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스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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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라스 작전은 2000년 9월 10일, 시에라리온 내전 중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에게 납치된 영국군 및 시에라리온군을 구출하기 위해 영국군이 수행한 군사 작전이다. 영국은 2000년 5월부터 시에라리온에 군대를 파견하여 자국민 및 외국인 소개 작전을 수행하고, 시에라리온 육군 훈련을 담당했다. 2000년 8월, 왕립 아일랜드 연대 순찰대가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에게 납치되자, 영국 정부는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특수공중정찰대(SAS)와 제1대대, 낙하산 연대(1 PARA)를 투입하여 바라스 작전을 개시했다. 작전 결과, 인질들은 구출되었으나 영국군 1명이 사망했으며, 이 작전은 영국군의 시에라리온 개입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키고, 시에라리온 내전 종식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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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라스 작전 | |
|---|---|
| 작전 개요 | |
| 분쟁 | 시애라리온 내전 |
| 장소 | 시에라리온 오크라 힐스 |
| 날짜 | 2000년 9월 10일 |
| 결과 | 영국군 승리, 모든 인질 구출됨 |
| 교전 세력 | |
| 교전국 2 |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 |
| 지휘관 | |
| 지휘관 1 | 존 홈즈 |
| 지휘관 2 | 포데이 캘리 |
| 병력 | |
| 병력 1 | 약 150명 |
| 병력 2 | 약 100명 - 200명 |
| 사상자 | |
| 사상자 1 | 1명 사망, 12명 부상 |
| 사상자 2 | 25명 이상 사망, 18명 이상 포로 |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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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시에라리온은 영국 식민지였으며, 1991년부터 내전이 발발했다. 2000년 5월, 영국군은 팔리서 작전으로 시에라리온에 배치되어 비전투원 소개 작전을 수행하고 시에라리온 육군을 훈련하는 임무를 맡았다.[7]
특수공중정찰대(SAS)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데이비드 스털링 대령이 창설한 부대로, 소규모 팀을 이용해 적진에 침투하여 비행장과 보급로를 공격했다.[8] 제1대대, 낙하산 연대(1 PARA)는 낙하산 및 공중 투입을 전문으로 하는 영국 육군 보병 부대로, SAS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9]
2. 1. 시에라리온 내전과 영국의 개입
시에라리온은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전 영국 식민지로, 1991년부터 내전이 발발했다. 웨스트 사이드 보이스는 내전에 참여한 민병대로, 처음에는 반군인 혁명적 통합 전선(RUF)에 충성했으나, 나중에는 정부를 위해 싸웠다.[6] 하지만 이들은 재편된 시에라리온 육군에 통합되지 않고 로켈 크릭 양쪽에 있는 버려진 마을 마그베니와 Gberi Bana에서 산적처럼 활동했다.[2][6][7]2000년 5월, 영국은 팔리서 작전을 통해 시에라리온에 군대를 파견하여 자국민 및 외국인 소개 작전을 수행하고, 시에라리온 육군 훈련을 담당했다.[7]
2. 2. 영국군 부대
특수공중정찰대(SAS)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창설된 영국 육군의 특수부대이다. 이들은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비행장과 보급로를 공격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소규모 팀으로도 높은 효율을 발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SAS는 1980년 님로드 작전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15]제1대대, 낙하산 연대(1 PARA)는 영국 육군의 보병 부대로, 낙하산 및 공중 투입을 전문으로 한다. 이들은 SAS와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16] 바라스 작전 당시 1 PARA 본부는 특수 부대를 지원할 강화 중대를 편성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이에 따라 자메이카에서 훈련 중이던 A 중대가 선발되었다.[17][18]
A 중대에는 갓 훈련을 마친 신병들이 많았지만, 중대장 매슈 로우 소령은 경험 많은 병사들로 교체하면 중대의 결속력과 사기가 저해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대신 신호병, 저격수, 중기관총 부대, 박격포 부대 등 1 PARA 내 다른 부대의 특수 병력들이 A 중대에 배속되어 중대 규모를 보강했다.[17][18] 또한, 서사이드 보이즈의 수적 우세와 작전의 어려움을 고려하여 추가 화력이 포함되었다.[19]
A 중대는 8월 31일 글로스터셔주 사우스 서니로 이동하여 작전 브리핑을 받았다.[17] 작전 보안을 위해 모든 휴대전화가 압수되었고, 작전 실행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로우 소령과 기획팀은 9월 3일 세네갈 다카르로 이동하여 계획을 구체화하고 SAS 순찰대가 수집한 정보를 검토했다.[17]
영국 정부는 시에라리온에 병력을 배치하는 것이 서사이드 보이즈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비상시 영국에서 공격을 개시하는 데 14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어, 대응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나머지 중대도 다카르로 이동했다.[21]
비상시 공격 개시에 대한 정치적 권한은 프리타운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 앨런 존스에게, 군사적 결정은 시에라리온 주둔 영국군 사령관 데이비드 리차즈 준장에게 위임되었다.[19]
3. 왕립 아일랜드 순찰대 피랍 사건
2000년 8월 25일, 앨런 마셜 소령이 이끄는 왕립 아일랜드 연대(1 R IRISH) 소속 11명과 시에라리온 육군 소속 무사 방구라 중위로 구성된 순찰대가 워털루 기지를 출발하여 마시아카에 주둔한 시에라리온 유엔평화유지활동(UNAMSIL) 요르단 평화유지군을 방문했다.[10] 이들은 점심 식사 중,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가 무장 해제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지로 복귀하는 길에 현장 조사를 하기로 결정했다.[10]
순찰대는 주요 도로에서 벗어나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가 주둔하던 마그베니(Magbeni) 마을로 이어지는 비포장 도로로 들어섰다. 순찰대는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의 대규모 무리에게 포위되었고, 이들은 베드포드 트럭에 장착된 대공포를 이용하여 순찰대의 이동 경로를 차단했다. 마셜 소령은 차량에서 내린 후 소총을 빼앗으려는 시도에 저항하다 구타당했다. 그와 순찰대원들은 로켈 크릭(Rokel Creek) 강둑에서 카누에 강제로 태워져 강 건너편 마을인 게베리 바나(Gberi Bana)로 이동되었다.[10]
4. 협상 과정
영국 정부는 시에라리온 정부의 승인을 받아 영국군이 직접 인질 석방 협상을 진행하도록 했다. 1 R IRISH의 지휘관인 사이먼 포드햄 중령이 협상을 주도했으며, 런던경찰청 인질 협상 전문가의 지원을 받았다.[13]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는 협상가들에게 마그베니 마을 이상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고, 자칭 '준장' 포데이 칼레이가 협상 대표로 나섰다. 8월 29일, 포드햄 중령은 인질 생존 증거를 요구했고, 칼레이는 마셜 소령과 에드 플래허티 대위를 회의에 데려왔다. 플래허티 대위는 포드햄 중령에게 게베리 바나의 배치와 인질 구금 건물을 설명한 개략도를 은밀히 전달했다.[13]
협상 중,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 일부의 친척들이 갱단의 캠프로 와서 영국 병사들을 석방해 달라고 요청했다. 갱단은 병사들에게 적대감이 없다고 응답했지만, 그들을 억류함으로써 그들의 요구 사항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했다.[15] 8월 31일, 위성 전화와 의료품을 대가로 인질 5명이 석방되었다.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는 나머지 인질 석방 조건으로 로메 평화 협정 재협상, 시에라리온 당국에 구금된 포로 석방 등 여러가지를 요구했다.[15]
5. 협상 결렬과 군사 작전 결정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는 마리화나와 코카인을 사용해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고, 이들의 행동은 불규칙적이었다.[13] 석방된 5명의 병사들은 칼레이가 이들을 모의 처형하며 위협했던 사건을 설명했다. 언론은 갱단의 마약 사용이 협상에 문제를 일으킨다고 보도했다.[13]
협상 과정에서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 일부 친척들이 갱단의 캠프를 방문해 영국 병사들의 석방을 요청했다. 갱단은 병사들에게 적대감은 없지만, 이들을 억류함으로써 자신들의 요구에 대한 관심을 끌어냈다고 밝혔다. 이들의 요구에는 기소 면책, 영국으로의 안전 통행(대학 과정 수강 목적), 개편된 시에라리온 군대 편입 등이 포함되었다.[15]
9월 9일, '캄보디아 대령'은 2주 넘게 억류된 로열 아일랜드 순찰대원 6명이 시에라리온에 새 정부가 수립된 후에야 석방될 것이라고 말했다. 협상가들은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의 비현실적인 요구가 시간 끌기 전술이라고 판단했다. 한편,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 기지 근처에 있던 SAS팀은 4일간 대기했지만 포로로 잡힌 병사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가 병사들을 살해하거나 구출하기 어려운 곳으로 이동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영국 정부는 군사 작전을 결정했다.[32]
6. 바라스 작전 (Operation Barras)
2000년 6월, 시에라리온에 주둔하던 아일랜드 왕립연대 소속 영국군 병사 11명과 시에라리온 군인 1명이 오콜라 힐스에서 순찰 중 무장 테러리스트 집단에 납치되었다. 이들은 정글 속 테러리스트 은신처에 감금되었고, 시에라리온 군인 무사 방글라 중위는 고문을 당했다.
테러리스트들은 사면과 동료 석방을 요구했고, 영국군은 협상을 통해 위성전화와 교환으로 5명의 인질을 석방시켰다. 그동안 SAS 정찰팀과 SBS가 현장에 투입되어 정보를 수집했다.
2000년 9월 10일 새벽, 헬리콥터 2대를 이용한 기습 작전이 개시되었다. SAS와 공수여단 제1대대가 강하하여 총격전 끝에 은신처를 제압하고 병사 전원을 구출했다. 테러리스트 측 사망자는 25명에서 50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영국군 사망자는 헬리콥터에서 강하 도중 총격을 받은 1명뿐이었다.
6. 1. 작전 계획

포로로 잡힌 병사들을 구출하기 위한 군사 작전 계획이 진행되면서,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의 수와 그들이 게베리 바나와 마그베니 마을 두 곳에 분산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특수 부대만으로는 작전을 수행할 수 없다는 점이 명확해졌다.[16] 따라서 제1 공수 연대(1 PARA) 본부는 특수 부대를 지원할 강화 중대를 편성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연대장은 자메이카에서 훈련 중이던 A 중대(매슈 로우 소령 지휘)를 선발했다. 당시는 영국군이 시에라리온에 처음 배치된 시기였다.[17][18]
A 중대 대원 중 상당수는 2주 전에 기초 훈련을 마친 훈련병이었다. 로우 소령은 그들을 더 경험 많은 병사들로 교체하면 중대의 결속력과 사기를 저해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지만, 신호병, 저격수, 중기관총 부대, 박격포 부대 등 1 PARA 다른 곳의 여러 특수 부대가 A 중대에 배속되어 중대 규모를 필요한 수준으로 끌어올렸다.[17][18] 작전이 어려움에 직면할 경우 추가 자원을 즉시 확보할 수 없다는 점과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가 수적으로 우세하다는 점을 고려하여 추가 화력을 포함시켜 계획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선택지를 극대화했다.[19]
1989년 8월 31일, 중대는 "기동 준비" 훈련을 한다는 명분하에 글로스터셔주 사우스 서니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작전 보안을 위해 모든 휴대전화를 압수한 후에야, 전 중대에 계획 중인 작전에 대한 브리핑이 이루어졌다. 작전 실행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로우 소령과 그의 기획팀은 9월 3일 세네갈 다카르로 이동하여 계획을 계속하고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 진영 근처에서 작전 중인 SAS 순찰대가 수집한 정보를 연구했다.[17]
영국 정부는 시에라리온에 병력을 배치하는 것이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로 하여금 포로로 잡힌 병사들에게 불리한 반응을 보이게 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응급 상황 발생 시 영국에서 공격을 개시하는 데 14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계산하여, 대응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나머지 중대도 다카르로 이동했다.[21]
대응 시간을 더 단축하기 위해, 비상시 공격 개시에 대한 정치적 권한은 프리타운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인 앨런 존스에게 위임되었고, 군사적 결정은 시에라리온 주둔 영국군 사령관인 데이비드 리차즈 준장에게 위임되었다.[19] 이틀 후, SAS 관측팀 2개(로켈 만 양쪽에 하나씩)가 영국 해군 특수부대인 특수보트부대(SBS)가 운영하는 돌격정을 이용하여 마을 근처에 투입되었다. 그들은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무기 세부 정보와 같은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헬리콥터가 착륙할 수 있는 적절한 장소를 확인했다.[17][30]
계획이 진행됨에 따라, 강화된 A 중대는 로켈 만 남쪽 마그베니 마을 공격을 계획하는 임무를 맡았고, SAS는 북쪽 강둑에 있는 게베리 바나를 공격하여 포로로 잡힌 왕립 아일랜드 연대 병사들을 구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마그베니 공격은 SAS 작전을 방해할 수 있는 마을의 무기를 무력화하고, 마그베니의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의 주의를 딴 곳으로 돌려 그들이 로켈 만을 건너 게베리 바나 작전을 방해하는 것을 막고,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를 제압하여 군사력을 파괴하고, 왕립 아일랜드 연대 순찰대의 차량을 회수하는 등 여러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18][22]
낙하산부대원과 특수부대원 모두를 위한 여러 가지 투입 방법이 고려되었는데, 4륜 구동 차량을 사용하는 육로 접근과 SAS 관측팀이 그들의 위치에 도착하는 데 사용한 방법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는 수로 투입이 포함되었다. 기획팀은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의 마을 진입로에 있는 검문소 때문에 육로 접근으로는 병력이 탐지되지 않고 마을에 진입할 수 없다는 점과, 강의 모래톱과 강한 조류 때문에 로켈 만에서 다수의 병력을 투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결론지었다. 따라서 작전 팔리서 시작부터 시에라리온에 있던 제7 비행대대 소속의 3대의 영국 공군 특수부대 치누크 헬리콥터에서 병력 투입이 이루어지기로 결정되었다.[23]
6. 2. 시에라리온으로의 전개
영국 언론은 1 공수여단의 경계 태세 강화에 주목하며, 작전 개시 가능성을 보도했다. 증강된 A 중대(약 130명)는 여러 부대로 나뉘어 시에라리온에 도착, 프리타운 남쪽 약 48.28km에 위치한 해스팅스 마을에 기지를 구축한 SAS에 합류했다.[24] 공수부대원들은 해스팅스에서 실사격 훈련과 마그베니 축소 모형을 이용한 리허설을 통해 작전에 대비했다.[25][26] 이러한 훈련은 병사들의 열대 더위 적응을 도왔고, 지휘관들은 열사병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물, 야전용 드레싱, 무기, 탄약만 휴대하기로 결정했다.[26] 방탄복 착용 여부를 두고 논쟁이 있었으나, 이른 아침의 서늘한 기온이 무게 영향을 완화할 것이라는 판단 하에 착용 명령이 내려졌다.[26]다음 날, 특수부대 사령부(DSF) 사령관 존 홀름스 준장이 22 SAS 대대장, D 중대장, 왕립 공군 전술통신부대 소속 3명을 포함한 본부 직원들과 함께 프리타운에 도착, 시뷰 하우스에 본부를 설치했다.[28] 그의 참모들은 로켈 크릭 양쪽의 SAS 관측팀, 런던의 COBR과 연락을 유지했다.[28][29]
6. 3. 작전 실행 (2000년 9월 10일)
작전은 9월 10일 일출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협상을 이끌었던 포드햄은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에게 전화를 걸어 포로로 잡힌 병사들이 살아 있음을 확인했고, 최종 명령은 9월 9일 저녁에 발령되었다.[32] 공격은 두 마을에 동시에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로열 아일랜드 대원들이 억류된 게베리 바나(Gberi Bana)는 SAS가, 마그베니(Magbeni)는 SAS팀과 공수부대가 공격할 예정이었다.[33]게베리 바나 (Gberi Bana) 공격 (SAS):작전 부대는 서사이드 보이즈 캠프에서 약 15분 거리의 해스팅스를 06시 15분경 출발했다.[34] SAS 정찰팀이 제 위치에 도착하자, 헬리콥터들은 로켈 크릭을 따라 이동했고, 치누크 헬리콥터들은 매우 저공 비행하여 다운워시로 여러 마을의 오두막 지붕, 특히 로열 아일랜드 연대가 억류되어 있던 건물의 아연 지붕을 날려 버렸다.[33]
헬리콥터가 접근하자, Gberi Bana에 있던 SAS 정찰팀은 인질 근처의 서사이드 보이즈와 교전하여 지역이 확보되기 전에 갱단원들이 인질들을 살해하려는 시도를 막았다.[33] 도착한 치누크 헬리콥터들은 전면 도어에 장착된 M134 미니건으로 사격을 개시했고, 두 대의 링스 공격 헬리콥터는 마을을 급강하하며 폭격하여 착륙 지점을 최대한 안전하게 만들고, SAS 정찰팀이 확인한 중화기를 파괴했다.[35]
공격 헬리콥터의 첫 번째 휩쓸기 이후, 두 대의 치누크 헬리콥터가 SAS 대원들을 Gberi Bana로 수송했다. 병사들은 고속 하강하여 마을에 진입했고 즉시 서사이드 보이즈의 사격을 받았다. 교전 초기에 영국 작전은 첫 번째 사상자를 냈다. 브래들리 티니언(Bradley Tinnion) 병장의 측면에 총탄이 관통하여 중상을 입었다. 그는 헬리콥터로 옮겨져 RFA ''Sir Percivale''함에 탑승한 의료팀으로 후송되었으나, 함상에서 집중적인 소생술에도 불구하고 사망했다.[35]
SAS는 포로로 잡힌 영국 병사들의 "영국군, 영국군!"이라는 외침을 듣고 그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하지만 방구라(Bangura)는 따로 억류되어 있어 찾기가 더 어려웠다. 그는 서사이드 보이즈가 화장실로 사용했던 더러운 야외 구덩이에서 발견되었다.[36] 그는 감금 기간 동안 굶주림과 구타를 당했기 때문에 헬리콥터로 옮겨져야 했다. SAS 도착 후 2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방구라를 포함한 로열 아일랜드 순찰대의 나머지 대원들은 모두 그 지역에서 후송되었다.[35]
SAS 작전이 종료됨에 따라, 치누크 헬리콥터는 Gberi Bana에서 포로들과 시신들을 유엔 시에라리온 임무(UNAMSIL)의 요르단 대대(battalion)로 수송했다. 그곳에서 시신들은 신원 확인 후 매장되었고, 서사이드 보이즈로 확인된 포로들은 시에라리온 경찰에 인계되었다.[37][38] 바라스 작전은 또한 서사이드 보이즈에 의해 감금되었던 22명의 시에라리온 민간인들을 해방시켰다. 남성들은 하인으로 이용되었고 서사이드 보이즈에 의해 조악한 군사 훈련을 받았는데, 이는 추후 전투에 강제로 참여시키려는 의도였을 가능성이 있다. 여성들은 성 노예로 이용되었다. 작전 계획자들은 서사이드 보이즈가 민간인들 사이에 숨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했기 때문에, 민간인들 또한 제압되어 요르단 평화유지군 기지로 옮겨져 신원 확인을 받았다. 23번째 민간인은 교전 중 총격으로 사망했다.[36][39]
마그베니 (Magbeni) 공격 (SAS, 1 PARA):

세 번째 치누크 헬기는 1 PARA 소속 A 중대 증원 병력의 절반과 SAS팀을 마그베니(Magbeni)로 수송했다. 헬기는 두 번째 SAS 정찰팀이 확인한 착륙 지점 상공 저공 비행을 하였고, 병사들은 후방 램프에서 뛰어내렸다. 정찰팀은 지면이 젖어 있다고 경고했지만 수심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가슴까지 차는 늪에 뛰어드는 것을 보고 놀랐다. 첫 번째 그룹의 대다수는 곧바로 늪을 건너 인근 나무 숲으로, 거기서 마을로 이동했지만, 착륙 지점을 확보하는 임무를 맡은 소규모 부대는 나머지 중대원들을 태우고 돌아와 착륙 지점에 투입할 치누크 헬기가 도착할 때까지 늪에서 대기해야 했다.[40]
나머지 A 중대원들, 2인자(2IC) 대니 매튜스(Danny Matthews) 대위를 포함한 병력을 태운 치누크 헬기는 마그베니에서 중기관총 사격을 받았다. 그러자 헬기는 문에 장착된 M134 미니건으로 반격했고, 곧이어 657 비행대대 링스 헬기 한 대가 합류하여 중기관총이 사격을 멈출 때까지 사격을 가했다. 매튜스가 탄 헬기의 병사들은 내려서 지상에 있는 중대원들과 합류했다. 중대가 전진하던 중, 영국 화력 지원 부대가 발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박격포 폭발로 중대장 매튜 로우(Matthew Lowe) 소령, 소대장 1명, 통신병 1명, 로우 소령의 본부 직원 2명을 포함한 7명이 부상을 입었다.[41]
다른 통신병이 부상자 보고를 무전으로 전송했고, 왕립 아일랜드 연대(SAS에 의해 구출된 직후)를 탈출시키기 위해 그베리 바나(Gberi Bana)로 향하던 치누크 헬기 중 한 대가 마을을 가로지르는 길에 착륙했다. 부상자들은 헬기에 태워졌고, 그 헬기는 왕립 아일랜드 연대 병력을 태우고 RFA ''서 페르시벌(Sir Percivale)''로 향했으며, 그곳에서 13명 모두 의무병의 진찰을 받았다.[41]
작전은 중대장이 부상당한 직후 거의 즉시 지휘권을 넘겨받은 중대 2인자 매튜스의 지휘 아래 계속되었다. 그의 지휘 아래, 각 소대는 해스팅스(Hastings)의 모의 마을에서 훈련 중 배정받았던 건물 집단을 공격했다.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의 탄약고가 발견되어 확보되었고, 나머지 건물들이 정리되자, 공수부대원들은 잠재적인 반격을 막기 위해 방어 진지를 구축했고, 정찰대는 덤불에 숨어 있는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를 찾아 인근 정글로 들어갔다.[42]
오전 8시가 되자 마을은 완전히 안전해졌고, 공수부대원들은 반격을 막기 위해 클레이모어 지뢰와 박격포를 배치하여 접근로를 확보했고, 파견대는 왕립 아일랜드 연대의 순찰을 막았던 베드퍼드 트럭을 포함한 나머지 차량과 중화기를 파괴했다. 공수부대원들은 또한 왕립 아일랜드 연대 순찰대의 랜드로버를 회수하여 치누크 헬기에 매달아 옮겼다. 마지막 영국군은 오후 2시경 그 지역을 떠났다.[42]
7. 작전 결과 및 영향
이 작전은 SAS가 영국 육군의 다른 대원들을 구출하기 위해 배치된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작전 중 브래들리 티니언(Bradley Tinnion)이라는 영국 병사 한 명이 부상을 입고 HMS ''아가일''(Argyll)로 후송된 후 사망했다.[43] 다른 12명의 병사들이 부상을 입었고, 그중 한 명은 중상을 입었다.[44] 국방부는 특수부대의 개입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SAS를 언급하지 않은 보도 자료를 발표했지만, 티니언이 원래 제29 코만도 연대 왕립 포병 출신의 상병이었다는 사실이 공개되자 전문가들에게 티니언이 특수부대에서 복무했음이 분명해졌다. 바라스 작전은 티니언이 SAS 병사로서 처음으로 참여한 작전이었다.[35]
작전 중 사망이 확인된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는 25명이었지만, 실제 수는 그보다 많을 가능성이 있으며, 최대 80명에 달할 수 있다. 이들의 저항은 예상보다 강했고, 정글에 발견되지 않은 시체가 더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다.[45][46] 다른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들은 포로로 잡혔고, 일부는 정글로 도망쳤다. 도망친 사람들 중 많은 수가 나중에 요르단 평화유지군에게 항복했다. 요르단군은 작전 종료 시점까지 30명을 받았고, 바라스 작전 후 2주 안에 57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371명이 항복했으며, 시에라리온 정보부 장관 줄리어스 스펜서는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가 "군사적 위협으로서 끝났다"고 선언했다.[48][47]
항복한 사람들 중 일부는 새로운 시에라리온 육군에 자원 입대했고, 합격한 사람들은 영국이 운영하는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이들의 지도자인 칼레이는 시에라리온 라디오에 방송될 메시지를 녹음하여 남은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들에게 유나밀에 항복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또한 마그베니와 게베리 바나에서 사망한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들의 시신을 확인했고, 이 시신들은 이후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48]
작전 당일 아침, 찰스 구스리 장군—영국군의 전문적인 수장인 합참의장—은 우연히 데이비드 프로스트 경이 진행하는 일요일 아침 정치 토크쇼인 ''프로스트와의 아침식사''에 출연할 예정이었다. 바라스 작전에 대한 최초의 공개적인 정보는 작전이 아직 종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구스리 장군의 프로스트 경과의 인터뷰에서 나왔다. 구스리 장군은 프로스트 경에게 "우리는 공격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매우 어려운 작전이고 위험이 크지만, 협상이 전혀 진전되지 않았기 때문에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 인질들은 3주 동안 억류되었고, 그들은 \[웨스트 사이드 보이즈] 인질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하거나 시에라리온의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키겠다고 위협했으며, 일단 그렇게 하면 우리는 더 이상 \[병사들을] 쉽게 구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그렇게 했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49] 국방부는 같은 날 자세한 내용이 담긴 보도 자료를 발표했다.[50]
바라스 작전에 참여한 인원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훈장이 수여되었다.
| 훈장 종류 | 수여자 | 비고 |
|---|---|---|
| 눈에 띄는 용감 십자훈장 | 낙하산 연대 중사 존 데이비드 베이크로프트 | |
| 눈에 띄는 용감 십자훈장 | 영국 왕립 공군 중대장 이안 제임스 맥케치니 맥팔레인 | |
| 군사 십자훈장 | 낙하산 연대 준위 해리 윌리엄 바틀렛 | |
| 군사 십자훈장 | 메이저 제임스 로버트 치스웰 | |
| 군사 십자훈장 | 대위 에반 존 제프레슨 퓨리 | |
| 군사 십자훈장 | 상사 스티븐 마이클 크리스토퍼 히니 | |
| 군사 십자훈장 | 소위 대니얼 존 매튜스 | |
| 뛰어난 비행 십자훈장 | 영국 왕립 공군 중위 티모시 제임스 버지스 | |
| 뛰어난 비행 십자훈장 | 중대장 이안 제임스 맥케치니 맥팔레인 | |
| 뛰어난 비행 십자훈장 | 중위 조나단 프리스트 | |
| 뛰어난 비행 십자훈장 | 중위 폴 그레이엄 셰퍼드 | |
| 뛰어난 비행 십자훈장 | 육군 항공단 대위 앨런 로클란 모이즈 |
홀름즈(특수부대 국장)는 작전 참여에 대한 공로로 뛰어난 봉사 훈장을 받았다.[49] 티니언은 사후 전투 명예 훈장을 받았다.[51]
8. 장기적 영향
바라스 작전은 시에라리온에 주둔한 영국군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로열 아일랜드 연대 순찰대가 서사이드 보이즈에 의해 포로로 잡힌 사건은 영국군의 위신에 큰 타격을 주었으나, 바라스 작전의 성공으로 이를 만회하고 영국군의 능력을 재확인했다.[53] 군사 역사가 윌리엄 파울러는 이 작전을 "법치주의와 시에라리온 민선 정부에 대한 필연적이고도 장엄한 지지"라고 평가했다.[53]
영국 정부는 바라스 작전을 계기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를 통해 혁명적 통합 전선(RUF)과 그들을 지원하는 라이베리아에 대한 정치적 압력을 강화했다.[60] 이는 유엔시에라리온사찰단(UNAMSIL)의 강화와 함께 RUF의 해체를 가속화하여 결국 시에라리온 내전 종식에 기여했다.[61]
또한, 바라스 작전은 영국 특수부대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상설 부대인 특수부대 지원 그룹(SFSG) 편성의 계기가 되었다.[59] SFSG는 2006년에 창설되어 낙하산 연대 제1대대, 왕립 해병대, 왕립 공군 연대의 지원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특수부대 작전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했다.[5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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