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타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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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타레는 르완다 남서부에 위치하며 부룬디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역이다. 르완다 집단학살 당시 투치족이 많이 거주하여 비교적 평온을 유지했으나, 이후 준군사 부대와 인테라함웨의 개입으로 대규모 학살이 발생하여 22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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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퇴르 비지뭉구는 1994년부터 2000년까지 르완다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으로, 르완다 애국 전선에 합류하여 아루샤 협정 협상에 기여했으나 폴 카가메 부통령과의 갈등으로 사임 후 투옥되었다가 사면받았다.
부타레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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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국가 | 르완다 |
위치 | 르완다 남부 |
중심 도시 | 부타레 |
역사 | |
설치 | 2002년 |
폐지 | 2006년 1월 1일 |
대체 | 남부주 |
2. 지리
부타레주는 르완다 중남부에 위치하며, 남쪽으로는 부룬디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지형은 르완다의 다른 지역과 대체로 비슷하게 구릉 지대이다. 주변의 탄자니아에 비해서는 언덕이 많은 편이지만, 르완다 북부 지역처럼 산이 많은 산악 지형은 아니다.
1994년 르완다 집단학살 당시, 부타레주는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ICTR)의 조사 과정에서 전문가 앙드레 기쇼아에 의해 "반군 지역"으로 불릴 만큼 초기 저항이 강했던 곳이다. 이는 투치족 출신 장-밥티스트 아비야리마나 행정구역장이 집단학살에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정치적으로도 르완다 사회민주당(PSD)의 영향력이 강해 학살을 주도한 인테라함웨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이다. 쥐베날 하비아리마나 대통령 사망 이후 전국적인 학살이 시작되었을 때도 부타레는 잠시 동안 평온을 유지하며 다른 지역 투치족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3. 르완다 집단학살
그러나 이러한 평온은 오래가지 못했다. 약 2주 후, 부타레 출신인 임시 대통령 테오도르 신디쿠브와보가 개입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아비야리마나 행정구역장이 살해되고, 투치족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로잘리 지칸다 전 여왕마저 희생되었다. 키갈리에서 준군사 부대와 인테라함웨가 동원되어 본격적인 학살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후투족 정부의 주요 인물 다수가 부타레 출신이었던 점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있다. (총리 장 캄반다, 장군 오귀스탱 은딘딜리이마나, 장관 폴린 니야라마수후코 등) 결국 다른 지역보다 늦게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타레에서는 약 22만 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희생자가 발생했으며, 이는 르완다 집단학살 전체 희생자의 20%를 넘는, 르완다 내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었다.
3. 1. 집단학살 이전 상황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ICTR)의 르완다 집단학살 조사 과정에서 전문가 앙드레 기쇼아는 부타레를 "반군 지역"으로 지칭했다. 부타레는 투치족 출신인 장-밥티스트 하비야리마나가 행정구역장을 맡고 있던 유일한 지역이었으며, 그는 집단학살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부타레에는 투치족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르완다 사회민주당(PSD)이 강세를 보였다. 이는 집단학살을 주도한 인테라함웨 민병대가 소속된 민주주의와 발전을 위한 국민 공화국 운동(MRND)보다 온건한 성향의 정당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환경 덕분에 부타레 내의 인테라함웨는 르완다 다른 지역에 비해 그 수가 적고 조직력도 약했다.
1994년 4월 6일, 후투족 출신 쥐베날 하비아리마나 대통령(부타레 행정구역장과는 친척 관계가 아님)이 비행기 격추로 사망하자 전국적으로 투치족에 대한 집단학살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부타레는 냐키주 코뮌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폭력 사태에서 비교적 안전한 상태를 유지했다. 이 때문에 르완다 다른 지역에서 폭력을 피해 많은 투치족 주민들이 부타레로 피난을 왔다.
3. 2. 집단학살의 시작과 전개
1994년 르완다 집단학살을 조사한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ICTR)에서 전문가 앙드레 기쇼아는 부타레를 "반군 지역"으로 언급했다. 부타레는 투치족 출신 장-밥티스트 아비야리마나가 행정구역장으로 있으면서 집단학살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유일한 지역이었다. 이곳은 투치족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아, 집단학살을 주도한 인테라함웨가 속한 민주주의와 발전을 위한 국민 공화국 운동(MRND)보다는 사회민주당(PSD)의 정치적 영향력이 더 컸다. 이 때문에 부타레의 인테라함웨는 다른 지역보다 수적으로 적고 조직력도 약했다. 1994년 4월 6일, 후투족 출신 쥐베날 하비아리마나 대통령(행정구역장 아비야리마나와는 친척 관계 아님)이 암살된 후 전국적으로 학살이 시작되었지만, 부타레는 냐키주 코뮌을 제외하고는 큰 피해 없이 평온을 유지했다. 많은 투치족이 다른 지역의 폭력을 피해 부타레로 피난했다.
그러나 이 평온은 약 2주간만 지속되었다. 부타레 출신인 테오도르 신디쿠브와보가 4월 19일 임시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신디쿠브와보는 부타레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새로운 행정구역장을 임명했고, 기존 행정구역장 하비야리마나는 곧 체포되어 살해당했다. 이후 ICTR 검찰이 "모든 투치족의 역사적 상징"으로 묘사한 전 로잘리 지칸다 여왕도 살해되었다. 키갈리에서 파견된 준군사 부대와 인테라함웨가 부타레에 도착하면서 본격적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후투족 정부는 부타레 출신 지도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 지역의 저항을 특히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시 대통령 신디쿠브와보 외에도, ICTR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첫 인물인 총리 장 캄반다, 헌병대장 오귀스탱 은딘딜리이마나 장군, 여성 및 가족 문제부 장관 폴린 니야라마수후코 등이 모두 부타레 출신이었다. 이들은 부타레에서의 학살을 더욱 부추겼다. 집단학살이 다른 지역보다 2주 늦게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타레에서는 22만 명이 살해되었다. 이는 르완다 집단학살 전체 희생자의 20%가 넘는 수치이며, 다른 어떤 행정구역보다도 높은 비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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