告書 http://www.feaci.or.[...] 대한주택공사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2006-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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