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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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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통문은 고구려 시대에 처음 세워져 조선 시대에 재건된 평양성의 서문이다. 6세기 중엽 고구려가 평양성을 쌓을 때 중성으로 처음 세워졌으며, 고려 시대에는 서경의 서문으로 사용되었다. 보통강가에 위치하여 이름 붙여졌으며, 고려사에는 '광덕문', '우양관'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현재의 건물은 1473년에 재건되었으며, 화강암 축대와 2층 누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임진왜란과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도 파괴되지 않아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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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문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일반 정보
2014년 보통문 모습
2014년 4월 보통문 모습
한글보통문
한자普通門
로마자 표기Botongmun
주요 위치평양직할시 중구역 보통문동
상세 정보
지정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보 제2호
종류
건축 시기고구려 시대

2. 역사

보통문은 고구려 시대에 처음 세워진 후 조선시대에 와서 고쳐 세워진 성문으로 6세기 중엽 평양성을 쌓을 때 평양성 중성의 서문으로 처음 세워졌으며 고려시대에도 서경의 서문으로 유지되었다. 보통강변에 있어서 보통문이라고 불렀으며, 〈고려사〉에는 "광덕문"이라 표기하고 있고, "우양관"이란 별칭도 있었다.[9]

건축양식은 장중하면서도 균형이 잡혀 고려시대의 건축양식을 보는 듯하다. 화강석을 다듬어 쌓은 축대와 그 위에 세운 2층 문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축대 복판에는 홍예문길을 냈다. 문길 앞쪽에는 앞뒤 쇳조각을 줄지어 입힌 튼튼한 널문을 달았다. 높이 쌓아 올린 축대와 넓이 4.4m, 높이 4.55m의 홍예문길은 선조들의 높은 돌쌓기 기술을 보여준다. 문루는 정면 3칸(14.8m), 측면 3칸(9.15m)이다. 보통문은 다른 성문들에 비하여 전체 높이가 조금 낮고, 또 1층 면적에 비하여 2층의 면적이 상대적으로 좁게 되어 있다. 측면에서 1층 양쪽 바깥기둥의 밑동과 마룻도리를 연결하는 3각형, 그리고 정면에서 축대바닥 양쪽 끝과 문루의 용마루 중심을 연결하는 3각형은 거의 정삼각형에 가깝게 되어 있다. 따라서 장중하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옛날에는 보통강 앞에 나루가 있어서[10] '보통송객(普通送客)'이라하여 보통문에서 손님을 바래다주는 광경은 평양8경의 하나로 유명했다고 한다.[11]

2. 1. 건립과 중건

6세기 중엽 고구려평양성 중성의 서문으로 처음 건립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서경의 서문으로 유지되었다. 1473년(조선 성종 4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되었다.[9] 보통문은 보통강변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고려사〉에는 "광덕문"이라 표기하고 있고, 그 밖에 아침 해를 다시 본다는 뜻에서 "우양관"이란 별칭도 있었다.[3]

2. 2. 임진왜란과 보통문

임진왜란 당시 평양성 탈환 작전 때 불화살이 문에 어지러울 정도로 날아들었으나 끝내 불에 타지 않아, 사람들이 그때부터 '신문(神門)' 또는 '귀문(鬼門)'이라고 불렀다고 한다.[12]

2. 3. 한국전쟁과 보통문

한국전쟁 당시 평양은 심한 폭격을 당했지만, 전쟁이 끝났을 때 시내에 온전한 건물은 두 채뿐이었다. 그중 하나는 은행 건물이었고, 다른 하나는 보통문이었다.[12]

3. 건축 양식

보통문은 장중하면서도 균형 잡힌 건축 양식을 보여주며, 고려 시대의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다.[9]

3. 1. 특징

화강석을 다듬어 쌓은 축대와 그 위에 세운 2층 문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축대 복판에는 홍예문길(아치형 통로)을 내고 튼튼한 널문을 달았다. 높이 쌓아 올린 축대와 넓이 4.4m, 높이 4.55m의 홍예문길은 선조들의 높은 돌쌓기 기술을 보여준다.[9] 문루는 정면 3칸(14.8m), 측면 3칸(9.15m)이다. 다른 성문들에 비하여 전체 높이가 조금 낮고, 1층 면적에 비하여 2층의 면적이 상대적으로 좁다. 측면에서 1층 양쪽 바깥기둥의 밑동과 마룻도리를 연결하는 3각형, 정면에서 축대바닥 양쪽 끝과 문루의 용마루 중심을 연결하는 3각형은 거의 정삼각형에 가까워 장중하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장중하면서도 균형이 잡힌 고려시대의 건축양식을 보인다.[9]

3. 2. 구조

화강석을 다듬어 쌓은 축대와 그 위에 세운 2층 문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축대 복판에는 홍예문길을 냈다. 문길 앞쪽에는 앞뒤로 쇳조각을 줄지어 입힌 튼튼한 널문을 달았다. 높이 쌓아 올린 축대와 너비 4.4m, 높이 4.55m의 홍예문길은 선조들의 높은 돌쌓기 기술을 보여준다. 문루는 정면 3칸(14.8m), 측면 3칸(9.15m)이다. 보통문은 다른 성문들에 비하여 전체 높이가 조금 낮고, 1층 면적에 비하여 2층의 면적이 상대적으로 좁다. 측면에서 1층 양쪽 바깥기둥의 밑동과 마룻도리를 연결하는 삼각형, 그리고 정면에서 축대 바닥 양쪽 끝과 문루의 용마루 중심을 연결하는 삼각형은 거의 정삼각형에 가깝게 되어 있어 장중하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4. 명칭과 의의

6세기 중엽 고구려평양성을 쌓을 때 평양성 중성의 서문으로 처음 세워졌으며, 조선시대에 고쳐 세워졌다. 고려시대에도 서경의 서문으로 유지되었다.

건축양식은 장중하면서도 균형이 잡혀 고려시대의 건축양식을 보는 듯하다. 화강석을 다듬어 쌓은 축대와 그 위에 세운 2층 문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축대 복판에는 홍예문길을 냈다. 문길 앞쪽에는 앞뒤 쇳조각을 줄지어 입힌 튼튼한 널문을 달았다. 높이 쌓아 올린 축대와 넓이 4.4m, 높이 4.55m의 홍예문길은 선조들의 높은 돌쌓기 기술을 보여준다. 문루는 정면 3칸(14.8m), 측면 3칸(9.15m)이다. 보통문은 다른 성문들에 비하여 전체 높이가 조금 낮고, 또 1층 면적에 비하여 2층의 면적이 상대적으로 좁게 되어 있다. 측면에서 1층 양쪽 바깥기둥의 밑동과 마룻도리를 연결하는 3각형, 그리고 정면에서 축대바닥 양쪽 끝과 문루의 용마루 중심을 연결하는 3각형은 거의 정삼각형에 가깝게 되어 있어 장중하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4. 1. 보통문과 별칭

보통강 변에 위치하여 '보통문'이라 불린다. 《고려사》에는 '광덕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침 해를 다시 본다'는 뜻의 '우양관'이라는 별칭도 있었다.[9]

4. 2. 평양8경과 보통송객

옛날에는 보통강 앞에 나루가 있어서 '보통송객(普通送客)'이라 하여 보통문에서 손님을 바래다주는 광경은 평양8경의 하나로 유명했다.[10][11] 보통문은 예로부터 신문이라고도 불렸는데, 임진왜란 당시 평양성 탈환작전 때 불화살이 문에 어지러울 정도로 날아들었으나 끝내 불에 타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그때부터 귀신 같은 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평양은 폭격을 심하게 당해 전쟁이 끝났을 당시 시내에 온전한 건물이 두 채뿐이었는데, 그 하나는 은행 건물이고 또 하나는 이 보통문이었다고 한다.[12]

4. 3. 상징적 가치

보통문은 고구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국방과 교통의 요충지였다. 보통강 변에 위치하여 '보통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광덕문' 또는 '우양관'이라고도 불렸다.[9]

옛날에는 보통강 앞에 나루터가 있어[10] '보통송객(普通送客)'이라 하여 보통문에서 손님을 배웅하는 광경은 평양8경의 하나로 유명했다.[11]

임진왜란 당시 평양성 탈환 작전 때 불화살 공격을 받았으나 불타지 않아 '귀신 같은 문'이라는 뜻의 '신문'이라고도 불렸다.[12] 또한 한국 전쟁 때 폭격 속에서도 온전히 남아있던 건물 두 채 중 하나였다.[12]

참조

[1] 웹사이트 Pothong Gate http://www.naenara.c[...] 2016-01-04
[2] 웹사이트 평양보통문 http://theme.archive[...]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3] 웹사이트 보통문 http://www.cybernk.n[...] 국가지식포털 북한지역정보넷
[4] 서적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4 - 평양의 날은 개었습니다 창비
[5] 뉴스 北 국보 제3호, 평양성 서문 '보통문' 큰 전쟁때마다 참화 견뎌낸 신문(神門) http://www.tongilnew[...] 통일뉴스
[6] 서적 これが新しい世界だ 第11 国際情報社 1966-11-01
[7] 뉴스 북한문화유산답사기 3.보통문…戰禍도 비켜간 '평양의 神門' http://news.joins.co[...] 중앙일보
[8] 웹사이트 평양보통문 http://theme.archive[...]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9] 웹사이트 보통문 http://www.cybernk.n[...] 국가지식포털 북한지역정보넷
[10] 서적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4 - 평양의 날은 개었습니다 창비
[11] 뉴스 北 국보 제3호, 평양성 서문 '보통문' 큰 전쟁때마다 참화 견뎌낸 신문(神門) http://www.tongilnew[...] 통일뉴스
[12] 뉴스 북한문화유산답사기 3.보통문…戰禍도 비켜간 '평양의 神門' http://www.joongang.[...]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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