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티노 마촐라
1. 개요
발렌티노 마촐라는 1919년에 태어나 1949년에 사망한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이다. 그는 토리노 FC에서 세리에 A 5회 우승, 코파 이탈리아 1회 우승을 이끌었으며, 1942-43 코파 이탈리아와 1946-47 세리에 A에서 득점왕을 차지했다.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12경기에 출전하여 4골을 기록했으며,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주장을 맡았다. 1949년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사망했으며, 2012년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출생일 | 1919년 1월 26일 |
|---|---|
| 출생지 | 이탈리아 카사노다다 |
| 사망일 | 1949년 5월 4일 (30세) |
| 사망지 | 수페르가, 이탈리아 |
| 신장 | 1.70m |
| 포지션 | 공격수, 공격형 미드필더 |
| 애칭 | 투렌 (뚜쟁이) |
| 유소년 클럽 | 트레솔디 (1934–193?) 파라 다다 (193?) 트레솔디 (193?–1936) |
|---|---|
| 클럽 | 트레솔디 (1936–1938) 알파 로메오 (1938–1939, 18골) 베네치아 리저브 (1939–1940) 베네치아 (1939–1942, 61경기 12골) 토리노 (1942–1949, 195경기 118골) |
| 국가대표팀 | 이탈리아 (1942–1949, 12경기 4골) |
|---|
-
세리에 A의 축구 선수 -
조지 웨아
조지 웨아는 1990년대 세계 최고의 공격수 중 한 명으로, FIFA 올해의 선수와 발롱도르를 수상한 라이베리아의 정치인이자 전 축구 선수이며, 선수 은퇴 후에는 라이베리아의 대통령을 역임했다. -
세리에 A의 축구 선수 -
데이비드 플랫
데이비드 플랫은 잉글랜드의 전 축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선수 시절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여러 클럽과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했고, 은퇴 후에는 여러 팀에서 감독직을 수행했다. -
1919년 출생 -
에드먼드 힐러리
에드먼드 힐러리는 1953년 텐징 노르가이와 함께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등정하고, 남극과 북극을 모두 정복했으며, 히말라야 지역 셰르파족을 위한 자선 활동에도 헌신한 뉴질랜드의 등반가, 탐험가, 자선가이다. -
1919년 출생 -
피에르 트뤼도
캐나다의 제15대 총리인 피에르 트뤼도는 자유당 소속으로 하원의원을 거쳐 법무장관을 역임하며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했고, 총리 재임 시절에는 외교 정책을 펼치고 헌법 개정을 통해 캐나다의 정체성 확립에 기여했으며, 그의 장남 쥐스탱 트뤼도 또한 캐나다의 총리를 역임했다. -
이탈리아의 남자 축구 선수 -
잔프랑코 졸라
잔프랑코 졸라는 나폴리, 파르마, 첼시에서 활약하며 다수의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하고 뛰어난 기술과 창의적인 플레이로 첼시 팬 선정 역대 최고의 선수 및 이탈리아와 영국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은퇴 후에는 여러 팀의 감독과 코치를 역임한 이탈리아의 전직 축구 선수이자 감독이다. -
이탈리아의 남자 축구 선수 -
안젤로 디 리비오
안젤로 디 리비오는 이탈리아의 은퇴한 축구 선수로, 유벤투스와 피오렌티나에서 활약하며 세리에 A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경험했고, 피오렌티나의 강등 후에도 팀에 남아 승격에 기여했으며, 이탈리아 국가대표로도 활약했다.
2. 클럽 경력
발렌티노 마촐라는 1942년 7월에 1,250,000 리라의 이적료와 함께 토리노로 이적했다. 유벤투스가 베네치아와 구두 합의를 했지만, 토리노가 역대 최고 이적료를 제시하여 마촐라를 영입했다. 같은 거래로 에치오 로익도 토리노에 합류했다. 토리노에서 주장을 맡으면서 토리노의 세리에 A 5회 우승, 코파 이탈리아 1회 우승에 기여했고 1942-43 코파 이탈리아 시즌 득점왕, 1946-47 세리에 A 득점왕에 오르는 영예를 안았다.
마촐라는 1942년 9월 20일, 코파 이탈리아에서 안코니타 비안치를 상대로 토리노 데뷔전을 치렀고, 2골을 기록하며 팀의 7-0 승리에 기여했다. 1942년 10월 4일 리그 데뷔전을 치렀으나, 마촐라와 로익은 부진하며 토리노는 암브로시아나-인테르에 1-0으로 패했다. 마촐라는 10월 18일 유벤투스를 상대로 리그 첫 골을 기록하며 팀의 5-2 승리를 이끌었다.
1943년 4월, 마촐라는 시즌 마지막 4경기에서 3골을 넣으며 토리노의 스쿠데토 획득에 기여했다.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서도 전 소속팀 베네치아를 상대로 득점하며 4-0 승리를 이끌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토리노는 토리노 피아트로 이름을 바꾸고 친선 경기와 비공식 대회에 참가했다. 마촐라는 토리노에 남아 1944 캄피오나토 알타 이탈리아에서 팀이 2위를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1945년 리그 재개 후, 마촐라는 캄피오나토 알타 이탈리아에서 16골을 기록하며 토리노의 우승을 이끌었다. 특히 quarto d'ora granata("마룬 15분")를 만들 때 소매를 걷어붙이는 모습으로 팀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1946-47 시즌, 마촐라는 주장에 임명되었고, 29골로 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1947년 4월 20일, 비첸차를 상대로 3분 만에 3골을 기록하며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가장 빠른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마촐라와 로익은 토리노의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팀의 통산 4번째 스쿠데토 획득을 이끌었다.
1947-48 시즌에도 좋은 활약을 이어간 마촐라는 1948년 5월 23일, 트리에스티나와의 경기에서 동료에게 패스를 거부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는 마촐라가 토리노를 떠나 인테르나치오날레로 이적하려는 의도라는 소문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토리노는 4연패를 달성했고, 마촐라는 25골로 득점 2위를 기록했다.
1948년 시즌 종료 후, 토리노는 브라질에서 친선 경기를 가졌고, 마촐라는 출국 전 토리노와의 작별을 발표했다. 1948년 9월, 계약 분쟁으로 복귀하지 않았던 마촐라는 9월 23일 구단과의 합의 후 복귀하여 득점을 기록했다. 마촐라는 더비에서 결승골을 넣는 등 긍정적인 활약을 이어갔다.
1949년 초, 마촐라는 근육 부상으로 고통받았지만, 1월과 2월 사이에 4골을 연속으로 넣었다. 4월 24일, 바리를 상대로 선수 경력 마지막 골을 기록했다. 4월 30일, 산 시로에서 인터를 상대로 0-0 무승부를 기록했는데, 마촐라는 협심증으로 인해 불참했다.
5월 1일, 토리노는 프란시스코 페레이라와의 작별 경기를 위해 리스본으로 향했다. 이 경기는 마촐라가 주최했으며, 포르투갈의 4-3 승리로 끝났다. 1949년 5월 4일, 이탈리아로 돌아오는 비행기가 토리노 교외에 추락하며 마촐라를 포함한 토리노 선수단 전원이 사망했다.
2.1. 초기 경력
마촐라는 어린 나이부터 일을 시작했음에도 축구에 대한 열정을 계속 키워나갔다. 그는 카사노 다다의 팀인 트레솔디의 리더였으며, 1934년 그가 경기장에서 뛰는 모습을 보고 유소년팀에 입단시켰다. 잠시 파라 다다로 이사했다가 다시 트레솔디로 돌아왔다. 그는 중앙 미드필더와 오른쪽 미드필더로 뛰었으며, 1935-36 시즌에 트레솔디에서 첫 시즌을 치렀고, 이듬해에는 1군에서 경기를 뛰며 경기당 10 리라를 받았다.
1938년, 알파 로메오가 그에게 세리에 C에서 뛸 수 있는 기회를 포함한 제안을 했을 때, 그는 밀란으로부터 세리에 A에서 뛸 수 있는 제안을 받았다. 그는 자동차 제조업체인 알파 로메오가 일자리를 보장했기 때문에 그곳을 선택했다. 알파 로메오에서 그는 한 시즌 동안 윙어로 뛰었다; 그러나 다른 자료에 따르면 그는 대신 오른쪽 미드필더로 뛰었다.
1919년 1월 26일, 밀라노현카사노 다다에서 태어났다.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생계를 위해 젊은 나이에 일을 시작했다。
프로 선수로서의 경력은 세리에 C에 소속되어 있던 밀라노의 자동차 회사인 알파 로메오 밀라노 공장의 클럽에서 시작되었다. 1939년 이탈리아 해군에 징집되어 베네치아로 가게 되었고, 베네치아 AC의 선발 시험을 보고 합격했다. 1939년부터 1942년까지 베네치아에서 선수로 활약하며 에치오 로이치와 함께 1941년 코파 이탈리아 우승, 1942년 리그 3위를 이끌었다. 1942년 4월 5일 크로아티아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이탈리아 대표팀 데뷔를 했다.
2.2. 베네치아 (1939-1942)
발렌티노 마촐라는 1939년 이탈리아 해군에 입대하여 베네치아에 배치되었다. 해군 복무 중에도 축구 선수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아 해군 팀에서 활약했으며, 베네치아 관계자들의 눈에 띄어 입단 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그는 신발을 망치지 않기 위해 부츠를 집에 두고 맨발로 테스트에 참가하여 감독 주세페 지라니를 설득, 1940년 1월 5만 리라에 베네치아와 계약했다.
1940년 3월 31일, 라치오와의 원정 경기에서 세리에 A 데뷔전을 치렀으며, 프란체스코 페르니고의 교체 선수로 출전했다. 이후 그는 남은 5번의 리그 경기에 모두 출전하며 바리와의 경기에서 골을 기록, 팀의 강등을 막는 데 기여했다. 또한 코파 이탈리아 16강전 모데나와의 경기에서도 득점했다.
베네치아에서 마촐라는 에치오 로익을 만나 함께 이탈리아 대표팀에 발탁되기도 했다. 1942년 4월 5일 크로아티아와의 경기에서 함께 데뷔한 두 선수는 서로 다른 배경에도 불구하고 좋은 호흡을 보였다.
마촐라는 베네치아에서 1940-41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끌었으며, 1941-42 시즌에는 세리에 A 3위에 오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2.3. 토리노 (1942-1949)
발렌티노 마촐라는 1942년 7월에 언론의 비판을 받은 125만 리라의 이적료와 선수 두 명(라울 메차드라, 발터 페트론)을 더한 조건으로 토리노로 이적했다. 유벤투스가 베네치아와 구두 합의를 했지만, 토리노가 역대 최고 이적료를 제시하여 마촐라를 영입했다. 같은 거래로 에지오 로익도 토리노에 합류했다.
마촐라는 1942년 9월 20일, 코파 이탈리아에서 안코니타 비안치를 상대로 토리노 데뷔전을 치렀고, 2골을 기록하며 팀의 7-0 승리에 기여했다. 1942년 10월 4일 리그 데뷔전을 치렀으나, 마촐라와 로익은 부진하며 토리노는 암브로시아나-인테르에 1-0으로 패했다. 마촐라는 10월 18일 유벤투스를 상대로 리그 첫 골을 기록하며 팀의 5-2 승리를 이끌었다.
1943년 4월, 마촐라는 시즌 마지막 4경기에서 3골을 넣으며 토리노의 스쿠데토 획득에 기여했다.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서도 전 소속팀 베네치아를 상대로 득점하며 4-0 승리를 이끌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토리노는 토리노 피아트로 이름을 바꾸고 친선 경기와 비공식 대회에 참가했다. 마촐라는 토리노에 남아 1944 캄피오나토 알타 이탈리아에서 팀이 2위를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1945년 리그 재개 후, 마촐라는 캄피오나토 알타 이탈리아에서 16골을 기록하며 토리노의 우승을 이끌었다. 특히 quarto d'ora granata("마룬 15분")를 만들 때 소매를 걷어붙이는 모습으로 팀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1946-47 시즌, 마촐라는 주장에 임명되었고, 29골로 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1947년 4월 20일, 비첸차를 상대로 3분 만에 3골을 기록하며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가장 빠른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마촐라와 로익은 토리노의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팀의 통산 4번째 스쿠데토 획득을 이끌었다.
1947-48 시즌에도 좋은 활약을 이어간 마촐라는 1948년 5월 23일, 트리에스티나와의 경기에서 동료에게 패스를 거부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는 마촐라가 토리노를 떠나 인테르나치오날레로 이적하려는 의도라는 소문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토리노는 4연패를 달성했고, 마촐라는 25골로 득점 2위를 기록했다.
1948년 시즌 종료 후, 토리노는 브라질에서 친선 경기를 가졌고, 마촐라는 출국 전 토리노와의 작별을 발표했다. 1948년 9월, 계약 분쟁으로 복귀하지 않았던 마촐라는 9월 23일 구단과의 합의 후 복귀하여 득점을 기록했다. 마촐라는 더비에서 결승골을 넣는 등 긍정적인 활약을 이어갔다.
1949년 초, 마촐라는 근육 부상으로 고통받았지만, 1월과 2월 사이에 4골을 연속으로 넣었다. 4월 24일, 바리를 상대로 선수 경력 마지막 골을 기록했다. 4월 30일, 산 시로에서 인터를 상대로 0-0 무승부를 기록했는데, 마촐라는 협심증으로 인해 불참했다.
5월 1일, 토리노는 프란시스코 페레이라와의 작별 경기를 위해 리스본으로 향했다. 이 경기는 마촐라가 주최했으며, 포르투갈의 4-3 승리로 끝났다. 1949년 5월 4일, 이탈리아로 돌아오는 비행기가 토리노 교외에 추락하며 마촐라를 포함한 토리노 선수단 전원이 사망했다.
3. 국가대표 경력
발렌티노 마촐라는 1942년 4월 5일에 열린 크로아티아와의 친선 경기에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로 데뷔했으며, 이탈리아는 크로아티아에 4-0 승리를 기록했다. 1942년 4월 19일에 열린 스페인과의 친선 경기에서 국가대표팀 첫 골을 기록했고, 이탈리아는 스페인에 4-0 승리를 기록했다.
마촐라는 1942년부터 1949년까지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로 활동하면서 12경기에 출전하여 4골을 기록했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는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을 맡았다.
| 연도 | 출장 | 득점 |
|---|---|---|
| 1942 | 2 | 1 |
| 1945 | 1 | 0 |
| 1946 | 1 | 1 |
| 1947 | 4 | 1 |
| 1948 | 2 | 0 |
| 1949 | 2 | 1 |
| | 12 || 4 |
| # | 개최 연월일 | 개최지 | 대전 국가 | 결과 | 경기 개요 |
|---|---|---|---|---|---|
| 1 | 1942년 4월 19일 | 밀라노 | 4–0 | 국제 친선 경기 | |
| 2 | 1946년 12월 1일 | 밀라노 | 3–2 | 국제 친선 경기 | |
| 3 | 1947년 4월 27일 | 피렌체 | 5–2 | 국제 친선 경기 | |
| 4 | 1949년 2월 27일 | 제노바 | 4–1 | 국제 친선 경기 |
4. 플레이 스타일
발렌티노 마촐라는 역대 최고의 축구 선수 중 한 명이자 최초의 현대적인 만능 축구 선수로 평가받는다. 그는 다재다능하고 근면하며, 경기장 모든 포지션에서 뛸 수 있었다. 강인한 성격, 승리 정신, 카리스마, 리더십으로 팀을 이끌었으며, 팀이 부진할 때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려 동료와 팬들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마촐라는 빠르고 강하며 활동적인 미드필더로, 뛰어난 기술과 드리블 실력, 체력, 포지션 감각, 시야, 창의성, 정확한 슈팅과 패스 능력을 갖췄다. 전술적 지능과 다양한 능력을 바탕으로 득점과 기회 창출 모두 가능했으며, 뛰어난 플레이메이커로서 팀의 공격을 조율했다. 주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기용되었지만, 최전방 공격수, 윙어, 세컨드 스트라이커 등 공격적인 역할도 수행했다.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힘, 타이밍, 헤딩 정확성, 점프력을 바탕으로 공중볼에 강점을 보였다.
공격적이고 창의적인 능력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수비적으로도 유능하여 상대에게 압박과 태클을 가해 소유권을 되찾았으며, 중앙 미드필더나 수비수로도 기용될 수 있었다. 밀라노 지역에서는 패스보다 드리블을 고집하는 선수를 "베네치아니(Veneziani)"(베네치아인)라고 불렀는데, 이는 마촐라가 베네치아에서 뛰었던 시절과 그의 드리블 돌파를 선호했던 것에서 유래한다.
잔피에로 보니페르티는 펠레,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요한 크루이프, 미셸 플라티니, 디에고 마라도나 등과 비교하며 팀에 가장 필요한 선수로 마촐라를 꼽았다. 브라질과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활약한 조제 알타피니는 마촐라와 외모가 닮아 "마졸라"(Mazola)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5. 수페르가의 비극
발렌티노 마촐라는 1949년 5월 4일에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친선 경기를 치른 토리노 선수단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이탈리아 토리노로 돌아가던 도중에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인해 사망했다. 마촐라는 병을 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리스본에서 조직한 경기에 참석하기로 결심했다.
비토리오 포초는 밤늦게 이루어진 시신 확인에 기여했다. 50만 명 이상이 참석한 장례식은 5월 6일에 거행되었으며, 시신은 마다마 궁전으로 운구되어 두오모로 행렬이 이어졌다. 같은 날 이탈리아 축구 연맹(FIGC)는 1948-49 세리에 A 시즌을 4라운드 남겨두고 인테르, AC 밀란, 유벤투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토리노를 우승팀으로 선포했다. 그의 아들인 산드로 마촐라도 축구 선수로 활약했다. 2012년에는 이탈리아 축구 연맹으로부터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6. 사망 이후
발렌티노 마촐라는 1949년 5월 4일에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친선 경기를 치른 토리노 선수단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이탈리아 토리노로 돌아가던 도중에 일어난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인해 사망했다. 마촐라는 병을 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리스본에서 조직된 경기에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비토리오 포초는 밤늦게 이루어진 시신 확인에 기여했다. 50만 명 이상이 참석한 장례식은 5월 6일에 거행되었으며, 시신은 마다마 궁전으로 운구되어 두오모로 행렬이 이어졌다. 같은 날 이탈리아 축구 연맹(FIGC)는 1948-49 세리에 A 시즌을 4라운드 남겨두고 인테르, AC 밀란, 유벤투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토리노를 우승팀으로 선포했다.
그의 아들인 산드로 마촐라도 축구 선수로 활약했다. 산드로 마촐라는 인테르와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활약하며 4번의 세리에 A 우승, 2번의 챔피언스컵 제패 등 아버지 못지않은 업적을 남겼다.
2012년에는 이탈리아 축구 연맹으로부터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브라질 선수 조제 알타피니는 마촐라의 이름을 딴 "마졸라"(Mazola)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잔피에로 보니페르티는 팀에 가장 필요한 선수로 마촐라를 꼽으며 펠레,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요한 크루이프, 미셸 플라티니, 디에고 마라도나 등과 비교했다.
7. 수상 내역
토리노
* 세리에 A: 1942-43, 1945-46, 1946-47, 1947-48, 1948-49
* 코파 이탈리아: 1942-43
베네치아
* 코파 이탈리아: 1940-41
개인
* 득점왕: 1946-47
*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 1942-43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사후): 2012
* 이탈리아 스포츠 명예의 거리: 2015
* 토리노 FC 명예의 전당: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