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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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 웨아는 라이베리아의 전 축구 선수이자 정치인이다. 그는 15세에 축구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포워드 포지션으로 변경, 1995년 아프리카 선수 최초로 발롱도르를 수상하고 FIFA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1990년대에는 AS 모나코, 파리 생제르맹, AC 밀란 등에서 활약하며 여러 차례 우승을 경험했으며, 2002년 은퇴 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2005년과 2017년 라이베리아 대선에 출마하여 2017년 당선되어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나, 2023년 재선에 실패했다.

조지 웨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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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의 웨아
이름조지 웨아
원어 이름George Manneh Oppong Weah
출생 이름George Tawlon Manneh Oppong Ousman Weah
출생일1966년 10월 1일
출생지몬로비아, 라이베리아
국적라이베리아
배우자클라 위아, 1993년 결혼
자녀4명, 조지 주니어와 티모시 포함
학력디브라이 대학교
직업정치인
축구 선수
정치 경력
대통령제25대 라이베리아 대통령
임기 시작: 2018년 1월 22일
임기 종료: 2024년 1월 22일
부통령주얼 테일러
이전 대통령엘런 존슨 설리프
다음 대통령조셉 보아카이
상원 의원임기 시작: 2015년 1월 14일
임기 종료: 2018년 1월 22일
이전 의원조이스 무수 프리먼-수모
다음 의원사아 조셉
선거구몽세라도 카운티
정당민주변혁회의
다른 정당민주변혁연합
축구 선수 경력
포지션스트라이커
1.85m
유소년 클럽1981-1984: 영 서바이버스
클럽1984-1985: 봉 레인지 유나이티드, 2경기, 1골
1985-1986: 마이티 배럴, 10경기, 7골
1986-1987: 인빈시블 일레븐, 23경기, 24골
1987: 아프리카 스포츠, 2경기, 1골
1987-1988: 토네르 야운데, 18경기, 14골
1988-1992: 모나코, 103경기, 47골
1992-1995: 파리 생제르맹, 96경기, 32골
1995-2000: AC 밀란, 114경기, 46골
2000: 첼시 (임대), 11경기, 3골
2000: 맨체스터 시티, 7경기, 1골
2000-2001: 마르세유, 19경기, 5골
2001-2003: 알 자지라 클럽, 39경기, 30골
총 클럽 경기 및 득점444경기, 211골
국가대표팀1986-2018: 라이베리아, 75경기, 18골
기타 정보역대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으로 평가됨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IFFHS) 선정 '레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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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축구인 경력

카메룬 프로리그에서 뛰던 조지 웨아는 1988년, 당시 AS 모나코 감독이었던 아르센 벵거에게 발탁되어 유럽 무대에 진출했다. 이후 AS 모나코파리 생제르맹에서 활약하며 프랑스 리그 우승 1회, 쿠프 드 프랑스 우승 3회 등을 경험했다.

1995년 세리에 AAC 밀란으로 이적하며 축구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했고, 두 차례의 세리에 A 우승과 FA컵 우승(첼시 임대 시절) 등을 추가하며 '우승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었다. 뛰어난 신체 능력과 득점력을 바탕으로 골키퍼를 제외한 거의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으며, 특히 AC 밀란 시절인 1996-97 시즌 개막전에서는 자기 진영 페널티 에어리어 부근에서 약 80m를 단독 드리블 돌파하여 골을 성공시켜 "산시로에 UFO 출현"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개인 수상 경력 또한 화려하여, 1995년에는 아프리카 선수 최초로 FIFA 올해의 선수발롱도르를 동시에 석권했으며, 아프리카 올해의 선수에도 선정되었다. 현재까지 유럽과 남아메리카 국적이 아닌 선수로는 유일한 FIFA 올해의 선수발롱도르 수상자이다. 또한 웨아는 FIFA 올해의 선수 수상자 중 유일하게 모국팀을 이끌고 FIFA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한 선수이기도 하다. 2002년 월드컵 예선에서 라이베리아 대표팀의 선전을 이끌었으나, 나이지리아에 밀려 아쉽게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웨아는 20세기 최고의 축구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대륙별 최고 스타를 뽑는 투표에서 펠레(남미), 요한 크라위프(유럽), 우고 산체스(북중미), 차범근(아시아)과 함께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선수로 선정되었다.

2.1. 클럽 경력

라이베리아의 클럽에서 축구 선수 생활을 시작한 웨아는 인빈시블 일레븐에서 주장과 득점왕을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카메룬토네르 야운데를 거쳐 1988년 프랑스의 AS 모나코로 이적하며 유럽 무대에 진출했다. 당시 모나코 감독이었던 아르센 벵거의 지도 아래 성장하여 1991년 쿠프 드 프랑스 우승을 경험했다.

1992년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하여 리그 우승과 두 차례의 쿠프 드 프랑스 우승(1992–93, 1994–95), 쿠프 드 라 리그 우승(1994–95)을 달성했다. 특히 1994-95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는 7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올랐고, 팀을 준결승까지 이끌었다.

1995년, 웨아는 아프리카 선수 최초로 발롱도르를 수상했으며, 같은 해 FIFA 올해의 선수에도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또한 1989년, 1994년에 이어 1995년 세 번째 아프리카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이후 이탈리아 세리에 A의 명문 AC 밀란으로 이적하여 1995–96 시즌과 1998–99 시즌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AC 밀란 시절 놀라운 신체 능력과 득점력으로 “리베리아의 괴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99-2000 시즌 중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첼시로 임대 이적하여 FA컵 우승을 경험했고, 이후 맨체스터 시티 FC, 마르세유, UAE알자지라를 거쳐 2003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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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클럽 우승 경력
클럽대회우승 연도/시즌
인빈시블 일레븐라이베리아 프리미어리그1986–87
라이베리아 FA컵1985–86
AS 모나코쿠프 드 프랑스1990–91
파리 생제르맹리그 11993–94
쿠프 드 프랑스1992–93, 1994–95
쿠프 드 라 리그1994–95
AC 밀란세리에 A1995–96, 1998–99
첼시FA컵1999–2000

2.1.1. 초기 경력 (라이베리아, 카메룬)

웨아는 1981년, 15세의 나이에 라이베리아 몬로비아 교외의 클라라 타운에 기반을 둔 3부 리그 클럽 영 서바이버스(Young Survivors)에서 골키퍼로 축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곧 득점의 재미를 느껴 포워드로 포지션을 변경했고, 데뷔전에서는 매우 좁은 각도에서 양쪽 골포스트를 맞고 들어간 골을 포함해 두 골을 넣는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영 서바이버스에서 3년간 뛰면서 팀이 4부 리그에서 2부 리그로 두 차례 승격하는 데 기여했다.

1984년, 웨아는 라이베리아 프리미어리그 클럽인 봉 레인지 유나이티드(Bong Range United)에 입단하여 한 시즌을 보낸 뒤, 라이베리아 최대 클럽 중 하나인 마이티 바롤레로 이적했다. 마이티 바롤레에서는 꾸준히 득점했지만 주전 자리를 확보하지 못했고, 이는 1986년 라이벌인 인빈시블 일레븐으로의 이적을 불러왔다. 인빈시블 일레븐에서는 주장을 맡아 팀의 1987년 라이베리아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며, 리그 득점왕과 최우수 선수상을 동시에 차지하는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해외로 진출하기 전까지 웨아는 라이베리아 통신공사에서 교환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1987년, 카메룬 프리미어리그 클럽 토네르 야운데와의 경기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후 이 클럽에 입단하여 해외 무대에 첫발을 내디뎠다. 카농 야운데와의 데뷔전에서 두 골을 넣었다. 카메룬에서는 한 시즌 동안 활약했다.

2.1.2. AS 모나코와 파리 생제르맹 (프랑스)

카메룬 리그에서 한 시즌을 보낸 후, 프랑스의 AS 모나코로 이적하였다. 당시 감독이었던 아르센 벵거는 웨아를 마치 자신의 아들처럼 대하며 성장을 도왔고, 웨아는 훗날 벵거 감독 덕분에 세계적인 선수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고 감사를 표했다. 모나코 시절인 1989년, 웨아는 처음으로 아프리카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1991년에는 팀의 쿠프 드 프랑스 우승에 기여했으며, 다음 해에는 팀을 컵 위너스컵 결승 무대에 올려놓았다. 1992년에는 파리 생제르맹으로 팀을 옮겼다.

파리 생제르맹에서도 그의 활약은 이어졌다. 1993-94 시즌 리그 1 우승을 차지했고, 쿠프 드 프랑스에서는 1992-93 시즌과 1994-95 시즌 두 차례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또한 1994-95 시즌에는 쿠프 드 라 리그 우승도 경험했다. 특히 1994-95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총 7골을 기록하며 대회 득점왕에 올랐고, 소속팀 파리 생제르맹을 준결승까지 이끄는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파리 생제르맹 시절 일부 팬들로부터 인종차별적인 비난을 받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2.1.3. AC 밀란 (이탈리아)

1995년, 프랑스 르샹피오나의 파리 생제르맹에서의 활약을 발판 삼아 이탈리아 세리에 A의 명문 구단인 AC 밀란으로 이적하며 축구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했다. 같은 해 웨아는 아프리카 선수 최초이자 비유럽/남미 국적 선수 최초로 발롱도르FIFA 올해의 선수를 동시에 수상했으며, 아프리카 올해의 선수상도 세 번째로 수상하며 그 해 개인상을 휩쓸었다. 이는 1995년 발롱도르 수상 범위가 유럽 리그에서 뛰는 모든 국적의 선수로 확대된 후 첫 비유럽 국적 선수의 수상이기도 했다.

1995-96 시즌 리그 개막전인 파도바와의 경기에서 데뷔골을 기록하고 프랑코 바레시의 골을 어시스트하며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렀다. 이 시즌 동안 웨아는 득점뿐만 아니라 두 자릿수 이상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팀의 세리에 A 우승(1995-96)에 크게 기여했다.

1996-97 시즌 개막전 엘라스 베로나와의 경기에서는 자기 진영 페널티 에어리어 부근에서부터 약 80m를 단독으로 드리블 돌파하여 골을 넣는 놀라운 장면을 연출했다. 이 골은 다음 날 지역 신문에 "산시로에 UFO 출현"이라는 헤드라인으로 대서특필될 정도로 큰 화제를 모았다. 또한 SS 라치오와의 경기에서도 단독 드리블 돌파 후 득점을 기록하는 등 뛰어난 개인 기량을 선보였다. 이러한 경이로운 신체 능력과 활약으로 “리베리아의 괴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98-99 시즌에도 팀의 세리에 A 우승에 기여하며 두 번째 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이후 무릎 부상 등으로 인해 1999-00 시즌 중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첼시 FC로 임대 이적하며 AC 밀란에서의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2.1.4. 후기 경력 (잉글랜드, 프랑스, UAE)

2000년 1월 11일, 웨아는 밀란에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첼시로 1999-2000 시즌 종료까지 임대 이적했다. 전성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웨아의 잉글랜드 시절은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첼시에서는 데뷔전에서 라이벌 토트넘 홋스퍼를 상대로 결승골을 기록하며 팬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윔블던리버풀을 상대로 리그 골을 추가했다. 또한, 1999-2000 FA컵에서는 레스터 시티와 길링엄을 상대로 중요한 골을 넣으며 첼시의 우승에 기여했다. 이 활약으로 결승전에 출전하여 첼시의 1-0 승리를 도왔다.

그러나 첼시의 감독 잔루카 비알리는 웨아의 완전 영입을 추진하지 않았고, 웨아는 2000년 8월 1일 공식적으로 밀란을 떠나 주급 30의 2년 계약으로 프리미어리그 승격팀 맨체스터 시티에 자유 계약으로 합류했다. 그는 밀란 구단주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제안한 1의 위약금을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맨체스터 시티에서는 모든 대회를 합쳐 11경기에 출전해 4골을 기록했으나, 감독 조 로일이 자신을 자주 교체 선수로 기용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2000년 10월 16일 팀을 떠났다. 그는 메인 로드에서 뛴 11경기 중 단 3경기만 풀타임으로 소화했다. 시티 소속으로 리그에서는 리버풀을 상대로 한 골을 넣었고, 길링엄을 상대로는 리그컵에서 총 세 골(1차전 1골, 2차전 2골)을 기록했다.

잉글랜드 생활을 마친 후, 웨아는 프랑스로 돌아가 마르세유에서 2001년 5월까지 활약했다. 이후 UAE알자지라로 이적하여 UAE 프로리그에서 뛰었으며, 2003년 37세의 나이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당초 메이저 리그 사커뉴욕/뉴저지 메트로스타스 합류를 계획했으나, 임시로 알자지라에 합류하게 되었다.

2.2. 국가대표팀 경력

1986년 2월 23일 부르키나파소와의 경기에서 라이베리아 국가대표팀 선수로 데뷔한 이후, 웨아는 75경기에 출전하여 18골을 기록했다. 세계 축구계에서 약팀으로 평가받는 라이베리아를 대표하며 웨아는 국가대표팀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팀의 핵심 선수였을 뿐만 아니라 감독직을 맡기도 했으며, 사재를 털어 대표팀 운영 자금을 지원하는 등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라이베리아는 FIFA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지 못했으며, 특히 2002년 월드컵 예선에서는 본선 진출을 아쉽게 놓쳤다.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본선에는 두 차례 진출하여 1996년2002년 대회에 참가했으나, 두 번 모두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이 때문에 웨아는 월드컵 본선 무대를 경험하지 못한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자주 언급된다.

웨아는 현직 대통령 신분이던 2018년 9월 11일, 나이지리아와의 친선 경기에 출전하며 국가대표팀에 깜짝 복귀하여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당시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그의 등번호 14번은 이 경기를 끝으로 대표팀에서 영구 결번되었고, 웨아는 경기장을 떠나며 관중들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

3. 정치인 경력

축구 선수 은퇴 후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5년 라이베리아 대통령 선거에 처음 출마했으나, 당시 경쟁자였던 엘렌 존슨-설리프에게 패배했다.

이후 2017년 라이베리아 대선에 다시 도전하여, 조셉 보아카이 후보와 결선 투표까지 가는 경쟁 끝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 선거 결과는 라이베리아 역사상 1944년 이후 73년 만에 처음으로 이루어진 민주적 정권 교체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는 2018년 1월 22일에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했으며,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3.1. 초기 정치 활동

축구 선수 은퇴 후, 조지 웨아는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2005년 라이베리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 의사를 밝히고, 지지 기반 확보를 위해 민주변화회의(CDC)를 창당하여 2005년 선거에 참여했다. 웨아는 라이베리아 내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지만, 하버드 대학교 출신이자 재무장관, 세계은행 등에서 경력을 쌓은 경쟁자 엘렌 존슨 설리프와 달리 정규 교육 배경이 부족하다는 점 때문에 국가 운영 능력에 대한 비판에 직면했다. 일부 분석가들은 웨아의 정치 경험 부족을 지적하며 "풋내기"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또한, 과거 파리 생제르맹 선수 시절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대통령 후보 자격 논란이 일었으나, 선거관리위원회는 법정에서 해당 주장을 기각하여 웨아의 출마를 허용받았다. 선거 유세 과정에서 웨아는 자신이 엘리트 계층 출신이 아님을 강조하며 빈곤층의 지지를 호소했다.

2005년 10월 11일 치러진 1차 투표에서 웨아는 28.3%를 득표하여 1위를 차지했지만, 과반수를 넘지 못해 2위인 설리프와 결선 투표를 치르게 되었다. 11월 8일 결선 투표 결과, 웨아는 40.6%를 득표하여 59.4%를 얻은 설리프에게 패배했다. 웨아는 선거 과정에서 유권자 협박과 투표지 조작이 있었다고 주장하며 결과에 불복했고, 그의 지지자들은 수도 몬로비아 거리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여러 아프리카 국가 지도자들의 중재와 투표 공정성에 대한 확인 이후, 웨아 측은 결과를 수용했다. 아프리카 연합은 이 선거를 "평화롭고, 투명하며, 공정하게" 치러졌다고 평가했다. 선거 기간 내내 제기된 교육 부족 논란에 대해 웨아는 "그들(엘리트)은 교육과 경험으로 수백 년간 나라를 통치했지만, 나라를 위해 한 것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는 이후 미국 마이애미의 데브리 대학교에서 경영학 학위를 취득했다. (초기에 런던의 파크우드 대학교 학위를 주장했으나, 이는 학위 장사 기관으로 밝혀졌다.)

2009년 미국에서 라이베리아로 돌아온 웨아는 몬트세라도주 상원의원 보궐선거에 민주변화회의 후보로 출마하며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이는 2011년 대통령 선거 재도전을 위한 포석으로 해석되었고, 실제로 웨아는 설리프 대통령에게 다시 도전할 의사를 밝혔다. 여러 야당과의 연합 시도가 실패한 후, 민주변화회의는 윈스턴 투브먼을 대통령 후보로, 웨아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여 2011년 선거에 나섰다. 투브먼-웨아 조는 1차 투표에서 32.7%를 얻어 43.9%를 얻은 설리프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결선투표제에 따라 2차 투표가 진행되었으나, 투브먼-웨아 조는 9.3% 득표에 그치며 재선에 성공한 설리프에게 다시 패배했다.

2014년, 웨아는 라이베리아 상원 선거에 몬트세라도주 민주변화회의 후보로 다시 출마했다. 그는 2014년 12월 20일 치러진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 엘렌 존슨 설리프의 아들인 로버트 설리프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웨아는 총 투표수의 78.0%(99,226표)를 얻었으며, 로버트 설리프는 약 11%(13,692표)를 얻는 데 그쳤다. 이로써 웨아는 라이베리아 국가대표 축구 선수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의회에 진출하는 기록을 세웠다. 다만 상원의원 당선 이후, 회의 참석률이 저조하고 법안 발의나 후원 실적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3.2. 라이베리아 대통령 (2018-2024)

2005년 라이베리아 대선에 출마했으나 엘렌 존슨-설리프에게 패배한 경험이 있다. 이후 2017년 선거에서 다시 대통령에 도전할 의사를 밝혔고, 민주변화연합(Coalition for Democratic Change) 후보로 출마했다. 1차 투표에서 38.4%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으며, 통합당의 조셉 보카이와 결선 투표를 치렀다. 결선 투표에서 웨아는 60%가 넘는 득표율을 얻어 보카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는 1944년 이후 73년 만에 처음으로 이루어진 민주적 정권 교체였다.

2019년 위아
2019년 위아


웨아는 2018년 1월 22일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며, 당시 아프리카에서 네 번째로 젊은 현직 대통령이었다. 그의 취임은 74년 만에 이루어진 라이베리아 최초의 민주적 정권 이양이기도 했다. 그는 부정부패 척결, 경제 개혁, 문맹 퇴치, 삶의 질 개선을 대통령 임기 동안의 주요 목표로 제시했다. 그의 취임식에는 아프리카의 유명 축구 선수였던 디디에 드로그바와 사무엘 에토오 등이 참석했다. 웨아 대통령은 선거 승리 후 '빈곤 퇴치를 위한 개발 및 번영 계획(Pro-Poor Agenda for Development and Prosperity)'을 약속하며, 이 계획이 가난한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라이베리아 국민에게 혜택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취임 직후인 2018년 1월 29일, 웨아 대통령은 국가 경제 상황을 고려하여 자신의 급여와 기타 혜택을 25% 자진 삭감하겠다고 발표했다. 같은 날, 그는 "흑인이 아닌" 사람들도 시민권을 얻고 외국인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헌법 개정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며, 현행 규정을 "인종차별적이고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2018년 7월 4일 기념식에서의 웨아 대통령
2018년 7월 4일 기념식에서의 웨아 대통령


그러나 경제 상황은 어려움을 겪었다. 2019년에는 물가 상승률이 28%까지 치솟았고, 이는 수도 몬로비아와 미국 워싱턴 D.C.에서 "국가 구하기(Save the State)"라는 이름의 시위를 촉발했다. 2019년 9월, 웨아 대통령은 국가 경제 대화(National Economic Dialogue, NED)에 참석하여 경제 위기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이 포럼에서는 진실화해위원회(TRC) 권고 사항 검토, 경제범죄 및 전쟁범죄 법정 설립, 신규 통화 발행, 국가 관세법 전면 검토, 라이베리아 중앙은행 자본 재충전, 국내외 부채 검토, 실용적인 농업 프로그램 개발 및 평화, 국가 화합 증진 등 다양한 권고안이 제시되었다. 집권 2년 차에는 물가 상승률이 30%에 달하는 등 경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고, 임금 지급 지연 문제 등이 겹쳐 시위가 이어졌으며 경찰은 최루탄과 물대포를 사용하여 대응했다. 웨아 대통령은 국정 연설을 통해 악화되는 경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일련의 경제 정책과 입법 개혁을 제안했다. 그의 집권 기간 동안 라이베리아의 실업률은 2017년 3%에서 4.1%로 증가했으며, 경제 성장률은 2018년부터 2022년까지 1~5% 사이를 기록했다.

사회 문제 해결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2020년 9월 12일, 그는 국내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와 함께 성폭행 전담 검사 임명, 국가 성범죄자 등록부 신설, 문제 해결을 위한 국가 태스크포스 구성을 약속했으며, 2 규모의 긴급 기금을 발표하여 일부를 가해자 신원 확인을 위한 DNA 검사 장비 구매에 사용하도록 했다. 그러나 2022년 3월까지 DNA 검사 장비는 작동되지 않았고, 전담 검사 임명과 성범죄자 등록부 시행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성 기반 폭력 전문 법원은 라이베리아 16개 카운티 중 3곳에만 설치되는 등 실질적인 이행은 더디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웨아 대통령은 마약의 불법 수출입 및 남용을 규제하고 근절하기 위한 마약 관련 법안에 서명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일부 성과를 거두었다. 웨아 행정부는 학교 건설 및 보수를 통해 아동들에게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제공하는 등 교육 분야 개선에 힘썼다. 의료 분야에서도 의료 서비스 접근성 향상을 위해 투자했으며, 인프라 구축, 의료 장비 도입, 의료진의 소외 지역 배치 등을 추진했다. 또한 건강 보험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라이베리아 최초의 투석 센터를 건설하기도 했다.

외교적으로는 취임 후 첫 공식 방문지로 세네갈을 찾아 마키 살 대통령과 양국 관계 강화를 논의했다. 2018년 2월에는 프랑스를 방문하여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회담하고, 아프리카 스포츠 개발 프로젝트에 대한 프랑스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 자리에는 디디에 드로그바, 킬리안 음바페, FIFA 회장 지안니 인판티노 등이 함께했다. 2018년 5월, 라이베리아 축구 협회 회장 무사 빌리티는 웨아 대통령과의 회담 후 라이베리아가 캐나다-멕시코-미국 월드컵 유치를 지지할 것이라고 발표했는데, 이는 당시 모로코 유치를 지지하던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는 다른 행보였다. 또한 중국을 방문하여 시진핑 주석의 재선을 축하하고 양국 간 유대 강화를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으며, 2019년과 2023년에는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각각 르우벤 리블린 대통령,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 만나 양국 관계 강화, 무역, 국제 문제 협력 등을 논의했다.

2019년 이스라엘에서 르우벤 리블린과 함께한 위아.
2019년 이스라엘에서 르우벤 리블린과 함께한 위아.


한편, 웨아 대통령은 2019년 야당 후보 텔리아 유레이 등에 대한 폭력 선동 혐의로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2022년 8월에는 내각의 고위 관리 3명이 부패 혐의로 미국의 제재 대상에 오르는 일이 발생했다. 또한 부통령으로 찰스 테일러 전 대통령의 전 부인인 주얼 테일러를 임명한 것을 두고, 전쟁 범죄로 수감 중인 찰스 테일러의 복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2023년 재선에 도전하여 바사족 등 일부의 지지를 받았으나, 2023년 대선 결선 투표에서 과거 경쟁자였던 조셉 보카이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여 재선에 실패했다.

4. 개인 생활

자메이카 출신 아내인 Clar Weah영어와 결혼하여 세 자녀(조지, 티타, 티모시)를 두었으며, 다른 관계에서 낳은 자녀가 한 명 더 있다. 2016년에는 딸의 어머니로부터 양육비 청구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그의 친조카인 패트릭 웨아는 메이저 리그 사커미네소타 유나이티드 FC에서 공격수로 활동 중이며, 처조카인 카일 던컨 역시 메이저 리그 사커뉴욕 레드불스에서 수비수로 뛰고 있다.

두 아들 George Weah Jr.영어와 티모시 웨아는 모두 축구 선수로 활동했다. 두 아들 모두 파리 생제르맹 유소년팀을 거쳤으나, 1군에서 뛴 것은 티모시뿐이다. 두 아들 모두 미국 청소년 대표팀에서 활동했으며, 특히 티모시는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2022년 FIFA 월드컵 본선에 출전했다. 이는 조지 웨아가 선수 시절 이루지 못했던 월드컵 본선 진출의 꿈을 아들이 대신 이룬 것이었다. 티모시는 웨일스와의 조별리그 1차전에서 월드컵 데뷔골을 기록하며 미국의 8년 만의 월드컵 16강 진출에 기여했다.

종교적으로는 기독교 프로테스탄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997년이슬람교로 개종하여 'Ousman아랍어'이라는 이름으로 10년간 활동했다. 그러나 이후 다시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왔으며, 2007년 프랑스에서 "나는 더 이상 이슬람교도가 아니다"라고 밝히며 개신교로 복귀했다. 그는 기독교인과 이슬람교도가 평화롭게 공존하기를 바라며, 그들은 하나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2017년 10월, 그는 라이베리아 상원의원 프린스 존슨과 함께 나이지리아의 유명 목사인 T. B. Joshua영어의 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이는 2017년 대선 당시 조슈아가 존슨의 웨아 지지 표명에 영향을 미쳤다는 배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수 시절 프랑스 리그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인연으로 프랑스 시민권을 보유하고 있으며,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5. 수상 내역

1995년에는 FIFA 올해의 선수, 발롱도르, 아프리카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는 등 선수로서 최고의 영예를 안았다. 그는 현재까지 유럽과 남아메리카 국적이 아닌 선수로는 유일하게 FIFA 올해의 선수발롱도르를 수상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FIFA 올해의 선수 수상자 중 유일하게 모국팀이 FIFA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한 선수이기도 하다.

웨아는 20세기 최고의 아프리카 선수로 선정되었는데, 이는 남아메리카펠레, 유럽의 요한 크라위프, 북아메리카우고 산체스, 아시아차범근과 함께 각 대륙을 대표하는 선수로 인정받은 것이다.

5.1. 클럽

마이티 바롤레
* 라이베리아 프리미어리그: 1986
* 라이베리아 FA컵: 1986

인빈시블 일레븐
* 라이베리아 프리미어리그: 1987

모나코
* 쿠프 드 프랑스: 1990-91

파리 생제르맹
* 리그 1: 1993-94
* 쿠프 드 프랑스: 1992-93, 1994-95
* 쿠프 드 라 리그: 1994-95

AC 밀란
* 세리에 A: 1995-96, 1998-99

첼시
* FA컵: 1999-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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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시즌, 대회별 출전 및 득점 기록
클럽시즌리그국내컵
(쿠프 드 프랑스, 코파 이탈리아, FA컵)
리그컵
(쿠프 드 라 리그, 풋볼 리그컵)
유럽 대항전
(유러피언컵/챔피언스리그, UEFA컵, 컵위너스컵)
기타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합계
리그출전득점출전득점출전득점출전득점출전득점출전득점
모나코1988–89디비지옹 12314101523817
1989–90디비지옹 11750073248
1990–91디비지옹 1291065534018
1991–92디비지옹 1341841944723
합계10347207261214966
파리 생제르맹1992–93디비지옹 1301462974523
1993–94디비지옹 1321132514014
1994–95디비지옹 134752311185318
합계963214631251613855
AC 밀란1995–96세리에 A261131633515
1996–97세리에 A28132053103616
1997–98세리에 A2410833213
1998–99세리에 A26841309
1999–2000세리에 A104201110145
합계114461951272014758
첼시 (임대)1999–2000프리미어리그11342155
맨체스터 시티2000–01프리미어리그712394
마르세유2000–01디비지옹 119510205
통산 합계350134582054633520478193

5.2. 개인

1995년에는 FIFA 올해의 선수, 발롱도르, 아프리카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그는 현재까지 유럽과 남아메리카 국적이 아닌 유일한 FIFA 올해의 선수발롱도르 수상자이다. 또한 웨아는 FIFA 올해의 선수 수상자 가운데 모국팀이 FIFA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한 유일한 선수이기도 하다.

1990년대 전성기 시절, 웨아는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그는 속도, 활동량, 체력, 공격 본능은 물론, 뛰어난 피지컬과 운동 능력을 마무리 능력, 기술, 창의성과 결합시킨 선수로 칭송받았다. 빠르고 강력하며 신체적으로 강인한 선수이자 골 감각이 뛰어났던 그는 많은 전문가들로부터 AC 밀란의 전설적인 선수 판 바스텐의 공백을 성공적으로 메운 선수로 인정받았다. 그의 속도, 가속력, 드리블 기술, 득점 능력 외에도 다재다능한 공격수로서 웨아는 찬스를 만들고 동료에게 어시스트를 제공할 수 있는 팀 플레이어이기도 했다.

호나우두와 호마리우와 함께 웨아는 1990년대 새로운 유형의 현대적인 스트라이커로 여겨졌다. 당시 스트라이커들이 주로 페널티 박스 안에서 동료의 패스를 받아 플레이하던 것과 달리, 그는 페널티 박스 바깥에서도 활동하며 공을 가지고 직접 골문으로 돌진하는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그에게 영감을 받은 차세대 스트라이커 중 한 명인 티에리 앙리는 "조지 웨아, 호마리우, 호나우두는 나에게 축구를 바꿔놓았습니다. 스트라이커로서 처음으로 스스로 골을 넣을 수 있는 선수들을 본 것입니다. 어디서든 공을 잡고 골을 넣을 수 있는 선수 말입니다. 이전에는 9번 스트라이커로서 '박스 안에 머물러라, 너무 많이 움직이지 마라, 윙으로 가지 마라, 내려오지 마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조지 웨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호나우두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 이전에는 호마리우를 다르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잠깐, 누군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평가했다.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AC 밀란 시절인 1996-97 시즌 개막전 베로나와의 경기에서 나온 골이 있다. 자신의 진영 페널티 에어리어 부근에서 공을 잡아 약 80m를 단독 드리블 돌파하여 득점에 성공했는데, 다음 날 지역 신문인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는 "산시로에 UFO 출현"이라는 헤드라인을 달며 이 골을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 중 하나로 평가했다. 축구계에 미친 자신의 영향에 대해 웨아는 "내가 존경하는 선수들 – 펠레, 마라도나, 베켄바워, 크루이프 – 그들은 위대한 업적을 많이 이루었다. 나도 축구계에 들어와 역사를 만들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프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 3회 수상,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한 최초의 아프리카 선수라는 업적으로 인해 1990년대에 그는 "킹 조지(King George)"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90min은 그를 역대 최고의 선수 50인 명단에 포함시켰다. 웨아는 종종 역대 최고의 아프리카 축구 선수 중 한 명으로 칭송받으며, IFFHS에 의해 20세기 아프리카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디디에 드로그바, 사무엘 에토와 함께 역대 최고의 아프리카 스트라이커 3인에 자주 이름을 올린다. 2013년 AC 밀란의 레전드 프랑코 바레시는 웨아를 자신이 함께 뛰었던 선수들로 구성한 역대 베스트 XI에 포함시켰다. 축구 잡지 FourFourTwo는 웨아를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경험하지 못한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가디언의 스콧 머레이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케빈 벡스터를 포함한 여러 언론과 FIFA는 그를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지 못한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간주한다.

웨아의 스포츠계에서의 위상은 EA 스포츠FIFA 비디오 게임 시리즈에도 반영되어, FIFA 14의 Ultimate Team Legends 선수 명단에 포함되었다. 선수 시절 웨아는 스포츠웨어 회사 디아도라의 후원을 받았으며, 특히 AC 밀란에서 뛸 당시 착용했던 빨간색 디아도라 축구화로 유명했다.

개인 수상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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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수상 내역연도/시즌비고
주요 개인상 | 발롱도르 | 1995 |
1995 |
1995 |
1989, 1994, 1995 | (1989, 1995), 첫 문단 참고 (1994)
1994–95 |
1995 |
1996 |
2005 |
기타 개인상 | 월드 XI | 1991, 1997, 1998 (1996 후보) |
1990–91 |
엘 파이스 유럽 축구의 제왕]]>1995 |
1995–96 |
1996 |
1996 |
2004 |
명예/선정 | IFFHS 아프리카 세기의 선수 | 1999 |
월드 사커]] 역대 최고 선수 100인>1999 | (20세기 세계 최고 선수 27위, 20세기 위대한 축구 선수 100인 중 43위)
[[플라네트 풋]] 역대 최고 선수 50인>1996 |
[[플라카르]] 세기의 스타 100인>1999 |
2004 |
- |
- |
- |
[[프랑스 풋볼]] 레전드 아프리카인 톱 30>2019 |
2021 |
학위>커팅턴 대학 명예 박사학위 | 2018 |

6. 기타 활동

웨아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국 라이베리아를 위해 헌신적인 인도주의 활동을 펼쳤다. 선수 시절 유엔 친선대사로 활동했으며, 유니세프 친선대사로도 임명되었으나 정치 활동을 시작하면서 중단했다. 이러한 인도주의적 노력을 인정받아 200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당시 코닥 극장)에서 열린 ESPY 어워드에서 아서 애쉬 용기상을 수상했다. 또한 축구계의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는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웨아는 축구를 통해 라이베리아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교육을 장려하고자 노력했다. 1998년에는 가수 프리스비 오모 이시보르(Frisbie Omo Isibor) 및 다른 아프리카 축구 스타 8명과 함께 Lively Up Africa영어라는 제목의 CD를 발매했다. 이 음반의 수익금은 참여 선수들의 출신 국가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에 사용되었다.

1994년 몬로비아에 축구 클럽 주니어 프로페셔널을 설립하고 회장을 맡았다. 이 클럽은 젊은이들의 학교 출석을 유일한 회원 자격 요건으로 삼아 교육을 장려했으며, 라이베리아 전역에서 선발된 많은 유소년 선수들이 이후 라이베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한때 거주했던 미국 뉴욕 스태튼 섬의 라이베리아인 공동체에서도 청소년 프로그램을 지원했다.

2016년에는 인도의 기업가 니라브 트리파티(Nirav Tripathi)가 회장으로 있는 디야 그룹(Diya Group)과 파트너십을 맺고, 빈곤국 및 신흥국의 청소년들을 지원하기 위한 글로벌 축구 아카데미 설립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스포츠를 통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웨아와 트리파티의 공통된 경험에 기반한 것으로, 여전히 빈곤 문제에 직면한 인도라이베리아 같은 국가의 청소년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