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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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네이는 사토 왕의 뒤를 이어 류큐 왕국의 추잔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중국과의 상업 관계를 발전시키려 했으며, 나하에 특별 본부를 건설하고 왕실 연대기를 편찬했다. 1397년에는 조선과 우호 관계를 맺고, 아시카가 막부와도 관계를 맺었으며, 시암, 자바, 수마트라 등과도 무역을 했다. 그러나 1402년 쇼 하시의 반란이 일어나 부네이는 폐위되었으며, 그의 최후는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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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네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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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신호 | 나가노마모노 (일본어: 中之真物 나카누 마문) |
거주지 | 우라소에성 |
군주 정보 | |
칭호 | 류큐국 츄잔왕 |
재위 기간 | 1398년-1406년 |
이전 군주 | 삿토 |
다음 군주 | 시쇼 |
개인 정보 | |
출생일 | 1356년 |
사망일 | 1406년? |
아버지 | 삿토 |
어머니 | 지나베타루 (가쓰렌 안지 2세의 딸) |
배우자 | 알려진 정보 없음 |
자녀 | 간네이시케츠 |
2. 생애
사토 왕의 사망으로 왕위를 계승한 부네이는 류큐와 중국 간의 상업적 관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려 했다.[4] 중국 사절단 및 유사한 임무를 위해 나하에 특별 본부가 건설되었고, 인근에 무역 센터가 설립되었다.[4] 또한 왕실 연대기인 『력대보안』(歷代寶案, 왕위 계승의 보고)이 1403년에 처음 편찬되기 시작했다.[4]
이 시기에는 오키나와의 3개 정치체와 주변 국가들 간의 무역과 문화 교류가 활발했다.[4] 산호쿠, 산난과의 경쟁 속에서, 1397년에 각자 조선에 사절을 보내 새로 건국된 조선 왕조와 강력한 우호 관계를 맺었다.[4] 추잔은 한국으로부터 불교 사상과 물건을 대거 유입했으며, 이 시기에 신토가 일본을 통해 오키나와에 처음으로 전래된 것으로 여겨진다.[4] 아시카가 막부와도 관계를 성공적으로 맺었다.[4] 1409년에는 시암에 사절단이 파견되었고, 자바와 수마트라 왕국과의 관계는 무역상들에 의해 얼마 전에 수립되어 강세를 유지했다.[4]
나하는 이 시기에 섬에서 가장 번화한 항구가 되었으며, 주변 정치체에 비해 추잔에 부와 명성을 가져다주었다.[4] 산호쿠와 산난의 왕들이 부네이의 아버지 사토와 비슷한 시기에 사망하여, 세 왕 모두 중국 황실에 오키나와 전체의 유일한 통치자로 공식적인 책봉을 받기 위해 다투었다.[4] 그러나 주체가 남경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명나라 황제로 즉위하는 등의 혼란으로 인해, 부네이의 요청은 11년 동안 답신을 받지 못하다가 1406년에 서신이 전달되었다.[4]
한편, 안지라고 불리는 지역 영주인 하시는 1402년에 소규모 반란을 일으켜 우라소에의 추잔 궁전 부근인 아자토 지구의 영주를 몰아냈다.[4] 1406년 1월 30일, 영락제는 류큐인들이 명나라 황궁에서 섬기기 위해 자신의 아이들을 거세하는 것에 경악을 표했다.[4] 황제는 거세된 소년들은 무죄이며 거세될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그 소년들을 류큐로 돌려보내 다시 환관을 보내지 말라고 지시했다.[4] 부네이가 저지른 이 실수는 쇼 하시의 쿠데타를 야기하지는 않았더라도, 그 원인이 되었다.[4] 부네이가 중국으로부터 추잔의 왕으로 공식 인정받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하시는 더 큰 반란을 일으켜 부네이를 몰아내고, 자신의 아버지인 쇼 시쇼를 추잔의 왕으로 세웠다.[4] 기록에는 부네이의 운명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지만, 반란군에게 죽임을 당했거나, 외딴 섬으로 도망쳐 나머지 생을 비교적 고독하게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2. 1. 즉위와 대외 관계
사토 왕의 사망으로 왕위를 계승한 부네이는 류큐와 중국 간의 상업적 관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려 했다.[4] 중국 사절단 및 유사한 임무를 위해 나하에 특별 본부가 건설되었고, 인근에 무역 센터가 설립되었다.[4] 또한 왕실 연대기인 『력대보안』(歷代寶案, 왕위 계승의 보고)이 1403년에 처음 편찬되기 시작했다.[4]이 시기에는 오키나와의 3개 정치체와 주변 국가들 간의 무역과 문화 교류가 활발했다.[4] 산호쿠, 산난과의 경쟁 속에서, 1397년에 각자 조선에 사절을 보내 새로 건국된 조선 왕조와 강력한 우호 관계를 맺었다.[4] 추잔은 한국으로부터 불교 사상과 물건을 대거 유입했으며, 이 시기에 신토가 일본을 통해 오키나와에 처음으로 전래된 것으로 여겨진다.[4] 아시카가 막부와도 관계를 성공적으로 맺었다.[4] 1409년에는 시암에 사절단이 파견되었고, 자바와 수마트라 왕국과의 관계는 무역상들에 의해 얼마 전에 수립되어 강세를 유지했다.[4]
나하는 이 시기에 섬에서 가장 번화한 항구가 되었으며, 주변 정치체에 비해 추잔에 부와 명성을 가져다주었다.[4] 산호쿠와 산난의 왕들이 부네이의 아버지 사토와 비슷한 시기에 사망하여, 세 왕 모두 중국 황실에 오키나와 전체의 유일한 통치자로 공식적인 책봉을 받기 위해 다투었다.[4] 그러나 주체가 남경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명나라 황제로 즉위하는 등의 혼란으로 인해, 부네이의 요청은 11년 동안 답신을 받지 못하다가 1406년에 서신이 전달되었다.[4]
한편, 안지라고 불리는 지역 영주인 하시는 1402년에 소규모 반란을 일으켜 우라소에의 추잔 궁전 부근인 아자토 지구의 영주를 몰아냈다.[4] 1406년 1월 30일, 영락제는 류큐인들이 명나라 황궁에서 섬기기 위해 자신의 아이들을 거세하는 것에 경악을 표했다.[4] 황제는 거세된 소년들은 무죄이며 거세될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그 소년들을 류큐로 돌려보내 다시 환관을 보내지 말라고 지시했다.[4] 부네이가 저지른 이 실수는 쇼 하시의 쿠데타를 야기하지는 않았더라도, 그 원인이 되었다.[4] 부네이가 중국으로부터 추잔의 왕으로 공식 인정받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하시는 더 큰 반란을 일으켜 부네이를 몰아내고, 자신의 아버지인 쇼 시쇼를 추잔의 왕으로 세웠다.[4] 기록에는 부네이의 운명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지만, 반란군에게 죽임을 당했거나, 외딴 섬으로 도망쳐 나머지 생을 비교적 고독하게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2. 2. 명나라와의 갈등
사토 왕의 사망으로 왕위를 계승한 부네이는 류큐와 중국 간의 상업적 관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려 했다.[4] 중국 사절단 및 유사한 임무를 위해 나하에 특별 본부가 건설되었고, 인근에 무역 센터가 설립되었다.[4] 또한 왕실 연대기인 『력대보안』(歷代寶案, 왕위 계승의 보고)이 1403년에 처음 편찬되기 시작했다.[4]이 시기에는 오키나와의 세 정치체(추잔, 산호쿠, 산난)와 주변 국가들 간의 무역과 문화적 교류가 크게 확산되었다.[4] 하지만, 자료에 따르면 이 시기에 일본의 아시카가 막부와 성공적으로 관계를 맺은 것은 추잔뿐이었다.[4] 1397년에는 세 왕이 각자 조선에 사절을 보내 조선 왕조와 우호 관계를 맺었고, 추잔은 한국으로부터 불교 사상과 물건을 대거 유입했다.[4]
나하는 이 시기에 섬에서 가장 번화한 항구가 되어 추잔에 부와 명성을 가져다주었으며, 이미 고조된 긴장을 더욱 심화시켰다.[4] 산호쿠와 산난의 왕들이 부네이의 아버지 사토와 비슷한 시기에 사망하면서, 세 왕 모두 중국 황실에 오키나와 전체의 유일한 통치자로 공식적인 책봉을 받기 위해 다투었다.[4] 그러나 주체가 남경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명나라 황제로 즉위하는 등의 혼란으로 인해, 부네이의 요청은 11년 동안 답신을 받지 못했다.[4]
1406년 1월 30일, 영락제는 류큐인들이 명나라 황궁에서 섬기기 위해 자신의 아이들을 거세하는 것에 경악을 표했다.[4] 황제는 거세된 소년들은 무죄이며 거세될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그 소년들을 류큐로 돌려보내 다시 환관을 보내지 말라고 지시했다.[4] 부네이가 저지른 이 실수는 하시의 쿠데타를 야기하지는 않았더라도, 그 원인이 되었다.[4] 부네이가 중국으로부터 추잔의 왕으로 공식 인정받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하시는 더 큰 반란을 일으켜 부네이를 몰아냈다.[4] 기록에는 부네이의 운명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지만, 반란군에게 죽임을 당했거나, 외딴 섬으로 도망쳐 나머지 생을 비교적 고독하게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4]
2. 3. 쇼 하시의 반란과 최후
부네이는 아버지인 사토 왕의 사망으로 왕위를 계승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류큐와 중국 간의 상업적 관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려 했다. 중국 사절단 및 유사한 임무를 위해 나하에 특별 본부가 건설되었고, 인근에 무역 센터가 설립되었다. 또한 왕실 연대기 편찬이 시작되었는데, 『력대보안』(歷代寶案, 왕위 계승의 보고)은 1403년에 처음 편찬되었다.[4]이 시기에는 3개의 오키나와 정치체와 이 지역의 다른 국가들 간에 무역과 문화적 교류가 크게 확산되었다. 하지만, 자료에 따르면 이 시기에 일본의 아시카가 막부와 성공적으로 관계를 맺은 것은 추잔뿐인 것으로 보인다. 1409년에는 시암에 사절단이 파견되었고, 자바와 수마트라 왕국과의 관계는 무역상들에 의해 얼마 전에 수립되어 강세를 유지했다. 오키나와의 세 왕, 추잔, 산호쿠, 산난은 1397년에 각자 조선에 사절을 보내 새로 건국된 조선 왕조와 강력한 우호 관계를 맺었다. 추잔은 한국으로부터 불교 사상과 물건이 대거 유입되었으며, 이 시기에 신토가 일본을 통해 오키나와에 처음으로 의미 있게 전래된 것으로 여겨진다.[4]
나하는 이 시기에 섬에서 가장 번화한 항구가 되어 주변 정치체에 비해 추잔에 부와 명성을 가져다주었으며, 이미 고조된 긴장을 더욱 심화시켰다. 산호쿠와 산난의 왕들은 부네이의 아버지 사토와 비슷한 시기에 사망했으며, 중국은 오키나와에 한 명 이상의 수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 왕 모두 중국 황실에 오키나와 전체의 유일한 통치자로 공식적인 책봉을 받기 위해 다투었다. 그러나, 주체가 남경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명나라 황제로 즉위하는 등 최근 발생한 혼란으로 인해, 부네이의 요청은 11년 동안 답신을 받지 못했다. 마침내 1406년에 서신이 전달되었다.[4]
한편, 안지라고 불리는 지역 영주인 하시는 1402년에 소규모 반란을 일으켜 우라소에의 추잔 궁전 부근인 아자토 지구의 영주를 몰아냈다. 정확히 어떤 논의가 왕실 내에서 이루어졌고, 어떤 조치가 고려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5년 동안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1406년 1월 30일, 영락제는 류큐인들이 명나라 황궁에서 섬기기 위해 자신의 아이들을 거세하는 것에 경악을 표했다. 황제는 거세된 소년들은 무죄이며 거세될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그 소년들을 류큐로 돌려보내 다시 환관을 보내지 말라고 지시했다.[4] 부네이가 저지른 이 실수는 쇼 하시의 쿠데타를 야기하지는 않았더라도, 그 원인이 되었다. 부네이가 중국으로부터 추잔의 왕으로 공식 인정받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하시는 더 큰 반란을 일으켜 부네이를 몰아내고, 자신의 아버지인 쇼 시쇼를 추잔의 왕으로 세웠다. 기록에는 부네이의 운명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지만, 반란군에게 죽임을 당했거나, 외딴 섬으로 도망쳐 나머지 생을 비교적 고독하게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4]
3. 가족
아버지 삿토와 어머니 마나베타루(真鍋樽) 사이에서 태어났다.[6] 마나베타루는 가츠렌 아지 2세의 딸이다.[6] 왕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왕세자는 칸네이시케쓰(完寧斯結)이다.[6] 부네이의 비는 후덴이다.[6] 남동생으로는 자키야마 사토누시가 있다.[6]
3. 1. 부모
삿토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마나베타루(真鍋樽)이다.[6] 마나베타루는 가츠렌 아지 2세의 딸이다.[6] 자키야마 사토누시는 부네이의 남동생이다.[6] 왕비는 후덴이며, 왕세자는 완녕사결이다.[6]3. 2. 형제
삿토와 마나베타루(真鍋樽)의 아들이며, 가츠렌 아지 2세의 외손자이다.[6] 사토의 아들이자 마나베타루 (가츠렌 아지 2세의 딸)의 아들)라는 설도 있다.[6] 남동생으로는 자키야마 사토누시가 있다.[6] 왕비와 세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후대에 왕세자 칸네이시케쓰(完寧斯結) 또는 완녕사결(完寧斯結)로 비정되는 인물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6]3. 3. 왕비와 자녀
부네이의 아버지는 삿토이며, 어머니는 마나베타루(真鍋樽)이다.[6] 마나베타루는 가츠렌 아지 2세의 딸이다.[6] 왕비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왕세자는 칸네이시케쓰(完寧斯結)이다.[6] 부네이의 남동생은 자키야마 사토누시이다.[6] 부네이의 비는 후덴이다.[6]참조
[1]
웹사이트
http://okinawa-repo.[...]
[2]
문서
"Veritable Records of the Taizong of Ming"
http://sillok.histor[...]
[3]
웹사이트
http://ir.lib.u-ryuk[...]
2021-02-16
[4]
간행물
Ryukyu in the Ming Reign Annals 1380s-1580s
http://www.ari.nus.e[...]
Asia Research Institute 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
2007-07-01
[5]
서적
Okinawa: The History of an Island People
https://books.google[...]
2000
[6]
문서
明太宗実録
http://hanchi.ihp.si[...]
[7]
웹인용
http://ir.lib.u-ryuk[...]
2021-05-25
[8]
서적
Okinawa: The History of an Island People
https://books.google[...]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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