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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쿠스 (미켈란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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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켈란젤로의 바쿠스는 1496년에서 1497년 사이에 제작된 대리석 조각상으로, 술의 신 바쿠스를 묘사한다. 라파엘레 리아리오 추기경의 의뢰로 제작되었으나, 추기경은 작품의 외설적인 묘사를 이유로 인수를 거부했다. 이후 조각상은 미켈란젤로의 은행가 야코포 갈리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고, 1572년 메디치 가문에 의해 구입되어 피렌체로 옮겨졌다. 바쿠스는 취한 듯한 모습과 양성적인 특징으로 묘사되며, 고대 조각상에서 영감을 받은 누드 스타일을 보여준다. 조각상은 손상과 복원 과정을 거쳤으며, 여러 상징을 통해 바쿠스임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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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쿠스 (미켈란젤로)
작품 정보
제목바쿠스
미술가미켈란젤로
제작 연도1496–1497년
종류대리석
높이 (미터)2.03m
소장바르젤로 국립 박물관
위치피렌체
이전 작품잠자는 큐피드 (미켈란젤로)
다음 작품피에타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의 바쿠스
바쿠스

2. 제작 배경

미켈란젤로는 초기 경력에 여러 명의 주요 후원자를 두었고, 이들은 그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바쿠스의 후원자는 고위 성직자인 라파엘레 리아리오 추기경이었는데, 그는 이전에 미켈란젤로가 제작했지만 고대 조각품으로 위장한 작품인 ''큐피드''(일명 ''잠자는 큐피드'')를 구입했었다. 리아리오 추기경은 나중에 미켈란젤로의 사기를 발견하고 200 두카트의 환불을 요구했다.[3]

이후의 자세한 정황은 하위 섹션을 참고.

미켈란젤로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려운 생활에 대해 언급했다.[3]

작성 시기내용
1509년...이제 12년 동안 저는 이탈리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모든 종류의 굴욕을 견디고, 모든 종류의 고난을 겪었으며, 뼈가 닳도록 일했습니다... 오로지 가족을 돕기 위해서...[3]
1512년저는 비참하게 살고 있습니다... 엄청난 고생과 수많은 걱정 속에 말입니다. 제가 행복한 시간을 보낸 지는 약 15년이 되었네요. 저는 당신을 돕기 위해 모든 것을 다했지만, 당신은 결코 그것을 인정하거나 믿지 않았습니다. 신께서 우리 모두를 용서하시기를.[3]


2. 1. 라파엘레 리아리오 추기경의 의뢰와 거절

라파엘레 리아리오 추기경은 미켈란젤로에게 고대 조각품을 모방하는 대신 자신의 작품을 만들 용기가 있는지 물었다. 그 결과 미켈란젤로는 이에 동의하여 실물 크기의 대리석 덩어리를 사용하여 바쿠스를 제작했다.[3] 이 조각상은 추기경의 정원을 위해 의뢰되었으며,[11] 그는 이를 고전 조각품 컬렉션을 보완하기 위해 의도했다. 그러나 최종 작품을 본 라파엘레 리아리오 추기경은 작품이 너무나 죄스럽고, 성적 욕망의 상징이라고 여겨 받기를 거부했다.[3]

미켈란젤로는 바쿠스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에는 새로 제작된 바쿠스 조각상 받기를 거부한 추기경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었다. 편지의 어조는 미켈란젤로와 그의 아버지 사이에 어려운 관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3]

1497년 7월 1일 미켈란젤로는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제가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에 놀라지 마세요. 추기경과의 문제를 아직 해결하지 못했고, 제 노동에 대한 만족과 보상을 받기 전에는 떠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위 인물들과는 천천히 진행해야 합니다. 그들은 재촉할 수 없으니까요...[3]

2. 2. 야코포 갈리로의 소유권 이전

1506년경,[12] 이 조각상은 라파엘레 리아리오 추기경과 미켈란젤로의 은행가였던 야코포 갈리의 컬렉션으로 옮겨졌고, 그는 칸첼레리아 궁전 근처에 비슷한 정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이 조각상은 1533-1536년경 마르턴 판 헤임스케르크의 드로잉에 처음 등장했다.[13] 이 조각상은 메디치 가문을 위해 구입되었고, 1572년에 피렌체로 옮겨졌다.

2. 3. 메디치 가문의 소장과 피렌체로의 귀환

미켈란젤로는 초기 경력에 여러 명의 주요 후원자를 두었고, 이들은 그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바쿠스의 후원자는 고위 성직자인 라파엘레 리아리오 추기경이었는데, 그는 이전에 미켈란젤로가 제작했지만 고대 조각품으로 위장한 작품인 ''큐피드''(일명 ''잠자는 큐피드'')를 구입했었다. 리아리오 추기경은 나중에 미켈란젤로의 사기를 발견하고 200 두카트의 환불을 요구했다.[3]

라파엘레 리아리오 추기경은 편지에서 미켈란젤로에게 다른 거장의 작품을 모방하는 대신 자신의 작품을 만들 용기가 있는지 물었다. 그 결과 미켈란젤로는 동의하고, 실물 크기의 대리석 덩어리를 사용하여 바쿠스를 제작했다.[3] 이 조각상은 추기경의 정원을 위해 의뢰되었으며,[11] 그는 이를 고전 조각품 컬렉션을 보완하기 위해 의도했다. 최종 작품을 본 라파엘레 리아리오 추기경은 그것이 너무나 죄스럽고, 성적 욕망의 상징이라고 여겨 작품을 받기를 거부했다.[3]

1506년경,[12] 이 조각상은 추기경과 미켈란젤로의 은행가였던 야코포 갈리의 컬렉션으로 옮겨졌고, 그는 칸첼레리아 궁전 근처에 비슷한 정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이 조각상은 1533-1536년경 마르턴 판 헤임스케르크의 드로잉에 처음 등장했다.[13] 이 조각상은 메디치 가문을 위해 구입되었고, 1572년에 피렌체로 옮겨졌다.

3. 작품 설명

미켈란젤로의 바쿠스는 눈을 굴리며 비틀거리는 몸으로 벼랑 끝에 서 있는 듯 위태로운 모습이다. 그의 뒤에는 사티로스가 앉아 바쿠스의 왼손에서 미끄러져 나오는 포도송이를 먹고 있다. 높은 무게 중심에서 비롯되는 불안정함은 미켈란젤로의 후기 작품, 특히 ''다비드''와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의 인물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2]

마르턴 판 헤임세르크의 조각 정원에 있는 ''바쿠스''의 그림, 1533-1536년경


풍화 작용으로 인해 이 조각상은 수년에 걸쳐 상당한 손상을 입었다. 잔을 든 오른손은 교체되었고, 포도 덩굴은 닳았으며, 음경은 제거되었다. 포도 덩굴은 자연적인 풍화 작용으로 인해 조각상의 무게 변화를 도왔을 수 있다. 반면 손과 음경의 손상은 자연적인 원인일 수도 있지만, 진정한 고고학적 외관을 주기 위한 의도적인 훼손일 수도 있다.[5] 술잔을 든 손은 부러졌고, 음경은 마르턴 판 헤임세르크가 1530년대에 이 조각을 보기 전에 이미 제거된 상태였다. 술잔은 1550년대 초에 복원되었다. 훼손은 조각상에 더 큰 고대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일 수 있으며, 처음에는 야코포 갈리의 로마 정원에 있는 고대 토르소와 단편적인 로마 부조 사이에 배치되었다.[6]

그러나 "고전적" 감성에 대한 이러한 양보는 퍼시 비시 셸리에게 이 작품이 "바쿠스의 정신과 의미"에 충실하다는 것을 납득시키지 못했다. 그는 "그것은 술에 취하고, 잔혹하며, 편협해 보이며, 가장 혐오스러운 방탕의 표현을 가지고 있다"고 썼다.[7] 미술사학자 요하네스 빌데는 조각상에 대한 반응을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신의 이미지가 아니다"라고 요약했다.[8]

3. 1. 양성적인 특징

조르조 바사리는 부푼 가슴과 배를 가진 바쿠스의 모습에 "젊은 남자의 가냘픔과 여성의 살집과 둥글함"이 모두 담겨 있다고 언급했으며, 그 양성성은 종종 주목받았다(고환 또한 부어 있다).[2]

3. 2. 고전 조각과의 비교

바쿠스는 자신의 창조물에 매료된 듯한 나체의 남자로 묘사된다. 그의 누드 스타일은 고대적 비례와 훨씬 더 자연주의적인 스타일의 조합이다.[3] 오른손에 든 포도주 잔을 응시하는 바쿠스의 눈은 찡그려졌지만 포도주를 향한 열정이 느껴진다. 술에 취한 탓에 뒤로 기댄 바쿠스는 전통적인 자세로 서 있지만, 그의 입은 벌어져 있고 눈은 굴러가며, 취한 듯한 더욱 자연스러운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바쿠스의 조각상은 원형이며 프락시텔레스디오니소스와 같은 다른 바쿠스 조각상과 유사한 매력적인 고대적 감각을 담고 있다.[4][3]

3. 3. 상징

바쿠스는 눈을 굴리며 비틀거리는 몸으로 벼랑 끝에 서 있는 듯하다. 그의 뒤에는 사티로스가 앉아 포도송이를 먹고 있다. 조르조 바사리는 바쿠스의 모습에 "젊은 남자의 가냘픔과 여성의 살집과 둥글함"이 모두 담겨 있다고 평했다.[2] 이 작품의 영감은 플리니우스가 묘사한 프락시텔레스의 청동 조각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바쿠스, 취기, 그리고 사티로스"를 묘사했다.[2]

바쿠스는 자신의 창조물에 매료된 듯한 나체의 남자로, 고대적 비례와 자연주의적인 스타일이 조합된 누드 스타일을 보여준다.[3] 오른손에 든 포도주 잔을 응시하는 바쿠스의 눈은 찡그려졌지만 포도주를 향한 열정이 느껴진다. 술에 취한 듯 뒤로 기댄 자세, 벌어진 입, 굴러가는 눈은 자연스러운 취기를 표현한다.[4][3]

풍화 작용으로 조각상은 손상되었는데, 오른손과 음경이 제거되었다. 손상된 부분은 자연적인 원인일 수도 있지만, 진정한 고고학적 외관을 위한 의도적인 손상일 수도 있다.[5] 술잔은 1550년대 초에 복원되었다. 훼손은 조각상에 고대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6] 그러나 퍼시 비시 셸리는 이 작품이 "가장 혐오스러운 방탕의 표현"이라고 비판했다.[7] 미술사학자 요하네스 빌데는 "신의 이미지가 아니다"라고 평했다.[8]

미켈란젤로는 바쿠스를 나타내는 상징들을 조각상에 포함시켰다. 바쿠스는 디오니소스라고도 불리며, 디오니소스 숭배의 대상이었다. 포도주, 담쟁이덩굴, 호랑이/표범, 사티로스는 이러한 숭배와 관련된 상징이며, 미켈란젤로의 바쿠스 조각상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다.

바쿠스는 덩굴 잎 화관을 쓰고 있는데, 이는 신에게 신성하게 여겨지는 식물이다.[9] 바쿠스는 포도주의 발명가이기 때문에 머리에 덩굴과 포도 잎을 쓰고 있다.[3] 오른손에는 술잔을 들고 자신의 창조물에 매료된 듯 응시한다. 술잔은 기울어져 있어 만취한 바쿠스가 자신의 액체 창조물을 쏟아붓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10]

조각상 뒷면


왼손에는 포도 잎으로 둘러싸인 호랑이 가죽(또는 표범 가죽)이 들려 있다. 아스카니오 콘디비에 따르면, 호랑이는 "포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바쿠스와 연관된 동물이다. 고양이과 동물의 가죽은 삶과 죽음을 나타낸다.[3]

4. 논란과 평가

미켈란젤로의 바쿠스는 초기 야코포 갈리의 로마 정원에 있는 고대 토르소 및 로마 부조 사이에 배치되어 고대 조각상처럼 보이게 했다.[6] 퍼시 비시 셸리는 이 작품이 "바쿠스의 정신과 의미에 충실하며 술에 취하고, 잔혹하며, 편협해 보이고, 가장 혐오스러운 방탕의 표현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7] 미술사학자 요하네스 빌데는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신의 이미지가 아니다"라고 요약했다.[8]

4. 1. 손상과 복원

미켈란젤로의 바쿠스 조각상은 고대 조각상처럼 보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손상되었다는 가설이 있다. 바쿠스는 자신의 창조물에 매료된 듯한 나체의 남자로 묘사되며, 그의 누드 스타일은 고대적 비례와 자연주의적인 스타일의 조합이다.[3] 오른손에 든 포도주 잔을 응시하는 바쿠스의 눈은 찡그려졌지만 포도주를 향한 열정이 느껴진다. 바쿠스는 전통적인 자세로 서 있지만, 술에 취한 탓에 뒤로 기댄 모습이다. 그의 입은 벌어져 있고 눈은 굴러가며, 취한 듯한 더욱 자연스러운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바쿠스의 조각상은 원형이며 프락시텔레스디오니소스와 같은 다른 바쿠스 조각상과 유사한 매력적인 고대적 감각을 담고 있다.[4][3]

조각상은 풍화 작용으로 인해 수년에 걸쳐 상당한 손상을 입었다. 잔을 든 오른손은 교체되었고, 포도 덩굴은 닳았으며, 음경은 제거되었다. 포도 덩굴의 손상은 자연적인 풍화 작용으로 인해 조각상의 무게 변화를 도왔을 수 있다. 반면 손과 음경의 손상은 자연적인 원인일 수도 있지만, 진정한 고고학적 외관을 위해 의도되었을 수도 있다.[5] 마르턴 판 헤임세르크가 1530년대에 이 조각을 보기 전에 술잔을 든 손은 부러졌고, 음경은 조각되었다. 술잔만 1550년대 초에 복원되었다. 이러한 훼손은 조각상에 더 큰 고대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일 수 있으며, 처음에는 야코포 갈리의 로마 정원에 있는 고대 토르소와 단편적인 로마 부조 사이에 배치되었다.[6]

4. 2. 비판과 옹호

바쿠스는 눈을 굴리며 비틀거리는 몸으로 바위 벼랑에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모습이다. 뒤에는 사티로스가 앉아 바쿠스의 왼손에서 미끄러져 나오는 포도송이를 먹고 있다. 조르조 바사리는 부푼 가슴과 배를 가진 바쿠스의 모습에 "젊은 남자의 가냘픔과 여성의 살집과 둥글함"이 모두 담겨 있다고 묘사하며, 양성성이 자주 주목받았다고 언급했다(고환 또한 부어 있다).[2] 이 작품은 플리니우스가 묘사한 프락시텔레스의 잃어버린 청동 조각상("바쿠스, 취기, 그리고 사티로스")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2] 높은 무게 중심에서 비롯되는 불안정함은 다비드와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의 인물상 등 미켈란젤로의 후기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바쿠스는 자신의 창조물에 매료된 듯한 나체의 남자로 묘사된다. 그의 누드 스타일은 고대적 비례와 자연주의적인 스타일이 혼합되어 있다.[3] 오른손에 든 포도주 잔을 응시하는 바쿠스의 눈은 찡그려졌지만 포도주를 향한 열정이 느껴진다. 바쿠스는 전통적인 자세로 서 있지만, 술에 취해 뒤로 기댄 모습이다. 그의 입은 벌어져 있고 눈은 굴러가며, 취한 듯한 더욱 자연스러운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바쿠스의 조각상은 원형이며 프락시텔레스의 디오니소스와 같은 다른 바쿠스 조각상과 유사한 매력적인 고대적 감각을 담고 있다.[4][3]

풍화 작용으로 인해 조각상은 수년에 걸쳐 손상되었다. 잔을 든 오른손이 교체되었고, 포도 덩굴은 닳았으며, 그의 음경은 제거되었다. 포도 덩굴은 자연적인 풍화 작용으로 인해 조각상의 무게 변화를 도왔을 수 있다. 반면 손과 음경은 다른 이유가 있는데, 손상된 부분이 자연적인 원인일 수도 있지만, 두 신체 부위의 손실은 진정한 고고학적 외관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5] 술잔을 든 손은 부러졌고, 음경은 마르턴 판 헤임세르크가 1530년대에 이 조각을 보기 전에 조각되었다. 술잔만 1550년대 초에 복원되었다. 훼손은 조각상에 더 큰 고대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일 수 있으며, 처음에는 야코포 갈리의 로마 정원에 있는 고대 토르소와 단편적인 로마 부조 사이에 배치되었다.[6]

그러나 "고전적" 감성에 대한 이러한 양보는 퍼시 비시 셸리에게 이 작품이 "바쿠스의 정신과 의미"에 충실하다는 것을 납득시키지 못했다. 그는 "그것은 술에 취하고, 잔혹하며, 편협해 보이며, 가장 혐오스러운 방탕의 표현을 가지고 있다"고 썼다.[7] 미술사학자 요하네스 빌데는 조각상에 대한 반응을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신의 이미지가 아니다"라고 요약했다.[8]

5. 복제품

멕시코시티 알바로 오브레곤 대로를 따라 파르케 에스파냐 옆에 이 조각상의 복제품이 설치되어 있다.[14][15][16]

6. 대중문화 속 바쿠스

1965년 전기 영화 고통과 희열은 미켈란젤로의 작품 목록으로 시작한다. 내레이션은 ''바쿠스''가 악마가 아담을 유혹하는 모습을 묘사한다고 말한다.[18]

참조

[1] 논문 Michelangelo in Rome: an altarpiece and the 'Bacchus' The Burlington Magazine 1981-10
[2] 논문 Michelangelo's Reflections on Bacchus Artibus et Historiae 2003
[3] 서적 Michelangelo : painter, sculptor, architect Vendome Press
[4] 서적 The Mirror of the Gods Oxford University Press
[5] 서적 Michelangelo Buonarroti Sillabe
[6] 서적 Unearthing the Past: Archaeology and Aesthetics in the Making of Renaissance Culture New Haven/London
[7] 문서 La Vita di Michelangelo Milan
[8] 서적 Michelangelo: Six Lectures Oxford University Press
[9] 문서
[10] 서적 Michelangelo : the complete sculpture, painting, architecture Hugh Lauter Levin Associates
[11] 문서
[12] 문서
[13] 논문 Regarding Michelangelo's 'Bacchus' Artibus et Historiae
[14] 웹사이트 La historia de la icónica avenida Álvaro Obregón en la Roma https://mxcity.mx/20[...] 2020-04-29
[15] 웹사이트 Avenida Álvaro Obregón, en el olvido https://www.24-horas[...] 2021-04-16
[16] 웹사이트 El David. Historia de esculturas en la Roma – Álvaro Obregón https://www.milenio.[...] 2021-01-06
[17] 뉴스 Stolen Roman statue returned to France after 50 years https://www.bbc.com/[...] 2022-02-02
[18] AV media The Agony and the Ecstasy International Class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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