벵골 분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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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벵골 분할령은 1905년 영국령 인도 제국 총독 커존이 행정 효율성을 명분으로 벵골 지역을 분할한 정책이다. 실제로는 민족 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한 의도로, 힌두교도가 다수인 서벵골과 무슬림이 다수인 동벵골로 나누어 벵골인들을 분리하려 했다. 이로 인해 벵골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스와데시 운동 등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1911년 벵골 분할령은 철회되었지만, 1947년 벵골 분할의 배경이 되었으며,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에 영향을 미쳤다.
1885년, 영국은 대영제국에 협조적인 인도 국민 회의를 자문 기관과 같은 형태로 취급하여, 인도의 상인, 지주, 지식인 계층 등의 회유를 도모했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반영적인 자세를 나타내는 급진파가 국민회의에서 대두되고 있었으며, 식민지 정부는 이러한 동향을 우려하고 있었다.[20]
The Bengal Partition영어은 1905년 인도 총독 커즌이 시행한 벵골 지역 분할을 의미한다. 표면적으로는 행정 효율화를 위한 조치였지만, 실제로는 벵골 지역의 민족 운동을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벵골 분할령은 벵골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벵골의 지식인들은 이를 민족 정체성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했다.[21] 수렌드라나트 바네르지 등의 인도 국민 회의 지도자들은 벵골 분할에 반대하며 영국 상품 불매 운동 (스와데시 운동)을 주도했다.[11][24]
2. 배경
이런 가운데 인도 총독 커즌이 제정한 것이 벵골 분할령이었다. 당시 벵골 관할 구역은 벵골, 비하르, 현재의 차티스가르, 오리사, 아삼의 일부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으로,[24] 효과적인 관리에 어려움을 초래하고 가난한 동부 지역에 대한 무관심을 야기한다고 영국 관리들은 주장해 왔다.[20][21]
커즌은 오리사와 비하르를 분할하고 벵골의 15개 동부 지역을 아삼과 합병할 계획을 세웠다. 동부 주는 인구 3100만 명을 보유했으며, 대부분이 무슬림이었고 중심지는 다카에 있었다.[20] 커즌은 새로운 주를 무슬림으로 생각했다고 지적했다.[19] 서벵골을 오리사 및 비하르와 통합함으로써 벵골어 사용자는 소수가 되었다.[24]
결과적으로 벵골 지방의 서벵골(현재 서벵갈 주, 힌두교 신자 다수 거주 지역)을 다른 주에 편입하여 지방 의회 선거에서 벵골인들을 소수파로 만들고, 동벵골(현재 방글라데시, 무슬림 다수 거주 지역)에 무슬림 자치주를 설립하여 민족 운동이 나뉘기를 의도했지만, 오히려 반영 투쟁을 격화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3. 벵골 분할령의 내용 (1905년)
벵골 분할령에 따라 벵골은 동벵골과 서벵골로 분리되었다.
이 분할은 벵골인들을 지방 의회 선거에서 소수로 만들고, 무슬림 자치주를 설립하여 민족 운동을 분열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와는 달리, 벵골 분할령은 오히려 반영 투쟁을 격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4. 분할에 대한 반발과 스와데시 운동
스와데시 운동은 단순한 불매 운동을 넘어, 국산품 애용, 민족 교육 장려 등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으며, 인도 민족주의 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분할일(1905년 10월 16일)은 형제자매 관계를 기념하는 락샤 반단 날과 겹쳤는데,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무슬림들에게 라키를 묶어 종교 간 유대를 강조하고 벵골 분할에 반대하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4][5]
4. 1. 인도 국민 회의의 분열
인도 국민 회의는 벵골 분할령에 대한 대응 방식을 두고 온건파와 급진파로 분열되었다.[19] 온건파는 영국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급진파는 보다 적극적인 저항 운동을 주장했다.
수렌드라나트 바네르지는 분할에 반대하는 청원이 효과가 없음을 인정하고, 영국 상품 불매 운동과 같은 강력한 접근 방식을 옹호했다. 그는 이 운동을 ''스와데시''로 칭했다.[11][24]
분할은 급진적 민족주의를 촉발시켰고, 인도 전역의 민족주의자들은 벵골의 대의를 지지했다. 영국이 여론을 무시하고 "분할 통치" 정책을 펼치는 것에 대해 충격을 받았다.[21]
G.K. 고칼레와 같은 온건파는 존 모리 인도 국무 장관과의 대화를 통해 헌법 개혁을 얻고자 했다.[19] 그러나 1906년 캘커타 회의에서 온건파는 급진파의 도전을 받았다. 온건파는 다다바이 나우로지를 초청하여 회의에서 온건파를 옹호하게 함으로써, 회의의 단결을 유지했다.[19]
1907년, 의회는 나그푸르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온건파는 극단주의자들이 회의를 지배할 것을 우려하여 장소를 수라트로 옮겼다. 분노한 극단주의자들이 수라트 회의에 몰려들었고, 양 진영은 별도의 회의를 열었다. 아우로빈도와 틸락을 지도자로 하는 극단주의자들은 고립되었고, 의회는 온건파의 통제하에 놓였다.[19]
5. 무슬림 벵골인들의 반응
1903년 벵골 분할령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무슬림 크로니클과 중앙 국민 무하메단 협회 등 무슬림 단체들은 이 제안을 비난했다. 무슬림 지도자 차우두리 카젬우딘 아흐메드 시디키, 델와르 호세인 아흐메드는 벵골 연대의 분할 위협과 동벵골의 교육, 사회 및 기타 이익이 감소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이유로 이 아이디어를 비난했다.[6]
1904년, 커존은 이 제안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 동벵골의 무슬림 다수 지역을 공식 방문했다. 그는 다카를 동벵골의 새로운 수도로 고려하고 있음을 암시하며 이 계획이 "구시대의 옛 무슬만 총독과 왕 이후 그들이 누리지 못했던 통일성을 동벵골의 무하메단들에게 부여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7]
교육받은 무슬림들이 분리된 주가 허용할 독립에 대해 알게 되자, 대부분은 분할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1905년, 무하메단 문학 협회는 동부와 서부의 무슬림들에게 분할 조치를 지지할 것을 촉구하는 7명의 무슬림 지도자들이 지지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새로운 주의 임박한 개념은 종종 소외되었던 무슬림 벵골인들에게 그들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고 그들의 공동체와 지역에 특정한 문제를 제기할 기회를 제공했다. 1905년 10월 16일, 모든 기존 무슬림 단체와 그룹을 통합하기 위해 무하메단 주 연합이 설립되었다. 나와브 바하두르 경 Khwaja Salimullah가 이 연합의 회장으로 만장일치로 선포되었다.
비록 다수의 무슬림이 분할을 지지했지만, 몇몇 저명한 무슬림 대변인들은 계속해서 이에 반대했다. 나와브 바하두르 경 Khwaja Salimullah의 이복형제인 Khwaja Atiqullah는 1906년 캘커타 회의에서 벵골 분할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발의했다. 다른 사람들로는 압두르 라술, 칸 바하두르 무하마드 유수프(변호사이자 중앙 국민 무하메단 협회 관리 위원회 위원), 무지부르 라흐만, Abdul Halim Ghaznavi, 이스마일 호세인 시라지, 무하마드 골람 호세인(작가이자 힌두-무슬림 통일의 옹호자), 마울비 리아카트 후세인(영국의 '분할 통치' 정책에 강력히 반대하는 자유주의 무슬림), 보그라의 사이드 하피주르 라흐만 차우두리와 부르드완의 아불 카셈이 있었다. 마이멘싱의 딘 무하마드와 치타공의 압둘 가파르와 같은 몇몇 무슬림 설교자들은 스와데시 사상을 설교했다.
AK 파즐룰 후크와 니바란 찬드라 다스는 그들의 주간지 Balaka(1901, 바리살)와 월간 Bharat Suhrd(1901, 바리살)를 통해 힌두-무슬림 연대를 촉진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다.
1906년, 전인도 무슬림 연맹은 나와브 바하두르 경 Khwaja Salimullah의 주도로 다카에서 설립되었다. 전통적이고 개혁적인 무슬림 단체인 파라이지, 와하비, 타이유니는 분할을 지지했다.
무슬림 다수인 동벵골은 캘커타를 중심으로 모든 교육, 행정 및 전문적인 기회가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뒤쳐져 있었다. 무슬림 다수인 동벵골과 이 지역의 자체 수도에 대한 약속은 과거에 기회를 얻기 어렵게 만들었다.[8]
스와데시 운동은 반분할 의제와 힌두적 성향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많은 무슬림들은 이 운동이 그들의 공동체에 해를 끼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Mir Mosharraf Hossain과 같은 저명한 작가들은 스와데시 운동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했다.[6]
6. 벵골 재통합 (1911년)
1911년, 벵골 분할령은 결국 철회되었다.[20] 조지 5세는 1911년 12월 12일 델리 두르바에서 동벵골을 벵골 관구에 통합할 것이라고 발표했다.[9][22] 벵골어가 사용되는 지역은 다시 통합되었고, 아삼 주, 비하르 주, 오리사 주는 분리되었다. 영국은 인도의 수도를 캘커타(현 콜카타)에서 델리로 이전했는데, 이는 벵골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이었다.[20]
벵골의 재통합은 벵골인들에게는 승리였지만, 무슬림들에게는 실망스러운 결정이었다. 동벵골의 무슬림들은 영국 정부가 힌두교도들을 달래기 위해 무슬림들의 이익을 훼손했다고 생각했다.[22]
7. 벵골 분할령의 유산
벵골 분할령은 인도 민족주의 운동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힌두교도와 무슬림 간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세카르 반도파디야이와 같은 역사가들은 커존 경의 벵골 분할 계획이 민족주의적 불안감을 "증폭"시켰다고 주장한다.[11] 분할에 반대하는 격렬한 움직임과 인도 국민 회의 내 '강경파'의 등장은 분리주의 무슬림 정치의 최종적인 동기가 되었다.[25]
1909년에는 무슬림과 힌두교도를 위한 별도의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전에는 양쪽 공동체의 많은 구성원들이 모든 벵골인의 민족적 연대를 옹호했지만, 별도의 선거구를 통해 독자적인 정치 공동체가 발전했고, 자체적인 정치적 의제를 갖게 되었다. 또한 무슬림은 전체적으로 약 2천2백만에서 2천8백만 명에 달하는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입법부를 지배했다.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이익이 보호될 독립 국가의 창설을 요구하기 시작했다.[14]
결국, 종교에 의한 분할안은 인도 국민 회의의 반대 운동으로 무산되었지만, 다수파 힌두교도의 수의 힘으로 밀어붙여졌다는 불만이 이슬람교도에게 남게 되었다. 종전 후 전인도 무슬림 연맹을 이끌었던 무함마드 알리 진나의 주도로 파키스탄(현재의 방글라데시를 포함)이 독립하고, 힌두교도와 무슬림의 분단 국가가 형성된 것을 고려하면, 이 사건이 인도 역사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1911년에 이 분할이 철회되었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 시기가 통합된 벵골 민족주의 정체성을 낳았다고 주장한다.[12]
7. 1. 1947년 벵골 분할과의 비교
1947년, 벵골은 인도 분할의 일부로,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두 번째로 분할되었다.[23] 동벵골은 인도 서부의 무슬림 다수 지역(발루치스탄, 펀자브, 신드, 북서 변경주)과 합쳐져 파키스탄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다. 파키스탄에서 유일하게 땅이 이어지지 않은 지역이었던 동벵골은 1955년에 "동파키스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71년,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라는 독립 국가가 되었다.[14]래드클리프 라인을 기준으로 한 1947년 분할은 1905년 커존의 분할과 매우 비슷했다.[12] 래드클리프 라인은 벵골의 두 지역에 힌두교도와 무슬림 인구가 같아야 한다는 계획에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동벵골은 71%, 서벵골은 70.8%가 무슬림이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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