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빈 (조선)
1. 개요
박성빈은 1871년 6월 6일에 태어나 1938년 9월 4일에 사망한 조선 시대 인물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효력부위까지 올랐으나, 부정부패에 환멸을 느껴 동학 농민 운동에 가담했다. 1892년 동학 접주가 되어 체포되었으나 살아남았고, 이후 칠곡과 구미 등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그의 아들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었으며, 박성빈은 장승원의 논을 소작하기도 했다.
| 이름 | 박성빈 |
|---|---|
| 원래 이름 | 朴成彬 |
| 출생일 | 1871년 6월 6일 |
| 출생지 | 조선 경상도 성주 |
| 사망일 | 1938년 9월 4일 (67세) |
| 사망지 |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
| 국적 | 대한제국 |
| 본관 | 고령 (高靈) |
| 직책 | 조선국 전설사 예하 정구품 효력부위 (朝鮮國 典設司 隸下 正九品 效力副尉) |
| 배우자 | 백남의 |
| 부모 | 박영규 (부), 성산 이씨(모) |
| 자녀 | 박○희 (장남, 이름은 추정, 2살 때 요절) 박동희 (차남) 박무희 (삼남) 박상희 (사남) 박귀희 (장녀) 박한희 (오남) 박재희 (차녀) 박정희 (육남) |
|---|---|
| 형제 | 남동생 박용빈, 박일빈 |
| 군주 | 조선 고종 이형 |
|---|---|
| 임기 | 1890년 4월 30일 ~ 1893년 6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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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박씨 -
박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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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박씨 -
박근령
박근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로, 육영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고, 2022년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
일제강점기의 사회운동가 -
김동인
김동인은 '약한 자의 슬픔'으로 시작하여 '감자'와 같은 작품을 통해 사실주의를 개척하고, 《창조》를 창간했으며, 사후 동인문학상이 제정되었다. -
일제강점기의 사회운동가 -
주요한
주요한은 일제강점기 시인이자 언론인이자 정치인이며, 친일 행위로 인해 논란이 있으며, 국회의원과 상공부 장관을 역임했다. -
성주군 출신 -
이진숙 (언론인)
이진숙은 문화방송의 기자 및 간부로 활동하다가 대전문화방송 사장을 역임했고, 걸프 전쟁 등 다양한 보도 활동을 펼쳤으며, 자유한국당에 입당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하여 2024년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직무가 정지되었다. -
성주군 출신 -
한기춘
한기춘은 한국 경제 발전에 기여한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으로, 연세대학교와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한국은행 고문,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고 유신정우회 국회의원과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의원으로 활동했으나, 유신정권 참여 경력은 비판받는다.
2. 생애
아버지 박영규가 사망하면서 장남임에도 막내인 박일빈에게 재산을 물려줘 가세가 기울어져, 처남의 도움으로 구미 상모동에서 처가 문중 선산 산지기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처가의 위토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장택상의 아버지 장승원에게 논 다섯 마지기를 소작하기도 했다. 가을 추수 후 둘째 아들 박무희가 도지와 뇌물을 장 직각 댁으로 보내는 것을 가족들은 보았다고 한다.
말년에 병으로 고생하던 박성빈은 늦은 나이에 얻은 막내 박정희가 장가가는 것을 보고 싶어해 친구의 딸인 김호남과 결혼시켰다. 그러나 박정희는 김호남을 좋아하지 않았고, 같은 방을 쓰기조차 거부했다고 한다. 박성빈은 2년 뒤인 1938년 9월 4일에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아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면서 "부사 효력부위 박성빈지묘"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2.1. 초기 생애
박성빈은 1871년 6월 6일(음력 4월 19일)에 태어났다. 아버지 박영규(朴永奎) 때까지 성주 철산 사읍촌에서 살다가 칠곡군 약목으로 이사 왔다. 박영규 대까지 4대 독자로 내려오다가 박영규 대에 와서 성빈(成彬), 용빈(龍彬), 일빈(一彬)의 3형제가 태어났다. 박영규는 "약목평야"라 불릴 만큼 농지와 소작농들을 거느린 부농이었다. 박성빈은 건너 마을에 살고 있던 백낙춘(白樂春)의 딸 백남의와 결혼했다. 젊은 시절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구한말 정9품 효력부위(効力副尉)까지 올랐지만, 당시의 부정부패에 환멸을 느껴 동학혁명에 가담하게 된다.
1892년 성주에서 22세의 젊은 나이에 동학 접주(接主)가 되었다가 관군에게 체포되기도 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이미 나라의 형세가 기울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한량처럼 매일같이 술로 세월을 보내곤 했다. 딸 박재희의 증언에 의하면 체포된 동학 농민군 300명 중 혼자 살아남았는데, 달변에 능했기 때문이다. 박정희와 동리 주민들은 괄괄하고 호쾌한 성격이었다고 증언한다.
박성빈이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던 경력으로 훗날 박정희는 동년배들이 동학난이라 부르던 것을 동학농민혁명이라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유족회는 2005년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 시행 이후 박성빈의 행적을 조사했다. 조사에 따르면 박성빈은 청년 시절 무과에 급제해 황해도 영변 지역 부사(또는 함남 지역 부사)로 발령받았으나 혼탁한 세상에 환멸을 느껴 관직을 포기했다. 그리고 성주에서 동학 운동에 뛰어들었으나 동학 운동 탄압이 거세지면서 관군에 체포되었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 칠곡과 구미 등에서 세상을 등지고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2.2. 관직 생활과 동학 농민 운동
박성빈은 젊은 시절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구한말 정9품 효력부위(効力副尉)까지 올랐지만, 당시의 부정부패에 환멸을 느껴 동학혁명에 가담하게 된다. 딸 박재희의 증언에 의하면, 벼슬을 하려고 전답을 팔아서 서울에 자주 올라갔으며 이때 가산을 많이 날렸다고 한다.
1892년 성주에서 22세의 젊은 나이에 동학 접주(接主)가 되었다가 관군에게 체포되기도 했다. 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이미 나라의 형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한량처럼 매일같이 술로 세월을 보내곤 했다. 딸 박재희의 증언에 따르면, 체포된 동학 농민군 300명 중 혼자 살아남았는데, 달변에 능했기 때문이다. 한편 박정희와 동리 주민들은 괄괄하고 호쾌한 성격이었다고 증언한다.
박성빈이 동학 농민 운동에 가담했던 경력으로 후일 박정희는 동년배 또래들이 동학난이라 부르던 것을 동학 농민 혁명이라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동학농민혁명 유족회는 2005년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 시행 이후 박성빈의 당시 행적을 면밀히 조사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박성빈은 청년 시절 무과에 급제해 황해도 영변 지역 부사(또는 함남 지역 부사)로 발령받았으나 혼탁한 세상에 환멸을 느껴 관직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성주에서 동학 운동에 뛰어들었으나 동학 운동 탄압이 거세지면서 관군에 체포되었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 칠곡과 구미 등에서 세상을 등지고 지낸 것으로 밝혀졌다.
2.3. 은둔 생활과 말년
1892년 22세의 젊은 나이에 성주에서 동학 접주(接主)가 되었다가 관군에게 체포되기도 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나라의 형세가 기울어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한량처럼 술로 세월을 보냈다. 그 때문에 아버지 박영규가 사망하면서 의절하다시피 장남임에도 막내인 박일빈에게 재산을 물려줘 가세는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고향을 떠나 처남의 도움으로 구미 상모동에 있는 처가 문중 선산 산지기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딸 박재희의 증언에 따르면, 체포된 동학 농민군 300명 중 혼자 살아 나왔는데, 달변에 능했기 때문이다. 한편 박정희와 동리 주민들은 괄괄하고 호쾌한 성격이었다고 증언한다.
박성빈이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던 경력으로 후일 박정희는 동년배 또래들이 동학난이라 부르던 것을 동학농민혁명이라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유족회는 2005년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 시행 이후 박성빈의 당시 행적을 면밀히 조사했다. 그에 따르면 박성빈은 청년 시절 무과에 급제해 황해도 영변지역 부사(또는 함남 지역부사)로 발령받았으나 혼탁한 세상에 환멸을 느껴 관직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성주에서 동학운동에 뛰어 들었으나 동학운동 탄압이 거세지면서 관군에 체포됐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 칠곡과 구미 등에서 세상을 등지고 지냈다.
처가의 위토만으로는 생활이 안 돼 한때 장택상의 아버지이자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칠곡군의 갑부 장승원을 찾아 그의 아들 박무희가 장승원의 논 다섯 마지기를 소작하기도 했다.
말년에 병으로 고생하던 박성빈은 46살이라는 매우 늦은 나이에 얻은 막내 박정희가 장가가는 것을 보고 싶어해 친구의 딸인 김호남과 결혼시켰다. 그러나 박정희는 김호남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같은 방을 쓰기조차 거부했다고 한다. 결혼 시킨 2년 뒤 1938년 9월 4일에 67세 나이로 사망한다. 아들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면서 "부사 효력부위 박성빈지묘"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3. 가족 관계
|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 아버지 | 박영규 | 1840년 2월 10일 ~ 1914년 2월 24일 | |
| 어머니 | 성산 이씨 | ? ~ ? | |
| 아우 | 박용빈 | ? ~ ? | |
| 아우 | 박일빈 | ? ~ ? | |
| 처 | 백남의 | 1872년 9월 22일 ~ 1949년 8월 12일 | |
| 장남 | 박동희 | 1895년 ~ 1972년 | |
| 자부 | 선산 김씨 김봉금 | 1894년 ~ ? | |
| 자부 | 여산 송씨 | 1911년 ~ 1995년 | |
| 손자 | 박재홍 | 1941년 ~ | |
| 손녀 | 박재선 | 1948년 ~ | |
| 차남 | 박무희 | 1898년 ~ 1960년 | |
| 자부 | 연안 차씨 | 1905년 ~ 1938년 | |
| 손녀 | 박씨 | 1920년 ~ ? | |
| 손서 | 김영달 | ? ~ ? | |
| 손자 | 박재석 | 1922년 ~ 1989년 | 국제전기 회장 |
| 손자 | 박재호 | 1931년 ~ 1999년 | 동양육운 회장 |
| 장녀 | 박귀희 | 1902년 ~ 1985년 | |
| 사위 | 은용표 | 1888년 ~ 1966년 | 가수 은지원의 할아버지 |
| 3남 | 박상희 | 1905년 ~ 1946년 | |
| 자부 | 조귀분 | 1908년 ~ 1993년 | |
| 손녀 | 박영옥 | 1929년 ~ 2015년 | |
| 손녀 | 박계옥 | 1937년 ~ | |
| 손녀 | 박화자 | 1940년 ~ 2007년 | |
| 손녀 | 박금자 | 1942년 ~ | |
| 손녀 | 박설자 | 1945년 ~ | |
| 손자 | 박준홍 | 1947년 ~ | |
| 4남 | 박한생 | 1910년 ~ 1928년 | |
| 차녀 | 박재희 | 1913년 ~ 1996년 | |
| 사위 | 한정봉 | 1911년 ~ 1966년 | |
| 5남 | 박정희 | 1917년 ~ 1979년 |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