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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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은 흙으로 형태를 만들고 삼베를 입혀 칠을 하는 건칠 기법으로 제작된 불상과 그 안에서 발견된 유물을 총칭한다. 이 불상은 청량사 유리보전에 봉안되어 있으며, 석굴암 본존불 양식을 계승한 통일신라 시대 불상으로 추정된다. 탄소 연대 측정 결과 8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1560년 중수 시 납입된 천인동발원문과 고려 시중 최충준이 1239년에 납시한 삼십칠존종자만다라팔엽일륜 등 복장유물 19건 208점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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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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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 정보 | |
이름 |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
지정 종류 | 보물 |
지정 번호 | 1919 |
지정일 | 2016년 11월 16일 |
소유자 | 청량사 |
관리자 | 청량사 |
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 247, 청량사 |
시대 | 남북국 시대 |
재질 | 건칠 |
수량 | 불상 1구, 복장유물 일괄(19건 208점) |
규격 | 상 높이 90 cm, 불두 높이 35.6 cm, 어깨 폭 54.2 cm, 무릎 폭 72.5 cm |
기타 | |
문화재청 ID | 12,19190000,37 |
관련 웹사이트 | 문화재청 |
위치 정보 | |
2. 역사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은 석굴암 본존불 계통의 통일신라 전성기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이르면 8세기 후반, 늦어도 10세기 전반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1] 방사선탄소연대 측정 결과 AD 770~945년 사이로 도출되어,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칠불상 중 하나로 평가된다.[1]
2. 1. 제작 및 기원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은 흙으로 형태를 만든 뒤 그 위에 삼베를 입히고 칠을 바르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하여 일정한 두께를 얻은 후 조각하여 만든 건칠불상이다. 이 불상은 오래전부터 청량사의 주불전인 유리보전의 주불로 봉안되어 온 것으로 추정되며, 엄숙한 상호, 당당하고 육감적인 양감, 균형 잡힌 신체, 탄력과 절제된 선묘 등에서 석굴암 본존불 계통의 통일신라 전성기 불상의 양식 계통을 따르고 있다.[1]불상의 초창 기록이 확인되지 않아 정확한 제작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두 차례에 걸쳐 실시한 바탕층 삼베에 대한 방사선탄소연대 측정 결과 AD 770~945년 사이(1차 중간 층: 900~945년, 2차 마감 층: 칠 제거 전 770년, 칠 제거 후 780~870년)로 도출되었다. 이에 이 불상은 이르면 8세기 후반, 늦어도 10세기 전반 경에는 조성된 것으로, 930년경으로 추정되는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건칠불상임을 알 수 있어, 우리나라 불교조각사에서 중요한 위치와 의미를 갖는 불상으로 평가된다.[1]
2. 2. 중수 및 보존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은 흙으로 형태를 만든 뒤 그 위에 삼베를 입히고 칠을 바르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하여 일정한 두께를 얻은 후 조각하여 만든 건칠불상이다. 이 불상은 오래전부터 청량사의 주불전인 유리보전의 주불로 봉안되어 온 것으로 추정된다.[1]불상의 초창 기록이 확인되지 않아 정확한 제작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두 차례에 걸쳐 실시한 바탕층 삼베에 대한 방사선탄소연대 측정 결과 AD 770~945년(1차 중간 층: 900~945년, 2차 마감 층: 칠 제거 전 770년/칠 제거 후 780~870년)으로 도출되었다. 이에 이 불상은 이르면 8세기 후반, 늦어도 10세기 전반 경에는 조성된 것으로, 930년경으로 추정되는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건칠불상임을 알 수 있다.[1]
3. 양식 및 특징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은 청량사의 주불전인 유리보전에 모셔져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엄숙한 얼굴, 당당하고 육감적인 양감, 균형 잡힌 신체, 탄력 있고 절제된 선묘 등에서 석굴암 본존불 계통의 통일신라 전성기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다.[1] 불상 제작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방사선탄소연대 측정 결과 8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1]
3. 1. 건칠 기법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은 흙으로 형태를 만든 뒤 그 위에 삼베를 입히고 칠을 바르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하여 일정한 두께를 얻은 후 조각하여 만든 건칠불상이다.[1] 이 불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칠불상 중 하나로, 불교조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1]두 차례에 걸쳐 실시한 바탕층 삼베에 대한 방사선탄소연대 측정 결과는 다음과 같다.[1]
측정 차수 | 측정 위치 | 측정 결과 |
---|---|---|
1차 | 중간 층 | AD 900~945 |
2차 | 마감 층 | 칠 제거 전 AD 770년 / 칠 제거 후 AD 780~870 |
이 측정 결과에 따르면, 이 불상은 이르면 8세기 후반, 늦어도 10세기 전반 경에는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930년경으로 추정되는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칠불상임을 보여준다.[1]
3. 2. 조형적 특징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은 흙으로 형태를 만든 뒤 그 위에 삼베를 입히고 칠을 바르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하여 일정한 두께를 얻은 후 조각한 건칠불상이다. 이 불상은 오래전부터 청량사의 주불전인 유리보전의 주불로 봉안되어 온 것으로 추정되며, 엄숙한 상호, 당당하고 육감적인 양감, 균형 잡힌 신체, 탄력과 절제된 선묘 등에서 석굴암 본존불 계통의 통일신라 전성기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다.[1]정확한 제작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바탕층 삼베에 대한 방사선탄소연대 측정 결과 AD 770~945년으로 도출되었다. (1차 중간 층: 900-945년, 2차 마감 층: 칠 제거 전 770년, 칠 제거 후 780-870년) 따라서 이 불상은 이르면 8세기 후반, 늦어도 10세기 전반 경에는 조성된 것으로, 930년경으로 추정되는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칠불상으로 평가되며, 한국 불교조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1]
4. 복장유물
복장유물은 불상을 중수하는 과정에서 납입된 발원문, 후령통, 복장전적, 금강계만다라 등 모두 19건 208점에 이른다. 이 중 1560년(명종 15) 중수 때 납입된 《천인동발원문》은 처음 만들어진 후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 중수된 기록을 담고 있어 중요하고, 《삼십칠존종자만다라팔엽일륜》은 고려의 시중 최종준이 1239년(고종 26)에 납시(納施)한 것으로 불상의 중수 연대 추정에 도움을 준다.[1]
구분 | 명칭 | 재질 | 수량 | 연대 | 크기(cm) | 비고 | |
---|---|---|---|---|---|---|---|
5 | 후령통(喉鈴筒) | 종이 | 1 | 조선시대 | 높이 23.3 폭 6.8 | 내부에 오보병을 납입함. 오보병 납입 물목은 <표2>참조. 보병의 크기는 높이 18.5cm, 폭 2.5cm임. | |
6 | 서방보병(西方寶甁) | 종이 | 1 | 조선시대 | 21.0×31.0 | 표면에 西方封|서방봉중국어, 藿香小黃無|곽향소황무중국어를 먹으로 씀. 중수시 납입한 오보병 중 서방으로 추정됨. 내용물은 없음. | |
7 | 남방보병(南方寶甁) | 종이 | 1 | 조선시대 | 21.0×31.0 | 표면에 南方封|남방봉중국어이라고 먹으로 씀. 중수시 납입한 오보병중 남방으로 추정됨. 내용물은 없음. | |
8 | 황초폭자(黃綃幅子) | 비단 | 1 | 조선시대 | 37.5×98.0 | 南|남중국어, 東|동중국어, 言|언중국어, 貴非保体兩主|귀비보체양주중국어라는 먹으로 쓴 글씨가 있음. | |
9 | 제보향(諸寶香) | 종이 나무 금속 | 1뭉치 (일괄) | 조선시대 | 23.0×32.5 | 표면에 諸寶香封|제보향봉중국어이라고 먹으로 씀. 금속제 후령통, 향목편 및 五方鏡중 三角, 半月鏡, 그리고 메달형태의 柄鏡을 납입함. | |
10 | 삼베 | 삼베 | 1 | 조선시대 | 35.0×68.0 | 天德|천덕중국어, …氏保体|씨보체중국어라는 먹으로 쓴 글씨가 있음. | |
11 | 청색직물편 | 비단 | 2 | 조선시대 | ①31.5×46.5 ②11.5×13.0 | ||
12 | 백색직물편 | 면 | 1 | 조선시대 | 37.0×93.0 | ||
13 | 봉함지편(封緘紙片) | 종이 | 2 | 조선시대 | ①23×38.6 ②10×41 | ① ‘梵|범중국어’字와 ‘封|봉중국어’字를 붉은색으로 씀. ② ‘封|봉중국어’字를 붉은색으로 씀. |
4. 1. 발원문
복장유물은 불상을 다시 만들 때 넣은 발원문과 후령통, 복장전적, 금강계만다라 등 모두 19건 208점에 이른다. 이 중 1560년(명종 15)에 다시 만들 때 넣은 《천인동발원문》은 처음 만들어진 후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 고쳐진 기록을 담고 있어 중요하고, 《삼십칠존종자만다라팔엽일륜》은 고려의 시중 최종준이 1239년(고종 26)에 납시(納施)한 것으로 불상의 중수 연대 추정에 도움을 준다.[1]구분 | 명칭 | 재질 | 수량 | 연대 | 크기(cm) | 비고 |
---|---|---|---|---|---|---|
1 | 結願文|결원문중국어 | 종이 | 1 | 1560년 | 65.6 x 41.8 | 嘉靖三十九年庚申十二月初一日蓮臺寺藥師三世如來改金重修記錄|가정 39년 경신 12월 초하루 연대사 약사삼세여래 개금중수기록중국어 |
2 | 千人同發願文|천인동발원문중국어 | 종이 | 1 | 1560년 | 66.0 x 41.5 | 嘉靖三十九年庚申仲冬日目|가정 39년 경신 중동일목중국어 |
3 | 發願文|발원문중국어 | 종이 | 1 | 1713년 | 36.5 x 30.5 | 康熙五十四年乙未六月日淸凉山蓮臺寺藥師如來與左右補處塗金重修記|강희 54년 을미 6월 일 청량산 연대사 약사여래여좌우보처도금중수기중국어 |
4 | 願文|원문중국어 | 종이 | 1 | 조선시대 | 27.3 x 28.4 | 稽首歸命十方三寶慈尊特|계수귀명시방삼보자존특중국어…… |
4. 2. 복장전적
복장유물은 불상을 다시 만들 때 넣은 발원문과 후령통, 복장전적, 금강계만다라 등 모두 19건 208점에 이른다. 이 중 1560년(명종 15)에 다시 만들 때 넣은 《천인동발원문(千人同發願文)》은 처음 만들어진 후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 고쳐진 기록을 담고 있어 중요하고, 《삼십칠존종자만다라팔엽일륜(三十七尊種字曼陀羅八葉一輪)》은 고려 시중 최종준(崔宗峻)이 1239년(고종 26)에 넣은 것으로 불상의 중수 연대 추정에 도움을 준다.[1]복장전적 | |||||||
---|---|---|---|---|---|---|---|
구분 | 명칭 | 재질 | 수량 | 연대 | 크기(cm) | 비고 | |
14 | 불량답시주목록 | 종이 | 1책 | 1698년 | 37.5×32.5 | 사본. 연대사시주기 | |
15 | 불량답시주목록 | 종이 | 1책 | 1713년 | 36.5×30.5 | 사본. 연대사시주기 | |
16 | 삼십칠존종자만다라팔엽일륜 | 종이 | 1매 | 16세기 | 66×54.5 | 목판본, 기해십월일시중최종준인시(己亥十月日侍中崔宗峻印施). | |
17 | 금강계만다라 | 166매 | 조선 후기 | 37×38 | 목판본. 낱장 | ||
18 | 범자다라니 | 종이 | 3매 | 조선 후기 | 51×57 | 목판본. 낱장 | |
19 | 주사범자다라니 | 종이 | 21매 | 조선 후기 | 42×48 | 주색으로 필사한 다라니. 낱장 |
4. 3. 기타 유물
복장유물로는 불상을 다시 만들 때 넣은 발원문, 후령통, 복장전적, 금강계만다라 등 모두 19건 208점이 있다. 이 중 1560년에 다시 넣은 《천인동발원문(千人同發願文)》은 처음 만들어진 후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 고쳐진 기록을 담고 있어 중요하며, 《삼십칠존종자만다라팔엽일륜(三十七尊種字曼陀羅八葉一輪)》은 고려의 시중 최종준(崔宗峻)이 1239년에 납시(納施)한 것으로 불상의 중수 연대를 추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1]구분 | 명칭 | 재질 | 수량 | 연대 | 크기(cm)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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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원문 | 결원문(結願文) | 종이 | 1 | 1560년 | 65.6x41.8 | * 嘉靖三十九年庚申十二月初一日蓮臺寺藥師三世如來改金重修記錄. | |
천인동발원문(千人同發願文) | 종이 | 1 | 1560년 | 66.0×41.5 | * 嘉靖三十九年庚申仲冬日目. | ||
발원문(發願文) | 종이 | 1 | 1713년 | 36.5×30.5 | * 康熙五十四年乙未六月日淸凉山蓮臺寺藥師如來與左右補處塗金重修記. | ||
원문(願文) | 종이 | 1 | 조선시대 | 27.3×28.4 | * 稽首歸命十方三寶慈尊特…… | ||
복장유물 | 후령통(喉鈴筒) | 종이 | 1 | 조선시대 | 높이 23.3 폭 6.8 | * 내부에 오보병을 납입함. 오보병 납입 물목은 <표2>참조. * 보병의 크기는 높이 18.5cm, 폭 2.5cm임. | |
서방보병(西方寶甁) | 종이 | 1 | 조선시대 | 21.0×31.0 | * 표면에 西方封, 藿香小黃無를 먹으로 씀. 중수시 납입한 오보병 중 서방으로 추정됨. * 내용물은 없음. | ||
남방보병(南方寶甁) | 종이 | 1 | 조선시대 | 21.0×31.0 | * 표면에 南方封이라고 먹으로 씀. 중수시 납입한 오보병중 남방으로 추정됨. * 내용물은 없음. | ||
황초폭자(黃綃幅子) | 비단 | 1 | 조선시대 | 37.5×98.0 | * 南, 東, 言, 貴非保体兩主라는 먹으로 쓴 글씨가 있음. | ||
제보향(諸寶香) | 종이 나무 금속 | 1뭉치 (일괄) | 조선시대 | 23.0×32.5 | * 표면에 諸寶香封이라고 먹으로 씀. * 금속제 후령통, 향목편 및 五方鏡중 三角, 半月鏡, 그리고 메달형태의 柄鏡을 납입함. | ||
삼베 | 삼베 | 1 | 조선시대 | 35.0×68.0 | * 天德, …氏保体라는 먹으로 쓴 글씨가 있음. | ||
청색직물편 | 비단 | 2 | 조선시대 | ①31.5×46.5 ②11.5×13.0 | |||
백색직물편 | 면 | 1 | 조선시대 | 37.0×93.0 | |||
봉함지편(封緘紙片) | 종이 | 2 | 조선시대 | ①23×38.6 ②10×41 | ① ‘梵’字와 ‘封’字를 붉은색으로 씀. ② ‘封’字를 붉은색으로 씀. | ||
복장전적 | 불량답시주목록(佛糧畓施主目錄) | 〃 | 1책 | 1698 | 37.5×32.5 | 사본(寫本). 연대사(蓮臺寺)시주기 | |
불량답시주목록(佛糧畓施主目錄) | 〃 | 1책 | 1713 | 36.5×30.5 | 사본(寫本). 연대사(蓮臺寺)시주기 | ||
삼십칠존종자만다라팔엽일륜(三十七尊種字曼陀羅八葉一輪) | 〃 | 1매 | 16세기 | 66×54.5 | 목판본, 己亥十月日侍中崔宗峻印施. | ||
금강계만다라 | 166매 | 조선 후기 | 37×38 | 목판본. 낱장 | |||
범자다라니 | 〃 | 3매 | 조선 후기 | 51×57 | 목판본. 낱장 | ||
주사범자다라니 | 〃 | 21매 | 조선 후기 | 42×48 | 붉은색으로 필사한 다라니. 낱장 | ||
계 | 19건 208점 |
5. 의의와 평가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은 흙으로 형태를 만들고 삼베를 입힌 후 칠을 바르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하여 만든 건칠불상이다. 이 불상은 청량사의 주불전인 유리보전의 주불로 오랫동안 모셔져 온 것으로 보인다. 엄숙한 얼굴, 당당하고 육감적인 형태, 균형 잡힌 신체, 탄력 있고 절제된 선 등에서 석굴암 본존불 계통의 통일신라 전성기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다.[1]
불상이 처음 만들어진 기록은 확인되지 않아 정확한 제작 시기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두 차례에 걸쳐 바탕층 삼베에 대한 방사선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 8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930년경으로 추정되는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칠불상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불상은 우리나라 불교조각사에서 중요한 위치와 의미를 갖는 불상으로 평가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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