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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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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손병희는 1861년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나 동학에 입교하여 최시형의 제자가 되었고,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동학을 재건하고 천도교로 개칭하여 종교 지도자로서 활동했으며, 3·1 운동을 주도했다. 3·1 운동 이후 투옥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1922년 사망했다. 그는 민족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그의 호를 딴 태권도 품새 '의암'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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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 [인물]에 관한 문서
손병희
손병희
손병희
본명손응구 (孫應九, Son Eung-gu)
가명이상헌 (李祥憲, I Sangheon)
출생일1861년 4월 8일
출생지조선 충청도 청주목 청원군 산외이면 대주리
사망일1922년 5월 19일
사망지일제강점기 경성부
매장지대한민국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
국적대한제국
거주지대한제국 한성부
민족한민족(밀양 손씨)
직업천도교 (동학) 지도자, 독립운동가, 저술가
경력대한국민의회 대통령 (1919년 2월 1일 ~ 1919년 3월 21일)
조선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1919년 4월 10일 ~ 1919년 4월 13일)
배우자사별 초배 현풍 곽씨 부인
사별 계배 남양 홍응화
최후 삼취 신안 주옥경
부모손두흥(부), 최씨 측실(모)
자녀손용화(셋째딸)
친척손시화(이복 서얼 여동생)
손병흠(이복 서얼 남동생)
손천민(이복 서얼 조카)
방정환(셋째사위)
최시형(이복 서얼 매제)
상훈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종교동학 (1906년 4월 3일 (음력 1906년 3월 10일) 이후 천도교로 개칭)
교파천도교 (1906년 4월 3일 (음력 1906년 3월 10일) 이후)
칭호천도교 제3대 교주
칭호 기간1897년 4월 11일 (음력 1897년 3월 10일) ~ 1908년 1월 18일
전임자최시형
후임자박인호
활동 기간1882년 ~ 1921년 1월 18일
웹사이트두피디아 손병희

2. 생애

손병희는 1861년 충청도 청주목(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향리서자로 태어났다. 하급 관리의 첩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관직에 나갈 자격은 없었으나, 교육은 받을 수 있었다. 1882년 조카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하여 3년 후 최시형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동학 북접의 지도자로서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관군의 토벌을 피해 원산으로 피신한 후에는 조직 재건과 포교 활동에 힘썼으며, 1897년 최시형의 뒤를 이어 동학 제3대 교주가 되었다.

이후 손병희는 동학 운동뿐만 아니라 근대화 운동의 지도자로도 활동했다. 독립협회 등 개화파 인물들과 교류하며 개화 사상을 받아들였다.

1901년 동학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여기서도 개화파 출신 인사들과 교류하며, 인재 육성의 필요성을 깨닫고 1903년부터 젊은이들을 선발하여 일본 유학을 보내기 시작했다.

망명 중에는 신문 기고 등을 통해 내정 개혁론과 근대화론을 제시했고, 1904년에는 갑진개혁운동을 일으켜 진보회를 조직했다.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했고, 1906년 대한제국이 외세의 간섭으로 무력화되자 이듬해 귀국했다. 그러나 천도교 내부에서는 일진회의 친일 세력과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손병희는 일진회 인물들을 교단에서 추방했다. 1908년 박인호에게 천도교 교주 자리를 계승시켰다.

1912년 이후 우이동 천도교 본부에 ‘봉황각’을 짓고 독립운동 투사를 양성했으며, 1919년에는 3·1 운동을 주도했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병으로 보석된 직후인 1922년에 사망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았다.

2. 1. 출생과 성장

손병희는 1861년 충청도 청주목(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세금 징수를 담당하는 향리였던 아버지 손의조(훗날 개명하여 손두흥)의 첩실 최씨 소생 (서자)으로 태어났다.[1] 하급 관리의 첩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관직에 나갈 자격은 없었으나, 교육은 받을 수 있었다. 1882년 배다른 조카 손천민의 권유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동학의 교리에 이끌려 동학에 입도하였다.[7] 3년 뒤 최시형을 만나 그의 수제자가 되었다. 최시형은 손병희에게 어려운 문제를 풀게 했는데, 정성껏 문제를 풀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고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한다.[7] 그는 새로운 종교에 헌신하여, 동학 주문인 21자 주문을 장시간 염송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2]

2. 2. 동학 입도와 수련

1882년 조카 손천민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했는데,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동학의 교리에 감화받았기 때문이었다.[7] 3년 뒤 최시형을 만나 그의 수제자가 되었다. 최시형은 손병희에게 어려운 문제를 풀게 했는데, 정성껏 문제를 풀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고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한다.[7] 그는 동학에 헌신하여 21자 주문을 장시간 염송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 해월 최시형을 만나 함께 49일간 수련을 하기도 했다. 해월의 첫 번째 부인이 사망한 후 해월이 손병희의 누이와 결혼하면서 이들의 유대는 더욱 강화되었다.[2]

2. 3. 동학 농민 운동 참여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동학 북접의 지도자로서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이 과정에서 많은 동학 신도들이 순도(殉道, 순교)하였다.[2]

3. 동학 재건과 천도교 창시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실패 이후, 손병희는 무너진 동학을 재건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개혁을 추진했다. 1897년 최시형의 뒤를 이어 동학 제3대 교주가 된 손병희는 동학 운동과 근대화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독립협회 인사들과 교류하며 개화 사상을 받아들였고, 1901년 일본으로 망명하여 개화파 출신 인사들과 교류하며 인재 육성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1906년 귀국하여 교단 내부의 친일 세력인 일진회와 갈등을 겪고, 일진회 인물들을 교단에서 추방했다.[3]

3. 1. 동학 재건 노력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손병희는 북접 소속으로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관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의 폭력으로 수많은 동학 신도들이 목숨을 잃었다. 관군의 추격을 피해 원산 등지로 피신한 그는 무너진 동학을 재건하고 포교 활동에 힘썼다. 1897년에는 스승이었던 최시형의 뒤를 이어 동학의 제3대 교주가 되었다. 한편, 관에 자수한 최시형은 이듬해 처형당했다.

이후 손병희는 동학 지도자로서뿐만 아니라 근대화 운동의 지도자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독립협회 인사 등 개화파 인물들과 교류하며 일부는 동학에 입교시키고, 이들로부터 개화 사상을 받아들였다.

3. 2. 일본 망명과 개화 운동

1901년 일본으로 망명하여 오세창, 권동진, 박영효, 조희연 등 개화파 전직 관료들과 교류하였고, 상하이와 메이지 유신 이후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던 도쿄 등을 돌아보면서 인재 양성이 시급함을 깨달았다.[3] 이를 계기로 조선의 개화를 주장하는 ‘삼전론’을 주창하였고, 1903년부터 젊은이들을 선발하여 일본 유학을 보내기 시작했다. 망명 중에는 신문 기고 등을 통해 내정 개혁론과 근대화론을 제시했고, 1904년 갑진개혁운동을 일으켜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진보회를 조직했다.[3] 진보회는 회원들에게 머리를 자르고 개화복을 입을 것을 명하는 등 개화 운동 확산을 위한 단체였다.

1903년, 손병희는 삼전론과 명리전(明理箋)이라는 두 편의 논문에서 그의 새로운 개혁 사상을 종합하였다. 이들은 동학/천도교 경전에 포함되었다. 명리전에는 동학이 "정치적, 도덕적 두 전선에서 싸워야 한다"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으며, 국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세상의 각 나라는 종교적 계몽을 보호하고, 국민을 보호하며, 직업을 가르쳐 그들의 나라를 중국의 태산처럼 안전하게 만든다."

삼전론은 강력한 국가를 달성하기 위한 세 가지 수단, 즉 종교, 군사, 산업화를 제시했다. 유미 문의 요약에 따르면, "국민들이 서구의 군사력을 당장 극복할 수 없더라도, 도덕적 우월성을 추구하고 산업화를 통해 경제력을 축적함으로써 서구와 경쟁할 수 있다." 손병희는 이러한 투쟁을 "우리 아시아인"과 "우리 아시아 땅"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한 아시아 전체의 노력으로 보았다.

3. 3. 천도교 창시와 발전

1905년 동학천도교로 개칭하고, 1906년 일본에서 귀국했다.[3] 당시 대한제국은 천도교 신도들을 무조건 잡아갈 정도로 극심하게 탄압했지만, 외세의 간섭으로 인해 무기력해진 상황이었다.[3] 한편, 천도교 내부에서는 일진회송병준, 이용구 등 친일 세력과 갈등이 심화되었고, 손병희는 일진회 인물들을 교단에서 추방하며 이들과 결별했다.[3]

4. 3·1 운동과 독립운동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 운동을 주도했으며,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2] 이에 앞서 1912년부터는 우이동(牛耳洞) 천도교 본부에 ‘봉황각(鳳凰閣)’을 짓고 독립운동 투사를 양성했다.

4. 1. 3·1 운동 주도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3·1 운동을 주도,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만세 시위를 이끌었다.[2]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파리 강화 회의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손병희의 천도교는 이 운동에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으며, 그는 독립 운동이 대중적이고 비폭력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립 선언서가 작성되었는데, 33명의 종교 지도자들이 서명하였고, 그중 15명이 천도교 신자였다. 손병희는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고, 가장 먼저 서명했다.

1919년 3월 1일, 최근에 서거한 고종의 추모 기간 중에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 선언서가 공개적으로 선포되었다. 이것이 바로 3·1 운동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손병희는 공원 근처 유명한 식당에서 다른 서명자들 앞에서 선언문을 낭독했다. 폭력을 피하기 위해 실내 장소가 선택되었다. 그들은 일본 총독에게 사본을 보냈고 경찰에 자신들이 한 일을 보고하고 체포를 기다리고 있다고 전화했다. 5,000~6,000명의 학생들을 포함한 많은 군중이 공원에 모였다. 시위는 처음에는 평화로웠지만 폭력으로 변했다. 대중들은 거리로 나가 한국 독립을 요구하며 시위했다. 이것은 지역과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전국적인 운동을 시작했지만, 일본은 즉시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잔혹하게 진압했다. 7,500명 이상의 한국인이 사망하고, 거의 17,000명이 부상을 입었고, 손병희를 포함하여 약 47,000명이 체포되었다.

4. 2. 체포와 투옥

1919년 3·1 운동을 주도하여 일제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2]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투옥 중 병을 얻어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1922년 동대문 밖 상춘원|Sangchunwon한국어 자택에서 사망했다.[2]

4. 3. 서거와 추서

1922년 병보석으로 출옥한 후 상춘원에서 서거하였다.[8][9]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5. 사상과 활동

손병희는 동학천도교로 개칭하고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중심으로 교리를 재정립했다. 동경대전, 용담유사 등을 주요 경전으로 삼았으며, 시천주(侍天主), 사인여천(事人如天) 등의 교리를 강조했다.[10]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 전봉준과 함께 관군에 맞서 싸웠다. 일본 망명 중에는 내정 개혁과 근대화를 주장하며 갑진개혁운동(1904년)을 이끌었다.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1906년 귀국 후에는 일진회와의 갈등 속에서 친일 세력을 교단에서 추방했다. 1908년 박인호에게 천도교 교주 자리를 물려주었다.[11]

1919년 3·1 운동을 주도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았다.[11]

5. 1. 삼전론(三戰論)과 개혁 사상

1903년 손병희는 일본 망명 중에 조선의 개화를 주장하는 삼전론(三戰論일본어)을 발표했다. 삼전론은 종교, 군사, 산업 세 가지 측면에서 개혁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같은 해 젊은이들을 선발하여 일본 유학을 보내기 시작했다.[11]

5. 2. 저술 활동

이외에 授受明實錄|수수명실록중국어, 道訣|도결중국어, 天道太元說|천도태원설중국어, 大宗正義說|대종정의설중국어, 敎|교중국어의 신인시대(神人時代), 無體法經|무체법경중국어, 性心身三端|성심신삼단중국어, 神通考|신통고중국어, 見性解|견성해중국어, 三性科|삼성과중국어, 三心觀|삼심관중국어, 極樂說|극락설중국어, 聖凡說|성범설중국어, 眞心不染|진심불염중국어, 後經|후경중국어, 十三觀法|십삼관법중국어, 夢中問答歌|몽중문답가중국어, 無何詞|무하사중국어, 勸道文|권도문중국어 등이 있다.[10]

5. 3. 교육 및 사회 활동

손병희는 귀국 후 박인호에게 교령 자리를 승계하고 교육 사업과 출판 사업에 힘썼다. 보성전문학교, 동덕여학단 등을 인수하여 민족의식 고취와 인재 양성에 힘썼다.

6. 가족 관계

손병희는 현풍 곽씨, 홍응화(1870년~?), 주옥경(1894년~1982년)과 결혼하였다.[12][13] 주옥경은 주병규(朱炳圭)의 딸이다. 이복 형 손병곤의 아들 손천민천도교인으로 손병희와 그의 동생 손병흠을 천도교에 입교시켰다. 여동생 손시화의 남편은 최시형이다.

6. 1. 가족 구성원

관계이름기타
부친손두흥(孫斗興, 다른 이름: 손의조(孫懿祖))
모친경주 최씨
이복 형손병곤(孫秉坤)
이복 조카손천민(孫天民)1857년 ~ 1900년 8월 29일, 천도교
동생손병흠(孫秉欽)1862년~1903년, 독립운동가
동생손병권(孫秉權)1863년~?
여동생손시화(孫時嬅)1864년 8월 4일~1938년 10월 23일
매부최시형(崔時亨)1827년 3월 21일~1898년
조카최동희1890년 1월 4일~1927년 1월 26일
조카최동호1897년~1930년
조카손자최익환1913년 3월 19일~1999년 6월 14일
조카손자최진환
조카손녀최문환
조카증손녀최인혜
부인현풍 곽씨, 홍응화(1870년~?), 주옥경(1894년~1982년)[12][13]주옥경은 주병규(朱炳圭)의 딸
차녀손광화(鄭廣朝)1899년? ~ ?
사위정광조(鄭廣朝)1883년 ~ 1953년
삼녀손용화1901년 ~ 1992년 10월 18일
사위방정환(方定煥)1899년 11월 9일 ~ 1931년 7월 23일, 아동문학가, 독립운동가 겸 작가, 언론인
외손자방운용1917~2002.10.4
외손자방하용1924~
3대 이후손권후, 손민후, 손승준 외


6. 2. 방정환과의 관계

방정환은 손병희의 사위로, 어린이 운동과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방정환은 천도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는데, 그의 부친이 천도교 신자였고, 방정환 자신도 1923년 천도교계 잡지에서 작가로 활동하였다. 또한 그가 어린이들에게 구연동화를 들려준 장소도 천도교 회관이었다. 방정환은 장인인 손병희의 사상과 활동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2][13]

7. 유산과 평가

손병희는 종교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 한국 근현대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동학천도교로 개칭하고 민족의식 고취와 근대화에 힘썼으며, 3·1 운동을 주도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하위 섹션에서 손병희의 민족 지도자로서의 역할, 천도교 발전과 영향, 현대적 의의를 상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이 섹션에서는 그의 삶과 업적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그에 대한 평가를 추가한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청주 삼일공원에는 충북 출신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손병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손병희는 민족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헌신한 선각자로 평가받는다. 특히 종교 지도자로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을 이끈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또한 일진회와 같은 친일 세력에 맞서 천도교의 민족적 성격을 지켜낸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7. 1. 민족 지도자로서의 역할

손병희는 종교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 민족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헌신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 충청도를 근거지로 북접군(北接軍)을 이끌고, 전라도를 근거지로 남접군(南接軍)을 이끈 전봉준과 함께 관군과 싸웠다.[1] 관군의 토벌을 피해 원산으로 피신한 후에는 조직 재건과 포교 활동에 큰 공을 세웠고, 1897년 최시형의 뒤를 이어 천도교 제3대 교주가 되었다.[1]

이후 손병희는 동학 운동뿐만 아니라 근대화 운동의 지도자로도 활동했다.[1] 독립협회 등 개화파 인물들과 교류하며 일부는 동학에 입교시키고, 그들로부터 개화 사상을 받아들였다.[1]

동학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고, 자신을 동학에 권유했던 조카가 체포·처형되자 1901년 일본으로 망명했다.[1] 여기서도 오세창, 권동진, 박영효, 조희연 등 개화파 출신 원관료들과 교류하며, 상하이와 메이지 유신 이후 개혁이 진행되었던 도쿄 등을 돌아보며 인재 육성의 필요성을 깨달았다.[1] 이를 계기로 조선의 개화를 주장하는 ‘삼전론(三戰論)’을 주창하게 되었고, 1903년부터는 젊은이들을 선발하여 일본 유학을 보내기 시작했다.[1]

망명 중에는 신문 기고 등을 통해 내정 개혁론과 근대화론을 제시했고, 1904년에는 갑진개혁운동을 일으켜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진보회를 조직했다.[1]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했고,[1] 1906년 천도교를 탄압했던 대한제국이 외세의 간섭으로 무력화되자 이듬해 귀국했다.[1] 그러나 천도교 내부에서는 일진회송병준, 이용구 등 친일 세력과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손병희는 일진회 인물들을 교단에서 추방했다.[1] 1908년 박인호에게 천도교 교주 자리를 계승시켰다.[1]

1912년 이후 우이동 천도교 본부에 ‘봉황각’을 짓고 독립운동 투사를 양성했으며,[1] 1919년에는 3·1 운동을 주도했다.[1]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1] 병으로 보석된 직후인 1922년에 사망했다.[1]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7. 2. 천도교의 발전과 영향

손병희는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1] 근대화와 민족의식 고취에 힘쓰며 민족 종교로 발전시켰다.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최시형을 거쳐 손병희에게 이어졌고, 손병희는 동학의 교리를 계승하면서도 시대 변화에 발맞춰 천도교라는 새로운 이름을 내걸었다.

손병희는 일진회와의 갈등 속에서도 천도교의 민족적 성격을 지켜냈다.[1] 송병준, 이용구 등 친일 세력이 주도한 일진회는 천도교 내에서 큰 갈등을 일으켰으나, 손병희는 이들을 교단에서 추방하며 천도교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천도교는 3·1 운동을 주도하는 등 민족 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1] 손병희는 1919년 3·1 운동을 주도하며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이로 인해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러한 노력으로 천도교는 한국 근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손병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비록 현재 천도교 신자 수는 대한민국 국민의 1% 미만으로 적지만, 천도교가 한국 사회에 남긴 발자취는 여전히 깊다.

7. 3. 현대적 의의

손병희는 한국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서울 탑골공원(현재의 독립공원) 입구의 동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의 호 '의암'을 딴 태권도 품새 '의암'이 있을 정도이다. 비록 천도교 신자 수는 대한민국 국민의 1% 미만으로 적지만,[1] 그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은 여전히 강조되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가문의 뿌리] 손순·손병희 선생 빛나는 '밀양손씨' http://www.bsnews.kr[...] 2024-02-03
[2] 웹사이트 Euiam Sungsa and The Free Faith Era https://web.archive.[...] 2021-07-30
[3] 뉴스 The politics of hair https://www.koreatim[...] 2002-01-05
[4] 기타 1906-04-03
[5] 기타 1906-04-03
[6] 기타 1897-03-10
[7] 서적 어린이그림위인전기 손병희 계몽사
[8] 뉴스 孫秉熙氏絕望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네이버) 1922-05-19
[9] 뉴스 [3·1 운동 100주년 기념 논고] 의암 손병희 선생의 생애와 사상 http://www.dynews.co[...] 동양일보 2019-02-26
[10] 웹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11] pdf 허수 : 문헌 해제 2. 孫秉熙, 『準備時代』 http://has.hallym.ac[...]
[12] 간행물 수의당 주옥경 천도교여성회본부
[13] 뉴스 여성운동 선구자 주옥경 누가 기생이라 폄하하나 http://premium.mk.co[...] 매경프리미엄 2017-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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