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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애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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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시애의 난은 1467년, 조선 세조 치세에 함경도에서 일어난 반란이다. 세조의 중앙 집권 강화 정책과 함경도 지역 차별에 대한 불만이 배경이 되었으며, 회령 부사였던 이시애가 주도했다. 이시애는 절도사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켜 함경도 일대를 장악했으나, 정부군의 반격으로 3개월 만에 진압되었다. 반란 진압 후 함길도는 함경북도와 함경남도로 분리되었으며, 길주목은 길성현으로 강등되는 등 지역 통제가 강화되었다. 이시애의 난은 조선 왕조 최초의 대규모 화약전을 보여준 사건으로도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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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애의 난 - [전쟁]에 관한 문서
이시애의 난
어유소가 해안 절벽을 기어올라 이시애 군대를 격파하는 모습
발생 시기1467년 5월 ~ 8월
장소함경도
결과정부군 승리, 반란 진압
교전 세력
전투 세력 1조선군
지휘관 1세조
귀성군
이준
조석문
허종
강순
김교
어유소
남이
전투 세력 2이시애 반란군
지휘관 2이시애 (처형)
이시합 (처형)
이명효 (처형)
병력 규모
정부군 병력 (5월)30,000명
정부군 병력 (7월)50,000명
반란군 병력 (5월)30,000명
반란군 병력 (7월)10,000명
피해 규모
피해군사적 사상자 불명, 20,000명 항복 및 정부군 귀순, 반란군 궤멸 및 지도자 처형

2. 배경

세조는 즉위 후 중앙집권 강화를 위해 함경도 출신 수령의 임명을 제한하고 경관(京官)으로 대체했으며, 수령들에게 지방 유지들의 자치기구인 유향소의 감독을 강화하게 했다. 이로 인해 타지 출신 수령들과 유향소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1]

회령부사를 지내다가 상(喪)을 당하여 관직을 사퇴한 이시애는 유향소의 불만과 백성들의 지역감정에 편승했다. 그는 아우 이시합(李施合), 매부 이명효(李明孝) 등과 함께 조정의 함경도인 지역 차별 및 단종 폐위 등을 반역으로 규정하고 거사를 모의하여, 1467년(세조 13) 5월 회령에서 거병, 반란을 일으켰다.[1]

이시애는 자신의 지위에 대한 불안감[2][1][3]과 더불어, "하삼도의 군사들이 육로로 함길도로 진격하고, 조정에서는 평안도와 황해도 군사들을 동원해 본도(함경도) 백성을 모두 죽일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민심을 선동했다.[1][3] 그러나 관리와 귀족들은 이시애의 소문을 허황된 것으로 비판하며 속지 않고 반란에 동조하지 않았다.

2. 1. 조선 초기 함경도의 특수성

세조는 중앙집권 정책을 강화하면서 함경도 출신 관리들을 줄이고, 남쪽 출신 관리들을 파견하여 함경도를 다스리게 했다.[1] 또한, 조선 백성의 이동을 규제하기 위해 호패법을 시행하였다.[1]

함경도는 이성계의 고향으로, 조선 건국 이전에는 여진족과의 잦은 충돌이 있던 지역이었다. 태조는 이 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웠고, 세종 대에는 두만강까지 영토가 확장되었다. 삼남 지방과 강원도 사람들이 함길도로 이주하면서 도(道)가 형성되었지만, 여진족의 침입에 맞서 싸우기 위해 막대한 인적, 물적 희생이 필요했고 이는 함경도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었다.[1]

조선 건국 이후, 함경도의 효율적인 통치와 방어, 그리고 왕실의 발상지를 우대하기 위해 향리 출신의 지방관이 세습적으로 임명되었다.[1] 그러나 세조가 즉위하면서 북부 지역 향리들은 백성에 대한 지배력을 잃을 것을 우려하여 불만을 품게 되었다.[1]

유자광은 이시애의 난 당시 토벌군에 참여했는데, 난이 확산된 이유가 함길도에 파견된 관리들이 지역 실정에 어둡고 백성을 착취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은 성곽 축조 등의 공사로 백성을 괴롭혔고, 함길도 주민에 대한 지역 차별로 인해 백성들은 외지에서 온 관리들에게 저항하였으며, 함길도의 향청들은 중앙 정부에 대항하여 힘을 합쳤다.[1]

2. 2. 세조의 중앙집권 강화 정책

세조는 즉위 후 중앙집권 정책을 강화하면서 함경도 출신 수령의 임명을 제한하고 경관(京官)으로 대체하였다. 또한, 수령들에게 지방 유지들의 자치기구인 유향소(留鄕所)의 감독을 강화하게 하였다.[1] 타지 출신 수령들과 유향소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1]

함경도는 조선 왕조 창업주인 이성계의 고향으로, 그의 권력 기반이었다. 세종 대에는 강역이 두만강까지 확장되었고, 삼남 지역과 강원도 사람들이 함길도로 이주하여 도(道)를 이루었다. 그러나 여진족의 침입에 맞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함길도 방어를 위해 막대한 인적·물적 희생이 필요했고, 이는 함경도 백성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1]

조선 건국 후 함길도의 효율적인 통치와 방어, 그리고 왕실 발상지를 우대하기 위해 향리 출신의 지방관이 세습적으로 임명되었다.[1] 그러나 세조가 즉위한 후, 중앙집권화 정책을 강화하여 북쪽 출신 관리의 수를 점차 줄이고 남쪽 출신 관리를 파견하여 함경도를 다스리게 했다. 세조는 또한 조선 백성의 이동을 규제하기 위해 호패법을 시행하였다. 이로인해 북부 지역의 향리는 백성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할 것을 우려하였고, 이는 북부 지역 사람들의 불만을 야기했다.[1]

유자광은 이시애의 난 당시 토벌군에 참여했는데, 난이 확산된 이유가 함길도에 파견된 관리들이 지역 실정에 어둡고 백성을 착취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더욱이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관리들은 성곽 축조 등의 공사로 백성을 괴롭혔다.[1] 함길도 주민에 대한 지역 차별로 인해 백성들은 외지에서 온 관리들에게 저항하였고, 함길도의 향청들은 중앙 정부에 대항하여 힘을 합쳤다.[1]

2. 3. 함경도 지역 차별과 불만

세조는 중앙집권 정책을 강화하면서 함길도 출신 수령의 임명을 제한하고 중앙 관리를 파견했다. 또한 백성들의 이동을 규제하기 위해 호패법을 실시했다.[1] 이는 지역 주민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함경도는 이성계의 고향으로, 조선 건국 후 향리 출신 지방관이 세습적으로 임명되어 지역을 다스렸다.[1] 그러나 세조 즉위 후 중앙집권화 정책으로 북쪽 출신 관리 수가 줄고 남쪽 출신 관리가 파견되면서, 함경도 백성들은 외지에서 온 관리들에게 저항하게 되었다.[1]

특히 함경도는 여진족과의 잦은 충돌로 인해 막대한 인적, 물적 희생을 감당해야 했고, 이는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었다.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관리들은 성곽 축조 등으로 백성을 괴롭혔고, 지역 실정에 어둡고 백성을 착취한다는 비판을 받았다.[1] 이러한 함경도 주민에 대한 지역 차별은 유향소를 중심으로 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1]

이시애는 이러한 지역적 불만과 차별에 편승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어머니 상을 당하여 함길도에 머무르던 중, 동생 이시합, 매부 이명효 등과 함께 불만을 품은 귀족과 백성들을 규합했다.[2] 그는 "하삼도의 군사들이 육로로 함길도로 진격하고, 조정에서는 평안도와 황해도 군사들을 동원해 본도(함경도) 백성을 모두 죽일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민심을 선동했다.[1][3]

3. 경과

1467년 5월, 이시애길주를 방문한 함길도절도사 강효문을 살해하면서 사건이 시작되었다. 오랫동안 여진족과의 군사적 요충지였던 함경도는 주민들의 부담이 컸고, 세조의 중앙집권화에 반발한 함경도 백성들이 이시애의 반정부 운동에 호응하여 대규모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6]

이시애는 국왕의 측근인 한명회신숙주가 강효문과 결탁하여 반란을 모의했다는 告発을 하여, 사건은 정권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까지 확대되었다.[6] 세조는 두 훈신을 사건 해결 때까지 구금했다.

반란이 장기화되자 세조는 구성군 이준을 총사령관(함길강원평안황해사도병마도총사)에 임명하고, 강순(진북장군), 남이 등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진압군을 함경도에 파병했다. 3개월 후, 이시애는 부하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반란은 종식되었다.[8]

3. 1. 반란 초기

이시애는 길주로부터 단천, 북청, 홍원으로 남하하면서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들을 모두 죽이고 스스로 왕명을 받은 절도사라 칭하며 거병하였다. 이시애는 '함길도의 절도사가 진장들과 함께 반역을 음모하고 있다'고 선동하여 절도사 강효문(康孝文), 함경도관찰사 신면, 길주목사 설징신(薛澄新) 등을 죽이고 체찰사 윤자운(尹子雲)을 사로잡았다.[6] 이어 '방금 남도의 군대가 바다와 육지로 쳐올라와서 함길도 군민을 다 죽이려 한다'고 선동하자 흥분한 함길도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유향소를 중심으로 일어나 타 지역 출신 수령들을 살해하는 등 함길도는 대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6]

이시애는 중앙에도 연락을 띄워 '병마절도사 강효문 등이 한성부한명회(韓明澮), 신숙주(申叔舟) 등과 결탁하여 함길도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서 모반하려 하여 민심이 흉흉하니 함길도 사람을 고을의 수령으로 삼기 바란다'는 등 모략 전술을 폈다.[6] 세조는 이에 속아 한명회, 신숙주 등을 한때 투옥하였다가, 신면, 강효문 등이 처형된 소식을 접하고는 곧 구성군 준(龜城君 浚)을 병마도총사로 삼아 토벌군을 출동시켰다.[6]

이시애는 어머니상을 당하여 함길도로 휴가를 간 것을 기회로 삼아, 그의 동생 이시합과 사위 이명효와 함께 불만을 가진 북방 지역의 귀족과 백성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도모하며 관직에서 물러났다.[2] 그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군사들도 설한령을 넘어 함길도로 진입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며 민심을 선동했다.[1][3]

1467년 5월 10일, 이시애는 함길도 병마절도사 강효문을 공격하여 살해했다. 동시에 길주 현감 성정신, 길주군 판관 박순달, 푸른 룡(Puryong) 현감 김익수를 살해함으로써 북방 지역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 반란을 일으켰다.[4][1][2]

이시애는 자신의 고향인 길주군에 근거지를 마련한 후, 익속군(익속군|守城軍한국어)을 선봉으로 하여 북청, 홍원 현과 단천, 함흥 등의 여러 도시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신면 등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지방 관리들을 모두 살해하고, 윤자운을 체포하면서 왕의 명령을 받아 반역죄로 처형했다고 주장했다.[4][1][2][3]

3. 2. 중앙 정부의 대응

1467년 5월 15일, 귀성군강원도 북부에 있던 이시애군을 패퇴시키고 회양(淮陽)으로 진격했다. 세조5월부터 항복하면 처벌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효유문(曉諭文)을 보냈지만, 통지문을 가져간 사자는 죽임을 당했다. 또한 반군 지휘자들을 체포하는 자들에게는 현상금을 걸었다.[4][1][2][3] 6월 1일, 억류되었던 체찰사 윤자운이 병사 한 사람과 옷을 바꿔입고 이시애의 진영에서 탈출하여 귀성군에게 합류했다. 귀성군은 윤자운을 호송한 뒤 철령을 넘어 안변에 진을 쳤고, 허종은 영흥으로 들어가 반군과 교전하였다.

이시애는 200~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마곡역(麻谷驛)에 나오기도 하고, 이시합은 홍원군 하탄동에서 귀성군의 부장 차운혁(車云革)에게 사로잡혔으나 거짓 속임수로 빠져나갔다. 당시 반군은 함흥, 관군은 영흥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세조는 효유문으로 마무리하려던 정책을 거두고, 신숙주 등을 풀어주는 동시에 친정(親征)을 계획하는 등 강경책을 강구하였다.[4][1][2][3]

이러한 세조의 강경책에 이시애는 당황하여 북청을 거쳐 이성(利城, 지금의 이원군) 다보동으로 본부를 옮겼다가 다시 북청군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시애의 후퇴로 구성군의 관군은 6월 19일 함흥을 점령하고 홍원으로 나아가 서쪽인 함관령(咸關嶺) 아래 신원(新原)에 새 막사를 짓고 근거지로 하여 전군을 지휘하였다. 구성군은 강순을 북청 공략의 선봉으로 삼고 종개(鐘介), 산개(山介)의 두 산에 진지를 구축하게 하였다. 귀성군의 군사는 안변에서 평안도 지역의 이시애군을 격퇴하고, 강순은 박중선, 허종, 어유소 등과 더불어 종개령을 넘어 북청 앞의 평포(平浦)에서 이시애군을 궤멸시키고 진을 쳤다.[4][1]

한편, 세조는 토벌군에 추가 병력을 파견했다. 평안도에서 영흥과 문천(文川)까지 3,000명의 군대를 지휘하게 할 북서면(西北面)의 도원수로 강순(姜順)을 임명했다. 또한 황해도에서 무천(茂川)까지 1,000명 이상을 지휘하는 박정선(朴貞宣)과, 한성에서 구성군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1,000명 이상의 경찰 병력을 지휘하는 어유소(魚有素)에게 권한을 부여했다. 세조는 또한 군대에 다수의 화약 무기를 공급했다.[4][1][2][3]

3. 3. 교전

1467년 5월 15일, 귀성군강원도 북부에 있던 이시애군을 간신히 물리치고 회양(淮陽)으로 진격했다. 세조5월부터 여러 효유문(曉諭文)을 보내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처벌하지 않겠다고 했으나, 통지문을 들고 간 사자는 죽임을 당했다. 또한 반군 지휘자들을 잡아오는 사람에게는 현상금을 걸었다. 6월 1일, 억류되었던 체찰사 윤자운이 병사 한 사람과 옷을 바꿔 입고 극적으로 이시애의 진영에서 탈출했다. 귀성군은 윤자운을 호송한 뒤 철령을 넘어 안변에 진을 쳤고, 허종은 영흥으로 들어가 반군과 싸웠다.

그 동안 이시애는 200~5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마곡역(麻谷驛)에 나타나기도 했고, 이시합은 홍원군 하탄동에서 귀성군의 부장 차운혁(車云革)에게 붙잡혔으나 거짓말로 속이고 빠져나가기도 했다.

당시 반군은 함흥, 관군은 영흥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세조는 효유문으로 마무리하려던 정책을 거두고, 가두었던 신숙주 등 중신들을 풀어주는 동시에, 친히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는 친정(親征)을 계획하는 등 강경책을 마련했다.

이시애세조의 강경책에 당황하여 북청을 거쳐 이성(利城, 지금의 이원군) 다보동으로 본부를 옮겼다가 다시 북청군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시애가 후퇴하자 구성군의 관군은 6월 19일 함흥을 점령하고 홍원으로 나아가 서쪽인 함관령(咸關嶺) 아래 신원(新原)에 새 막사를 짓고 근거지로 삼아 전군을 지휘했다. 구성군은 강순을 북청 공략의 선봉으로 삼고 종개(鐘介), 산개(山介)의 두 산에 진지를 구축하게 했다. 귀성군의 군사는 안변에서 평안도 지역의 이시애군을 격퇴하는 한편, 강순은 박중선, 허종, 어유소 등과 함께 종개령을 넘어 북청 앞의 평포(平浦)에서 이시애군을 궤멸시키고 진을 쳤다.

6월 19일, 이시애군은 북청에서 퇴각하고, 이시합은 2만여 명의 군사를 북청 근처인 여주을현(汝注乙峴)에 주둔시켰다. 한편, 자신은 단천 이북의 여러 진군(鎭軍)과 여진족 500여 명을 합쳐 이성 고사리포(高沙里浦)에서 북청 어소(於所)로 나아가 관군을 협공하려 했다. 이를 모르는 관군은 북청성으로 진격해 들어갔다가 이시애군은 없었고, 주변에 있던 이시합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강순은 김교(金嶠)의 건의에 따라 목책(木柵)을 두르고, 또 밖에는 녹각(鹿角)을 늘어놓는 한편, 성 밖에는 갱도를 파고 그 위를 평지처럼 하여 적군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6월 24일 밤 4고(四鼓[7])에 이시애군이 기습 공격을 했으나, 강순은 말에 재갈을 물리고 다리를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성문을 굳게 닫아걸어 공격을 무시하고 응전하지 않았다. 날이 밝자 북도 사람을 시켜 대의(大義)로써 이시애군을 설득하니 그들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이시애는 10여 회나 싸움을 걸었으나 관군의 북청 수비진을 뚫지 못하고 패퇴했다.

관군은 이시애에게 대궐에 나아가 자수(自首)할 것을 권했으나 듣지 않았다. 북청에서 패퇴한 이시애군은 다시 군세를 정비하였다.

7월 14일, 이시애는 자신의 사위인 이명효(李明孝)에게 홍원·북청·갑산·삼수의 백성들을 모아 탕구령(湯口嶺)을 넘어 홍원 서쪽인 신익평(申翌坪)에 주둔해 관군의 함흥과 북청 통로와 보급로를 차단하게 했다. 이시합은 이성 이북의 백성을 이끌고 마어령(磨於嶺)을 넘어 2진을 형성하게 하는 동시에, 이시애 자신은 회령 이북의 백성을 이끌고 대문령(大門嶺)을 넘어 열여문평에 진을 쳐서 장기전을 펴고 관군의 자멸을 기다렸다.

한편, 관군은 북청에 있는 군사를 홍원으로 후퇴시키려 하여 1·2·3진으로 나누어 이시애군을 뚫고 나가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이시애는 이 틈을 타서 북청을 점령하였다. 그 동안에도 관군은 이시애 등에게 효유에 나섰으나 이시애가 듣지 않자 결국 장기전으로 나가게 되었다.

7월 25일, 강순 장군은 밤중에 상거령을 몰래 넘어 진격했고, 어유소 장군은 종거령을 통해 북청으로 잠입하여 양면 공격을 가했다. 동시에 귀성군과 그의 군대는 구성군을 출발하여 평포군으로 진격했다. 포위섬멸 작전을 이용하여 상거령에서 반군을 격파했다. 관군은 북청으로 진격하여 반란 참여 관리이자 검객인 유덕지가 이끄는 반군을 무찔렀다. 관군은 반군을 흡수하여 병력을 약 5만 명으로 늘렸다. 패배 소식을 들은 이시애는 남은 1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만령으로 향했다.[1][2][3][4]

화차 발사대. 각 화살의 좁은 부분에 점화 장치가 설치되어 발사된다.


리원군 만령(萬嶺) 고개는 남쪽으로 바다, 북쪽으로 태산(太山)을 마주하고 있어 이시애가 정부군과 싸우기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였다.

7월 31일, 강순의 군대가 먼저 만령에 도착했고, 이어 어유소의 군대, 그리고 귀성군의 군대가 도착했다. 먼저 귀성군, 강순, 박중선, 우종(禹種) 중장, 허종 등이 이끄는 병사들은 주요 도로 남쪽 중앙 봉우리로 이동했다. 어유소는 해안과 동령(東嶺) 고개에 배치되었고, 김교 등은 북산(北山) 아래로 이동하여 만령을 사방에서 포위하고 동시에 공격하여 이시애와 화약 무기와 화살을 주고받으며 교전했다. 여진족과 연계된 이시애는 증원을 요청했지만, 정부군은 홍원과 북청 지역에서 반군을 격파하고 그들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오후 3~5시경, 우종이 반군을 공격하여 만령의 주봉을 점령하자, 남은 5,000명의 반군은 중앙 봉우리로 후퇴했다.[1][2][3][4] 이시애는 약 2,000명의 팽배대(彭排隊, 팽배대|彭排隊중국어)를 3열로 배치했다. 동시에 오후 5~7시경, 어유소화차를 이용하여 이시애 군의 좌익을 관통하는 중앙 봉우리 포격을 명령했다. 그는 우종을 파견하여 위장된 수륙양용 특수부대를 이끌고 후방 방어선 모서리의 틈을 침투하게 하여 정부군이 반군을 격파하고 이시애가 야간에 후퇴하게 만들었다.[1][2][3][4]

3. 4. 진압

7월 25일 관군은 비밀리에 작전을 개시하여 강순의 군사를 선봉으로 산개령을 넘게 하고, 어유소의 군사는 종개령을 넘어 북청을 공격하게 했다. 귀성군의 군사는 평포로 진격했다. 강순어유소는 협공으로 이시애군을 격파하고 북청을 점령, 가짜 부절도사 유득지를 격퇴하고 병력을 흡수하여 관군이 5만 명으로 늘어났다.[8]

이시애는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만령으로 이동했다. 만령은 남쪽으로는 바다, 북쪽으로는 태산을 등지고 있어 전투에 유리했다. 7월 말, 강순, 어유소, 귀성군의 군사가 집결하여 만령을 공격했다. 귀성군, 강순, 박중선 등은 큰길로, 허종은 중봉으로, 우공은 큰길 중봉, 어유소는 바닷가와 동령, 김교 등은 북산 밑으로 진격하여 4면에서 포위, 협공하는 전술로 이시애군의 주봉을 점령하고 중봉을 공격했다.[8]

7월 말, 이시애는 여진족과 내통하여 저항하려 했으나, 신숙주, 허종, 강순, 어유소, 남이 등이 이끄는 3만 군대가 함경남도 홍원, 북청에 주둔하던 이시애군을 격파하고 이원군의 만령에서 반란군 주력부대를 분쇄하였다.[8]

7월 31일 이시애는 2천 명의 병력으로 3중 포열을 치고 저항했으나, 어유소군이 이시애군의 좌측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관군은 육탄전으로 이시애군을 패퇴시켰고, 이시애이성 쪽으로 도망쳤다.[8]

8월 1일 관군은 이성까지 추격했으나, 이시애군은 이성군의 객사와 창고를 불사르고 북으로 도주했다. 8월 8일 관군은 마운령을 넘어 영제원으로 진격했고, 이시애는 단천에서 저항했으나 패주하여 길주로 달아났다.[8]

8월 12일 관군은 단천에서 이시애군을 격파하고 마천령을 넘어 영동역까지 진격했다. 이시애는 허종 휘하 허유례의 계략에 빠져 이시합과 함께 체포되었다.[8]

이시애는 길주를 거쳐 경성으로 퇴각하여 여진으로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이시애의 처조카 허유례는 아버지 허승도가 이시애에게 강제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시애의 부하 이주, 황생 등을 포섭, 이시애와 이시합을 체포하여 남이 등 토벌군에게 인계하였다.[8]

4. 결과

1467년 8월, 이시애의 군대는 남이 등이 이끄는 토벌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시애를 비롯한 생포된 사람들은 8월 12일 토벌군의 진지 앞에서 구성군 이준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로써 3개월에 걸쳐 함경도를 혼란에 빠뜨린 이시애의 난은 막을 내렸다.[2][5][1] 이시애는 능지처참으로 처형되었고 그의 목은 한성(지금의 서울)으로 보내졌다.

이시애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그 영향은 컸다. 난이 평정된 후, 세조는 심복인 한명회신숙주를 계속 중용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난의 진압에 공헌한 구성군과 남이 등 왕족의 정치적 부상을 허용하여 세조의 말년에는 훈신과 왕족의 정치적 대립이라는 불씨를 남기게 되었다.[1] 또한 조선의 시조 이성계(태조)의 출신지임에도 불구하고, 함경도는 이후 조선 시대 내내 “잊혀진 땅”으로 시대의 흐름에서 뒤처지게 되었다.

4. 1. 함경도의 분리와 통제 강화

1468년 길주목은 길성현으로 강등되고 동쪽 지역은 명천현으로 분리되었으며, 함길도는 함경북도함경남도로 분리되어 '''함경도'''로 개칭되었다. 또한 함경도의 유향소는 폐지되었다.[2][5][1] 이시애의 난으로 인해 세조의 통치는 더욱 공고해졌다.

4. 2. 공신 책봉과 정치적 변화

1467년 8월 이시애 군은 남이 등의 토벌대에 의해 궤멸당하고, 이시애 등 생포된 자들은 8월 12일 토벌군의 진지 앞에서 구성군 이준에 의해 참수형되고 효수되었다. 이로써 3개월에 걸쳐 함경도를 휩쓴 이시애의 난은 평정되었다. 구성군 이준과 남이, 조석문, 어유소, 허종, 허유례, 이숙기 등은 정충적개공신(精忠敵愾功臣)으로 녹훈되고 김서형 등 많은 적개원종공신(敵愾原從功臣)들이 책록되었다.[2][5][1]

난의 여파로 이듬해인 1468년에 길주목은 '''길성현'''(吉城縣)으로 강등되고 동쪽 지역을 떼어내 명천현이 분리되었고, 함길도는 '''함경도'''로 개칭되고 함경북도함경남도로 분리되었으며, 함경도의 유향소는 폐지되었다.[2][5][1]

난이 평정된 후, 세조는 심복인 한명회신숙주를 계속 중용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난의 진압에 공헌한 구성군과 남이 등 왕족의 정치적 부상을 허용하여 세조의 말년에는 훈신과 왕족의 정치적 대립이라는 불씨를 남기게 되었다.[1]

4. 3. 역사적 의의

이시애는 세조 정권에 저항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세조가 수립한 강력한 정부 시스템에 대한 민중의 불만을 결집시켰다.[2]

만령 전투는 이시애의 난에서 양측이 조선왕조 최초로 대규모 화약전을 벌인 전환점이었다. 이시애의 난 당시 전투에서는 총통 방어용 방패벽, 방패벽을 파괴하기 위한 총통, 큰 피해를 입히기 위한 화차 등 다양한 종류의 (화약) 무기들을 볼 수 있었다.

이시애의 난 당시 양측이 사용한 표준형 손총인 승자총통


난이 평정된 후, 세조는 심복인 한명회신숙주를 계속 중용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난의 진압에 공헌한 구성군 이준과 남이 등 왕족의 정치적 부상을 허용하여 세조의 말년에는 훈신과 왕족의 정치적 대립이라는 불씨를 남기게 되었다. 또한 조선의 시조 이성계(태조)의 출신지임에도 불구하고, 북동쪽 변방인 함경도는 이후 조선 시대 내내 “잊혀진 땅”으로 시대의 흐름에서 뒤처지게 되었다.

4. 4. 군사 기술적 측면



만령 전투는 이시애의 난에서 양측이 조선 최초로 대규모 화약전을 벌인 전환점이었다.[2] 당시 전투에서는 총통 방어용 방패벽, 방패벽을 파괴하기 위한 총통, 큰 피해를 입히기 위한 화차 등 다양한 종류의 화약 무기들을 볼 수 있었다.

참조

[1] 웹사이트 이시애의 난 지역감정이 덧씌워진 중앙권력과의 갈등 1467년(세조 13) http://contents.hist[...]
[2] 웹사이트 이시애의 난(李施愛ㅡ亂) http://encykorea.aks[...]
[3] 웹사이트 조선 세조—이시애의 난 https://m.blog.naver[...]
[4] 웹사이트 이시애의 난(李施愛ㅡ亂) https://archive.toda[...]
[5] 웹사이트 이시애 http://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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