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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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펠레는 1940년 브라질에서 태어난 축구 선수로, 20세기 가장 성공적인 스포츠 스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어린 시절부터 축구에 두각을 나타낸 그는 1958년 FIFA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우승을 이끌며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고, 이후 1962년과 1970년 월드컵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며, 월드컵 3회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클럽에서는 산투스 FC에서 활약하며 수많은 우승을 경험했고, 뉴욕 코스모스에서도 선수 생활을 했다. 은퇴 후에는 FIFA 페어플레이 위원회 위원, 유니세프 친선 대사 등으로 활동했으며, 예술 분야에도 관심을 보였다. 펠레는 2022년 8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사망은 전 세계에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펠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70년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의 펠레
1970년 브라질의 펠레
본명에지송 아란치스 두 나시멘투
출생일1940년 10월 23일
출생지트레스코라송스, 브라질
사망일2022년 12월 29일
사망지상파울루, 브라질
안장 장소메모리얼 네크로폴 에큐메니카, 산투스, 상파울루
1.73 m
직업축구 선수
인도주의자
배우자로즈메리 두스 레이스 촐비(1966년–1982년, 이혼)
아시리아 레무스 세이샤스(1994년–2008년, 이혼)
마르시아 아오키(2016년)
자녀7명, 에지뉴 및 조슈아 나시멘투 포함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아버지돈디뉴
친척조카 (형제)
별칭펠레 (페레)
왕 (O ReiO Rei포르투갈어)
축구의 왕 (O Rei do FutebolO Rei do Futebol포르투갈어)
로마자 표기Pelé
Edson Arantes do Nascimento
선수 경력
포지션공격수, 공격형 미드필더
유소년 클럽1953–1956: 바우루
클럽1956–1974: 산투스
1975–1977: 뉴욕 코스모스
클럽 출장산투스: 583
뉴욕 코스모스: 64
클럽 득점산투스: 569
뉴욕 코스모스: 37
총 출장647
총 득점606
국가대표 경력
국가대표팀브라질
국가대표 출장92
국가대표 득점77
국가대표팀 연도1957–1971
수상
메달메달: 남자 축구
메달: 브라질
월드컵
월드컵1958 스웨덴: 금메달
1962 칠레: 금메달
1970 멕시코: 금메달
코파 아메리카
코파 아메리카1959 아르헨티나: 은메달
정치 경력
직책초대 체육부 장관
임기 시작1995년 1월 1일
임기 종료1998년 4월 30일
대통령페르난두 엔히키 카르도주
이전 직책신설
다음 직책하파엘 그레카 (체육관광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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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린 시절

펠레는 어린 시절 여러 아마추어 팀에서 축구를 했다. 1954년 아버지 돈지뉴의 소속팀인 바우루 AC 유소년 클럽에 합류하여, 아버지의 친구이자 전 브라질 국가대표 선수였던 바우데마르 지 브리투의 지도를 받았다. 바우데마르는 펠레의 재능을 알아보고 볼 컨트롤, 경기 흐름을 읽는 법 등 중요한 기술들을 가르쳤다. 1955년 바우데마르는 바우루를 떠났지만 펠레와 계속 교류하며, 1956년 펠레의 부모를 설득하여 산투스 FC에 입단하도록 주선했다.

2.1. 탄생과 가족

펠레의 고향인 미나스제라이스주 트레스코라송스 광장에 있는 그의 기념 동상
펠레의 고향인 미나스제라이스주 트레스코라송스 광장에 있는 그의 기념 동상

1940년 10월 23일, 브라질 남동부 미나스제라이스주의 도시 트레스코라송스에서 2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펠레가 태어났을 때 마을에는 전기 시설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전구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의 이름을 따서 '에드송(Edson)'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나 출생 증명서에는 '에지송(Edison)'으로 잘못 기재되어 그 이름이 정식 이름이 되었다.

아버지 돈지뉴(본명: 주앙 하무스 두 나시멘투)는 축구 선수로, 포지션은 중앙 공격수였다. 180cm가 넘는 큰 키를 활용하여 헤더를 잘하는 선수였으며, 아틀레치쿠 미네이루에서 뛴 적도 있지만 무릎 부상으로 방출되었다. 이후 작은 클럽에서 적은 급여를 받으며 선수 생활을 하는 등 성공적인 선수는 아니었다. 1944년, 펠레는 아버지가 무릎 부상이 심해져 은퇴하기 전, 아버지를 따라 상파울루주바우루로 이주했다. 아버지가 바우루 AC 선수로 취직하기 전에는 구두닦이 일을 하며 생계를 도왔다. 어머니 도나 셀레스치는 매우 엄격한 여성이었고, 아들이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운동 선수 대신 안정된 직장을 갖기를 원해 엄격하게 교육했다. 어린 시절 펠레는 비행기 조종사를 꿈꿨으나, 아버지의 영향으로 축구 선수가 되려 했고, 어머니 몰래 아버지에게 축구 기술과 마음가짐을 배웠다.

'펠레'라는 별명은 상로렌수 지역 연고팀인 바스쿠 다 가마의 주전 골키퍼 '빌레(Bilé)'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어린 펠레는 빌레 선수를 가장 좋아했는데, 'B' 발음을 'P'로 발음했던 것이다. 학교 친구들도 '펠레'라고 부르자, 이 별명을 싫어했던 펠레는 친구들과 싸워 2일간 정학 처분을 받기도 했다. 펠레라는 별명이 정착되기 전에는 에지송의 애칭인 '지쿠(Dico)'라고 불렸다.

1950년, 펠레가 9살이었을 때 1950년 FIFA 월드컵이 브라질에서 개최되었다. 우승 후보였던 브라질은 스위스전을 제외하고 무패로 결승에 진출하여 우루과이를 만났다. 당시 브라질은 우루과이보다 승점과 골 득실이 앞서 무승부만 해도 우승이 확정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7월 16일 결승전에서 브라질이 실점하여 우승에 실패하는 '마라카낭의 비극'이 일어났다. 펠레는 라디오 중계로 경기를 듣던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보았고, 아버지를 위해 브라질을 월드컵에서 우승시키고 우루과이에 복수할 것을 예수상 앞에서 맹세했다.

2.2. 유년기

펠레의 고향인 미나스제라이스주 트레스코라송스 광장에 있는 그의 기념 동상
펠레의 고향인 미나스제라이스주 트레스코라송스 광장에 있는 그의 기념 동상

펠레가 태어난 트레스 코라송이스(Tres Corações) 마을 풍경
펠레가 태어난 트레스 코라송이스(Tres Corações) 마을 풍경

펠레는 1940년 10월 23일 브라질 남동부 미나스제라이스주트레스코라송스에서 태어났다. 펠레가 태어났을 때 마을에 전기 시설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전구 발명자인 토머스 에디슨의 이름을 따서 '에드송(Edson)'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출생 증명서에는 '에지송(Edison)'으로 잘못 기재되어 현재까지도 수정되지 않았다.

펠레의 아버지는 돈지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축구 선수 주앙 하무스 두 나시멘투이다. 돈지뉴는 중앙 공격수로 뛰었고, 180cm가 넘는 키를 활용하여 헤더를 잘하는 선수였다. 벨루오리존치를 연고로 하는 아틀레치쿠 미네이루에서 뛴 적도 있지만, 무릎 부상으로 방출되어 군소 클럽에서 낮은 급여를 받으며 선수 생활을 했다. 1944년, 펠레는 아버지가 무릎 부상이 악화되어 은퇴하기 전, 아버지를 따라 상파울루주바우루로 이주했으며, 아버지가 바우루 AC 선수로 취직하기 전에는 구두닦이 일을 하며 생계를 도왔다. 펠레의 어머니 도나 셀레스치는 아들이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를 원하여 엄격하게 교육시켰다. 어린 시절 펠레는 비행기 조종사를 꿈꿨으나, 아버지의 영향으로 축구 선수가 되려고 하였고, 어머니 몰래 아버지에게 축구 기술과 마음가짐을 배웠다.

'펠레'라는 별명은 상로렌수 지역 연고팀인 바스쿠 다 가마의 골키퍼 빌레(Bilé)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어린 펠레는 빌레를 가장 좋아했는데, 'B' 발음을 'P'로 발음했던 것이다. 학교 친구들이 '펠레'라고 부르자, 펠레는 이 별명을 싫어하여 친구들과 싸웠고, 2일간 정학 처분을 받았다. 펠레라는 별명이 정착되기 전에는 에지송의 애칭인 지쿠(Dico)라고 불렸다.

1950년, 브라질 월드컵이 개최되었다. 브라질은 스위스전을 제외하고 무패로 결승에 진출하여 우루과이를 만났다. 브라질은 우루과이보다 승점과 골 득실이 앞서 무승부만 해도 우승할 수 있었지만, 마라카낭의 비극이 일어나 브라질은 우승에 실패했다. 이때 펠레는 라디오 중계로 경기를 듣던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보았고, 아버지를 위해 브라질을 월드컵에서 우승시키고 우루과이에 복수할 것을 예수상 앞에서 맹세했다.

이후 펠레는 동네 아마추어 팀에서 축구를 하며 10대 시절을 보냈고, 1954년 돈지뉴의 소속팀인 바우루 AC의 유소년 클럽이 창설되자 그 팀에 합류했다. 그 팀에서 아버지의 친구이자 전 브라질 국가대표 선수였던 바우데마르 지 브리투의 지도를 받았다. 바우데마르는 펠레의 재능에 주목하여 볼 컨트롤, 경기 흐름을 읽는 요령 등을 가르쳤다. 1955년 바우데마르는 바우루를 떠났으나, 펠레와 계속 교류하며 1956년 펠레의 부모를 설득하여 산투스 FC 입단을 주선했다.

2.3. 소년 시절

미나스제라이스주 트레스코라송스에서 2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펠레가 태어났을 때 마을에는 전기 시설이 부설되었기 때문에 전구 발명자인 토머스 에디슨의 이름을 따서 에드송(Edson)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출생 증명서에는 에지송(Edison)으로 오기되어 그 이름이 정식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펠레의 아버지 돈지뉴는 아틀레치쿠 미네이루에서 뛴 적도 있지만 무릎 부상으로 방출되어 군소 클럽에서 낮은 급여를 받고 뛰는 등 성공적인 선수는 아니었다. 1944년 펠레는 아버지를 따라 상파울루주 바우루로 이주했으며, 아버지가 바우루 AC 선수로 취직하기 전에는 구두닦이 일을 하면서 생계를 도왔다. 펠레의 어머니 도나 셀레스치는 매우 엄격한 여성이었으며, 아들이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 운동 선수 대신에 안정된 직장을 갖길 원해 펠레를 엄격히 교육했다. 어린 시절 펠레는 비행기 조종사를 꿈꿨으나 아버지의 영향으로 축구 선수가 되려 하였고, 어머니의 눈을 피해 아버지에게 축구 기술과 마음가짐을 배웠다.

"펠레"라는 애칭은 상로렌수 지역 연고팀인 바스쿠 다 가마의 주전 골키퍼 빌레(Bilé)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어린 펠레는 빌레를 제일 좋아했는데, "B" 발음을 "P"로 발음했던 것이다. 학교 친구들도 "펠레"라고 부르자 펠레는 그 별명을 좋아하지 않아 친구들과 싸웠고 2일 간 정학 처분을 받았다. 펠레라는 별명이 정착되기 전에는 에지송의 애칭인 지쿠(Dico)라고 불렸다. 9세 때인 1950년에 FIFA 월드컵이 브라질에서 개최되었고, 브라질은 스위스전을 제외하고 무패로 결승에 진출하여 우루과이를 만났다. 당시 브라질은 우루과이보다 승점과 골 득실이 앞섰기 때문에 무승부로 끝나도 우승이 확정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7월 16일에 치뤄진 결승전에서 브라질이 실점하여 우승에 실패하는 "마라카낭의 비극"이 일어났다. 이때 펠레는 라디오 중계로 듣던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으로 보았고, 아버지를 위해 브라질을 월드컵에서 우승시킬 것을 맹세했다.

이후 동네의 여러 아마추어 팀에서 축구를 하며 10대 시절을 보냈고, 1954년 바우루 AC 유소년 클럽이 세워지자 그 팀에 합류하였다. 거기서 아버지의 친구이자 브라질 국가대표팀 선수였던 바우데마르 지 브리투의 지도를 받았다. 바우데마르는 펠레의 재능에 주목하여 볼 컨트롤, 경기 흐름을 읽는 요령 등을 가르쳤다. 1955년 바우루를 떠났으나 펠레와 교류하며 1956년 펠레 부모를 설득하여 산투스 입단을 주선해주었다.

펠레의 고향인 미나스제라이스주 트레스코라손스 광장에 있는 그의 기념 동상
펠레의 고향인 미나스제라이스주 트레스코라손스 광장에 있는 그의 기념 동상

3. 클럽 경력

1962년 유럽 투어를 위해 산투스 선수 자격으로 네덜란드를 방문한 펠레.
1962년 유럽 투어를 위해 산투스 선수 자격으로 네덜란드를 방문한 펠레.

1962년의 펠레.
1962년의 펠레.

1963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전 2차전에서 보카 주니어스를 상대하기 전의 펠레(라 보므보네라)
1963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전 2차전에서 보카 주니어스를 상대하기 전의 펠레(라 보므보네라)

1975년 6월 15일 북미 사커 리그 데뷔 경기 시작 직전에 경기장에 입장하는 펠레.
1975년 6월 15일 북미 사커 리그 데뷔 경기 시작 직전에 경기장에 입장하는 펠레.


펠레는 산투스 FC 소속으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친선 경기를 가졌다. 스페인레알 마드리드 CFFC 바르셀로나, 이탈리아유벤투스 FC, 인터 밀란, AC 밀란, AS 로마와 경기를 치렀다. 1973년에는 이집트를 방문하여 알 아흘리와 경기를 가졌고, 쿠웨이트에서 카디시아와의 경기도 치렀다.

1956년 산투스 FC에 입단한 펠레는 몸무게가 60kg이 채 되지 않아 2군이나 유소년 팀에서 훈련했다. 6,000 크루제이루 월급으로 임시 계약을 맺고 바우루를 떠나 합숙 생활을 시작, 1956년 9월 7일 코린치앙스와의 친선 경기에서 데뷔골을 터뜨렸다. 바우테르 바스콘셀루스의 부상으로 출전 기회를 얻었고, 1957년 상파울루 주 선수권 대회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며 정식 계약을 맺었다. 1958년에는 이마누엘리 데우 베시우가 유럽으로 이적하면서 주전 자리를 확보, 상파울루 주 선수권 대회에서 38경기 58골을 기록하며 2년 연속 득점왕과 우승을 차지했다.

브라질 대표팀에서의 활약으로 산투스는 전 세계에서 친선 경기 제안을 받았고, 정기적으로 세계 투어를 했다. 1959년 첫 유럽 투어에서 6주 동안 22경기를 치르는 등 과밀 일정을 소화했고, 클럽 활동과 병행하여 병역 의무도 이행해야 했다. 펠레는 국가대표 활동을 이유로 면제를 주장했지만 허용되지 않았고, 산토스 연안 방위대에 배속되어 군 선발팀으로 남미 군인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 1959년에는 산토스, 브라질 대표팀, 상파울루 선발팀, 연안 방위대 팀, 군 선발팀 등 5개 팀에서 총 103경기에 출전했다.

이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레알 마드리드 CF 회장, 인테르, 움베르토 아녤리 유벤투스 FC 회장 등이 이적 제의를 해왔지만 모두 거절했고, 자니우 쿠아드루스 대통령은 펠레를 국외 유출이 불가능한 국보로 공식 선언하며 이적을 저지했다.

1962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페냐롤을 꺾고 우승, 1962년 인터콘티넨털컵에서 SL 벤피카를 상대로 1, 2차전 합계 5골 1도움을 기록하며 우승을 이끌었다. 1963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도 보카 주니어스를 누르고 대회 2연패를 달성했으며, 1963년 인터콘티넨털컵에서도 AC 밀란을 꺾고 우승했다.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펠레는 상대 선수들의 집중 견제를 받았고, 거친 플레이와 언어 도발을 겪었다. "펠레"라는 애칭의 상표권으로 수익을 올렸지만, 투기 사업 실패로 큰 빚을 졌다. 클럽은 빚을 갚아주는 대신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갱신했다.

1969년 1월, 콩고 민주 공화국콩고 공화국 간의 분쟁 중 콩고에서 산투스의 경기가 열릴 때, 양측 지도자는 경기 관람을 위해 휴전에 합의했다. 비아프라 전쟁으로 내전 중이었던 나이지리아에서는 나이지리아 정부군과 비아프라 간에 경기 전후 48시간 동안 휴전하고 펠레가 머무는 동안 라고스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1969년 11월 19일,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열린 CR 바스쿠 다 가마와의 경기에서 페널티킥으로 1000골을 달성했다. 1970년대에 산투스는 쇠퇴하기 시작했고, 펠레는 은퇴 후의 생활을 고민하며 산투스 메트로폴리탄 대학교에서 체육학을 전공했다. 1973년 펩시코 후원 국제 유소년 축구 프로그램 계약을 맺고 64개국을 방문하여 축구 교실을 열었다. 1974년 10월 2일, AA 폰치 프레타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산투스에서 은퇴했다.

1975년 미국으로 건너가 북미 사커 리그(NASL)의 뉴욕 코스모스로 이적하였다. 계약 기간은 2년이며, 이적료는 9였다. 1975년 6월 15일 댈러스 토네이도와의 경기에서 데뷔, 2-2 무승부를 기록했다. 펠레는 뉴욕 코스모스를 1977년 사커볼로 이끌었는데, 이 시즌은 그의 세 번째 시즌이자 클럽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다.

1977년 10월 1일 자이언츠 스타디움에서 열린 은퇴 경기인 뉴욕 코스모스와 친정팀 산투스와의 친선 경기는 7만 5천 명의 관중이 모여들었다. 펠레는 전반전에는 코스모스의 선수로, 후반전에는 산투스의 선수로 뛰었으며, 전반전에 1골을 넣고 자신의 은퇴 경기를 장식했다.

3.1. 산투스 FC

1962년 유럽 투어를 위해 산투스 선수 자격으로 네덜란드를 방문한 펠레.
1962년 유럽 투어를 위해 산투스 선수 자격으로 네덜란드를 방문한 펠레.

펠레가 1973년 2월 카이로 국제공항에서 환호하는 군중을 향해 손을 들고 있다.
펠레가 1973년 2월 카이로 국제공항에서 환호하는 군중을 향해 손을 들고 있다.

1973년 2월 쿠웨이트에서 펠레와 주바이다 타르왓.
1973년 2월 쿠웨이트에서 펠레와 주바이다 타르왓.

1962년의 펠레
1962년의 펠레

1962년 10월 네덜란드에서 산투스와 함께한 펠레
1962년 10월 네덜란드에서 산투스와 함께한 펠레

1963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전 2차전에서 보카 주니어스를 상대하기 전의 펠레(라 보므보네라)
1963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전 2차전에서 보카 주니어스를 상대하기 전의 펠레(라 보므보네라)


펠레는 산투스 소속으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친선 경기를 가졌다. 스페인에서는 레알 마드리드 CFFC 바르셀로나, 이탈리아에서는 유벤투스 FC, 인터 밀란, AC 밀란, AS 로마와 경기를 치렀다. 1973년에는 이집트를 방문하여 알 아흘리와 경기를 가졌는데, 이는 쿠웨이트에서 카디시아와의 경기를 치른 지 며칠 후였다.

쿠웨이트에서 펠레는 우연히 쿠웨이트의 한 영화 행사에 참석한 이집트 영화 배우 주바이다 타르왓을 만났다. 펠레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감탄했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타르왓은 인터뷰에서 펠레가 자신에게 장미꽃 화환을 씌워주었다고 회상했다. 그녀는 펠레가 자신을 따라다니며 브라질로 데려가려고 했다고 말했다. 펠레의 다음 방문지는 카이로였고, 그는 다시 타르왓을 만났지만, 펠레가 영어를 하지 못해 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1956년 산투스 FC에 입단한 펠레는 체중이 60kg이 채 되지 않아 바로 1군에서 뛰지 못하고 2군이나 유소년 팀에서 훈련했다. 월급 6,000 크루제이루로 임시 계약을 맺고 바우루를 떠나 합숙 생활을 시작했다. 1956년 9월 7일 코린치앙스와의 친선 경기에서 데뷔골을 터뜨렸다. 바우테르 바스콘셀루스의 부상으로 출전 기회를 얻었고, 1957년 상파울루 주 선수권 대회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며 정식 계약을 맺었다. 1958년에는 이마누엘리 데우 베시우가 유럽으로 이적하면서 주전 자리를 확보, 상파울루 주 선수권 대회에서 38경기 58골을 기록하며 2년 연속 득점왕과 우승을 차지했다.

브라질 대표팀에서의 활약으로 산투스는 전 세계에서 친선 경기 제안을 받았고, 정기적으로 세계 투어를 했다. 펠레는 모든 경기에서 기대에 부응해야 했지만, 1959년 첫 유럽 투어는 6주 동안 22경기를 치르는 과밀 일정이었다. 클럽 활동과 병행하여 병역 의무도 이행해야 했다. 펠레는 국가대표로 활동했으니 면제를 주장했지만 허용되지 않았고, 산토스 연안 방위대에 배속되어 군 선발팀으로 남미 군인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 1959년에는 산토스, 브라질 대표팀, 상파울루 선발팀, 연안 방위대 팀, 군 선발팀 등 5개 팀에서 총 103경기에 출전했다. 24시간 안에 2경기, 때로는 48시간 안에 3경기에 출전하기도 했다.

이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레알 마드리드 CF 회장, 인테르, 움베르토 아녤리 유벤투스 FC 회장 등이 이적 제의를 해왔지만 모두 거절했고, 자니우 쿠아드루스 대통령은 펠레를 국외 유출이 불가능한 국보로 공식 선언하며 이적을 저지했다.

1962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페냐롤을 꺾고 우승하여, 1962년 인터콘티넨털컵에서 SL 벤피카를 상대로 1, 2차전 합계 5골 1도움을 기록하며 우승을 이끌었다. 1963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도 보카 주니어스를 누르고 대회 2연패를 달성했으며, 1963년 인터콘티넨털컵에서도 AC 밀란을 꺾고 우승했다.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펠레는 상대 선수들의 집중 견제를 받았고, 거친 플레이와 언어 도발을 겪었다. 펠레는 "펠레"라는 애칭의 상표권으로 수익을 올렸지만, 투기 사업 실패로 큰 빚을 졌다. 클럽은 빚을 갚아주는 대신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갱신했다.

1969년 1월, 콩고 민주 공화국콩고 공화국 간의 분쟁 중이던 콩고에서 산투스의 경기가 열릴 때, 양측 지도자는 경기 관람을 위해 휴전에 합의했다. 산투스는 콩고에서 여러 경기를 치렀고, 1월 23일 콩고 민주 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친선 경기에서 2-3으로 졌다. 모부투 세세 세코 콩고 민주 공화국 대통령은 이 경기를 기념하여 1월 23일을 국민 체육일로 지정했다. 비아프라 전쟁으로 내전 중이었던 나이지리아에서는 나이지리아 정부군과 비아프라 간에 경기 전후 48시간 동안 휴전하고 펠레가 머무는 동안 라고스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1969년 11월 19일,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열린 CR 바스쿠 다 가마와의 경기에서 페널티킥으로 1000골을 달성했다. 1970년대에 산투스는 쇠퇴하기 시작했고, 펠레는 은퇴 후의 생활을 고민했다. 산투스 메트로폴리탄 대학교에서 체육학을 전공했다. 1973년 펩시코 후원 국제 유소년 축구 프로그램 계약을 맺고 64개국을 방문하여 축구 교실을 열었다. 1974년 10월 2일, AA 폰치 프레타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산투스에서 은퇴했다.

3.1.1. 프로 데뷔

1956년 산투스 FC에 입단한 펠레는 당시 몸무게가 60kg도 안 되는 왜소한 체구였다. 그는 바로 1군에서 뛰지 못했고, 2군과 유소년팀에서 훈련을 계속하였다. 그는 월급으로 6000 크루제이루를 받는 조건으로 가계약을 체결했고, 지금까지 생활하던 바우루를 떠나 산투스의 합숙소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956년 9월 7일에 7-1로 승리한 SC 코린치앙스와의 친선 경기에서 산투스 선수로서의 첫 경기와 첫 득점을 기록했다. 이후 산투스의 주전 공격수이자 펠레와 친했던 동료 선수인 바우테르 바스콘셀루스가 골절 부상을 입어 시즌 아웃을 당하자, 펠레는 브라질 프로 리그 출전 기회를 얻었다. 바스콘셀루스는 부상에서 회복한 후에도 이전과 같은 경기를 보여주지 못하고 자바쿠아라 아틀레치쿠로 이적했다. 이후 펠레는 1957년에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에서 득점왕에 올랐고, 1957년 4월 8일에 산투스와 정식 계약을 맺었다.

1958년에는 동료 공격수인 이마누엘리 데우 베시우가 이탈리아엘라스 베로나 FC로 이적하며 유럽으로 떠난 것을 계기로 펠레는 주전으로 떠올랐다. 그는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에서 38경기에 출전하여 58골을 넣으며 지난 대회에 이어 연속으로 득점왕에 올랐고 동시에 산투스의 우승에 기여했다.

3.1.2. 이적 소동

1961년 스페인의 명문 축구 클럽인 레알 마드리드 회장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펠레 영입 의사를 밝혔다. 같은 해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는 4000만 크루제이루의 이적료를 제시했고, 유벤투스 회장 움베르토 아녤리도 수천만 달러의 이적료를 조건으로 이적을 제의했다. 펠레는 이러한 제안을 모두 거절했고 산투스 측은 펠레를 방출하거나 이적시킬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적 소동은 자니우 쿠아드루스 대통령 시기 브라질 정부가 펠레를 국외로 유출할 수 없는 국보로 공식 선언하고 이적을 저지하는 사태로까지 커졌다. 한편 산투스 측은 펠레를 달래기 위해 거액의 돈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후 펠레는 지지가 레알 마드리드, 지누 사니와 조제 아우타피니가 AC 밀란으로 이적한 것처럼 유럽 클럽에서 뛴 선수가 많지만 산투스에서의 생활에 만족한다고 밝혔다.

당시 프로 축구 클럽은 1980년까지 외국인 선수 제한을 2명으로 설정했고, 축구 리그가 발전한 유럽 국가도 자국 선수의 국외 리그 이적에 제한을 두었다. 이탈리아월드컵에서의 부진을 이유로 1966년부터 1980년까지 이탈리아계 아르헨티나인을 제외한 외국인 선수 영입을 금지했고, 스페인은 1965년부터 1970년대 초까지 외국인 선수와의 계약을 금지하는 등 비유럽권 선수들이 타국 리그에서 뛸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펠레는 이러한 기회를 거절하고 브라질 국내에서 계속 선수 생활을 했다.

3.1.3. 국제적인 성공

1962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산투스는 우루과이의 페냐롤을 꺾고 브라질 클럽 최초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 대회 우승으로 인터콘티넨털컵 출전권을 얻은 산투스는 1962년 인터콘티넨털컵에서 에우제비우가 이끌던 포르투갈SL 벤피카를 상대로 1, 2차전 합계 5골 1도움을 기록하며 우승을 이끌었다. 이듬해 1963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도 아르헨티나의 보카 주니어스를 누르고 대회 2연패를 달성했으며, 1963년 인터콘티넨털컵에서도 AC 밀란을 꺾고 우승했다.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펠레는 상대 선수들의 집중 견제를 받았다. 그는 더 이상 신인이 아닌 챔피언으로 간주되었고, 상대 팀들은 그의 움직임과 동료 선수와의 연계를 방해하는 데 집중했다. 수비수들은 펠레에게 거친 플레이와 언어 도발을 일삼으며 퇴장을 유도하기도 했다.

펠레는 "펠레"라는 자신의 애칭에 대한 상표권을 획득하여 수익을 올렸고, 이를 바탕으로 투기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실패하여 큰 빚을 졌다. 클럽은 펠레의 빚을 갚아주는 대신 그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갱신했다.

1962년의 펠레.
1962년의 펠레.

1962년 10월 네덜란드에서 산토스와 함께한 펠레
1962년 10월 네덜란드에서 산토스와 함께한 펠레

1963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전 2차전에서 보카 주니어스를 상대하기 전의 펠레(라 보므보네라))
1963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전 2차전에서 보카 주니어스를 상대하기 전의 펠레(라 보므보네라))

3.1.4. 아프리카 원정

1962년 유럽 투어를 위해 산투스 선수 자격으로 네덜란드를 방문한 펠레.
1962년 유럽 투어를 위해 산투스 선수 자격으로 네덜란드를 방문한 펠레.

산투스는 수익을 얻기 위해 해외 원정 경기를 많이 치렀는데, 특히 펠레는 자신의 뿌리인 아프리카로 떠난 원정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그는 인종 차별이 만연했던 사회에서도 흑인이 성공할 수 있다는 상징으로 숭배받았고, 아프리카인들은 펠레를 보기 위해 경기장과 공항에 몰려들었다.

1969년 1월, 콩고 민주 공화국콩고 공화국 간의 분쟁 중이었던 콩고에서 산투스의 경기가 열릴 때, 양측 지도자는 경기 관람을 위해 휴전에 합의했다. 산투스는 콩고에서 여러 경기를 치렀고, 1월 23일 콩고 민주 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친선 경기에서 2-3으로 졌다. 모부투 세세 세코 콩고 민주 공화국 대통령은 이 경기를 기념하여 1월 23일을 국민 체육일로 지정했다. 비아프라 전쟁으로 내전 중이었던 나이지리아에서는 나이지리아 정부군과 비아프라 간에 경기 전후 48시간 동안 휴전하고 펠레가 머무는 동안 라고스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3.1.5. 1000골 달성

1969년 여름, 세계 축구계와 언론은 펠레의 통산 1000번째 골 달성에 주목했다. 1969년 10월, 펠레는 990골을 기록했고, 11월 14일 헤시피에서 열린 보타포구 FC와의 경기에서 999골을 달성하며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후 펠레가 출전하는 경기는 월드컵 결승전과 같은 열기를 띠었고, 일부 신문은 "펠레는 1000골을 달성하고 불로장생될 것"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

11월 19일,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열린 산투스와 CR 바스쿠 다 가마의 경기에서 6만 5천여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후반 33분 펠레가 페널티킥을 얻어냈다. 펠레는 골키퍼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반대 방향으로 차는 "Paradinha포르투갈어" 슛으로 골을 성공시켜 개인 통산 1000골을 달성했다. 골 성공 직후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 경기가 잠시 중단되었고, 기자들은 펠레와 짧은 인터뷰를 가졌다.

1000골 성공 직후 인터뷰 발언으로 인해 펠레는 위선자, 선동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후에 자서전에서 어머니에게 바칠 말을 떠올리지 못했고, 자신과 같은 입장의 사람이 메시지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후 브라질 우정국은 1000골 기념 우표를 발행했고, 브라질 정부는 리우브랑쿠 훈장 2등급을 수여하고 다음 날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1995년 상파울루주는 11월 19일을 "펠레의 날"로 지정했다.

3.1.6. 산투스 FC에서의 황혼기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산투스 FC는 기존 선수들의 이탈과 잦은 감독 교체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펠레는 축구를 예전만큼 즐길 수 없게 되자 은퇴 후의 생활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대학과 기업의 초청으로 강연 기회를 자주 얻었고,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과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학업에 대한 의욕을 느껴 줄리우 마제이의 지도로 선수 생활 중 틈틈이 공부하여 대학 입시에 합격, 산투스 메트로폴리탄 대학교에서 체육학을 전공하였다.

1973년에는 펩시가 후원하는 국제 유소년 축구 프로그램 프로젝트 계약을 맺었다. 이 계약은 5년으로 연장되었고, 펠레는 마제이와 함께 64개국을 방문하여 축구 교실을 열고 축구 보급에 힘썼다. 1974년 10월 2일, 18년 동안 선수 생활을 했던 산투스에서의 마지막 경기인 AA 폰치 프레타와의 경기에 참가하였다. 경기 시작 20분에 필드에서 공을 잡고 센터 서클을 향해 놓으면서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벌려 십자가와 유사한 포즈를 취해 팬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며 이별을 고했다.

1962년의 펠레
1962년의 펠레

3.2. 뉴욕 코스모스

1975년 6월 15일 북미 사커 리그 데뷔 경기 시작 직전에 경기장에 입장하는 펠레.
1975년 6월 15일 북미 사커 리그 데뷔 경기 시작 직전에 경기장에 입장하는 펠레.

산투스를 떠난 후인 1975년 미국으로 건너가 북미 사커 리그(NASL)의 뉴욕 코스모스로 이적하였다. 이적은 애틀랜틱 레코드의 창시자인 아흐메트 에르테군워너 브라더스의 사장이자 뉴욕 코스모스의 회장인 스티브 로스의 권유로 이뤄졌다. 계약 기간은 2년이며, 이적료는 9였다. 이 계약에는 미국 국무부 장관이자 열렬한 축구팬인 헨리 키신저의 후원이 있었다. 1970년대 당시 축구의 불모지였던 미국은 축구를 빠르게 보급하여 FIFA 월드컵을 유치하고자 하였으며, 펠레가 뉴욕 코스모스로 이적할 때 미국에서 뛰는 것으로 축구 발전에 협력해달라는 취지의 공문을 발행하여 이적을 지원했다. 코스모스 측은 21 클럽에서 열린 기자 회견에서 펠레를 공개했으며, 뉴욕 코스모스 대변인 존 오라일리는 미국에는 여러 슈퍼 스타가 있었지만 모두 펠레 수준은 아니었으며 모두가 펠레의 몸을 만지고 악수하고 사진을 찍고 싶어했다고 밝혔다. 이후 펠레는 보스턴에서 열린 공개 석상에서 그를 보려고 몰려든 인파에 몰려 부상을 입고 들것에 실려나가기도 했다.

펠레는 1975년 6월 15일 다우닝 스타디움에서 열린 댈러스 토네이도와의 경기에서 코스모스 데뷔전을 치렀고, 2-2 무승부를 냈다. 같은 날 열린 토론토 메트로스와의 경기는 2만 5천 명의 관중이 모였고, 이후에도 북아메리카 축구 리그의 평균 관중 수는 2만 명 대를 유지하였다. 펠레의 미국 진출은 조르조 키날리아가 뉴욕 코스모스로 이적한 것을 시작으로 프란츠 베켄바워, 산투스 시절 동료인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 요한 크라위프, 에우제비우, 보비 무어, 조지 베스트, 고든 뱅크스 등 축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선수들이 미국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펠레는 축구 불모지였던 미국에 축구 전도사 역할을 수행하는 인기 선수로 활약하여 뉴욕의 명예 시민이 되었다.

펠레는 뉴욕 코스모스를 1977년 사커볼로 이끌었는데, 이 시즌은 그의 세 번째 시즌이자 클럽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다. 1977년 6월 37세의 나이로 탬파베이 라우디스와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3-0으로 승리했다. 이때 자이언츠 스타디움에 입장한 관중 수는 62,394명으로 NASL 관중 최다 기록을 갱신했으며, 자이언츠 스타디움에서 열린 사커볼 8강 1차전에서 포트로더데일 스트라이커스에게 8-3으로 패한 경기에서는 77,891명의 관중이 찾아와 NASL 관중 최다 기록을 다시 갱신했다. 이후 로체스터 랜서스와의 준결승 2차전에서 4-1로 승리했고, 오리건주 포틀랜드시빅 스타디움에서 열린 시애틀 사운더스와의 경기에서 2-1로 승리하며 뉴욕 코스모스를 두 번째 사커볼 우승으로 이끌며 공식 선수 생활을 마쳤다.

같은 해 10월 1일 자이언츠 스타디움에서 열린 펠레의 은퇴 경기인 뉴욕 코스모스와 친정팀 산투스와의 친선 경기는 7만 5천 명의 관중이 모여들었다. 이 경기는 ABC의 와이드 월드 오브 스포츠를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으며, 무하마드 알리, 보비 무어를 비롯하여 아버지 돈지뉴와 아내 호제메리가 관람석에서 경기를 관람했다. 펠레는 전반전에는 코스모스의 선수로, 후반전에는 산투스의 선수로 뛰었으며, 전반전에 1골을 넣고 자신의 은퇴 경기를 장식했다. 경기 후 시상식에서는 "사랑을! 모두에게 사랑을! 세계에 사랑을!"이라는 말로 마무리했다.

4. 국가대표팀 경력

펠레는 1957년 리우데자네이루의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열린 산투스의 친선 경기를 관람하던 시우비우 피리유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 의해 대표팀에 발탁되었다. 같은 해 7월 7일, 마라카낭에서 열린 아르헨티나와의 코파 로카 1차전을 통해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57분에 교체 투입된 펠레는 브라질 대표팀 역사상 최연소 출전 기록을 세웠다. 비록 경기는 1-2로 패했지만, 펠레는 브라질 대표팀의 유일한 골을 넣었다. 이후 2차전에서도 골을 넣으며 2-0 승리를 이끌어 코파 로카 우승에 기여했다.

펠레의 첫 국제 경기는 1957년 7월 7일 마라카낭에서 열린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였다. 이 경기에서 펠레는 16세 9개월의 나이로 브라질 대표팀 첫 골을 기록하며, 브라질 최연소 득점 기록을 세웠다.

이후 펠레는 1958년 FIFA 월드컵에서 등번호 10번을 달고 맹활약하여 브라질의 첫 우승을 이끌었으며, 이후 축구계에서 등번호 10번은 에이스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이는 팀 내 추첨으로 결정된 우연이었다.

4.1. 1958년 FIFA 월드컵

펠레(등번호 10번)가 1958년 FIFA 월드컵에서 스웨덴 선수 세 명을 제치고 드리블하고 있다.
펠레(등번호 10번)가 1958년 FIFA 월드컵에서 스웨덴 선수 세 명을 제치고 드리블하고 있다.

17세의 펠레가 브라질이 1958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승리한 후 골키퍼 질마르의 어깨에 기대어 울고 있다.
17세의 펠레가 브라질이 1958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승리한 후 골키퍼 질마르의 어깨에 기대어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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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펠레는 상파울루 주 선수권 대회 2년 연속 득점왕을 차지한 실적을 바탕으로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으며, 등번호 10번을 받았다. 당시 브라질 대표팀 심리학자는 펠레와 가린샤가 너무 어려서 선수로서 가져야 할 호전적인 정신과 책임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선발을 반대했다. 그러나 비센치 페올라 감독은 몸이 빠르고 찬스에 강한 둘을 기용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여 대표팀에 포함시켰다.

대회 직전 불가리아와의 평가전에서 2골을 넣었으나 무릎 부상을 입어 조별 리그 2경기를 결장했다. 3차전 소련과의 경기에서 월드컵에 처음으로 출전했으며, 바바의 두 번째 골에 도움을 기록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17세였으며, 1982년 FIFA 월드컵에서 북아일랜드의 노먼 화이트사이드가 갱신하기 전까지 최연소 월드컵 출전 기록이었다.

8강전 웨일스와의 경기에서 66분에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골을 넣어 월드컵 사상 최연소 득점(17세 239일)을 성공하였다. 펠레는 이 골을 "나에게 가장 중요한 골 중 하나였다"며 감격했다. 준결승전 프랑스와의 경기에서는 52분, 64분, 75분에 연달아 골을 넣으며 해트트릭을 기록, 월드컵 역사상 최연소 해트트릭 기록을 세웠다.

결승전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55분에 발리슛으로 골을 넣고 종료 직전에 마리우 자갈루의 패스로 헤딩슛을 성공시키며 브라질의 첫 월드컵 우승에 기여했다. 특히 55분에 기록한, 스웨덴의 벵트 구스타브손의 머리에 맞은 공을 띄워 발리슛으로 연결시킨 것은 펠레의 골 중 최고의 골로 평가받는다. 펠레의 두 번째 골 이후 스웨덴 선수 시그바르드 파를링(Sigvard Parling)은 "펠레가 결승전에서 다섯 번째 골을 넣었을 때, 솔직히 말해서 박수치고 싶었다"고 말했다. 경기가 끝났을 때 펠레는 경기장에서 쓰러졌고, 가린샤에게 구조되었다. 그는 회복했고, 승리에 감격하여 동료들에게 축하받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4경기에 출전하여 6골을 넣어 저스트 퐁텐(Just Fontaine) 다음으로 득점 2위를 기록했고, 대회 최우수 신인 선수로 선정되었다.

이 대회에서 펠레가 "등번호 10번"을 달고 활약한 것은 이후 축구계에서 등번호 10번이 에이스 번호로 여겨지게 된 계기가 되었지만, 당시 팀 내 추첨으로 배정된 우연의 결과였다.

4.2. 1959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1959년 남미 선수권 대회는 펠레가 참가한 유일한 남미 선수권 대회였다. 펠레는 이 대회에서 6경기에 출전하여 8골을 넣으며 대회 득점왕과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칠레와의 경기에서 2골, 파라과이와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브라질의 6경기 중 5경기에서 득점하는 활약을 펼쳤다. 브라질은 토너먼트에서 무패를 기록했지만, 개최국 아르헨티나에 승점이 밀려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후 브라질 축구 연맹의 방침에 따라 1군 선수들이 남미 선수권 대회에 불참하게 되면서 이 대회는 펠레의 처음이자 마지막 남미 선수권 대회 활약이 되었다.

4.3. 1962년 FIFA 월드컵

1962년 칠레에서 열린 1962년 FIFA 월드컵에서 펠레는 세계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았다. 조별 리그 첫 경기인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다. 펠레는 첫 번째 골을 어시스트한 후 수비수 네 명을 제치고 두 번째 골을 넣어 2-0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이어진 두 번째 경기인 체코슬로바키아전에서 전반 25분에 드리블 돌파 후 중거리 슛을 쏘는 과정에서 허벅지 근육 부상을 당했다. 이 슛은 체코슬로바키아의 골키퍼 빌리암 슈로이프에게 막혔다. 펠레가 부상당하는 것을 본 체코슬로바키아 수비수 스바토플루크 플루스칼은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국제 축구 연맹(FIFA) 규정에 의해 월드컵 경기 교체 출전은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펠레는 교체되지 못하고 피치에 머물렀다. 부상당한 사실을 알게 된 요세프 마소푸스트, 라디슬라프 노바크, 얀 포플루하르, 얀 랄라, 슈로이프 등의 체코슬로바키아 선수들은 펠레를 고의로 건들지 않으려는 플레이를 펼쳤다. 특히 마소푸스트는 경기 도중에 펠레를 부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펠레는 체코슬로바키아 선수들에 대해 진정한 스포츠맨이라고 평가하고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체코슬로바키아전 이후 펠레는 남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으나, 브라질 대표팀은 펠레 없이 대회 2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펠레의 공백은 아마리우두가 채웠으며, 아마리우두는 결승에서 1골을 넣으며 우승에 기여했다. 당시 FIFA 규정은 결승전에 출전한 선수들만 메달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펠레는 2007년에 소급하여 우승 메달을 받았다.

4.4. 1966년 FIFA 월드컵

1966년 FIFA 월드컵 당시 펠레는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축구 선수였으며, 브라질가린샤, 질마르, 자우마 산투스와 같은 선수들과 자이르지뉴, 토스탕, 제르송과 같은 새로운 선수들을 기용하여 큰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브라질은 3경기 만에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펠레는 선수로서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대회 전부터 부상을 안고 있었다. 월드컵 첫 경기인 불가리아와의 경기에서 프리킥으로 1골을 넣었지만, 상대 수비수인 도브로미르 제체프의 거친 수비로 인해 부상을 입었다. 결국 펠레는 헝가리와의 2차전을 결장했고, 브라질은 헝가리에게 1-3으로 패했다.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인 포르투갈전에서는 부상을 딛고 출전했으나, 상대 수비수인 주앙 모라이스의 거친 반칙으로 무릎 부상을 입었다. 당시 규칙에는 선수 교체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펠레는 제대로 뛸 수 없었고, 브라질은 사실상 10명으로 경기를 이어갔지만 1-3으로 패하여 대회 3연속 우승에 실패했다.

당시 잉글랜드인 주심 조지 매케이브는 펠레에게 부상을 입힌 모라이스에게 경고조차 주지 않았고, 이는 월드컵 역사상 최악의 판정 중 하나로 남았다. 펠레는 거듭된 거친 플레이와 심판 판정에 분노하여 더 이상 월드컵에 출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며, 선수 보호 제도를 만들어달라고 FIFA 측에 강력히 요청했다.

4.5. 1970년 FIFA 월드컵과 대표팀 은퇴

펠레는 1966년 FIFA 월드컵 이후 2년 동안 대표팀에서 활동하지 않았다. FIFA가 선수 보호를 위해 선수 교체 제도와 카드 제도를 정비하자, 펠레는 다시 한번 최고의 자리에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1968년에 대표팀 복귀를 선언했다. 1968년 7월 25일 파라과이와의 경기에서 2골을 넣으며 복귀했고, 이후 1970년 FIFA 월드컵 남미 지역 예선에서 6경기 6골을 기록하며 활약했다.

1970년 FIFA 월드컵에서 펠레는 호베르투 히벨리누, 제르송, 토스탕, 자이르지뉴 등과 함께 브라질 대표팀의 공격을 이끌었다. 조별 리그 첫 경기인 체코슬로바키아전에서 1골 2도움을 기록하며 4-1 승리를 이끌었고, 2차전 잉글랜드전에서는 1-0 승리에 기여했다. 특히 잉글랜드전에서 펠레의 헤딩슛과 고든 뱅크스의 선방은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3차전 루마니아전에서는 두 골을 넣어 3-2 승리를 이끌었다.

8강에서 페루를 4-2로 꺾고, 준결승에서 우루과이를 3-1로 꺾으며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전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펠레는 헤딩 선제골을 넣고, 자이르지뉴카를루스 아우베르투의 골을 어시스트하며 4-1 승리를 이끌었다. 이로써 브라질은 세 번째 월드컵 우승을 달성했고, 펠레는 골든볼을 수상했다.

1970년 FIFA 월드컵 우승 후 축하받는 펠레
1970년 FIFA 월드컵 우승 후 축하받는 펠레


1970년 월드컵 이후 펠레는 몇 차례 친선 경기에 더 출전했고, 1971년 7월 18일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를 끝으로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펠레는 브라질 대표팀에서 A매치 92경기에 출전하여 77골을 기록했으며, 이는 브라질 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이다.

5. 은퇴 후의 삶

은퇴 후 펠레는 국제축구연맹(FIFA) 대사와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세계적인 홍보 활동과 아동 권리 보호 운동에 참여했다. 2001년 FIFA와 유니세프가 파트너십을 체결한 후에도 이 활동을 계속했다.

예술 분야에도 관심을 보여 1978년 영화 《우스 트롬바지냐스》(Os Trombadinhas)의 각본을 썼고, 1981년 영화 《승리의 탈출》(Escape to Victory)에 마이클 케인, 실베스터 스탤론과 함께 출연하여 축구 묘사 자문을 담당했다. 기타 연주에도 관심을 가져 일리스 헤지나, 세르지우 멘지스, 자이르 호드리게스 등 브라질 음악가들과 협연했다.

1993년에는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가 브라질 축구 리그 중계권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브라질 축구 연맹으로부터 1000000USD의 뇌물을 요구받았다고 폭로했다. 펠레는 뇌물을 요구한 인물을 밝히지 않았지만, 이로 인해 히카르두 테이셰이라 브라질 축구 연맹 회장과 그의 장인이자 FIFA 회장이었던 주앙 아벨란제와 대립했다. 아벨란제는 보복으로 1994년 FIFA 월드컵 조 추첨식에서 펠레를 제외했다.

1995년 페르난두 엔히키 카르도주 대통령에 의해 브라질 체육부 장관에 임명되어 브라질 최초의 흑인 장관이 되었다. 1998년까지 재임하며 "올림픽 빌리지" 건설과 펠레법 제정에 힘썼다. 펠레법은 선수가 구단의 계약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이적할 수 있도록 한 법률로, 1998년 가결되어 2001년부터 시행되었다. 이로써 선수 보유권이 폐지되고 계약 종료 후 이적료가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 체육부 장관 재임 중에도 테이셰이라 및 아벨란제와 관계가 악화되어 펠레의 회사는 사업에서 배척되었지만, 2001년 화해하여 분쟁을 끝냈다. 그러나 언론은 펠레를 "왕이 평민으로 전락했다", "스포츠 윤리를 위해 싸워온 민중에 대한 최대의 배신"이라고 비판했다.

펠레는 많은 명예직에 임명되었고, 1998년 대영 제국 훈장을 받았다. 펩시, 푸마, 마스터카드, 코카콜라 등 여러 기업의 광고에 출연했고, 2002년에는 화이자의 발기부전 치료제 대변인을 맡았다. 2010년에는 현역 시절 마지막 팀인 뉴욕 코스모스의 명예 회장으로 취임했다.

1995년
1995년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에서 연설하는 펠레(2006년)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에서 연설하는 펠레(2006년)

반데를레이 루솅부르구(Vanderlei Luxemburgo)의 생일 파티에 참석한 펠레(2007년)
반데를레이 루솅부르구(Vanderlei Luxemburgo)의 생일 파티에 참석한 펠레(2007년)

펠레와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2008년)
펠레와 브라질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2008년)

6. 사망

2015년부터 노환으로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2021년 정기 건강 진단 시 오른쪽 결장에서 이 발견되어 그 해 9월 4일에 적출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약 1개월간 입원하고 같은 해 12월 8일부터 상파울루에 있는 이스라엘리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병원에 입원하여 화학 치료를 받았다. 같은 해 12월 23일에 퇴원했지만 항암 치료는 계속되었고, 이후 병원에서 한 달에 한 번 검사를 받는 생활이 이어졌다. 2022년 4월 18일부터 이스라엘리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병원에 다시 입원했으며 이후 잠시 퇴원했다가 2022년 11월 29일부터 치료의 재검토를 위해 다시 입원했다. 이때는 호흡기 감염도 확인되었다.

펠레의 입원이 보도된 시기 카타르에서 2022년 FIFA 월드컵이 개최되었는데, 당시 대회에 참가한 브라질 국가대표팀의 응원단이 경기 전 국가 제창 시에 펠레의 회복을 기도하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카타르에 있는 높이 300m의 어스파이어 타워에는 펠레의 모습을 크게 비추는 점등이 켜졌다. 월드컵 이후에는 화학 치료를 했지만 차도가 없어서 이를 중단하고 투병하다가, (현지 시간으로) 12월 29일 오후 3시 27분에 8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펠레의 죽음은 전 세계에 일제히 보도되었고, 리오넬 메시킬리안 음바페 등의 축구 선수들과 펠레의 현역 시절 소속팀인 산투스 FC에서 공식 SNS를 통해 애도를 표했다.

장례식은 2023년 1월 2일과 3일에 산투스 FC의 홈구장인 빌라 베우미루에서 진행됐다. 펠레의 시신은 펠레의 아버지 돈지뉴가 안치된 네크로폴 에큐메니카 공동묘지 9층에 안치되었다.

펠레가 별세한 지 1년 6개월 후, 펠레의 어머니인 셀레스치 아란치스(1923년 ~ 2024년)가 세상을 떠났다.

7. 영향

펠레는 뛰어난 축구 실력과 영향력으로 많은 선수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그의 별명은 후배 선수들에게 널리 사용되었다. "하얀 펠레"로 불린 토스탕지쿠, "러시아의 펠레" 예두아르트 스트렐초프, "사막의 펠레" 마제드 압둘라 등이 그 예시이다. 특히 가나아베디 펠레는 펠레의 이름을 가명으로 사용했고, 니 램프티는 펠레 스스로 후계자로 삼기도 했다. 2000년대 이후 호비뉴, 네이마르 등이 "새로운 펠레"로 불렸고, 잉글랜드웨인 루니도 "하얀 펠레"라는 별명을 얻었다. 브라질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마르타 비에이라 다 시우바는 "치마 입은 펠레"라는 별명을 얻었다.

펠레는 축구를 "아름다운 경기(The Beautiful Game)"와 연결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양발로 정확하고 강력한 슛을 날리는 능력이 뛰어났다. 또한 뛰어난 시야와 지능, 정확한 패스와 어시스트 능력도 갖춘 선수였다.

펠레는 다양한 공격 포지션에서 활약했으며, 스트라이커, 중앙 공격수(centre forward), 인사이드 포워드(inside forward), 세컨드 스트라이커(second striker) 등으로 뛰었다. 후기에는 공격형 미드필더(attacking midfielder) 역할을 맡아 플레이메이킹을 하기도 했다. 펠레의 플레이 스타일은 속도, 창의성, 기술, 체력, 지구력, 운동 능력을 결합한 것이었다. 그의 드리블 기술은 매우 뛰어나 상대를 쉽게 제칠 수 있었으며, '드리블 다 바카(drible da vaca)'와 '파라딩냐(paradinha)'가 그의 트레이드마크 기술이었다.

펠레는 헤딩 능력도 뛰어났으며, 휘어지는 슛과 프리킥, 페널티킥에도 능숙했다. 하지만 페널티킥을 비겁한 득점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자주 차지 않았다.

펠레는 경기장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과 스포츠맨십을 보여주었다. 1970년 월드컵에서 보비 무어와의 포옹은 스포츠맨십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펠레는 중요한 경기에서 결정적인 골을 넣는 "큰 경기 선수"로 명성을 얻었다.

8. 펠레의 저주

펠레의 FIFA 월드컵 우승국 예상은 모두 빗나가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94년 FIFA 월드컵 당시에는 콜롬비아의 우승을 예상했지만 콜롬비아 대표팀은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독일을 유력 후보로 거론하고 브라질에 대해 "뛰어난 선수를 가지고 있지만 팀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후보에서 제외했으나 독일은 8강에서 탈락하고 브라질이 우승했다.

1998년 FIFA 월드컵에서는 스페인을 가장 주목받는 팀으로 꼽았지만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따르면 펠레는 이 대회에서 스페인을 가장 강력한 후보로 꼽았고 결승 상대는 브라질이 될 것으로 예상했으며, 개최지와 지리적 이점이 있는 프랑스잉글랜드를 유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했다고 밝혔다.

2002년 FIFA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프랑스가 결승에 진출 할 것으로 예상하고 브라질은 우승 할 수 없다고 예상했지만, 아르헨티나와 프랑스는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고 우승할 수 없다고 예측한 브라질이 우승했다. 이탈리아포르투갈을 유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했지만 이탈리아는 16강전에서, 포르투갈은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2006년 FIFA 월드컵에서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브라질을 꼽았다. 잉글랜드, 이탈리아, 네덜란드, 프랑스에 대해서는 에이스 역할을 수행할 선수가 존재하지 않는 점을 이유로 우승 가능성은 낮다고 평가했다. 한편 브라질, 아르헨티나, 잉글랜드를 우승 후보로 거론했지만 모두 우승하지는 못했다.

2010년 FIFA 월드컵에서는 멕시코의 우승을 예상했지만 16강에서 탈락했다. '아프리카의 팀이 큰 활약을 할 것'이라고 밝혔으나 가나만 16강에 진출하는 등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가나의 니 램프티와 잉글랜드의 닉 밤비처럼 '월드 클래스 선수가 될 것'이라고 재능을 높이 평가한 젊은 선수가 크게 성장하지 못하는 징크스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호나우두AC 밀란에서 부상을 입고 방출당하자 더 이상 축구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으나 2009년 3월에 SC 코린치앙스에 이적하여 리그에서 14경기에 출전하여 10골을 넣는 등 활약했다.

2014년 FIFA 월드컵 당시에는 개최국인 브라질을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로 삼았고, 독일스페인을 우승 후보로 거론했으며, 아르헨티나칠레도 주목할 만한 팀으로 꼽았다. 잉글랜드에 대해 "어려운 조에 속했지만 조별 리그를 돌파 할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으나 스페인은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고, 브라질은 준결승에서 탈락하는 결과를 낳았으나 독일의 우승을 적중시켰다.

2022년 FIFA 월드컵에서는 펠레가 임종을 앞둔 상태였는데, 그 월드컵에서는 브라질이 우승할 것이라는 발언을 해서 마지막 펠레의 저주가 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브라질은 그 월드컵의 8강전에서 크로아티아에게 승부차기로 패배하여 탈락했고, 이로써 마지막 펠레의 저주도 결국 통하고 말았다.

9. 수상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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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내역
클럽대회시즌
산투스 FC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이 A1961, 1962, 1963, 1964, 1965, 1968
코파 리베르타도레스1962, 1963
인터콘티넨털컵1962, 1963
인터콘티넨털 챔피언스 슈퍼컵1968, 1970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1958, 1960, 1961, 1962, 1964, 1965, 1967, 1968, 1969, 1973
리오-상파울루 토너먼트1959, 1963, 1964, 1966
뉴욕 코스모스북미 사커 리그 사커볼1977
국가대표대회시즌
브라질FIFA 월드컵1958, 1962, 1970
개인수상시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득점왕1965
인터콘티넨털컵 득점왕1962, 1963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이 A 득점왕1961, 1963, 1964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득점왕1957, 1958, 1959, 1960, 1961, 1962, 1963, 1964, 1965, 1969, 1973
리오-상파울루 토너먼트 득점왕1963
볼라 데 프라타1970
FIFA 월드컵 베스트 영 플레이어1958
France Football 선정 1958 FIFA 월드컵 최우수 선수1958
Opta 선정 1970 FIFA World Cup 최우수 선수1970
남미 챔피언십 최우수 선수1959
남미 챔피언십 득점왕1959
FIFA Ballon d'Or Prix d'Honneur2013
국제 축구 역사 & 통계 연맹(International Federation of Football History & Statistics) 선정 20세기 최고의 축구 선수1999년
국제 축구 역사 & 통계 연맹(International Federation of Football History & Statistics) 선정 20세기 최고의 남미 선수1999년
IFFHS선정 20세기 최고의 브라질 선수2006
France Football's Ballon d'Or1958, 1959, 1960, 1961, 1963, 1964, 1970
FIFA 20세기 최고의 선수2000년
UNICEF선정 20세기 최고의 축구 선수1999년
FIFA Order of Merit1984
FIFA Centennial Award2004
FIFA 1002004
Winner of France Football's World Cup Top-100 1930–1990
BBC Overseas Sports Personality of the Year1970
BBC Sports Personality of the Year Lifetime Achievement Award2005
Laureus Lifetime Achievement Award2000
Golden Foot: Greatest football player to have ever played the game2012
Athlete of the Century, by Reuters News Agency1999
Athlete of the Century, elected by 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1999
남미 올해의 축구 선수1973
Football Player of the Century, elected by France Football's Ballon d'Or Winners1999
Inducted into the American National Soccer Hall of Fame1992
World Team of the 20th Century1998
TIME: One of the 100 Most Important People of the 20th century1999
World Soccer Greatest XI of All Time2013
FWA Tribute Award2018
북미 사커 리그(NASL) 올스타 팀1975, 1976, 1977
뉴욕 코스모스 10번 영구 결번1977
Elected Citizen of the World, by the United Nations1977
Elected Goodwill Ambassador, by UNESCO1993
리우브랑쿠 훈장 4등급1967
리우브랑쿠 훈장 2등급1969
헝가리 공화국 십자공로장1994
대영 제국 훈장 사령관 기사 명예 2등급1997년 12월 3일
브라질 문화공로훈장 2등급2004
Elected Commander of the Order of Rio Branco after scoring the thousandth goal1969
Awarded the FIFA Order as a tribute to his 80 years as a sports institution1984
Awarded with the Order of Merit of South America, by CONMEBOL1984
Awarded with the Order of Champions, by the Organization of Catholic Youth in the USA1978
He was awarded the National Order of Merit, by the government of Brazil1991
Olympic Order, by the 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2016

10. 경력 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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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기록
해트트릭92회
1경기 4골31회
1경기 5골 이상6회
월드컵 출전14경기 12골
산투스 FC와 유럽 클럽 간 친선 경기 득점132경기 143골
통산 득점 (친선 경기 포함)1363경기 1281골

뉴욕 코스모스는 펠레의 등번호 10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친선 경기는 공식 기록이 아님

11. 방송 출연

펠레는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1981년에는 실베스터 스탤론, 마이클 케인과 함께 《승리의 탈출》에 출연하여 축구 장면의 기술 고문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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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의 영화 출연 목록
년도제목역할비고
1969Os Estranhos플리니오 폼페우TV 시리즈
1971O Barão Otelo no Barato dos Bilhões아란테스 박사/본인
1972A Marcha시코 봉다데
1981승리의 탈출 (Escape to Victory)루이스 페르난데스 상병
1983A Minor Miracle본인Young Giants로도 알려짐
1985Pedro Mico
1986핫샷 (Hotshot)산토스
1986Os Trapalhões e o Rei do Futebol나시멘토
1989Solidão, Uma Linda História de Amor
2001마이크 바셋: 잉글랜드 감독 (Mike Bassett: England Manager)본인
2016펠레: 전설의 탄생 (Pelé: Birth of a Legend)호텔 로비에 앉아 있는 남자카메오 출연


또한, 펠레는 기타 연주 실력을 바탕으로 작곡한 음악이 에리스 레지나, 세르지우 멘데스, 자이르 로드리게스 등 유명 음악가들에 의해 연주되기도 했다.

11.1. 광고

펠레는 은퇴 후 펩시콜라, 푸마, 마스터카드, 코카콜라 등 세계적인 기업들의 광고 모델로 활동했다. 2002년에는 제약회사 화이자의 의뢰를 받아 발기부전 치료제 광고 모델로 활동했으며, 삼성전자의 파브 광고 모델로도 활동했다.

펠레는 "펠레 카페"라는 커피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는데, 이는 1960년대 브라질 커피 협회가 유럽 진출 시 설립한 것으로 동유럽과 중동 등 세계 각지에서 판매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