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종인 묘와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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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변종인 묘와 신도비는 변종인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유적이다. 신도비는 대제학 성현이 지은 비문으로 그의 성품, 업적, 사상 등을 기록하고 있다. 변종인은 관후한 성품과 청렴함으로 벼슬 생활을 하였으며, 무예와 병법에도 능통했다. 묘소는 부인 이천 안씨와 쌍분으로 조성되었으며, 묘비, 상석, 문관석 등이 갖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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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비 - 장성 김인후 신도비
장성 김인후 신도비는 조선 시대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김인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으로, 숙종 8년에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영조 18년에 이재가 비문을 쓰고 김진상이 전서를 써서 건립되었으며, 김인후의 생애와 학문적 업적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받는다.
변종인 묘와 신도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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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변종인 묘와 신도비 |
영문 이름 | Byeon Jong-in Myo and Sindobi |
유형 | 향토문화재 |
지정 번호 | 1 |
지정일 | 1986년 4월 29일 |
주소 (묘) |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고강동 산 63-7 |
주소 (신도비) |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고강동 산 63-9 |
시대 | 조선 |
2. 신도비의 위치 및 형태
신도비는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고강동 능골에 위치하고 있다. 비좌(碑座)는 문갑 무늬로 장식되어 있으며, 옥개(屋蓋)는 무인이었던 변종인을 상징하여 투구형으로 만들어졌다. 비신(碑身)은 백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154cm, 폭은 76cm, 두께는 20cm이다.[2]
변종인(卞宗仁, 1433년 ~ 1500년)은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자는 자원(子元),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1433년(세종 15년) 밀양 변씨 변예생과 배천 조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452년(단종 즉위년) 충순위에서 벼슬을 시작하여 내금위, 당상관(정3품), 첨지사(정3품), 동지사(종2품), 자헌대부(정2품) 등을 역임하였다.[2]
변종인은 성품이 관후하고 외모가 준수하였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뜻을 거스르더라도 교류를 끊지 않았으며, 직무에 있어서는 부지런하고 신중하였고 가는 곳마다 공적을 남겼다.[1] 벼슬을 지내고 정사에 임해서는 바른 것을 지키고 아부하지 않았으며, 여러 요직을 거치면서도 일을 잘 처리하였다. 일이 있을 때마다 힘을 다하였으며 평생 바른 말을 하고 행동에 흐트러짐이 없었다.[1]
성현이 지은 신도비문에 따르면 변종인은 성품이 관후하고 남에게 얽매이지 않았다. 벼슬을 지내고 정사에 임해서는 바른 것을 지키고 아부하지 않았으며, 여러 중직을 역임하면서 조치를 잘 하였다. 그는 일이 있을 때마다 힘을 다하였으며 평생 바른 말을 하고 행함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항상 화기를 띠고 집에 있을 때에는 자신에게 엄격했으며, 청탁을 하지 않고 담백하였다. 또한 후손들에게 청백함을 본받도록 일렀으며, 공적인 일을 위해 사사로움을 버리도록 교육하였다.[1]
부인 이천 안씨와 쌍분(雙墳)을 이루고 있다. 묘 앞에는 비투(碑頭)에 투구형을 조각한 묘비,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장명등(長明燈)이 있다. 좌우에는 문관석(文官石)이 설치되어 있다.[2]
변종인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국방력 강화와 외교 관계 안정에 기여한 인물이다.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가는 곳마다 공적을 세웠으며, 평생 바른말을 하고 흐트러짐 없는 행동으로 오늘날까지 귀감이 되고 있다.[2]
[1]
공고
부천시 향토유적 지정 및 보호구역 설정 예고(안) 공고
http://www.bucheon.g[...]
부천시장
2012-05-02
3. 변종인의 생애와 업적
1467년(세조 13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당상관으로 승진하였다. 성종 대에는 오랑캐의 침입을 막고 여러 차례 변방을 지키는 임무를 맡아 국방력 강화에 힘썼다. 1494년(성종 25년)에는 지중추부사로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2]
변종인은 성품이 관대하고 외모가 준수했으며, 다른 사람이 자신의 뜻을 거스르더라도 교제를 끊지 않았다고 한다. 직무에 임해서는 부지런하고 신중했으며 가는 곳마다 공적이 있었다. 또한 청백하고 검소함을 스스로 지켜 자손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2]
1500년(연산군 6년) 3월,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공장(恭莊)으로, 신중하고 공손하게 임금을 섬기고, 적을 이기고 뜻이 강하다는 의미이다.[2]
4. 성품과 사상
사람을 대할 때에는 항상 온화한 기운을 띄었고, 집에 있을 때에는 자신에게 엄격하였으며, 청탁을 하지 않고 소박하게 지냈다. 또한 후손들에게 청백함을 본받도록 가르쳤으며, 공적인 일을 위해 사사로움을 버리도록 교육하였다.[1]
여러 사람을 정성껏 도와주고 몸소 무예를 닦아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병법에 능통하였다. 예를 즐기며 시를 돈독히 하고, 청렴하고 검소함을 스스로 지켜 자손들이 본받도록 하였다.[1]
5. 신도비문
변종인은 여러 사람을 정성껏 도와주고 몸소 무예를 닦아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병법에 능통하였다. 예를 즐기며 시를 돈독히 하고, 청백하고 검소함을 스스로 준수하여 자손들이 귀감으로 삼도록 하였다.[1]
6. 묘소
7. 평가
그는 관대하고 준수한 외모를 지녔으며, 자신과 뜻이 다른 사람과도 교류를 끊지 않았다. 직무에 있어서는 부지런하고 신중했으며, 공적인 일을 위해 사사로움을 버리고 청탁을 받지 않는 등 청백함을 실천하였다. 또한 후손에게도 청백함을 본받도록 가르쳤다.[2]
변종인은 무예가 뛰어나고 병법에 능통했으며, 여러 사람을 정성껏 도왔다. 예를 즐기고 시를 좋아했으며,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여 자손들의 귀감이 되었다.[2]
참조
[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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