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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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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중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1910년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했다. 안중근은 교육과 계몽 운동을 펼치고 의병 활동에 참여했으며, 동양 평화를 주장하는 '동양 평화론'을 저술했다. 그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그의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분야에서 기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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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안중근 1910
존칭존경하는
이름안중근
로마자 표기An Junggeun
한자 표기安重根
한글 표기안중근
출생일1879년 9월 2일
출생지조선 황해도 해주부
사망일1910년 3월 26일
사망지일본 제국 관동주 뤼순
사망 원인교수형
종교천주교
세례명토마스
다른 이름안응칠, 안다묵
본관순흥
배우자김아려
아버지안태훈
어머니조마리아
자녀안현생 (장녀, 1902년 - 1960년)
안문생 (장남, 1905년 - 1917년)
안준생 (차남, 1907년 - 1951년)
활동
주요 활동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직업독립운동가, 항일 의병장, 사상가, 저술가, 시인, 작가, 서예가
활동 이념민족주의, 범아시아주의
소속 단체대한의군 (1907년~1909년), 대한의군 참모중장, 특파독립대장, 아령지구사령관
관련 활동독립운동
재판 및 처벌
범죄 혐의살인죄 (이토 히로부미 암살)
형벌사형 (교수형)
사후 훈장건국훈장 대한민국장
기타
동양평화론http://www.ndl.go.jp/site_nippon/kensei/shiryou/limage/Gazou_40_3.html
지도

2. 생애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안향의 26대손으로, 어릴 적 이름은 응칠(應七)이었다. 가슴과 배에 일곱 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아 태어났다는 의미였다.[3] 성격이 경솔하여 이름을 '중근'(중근한국어)으로 바꾸었다.

1894년 16세에 김아려와 혼인하였고, 같은 해 김구와 처음 만났다.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자 아버지 안태훈은 자경단을 조직하여 동학농민군과 맞섰고, 안중근도 이 과정에 참여했다.

1896년 아버지 안태훈이 천주교에 입교하였고, 1897년 안중근도 19세의 나이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5][6] 이후 프랑스어를 배우며 천주교 전교 사업에 힘썼다. 1898년부터 1904년까지 프랑스인 신부 빌헬름(한국 이름 홍석구)과 함께 천주교 대학 설립을 추진했으나, 조선교구장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 주교의 반대로 무산되었다.[7]

1905년 아버지 안태훈이 사망하였다. 1906년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으며, 서북학회에 가입하였다. 1907년에는 석탄회사 삼합을 설립하였으나, 같은 해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만주로 망명하였다.

1908년 7월 전제덕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지구 사령관 자격으로 엄인섭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입,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러나 이후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패배하였다.[215]

1909년 초, 안중근은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단지동맹을 결성하고, 왼손 약지를 잘라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고 혈서를 썼다.[73]

2. 1. 생애 초반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안향의 26대손으로, 어릴 적 이름은 응칠(應七)이었다. 가슴과 배에 일곱 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아 태어났다는 의미였다.[3]

1894년 16세에 김아려와 혼인하였고, 같은 해 김구와 처음 만났다.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자 아버지 안태훈은 자경단을 조직하여 동학농민군과 맞섰고, 안중근도 이 과정에 참여했다.

프랑스 신부 빌헬름


1896년 아버지 안태훈이 천주교에 입교하였고, 1897년 안중근도 19세의 나이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5][6] 이후 프랑스어를 배우며 천주교 전교 사업에 힘썼다. 프랑스인 신부 빌헬름(한국 이름 홍석구)과 함께 천주교 대학 설립을 추진했으나, 조선교구장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 주교의 반대로 무산되었다.[7]

1905년 아버지 안태훈이 사망하였다. 1906년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으며, 서북학회에 가입하였다. 1907년에는 석탄회사 삼합을 설립하였으나, 같은 해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만주로 망명하였다.

2. 1. 1. 출생과 가계

체포 후 사진(1909년)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安泰勳)과 어머니 조마리아(趙瑪利亞)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202] 아버지 안태훈(安泰勳)과 어머니 조마리아(趙瑪利亞)의 맏아들로 태어났다.[3] 진해 명예현감을 지낸 할아버지 안인수(安仁壽)는 해주 일대에서 미곡상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다.[204]

어릴적 이름은 응칠(應七)이었는데, 이는 안중근이 태어날 때 등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이었다. 안중근은 이 이름을 해외에 있을 때 많이 사용했다. 1894년, 16세 때 김아려와 결혼하여 후에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다.[56]

안중근의 가계는 5대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다소 불확실하다. 순흥 안씨 족보에 따르면, 14대조 안숙관과 13대조 안류가 통정대부(정3품)의 품계를 받았을 뿐, 5대조 안기옥(安起玉)에 이를 때까지 벼슬에 나가지 못했다.

안기옥 대에 이르러 무과에 급제, 관직 진출을 꾀하였다. 안기옥과 그의 네 아들 안영풍(安永豊), 안지풍(安知豊, 안중근의 고조부), 안유풍(安有豊), 안순풍(安順豊)은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다. 안지풍의 장남 안정록(安定錄, 안중근의 증조부), 안유풍의 아들 안두형(安斗亨), 안유풍의 손자 안인환(安仁煥), 안순풍의 아들 안신형(安信亨) 등이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고, 안유풍의 손자 안인권(安仁權)은 절충장군의 품계를 받았다. 안정록의 아들이자 안중근의 할아버지인 안인수는 통훈대부와 진해현감을 지냈다.

안중근은 어렸을 때부터 사냥을 좋아했고, 서당 공부를 빼먹고 놀러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차분히 앉아있는 날이 드물자 할아버지는 원래 이름인 응칠 대신 '무거울 중(重)'에 '뿌리 근(根)'자를 써서 중근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개화당 정객의 식객으로 있었던 아버지 안태훈이 척신정권에 의해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였다. 이에 할아버지 안인수는 일가를 이끌고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피신했다. 안중근도 가솔을 따라 청계동으로 이주했고, 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훈장을 초빙하여 공부했으나, 사서오경에는 이르지 못하고 통감 10권까지만 배웠다고 한다.

2. 1. 2. 유년 시절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202] 아버지 안태훈(1862년)과 어머니 조마리아(趙瑪利亞)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진해 명예현감을 지낸 할아버지 안인수(安仁壽)는 해주 일대에서 미곡상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다.[204] 1911년 한국을 방문하여 안태훈 일가의 활동지를 답사한 베네딕토 수도원의 노베르트 베버 신부가 작성한 여행기에 따르면, 안인수와 그의 아들 6형제와 가족 36인이 해주에서 일가를 이루고 살았을 당시에 안인수는 4백 석의 토지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204] 할아버지가 대지주이자 미곡상으로 재산을 많이 축적하여 안중근은 어렵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다.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순흥 안씨 안태훈과 조마리아의 첫째 아들이었다. 안중근은 안향의 26대 손이다. 그의 어린 시절 이름은 안응칠(安應七)이었다. 이 이름은 가슴과 배에 있는 일곱 개의 점에서 유래했는데, 북두칠성의 기운에 따라 태어났다는 의미이다.[3]

안중근의 가계는 그의 5대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다소 불확실하다. 순흥 안씨 족보에 의하면 17대조 안려(安廬)는 사마시에 합격한 생원으로서 건원릉 참봉을 지냈다. 14대조 안효신은 어린 나이에 문단에서 명성을 날릴 정도로 문장에 능했으나 벼슬을 구하지 않고 황해남도 해주로 내려가 은거 생활을 했다. 이로써 안효신은 순흥 안씨 참판공파의 해주 입향 시조가 되었다. 이후 안중근의 선조들은 안중근의 14대조 안숙관과 13대조 안류가 통정대부(정3품)의 품계를 받았을 뿐이며, 안중근의 5대조 안기옥(安起玉)에 이를 때까지 벼슬에 나가지 못했다.

안중근의 5대조 안기옥의 대에 이르러 무과에 급제, 관직 진출을 꾀하였다. 이는 향리직을 장기간 세습하면서 사회경제적 능력을 갖추어 나간 이서(吏胥)층이 과거를 통해 양반층으로 편입되려는 신분상승 운동을 벌였음을 의미한다.

안중근은 양반 집안에서 셋째 아들과 딸 하나[47]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후에 그의 동생인 안정근, 안공근과 사촌 형제인 안명근, 안경근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48]

본인이 직접 쓴 자서전에 따르면, 성격이 너무 경솔해서 이름()을 중근(중근한국어)이라 하고, 배와 가슴에 흑자가 일곱 개나 있어서 응칠(응칠한국어)이라 지었다고 한다.[49]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직전까지 안응칠(安應七)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79]

어린 시절 그는 한문과 서양 과학을 배웠지만, 무술과 사격에 더욱 흥미를 느꼈다. 당시 안태훈의 집에 피신해 있던 미래의 한국 독립운동 지도자 김구는 어린 안중근이 뛰어난 사격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책 읽기를 좋아했으며 강한 카리스마를 지녔다고 기록했다.[4]

1894년, 16세 때 김아려와 결혼하여 후에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다.[56]

16세에 안중근은 아버지와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여 세례명 "토마스"를 받았다.[5][6] 그리고 프랑스어를 배웠다. 일본군을 피해 도망치던 중 안중근은 한국 천주교회의 프랑스 신부 빌헬름(한국 이름 홍석구; 洪錫九)에게 피신하여 몇 달 동안 그의 교회에 숨어 지냈다. 신부는 안중근에게 성경을 읽도록 권유하고 그와 여러 차례 논의를 나누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천주교 신앙을 유지했으며, 아내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아들에게 신부가 되기를 바란다고까지 했다.[7]

2. 1. 3. 천주교 입교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202]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마리아(趙瑪利亞)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안중근은 안향의 26대 손이다. 그의 어린 시절 이름은 안응칠(安應七)이었는데, 가슴과 배에 있는 일곱 개의 점에서 유래한 것으로 북두칠성의 기운에 따라 태어났다는 의미이다.[3]

16세에 안중근은 아버지와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Thomas)라는 세례명을 받았다.[5][6] 니콜라 빌렘 신부에게 천주교 영세를 받았으며, 당시 조선교구장으로 사목 중이던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 주교와도 인연을 맺고, 성당 건축에 필요한 헌금을 봉헌하는 등 왕성한 신앙생활을 했다.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다. 일본군을 피해 도망치던 중 안중근은 한국 천주교회의 프랑스 신부 빌헬름(한국 이름 홍석구; 洪錫九)에게 피신하여 몇 달 동안 그의 교회에 숨어 지냈다. 빌헬름 신부는 안중근에게 성경을 읽도록 권유하고 그와 여러 차례 논의를 나누었다. 안중근은 죽을 때까지 천주교 신앙을 유지했으며, 아내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아들에게 신부가 되기를 바란다고까지 했다.[7]

1894년, 16세 때 김아려와 결혼하여 후에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다.[56]

2. 2. 계몽 운동과 의병 운동

안중근은 1895년 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배웠으며, 1897년에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조제프 빌렘(한국명 홍석구) 신부에게서 토마스(도마)라는 세례명을 받았다.[211] 홍석구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으나, 뮈텔 주교가 조선인들이 학문을 하면 천주교 교리에 의문을 품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프랑스어 배우기를 그만두었다.[211]

1906년, 안중근은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으며, 서북학회에도 가입하였다.[49] 1907년에는 석탄회사 삼합을 설립하였으나, 같은 해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 되자 만주로 망명하였다.

1908년 7월, 안중근은 전제덕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지구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입,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러나 이후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패배하였다.[215]

1909년 초, 안중근은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단지동맹을 결성하고, 왼손 약지를 잘라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고 혈서를 썼다.[73]

안중근의 가계 및 연표는 다음과 같다.

연도내용
1879년 9월 2일황해도 해주부 수양산(현재 북한)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47] 아버지 안태훈, 어머니 조마리아.
1894년16세에 김아려와 혼인.[55][56] 김구와 첫 만남.
1896년부친 안태훈이 천주교에 입교.
1897년19세에 천주교에 입교.[61][62]
1898년~1904년천주교 전교 사업 및 천주교대학 설립 추진 (불발).
1905년부친 안태훈 사망.
1906년삼흥학교, 돈의학교 운영, 서북학회 가입.
1907년석탄회사 삼합 설립.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만주 망명.
1908년 7월대한의군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지구 사령관 자격으로 국내 진입, 일본군과 교전 후 패배.
1909년11명의 동지들과 단지동맹 결성.[71][72]


2. 2. 1. 계몽 운동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기자, 안중근은 국권 회복 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갔으나 상하이의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절당하고 실망하여 귀국했다.[49] 이 무렵 부친상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1906년 3월 3년상을 마치기도 전에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했다. 생계를 위해 석탄상회를 경영했으나 실패했고,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석탄회사를 정리하고 가산을 털어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 교육운동을 시작했다.[49] 이후 황해남도 천주교 계열 학교인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여 교사로도 활동했다.[49]

1907년 대구에서 서상돈 등이 주도한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49]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일본의 방해로 실패했다.[49]

2. 2. 2. 의병 활동

1907년(융희 1년) 고종 황제가 헤이그 특사 사건의 책임을 지고 강제 퇴위당한 뒤 한일신협약 체결, 군대 해산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그는 노선을 바꾸어 독립 전쟁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데 가담하였다.[214] 매국노 척결을 주장하던 그는 의병대를 찾아다녔다. 그 뒤 황해도 의병대의 일원으로 일본군과 싸우다가, 직접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하고자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에 가입하고, 곧 계동청년회의 임시사찰(臨時査察[214])에 선출되었다.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1908년 7월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 자격으로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 뒤 본격적인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흥군과 신아산 부근의 야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얼마 후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때 기습 공격을 받은 이유는 다른 의병 대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혼자 뜻으로 전투에서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거하여 석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215] 이 일로 의병의 신임을 잃은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새로 의병을 일으키려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부대는 곧 해체되었다.

1909년(융희 3) 초, 안중근은 뜻이 같은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의병으로 재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안중근은 이때 왼쪽 손의 약손가락(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혈서로 결의를 다졌다. 안중근의 수인(手印)은 이때부터 찍기 시작한 것이다.

2. 3. 이토 히로부미 저격

저격 직전의 이토 히로부미(왼쪽에서 두 번째)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216] 대동공보사에서 이 소식을 들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했다. 10월 21일,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했다.

당초 동청철도의 출발지인 장춘의 남장춘(南長春), 관성자(寬城子)역과 도착지인 하얼빈, 채가구(蔡家溝)역에서 암살을 시도하려 했으나,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여 하얼빈과 채가구역에서 저격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217]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구역으로,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공격하기로 했으나, 채가구역에서의 계획은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는 코콥초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사격하였다. 총알은 할로포인트를 사용하였으며, 현재는 금지되어있는 총알이다.[218] 이외에도, 일곱 발의 총알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모리 타이지로(森泰二郞),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남만주 철도의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에게 발사되었다.[216]

총격 후, 안중근은 태극기를 높이 들어 올리며 에스페란토어로 "코레아 우라!"(Koreio! Ura!eo)를 3번 크게 외쳤다. 이는 '대한 독립 만세'라는 뜻이었다.[216]

총격 30분 만인 오전 10시경, 이토는 피격 직후 열차로 옮겨졌다. 죽기 직전에 브랜디(각성제로 사용)를 한 모금 마시고 "범인은 조선인인가"하고 물었으며, 주변에서 그렇다고 대답하자 "바보 같은 녀석"이라고 말하며 죽었다고 한다. 당시 동행한 의사의 증언으로는 열차 내로 옮길 때까지 살아있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서는 "난 틀렸다... 다른 부상자는 누구지"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도 기록되어 있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2. 3. 1. 저격 배경

1909년 10월,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이토는 러시아 대표와의 협상을 마치고 기차로 돌아오던 중이었다. 안중근은 역 플랫폼에서 FN M1900 권총으로 이토를 세 번 쏘았다.[8] 이와 함께 일본 총영사 가와가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청 서기관 모리타 지로(森泰二郞), 남만주철도 간부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도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총격 후 안중근은 러시아어로 "Корея! Ура!"(코리아! 만세!)라고 외치며 한국 국기를 흔들었다.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 경비병에게 체포되어 일본 식민 당국에 인계되었다. 이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안중근은 감사의 표시로 십자가 표시를 했다. 안중근은 "나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 이것은 고결한 애국자의 행위이다."라고 말했다.[7]

재판에서 안중근은 한국 의병의 중장이라고 주장하며 전쟁포로로 다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토가 저지른 것으로 믿는 15가지 죄목을 제시하며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다.[9] 안중근은 이토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지시했다고 믿었으나, 실제로는 미우라 고로가 지시하고 이토에게 보고했다.[12][10]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한 15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안중근이 제시한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이유
명성황후 시해
고종 폐위 음모
한국에 대한 14개 불평등 조약 강요
무고한 한국인 학살
무력에 의한 한국 정부 권력 찬탈
한국 철도, 광산, 삼림, 하천 약탈
일본 화폐 사용 강요
한국 군대 해산
한국인 교육 방해
한국인 해외 유학 금지
한국 교과서 몰수 및 소각
세계에 한국인이 일본의 보호를 원한다는 소문 유포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평화롭다고 일본 천황을 속임
아시아 평화 파괴
고메이 천황 시해[11][12]



안중근은 "나는 한국 의병 중장으로서 동양의 평화를 깨뜨리고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악화시킨 범죄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고 밝혔다.

안중근은 1909년 1월, 동지 12명과 함께 단지동맹을 결성, 약지를 자르고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고 썼다.[73] 대동공보에 기고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단결을 호소하기도 했다.[77]

사건 당시 정보 혼란으로 인해 여러 추측이 있었고, 안중근 외 다수 범인설, 배후 음모설 등이 제기되기도 했다.

2. 3. 2. 하얼빈 의거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이 대동공보사에 전해졌다.[216] 이 소식을 들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했다. 10월 21일, 안중근은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했다.

당초 계획은 동청철도의 출발지인 장춘의 남장춘(南長春), 관성자(寬城子)역과 도착지인 하얼빈, 채가구(蔡家溝)역에서 암살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여 하얼빈과 채가구에서 저격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217]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구역으로 이동하였고,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채가구역에서의 계획은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사격하였다. 총알은 할로포인트를 사용하였으며, 현재는 금지되어있는 총알이다.[218] 이외에도, 일곱 발의 총알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모리 타이지로(森泰二郞),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남만주 철도의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에게 발사되었다.[216]

총격 후, 안중근은 가슴 안에 있던 태극기를 높이 들어 올리며 에스페란토어로 "코레아 우라!"를 3번 크게 외쳤다. 이 외침은 '대한 독립 만세'라는 뜻이었다.[216]

총격 30분 만인 오전 10시경, 이토 히로부미는 피격 직후 열차로 옮겨졌다. 죽기 직전에 브랜디(각성제로 사용)를 한 모금 마시고 "범인은 조선인인가"하고 물었으며, 주변에서 그렇다고 대답하자 "바보 같은 녀석"이라고 말하며 죽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사건 현장에 있던 주변인물들의 증언에 의한 것이지만 조작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당시 동행한 의사의 증언으로는 열차 내로 옮길 때까지 살아있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서는 죽기 직전에 "난 틀렸다... 다른 부상자는 누구지"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도 기록되어 있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2. 3. 3. 체포와 재판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FN M1900 권총으로 저격했다.[218]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왔고, 이 소식을 들은 안중근은 암살에 자원했다.[216]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은 당초 장춘의 남장춘, 관성자역과 하얼빈, 채가구역 등 4곳에서 암살을 시도하려 했으나, 자금과 인력 부족으로 하얼빈과 채가구역에서 저격하기로 계획을 변경했다.[217] 채가구역에서의 계획은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한 후,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총알은 할로포인트를 사용했다.[218] 이 외에도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모리 타이지로,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남만주 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에게도 총격을 가했다.[216]

저격 후 안중근은 가슴에 있던 태극기를 들어 올리며 에스페란토어로 "코레아 우라!"(Koreio! Ura!eo)라고 세 번 외쳤는데, 이는 대한 독립'''만세'''라는 뜻이었다.[216]

총격 30분 만인 오전 10시경, 이토 히로부미는 사망했다. 그는 죽기 직전에 "범인은 조선인인가"하고 물었고, 주변에서 그렇다고 대답하자 "바보 같은 녀석"이라고 말하며 죽었다고 한다.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군에 체포되어 1차 조사 후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으로 넘겨졌다.[219] 최재형은 안중근이 러시아 제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하고 변호사 미하일로프 주필을 변호인으로 준비했으나, 안중근은 일본 제국 정부에 넘겨져 관동주 뤼순 감옥에 갇혔다.

1910년 2월 14일, 안중근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15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국내외에서 변호 모금 운동이 일어났고 안병찬 등이 무료 변론을 자원했으나, 일제는 일본인 변호사를 선임했다. 안중근은 수감 중에도 동양 평화론을 저술했으나 완성하지 못했다.

2. 3. 4. 사형 집행과 유언

1910년 2월 14일, 안중근은 관동주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216] 안중근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에게 전보를 보내 사제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며, 자신의 사형 집행일로 성금요일을 희망한다는 뜻을 전했다.[216]

1910년 3월 9일, 안중근은 황해도 천주교 신천본당 주임신부였던 조제프 빌렘 신부에게서 고해성사를 받았다.[216] 3월 10일에는 빌렘 신부의 집전으로 마지막 미사를 봉헌했다.[216]

3월 25일, 세계적으로 성탄절, 정월 초하루, 황제의 탄신일에는 사형이 없다는 관례와 대한제국 내의 의병 활동이 강하게 전개되고 있어 통감부에서 이를 고려하여 사형 연기를 요청, 사형 집행이 연기되었다. 이날은 순종 황제가 태어난 건원절이었다.[216]

안중근은 면회를 온 두 동생에게 노모의 안부를 묻고 불효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했으며, 장남을 천주교 사제로 길러 달라고 부탁했다. 또한 동생 안정근에게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 공업 또는 식림과 같은 일에 종사하도록 당부했다.[216]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의 사형은 뤼순 감옥에서 집행되었다. 향년 32세였다.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이 참석했다.[216]

구리하라 전옥은 안중근에게 “금년 2월 24일 뤼순 지방 법원의 언도와 확정명령에 따라 사형을 집행하겠다”는 뜻을 전했다.[226] 소노키의 통역이 끝나자 안중근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구리하라 전옥은 다시 한번 안중근에게 “뭔가 남길 말이 없느냐”라고 물었다.[226] 안중근은 "아무것도 남길 유언은 없으나 다만 내가 한 일이 동양 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 한·일 양국인이 서로 일치 협력해서 동양평화의 유지를 도모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226][225]

어머니의 뜻에 따라 항소를 포기한 안중근 의사는 사형 집행 전인 1910년 3월 9~10일경, 어머니가 준비한 하얀 명주천으로 지은 수의를 가져온 두 동생 안정근안공근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222]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223][224][225]

3. 사상과 신념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통해 대한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추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의 행동과 사상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1909년 11월 7일 조선통감 소네 아라스케가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에게 제출한 조사 보고서에는 안중근을 "흉한(兇漢)"이라고 칭하며, 평양에서 조성환[158]에게 반일 교육을 받고, 간도에서 이상설[159]의 문하생이 되었으며, 최재형[160]과 합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61] 이 보고서는 안중근을 "무뢰한"이자 "포악한 자"로 평가하고, 《대동공보》를 재미 한국인들의 운동 지원 창구로 주목하며, 미국으로부터의 자금 흐름에 관심을 가졌다.[161]

1984년 일본사회당의 니이무라 가쓰오 중의원 의원은 안중근을 포함한 한국 통치 시대의 "정치범" 명예 회복을 제기했지만, 당시 외무상 아베 신타로는 명확한 답변을 피했다.[189]

일부에서는 한국 병합에 반대하며 한국 근대화에 힘썼던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이 한국 병합을 앞당겼다는 주장이 제기된다.[162][183] 도널드 키인은 암살이 대한제국의 소멸이라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한다.[90] 그러나 이토 유키오 교토대학교 교수는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을 보호국으로 유지하려는 입장이었지만, 한국통감 시대에 국권 침탈에 관여했고, 결국 병합을 결정하는 각의 결정도 승인했다고 지적한다.[163][164] 따라서 병합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고, 암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아니지만, 일진회의 합방 운동 등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병합이 가속화되었다.[165] 와타나베 쇼이치는 이토 히로부미 암살로 인해 한국 병합이 급속히 진행되었다고 주장한다.[166]

일본 정부는 안중근에 대해 "범죄자", "테러리스트", "사형 판결을 받은 인물"이라는 견해를 보인다. 2014년 당시 내각관방장관 스가 요시히데는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고 발언했다.[155] 이후 "안중근은 내각총리대신과 한국통감을 역임한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하고 사형 판결을 받은 인물이다"라고 수정했다.[156][157] 2014년 1월 21일 중국망은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극동 연구소 전문가 콘스탄틴 아스몰로프의 인터뷰를 인용해 "일본에게 있어 그는(안중근) 테러리스트이며, 수상 암살범이다"라고 보도했다.[180] 산케이 신문은 안중근을 "초대 한국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테러리스트"라고 표현했다.[181]

3. 1. 동양평화론

안중근은 옥중에서 《동양 평화론》을 집필하여 하얼빈 의거를 동양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중·일 3국이 서로 독립을 유지하며 협력하여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에 맞서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보았다.[242]

이토 히로부미는 '동양 평화'를 내세워 이웃 나라를 침략하고 일본에 종속시키려 했고, 안중근은 이러한 이토를 '동양 평화의 교란자'로 여겨 제거하고자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을 일으켰다. 안중근은 재판 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 동양 평화를 위한 정의로운 행동이었음을 강조했다.[242] 그는 사형 직전 남긴 최후 발언에서도 "나의 이 거사는 동양 평화를 위하여 결행한 것이므로 임석 제원들도 앞으로 한·일 화합에 힘써 동양 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라고 말하며 동양 평화에 대한 염원을 드러냈다.[242]

안중근은 한·중·일 3국이 독립적으로 협력하여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야 동양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일본이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대동아공영권의 문제점을 간파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구상했다.[242] 러일 전쟁 당시 일본의 발전에 주목하며, 중국, 한국, 일본이 연합하여 서구 열강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메이지 천황이 동아시아 평화와 한국 독립을 원한다고 믿었으며,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유를 메이지 천황에게 알리고자 했다.[7]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이 일본과 한국의 우호 관계를 맺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우정이 중국과 함께 세계가 따라야 할 모범이 되기를 희망했다. 그의 범아시아주의 사상은 미완성 유고인 《동양 평화론》에 담겨 있으며, 한국, 일본, 중국 간의 연합군 편성 및 공동 화폐 발행을 제안했다.[7][21] 메이지 대학의 사사가와 노리카쓰(笹川紀勝) 교수는 안중근의 사상이 유럽 연합과 맞먹는 수준이며, 국제 연맹보다 10년 앞선 개념이라고 평가했다.[22]

2014년 당시 일본 내각관방장관 스가 요시히데(菅義偉)는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고 발언했으나,[155] 이후 "안중근은 내각총리대신과 한국통감을 역임한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하고 사형 판결을 받은 인물이다"라고 수정했다.[156][157]

3. 2. 천주교 신앙

안중근은 19세 때 니콜라 빌렘 신부에게 천주교 영세를 받았으며, 세례명은 토마스(Thomas)이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이 먼저 영세를 받아 입교한 후, 그의 집안은 모두 영세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안중근은 당시 조선교구장으로 사목 중이던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 주교와도 인연을 맺고, 성당 건축에 필요한 헌금을 봉헌하는 등 왕성한 신앙생활을 해왔다.[252]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의 의거 이후 사형 선고를 받은 안중근은, 사형집행 직전 신부를 만나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집전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는 안중근의 의거를 살인 행위로 단죄, 조선교구의 신부들로 하여금 안중근에게 성사를 베푸는 것을 금지했다. 이에 니콜라 빌렘 신부가 뮈텔 주교의 명을 어기고 뤼순 감옥으로 찾아가 미사와 고해성사를 집전해주었고, 안중근은 성사를 받고 사망했다. 뮈텔 주교는 주교에게 불순명했다는 이유로 빌렘 신부의 성사집행권을 정지시켰으나, 빌렘 신부가 교황청 교회법원에 이의를 제기해 성사집행권 정지는 해제되었다. 한편 천주교 신앙이 독실했던 안중근은, 자신의 아들인 안분도를 사제로 키우려고 계획했었다.[252]

오랜 기간동안 한국 천주교에서 살인자로 단죄되었으나, 1990년대에 들어 안중근에 대한 한국천주교회의 평가가 변화하기 시작했고 1993년 8월, 탄신 미사를 집전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안 의사의 당시 행위는 살인이 아니라 독립운동이자 정당방위로 봐야 마땅하다"라는 입장을 밝히며 한국 천주교에서 안중근의 평신도 신분은 완전히 복권되었다.[252]

4. 평가

안중근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며, 시대와 국가, 사람에 따라 크게 다르다.[120][121][122] 특히, 한국과 일본의 안중근 평가 차이는 양국 갈등의 상징이 되었다.[123]

안중근은 사형 집행 후 조국에 묻어달라고 유언했지만, 그의 시신은 뤼순 감옥 근처 죄수 공동묘지에 묻혔다. 일제는 안중근의 매장 위치를 숨겼고, 현재까지도 유해와 정확한 위치는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안공근은 시신 인수를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형제를 감금, 강제 귀국시켰다. 이는 안중근의 묘가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 해방 후 백범 김구는 1946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효창공원에 안장하고, 안중근 의사의 가묘를 조성했다. 김구는 안중근의 유해를 찾겠다는 결의를 보였으나, 1949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며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가묘 앞에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봉환되면 모셔질 자리"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227]
  • 1962년 3월 1일, 안중근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2008년 남북 정부는 공동으로 유해 발굴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뤼순 감옥 북쪽 야산에 묻혔다는 증언에 따라 1차 발굴을 진행했지만,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 회장 안태근은 발굴지가 일본인 공공묘지였으며, 10억의 예산을 투입했음에도 실패했다고 밝혔다.[228]
  • 안태근 회장은 뤼순감옥구지묘지가 유해 매장지라고 주장한다. 정부 발굴지와 반대 방향으로 감옥에서 동쪽으로 500m 떨어진 곳이며, 가장 오래된 죄인 묘역이다. 안 회장은 1943년 수학여행 당시 이곳을 방문했던 사람들과 주민들의 증언을 근거로 제시하며, 1차 발굴 때 이곳을 조사하지 않은 점을 아쉬워했다. 현재 해당 지역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유해 발굴이 더욱 어려워졌다.[228]
  • 2019년 12월 26일, 장흥 해동사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91호로 지정되었다.[229]
  • 2022년,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안중근을 '신앙의 선조'로 선정했다.[230][231]

4. 1. 긍정적 평가

안중근의 태극기. 한국 독립을 열망하다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은 당시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고 있던 한국인들과 많은 중국인들에게 칭송받았다. 원세개, 쑨원, 량치차오와 같은 저명한 중국 정치 지도자들은 안중근을 칭찬하는 시를 썼다.[23]

2010년 한국에서 열린 안중근 심포지엄에서 도쿄대학교에서 근무했던 활동가 와다 하루키는 교토대학교의 역사학자인 이토 유키오를 인용하여 안중근을 평가했다.[24] 이토 유키오는 2009년에 발표한 글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통치가 문화적 차이로 인해 한국 병합을 위한 첫 단계로 여겨졌기 때문에 한국인들의 강력한 저항을 불러일으켰으며, 이토의 이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암살했다 해도 안중근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2010년 3월 26일, 대한민국에서는 안중근 의거 100주년을 기리는 전국적인 추모 행사가 열렸으며, 여기에는 정운찬 총리가 주도한 기념식과 추모 공연이 포함되었다.

4. 2. 부정적 평가

일본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에 대한 적대감이 커졌고, 이는 조선 강점의 논리로 이어지기도 했다.[7]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이 식민지화의 마지막 단계를 가속화했다고 주장하지만,[19] 다른 학자들은 이에 반박한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은 당시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던 한국인들과 많은 중국인들에게 칭송받았다. 원세개, 쑨원, 량치차오 등 저명한 중국 정치 지도자들은 안중근을 칭찬하는 시를 썼다.[23]

2010년 한국에서 열린 안중근 심포지엄에서 와다 하루키(和田春樹)는 교토대학교 역사학자 이토 유키오(伊藤之雄)의 평가를 인용했다. 이토 유키오는 2009년 발표한 글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통치가 문화적 차이로 인해 한국인들의 강한 저항을 불러일으켰으며, 이토의 이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암살했다 해도 안중근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사건 당시 정보 혼란으로 피해자와 범인 수에 대한 여러 추측이 있었다. 1909년 10월 27일자 각 신문에는 "5, 6명의 한국인에게 저격당했다"거나 "환영객들 속에 섞여 있던 한국인 수명에게 저격당했다"는 보도가 있었다.[105] 그러나 목격자들의 진술과 안중근의 자백,[107][108] 비서관 등의 전보[109]를 종합하면 거의 일치한다. 하지만 몇 발이 발포되었는지, 저격범이 1명인지 다수인지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으며, 단독 범행이 아니었다는 주장과 배후에 국가적 음모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 다수범설

무로타 요시후미(室田義文)는 이토 히로부미의 시신에 박힌 탄환이 안중근의 브라우닝 7연발 권총용이 아니고, 윗층에서 발포된 프랑스제 카빈 소총의 탄환이며, 역사 2층 식당에서 발포되었다고 주장하며, 저격범이 적어도 2명이었다고 주장했다.[110] 무로타는 당시부터 "범인은 안중근이 아니다"라고 주장했지만, 외교 문제 때문에 부정되었다고 설명한다.[111] 러시아는 암살 관여 의심을, 일본은 러일 관계 악화를 두려워하여 경비 책임을 묻거나 깊이 추궁하지 않았다. 무로타는 진상 규명을 요구했지만, 야마모토 곤베이(山本權兵衛)가 외교 문제를 이유로 반대[112]하여 항의가 봉쇄되었다고 한다.[113]

여러 설에서는 안중근이 사건의 진상을 덮기 위한 인신공양이 되었다고 주장하며, 아키시게 겐지로(明石元二郎),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등이 배후 인물로 거론되었다.[114][115][116]

; 철포탄(주모자는 다른 사람이라는 설)

  • 기독교계 비밀결사와 미국의 음모라는 설이 사건 이틀 후 도쿄 니치니치 신문에 실렸다.[117]
  • 러시아 국적 조선인 최재형[160](신문에서는 "최세향")이 암살을 지시했다는 설도 당시 신문에서 보도되었다.[118]
  • 당시 만주 주재 외무서기관 혼다 구마타로(本多熊太郎)는 하얼빈 조선인들을 장악한 러시아 국적 김 모씨가 안중근을 부추겼다고 단언했다.[119]


안중근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며, 시대와 국가, 사람에 따라 크게 다르다.[120][121][122] 특히 한국과 일본의 평가 차이는 양국 갈등의 상징이 되었다.[123]

; 평가 없음

안중근이 "일본의 전 총리들을 암살한 인물"로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지만,[185] 중국 정부는 안중근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민족주의적 독립운동을 자극하고 국내 사회 불안을 증가시킨다고 판단하여 적극적인 평가를 하지 않았다.[185]

1980년대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중국 교과서에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고 중국 침략 준비를 가속화했다'는 서술이 있었고, 안중근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고 한다.[183]

2006년 한국인이 하얼빈시에 4.5m 안중근 동상을 건립했으나, "외국인 동상 건립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철거되었다.[184] 이토 암살 100주년인 2009년 10월 26일 하얼빈시 기념식은 조선민족민예박물관에서 개최되었고, 여순시 전쟁전시관 안중근 특별전은 "국제항일열사전시관"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다.[185]

; 기타

2020년10월, JTBC 뉴스룸 보도에 따르면, SAT와 AP 교과서가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 동안 조선이 중국의 식민지였다고 기술하고 있다.[186] 바이두 백과사전에는 안중근, 윤동주, 윤봉길, 김구조선족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윤동주국적은 중국으로 되어 있다.[186] 이는 조선족이 중국 국적을 취득한 1954년을 고려하면 잘못된 사실이며, 독립운동가들이 만주, 상하이, 길림성에 거주하며 독립운동을 펼쳤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경우, 조선의 항일 운동이 중국 항일 운동 역사에 편입될 수 있다.[186]

4. 3. 논란



안중근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2010년 한국에서 열린 안중근 심포지엄에서 도쿄대학교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교수는 교토대학교 이토 유키오(伊藤之雄) 교수의 2009년 글을 인용하며, 이토 히로부미의 통치가 문화적 차이로 인해 한국 병합의 첫 단계로 여겨져 한국인들의 강력한 저항을 불러일으켰으며, 이토의 이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암살했다 해도 안중근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평가했다.[24]

2010년 3월 26일, 대한민국에서는 안중근 의거 100주년을 기리는 전국적인 추모 행사가 열렸으며, 정운찬 총리가 주도한 기념식과 추모 공연이 포함되었다.

4. 3. 1. 테러리스트 논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은 당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던 한국인들과 많은 중국인들에게 칭송받았다. 원세개, 쑨원, 량치차오 등 저명한 중국 정치 지도자들은 안중근을 칭찬하는 시를 썼다.[23]

대한민국에서는 안중근을 국민 영웅으로 추앙하는 반면, 일본 정부는 역사적으로 안중근을 테러리스트이자 범죄자로 간주해 왔다. 2014년 1월, 당시 일본 정부 대변인이자 훗날 총리가 된 스가 요시히데는 중국 하얼빈에 있는 안중근 기념관을 두고 동아시아 국가들 간의 "평화와 안정 구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반면 중국은 안중근을 "유명한 반일 애국지사"라고 칭했고, 대한민국 외교부는 안중근을 "높이 존경받는 인물"이라고 밝혔다.[32] 이러한 평가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2017년 2월, 대한민국 인천시에서 게시된 포스터에 안중근의 사진이 사용된 것에 대해 대한민국 경찰이 비판을 받았다.[33] 이 포스터는 테러를 경고하는 내용이었고, 많은 대한민국 시민들은 온라인상에서 경찰을 비판하며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로 암시하려는 의도였느냐"고 질문했다. ''코리아 타임스''의 한 경찰관은 사과하며 안중근을 테러와 연관시키려는 의도는 없었고, 모든 포스터는 철거되었다고 해명했다.[34]

북한에서는 안중근을 애국자로 평가하면서도, 김일성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를 만나지 못해 뜻을 이루지 못한 인물로 평가한다. 과거 북한 교과서에서는 안중근이 양반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김일성의 반면교사처럼 다루어졌다.[150][151] 2009년에는 “탁월한 지도자를 만나지 못하고 개인 테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목숨을 던져도 독립의 염원을 이루지 못한 민족의 풍운아”라고 평가했다.[152]

2015년 3월 5일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가 피습 사건을 당했을 때,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피습범을 안중근에 비유하며 칭찬했다. 조선중앙통신은 “미제의 전쟁 책동에 반대하는 의로운 행동이 테러라면, 일제의 조선 침략에 반대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처형한 안중근 등 반일 애국지사들의 의거도 일본 반동들이 모독하는 것처럼 테러라고 불러야 하는가”라고 주장했다.[154]

4. 3. 2. 밀정 의혹

2019년 KBS 탐사보도부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의 보이지 않는 적이었던 밀정을 추적했다. 일본 외무성과 방위성 기밀문서, 헌정자료실 서신, 중국 당국 공문서 등 5만 장을 분석한 결과, 김좌진 장군의 참모 이정을 포함해 총 895명의 밀정 혐의자 실명을 확인했다. 이 중에는 안중근의 거사 동지인 우덕순도 포함되어 있었다.[251]

1920~30년대 일본 기밀문서에 따르면, 우덕순은 만주 지역에서 일제가 한국인 사회 통제를 위해 만든 친일단체 '조선인민회'의 주요 간부로 활동했다. 조선인민회는 일반 한국인과 독립운동가를 감시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했다. 김주용 원광대 교수는 우덕순이 조선인민회를 통해 밀정을 지휘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분석했다. 우덕순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독립유공자이다.[251]

4. 3. 3. 유해 발굴 문제

안중근은 자신이 사형당하면 조국에 묻어달라고 마지막으로 부탁했다. 그러나 그의 시신은 뤼순 감옥 근처 죄수 공동묘지에 묻혔다. 일제는 안중근을 매장한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지 않아, 그의 유해가 묻힌 곳은 현재까지도 공식적으로 찾지 못하고 있으며, 정확한 위치 역시 알려진 정보가 전혀 없다.[227]

당시 안중근의 동생인 안정근안공근은 형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일본은 안중근의 시신 인수를 거부하고 숙소에 있던 형제를 감금하고 강제 귀국시키는 등 안중근의 시신을 못 가져가게 하기 위해 안달이었다. 안중근의 묘지가 한국 독립 운동의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는 해방 후인 1945년 11월 중화민국에서 돌아와 1946년 6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독립운동 3의사의 유해를 일본에서 찾아 효창공원에 안장하였고, 그 옆에 언젠가는 안치될 안중근 의사의 가묘를 만들었다. 이는 안중근의 시신을 꼭 찾겠다는 김구의 결심을 보여준다. 하지만 김구는 1949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고, 김구 또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가묘 앞에는 “이곳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봉환되면 모셔질 자리로 1946년에 조성된 가묘입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227]

2008년 남북 정부는 광복 이후 처음으로 안중근 유해 공동 발굴에 나섰지만, 유해와 그 위치를 찾지 못했다.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의 뤼순(旅順)감옥 북쪽 야산 어딘가에 안 의사의 유해를 묻었다는 일제 당시 간수들의 증언에 따라 2008년 1차 발굴 작업을 진행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 회장 안태근은 “당시 정부가 발굴 작업을 진행했던 곳은 일본인 공공묘지로, 태평양전쟁 직전에 일본인들이 유해를 파서 본국으로 가져갔다”며 “10억의 예산을 들여 3000여 평의 땅을 파는 대대적인 사업을 진행했으나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말했다.[228]

안태근 회장은 뤼순감옥구지묘지(旅順監獄舊址墓地)에 유해가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발굴을 벌였던 지점과는 반대 방향으로 감옥에서 동쪽으로 500m 떨어진 곳으로, 가장 오래된 죄인 묘역이다. 그는 “1943년 그곳으로 수학여행을 갔던 사람, 아버지와 함께 안 의사의 묘를 참배했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모두 그곳을 안 의사 묘지로 지목한다. 뤼순에 가면 해당 주민들이 실제 그곳을 묘지로 알고 있기도 하다. 1차 발굴지에서 불과 500m 떨어진 곳인데, 1차 작업 때 거길 파지 않은 게 못내 아쉽다.”라고 말했다. 현재 현장에는 이미 아파트가 들어서 유해 발굴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228]

5. 기념 사업

안중근 의사를 기리기 위한 다양한 기념 사업이 대한민국,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진행되어 왔다.

1963년 안중근의사숭모회가 설립되어 윤치영이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1970년에는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서울에 안중근의사기념관이 건립되었고, 2010년 안중근 의사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신관이 건설되었다.[199] 서울 남산공원에 위치한 안중근의사기념관 앞에는 안중근의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1974년에는 작가 김경승이 제작한 안중근 기념 동상이 남산 구 조선신궁 자리에 설치되었는데, 신동아그룹 창업주 최성모가 성금을 희사하기도 했다.[253]

2006년에는 중국 정부에 의해 하얼빈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세워졌다.[27]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 방문 중 시진핑 주석에게 안중근 의사 기념비 건립을 제안했고, 이에 따라 2014년 1월 19일 하얼빈에 새로운 기념관이 개관하여 사진과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28] 2006년 하얼빈에 안중근 의사 동상이 건립되었다가 중국 당국에 의해 철거된 적이 있었는데,[184] 동상 건립이 금지되면서 하얼빈역 내에 비석을 세우려 했으나, 한일·중일 관계 악화로 인해 중국 정부는 기념비 건립 계획을 확대하여 '안중근 의사 기념관'으로 격상시켜 2014년 1월 19일에 완공하고, 다음 날부터 일반에 공개하였다.[200] 이전에 문제가 되었던 동상도 함께 설치되어 있다. 한국은 "환영하며 높이 평가한다"고 발표했지만,[200] 일본은 항의하였다. 2017년 3월 22일, 하얼빈역에 위치한 안중근 기념관은 대한민국의 미국 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에 대한 중국의 보복 조치로 하얼빈시의 한국 미술관으로 이전되었다가,[30] 보수 공사 후 하얼빈역에 다시 문을 열었다.[31]

하얼빈 안중근 기념관


안중근 의사가 투옥되고 처형된 뤼순에서는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연례 행사가 열린다.[29]

일본 미야기현(宮城県)쿠리하라시(栗原市)(구 와카야나기정(若柳町))의 다이린지(大林寺)에는 1981년에 안중근 의사의 현창비가 건립되었다. 이는 안중근 의사에게서 “위국헌신군인본분(為国献身軍人本分)”이라는 글씨를 받은 전 수감소장 치바 시치쥬(千葉十七)가 사망하고 그의 유족이 안중근 의사 탄생 100주년(1979년)을 맞아 한국에 보낸 것에 대한 답례로, 유묵을 새긴 비석을 세운 것이다. 1992년9월 6일부터는 한일 합동으로 매년 안중근 의사와 치바 시치쥬 부부의 합동 추모제가 거행되고 있다.[197] 2011년, 사가현(佐賀県)사가시(佐賀市)의 무량사(無量寺)에 “안중근 동양평화 기원비(安重根東洋平和祈願碑)”가 세워졌다.[198]

서울 남산공원에 있는 안중근의사기념관 내부의 동상


그 외에도 다음과 같은 기념 사업 및 추모 활동이 있었다.

  • 1958년: 북한에서 "애국열사 안중근" 창작, 공연.
  • 1979년: 명동성당에서 안중근 의사 탄신 100주년기념 대미사 집전.
  • 1986년: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 중화인민공화국 뤼순 감옥 방문,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요청.
  • 1990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안중근 (도마) 의사 추모 자료집-서거 80주년을 맞이하여》 발간.
  • 2000년: 안중근 의사 유골 발굴위원회 발족, 하얼빈역에서 남한과 북조선의 공동 기념식.
  • 2008년: 독립운동가로서는 최초로 한국 해군의 1800톤급 손원일급 잠수함 대형 3번함의 이름이 안중근함으로 명명.[259][260]
  • 2009년:
  • 9월 4일 중화인민공화국 하얼빈 시에 세워졌다가 대한민국에 반입된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대한민국 국회에 임시 전시.[261]
  • 10월 9일~10월 10일 중화인민공화국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1909년 10월의 의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최초로 국제 장기 기전인 제1회 세계인 장기 대회 개최.[262]
  • 2010년:
  • 3월 26일:
  • 이명박 대통령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모셔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발표.[264]
  • 서울 서울광장에서 안중근 의사 사망 100주년 추념식이 정부 주관으로 열림.
  • 9월 30일:
  • 국방부조선일보가 안 의사 사망 100주년과 조선일보 창간 90주년을 맞아 공동으로 제정한 위국헌신상이 11명에게 처음 수여.
  • 러시아 정부가 안중근과 관련된 외교 문서를 대한민국 정부에 처음 전달.[266]
  • 11월 19일: 안중근의사 사망 100주년기념, 대한독립 운동가 42인 초상화 특별전 《대한독립전》이 남산의 안중근의사 기념관에서 개최. (서양화가 조영규)[267]
  • 12월 1일: 안중근의사 사망 100주년기념, 대한독립 운동가 42인 초상화 특별전 《대한독립전》이 안양시 소재의 평촌아트홀에서 개최. (서양화가 조영규)[268]
  • 2011년:
  •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및 국내 봉환을 추진하는 비정부 민간단체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가 공식 출범.
  • 천주교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준비위원회(위원장 염수정 주교)가 안중근을 ‘근현대 신앙의 증인에 대한 시복조사’ 대상으로 거론하면서 안중근에 대한 시복 조사를 실시.

6. 가족 관계

항목내용
할아버지안인수(安仁壽, 1832~1893), 진해현감 역임
할머니제주 고씨(濟州 高氏)
아버지안태훈(安泰勳, 1862~1905), 성균진사
어머니조마리아(趙性女 마리아, 1862~1927), 독립운동가, 2008년 8월 조마리아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 수여
여동생안성녀 루시아(安性女, 1881~1954), 독립운동가, 부산 천주교 묘지에 안장.
매제권승복(權承福), 독립운동가, 1920년 사망
조카권헌(權憲)
남동생안정근(安定根, 1883~1949), 독립운동가, 1949년 상하이에서 사망.
조카안원생(安原生, 1905~?), 독립운동가, 안미생(安美生, 1914-2004), 안진생(安珍生. 1916~1988, 미얀마 대사 역임)
남동생안공근(安恭根, 1885~1939), 독립운동가, 1939년 사망 추정.
조카안우생(安偶生,1907~1991), 안낙생(安樂生, 1913~?), 안연생(安蓮生, 1917~?), 안금생(安錦生), 안지생(安志生)
부인김아려(金亞麗, 1878~1946)
장녀안현생(安賢生, 1902~1959), 효성여자대학교 (현 대구가톨릭대학교) 불문학 교수로 재직.[247]
사위황일청
외손녀황은주(1928 ~ 2021), 황은실(1931 ~ 2021 전)
장남안문생(安文生, 일명 안분도), 연해주로 피신하였다가 7살 때 누군가가 준 과자를 먹고 독살당함.
차남안준생(安俊生, 1907~1951), 폐결핵으로 사망. 혜화동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248]
자부정옥녀(鄭玉女, 1905 ~ 1991)
손녀안선호(安善浩, 1930 ~2003)
손자안웅호(鄭雄浩, 1933 ~ 2013), 의학박사, 안중근의 유일한 손자.[249]
증손자토니안 주니어(안도용(安度勇)[250]
증손녀리사 안, 캐런 안(1973~ )
손녀안연호(安蓮浩, 1938~2011)



안중근의 사촌 안명근(安明根)은 1910년 대한제국 일본 병합 조약을 체결한 초대 조선총독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15년 동안 투옥되었고, 1926년 사망했다. 안중근의 형제인 안정근(安定根)과 안공근(安恭根), 그리고 안중근의 사촌 안경근(安敬根)과 조카 안우생(安偶生)은 김구가 이끌던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일본과 싸웠다. 안중근의 또 다른 조카 안춘생(安椿生)은 중국의 국민혁명군에 참여하여 상하이에서 일본군과 싸웠고, 1940년에는 한국광복군에 합류했다. 이후 그는 대한민국 육군 중장이자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되었다.

한편, 안중근의 막내아들 안준생(安俊生)은 일제 강점기 동안 유력한 사업가이자 친일파가 되었다. 그는 1952년 결핵으로 사망했고, 그의 자녀들은 전쟁 후 미국으로 이민했다.[25]

7. 기타

일본 우익들은 안중근을 존경하는 지바 도시치를 비판하거나 위협하였다.[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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