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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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삿토는 14세기 류큐 중산국의 왕으로, 1350년 왕위에 올라 중국과의 조공 및 무역 관계를 시작하고, 1392년에는 중국 이민자 공동체인 쿠메무라를 설립하는 등 류큐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조선, 태국 등과 외교 및 무역 관계를 수립하고, 국왕 보좌관인 오쇼 제도를 도입했다. 삿토는 1395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분에이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1405년에 축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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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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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삿토 |
원어 이름 | 察度 |
신호 (神號) | 오호마모노(大真物) |
칭호 | 류큐국 츄잔왕 류큐 국왕 |
재위 기간 | 1350년 ~ 1395년 |
출생일 | 1321년 |
사망일 | 1395년 11월 17일 |
거주지 | 우라소에 성 |
정치 | |
왕조 | 삿토 왕조 |
계승자 | 부네이 |
계승 형식 | 왕세자 |
가족 | |
아버지 | 오쿠마 우후야 |
어머니 | 천녀 (전설) |
배우자 | 마나베다루 (가쓰렌 아지 2세의 딸) 기타 배우자 정보는 제공되지 않음 |
자녀 | 정보 없음 |
2. 생애와 통치
삿토는 에이소 왕통의 사이이가 붕어한 후, 그 두터운 신망으로 추대되어 1350년에 츄잔의 왕이 되었다. 즉위 후, 남북 산에 대항하기 위해 경제적 기초를 다지기 위한 대개혁을 실시했다. 무역관과 공창이 될 어물성을 설치하고, 루손 섬, 자바 섬, 수마트라 등 동남아시아와 무역을 했으며, 명나라와 고려와도 교역을 시작했다.[3]
삿토는 국왕 보좌관인 ''오쇼''(王相) 직책을 창설했다. 이는 족장의 직접 통치를 점차 대체하고 그의 이름으로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는 관료제의 시작을 알렸다.
또한 그의 치세에, 북원 3대 황제 토구스 테무르의 차남 地保奴|지보노중국어가 명나라의 홍무제에 의해 류큐로 유배된 사실이 『명사』[8] 및 『규요 기사』[9]에 기록되어 있다(지보노의 그 후는 전해지지 않는다).
2. 1. 초기 생애
전승에 따르면 우라소에 마기리아자나의 오쿠마 우에야와 전설 속 천녀인 하늘옷(羽衣)의 아들로 여겨진다. 매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당시 강세를 자랑하던 가쓰렌 아지의 딸과 결혼하여 가문을 일으켰다. 중산 남북 산(남부의 남산, 북부의 북산)과의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마키미나토에서 일본 상선으로부터 철괴를 사들여 농민에게 농기구를 주고 농민을 도운 일로, 우라소에 아지로서 인망을 모았다[6]。2. 2. 왕위 계승 및 국내 정책
삿토는 우라소에 지역의 지사였다. 1350년 족장 세이가 사망하자 삿토는 스스로 왕위를 차지했다.[3] 그러나 그의 왕조는 아들 분에이에서 끝나고, 분에이는 1405년에 축출되었다.1372년, 명나라의 홍무제는 양재를 사신으로 보내 삿토에게 중국 문화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난징에 대표단을 파견할 것을 요청했다. 삿토는 이 요청에 즉시 응했는데, 이는 그에게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와 공식적으로 교역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는 1374년, 중국에 정식으로 복속하기 위한 사절단의 수장으로 그의 남동생 타이키를 난징으로 보냈고, 조공 및 무역 관계를 시작했다. 홍무제는 류큐 사절단을 접대하고, 그들의 선물을 받아들였으며, 왕의 인장을 포함한 다양한 중국의 선물과 함께 그들을 돌려보냈다. 이 인장은 수여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중국 관리가 귀국 사절단을 동행하여 오키나와 족장으로 삿토를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데 황실을 대표했다.[7] 오키나와는 중국에 정복되거나 병합된 적이 없었지만, 중국 조정의 눈으로 족장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이 수여 관습은 5세기 후 류큐 왕국이 해체될 때까지 조공 관계의 일부로 계속되었다. 다음 20년 동안 중국에 최소 9개의 조공 사절단이 파견되었으며, 그 중 3개는 타이키가 이끌었다.
삿토 통치 기간 동안, 조선[4] 왕국과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을 포함한 여러 다른 국가들과 외교 및 무역 관계가 수립되었다. 이러한 왕국, 중국, 일본과의 무역은 기착지 역할을 하는 여러 작은 섬을 통해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타네가시마는 일본 본섬 및 세토 내해로 가는 상인들을 위한 환적 및 보급 지점으로 사용되었다. 미야코지마와 야에야마 제도는 류큐 열도 내 오키나와 남쪽에 위치한 작은 섬들로, 츄잔에 조공을 보냈다.
삿토는 또한 1392년 수도 슈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쿠메무라라는 중국 이민자 공동체를 설립했다. 이 중국인들은 수십 년, 수 세기에 걸쳐 지역 오키나와인들과 통혼하게 되었다. 쿠메무라는 중국 연구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그곳의 중국인 거주자들과 그 후손들은 외교관, 통역관 및 관련 역할로 왕국을 섬겼다.
삿토에 의해 도입된 또 다른 중요한 발전은 ''오쇼'' (王相), 즉 국왕 보좌관이라는 직책의 창설이었다. 오키나와에서는 직접적인 군주 통치가 적어도 몇 세대 동안 중요하고 강력하게 유지되었지만, 이는 족장의 직접적인 통치를 점차 대체하고 그의 이름으로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는 관료제의 시작을 알렸다.
삿토는 1395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분에이가 계승했다. 난징에 파견된 사절단은 족장의 죽음을 알리고 그의 후계자에 대한 수여를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하나지 쵸슈가 1650년대에 쓴 공식 역사서인 "츄잔 세이칸"은 삿토의 죽음을 공자의 천명과 밀접하게 관련된 개념인 ''텐토''[5] (天道)의 예로 인용한다.
전승에 따르면 우라소에 마기리아자나의 오쿠마 우에야와 전설 속 천녀인 하늘옷(羽衣)의 아들로 여겨진다. 태어난 집은 매우 가난했지만, 당시 강세를 자랑하던 가쓰렌 아지의 딸과 결혼하여 가문을 일으켰다. 중산 남북 산(남부의 남산, 북부의 북산)과의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마키미나토에서 일본 상선으로부터 철괴를 사들여 농민에게 농기구를 주고 농민을 도운 일로, 우라소에 아지로서 인망을 모았다.[6]
에이소 왕통의 사이이가 붕어한 후, 그 두터운 신망으로 추대되어, 1350년에 중산왕이 되었다. 즉위 후, 남북 산에 대항하기 위해 경제적 기초를 다지기 위한 대개혁을 실시했다. 무역관과 공창이 될 어물성을 설치하고, 루손 섬, 자바 섬, 수마트라 등 동남아시아와 무역을 했으며, 명나라와 고려와도 교역을 시작했다.
1390년, 미야코의 요나하 세토 토요미오야는 섬 내 통일 후의 후견을 기대하며 입공했다.
또한 그의 치세에, 북원 3대 황제 토구스 테무르의 차남 地保奴|지보노중국어가 명나라의 홍무제에 의해 류큐로 유배된 사실이, 『명사』[8] 및 『규요 기사』[9]에 기록되어 있다(지보노의 그 후는 전해지지 않는다).
2. 3. 대외 관계
삿토는 1372년 중국 명나라의 홍무제가 보낸 사신을 통해 중국 문화의 우위를 인정하고 오키나와가 난징에 대표단을 파견할 것을 요청받았다. 삿토는 이 요청에 즉시 응했는데, 이는 그에게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와 공식적으로 교역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1374년, 중국에 정식으로 복속하기 위한 사절단의 수장으로 그의 남동생 타이키 (泰期)를 난징으로 보냈고, 조공 및 무역 관계를 시작했다.[3] 홍무제는 류큐 사절단을 접대하고, 그들의 선물을 받아들였으며, 왕의 인장을 포함한 다양한 중국의 선물과 함께 그들을 돌려보냈다. 이 인장은 수여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중국 관리가 귀국 사절단을 동행하여 오키나와 족장으로 삿토를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데 황실을 대표했다.[3] 오키나와는 중국에 정복되거나 병합된 적이 없었지만, 중국 조정의 눈으로 족장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이 수여 관습은 5세기 후 류큐 왕국이 해체될 때까지 조공 관계의 일부로 계속되었다. 다음 20년 동안 중국에 최소 9개의 조공 사절단이 파견되었으며, 그 중 3개는 타이키가 이끌었다.삿토 통치 기간 동안, 조선[4] 왕국과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을 포함한 여러 다른 국가들과 외교 및 무역 관계가 수립되었다. 이러한 왕국, 중국, 일본과의 무역은 기착지 역할을 하는 여러 작은 섬을 통해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타네가시마는 일본 본섬 및 세토 내해로 가는 상인들을 위한 환적 및 보급 지점으로 사용되었다. 미야코지마와 야에야마 제도는 류큐 열도 내 오키나와 남쪽에 위치한 작은 섬들로, 츄잔에 조공을 보냈다.
1372년, 명나라의 홍무제가 양재를 초유사로 보냈다. 이에 응하여 동생 타이키를 조공 사신으로 보내 표문을 바치고 신하를 칭하며 공물을 헌상했다.[7] 이처럼 명나라와의 교류가 시작되었지만, 북산 및 남산도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중산·산남·산북의 왕으로 책봉되었다. 이때, 에이소 왕통의 잔당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요미탄 아지, 북산왕국 (북산왕국이라고도 함), 산남왕국 (남산왕국이라고도 함) 사이의 다툼은 끊이지 않았지만, 책봉 체제 안에서의 삼산 시대가 확정되었다.
또한 한반도의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에 따르면, 1389년에 찰도왕이 통교(조선 측에서는 "조공"이라고 함)의 사신으로 옥지를 보내, 고려를 대신한 이씨 조선에도 마찬가지로 1392년부터 사신을 보냈다. 이 때, 왜구에게 붙잡혀 온 조선인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동시에 얼마간의 진물(유황, 목재, 후추, 자라 등)을 헌상했다고 한다. 1394년에는, 조선으로 도망한 산남 왕자 승찰도의 송환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 시기에는 미야코·야에야마로부터의 입공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1390년, 미야코의 요나하 세토 토요미오야는 섬 내 통일 후의 후견을 기대하며 입공했다.
삿토는 1392년 수도 슈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쿠메무라라는 중국 이민자 공동체를 설립했다. 이 중국인들은 수십 년, 수 세기에 걸쳐 지역 오키나와인들과 통혼하게 되었다. 쿠메무라는 중국 연구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그곳의 중국인 거주자들과 그 후손들은 외교관, 통역관 및 관련 역할로 왕국을 섬겼다.
2. 4. 사망
삿토는 1395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분에이가 왕위를 계승했다. 난징에 파견된 사절단은 족장의 죽음을 알리고 그의 후계자에 대한 수여를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하나지 쵸슈가 1650년대에 쓴 공식 역사서인 "츄잔 세이칸"은 삿토의 죽음을 공자의 천명과 밀접하게 관련된 개념인 ''텐토''[5] (天道)의 예로 인용한다. 쵸슈는 삿토를 전반적으로 훌륭한 족장이라고 묘사하면서도, 그가 사치스러운 유혹에 굴복하고 적절한 겸손함을 잃었다고 비난했다. 따라서 쵸슈는 삿토가 ''텐토''의 인도를 받아 잠자는 동안 독사에게 물려 죽임을 당했다고 설명한다.3. 가족
- 아버지: 오쿠마 우에푸야
- 어머니: 텐뇨(선녀, 전설의 벤자이텐의 화신)
- 누나: 이름 미상
- 남동생: 타이키(오로쿠 성주, 이후 텐간 아지)
- 남동생: 텐큐 아지
- 남동생: 야스야 시카나시
- 왕비: 마나베 타루(카츠렌 아지 2세의 딸)
이름 | 비고 |
---|---|
무네이 | 세자 |
사키야마 사토누시 | 차남 |
텐차소 아지 카나시 | 장녀 |
- 자손
- * 쿄아하곤 사네모토(우 씨)
- * 나고 친정에이 호노리(사네모토의 자손)
4. 평가
삿토는 우라소에 지역의 지사였다가 1350년 족장 세이가 사망하자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3] 1372년, 중국 사신들의 요청에 따라 삿토는 중국과의 조공 및 무역 관계를 시작했다. 홍무제는 류큐 사절단을 환대하고 삿토를 오키나와 족장으로 공식 인정했다.[3] 이러한 관계는 류큐 왕국이 해체될 때까지 5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삿토의 통치 기간 동안 조선[4], 아유타야 왕국 등 여러 국가와 외교 및 무역 관계가 수립되었다. 타네가시마, 미야코지마, 야에야마 제도 등 작은 섬들은 무역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삿토는 1392년 슈리 근처에 중국 이민자 공동체인 쿠메무라를 설립하여 중국 연구의 중심지로 성장시켰다. 또한, 국왕 보좌관 직책인 '오쇼'(王相)를 창설하여 관료제의 시작을 알렸다.
1650년대 하나지 쵸슈가 쓴 역사서 "츄잔 세이칸"은 삿토가 훌륭한 족장이었지만 사치와 겸손 부족으로 ''텐토''(天道)[5]의 인도를 받아 독사에 물려 죽었다고 묘사한다.
참조
[1]
서적
Veritable Record of the Ming Taizu
http://hanchi.ihp.si[...]
[2]
웹사이트
http://ir.lib.u-ryuk[...]
[3]
간행물
Okinawa History Biographical Dictionary
島尻地区小学校社会科研究会
[4]
문서
[5]
문서
[6]
문서
[7]
문서
[8]
wikisource
明史/卷327
[9]
wikisource
球陽記事/卷之一
[10]
웹인용
http://ir.lib.u-ryuk[...]
2021-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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