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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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의 복음'은 근면과 끈기를 통해 부를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으며, 앤드루 카네기가 제시한 철학이다. 카네기는 부유층이 재산을 사회에 재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선 활동보다는 수혜자가 스스로를 발전시킬 기회를 제공하는 기부를 강조했다. 또한, 사망 시 재산에 대한 높은 누진세를 통해 국가가 부를 재분배하는 것을 지지했다. '부의 복음'은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의 비판을 받았으며, 카네기는 이에 대한 반박과 함께 자선 활동의 한계를 명확히 했다. 이 사상은 피비 허스트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며, 공공 도서관 설립을 통해 자선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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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의 복음 | |
|---|---|
| 개요 | |
| 제목 | 부의 복음 |
| 원제 | The Gospel of Wealth |
| 다른 제목 | Wealth (부) |
| 저자 | 앤드루 카네기 |
| 발표일 | 1889년 6월 |
| 출판 | North American Review (북미 리뷰) |
| 내용 | |
| 주요 주장 | 부자들은 그들의 부를 사회 발전을 위해 사용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 |
| 핵심 개념 | 자선 활동 사회적 책임 부의 관리 |
| 요약 | 카네기는 부의 불평등이 불가피하며 산업 발전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는 부자들이 그들의 지혜와 경험을 활용하여 사회에 가장 이로운 방식으로 부를 사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부자들이 죽기 전에 그들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
| 영향 | |
| 영향 | 현대 자선 활동의 개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카네기 자신도 그의 부를 도서관, 교육 기관 등에 기부했다. |
| 비판 | 일부에서는 그의 주장이 부의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사회 구조적 문제 해결을 회피한다고 비판한다. 또한, 그의 자선 활동이 자신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사회적 비판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
2. 주장
"부의 복음"은 자수성가한 부유층이 가진 박애 정신과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카네기는 당시 새롭게 나타난 부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 부자들이 책임감 있고 신중한 태도로 자신의 과잉 재산을 사회에 재분배하는 것을 제안했다. 이는 부를 자녀에게 물려주는 전통적인 상속 방식과는 다른 접근 방식이다. 카네기는 과잉된 재산은 조심스럽게 관리될 때 사회 전체에 가장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부의 복음"은 근면과 끈기가 부를 축적하는 중요한 원동력이라고 주장한다. 카네기는 부자들이 낭비, 무책임한 소비, 사치를 멀리하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의 격차를 줄이는 데 재산을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를 통해 부자는 무분별한 소비 대신 사회적 책임을 다하게 된다고 보았다.
2. 1. 부의 분배 방식
카네기는 부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고자, 부자가 과잉 재산을 책임감 있게 사회에 재분배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는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전통적인 상속 방식과는 다른 접근 방식이다. 그는 신중하게 관리된 과잉 재산이 사회 전체에 가장 유익하다고 보았다. 카네기는 낭비, 무책임한 소비, 사치를 비판하고, 부와 가난의 격차를 줄이는 데 재산을 활용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를 통해 부자는 무분별한 소비 대신 사회적 책임을 다하게 된다고 보았다.카네기는 막대한 재산 상속자들이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철학을 세웠다. 그는 자선 단체 기부조차 신중해야 한다고 여겼다. 직접 관리하지 않으면 자선 단체가 기부자의 의도대로 돈을 현명하게 사용할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빈곤 상태를 유지시키는 기존 자선을 비판하며, 수혜자가 스스로 발전할 기회를 주는 새로운 기부 방식을 촉구했다. 이 방식은 기부된 재산이 단순 소비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체의 더 큰 부 창출에 기여한다고 믿었다.
"부의 복음"에서 카네기는 축적된 부를 그것이 형성된 지역 사회에 분배하는 구체적인 방식을 제시했다. 그는 사치나 개인적 부 축적을 비판하고, 사망한 백만장자 재산에 높은 세금을 부과하는 영국 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사망 시 재산에 대한 높은 세금은 국가가 이기적인 백만장자의 가치 없는 삶을 비난하는 것이다. 국가는 이 방향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고 언급하며, 국가의 적극적인 부의 재분배 역할을 시사했다.[2]
카네기는 부자의 의무는 검소한 생활 유지이며,[8] 여분의 재산은 사회 전체의 더 큰 이익을 위해 환원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귀족적 상속 문화를 비판하고, 부양가족에게는 적절한 지원만 제공하며 과도한 부 대부분은 지역 사회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약 부자가 사망 시까지 과도한 부를 처분하지 않았다면, 누진세 방식으로 국가가 이를 거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실제로 부자 재산 중 어느 정도가 사망 시 국가를 통해 공공으로 가야 하는지... 금액이 커질수록 (세금이) 빠르게 증가해 백만장자 재산의 최소 절반이 국가 금고에 들어갈 때까지 경계를 정하기는 어렵다."고 말하며, 높은 누진세를 통한 부의 재분배를 옹호했다.[2]
3. 반응
카네기의 '부의 복음'은 발표 이후 부의 본질, 목적, 그리고 어떻게 분배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열띤 논쟁을 대서양 양쪽에서 불러일으켰다.
특히 1892년 홈스테드 파업 당시, 카네기는 자신이 주창한 '부의 복음'에 집중함으로써 카네기 철강이 노조를 파괴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판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었다. 이 파업은 300명의 핑커톤 경비대와 철강 노동자 및 지지자들 간의 격렬한 충돌로 이어져 총격전으로 번졌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 7명과 경비대 3명이 목숨을 잃고 다수가 부상을 입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당시 스코틀랜드에 머물고 있던 카네기는 기자들의 질문에 폭력 사태를 "통탄할 일"이라고 표현하면서도, 자신은 "사업에 대한 모든 적극적인 통제를 포기했다"며 직접적인 책임에서는 발을 빼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후 그는 자선 활동과 '부의 복음'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데 더욱 힘썼으며, 홈스테드 파업 사건은 그의 자선가로서의 명성에 큰 흠집을 내지 못했다.[9]
이처럼 카네기의 부에 대한 견해는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며, 부의 의미와 사회적 역할에 대한 광범위한 토론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3. 1.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의 비판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은 잉글랜드 자유당 대표이자 카네기의 친구였지만, 카네기가 발표한 '부의 복음'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글래드스턴은 카네기와 정치적 이상을 공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자 상속, 무제한 상속, 그리고 영국 귀족 제도를 옹호하며 카네기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7] 이러한 글래드스턴의 입장은 다른 비평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카네기의 자선 방식을 "급진적"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졌다.이러한 비판에 대해 카네기는 자신을 변호하는 글들을 발표했다. 그는 개인주의, 사유 재산, 개인의 재산 축적이 장기적으로 인류에게 이익이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모든 가난한 사람이 부유층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자신의 원래 주장을 수정하여 "스스로 돕는 사람들을 돕고, 향상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라"고 명확히 했다. 이는 자선에도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였다.[7]
3. 2. 카네기의 반박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은 잉글랜드 자유당 대표이자 카네기의 친구였지만, 카네기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글래드스턴은 장자 상속, 무제한 상속, 그리고 영국 귀족을 옹호하며 카네기의 자선 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7] 이러한 글래드스턴의 입장에 동조하는 많은 비평가들 역시 카네기의 "급진적인" 자선 방식을 비난했다.이러한 비판에 대응하여 카네기는 여러 편의 에세이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변호했다. 그는 개인주의, 사유 재산, 그리고 개인 재산의 축적이 장기적으로 인류에게 이익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를 옹호했다. 또한, 자신의 주장이 모든 사람이 상류층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로 오해받는 것을 경계했다. 카네기는 원래의 주장을 수정하여 자선은 "스스로 돕는 사람들을 돕고, 향상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명확히 했다. 이는 모든 빈곤층이 부유층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선 활동에도 일정한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7]
3. 3. 피비 허스트의 "부의 복음"
1901년, 미국의 조나단 프렌티스 돌리버 상원의원은 유명 잡지 ''성공''에 "피비 애퍼슨 허스트와 새로운 부의 복음"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허스트는 미국의 자선가이자 여성 참정권 운동가였다. 돌리버에 따르면, 허스트는 공립 학교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었고 도시의 빈곤과 여러 사회 문제들에 대해 우려했다. 그녀는 카네기와 마찬가지로 백만장자로서 불우한 이웃을 돕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10] 돌리버가 쓴 글의 목적은 허스트의 "부의 복음"을 설명하고, 그녀가 카네기와 같은 남성들과 동등하게 여겨져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허스트는 부유한 여성들이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여 지역 사회에 도움이 되어야 할 신성하고 도덕적인 의무가 있으며, 특히 진보적인 교육과 개혁을 통해 이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1] 카네기처럼 허스트 역시 하류층에게 상류층과 같은 수준으로 교육받을 기회를 주는 것에 큰 관심을 가졌다. 또한 카네기처럼 그녀는 자신의 무료 공공 도서관을 세웠는데, 이 도서관은 아나콘다, 몬태나에 있었다.4. 자선 활동에 미친 영향
앤드루 카네기의 저서 '부의 복음'은 자수성가한 부유층이 사회에 대해 져야 할 박애의 책임을 강조한다. 카네기는 부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부자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사려 깊게 자신의 넘치는 부를 사회에 재분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단순히 부를 자녀에게 물려주는 전통적인 상속 방식과는 다른 접근이었다. 그는 과도한 재산은 신중하게 관리될 때 사회 전체에 가장 큰 유익을 줄 수 있다고 보았다.
카네기는 부를 낭비하거나 무책임하게 소비하고 사치하는 것을 비판했다. 대신,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의 격차를 줄이는 데 기여하는 방식으로 재산을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생각은 부자들이 단지 부를 쌓는 것을 넘어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유도하며, 무가치하거나 나태한 생활, 과도한 음주 등을 조장하는 대신 책임감 있는 행동을 장려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부의 복음'은 현대적인 의미의 자선 활동이 시작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2] 카네기는 이러한 철학을 실천에 옮겨, 미국과 영국 문화권 지역에 공공 도서관인 '카네기 도서관'을 설립하는 데 많은 기부를 했다. 이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발전할 기회를 제공하려는 목적이었다.[13] 카네기의 이러한 활동과 철학은 이후 많은 부유층의 자선 활동에 영향을 미쳤다.
4. 1. 카네기 도서관

카네기는 자신이 주장한 '부의 복음' 철학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현대적인 자선 운동을 시작했다.[12] 그는 미국과 영국 문화권 전역의 도시와 마을에 '카네기 도서관'으로 알려진 공공 도서관을 설립하는 기부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스스로 발전하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했다.[13]
카네기는 도서관 건립 및 설비 비용을 지원하는 대신, 해당 지역의 지방 자치 단체가 도서관의 지속적인 운영 비용을 책임지도록 요구했다. 이를 위해 지방 자치 단체는 세금을 부과하는 조례를 통과시켜야 했다. 이렇게 설립된 도서관들은 각각 자체적인 기금과 이사회를 갖추었으며, 상당수가 오늘날까지 운영되고 있다.
초기에 일부 지역 사회에서는 지원금을 받아 화려한 건물을 짓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이에 카네기는 도서관 건물이 단순함과 기능성을 갖추도록 의무화하는 건축 지침을 마련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사망한 후에도 도서관 기부 프로그램이 계속될 수 있도록 카네기 재단을 설립했다.
5. 홈스테드 파업과 카네기의 책임
1892년, 카네기의 카네기 철강 회사가 노동조합을 파괴하려던 과정에서 홈스테드 파업이 발생했다. 이 파업은 회사 측이 고용한 300명의 핑커톤 경비대와 파업에 참여한 철강 노동자 및 지지자들 간의 격렬한 대치로 이어졌고, 결국 총격전으로 번졌다. 이 폭력 사태로 인해 노동자 7명과 핑커톤 경비대 3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고, 당시 스코틀랜드에 머물고 있던 카네기에게 기자들이 찾아갔다. 기자들의 질문에 카네기는 발생한 폭력을 "통탄할 일"이라고 표현하면서도, 자신은 "사업에 대한 모든 적극적인 통제를 포기했다"고 주장하며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도 카네기는 이후 자선 사업과 부의 복음을 설파하는 데 더욱 집중했으며, 홈스테드 파업은 그의 자선 활동 덕분에 그의 사회적 평판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9]
참조
[1]
웹사이트
Andrew Carnegie
https://npg.si.edu/o[...]
2021-03-02
[2]
웹사이트
Wealth
http://www.swarthmor[...]
1889-06
[3]
웹사이트
The Gospel of Wealth and Other Timely Essays
https://books.google[...]
Century
1901-03-31
[4]
웹사이트
Carnegie.Gospel of Wealth
https://www.swarthmo[...]
2015-12-14
[5]
웹사이트
The Gospel According to Andrew: Carnegie's Hymn to Wealth
http://historymatter[...]
2010-07-13
[6]
웹사이트
Both More and No More: The Historical Split between Charity and Philanthropy
https://www.hudson.o[...]
2018-08-27
[7]
간행물
Andrew Carnegie's Gospel of Wealth
1991-07
[8]
웹사이트
Internet History Sourcebooks: Modern History
https://legacy.fordh[...]
2023-03-31
[9]
간행물
Andrew Carnegie: Robber Baron turned Robin Hood
2015-02
[10]
간행물
Phoebe Apperson Hearst and The New Gospel of Wealth
1901
[11]
간행물
Phoebe Apperson Hearst's "Gospel of Wealth," 1883-1901
2002
[12]
잡지
Lasting Good, Andrew Carnegie, The world's richest man gives and gives
[13]
서적
Free To Al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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