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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집단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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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르완다 집단학살은 1994년 약 100일 동안 르완다에서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이 투치족과 온건 후투족을 대량 학살한 사건이다. 이 학살은 부족 및 민족 간의 갈등, 경제적 어려움, 인구 증가, 정치적 긴장 등 복합적인 요인으로 발생했다. 벨기에 식민 통치 시기부터 후투족과 투치족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1980년대 후반 커피 가격 폭락으로 인한 경제 위기, 인구 증가에 따른 토지 부족, 르완다 애국 전선의 침공 등이 학살의 배경이 되었다. 특히 후투족의 권력 투쟁과 언론의 선동이 학살을 부추겼으며, 하비아리마나 대통령 암살 이후 위기위원회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학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군인, 경찰, 민병대가 조직적으로 투치족을 식별하고 살해했으며, 여성에 대한 강간과 성폭력도 자행되었다. 국제 사회는 유엔 평화 유지군을 파견했지만, 개입에 소극적이었고, 프랑스와 같은 국가는 자국민 대피를 돕는 과정에서 논란을 빚었다. 르완다 애국 전선이 승리하면서 학살은 종식되었지만, 100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많은 난민이 발생했으며, 르완다는 심각한 사회적,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이후 르완다 정부는 사법 시스템을 재건하고, 국제형사재판소를 통해 책임자를 처벌하려 노력했으며, 학살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관을 건립했다. 르완다 집단학살은 영화,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다뤄지며, 2023년에는 4곳의 기념관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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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집단학살
개요
냐마타 학살 기념 센터
냐마타 학살 기념 센터에 있는 인간 두개골
위치르완다
목표투치족, 후투족 온건파, 트와족
날짜1994년 4월 7일 – 7월 19일
유형집단 학살, 대량 살인, 집단 학살적 강간, 인종 청소
동기반투치족 감정, 후투 파워
사망자추정:
50만 ~ 80만 명의 투치족
1만 명의 트와족
피해자집단 학살 기간 동안 강간당한 25만 ~ 50만 명의 투치족 여성
가해자후투족 주도 정부 (테오네스테 바고사라 주도)
인테라함웨 (로베르 카주가 주도)
임푸자무감비 (장-보스코 바라이아그위자 및 하산 응게제 주도)
펠리시앙 카부가가 자금을 지원한 기타 민병대 및 갱단
지역 후투족 극단주의자
배경
관련 분쟁르완다 내전
추가 정보
관련 보고서https://www.hrw.org/reports/1999/rwanda/Geno15-8-01.htm

2. 배경

르완다 집단학살이 하비아리마나 암살 이전에 어느 정도 계획되었는지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계속 논쟁 중이다.[15]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ICTR) 검사들은 피고인들이 하비아리마나 암살 전에 집단학살을 계획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명확히 입증하지는 못했다.[16]

르완다 집단학살은 단순히 후투족투치족 간의 민족 대립 문제로만 설명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요인이 얽혀 발생했다. 후투족과 투치족은 본래 같은 뿌리를 가졌고 그 경계도 모호했으나, 벨기에의 식민 통치 시기(루안다-우룬디)에 인위적으로 분리되어 서로 다른 민족으로 규정되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158] (자세한 내용은 식민지 시대 참고)

역사적인 민족 갈등 외에도 여러 사회경제적, 정치적 요인이 집단학살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1980년대 후반 경제 상황 악화로 인한 젊은 층의 높은 실업률, 급격한 인구 증가에 따른 토지 부족 문제와 분쟁, 식량 부족 등이 사회적 불안을 심화시켰다.[159][160] 또한, 1990년대 초 르완다 애국전선(RPF)의 침공 이후 하비아리마나 정권이 투치족을 적으로 돌리는 정책을 강화한 점, 1993년 8월 아루샤 협정 체결로 RPF에게 상당 부분 양보하게 되자 자신들의 지위에 위협을 느낀 후투 강경파들의 반발도 중요한 요인이었다.[159][160] (자세한 내용은 독립 이후 관계 및 르완다 내전 참고)

더불어 일반 대중의 문해 능력이 낮아 권력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경향이 있었던 점도 집단학살이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159][160] 국제 사회, 특히 유엔과 주요 국가들의 소극적인 태도와 상황 판단 실패[161], 그리고 르완다 내 일부 종교계 인사들이 학살에 관여했다는 사실[162] 역시 비극을 막지 못한 중요한 배경으로 지적된다. 이하 하위 섹션에서는 이러한 각 요인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본다.

2. 1. 식민지 이전의 왕국과 후투족, 투치족, 트와족의 기원

오늘날의 르완다 지역에 가장 먼저 거주했던 민족은 트와족으로, 이들은 기원전 8000년에서 3000년 사이에 정착한 피그미 수렵채집인들이었다. 트와족은 현재까지도 르완다에 거주하고 있다. 기원전 700년에서 기원후 1500년 사이에는 다수의 반투인들이 이주해 오면서 농경을 위해 숲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반투족의 이주와 후투족, 투치족의 형성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이 존재한다. 한 이론은 후투족이 먼저 정착하고 이후 투치족이 이주해 와 별개의 민족 집단을 이루었다고 본다. 다른 이론에서는 이주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새로 이주한 사람들은 기존 주민들과 유전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고[373] 기존 사회에 통합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후투족과 투치족의 구분은 민족적 차이라기보다는 나중에 발생한 사회 계급적 구분으로, 투치족은 주로 가축을 기르는 목축 엘리트 계층을, 후투족은 농사를 짓는 농경 계층을 형성했다. 실제로 '투치'(Tutsi)라는 단어는 본래 '가축을 많이 소유한 사람'을 의미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엘리트 집단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변화했다는 점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374] 중요한 것은 후투족, 투치족, 트와족 모두 같은 언어(키냐르완다어)를 사용하며, 이들 모두를 아울러 바냐르완다라고 부른다는 점이다.

이들은 여러 씨족(우브워코, ''ubwoko'')을 이루며 살았고, 1700년경에는 약 8개의 왕국이 형성되었다. 그중 투치족의 니이기냐(Nyiginya) 씨족이 다스리던 르완다 왕국이 18세기 중반부터 점차 강력해져 정복과 통합을 통해 세력을 넓혀나갔다. 특히 키게리 르와부기리 왕(재위 1853년~1895년) 시대에 르완다 왕국은 전성기를 맞이하여 영토를 서쪽과 북쪽으로 확장하고 행정 개혁을 단행했다.

르와부기리 왕의 개혁에는 우부하케(ubuhake)와 우부레트와(uburetwa) 제도가 포함되었다. 우부하케는 투치족 후원자가 후투족이나 다른 투치족에게 가축을 빌려주는 대가로 경제적 또는 군사적 봉사를 받는 일종의 후견 제도였고, 우부레트와는 후투족이 투치족 지주나 추장을 위해 강제로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는 부역 제도였다. 이러한 개혁 조치들은 기존에 존재하던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의 사회경제적 구분을 더욱 명확하게 만들고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2. 2. 식민지 시대

1884년 베를린 회의에서 오늘날의 르완다와 부룬디 지역은 독일 제국에게 할당되었다.[373] 독일은 1897년부터 현지 르완다 왕국의 군주제를 이용한 간접 통치 정책을 폈다. 이러한 방식은 소수의 유럽인으로 넓은 식민지를 통제하는 데 유리했다. 당시 유럽 식민 지배자들은 투치족후투족보다 백인에 가깝고 인종적으로 우월하며, 따라서 식민 통치에 더 적합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었다.[375][9] 이러한 믿음은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유행했던 인종주의와 함 가설에 기반한 것이었다. 함 가설은 성경창세기 기록을 왜곡하여, 함의 후손인 함족이 아프리카 원주민(흑인)에게 문명을 전파했으며, 투치족이 바로 이 함족의 후예라고 주장했다.[166] 투치족의 키가 크고 마른 체형, 후투족의 상대적으로 작은 키와 통통한 체형을 이러한 인종적 구분의 근거로 삼기도 했다.[167] 존 해닝 스피크와 같은 탐험가들은 이러한 함 가설을 적극적으로 퍼뜨렸다. 르완다의 무싱가 5세 국왕은 독일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통치 기반을 강화했다.

함 가설을 주장한 탐험가 존 해닝 스피크. 그의 이론은 르완다의 민족 구분에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7년, 벨기에 군대가 르완다와 부룬디를 점령했고, 전쟁 후 1919년에는 국제 연맹의 위임통치령으로 정식으로 벨기에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벨기에는 초기에는 독일처럼 기존 왕정을 이용한 간접 통치를 유지했으나, 1926년부터는 벨기에령 콩고에서와 유사한 직접 통치 방식으로 전환했다. 벨기에는 행정 효율성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전통적인 족장(chief)의 수를 줄이고, 그 자리를 대부분 투치족에게 집중시켰다. 또한, 후투족에게 강제 노동을 부과하는 우부레트와 제도를 더욱 확대하고 강화했다. 벨기에 당국은 투치족 족장들이 주도하는 토지 개혁을 감독했는데, 이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후투족이 관리하던 목초지가 제대로 된 보상 없이 몰수되는 경우가 많았다.

1930년대에 벨기에는 교육, 보건, 공공 사업, 농업 감독 등 여러 분야에서 근대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를 통해 국가 시스템은 일부 현대화되었지만, 투치족의 우위는 더욱 공고해졌고, 후투족은 교육 및 사회 진출 기회에서 배제되는 등 많은 권리를 박탈당했으며 과중한 강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1935년, 벨기에 식민 정부는 모든 르완다인에게 각자의 민족(투치족, 후투족, 트와족, 또는 귀화 외국인)을 명시한 신분증을 발급했다. 이전에는 부유한 후투족이 사회적 지위 상승을 통해 명예 투치족으로 인정받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 신분증 제도는 이러한 민족 간의 사회적 이동을 완전히 차단하고, 유동적이었던 사회경제적 집단을 경직된 '민족' 집단으로 고착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0][175] 이 신분증은 훗날 르완다 집단학살 당시 표적이 된 사람들을 식별하는 데 악용되었다. 벨기에 식민 통치 시기 동안 가톨릭교회의 영향력도 크게 확대되었는데, 식민 정부가 현지 성직자들에게 많이 의존했기 때문이며, 많은 르완다인들이 사회적 상승을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이처럼 독일과 벨기에의 식민 통치는 기존에 존재했던 사회경제적 구분을 인종적인 민족 구분으로 왜곡하고 고착시켰으며, 특정 집단(투치족)을 우대하고 다른 집단(후투족)을 차별하는 정책을 통해 민족 간의 갈등과 분열을 심화시켰다. 이는 훗날 르완다 집단학살이라는 비극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158]

2. 3. 르완다 혁명과 독립 이후의 투치족과 후투족의 관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르완다에서는 후투족 해방 운동이 성장하기 시작했다.[375][158] 이는 전쟁 중 사회 개혁에 대한 불만과 가톨릭 교회 내에서 후투족에 대한 동정심이 커진 것에 영향을 받았다.[375][158] 가톨릭 선교사들은 투치족 엘리트보다 억압받는 후투족을 지원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후투족 성직자와 교육받은 엘리트를 양성하여 기존 정치 질서에 대항하는 세력을 형성했다.[375][158] 투치족 지배 계급은 후투족의 영향력 증대를 감지하고 즉각적인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했다.[375] 1957년, 후투족 학자 그룹은 "바후투 선언"을 작성하여 투치족과 후투족을 별개의 인종으로 규정하고, 다수결 원칙에 따라 후투족에게 권력을 이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75][158]

1964년 1월 후투족 민병대에 의해 살해된 투치족


1959년 11월 1일, 후투족 정치인 도미니크 음보뉴무트와가 기타라마 현에서 친투치족 정당 지지자들에게 공격당했다.[375][179] 음보뉴무트와는 살아남았지만, 그가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후투족 활동가들은 투치족 지도층과 일반 시민을 살해하며 보복했다. 이는 르완다 혁명의 시작이었다.[375][179] 투치족도 반격에 나섰으나, 당시 벨기에 행정부는 투치족 지배를 끝내기 위해 후투족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375][182] 1960년대 초, 벨기에는 대부분의 투치족 족장을 후투족으로 교체하고 코뮌 선거를 실시하여 후투족의 압도적인 승리를 이끌었다.[375][183] 결국 왕정은 폐지되고 후투족 주도의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1962년 르완다는 독립을 맞이했다.[375]

혁명이 진행되면서 투치족은 후투족의 박해를 피해 부룬디, 우간다, 탄자니아, 자이르(현 콩고 민주 공화국) 등 주변국으로 망명하기 시작했다.[375] 이들은 난민으로 분류되었고[375] 르완다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며 '인벤지'(invenzi|인벤지kin, 바퀴벌레라는 뜻)라는 무장 단체를 결성하여 르완다를 공격했다.[375] 그러나 이 공격은 대부분 실패했고, 오히려 르완다 내 투치족에 대한 보복과 추가적인 망명을 초래했다.[375] 1964년까지 30만 명 이상의 투치족이 망명하여 이후 30년 동안 난민으로 살아가야 했다.[375][187]

독립 후 첫 대통령이 된 그레고아르 카이리반다는 후투족 중심의 독재 정치를 펼쳤다.[186] 그의 정권 하에서 투치족에 대한 폭력적인 박해와 정치적 탄압이 자행되었다.[186] 1973년 쥐베날 하브자리마나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투치족에 대한 무분별한 폭력은 다소 줄어들었지만 차별은 계속되었다.[375][188] 하브자리마나는 자신의 정당인 민주주의와 개발을 위한 국민 공화 운동(MRND)을 창당하고[188] 1978년에는 MRND 일당 독재 체제를 헌법으로 확립했다.[189] 정권 내에서는 하브자리마나 대통령 부부의 친인척과 동향 출신으로 구성된 비공식 조직 '아카주'가 권력 기반을 형성하며 투치족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쿼터제 등으로 투치족의 사회 진출은 여전히 제한되었고, 망명한 투치족 난민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190]

2. 4. 르완다 내전

르완다 내전 기간 동안 르완다 애국전선을 지휘한 폴 카가메


1980년대 우간다 부시 전쟁 당시, 우간다에 거주하던 르완다 난민 출신 병사들은 프레드 르위게마의 지휘 아래 요웨리 무세베니가 이끄는 반군 민족 저항군(NRA)에 합류하여 밀턴 오보테 정권을 상대로 싸웠다.[47] 이들은 무세베니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우간다군에 남았지만, 비밀리에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르완다 침공을 계획했다.

1990년 10월, 르위게마는 4,000명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르완다 애국전선(RPF)이라는 이름으로 르완다 국경을 넘어 60km를 진격하며 내전을 시작했다.[14] 그러나 침공 사흘 만에 르위게마가 전사하고, 프랑스자이르가 주베날 하비아리마나의 르완다 정부군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면서 RPF는 큰 타격을 입고 격퇴되었다.[96] 르위게마의 부관이었던 폴 카가메가 RPF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어, 병력을 이끌고 우간다를 거쳐 르완다 북부의 험준한 비룽가 산맥으로 후퇴했다. 카가메는 이곳에서 군대를 재정비하고 해외 투치족 공동체로부터 자금과 병력을 지원받았다.

카가메는 1991년 1월 북부 도시 루헹게리를 기습 공격하며 전쟁을 재개했다. RPF는 기습적으로 도시를 점령했으나 하루 만에 다시 산악 지대로 후퇴했다.[120] 이후 RPF는 게릴라전 방식으로 국경 지역 일부를 점령했지만, 르완다 정부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135]

1992년 6월, 수도 키갈리에서 여러 정당이 참여하는 연립 정부 구성 논의가 시작되자 RPF는 휴전을 선언하고 탄자니아아루샤에서 르완다 정부와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150] 하지만 1993년 초, 일부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이 투치족을 대상으로 대규모 폭력 사태를 일으키면서 평화 분위기는 깨졌다. RPF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평화 협상을 중단하고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여 르완다 북부의 넓은 지역을 장악했다.

이후 평화 협상은 아루샤에서 재개되었고, 1993년 8월 마침내 아루샤 합의가 체결되었다. 이 합의에 따라 RPF는 과도 정부(BBTG)와 통합될 국가 군대에서 지분을 보장받았다.[187] 합의 이행을 감독하기 위해 유엔 르완다 지원단(UNAMIR)이 평화유지군으로 파견되었으며, RPF는 과도 정부 구성을 위한 준비 기지로 키갈리의 르완다 의회 건물 일부를 할당받았다.

그러나 하비아리마나 정권 내 강경파, 특히 대통령 부인 아갓테 하비아리마나와 그 측근들로 구성된 ''아카주'' 세력은 RPF와의 권력 분점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1990년 RPF 침공 이후 하비아리마나와 강경파들은 투치족에 대한 공포심을 이용하여 후투 권력이라는 극단적인 반투치 이데올로기를 확산시켰다. 1990년 10월에는 기세니 주에서 383명의 투치족이 살해되는 포그롬이 발생했으며, 반투치 선전을 퍼뜨리는 잡지 『캉구라』가 창간되어 "후투 십계명"과 같은 노골적인 인종차별적 내용을 유포했다. 1992년에는 더욱 극단적인 공화국 방위 연합(CDR) 정당이 창설되었고, 집권당 내에서도 아루샤 합의에 반대하는 강경파 목소리가 커졌다.

이 시기부터 후투 권력 운동은 르완다 정치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했다. 집권당의 청년 조직인 ''인테라함웨''와 CDR의 청년 조직인 ''임푸자무감비'' 같은 극단주의 민병대가 조직되어 군대의 지원 아래 훈련을 받았고, 전국적으로 투치족을 대상으로 한 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군부 내 강경파인 테오네스테 바고소라 대령 등은 아루샤 합의를 무력화하고 투치족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14] 1993년의 지역적 학살은 이러한 극단주의 세력의 활동이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으며, 이는 1994년 르완다 집단학살로 이어지는 불안정한 정세를 예고했다.

3. 학살 준비

르완다투치족에 대한 집단 학살은 정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준비되었다. 학살 개시 당시 이미 르완다 내에는 AK-47 소총과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인원이 3만여 명에 달했으며, 비무장 후투족 민간인들도 간단한 서류 작성만으로 무기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376]

당시 국무총리였던 장 캄반다는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ICTR)에서 정부 각료회의에서 투치족 말살 계획이 공공연히 논의되었다고 증언했다. 한 각료는 "개인적으로도 투치족들을 말살시키는 데 찬성한다. 투치족이 없다면 르완다가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없어질 것"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377] 재판 과정에서 지방 정부 차원에서도 시장과 경찰관들이 집단 학살을 논의하고 실행에 옮겼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만, 집단 학살이 하비아리마나 대통령 암살 이전에 어느 정도까지 구체적으로 계획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 여전히 논쟁이 존재한다.[15] ICTR 검찰은 피고인들이 하비아리마나 암살 전에 집단 학살을 공모했다고 주장했으나, 법정에서 이를 명확히 입증하지는 못했다.[16] 2008년, 학살의 핵심 주모자로 지목되었던 테오네스테 바고사라 대령은 집단 학살 공모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집단 학살 자체에 대한 책임은 인정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21][22] ICTR 검찰 측 증인 앙드레 기샤우아는 2010년에 검찰이 일관되게 입증하지 못한 것은 피고인들 사이에 "음모"가 존재했다는 것이며, 이는 집단 학살을 저지를 사전 계획이나 연관성을 가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두 건의 판결(전 총리 장 캄반다와 임시 정부의 전 정보부 장관 엘리에제르 니이테게카에 대한 유죄 판결)을 제외하고는 재판부가 검찰의 음모 증거가 부족하다고 일관되게 판결했다고 언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살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 정황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1990년부터 군은 마체테와 같은 무기를 민간인에게 보급하기 시작했고, RPF의 위협에 대비한다는 명분 아래 '민방위' 프로그램을 통해 후투족 청년들에게 전투 훈련을 실시했다. 이 무기들은 이후 집단 학살에 사용되었다. 후투 강경파는 인테라함웨와 임푸자무감비와 같은 민병대를 조직하여 학살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 르완다 정부는 1990년 말부터 대량의 수류탄과 탄약을 구매했으며, 이 과정에서 당시 이집트 외무장관이었던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가 이집트로부터의 무기 판매를 중개하기도 했다. 르완다군(FAR)의 규모 역시 1년 만에 1만 명 미만에서 3만 명 수준으로 급격히 팽창했다. 1993년에는 농업용 수요를 훨씬 초과하는 규모의 마체테와 면도날, 톱 등 무기로 사용될 수 있는 도구들이 수입되어 민방위 네트워크를 통해 전국에 배포되었다.

1993년 10월, 이웃 나라 부룬디에서 최초의 후투족 대통령이었던 멜키오르 은다다예가 투치족 극단주의 장교들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부룬디 내전과 1993년 부룬디 집단 학살을 촉발했으며,[17] 르완다의 후투족에게 투치족에 대한 불신과 적개심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후투 강경파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이전까지 주변적인 아이디어에 머물렀던 체계적인 집단 학살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1994년 1월 11일, UNAMIR 사령관이었던 캐나다 출신 로메오 달레어 소장은 인테라함웨 고위 간부 출신 정보원(카심 투라친제, 일명 "장-피에르")으로부터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유엔 본부에 긴급 전문, 이른바 '집단 학살 팩스(Genocide Fax)'를 발송했다.[18] 이 전문에는 후투족 민병대가 키갈리 내 모든 투치족의 명단을 작성하고 있으며, 대규모 학살을 계획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정보원은 자신의 부대가 "20분 안에 최대 1,000명의 투치족을 살해할 수 있다"고 밝혔으며,[19] 달레어 소장은 정보원 보호와 무기 은닉처 급습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유엔 평화유지활동국(DPKO)의 책임자였던 코피 아난은 해당 작전이 UNAMIR의 권한을 넘어서는 것이라며 이를 불허했다.[19][211] 유엔은 대신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에게 아루샤 협정 위반 가능성을 경고하는 선에서 사태를 마무리 지으려 했고, 결국 학살을 막을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212] 이러한 국제 사회의 소극적인 태도와 상황 오판은 이후 벌어질 참극을 막지 못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지적된다.[161]

3. 1. 후투 파워 운동

1990년, 군은 마체테와 같은 무기로 민간인을 무장시키기 시작했고, RPF의 위협에 대한 "민방위" 프로그램이라는 명목으로 후투족 청년들에게 전투 훈련을 제공했다. 이 무기들은 나중에 집단 학살을 수행하는 데 직접적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후투 권력 지도자들은 인테라함웨와 임푸자무감비로 알려진 준군사 민병대 조직을 결성했다. 이들은 경찰, 헌병, 정규군을 보조하며 학살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 민병대는 주로 북부 지역에서 집을 잃고 쫓겨난 후투족 국내 실향민 중에서 충원되었으며, 집단 학살 직전에는 총 5만 명의 대원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르완다 정부는 1990년 말부터 대량의 수류탄과 탄약을 구매했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이집트 외무 장관이었던 미래의 유엔 사무총장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가 이집트로부터의 대규모 무기 판매를 중개하기도 했다. 같은 시기 르완다군(FAR)은 급격히 확장되어 1년 만에 병력이 1만 명 미만에서 거의 3만 명으로 증가했다. 신규 징집병들은 규율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고, 잘 훈련된 정예 대통령 경호대 및 헌병대 부대와 일반 사병 간의 전투력 격차가 벌어졌다.

1993년 3월, 후투 권력 세력은 제거 대상인 "반역자" 명단을 작성하기 시작했으며,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의 이름도 이 명단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공화국 수호 동맹(CDR)은 공개적으로 대통령을 반역죄로 비난했다. 1993년 동안 강경파들은 농업용 수요를 훨씬 넘어서는 규모의 마체테뿐만 아니라 면도날, 톱, 가위 등 무기로 사용될 수 있는 도구들을 수입했으며, 이 도구들은 민방위 네트워크의 일부로 위장되어 전국에 배포되었다.

1993년 10월, 부룬디 최초의 후투족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던 멜키오르 은다다예가 투치족 극단주의 장교들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암살은 부룬디 내전과 1993년 부룬디 집단 학살을 촉발했으며,[17] 르완다의 후투족에게 투치족은 신뢰할 수 없는 적이라는 인식을 강화시키는 충격을 주었다. 공화국 수호 동맹(CDR)과 다른 정당 내 후투 권력 세력은 이 상황을 이용할 기회로 보았다. 이전까지 주변적인 견해에 머물렀던 체계적인 집단 학살 계획이 이들의 최우선 과제로 부상했으며, 적극적인 계획 수립에 착수했다. 이들은 은다다예 암살에 대한 대중의 분노, RTLM의 선전, 그리고 권위에 대한 르완다인들의 전통적인 복종 성향을 이용하면 후투족 대중을 동원하여 학살을 실행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후투 권력 지도자들은 이전까지 주로 마체테와 전통적인 수제 무기만을 사용하던 인테라함웨와 다른 민병대 조직에 AK-47 소총 등 화기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후투 권력 집단은 국영 방송인 르완다 라디오가 지나치게 진보적이며 반대파를 지지한다고 판단하여, 새로운 라디오 방송국인 라디오 텔레비지옹 리브르 데 밀 콜린(RTLM)을 설립했다. RTLM은 젊은 층을 대상으로 서구식 토크쇼 형식을 모방하여 대중음악, 인터뷰, 청취자 참여 등을 활용했으며, 도시 중심의 신문과 달리 라디오 방송을 통해 농촌 인구 대다수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방송 진행자들은 저속한 농담과 공격적인 언어를 사용하며 기존 라디오 르완다의 격식 있는 보도와 차별화했다.[23] RTLM 방송 시간의 대부분(66.29%)은 뉴스 보도(1.52%)보다는 진행자들이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데 할애되었다.[24] 집단 학살이 임박하면서 RTLM 방송은 반(反)투치 선전에 집중했다. 투치족을 후투족의 희생을 발판 삼아 권력을 장악하려는 위험한 적으로 묘사했으며, RPF와 투치족 정당, 일반 시민들을 하나로 묶어 전체 투치족을 르완다에 대한 단일 위협으로 규정했다. 나아가 투치족을 '이넨지'(바퀴벌레)로 비하하며 박멸 대상으로 지목했다.[25] 집단 학살 직전까지 RTLM은 RPF가 후투족에게 저지른 만행을 294건 보도하고, 후투족에게 투치족 살해를 촉구하는 방송을 252건 내보냈다.[24] 한 방송에서는 "누군가는 그들을 영원히 사라지게 해야 한다 인간의 기억에서 지워야 한다 지구상에서 투치족을 몰살해야 한다"고 선동했다.[26] 폭력이 시작될 무렵, 젊은 후투족들은 수개월간 지속된 인종차별적 선전에 노출되어 모든 투치족을 제거해야 할 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RTLM은 집단 학살 선동 역할로 인해 "마체테 라디오"라는 악명을 얻었다.[27] 하버드 케네디 스쿨 연구원 데이비드 야나기자와-드로트는 2014년 연구에서 르완다 집단 학살 동안의 전반적인 폭력의 약 10%가 이 새로운 라디오 방송국에 기인한다고 밝혔다.[28] 언론의 자유 옹호 단체인 교육에서의 개인의 권리를 위한 재단의 연구원인 고든 대닝은 매체의 이용 가능성이 미디어 소비와 상관관계가 있다는 그 논문의 가정을 의문시했다.[29]

3. 2. 언론의 역할

권력 집단은 국영 르완다 라디오가 지나치게 진보적이며 반대파를 지지한다고 여겨, 새로운 라디오 방송국인 라디오 텔레비지옹 리브르 데 밀 콜린(RTLM)을 설립했다. RTLM은 르완다의 젊은 성인층을 주요 청취자로 삼았고, 광범위한 청취 범위를 확보했다. 도시에 국한된 신문과 달리, 라디오 방송은 르완다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촌 주민들에게도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방송 형식은 인기 음악 재생, 인터뷰 진행, 청취자 참여 유도 등 서구식 라디오 토크쇼를 모방했다. 진행자들은 저속한 농담을 하거나, 르완다 라디오의 격식 있는 보도와는 대조적으로 공격적인 언어를 구사했다.[23] RTLM 방송 시간 중 뉴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1.52%에 불과했고, 66.29%는 진행자들이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시간으로 채워졌다.[24]

집단 학살이 시작되자 RTLM은 투치족에 대한 반감을 부추기는 선전에 집중했다. 이들은 투치족을 후투족의 희생을 발판 삼아 정치 권력을 장악하려는 위험한 세력으로 묘사했다. 르완다 애국 전선(RPF)과 투치족 정당, 심지어 일반 투치족 시민까지 하나로 묶어, 투치족 전체를 르완다에 대한 단일하고 동질적인 위협으로 규정했다. RTLM은 민족적, 정치적 갈등을 부추기는 것을 넘어, 투치족을 '이넨지'(inyenzi, 바퀴벌레)라고 부르며 비인간적인 해충으로 묘사하고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5] 집단 학살 직전까지 RTLM은 RPF가 후투족에게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만행을 294건 보도했으며, 후투족에게 투치족 살해를 촉구하는 방송을 252건 내보냈다.[24] 한 방송에서는 "누군가는... 그들을 영원히 사라지게 만들어야 한다... 인간의 기억에서 지워야 한다... 지구상에서 투치족을 몰살해야 한다"고 선동했다.[26]

폭력이 시작될 즈음, 젊은 후투족들은 수개월간 지속된 인종차별적 선전에 노출되어 모든 투치족을 국가 장악 전에 제거해야 할 위험한 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RTLM은 집단 학살을 선동하는 역할 때문에 "마체테 라디오"라는 악명을 얻었다.[27] 하버드 케네디 스쿨의 연구원 데이비드 야나기자와-드로트(David Yanagizawa-Drott)는 2014년 연구에서 르완다 집단 학살 기간 동안 발생한 전체 폭력의 약 10%가 RTLM 방송 때문이라고 분석했다.[28] 반면, 언론의 자유 옹호 단체인 교육에서의 개인의 권리를 위한 재단(FIRE)의 고든 대닝(Gordon Danning)은 해당 연구가 매체 접근성이 곧 미디어 소비로 이어진다고 가정한 점에 의문을 제기했다.[29]

1994년 4월 6일 하비아리마나 대통령 암살 직후, RTLM은 벨기에 평화유지군이 대통령기 격추에 연루되었다고 비난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이 허위 선동은 이후 르완다군 병사들이 벨기에군 평화유지군 10명을 살해하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이어지는 데 영향을 미쳤다.[213]

3. 3. 하비아리마나 대통령 암살

르완다 집단학살이 하비아리마나 대통령 암살 이전에 어느 정도 계획되었는지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15] 국제형사재판소(ICTR) 검사들은 피고인들이 하비아리마나 암살 전에 집단학살을 계획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입증하지는 못했다.[16]

1994년 4월 6일, 하비아리마나 대통령과 부룬디 대통령 시프리앵 은타랴미라가 탑승한 비행기가 키갈리 국제공항 인근에서 격추되었다. 이 사건은 후투 극단주의 세력에게 학살을 개시할 빌미를 제공했다.

암살 직후, 국제 연합 르완다 지원단(UNAMIR)은 아가테 웅윌링기야마나 총리에게 벨기에 군인 10명으로 구성된 호위를 보내 르완다 라디오를 통해 국민들에게 연설하도록 하려 했다. 그러나 대통령 경호대가 라디오 방송국을 점거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다음 날 아침, 다수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웅윌링기야마나 총리를 경호하던 벨기에 군인들을 제압하고 무장 해제시켰다. 웅윌링기야마나 총리와 그녀의 남편은 살해되었으나, 자녀들은 가구 뒤에 숨어 살아남아 세네갈 출신 UNAMIR 장교 음바예 디아네에 의해 구조되었다. 제압된 벨기에 군인 10명은 키갈리 캠프 군사 기지로 끌려가 고문을 받고 살해당했다. 이 살해를 저지른 대통령 경호대 지휘관 베르나르 누투야하가 소령은 2007년 벨기에 법원에서 2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37] 미르콜린느 자유 라디오・텔레비전은 벨기에 평화 유지군이 대통령기 격추에 연관되었다는 허위 사실을 유포하며 반(反)벨기에 감정을 부추겼고, 이는 벨기에 군인 살해의 한 원인이 되었다.[213]

웅윌링기야마나 총리 암살 외에도, 후투 극단주의자들은 4월 6일 밤부터 7일 사이에 키갈리 시내의 저명한 온건파 정치인과 언론인들의 명단을 확보하고 이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헌법재판소장 조제프 카바루간다, 농업부 장관 프레데릭 은자무람바호, 자유당 대표 란트왈드 은다싱와와 그의 캐나다인 아내, 아루샤 협정 수석 협상가 보니파스 응굴린지라 등이 살해되었다. 파우스틴 트와기라문구 총리 지명자를 포함한 일부 온건파 인사들은 암살을 피했지만, 이 숙청으로 인해 르완다의 온건 정치 지도부는 사실상 와해되었다. UNAMIR 사령관 로메오 다레어는 "4월 7일 정오까지 르완다의 온건파 정치 지도부는 사망하거나 숨어 있었고, 미래의 온건 정부가 들어설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평가했다.

한편, 군 내부에서는 테오네스트 바고소라 대령이 권력을 장악하려 했으나, 위기 위원회는 바고소라가 추천한 오귀스탱 비지문구 대신 마르셀 가친지를 새로운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 가친지는 군대가 집단 학살에 가담하는 것을 막고 르완다 애국 전선(RPF)과의 휴전을 추진하려 했으나, 군에 대한 통제력이 미약했고 결국 열흘 만에 강경파인 비지문구로 교체되었다.

4. 집단 학살의 진행

하비아리마나 대통령 암살 직후인 1994년 4월 6일 밤부터 7일 아침 사이,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은 권력 공백 상태를 이용해 신속하게 움직였다. 이들은 먼저 아가트 웅윌링기야마나 총리를 살해했다. 유엔 르완다 지원단(UNAMIR) 소속 벨기에 군인 10명이 총리를 보호하려 했으나, 이들 역시 대통령 경호대에 의해 키갈리 캠프에서 살해되었다.[114] 이 사건은 UNAMIR의 활동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주동자인 베르나르 누투야하가 소령은 훗날 벨기에 법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37]

이와 동시에 극단주의자들은 사전에 작성된 명단을 이용해 키갈리 시내의 주요 온건파 정치인과 언론인들을 체계적으로 제거했다. 헌법재판소장 조제프 카바루간다, 농업부 장관 프레데릭 은자무람바호, 자유당 대표 란트왈드 은다싱와 등이 이 시기에 살해되었다. 비록 파우스틴 트와기라문구 총리 지명자 등 일부는 암살 위협에서 살아남았지만, 4월 7일 정오 무렵에는 르완다의 온건파 정치 지도부는 사실상 와해되어 극단주의 세력이 방해 없이 집단학살을 추진할 기반이 마련되었다.

4월 7일부터 군인, 경찰, 인테라함웨와 임푸자무감비 같은 후투족 민병대가 주도하는 조직적인 집단학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라디오 르완다와 특히 극단주의 민영 방송 밀 콜린느 자유 라디오 텔레비전(RTLM)은 투치족과 온건파 후투족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기며 살해를 선동하는 방송을 지속했다. 학살은 수도 키갈리에서 시작되어 빠르게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한편, 르완다 애국 전선(RPF)은 하비아리마나 암살 직후 내전을 재개하고 북부 지역부터 공세를 시작했다. 그러나 학살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 영국, 벨기에를 포함한 유엔과 국제 사회는 UNAMIR 평화유지군의 병력과 권한을 강화하는 등의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아 사실상 학살을 방관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심지어 프랑스 정부는 집단학살 발발 이후에도 후투족 정부를 지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38][39][40][41]

4. 1. 살해 방법

집단학살이 시작되자 군인, 경찰, 그리고 인테라함웨와 임푸자무감비 같은 민병대는 투치족과 온건파 후투족 지도자들을 제거하는 것을 시작으로 조직적인 살해에 나섰다. 전국적으로 검문소와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고, 민족 구분이 명시된 르완다 신분증을 통해 투치족을 식별하여 즉시 살해했다.[43] 민병대는 수도 키갈리를 포함한 전역에서 집집마다 수색하며 투치족을 찾아내 살해하고 재산을 약탈했다.[43]

Ntarama 교회에서는 수류탄, 마체테, 소총 등으로 5,000명 이상이 학살되었다.


무람비 기술학교에 보관된 학살 희생자들의 유골.


냐마타 학살 기념관에 전시된 두개골.


가해자들은 일반 후투족 시민들에게 마체테, 곤봉, 둔기 등 무기를 나누어 주며 투치족 이웃을 살해하도록 강요했다.[234] 살해를 거부하는 사람은 투치족 동조자로 몰려 살해당하는 경우도 많았다.[234] 대부분의 희생자는 자신이 살던 마을이나 도시에서 이웃의 손에 살해당했다. 살해 도구로는 마체테가 가장 흔하게 사용되었으며(희생자의 37.9%), 둔기(16.8%), 소총, 수류탄 등도 동원되었다.[243] 특히 마체테는 1993년 당시 정부가 중국으로부터 대량으로 수입한 것이었다.[242]

학살은 교회나 학교 건물처럼 피난처로 여겨지던 곳에서도 자행되었다. Ntarama 교회에서는 5,000명 이상이 수류탄과 마체테 등으로 살해되거나 산 채로 불태워졌고, 냐루부예 학살에서는 가톨릭 교회로 피신한 1,500명 이상의 투치족이 불도저로 건물이 파괴된 후 학살당했다.[56][229] 지역 사제 아타나스 세롬바는 이 학살에 가담한 혐의로 ICTR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56][57][58][230][231][232] 키갈리의 공립 기술학교(École technique officielle)에서는 UNAMIR 소속 벨기에 평화유지군이 철수한 직후, 피신해 있던 수천 명의 투치족이 르완다군과 민병대에게 학살당했다(공립 기술학교 학살).[59][233]

살해 방식은 극도로 잔인했다. 희생자들은 종종 끔찍한 고문을 당했는데, 손발을 절단하여 고통스럽게 죽게 만들거나[245][246], 가족 앞에서 자녀를 살해하거나, 심지어 근친상간이나 인육 섭취를 강요받기도 했다.[248] 살해된 시신은 옷이 벗겨진 채 길가나 살해 현장에 방치되거나, 강이나 호수에 버려져 빅토리아 호까지 떠내려가기도 했다.[238][239] 매장 자체가 방해받아 많은 유해가 동물들에게 훼손되었다.[247]

르완다 집단학살 중 살해된 여성의 사진, 키갈리 집단학살 기념관.


강간 역시 조직적인 학살 도구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60] 인테라함웨를 비롯한 가해자들은 투치족 여성을 민족 말살의 대상으로 삼아 강간을 자행했으며, 이는 ICTR에 의해 제노사이드의 일부로 인정되었다.[251] 후투족 극단주의 선전은 투치족 여성을 "적과 결탁한 성적으로 유혹적인 제5열"로 묘사하며 성폭력을 부추겼다.[60] UN 특별 보고관 르네 데그니-세귀는 "강간이 규칙이었고, 없는 것이 예외였다"고 보고했으며[62], 약 25만에서 50만 명의 여성이 강간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253] 피해자는 주로 투치족 여성이었으나, 온건파 후투족 여성이나 투치족과 결혼했거나 숨겨준 후투족 여성도 표적이 되었다.[61] 가해자들은 의도적으로 HIV 감염자를 동원한 "강간 부대"를 만들어 피해자들에게 바이러스를 퍼뜨리려 했으며[63][64], 강간 후 성기 절단과 같은 극악한 신체 훼손을 가하기도 했다.[61] 남성 역시 성기 절단 등 성적 학대의 대상이 되었다.[61][207]

4. 2. 사망자 수

하비아리마나 대통령 암살 다음 날인 1994년 4월 7일부터 르완다 애국 전선(RPF)이 수도 키갈리를 점령한 7월 중순까지 약 100일 동안 르완다 전역에서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다. 이 기간 동안 살해된 희생자의 정확한 수는 학살 관련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아[240]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논쟁 중이다.

르완다 정부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당시 르완다 인구 약 730만 명 중 1,074,017명(다른 추산으로는 117만 4천 명[241])이 학살되었으며, 이 중 94%가 투치족이라고 한다.[241] 이는 하루 평균 1만 명 이상이 살해된 셈이다.[241] 학살 이후 생존한 투치족은 약 15만 명으로 추산된다.[241]

그러나 다른 기관 및 연구자들의 추정치는 이와 다르다. 휴먼 라이츠 워치는 현장 조사를 바탕으로 희생자 수를 약 507,000명으로 추산했으며,[240] 2020년 제노사이드 연구 저널 심포지엄에서는 여러 방법론을 통해 50만 명에서 60만 명 사이로 추정했는데, 이는 당시 투치족 인구의 약 3분의 2에 해당한다. 이 외에도 유엔은 80만 명, 아프리카 권리(African Rights)는 75만 명 전후로 추산하는 등[240]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키갈리 제노사이드 기념관에 전시된 학살 희생자들의 사진


집단학살이 르완다의 평균 수명에 미친 영향을 보여주는 그래프


희생자의 대다수는 투치족이었지만, 후투족 중에서도 온건파 인사들이나 학살 협력을 거부한 사람들도 '배신자'로 낙인찍혀 살해되었다.[234] 또한, 르완다의 소수 민족인 바투아족(Twa) 역시 약 3분의 1이 학살 과정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256]

르완다 정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희생자의 37.9%는 마체테로, 16.8%는 둔기로 살해되었다.[243] 특히 학살에 사용된 마체테의 상당수는 1993년 당시 르완다 정부가 중국으로부터 대량으로 수입한 것이었다.[242] 이 외에도 소총, 수류탄 등 다양한 무기가 사용되었다.

집단학살은 사망자 외에도 막대한 인적 피해를 남겼다. 수많은 여성이 강간 피해를 입었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HIV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241][253] 유엔 특별 보고관은 강간 피해자 수를 25만 명에서 50만 명으로 추산했다.[253] 또한 약 40만 명의 고아가 발생했으며, 이 중 약 8만 5천 명은 어린 나이에 가장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약 200만 명의 르완다인(대부분 후투족)이 난민이 되어 인근 국가로 피난했다.

4. 3. 르완다 애국 전선의 군사 작전과 승리

1994년 르완다 집단 학살 당시 르완다 애국 전선(RPF)의 진격 상황을 보여주는 지도


르완다 애국 전선의 침공 경로. 4월에는 주로 북동부와 수도 키갈리로(갈색 화살표), 5월과 6월에는 중부로(주황색 화살표), 7월에는 부타레 등 나머지 지역으로(분홍색 화살표) 각각 진격했다.


4월 7일, 집단 학살이 시작되자 르완다 애국 전선(RPF) 사령관 폴 카가메는 위기 대책 위원회와 유엔 르완다 지원단(UNAMIR)에 학살이 멈추지 않으면 내전을 재개하겠다고 경고했다. 다음 날인 4월 8일, 르완다 정부군은 국회 의사당을 여러 방향에서 공격했지만,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RPF 군대는 성공적으로 반격했다. RPF는 이후 북쪽에서 세 전선으로 공격을 시작하여 키갈리에 고립된 병력과 신속하게 연결하려 했다. 카가메는 임시 정부가 바고소라의 통치를 위한 위장에 불과하고 집단 학살을 종식할 의지가 없다고 판단하여 그들과의 대화를 거부했다.

그 후 며칠 동안 RPF는 꾸준히 남쪽으로 진격하여 가비로와 키갈리 북쪽 및 동쪽의 광대한 지역을 점령했다. 그들은 수도 키갈리나 부욤바를 직접 공격하는 대신, 도시를 포위하고 보급로를 차단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RPF는 또한 우간다에서 온 투치족 난민들이 RPF 통제 지역의 최전선 뒤에 정착하도록 허용했다.

4월 내내 UNAMIR은 휴전을 성립시키려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카가메는 학살이 멈추지 않는 한 RPF는 전투를 멈추지 않겠다고 매번 주장하며 거부했다. 4월 말, RPF는 탄자니아 국경 지역 전체를 확보하고 키갈리 남쪽인 키붕고에서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키갈리와 루헨게리 주변을 제외하고는 거의 저항에 직면하지 않았다.

5월 16일까지 RPF는 임시 정부의 임시 거처였던 키갈리와 기타라마 사이의 도로를 차단했다. 6월 13일에는 르완다 정부군이 도로를 다시 열려는 시도가 실패한 후 기타라마 자체를 점령했다. 이로 인해 임시 정부는 북서쪽 끝의 기세니로 이전해야 했다. 전쟁을 수행하는 동시에 카가메는 군대를 확장하기 위해 대규모로 병력을 모집했다. 새로운 징집병에는 집단 학살 생존자 투치족과 부룬디 난민이 포함되었지만, 이전 징집병보다는 훈련과 규율이 부족한 면도 있었다.

키갈리 포위를 완료한 RPF는 6월 후반기를 도시 자체를 점령하기 위한 전투에 집중했다. 르완다 정부군은 더 많은 병력과 무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RPF는 꾸준히 영토를 확보하고 적진 뒤에서 민간인을 구출하는 기습 공격을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당시 UNAMIR 사령관 로메오 달레르에 따르면, 이러한 성공은 카가메가 "심리전의 대가"였기 때문이며, 정부군이 키갈리 전투보다 집단 학살에 더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과 영토 상실로 인한 정부의 사기 저하를 이용했다고 평가했다.

RPF는 마침내 7월 4일 키갈리에서 르완다 정부군을 격파했다. 이후 7월 18일에는 기세니와 북서부 지역을 점령하여 임시 정부가 자이르(현 콩고 민주 공화국)로 도망가게 만들고 집단 학살을 최종적으로 종식시켰다. 1994년 7월 말, 카가메의 군대는 프랑스 주도의 유엔군이 터키석 작전의 일환으로 점령한 남서부 지역을 제외한 르완다 전역을 장악했다.

르완다의 해방의 날은 RPF가 키갈리를 점령한 7월 4일로 기념되며,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68]

4. 4. 르완다 애국 전선에 의한 살인

집단 학살 기간과 르완다 애국 전선(RPF)의 승리 이후 수개월 동안 RPF 군인들이 많은 사람들을 살해했지만, 그 사상자 수는 논쟁의 대상이다. 앨리슨 데스 포르지스는 RPF가 고위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조직적으로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는 결론을 내린 초기 연구자 중 한 명이다. 그녀는 RPF가 투치족의 적으로 간주되는 약 3만 명을 살해했다고 추정했다.[49] 일부 증인들은 폴 카가메 본인이 살인을 지시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르완다 국제 형사 재판소(ICTR) 조사관들이 1996년 초 르완다 키부예의 집단 매장지에서 시신 2겹(집단 학살의 투치족 희생자 1겹과 RPF가 후투족 민간인을 살해한 1겹)을 발견한 후, 르완다 정부는 추가적인 법의학 조사를 금지했다. 프랑스 학자 앙드레 기쇼아는 집단 학살 이후 정부가 ICTR의 기소를 피하기 위해 후투족 살인과 관련된 증거를 고의적으로 인멸했다고 비판했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러한 범죄에 대해 ICTR이 기소했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69] 심지어 국제법상 집단 학살에 해당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70][71] 반면, 집단 학살 이후 정권은 RPF 군인에 의한 살인이 보복을 추구하는 규율 없는 신병들에 의해 저질러졌으며, 이러한 모든 위반은 즉시 처벌되었다고 주장한다.

RPF의 살인에 대한 첫 소문은 1994년 4월 28일, 25만 명의 대부분 후투족 난민들이 르완다 루수모 국경을 넘어 탄자니아로 몰려들면서 나타났다.[72] 난민들은 투치족 반군이 잔혹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도망쳤다. 유엔 난민 고등 판무관(UNHCR)의 대변인은 당시 "후투족을 겨냥한 정부 라디오의 선전이 많다"며 "그들을 반투치족으로 느끼게 한다"고 언급했다.[73] 4월 30일 RPF가 루수모 국경을 장악한 후,[74] 난민들은 카게라 강을 건너 탄자니아의 외딴 지역으로 향했다. 5월 초, UNHCR은 잔혹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듣기 시작했고, 5월 17일에 이 정보를 공개했다.[75]

RPF가 르완다에서 권력을 장악한 후, UNHCR은 로버트 게르소니가 이끄는 팀을 파견하여 4월 이후 르완다에서 도망친 약 2백만 명의 난민들의 신속한 귀환 가능성을 조사했다. 300명을 인터뷰한 후 게르소니는 "분명히 체계적인 살인과 특정 지역의 후투족 박해"가 일어났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게르소니의 조사 결과는 유엔에 의해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고 억압되었다. '게르소니 보고서'는 기술적으로는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의 조사 결과 요약본이 2010년에 유출되었다.[76][77] 게르소니는 개인적으로 1994년 4월부터 8월까지 RPF가 "25,000명에서 45,000명 사이의 사람들을 살해했으며, 4월부터 7월까지 매달 5,000명에서 10,000명 사이, 8월에 5,000명을 살해했다"고 결론 내렸다. 새로운 르완다 당국은 게르소니의 주장을 전면 부인했으며,[78] 그 세부 사항은 언론에 유출되었다.[79] 한 RPA(르완다 애국군, RPF의 군사 조직) 장교는 "적절한 심사를 할 시간이 없었다. ... 우리에게는 군대가 필요했고, 징집된 사람 중 일부는 도둑과 범죄자였다. 오늘날 우리 문제의 많은 부분은 그 사람들의 책임이다"라고 설명했다. 스티븐 킨저와의 인터뷰에서 카가메는 살인이 발생했음을 인정했지만, 그것이 통제 불가능한 무법 군인들에 의해 수행되었다고 주장했다.

RPF의 살인은 1995년 키베호 학살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 사건에서 군인들은 부타레 주에 위치한 국내 실향민 수용소에 발포했다.[80] 유엔 르완다 지원단(UNAMIR)의 일원으로 파견되었던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은 최소 4,000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했지만,[81] 르완다 정부는 사망자가 338명이라고 주장했다.

5. 국제사회의 대응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의 회의장.


르완다 집단학살 당시 국제 사회, 특히 유엔과 주요 강대국들은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여 학살을 방관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아루샤 협정 이행을 감독하기 위해 파견된 국제 연합 르완다 지원단(UNAMIR)은 자원 부족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다수 회원국들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활동에 큰 제약을 받았다.[267][268] UNAMIR 사령관 로메오 달레르는 집단학살 계획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병력 증강과 무기 압수 등 적극적인 조치를 요청했으나, 유엔 본부는 권한을 넘어서는 행위라며 이를 거부했다.

학살이 시작된 후에도 국제 사회의 대응은 미온적이었다. 달레르 사령관은 사태 수습을 위한 병력 증강을 거듭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유엔 본부는 외국인 피난에 집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로 인해 키갈리의 한 기술 학교를 경호하던 벨기에 평화 유지군이 철수하자마자 학교에 피신해 있던 약 2,000명의 투치족이 학살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심지어 학살이 한창이던 1994년 4월 21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UNAMIR 병력을 280명으로 대폭 감축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 제912호를 통과시켰다.[270] 이는 같은 날 보스니아 전쟁 내 안전 지대 방어를 결의한 유엔 안보리 결의 제913호와 대조를 이루며, 국제 사회가 유럽 문제와 달리 아프리카 문제에는 무관심하다는 비판을 받았다.[271]

주요 국가들의 태도 역시 소극적이었다. 벨기에는 초기에 UNAMIR에 대한 확고한 권한 부여를 주장했으나, 자국 평화 유지군 10명이 살해되자 가장 먼저 철수하여 UNAMIR의 역량을 크게 약화시켰다.[269] 미국빌 클린턴 행정부는 소말리아에서의 모가디슈 전투 (1993년) 실패 경험 이후 아프리카 분쟁 개입을 극도로 꺼렸다. 미국은 르완다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제노사이드'로 규정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회피했으며,[271][278] 이는 제노사이드 협약에 따른 개입 의무를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또한 미국은 UNAMIR의 완전 철수를 주장하고[278], 유엔의 장갑차 지원 요청에 대해 1500만달러의 리스 비용을 요구하는 등[275][278] 국제 사회의 효과적인 대응을 방해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당시 유엔 주재 미국 대사였던 매들린 올브라이트 역시 병력 증강 결정 투표를 지연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275] 클린턴 대통령은 훗날 르완다 사태에 개입하지 않은 것을 자신의 행정부의 실패로 인정하며 후회한다고 밝혔다.[274]

한편, 학살을 주도한 르완다 임시 정부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비상임 이사국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제노사이드 주장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하며 국제 사회의 비난을 무마하고 개입을 지연시키려 했다.[275] 유엔이 "제노사이드 행위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고 공식 인정한 것은 이미 적십자가 50만 명의 사망자를 추산한 뒤인 1994년 5월 17일에 이르러서였다.[276]

달레르 사령관은 유엔의 소극적인 지침과 부족한 자원에도 불구하고 권한을 넘어 피난민 보호를 위해 노력했지만,[272]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 무력감을 느껴야 했다.[273] 그는 훗날 인터뷰를 통해 국제 사회, 특히 서방 국가들이 르완다의 비극에 보인 무관심과 냉담함을 강하게 비판했다.

:나에게 있어서, 르완다인의 고통에 대한 국제 사회, 특히 서방 국가의 무관심과 냉담함을 애도하는 행위는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매우 군인스러운 말투로 말하자면, 아무도 르완다 일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솔직해지자. 르완다의 제노사이드를 아직 기억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제노사이드를 모두가 기억하는 것은, 전원이 거기에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르완다의 제노사이드에는, 사실 누가 관련되어 있었을까?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르완다에서는 불과 3개월 반 동안 유고슬라비아 분쟁을 모두 합한 것보다 많은 사람이 살해당하고, 부상당하고, 추방되었다. 그 유고슬라비아에는 우리는 6만 명이나 되는 병사를 파견했고, 그것뿐만 아니라 서방 세계는 모두 모여, 거기에 수십억 달러를 쏟아부어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르완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솔직히 말해서 무엇이 행해졌을까? 누가 르완다를 위해 슬퍼하고, 정말로 거기에 살고, 그 결과를 계속 살아가고 있을까? 그래서, 내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르완다인이 수백 명이나, 가족과 함께 살해당했다――질릴 정도로 시체가――마을이 통째로 사라져…우리는 매일 그런 정보를 계속 보내고, 국제 사회는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280]

달레르 사령관은 학살을 막지 못했다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으로 우울증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렸으며, 2000년에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282][283]

5. 1. 유엔

10명의 벨기에 UNAMIR 군인이 학살당하고 훼손된 건물이 있다. 현재는 군인들을 위한 기념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르완다 유엔 지원단(UNAMIR)은 아루샤 협정의 이행을 감독하기 위해 1993년 10월부터 르완다에 주둔했다.[19] UNAMIR 사령관 로미오 달레어는 임무 수행 중 후투족 극단주의 세력의 활동과 투치족 대량 학살 계획을 인지하게 되었다.[19][82] 그는 정보원을 통해 알게 된 비밀 무기 은닉 장소에 대한 급습을 요청했으나, 유엔 평화유지국(DPKO)은 달레어가 임무 범위를 벗어났다고 판단하여 이를 거부했다.[19][82] 그러나 무기 압수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872에 따라 UNAMIR의 임무 범위에 포함된다는 주장도 있었다.[82]

UNAMIR의 평화 유지 활동은 하비아리마나 대통령과 후투 강경파의 방해로 어려움을 겪었으며,[19] 1994년 4월까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진전이 없을 경우 UNAMIR의 임무를 종료하겠다고 압박했다.[19] 하비아리마나 대통령 사망과 집단학살 시작 후, 달레어는 평화 회복을 위해 위기 위원회와 르완다 애국 전선(RPF) 양측과 접촉했으나,[19] 양측 모두 휴전에 관심이 없었다. 당시 정부는 집단학살 세력에게 장악되었고, RPF는 학살을 막기 위해 군사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19] 유엔 헌장 제6장에 따른 UNAMIR의 권한은 군사적 개입을 제한했으며,[19] 르완다인 직원 다수가 학살 초기에 살해당하면서 작전 능력 또한 크게 약화되었다.[19]

결과적으로 UNAMIR은 대부분 방관자 역할에 머물렀고, 달레어는 이를 "실패"라고 평가했다.[19] UNAMIR의 주요 기여는 아마호로 스타디움 본부 등 안전한 유엔 시설에서 수천 명의 투치족과 온건 후투족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19] 외국인들의 대피를 도운 것이었다. 4월 12일, 가장 많은 병력을 파견했던 벨기에 정부는 자국 군인 10명이 살해되자 철수를 결정했고, 이는 UNAMIR의 역량을 더욱 약화시켰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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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집단학살 발생 이후에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267][268] 벨기에가 철수한 후, 달레어는 병력 증강을 계속 요청했지만 거부되었다. 오히려 유엔 본부는 UNAMIR에게 외국인 피난에 집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로 인해 키갈리의 한 기술 학교를 경호하던 벨기에 부대가 철수했고, 직후 학교에 피신해 있던 약 2,000명의 투치족이 학살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4일 뒤, 안전 보장 이사회는 유엔 안보리 결의 제912호를 통해 UNAMIR 병력을 280명으로 감축하기로 결정했다.[270] 이는 같은 날 보스니아 전쟁 내 안전 지대 방어를 결의한 유엔 안보리 결의 제913호와 대조적으로, 아프리카보다 유럽을 우선시했다는 비판을 받았다.[271] 달레어 소장은 제한된 권한에도 불구하고 피난민 보호를 계속 시도했지만,[272] 병력과 권한 부족으로 많은 학살을 막지 못했다.[273]

르완다 학살 당시의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


당시 미국 정부는 르완다 사태 개입에 소극적이었다. 빌 클린턴 행정부는 르완다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제노사이드'로 규정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했는데, 이는 제노사이드 협약에 따른 개입 의무 발생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271][278] 미국은 오히려 1994년 4월 유엔에 UNAMIR의 완전 철수를 촉구하기도 했다.[278] 르완다 정부는 안전 보장 이사회 비상임 이사국 지위를 이용해 제노사이드 주장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하며 국제적 비난을 피하려 했고, 이로 인해 안전 보장 이사회의 '제노사이드' 용어 사용은 더욱 지연되었다.[275]

1994년 5월 17일, 적십자가 이미 50만 명의 사망자를 추산한 뒤에야 유엔은 "제노사이드 행위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고 인정했다.[276] 같은 날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918을 통해 무기 금수 조치를 부과하고 UNAMIR 병력을 5,500명으로 증강(UNAMIR II)하기로 결정했지만,[229] 이는 달레어가 학살 발생 이전에 요청했던 규모였다.[277] 병력 증강 결정은 미국의 매들린 올브라이트 대사의 반대로 4일간 지연되었으며,[275] 미국은 유엔이 요청한 50대의 장갑차 제공에 대해 1500만달러의 리스 비용을 요구하는 등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275][278] 결국 비용 문제와 장비 부족으로 유엔 증원군의 배치는 지연되었고, 새로운 군인들은 6월에야 도착하기 시작했다.[275][278]

UNAMIR II는 1994년 7월 RPF가 승리한 후 1996년 3월 임무가 종료될 때까지 르완다의 보안과 안정 유지에 주력했다.[279] 달레어 사령관은 학살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1994년 8월 사령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우울증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렸다.[282] 그는 훗날 국제 사회, 특히 서방 국가들의 무관심을 강하게 비판하며 르완다의 비극이 쉽게 잊혀지는 현실에 대해 개탄했다.[280] 클린턴 전 대통령 역시 1999년 인터뷰에서 당시 미국 정부가 르완다 사태를 '지역 분쟁'으로 간주하고 '제노사이드' 인정을 거부했던 결정을 후회한다고 밝히며, 미군 5,000명을 파견했다면 50만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274]

5. 2. 프랑스

1994년 8월 공항에서 경계를 서는 프랑스 해병대 강하부대.


하비아리마나 대통령 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는 프랑스아프리카 정책의 일환으로 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284] 내전 중 RPF에 대항하여 르완다를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프랑스는 RPF를 우간다와 함께 프랑스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영어권의 음모"의 일부로 간주했다.[284] 영국 언론인 린다 멜번(Linda Melvern)은 당시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이 RPF의 침공을 프랑스어권 국가에 대한 영어권 인접 국가의 침략으로 보았으며, 프랑스의 정책은 RPF의 군사적 승리를 막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고 분석했다.[284]

집단 학살 초기, 프랑스는 벨기에군과 UNAMIR의 지원을 받아 자국민 등 외국인 대피 작전인 ''아마릴리스''를 실행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프랑스군은 투치족의 동행을 거부했으며, 일부는 트럭에서 강제로 내려져 살해당했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투치족 배우자나 자녀를 분리하여 외국인만 구출하고 르완다인은 방치했다는 지적도 받았다. 프랑스는 하비아리마나의 부인 아가테 등 구 정권의 주요 인사들을 구출하기도 했다.

1994년 6월 22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결의 제929호를 통해 프랑스군 주도의 다국적군에게 인도적 목적의 개입을 승인했다.[285] 이에 따라 프랑스는 오페라시옹 튀르쿠아즈(터키석 작전)를 개시하여, 자이르(현 콩고 민주 공화국)의 고마부카부를 기지로 삼아 르완다 남서부(샹구구–키부예–지콩고로 삼각지대)에 '튀르쿠아즈 구역'이라는 인도적 보호 구역을 설정했다. 라디오 프랑스 인터내셔널은 이 작전으로 약 15,000명의 생명을 구했다고 추정하지만, 집단 학살이 막바지에 이르고 RPF가 우세해지면서, 많은 르완다인들은 이 작전을 집단학살 가담자를 포함한 후투족을 RPF로부터 보호하려는 시도로 해석했다. 프랑스는 RPF에 적대적이었고, 프랑스군의 존재는 RPF의 진격을 일시적으로 늦췄다. 이 작전이 오히려 제노사이드 가담자들의 자이르 등 인접국 도피를 도왔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286] 르완다 애국 전선 출신인 자크 비호자가라(Jacques Bihozagara)는 터키석 작전이 "제노사이드 가해자 보호만을 목적으로 했다. 왜냐하면 제노사이드는 '인도적 확보 지대' 안에서도 행해졌기 때문이다"라고 증언하며 비판했다.[287] 또한, 프랑스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함께 제재 이전 주요 무기 공급국이었으며, 제재 이후에도 자이르를 통해 무기 공급을 지속했다는 비판이 있다.[91]

프랑스의 역할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었다. 1998년 르완다에 관한 프랑스 의회 위원회는 프랑스가 "민족적 긴장, 학살, 폭력의 배경 속에서 군사적 협력"을 포함한 판단 오류를 범했다고 결론 내렸으나, 집단 학살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위원회는 프랑스가 제노사이드 위협 규모 파악 실패, UNAMIR에 대한 과도한 의존, 비효과적 외교 등의 과오를 저질렀다고 지적했다.[298]

2006년 프랑스 판사 장루이 브뤼기에르(Jean-Louis Bruguière)는 하비아리마나 대통령 암살 사건과 관련하여 폴 카가메 현 르완다 대통령 등 RPF 지도부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했고, 이는 양국 간 외교 단절로 이어졌다.[288] 이에 카가메 대통령은 프랑스의 집단학살 관여를 고발하는 위원회 구성을 명령했다.[289] 르완다 정부는 2008년 무초 위원회(Mucyo Commission) 보고서를 통해 프랑스 정부가 집단 학살 준비를 인지하고 후투족 민병대 훈련을 도왔다고 비난했다. 이 보고서는 당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위베르 베드린, 에두아르 발라뒤르 총리, 알랭 쥐페 외무장관, 도미니크 드 빌팽 등 프랑스 고위 관리 33명이 집단 학살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하며 기소를 요구했다.[254][293][294][295][296] 보고서는 프랑스군 병사가 직접 암살과 강간에 가담했다는 주장도 포함했으나, 강간 혐의는 입증되지 않았다.[293] 카가메 대통령은 프랑스와 스페인 사법부의 체포 영장 철회를 요구하며 프랑스 국민을 기소할 수 있다고 위협하기도 했다.[290][291][292] BBC는 르완다 보고서의 동기가 카가메 대통령의 권위 부여 및 RPF에 대한 전쟁 범죄 혐의에서 관심을 돌리려는 목적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297]

이후 관계 개선 노력이 이어졌다. 2010년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프랑스 대통령은 르완다를 방문하여 프랑스가 집단 학살 당시 "잘못"을 저질렀다고 인정했으나, 공식적인 사과는 하지 않았다.[299][300] 이에 대해 카가메 대통령은 양국 관계 정상화에 대한 기대를 표명했다.[301] 같은 해 프랑스 당국은 망명 중이던 아가트 하비아리마나를 구속했다.[302] 2019년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스의 역할을 재검토하기 위해 국가 기록 보관소 조사를 지시했으며,[83] 2020년에는 집단 학살 자금 지원 혐의를 받는 펠리시앙 카부가가 파리 근교에서 체포되었다.[304] 2021년 5월, 마크롱 대통령은 키갈리 방문 연설에서 프랑스가 학살 정권 편에 섰던 책임이 있음을 인정했지만, 사과에는 이르지 않았다.[303] 같은 해 4월, 르완다 정부가 위임한 연구 보고서는 프랑스가 1994년 4월과 5월에 발생한 "예견 가능한" 학살을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84]

5. 3. 미국



미국 군용 차량 호송대가 1994년 8월 자이르 킴붐바 캠프에 있는 르완다 난민에게 고마에서 깨끗한 물을 운반하고 있다


정보 보고에 따르면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그의 내각은 학살이 절정에 달하기 전에 모든 투치족을 제거하기 위한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집단 학살이 계획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85] 그러나 소말리아에서 겪었던 모가디슈 전투의 실패 경험은 당시 미국의 정책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논평가들은 모가디슈 전투에서 미군 사상자가 발생하고 그 시신이 거리로 끌려다니는 충격적인 사건 이후, 미국이 르완다 집단 학살과 같은 분쟁에 개입하는 것을 주저하게 된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전 미국 소말리아 특사였던 월터 클라크는 "소말리아의 유령은 계속해서 미국의 정책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르완다에서 우리가 대응하지 못한 것은 다시 소말리아와 같은 상황에 휘말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라고 평가했다.[86]

클린턴 대통령 자신도 훗날 르완다 집단 학살에 개입하지 못한 것을 자신의 주요 외교 정책 실패 중 하나로 언급하며 "우리가 폭력을 종식시킬 수는 없었을지라도, 줄일 수는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유감입니다."라고 말했다.[87] 당시 워싱턴에서 이루어진 논의의 80%는 르완다에 체류 중인 미국 시민의 안전한 대피에 집중되어 있었다.[88]

한편, 미국 정부는 제노사이드 이전부터 르완다 애국 전선(RPF)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RPF의 지도자가 된 폴 카가메는 1990년 캔자스주 리번워스 군의 리번워스 요새에 초청되어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르완다 애국 전선이 르완다 침공을 시작했을 때 카가메는 미국에서 수학 중이었으며, 공동 설립자 프레드 루위게마가 사망하자 급히 귀국하여 사령관직을 이어받았다.[306] 1997년 워싱턴 포스트는 르완다 애국 전선이 미국 군 특수 부대로부터 훈련을 받았을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307][308]

소말리아 사태 이후, 미국은 세계 평화 유지 활동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994년 5월 3일 확정된 Presidential Decision Directive 25|대통령 결정 지령 25eng(PDD-25)는 이러한 미국의 정책 변화를 공식화했다. 그 결과, 미국은 르완다 집단 학살 기간 동안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다. 미국 국가안보 기록 보관소는 미국 정부가 다음과 같은 방법을 통해 르완다 사태에 대한 국제 사회의 대응을 지연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했다.[278]

# 1994년 4월, 유엔에 국제 연합 르완다 지원단(UNAMIR)의 전면 철수를 촉구했다.

# 미국 국무 장관 워렌 크리스토퍼는 5월 21일까지 '제노사이드'라는 용어의 공식 사용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미국 관리들이 이 용어를 공개적으로 사용하기까지 3주가 더 걸렸다. 이는 르완다 사태를 '제노사이드'로 규정할 경우, 제노사이드 협약 비준국으로서 개입해야 할 의무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271]

# 정부 내부의 관료주의적 문제로 인해 제노사이드에 대한 전반적인 대응이 늦어졌다.

# 학살을 선동하는 라디오 방송을 재밍하는 것에 대해 비용 문제와 국제법적 명분을 이유로 거부했다.

# 제노사이드를 주도하는 인물들을 파악하고 있었고, 이들과 접촉하여 학살 중단을 촉구했지만, 실질적인 압박이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278]

또한, 유엔이 5,500명 규모의 평화 유지군 증파를 결정했을 때(유엔 안보리 결의 제918호), 미국은 유엔의 50대 장갑차 지원 요청에 대해 수송 비용 650만달러를 포함한 총 1500만달러의 리스 비용을 요구했다. 이러한 미국의 소극적인 태도는 유엔 평화 유지군의 신속한 전개를 방해하는 요인이 되었다.[275][278] 당시 미국의 유엔 대사였던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병력 증강 결정 투표를 4일간 연기시키는 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275]

5. 4. 가톨릭 교회



1994년까지 르완다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로마 가톨릭교회 국가 중 하나로, 인구의 68%가 가톨릭 신자였고, 18%는 개신교 신자, 약 1%는 무슬림이었다.

르완다에서 투치족후투족 간의 대립이 형성되는 데 가톨릭 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세기 말부터 제1차 및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식민지 시대에 가톨릭 교회는 투치족을 우대하며 식민지 행정 엘리트로 육성했고, 이는 종족 간 갈등을 식민 통치의 수단으로 삼는 결과를 낳았다. 벨기에 식민 정부는 가톨릭 교회가 설립한 학교를 통해 투치족 추장의 자녀들을 엘리트로 교육하며 투치족을 우대했다. 특히 가톨릭 교회는 투치족이 후투족보다 우월하다는 '하미틱 가설'을 퍼뜨리며 양 부족 간의 인종 갈등을 부추겼다.

한편, 투치족의 지배 하에 있던 후투족 일부는 가톨릭을 통해 의식화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57년 후투 사회운동을 이끈 그레구아르 카이반다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가톨릭 교회가 소유한 신문사 '키냐마테카'(Kinyamateka)의 편집장을 지냈다. 그는 후투와 투치의 갈등을 인종 간의 갈등으로 규정하고, '외국인'인 투치족을 몰아내기 위해 후투족의 단결을 주장했다. 카이반다는 신문 편집장 지위를 이용하여 키냐르완다어로 후투족의 민족 의식을 고취했으며, 투치족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겨 운동을 확산시켰다.[378]

1950년대 후반부터 가톨릭 교회는 후투족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돌아섰으며, 많은 성직자가 이후 벌어진 학살에 협조했다. 학살에 가담한 일반 주민 중 다수는 '투치족 학살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여겼고, 르완다 정부 조사 결과 가톨릭 교회 일부가 학살에 직접 가담한 사실이 밝혀졌다.

학살 이후 르완다 국제 형사 재판소(ICTR)에서는 학살에 관여한 사제 아타나제 세롬바와 에마뉘엘 루쿤도 등이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는 가톨릭 교회의 집단 학살 책임을 부인했으며, 르완다 내 가톨릭 교회는 학살에 연루된 성직자들의 행위를 개인적인 범죄로 치부하며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았다.[379] 요한 바오로 2세는 1994년 4월 9일 르완다 가톨릭 신자들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증오와 복수심에 굴하지 말고 용감하게 대화하고 용서하라"고 촉구하기도 했다.[95]

가톨릭 교회는 집단 학살 발생 사실은 인정하지만, 가담자들은 교회의 허락 없이 행동했다는 입장을 유지해왔다.[100] 휴먼 라이츠 워치는 1999년 보고서에서 르완다의 여러 종교 지도자들이 집단 학살을 제때 비난하지 않았다고 지적했지만[96], 다른 한편으로 일부 성직자들은 투치족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기도 했다.[96]

냐마타(Nyamata)의 가톨릭 교회 학살 기념관에 놓인 추모 꽃다발


일부 성직자들의 학살 가담 사례는 다음과 같다.

  • 가톨릭 수녀 마리아 키시토와 거트루드 무캉강고는 2001년, 소부의 수도원에 피신한 투치족 500~700명을 살해하는 데 연루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증인들은 이들이 사형 집행반에게 피난민의 위치를 알리고, 건물에 불을 지르기 위한 휘발유를 제공했다고 증언했다.[97]
  • 아타나제 세롬바 신부는 2006년, 투치족 2,000명 학살에 가담한 혐의로 르완다 국제 형사 재판소에서 15년 형을 선고받았고, 항소심에서 종신형으로 형량이 가중되었다. 재판 기록에 따르면, 세롬바 신부는 투치족들을 교회로 유인하여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처럼 속인 뒤, 불도저로 교회를 무너뜨려 안에 있던 사람들을 살해하고, 생존자는 후투족 민병대에게 살해하라고 지시했다.[98][99]
  • 오귀스탱 미사고 주교는 부패와 집단 학살 공모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2000년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101]


2017년 3월 20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르완다 방문 중이던 폴 카가메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르완다 대학살 당시 가톨릭 교회와 교회 구성원들이 저지른 죄와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교황은 일부 가톨릭 사제와 수녀들이 학살 과정에서 희생되기도 했지만, 다른 이들은 집단 학살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데 가담했음을 인정했다.[102]

5. 5. 바티칸의 입장



르완다는 1994년 집단학살 이전까지 아프리카에서 가장 가톨릭 신자 비율이 높은 국가 중 하나였다. 그러나 학살 과정에서 일부 가톨릭 성직자들이 학살에 직접 가담하거나 협조한 사실이 드러났다. 르완다 국제 전범 법정에서는 학살에 관여한 사제 아타나제 세롬바(Athanase Seromba), 에마누엘 루쿤도(Emmanuel Rukundo) 등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379] 또한, 가톨릭 수녀 마리아 키시토와 거트루드 무캉강고는 2001년, 수도원에 피신한 투치족 수백 명을 살해하는 데 연루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97] 세롬바 신부는 투치족 2,000명을 교회로 유인한 뒤 불도저로 건물을 무너뜨려 학살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98][99] 물론, 많은 다른 성직자들은 투치족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했다.[96]

학살 당시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와 교황청은 가톨릭 교회의 집단학살 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1994년 4월 9일, 교황은 르완다 가톨릭 신자들에게 "증오와 복수심에 굴하지 말고 용감하게 대화하고 용서하라"는 메시지를 보냈으나,[95] 이후 교회 차원의 책임은 부인하며 학살에 연관된 성직자들은 개별적으로 죄를 저지른 것이라는 입장을 유지했다.[379][100]

더 나아가 교황청이 조직망을 이용해 학살 가담자들의 유럽 도피를 도왔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국제 가톨릭 자선단체인 카리타스 인터내셔널의 도움으로 학살 전범들이 유럽행 비행기표를 받아 탈출했으며, 학살에 가담한 신부들은 벨기에나 프랑스 교구로 파견되었다는 주장이 나왔으나, 주교들은 이를 부인했다.[380] 또한 교황청은 르완다 학살을 '민족 말살' 대신 '골육상쟁'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건의 심각성을 축소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380] 학살이 벌어지는 3개월 동안, 그리고 프랑스의 진상조사 보고서가 발표된 뒤에도 교황청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1998년 요한 바오로 2세는 르완다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유감이나 사과의 내용은 없이 후투족 학살자들의 사형 집행 연기를 요청했을 뿐이었다.[380]

이러한 입장은 2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변화했다. 2017년 3월 20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티칸 사도궁에서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을 만나 르완다 집단학살 당시 "가톨릭 교회와 교회 구성원들이 저지른 죄와 잘못"에 대해 공식적으로 용서를 구했다.[381][102] 프란치스코 교황은 일부 가톨릭 사제와 수녀들이 학살 과정에서 살해당하기도 했지만, 다른 이들은 증오를 선동하고 학살을 준비하거나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102]

6. 학살 이후

집단학살 이후 르완다 애국 전선(RPF)은 국가 통제권을 장악하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했다. 폴 카가메가 실질적인 지도력을 발휘하며 국가 재건과 안정화에 나섰다. 새 정부는 아루샤 협정 등을 기반으로 연립 정권을 구성하고, 시민 신분증에서 민족 구분을 공식적으로 폐지하는 등 국민 통합을 추구했다.[324] 2000년 폴 카가메가 대통령에 취임했으며, 이후 선거를 통해 집권을 이어갔다.[323][324] 여성의 정치 참여 확대를 위해 쿼터제를 도입하여 2010년 기준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여성 의원 비율(56%)을 달성하기도 했다.[324][318]

그러나 집단학살의 여파는 심각했다. 수많은 난민이 발생했으며, 특히 자이르(현 콩고 민주 공화국)로 피신한 후투족 난민 캠프는 학살 가담 세력의 재집결지가 되어 르완다 안보를 위협했다. 이는 결국 제1차 콩고 전쟁(1996-1997)과 제2차 콩고 전쟁(1998-2003)으로 이어지는 등 주변 지역 불안정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르완다인들이 인접 국가에서 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1998년 3월, 미국빌 클린턴 대통령은 르완다를 방문하여 집단학살 당시 국제 사회의 대응이 미흡했음을 인정하고 사과했다("클린턴 대통령의 사과").[319][320] 이는 국제 사회의 책임 인정으로 받아들여져 르완다 국민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322]

국내적으로는 사회 통합과 안정을 명분으로 표현의 자유 제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2003년 제정된 헌법 제38조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지만[130], 정부는 '집단학살 이데올로기'나 '분열주의' 조장을 막는다는 이유로 관련 법률을 제정하여 특정 발언을 규제했다.[131] 이 법들은 '분열주의'와 같은 핵심 용어의 정의가 모호하여[132][133] 정부 비판을 위축시키고 자기 검열 문화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았다.[134]

또한 헌법에 따라 "집단학살의 수정주의, 부인주의 및 사소화"는 범죄로 규정되었으며[135], 수백 명이 "집단학살 이데올로기"나 "수정주의" 등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136] 국제앰네스티와 같은 국제 인권 단체들은 르완다 정부가 이러한 법을 이용해 정당한 반대와 비판을 억압한다고 비판했다.[137] 2010년에는 대통령 후보 빅투아르 잉가비르의 변호를 맡았던 미국인 변호사 피터 얼린더가 집단학살 부인 혐의로 르완다에서 체포되어 기소되기도 했다.[138]

르완다는 대규모 국제 원조를 바탕으로 외국인 투자 유치, 농업 생산력 향상 등 경제 재건과 개발에 힘쓰고 있다.[324] 하지만 여전히 대규모 난민 귀환 문제[325], 구 정부군 및 민병대 잔당과의 산발적 충돌[326], 집단학살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사회 통합 문제, 전쟁 강간 피해자 및 고아 지원[252][253], 생존자들의 트라우마 치유[184], 신체 장애인 복지[330] 등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또한, 집단학살 책임 규명을 위한 사법 처리 과정에서 가차차 법원을 운영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으나 여러 도전에 직면하기도 했다.

6. 1. 난민 위기, 반란, 그리고 두 차례의 콩고 전쟁

키탈리 난민 캠프, 자이르 (1994)


흐린 날 난민 캠프의 모습, 다양한 색상의 텐트와 난민들을 보여줌
자이르(1994년) 고마의 킴붐바 난민 캠프


르완다 애국 전선(RPF)의 승리 이후, 학살에 가담했거나 투치족의 보복을 두려워한 약 200만 명의 후투족이 이웃 국가, 특히 자이르(현 콩고 민주 공화국, DRC) 동부 지역의 난민 캠프로 피난했다.[311] 이 과정에서 후투족 학살자들도 함께 피난하여 르완다 국경을 따라 위치한 난민 캠프에서 재집결하기 시작했다.

유엔 난민 기구(UNHCR)가 설치한 이 캠프들은 매우 혼잡하고 위생 상태가 열악했으며, 콜레라이질 같은 전염병이 퍼져 수천 명의 난민이 목숨을 잃었다.[312] 캠프는 사실상 이전 후투족 정권의 군대와 정부 관리들의 통제하에 있었으며, 이들 중에는 학살을 주도했던 많은 지도자들이 포함되어 르완다로 돌아가 권력을 되찾기 위해 재무장을 시도하고 있었다.[315]

미국은 1994년 7월부터 9월까지 'Operation Support Hope' 작전을 통해 난민 캠프에 식량, 물, 의료품 등을 공수하고 기반 시설 정비를 지원했으며[313][314], 다국적군도 지원 활동에 참여했다. 일본 정부 역시 오가타 사다코 당시 유엔 난민 고등 판무관의 요청을 받아 국제평화협력법에 근거하여 자위대를 파견(자위대 르완다 난민 구호 파견)하여 1994년 10월부터 12월까지 자이르와 케냐에서 의료, 방역, 급수 지원 활동을 펼쳤다.[316]

1996년 말, 난민 캠프에 기반을 둔 후투족 무장 세력이 국경을 넘어 르완다를 침입하는 일이 잦아지자, RPF가 이끄는 르완다 정부는 추가 학살을 막는다는 명분 하에 반격을 시작하며 자이르에 군사적으로 개입했다.[317] 르완다는 자이르 남키부주에 거주하는 투치족인 바냠룰렝게에게 군대와 군사 훈련을 제공하여 자이르 보안군을 물리치는 데 도움을 주었다.[317] 이후 르완다군, 바냠룰렝게, 그리고 다른 자이르 투치족들은 후투족 민병대를 겨냥하여 난민 캠프를 공격했다.[317] 이 공격으로 수십만 명의 난민들이 흩어졌는데[317], 많은 이들이 RPF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르완다로 돌아갔고, 다른 사람들은 자이르 서쪽으로 더 깊숙이 피난했다.[317] 1996년 11월 르완다 정부가 난민 귀국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40만에서 70만 명에 달하는 난민이 르완다로 돌아왔고[317], 같은 해 12월 말에는 탄자니아 정부의 철수 조치로 50만 명이 넘는 난민이 추가로 귀국했다.[317] 그러나 자이르 서부로 피난한 난민들은 콩고 자이르 해방 민주 세력 연합(AFDL)의 지원을 받는 르완다 애국군(RPA)에게 계속 추격당했으며, 한 추정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약 232,000명의 후투족 난민이 살해되었다.[317]

한편, 패배한 구 정권 세력은 르완다 해방군(ALiR)을 결성하여 르완다 북서부 지역의 후투족 주민들의 지원을 받으며 국경을 넘나드는 반군 활동을 계속했다.[317] 하지만 르완다 정부의 지속적인 선전 활동과 후투족의 르완다 국방군 통합 정책이 효과를 거두면서 1999년까지 후투족 민심을 정부 쪽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고, 반란은 점차 진압되었다.[317]

난민 캠프 해체와 더불어, 폴 카가메는 당시 자이르의 독재자 모부투 세세 세코를 축출할 계획을 세웠다.[317] 모부투는 난민 캠프에 기반을 둔 후투족 학살 연루자들을 지원하고 자이르 내 투치족에 대한 공격을 방관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317] 르완다 정부는 우간다와 함께 로랑데시레 카빌라가 이끄는 반군 연합(AFDL)을 지원했고, 이들은 1996년 제1차 콩고 전쟁을 일으켰다.[317] AFDL은 빠르게 북키부와 남키부주를 장악하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조직력과 사기가 저하된 자이르 군대로부터 별다른 저항 없이 영토를 점령해 나갔고, 1997년에는 자이르 전역을 통제하게 되었다.[317] 모부투는 국외로 망명했고, 자이르는 콩고 민주 공화국(DRC)으로 국명을 변경했다.[317]

그러나 르완다와 카빌라가 이끄는 콩고 새 정부의 관계는 1998년에 틀어졌고, 카가메는 새로운 반란 세력을 지원하며 제2차 콩고 전쟁(1998–2003)을 촉발했다.[317] 이 전쟁은 2003년까지 이어지며 수백만 명의 사망자와 막대한 피해를 낳았다.[317] 2010년 유엔은 보고서를 통해 르완다 군대가 이 전쟁 동안 콩고에서 광범위한 인권 침해와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다고 비난했지만, 르완다 정부는 이를 부인했다.[317] 이후에도 르완다 정부와 DRC 내 반대 세력 간의 무력 충돌은 계속되었으며, 고마 지역에서의 M23 반란(2012–2013)을 포함한 여러 용병 민병대 간의 전투로 이어졌다. 구 르완다 정권의 흐름을 잇는 후투계 무장 조직은 2009년 5월까지 콩고 민주 공화국 동부에 존재했으며[317], 오늘날까지도 르완다 출신의 후투족과 투치족 상당수가 이 지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6. 2. 르완다 국내 상황



집단학살로 르완다의 기반 시설과 경제는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많은 건물이 파괴되었고, 이전 정권은 국외로 도피하며 모든 통화와 동산 자산을 가져갔다.[110] 인적 자원 손실도 막대하여, 인구의 40% 이상이 사망하거나 난민이 되었다.[110] 생존자 대부분은 친척을 잃거나 살해를 목격하는 등 극심한 트라우마를 겪었으며, 일부는 집단학살에 참여하기도 했다.[111] 특히 전쟁 강간 피해 여성들은 사회적 고립, 성병 감염,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 등으로 고통받았으며, 일부는 스스로 낙태를 선택하기도 했다.[112][252] 르완다 학살 문제 특별 보고관은, 미성년 소녀를 포함한 25만 명에서 50만 명의 여성이 강간당했고, 2,000명에서 5,000명이 임신했다고 추정하고 있다.[253]

르완다 애국 전선(RPF)을 이끌던 폴 카가메의 군대는 국가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동시에 정부 구조를 재건하는 작업에 착수했다.[79][110] RPF는 1994년 7월 군사적 승리 이후, 집단학살 이전 쥐베날 하비아리마나 대통령 시절의 연립 정권과 유사한 형태의 거국 일치 내각을 구성했다. 이 내각은 헌법, 아루샤 협정, 각 정당의 정치 선언을 기반으로 운영되었으며, 구 정권 여당이었던 개발 국민 혁명 운동은 불법화되었다. 새로운 정당 결성은 2003년까지 금지되었다.[324] 카가메 정부는 투치족이 지배하지 않는 포용적 정부임을 강조하며, 시민 신분증에서 민족 구분을 삭제하고 후투족, 투치족, 트와족 간의 차이를 강조하지 않는 정책을 추진했다.[79]

집단학살 이후, 보복을 두려워한 약 200만 명의 후투족이 국외로 탈출하여 난민이 되었다.[311] 이들은 주로 자이르(현 콩고 민주 공화국) 동부 지역으로 유입되었으며, 일부는 부룬디, 탄자니아, 우간다로 향했다. 난민 캠프는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콜레라, 이질 등 전염병이 확산되어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312] 비정부 기구(NGO)들이 르완다로 복귀하기 시작했지만, 국제 사회의 초기 지원은 미흡했으며, 대부분의 원조는 자이르의 난민 캠프에 집중되었다.[110] 난민 캠프에는 집단학살에 가담했던 후투족 세력이 재집결하여 르완다 해방군(ALiR) 등을 결성하고 르완다 정부를 위협하기도 했다. 미국은 '지원 희망 작전'을 통해 식량, 물, 생활 필수품의 공수 지원과 공항 정비 등을 실시했으며[313][314], 다국적군과 일본자위대도 자위대 르완다 난민 구호 파견을 통해 난민 구호 활동에 참여했다.[316] 1996년 제1차 콩고 전쟁 발발 이후, 같은 해 11월 르완다 정부가 난민 귀환을 인정함에 따라 40만 명에서 70만 명에 달하는 난민이 르완다로 귀국했다.[317] 1996년 12월 말에는 탄자니아 정부의 철수 활동으로 인해 50만 명이 넘는 난민이 추가로 귀국했다.

한편, 자이르(현 콩고 민주 공화국) 동부로 피신한 후투족 난민 캠프는 르완다 안보에 위협이 되었다. 집단학살 가담자들이 캠프 내에서 재결집하여 르완다를 공격하자, RPF 정부는 자이르 영토 내 군사 작전을 감행했다. 이는 제1차 콩고 전쟁(1996–97)과 제2차 콩고 전쟁(1998–2003)의 주요 원인이 되었으며, 이후에도 M23 반란(2012–2013) 등 콩고 동부 지역의 불안정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여전히 많은 르완다인들이 주변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1998년 3월, 미국빌 클린턴 대통령은 르완다를 방문하여 집단학살 당시 국제 사회의 대응이 미흡했음을 인정하고 사과했다.[319][320] 이는 르완다 국민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322] 2000년 3월 파스퇴르 비지뭉구 대통령 사임 후 폴 카가메가 대통령에 취임했으며, 2001년 3월 첫 비밀 선거 형식의 지방 선거가 치러졌고[323], 2003년 8월에는 첫 복수 후보 대통령 선거가, 같은 해 9월부터 10월에는 상·하원 의원 선거가 치러졌다.[324] 카가메 대통령과 RPF는 선거에서 승리하며 집권을 이어갔다. 정부는 여성의 유산 상속 권한을 허용하고 여성 의원 비율 증가를 위한 쿼터제를 도입하는 등 여성 권리 확대를 추진했으며[324], 그 결과 2010년 3월 기준 여성 의원 비율 56%로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318]

2003년 헌법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지만[130], 정부는 '집단학살 이데올로기'와 '분열주의' 조장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여러 법률을 제정하여 실제로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131] 이 법들은 관련 용어를 모호하게 정의하고 있어[132][133], 국민들 사이에 자기 검열 문화를 확산시켰다.[134] 또한 "집단학살의 수정주의, 부인주의 및 사소화"는 범죄로 규정되어[135] 수백 명이 관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136] 국제앰네스티 등 국제 인권 단체는 이러한 법들이 정당한 비판과 반대 의견을 탄압하는 데 이용된다고 비판했다.[137] 2010년에는 야당 정치인의 변호를 맡았던 미국인 변호사 피터 얼린더가 집단학살 부인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138]

르완다 신정부는 대규모 난민 귀환[325], 구 정부군 및 민병대 잔당과의 교전[326], 집단학살 관련 범죄자 수용으로 인한 형무소 과밀화[327] 등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강간 피해 여성들은 사회적 낙인과 HIV/AIDS를 포함한 성병 감염[252] 등으로 지속적인 고통을 겪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같은 마을에 살아야 하는 현실은 사회 통합의 큰 걸림돌이 되었으며, 민족 간 신뢰 회복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집단학살은 아동들에게도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유니세프 조사에 따르면, 집단학살 당시 아동 6명 중 5명이 유혈 사태를 목격했으며[184], 2001년까지 약 5,000명의 10대 청소년이 학살 가담 혐의로 구금되었다.[328] 이들은 교육 기회를 박탈당하고 가족에게 거부당하는 등 사회 복귀에 어려움을 겪었다.[329] 또한 집단학살로 인한 신체 장애인들에 대한 복지 지원도 부족한 실정이다.[330]

르완다는 국제 사회의 원조를 바탕으로 정치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외국인 및 국내 투자 유치, 농업 생산력 향상 등을 통해 경제 재건에 힘쓰고 있다.[324]

6. 3. 사법 제도

제노사이드와 내전 기간 동안 사법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파괴된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제노사이드 이후, 르완다 애국 전선(RPF)은 책임이 있는 사람들과 제노사이드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대규모 체포 정책을 추진했다. 이로 인해 제노사이드 이후 2년 동안 10만 명 이상이 투옥되었다. 이러한 대규모 체포는 르완다 교도소 시스템의 수용 능력을 훨씬 넘어섰고, 국제앰네스티는 이를 "잔혹하고, 비인간적이거나 굴욕적인 대우"라고 비판했다.[113] 르완다의 19개 교도소는 총 18,000명을 수용하도록 설계되었지만, 1998년에는 전국적으로 10만 명 이상이 과밀한 구금 시설에 수용되었다.[113]

사법 기관 역시 큰 피해를 보았다. 많은 판사, 검사, 직원이 제노사이드 기간 동안 살해되었고, 정부 기관 자체가 파괴되었다. 르완다의 판사 750명 중 506명이 살아남지 못했으며, 생존자 대부분도 르완다를 떠났다. 1997년까지 르완다 사법 시스템에는 변호사가 50명밖에 남지 않았다.[114] 이러한 인력 부족과 시스템 붕괴로 인해 재판은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 제노사이드 이후 13만 명의 용의자가 교도소에 수감되었지만,[114] 1996년부터 2000년 말까지 처리된 사건은 3,343건에 불과했다.[115] 피고인 중 약 20%가 사형, 32%가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20%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115] 이 속도로는 수감된 용의자들의 재판을 마치는 데 200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다.[116]

RPF 정부는 지연되던 제노사이드 재판을 시작하기 위해 노력했다. 1996년 8월 30일, '유기법 제08/96호'가 제정되면서 마침내 제노사이드 관련 범죄와 1990년 10월 이후의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기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117] 이 법은 2001년 가차차 재판소를 포함하도록 개정되기 전까지 제노사이드 대응의 핵심적인 법적 근거가 되었다. 유기법은 제노사이드 연루자들을 네 가지 범주로 나누고 각 범주에 대한 처벌 수위를 명시했다. 가장 중한 범죄인 첫 번째 범주에는 제노사이드의 "계획자, 조직자, 선동자, 감독자 및 지도자", 국가 권력을 이용해 제노사이드를 조장한 자, 특히 잔혹하거나 성적 고문을 가한 살인자들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118]

1996년 유기법 제정 이전에도 르완다에는 사형 제도가 있었지만, 1982년 이후 실제 집행은 없었다. 그러나 제노사이드 이후, 1998년 4월 프로두알드 카라미라를 포함한 22명이 공개 처형되었다. 이후 르완다는 2003년까지 사형 선고를 계속했지만 더 이상 집행하지는 않았다. 결국 2007년 7월 25일, 사형 폐지에 관한 유기법이 발효되어 사형 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기존의 모든 사형 선고는 독방 종신형으로 전환되었다.[119][120] 이는 사형에 대한 전 세계적인 모라토리엄을 촉구하는 UN 결의안이 제시되는 등 국제적인 흐름과도 맥을 같이하는 조치였다.[121]

6. 4. 가차차 법원

제노사이드와 내전으로 인해 르완다의 사법 시스템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제노사이드 이후 10만 명이 넘는 용의자가 체포되어 교도소에 수감되었으나, 이는 교도소 수용 능력을 훨씬 초과하는 숫자였다.[113] 국제앰네스티는 이러한 상황을 "잔혹하고, 비인간적이거나 굴욕적인 대우"라고 비판했다.[113] 1998년에는 약 18,000명을 수용하도록 설계된 교도소에 10만 명 이상이 수감되었다.[113]

사법 시스템의 기반 시설 파괴와 더불어, 제노사이드 기간 동안 많은 판사와 검사들이 살해되거나 국외로 도피했다. 르완다의 판사 750명 중 506명이 생존하지 못했으며, 1997년에는 변호사가 50명에 불과했다.[114] 이러한 인력 부족과 시스템 붕괴로 인해 재판은 극도로 더디게 진행되었다. 1996년부터 2000년 말까지 처리된 사건은 3,343건에 불과했으며,[115] 당시 수감된 13만 명의 용의자[114] 전체를 재판하는 데 200년 이상 걸릴 것이라는 계산도 나왔다.[116]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르완다 애국 전선(RPF) 정부는 2001년 유기법 제40/2000호를 통과시켜 전통적인 공동체 기반 사법 제도인 가차차(Gacaca) 재판소를 도입했다.[122][117] 이는 기존 사법 시스템의 부담을 덜고 재판 속도를 높이기 위한 조치였다.[115] 가차차 시스템은 전통적으로 지역 사회 내 갈등 해결에 사용되었으나, 집단학살 범죄를 다루도록 조정되었다.[123] 가차차 재판소의 주요 목표는 제노사이드 기간 동안 발생한 일에 대한 진실 규명, 재판 과정 가속화, 국가 통합과 화해 증진, 그리고 르완다 국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117]

가차차 재판


가차차 재판 시스템은 여러 논란과 도전에 직면했다. 재판관(킨야르완다어로 '부정을 혐오하는 자들'이라는 뜻의 Inyangamugayo)은 대중 투표로 선출되었으나,[124] 법률 지식이나 복잡한 절차에 대한 훈련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124] 또한, 선출된 재판관 중 상당수가 제노사이드 가담 혐의로 사임하거나 기소되었으며(약 27%),[124][117] 피고인에게 변호인이 제공되지 않고 증인 보호가 미흡하다는 점, 일반 법원에 항소할 권리가 없다는 점 등 절차적 공정성에 대한 문제도 지적되었다.[124] 특히, 가차차 재판소가 RPF가 지배하는 정부의 영향을 받으며,[124] RPF 구성원이 저지른 것으로 알려진 후투족 민간인 학살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았다는 비판은 심각한 한계로 여겨진다.[124]

이러한 비판 속에서도 가차차 재판 시스템은 운영 기간 동안 약 196만 건의 사건을 재판하고 100만 명 이상을 심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126] 가차차 재판소는 2012년 6월 18일 공식적으로 활동을 종료했다.[125]

6. 5.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

르완다 국제 전범 재판소 건물


유엔은 르완다 집단학살 당시 제노사이드를 비롯한 심각한 국제법 위반 행위를 저지른 책임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ICTR)를 설립했다. 1994년 11월 8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결의 제955호를 통해 재판소 설치를 결정했고,[331] 1995년 2월 22일 결의 제977호에 따라 재판소 본부를 탄자니아아루샤에 두기로 했다.[332]

ICTR은 특별 국제 재판소로서[127], 주로 집단학살을 계획하고 지시한 정부 및 군 고위 관계자들을 재판 대상으로 삼았다. 반면, 하위 지도자들이나 일반 가담자들은 르완다 국내 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당초 르완다 정부는 자국 내에서 재판을 진행하기를 원했으나, 유엔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ICTR 설립을 추진했으며, 이 때문에 르완다 정부는 재판소 설치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재판소는 1996년 5월 30일부터 실제 운영에 들어갔으며, 첫 기소 대상은 인테라함웨 전국 위원회 제2부의장이었던 Georges Rutaganda|조르주 루타간다eng였다.[334] ICTR은 설립 초기 4년의 임기로 시작했으나[128], 재판 과정이 길어지면서 활동 기간이 연장되었다. 재판 지연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2003년에는 Hassan Bubacar Jallow|하산 부바카르 자로우eng가 수석 검찰관으로 임명되었고,[341][342][343] 2008년 말까지 1심 재판을, 2010년까지 모든 재판을 완료한다는 목표가 설정되었다.[128]

주요 판결로는 2008년 12월 18일, 집단학살의 핵심 인물로 지목된 전 국방성 관방장 Theoneste Bagosora|테오네스트 바고소라eng에게 제노사이드, 인도에 반하는 죄 등으로 무기 징역이 선고된 사례가 있다. 재판부는 바고소라가 아가트 위린지이마나 총리와 벨기에 평화유지군 10명의 살해에도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345]

과거 ICTR과 르완다 정부 사이에는 사형제 존치 문제를 두고 갈등이 있었으나, 2007년 르완다 정부가 사형제를 폐지하면서 이 문제는 해소되었다.[338] ICTR은 예정된 임무를 마치고 2015년 12월 31일에 공식적으로 폐쇄되었으며,[129] 남은 업무는 국제형사재판소 기구(MICT)로 이관되었다.

6. 6. 생존자

르완다 집단학살 생존자의 정확한 수는 파악하기 어려워, 15만 명에서 309,368명 사이의 다양한 추정치가 제시되고 있다.[49] 집단학살 생존자들을 대표하고 지원하기 위한 여러 단체가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적으로 생존자 기금, 이부카, 아베가 등이 있다.[139]

르완다 사회문제부가 2007년에 발표한 생존자 생활 환경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르완다 내 생존자들의 구체적인 상황은 다음과 같다.[140]

르완다 집단학살 생존자 현황 (2007년 기준)
분류생존자 수
매우 취약한 생존자120,080
집이 없는 사람39,685
아이가 이끄는 가구에서 생활하는 고아28,904
과부49,656
집단학살 중 장애를 입은 사람27,498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어린이 및 청소년15,438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하는 고등학교 졸업자8,000



생존자들은 집단학살 이후에도 여러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특히 집단학살 과정에서 자행된 대규모 강간 피해자들은 사회적 낙인과 고립, 원치 않는 임신 및 출산, 그리고 매독, 임질, HIV/AIDS와 같은 성병 감염 등 장기적인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252] 르완다 학살 문제 특별 보고관은 미성년자를 포함하여 25만 명에서 50만 명의 여성이 강간 피해를 입었으며, 이로 인해 2,000명에서 5,000명이 임신한 것으로 추정했다.[253]

또한, 많은 미성년자들이 참혹한 학살 현장을 목격하면서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게 되었다. 유니세프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아이 6명 중 5명이 유혈 사태를 목격했다고 한다.[184] 일부 청소년들은 학살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구금되기도 했으며[328], 이는 교육 기회의 박탈과 사회 복귀의 어려움으로 이어졌다. 가족들 역시 경제적 문제나 학살 가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경우도 있었다.[329]

집단학살로 인해 부상을 입어 신체 장애자가 된 생존자들도 다수 존재하지만, 이들을 위한 복지 정책은 아직 미흡한 실정이다. 일부 비정부기구(NGO)에서 의족 제작 지원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330]

7. 기념 및 추모

르완다 집단학살을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국내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1998년 3월, 미국클린턴 대통령은 르완다를 방문하여 키갈리 국제공항 활주로 연설을 통해 미국과 국제 사회가 집단학살을 막기 위해 충분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며 사과했다. 이는 "클린턴 대통령의 사과"(Clinton's apology)로 알려져 있다[319][320]. 이 사과가 이후 국제 분쟁 개입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는 평가도 있지만[321], 르완다 내에서는 국제 사회가 집단학살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여졌다[322].

2019년 3월에는 콩고 민주 공화국펠릭스 치세케디 대통령이 르완다를 방문하여 키갈리 집단학살 기념관 방명록에 서명하며 "이러한 공포의 부수적인 영향은 수백만 명의 생명을 잃은 제 나라도 피해가지 못했습니다."라고 기록했다.[150] 같은 해 4월 7일, 르완다 정부는 키갈리 집단학살 기념관에서 25주년을 맞아 100일간의 공식 애도 기간을 시작하는 행사를 열었다. 이 행사에는 차드, 콩고 공화국, 지부티, 니제르, 벨기에, 캐나다, 에티오피아 등 각국 정상 및 고위 관계자들과 아프리카 연합, 유럽 연합 대표단이 참석했다.[151]

르완다에서는 매년 국가 차원의 기념 프로그램인 콰이부카(Kwibuka, '기억하다'라는 뜻)가 열린다. 이 프로그램은 4월 7일부터 13일까지 이어지는 공식 애도 주간인 이큐나모(Icyunamo)로 시작되며, 이 기간에는 업무가 중단되고 전국 및 전 세계 르완다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 다양한 추모 행사가 열린다. 생존자들은 이 기회를 통해 자신들의 경험을 공유하고, 비극적인 사건들을 함께 기억하며 성찰한다.[152]

7. 1. 기념 시설

키갈리 학살 기념 센터


키갈리 학살 기념 센터 벽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냐마타 학살 기념관 입구


르완다에서는 1995년 이후 해외 원조를 받아 전국 각지에 제노사이드 기념 시설이 건립되었다. 르완다는 매년 4월 7일부터 1주일을 르완다 학살 추모 주간으로 지정하여, 전국 각지의 시설에서 추모식과 위령제를 열고 있다. 이를 통해 희생자를 애도하고, 학살을 기억하며 반성하고, 다시는 이러한 비극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346]. 추모 행사에는 아프리카 여러 국가의 정상들이 참석하기도 한다[347].

2004년에는 수도 키갈리에 이러한 기념 시설의 중심 역할을 하는 키갈리 학살 기념 센터(Kigali Genocide Memorial)가 개관했다. 이 센터는 약 2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박 시설을 갖춘 대규모 시설로 계획되었으며, 일부 시설은 2005년 시점에도 건설 중이었다[348][349][350]. 현재 르완다에는 7개의 중앙 기념 시설과 약 200개의 지역 기념 시설이 존재하며, 이들은 대부분 학살 당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던 장소에 세워졌다.

그러나 이러한 기념 시설들은 정치적인 목적성과 여러 모순점으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한다. 많은 기념 시설에서는 제노사이드 부인이나 경시를 막기 위해[351] 수백 구의 유해와 유골을 전시하고 있는데, 이는 대규모 폭력이 실제로 자행되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된다. 하지만 희생자의 유해를 공개하는 행위는 국내외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유해 전시는 "유해는 가능한 한 신속하고 눈에 띄지 않게 매장해야 한다"는 르완다의 전통적인 장례 방식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있으며, 기념 시설에 매장되는 희생자가 주로 투치족이고 후투족은 배제되어 차별받고 있다는 문제도 제기된다. 르완다 내전과 난민 생활 등으로 후투족 역시 많은 피해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고통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많은 후투족이 불만을 느끼고 있다. 또한, 현재 르완다 정부가 학살 기념관을 개발 협력 자금을 유치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반면, 국제 원조 기관들이 기념관 설립 및 유지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1994년 학살 당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국제 사회의 죄책감을 덜려는 측면도 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352].

집단 학살이 발생한 지 30년이 지난 2024년 시점에도 여전히 집단 매장지를 추적하고 발굴하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353]

7. 2. 세계 유산

냐마타 학살 기념관, 무람비 학살 기념관, 기소지의 키갈리 학살 기념관, 그리고 비세세로 학살 기념관 등 4곳은 2023년 제45회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학살의 기억의 장소: 냐마타, 무람비, 기소지, 비세세로"(영어: Memorial sites of the Genocide: Nyamata, Murambi, Gisozi and Bisesero영어, 프랑스어: Sites mémoriaux du génocide : Nyamata, Murambi, Gisozi et Bisesero프랑스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369]. 등재 면적은 24.65ha이며, 완충지대는 136.16ha이다. 등재 기준 (6)이 적용되었다.

8. 미디어와 대중문화

르완다 대통령 폴 카가메는 영화 ''유리로 만든 지구'' 시사회에서 왼쪽부터 제나 드완, 감독 데보라 스크랜튼, 다큐멘터리 대상인 장 피에르 사가후투, 제작자 레이드 캐롤린 및 총괄 제작자 채닝 테이텀과 함께 서 있다.


자신이 근무하는 호텔에 피난민을 숨겨 목숨을 구한 폴 루세사바기나


오텔 드 밀 콜린의 정문


르완다 집단학살은 여러 책, 영화, 다큐멘터리 등 미디어와 대중문화 작품을 통해 다루어져 왔다.

캐나다의 중장 로미오 달레어는 책 ''악마와 악수: 르완다에서의 인류 실패'' (Shake Hands with the Devil: The Failure of Humanity in Rwandaeng, 2003)를 공동 집필하여 집단 학살의 가장 잘 알려진 목격자 중 한 명이 되었으며, 이 책에서 우울증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은 경험을 묘사했다.[141][355] 이 책은 2007년 영화 ''악마와 악수''로 제작되었고,[142]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 ''악마와 악수하기: 로메오 달레어의 여정'' (Shake Hands With the Devil: The Journey of Roméo Dallaireeng)은 선댄스 영화제 국제 다큐멘터리 부문 관객상을 수상했다.

영화 ''호텔 르완다''(2004)는 집단 학살 동안 키갈리의 오텔 드 밀 콜린에서 1천 명 이상의 피난민을 보호한 호텔리어 폴 루세사바기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146][356] 이 영화는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아카데미상골든 글로브상 후보에 올랐고,[356] 미국 영화 연구소(AFI)가 선정한 AFI 선정 100대 감동적인 영화 90위에 선정되었다. 2006년에는 루세사바기나의 자서전 ''An Ordinary Man'' (한국어판 제목 『호텔 르완다의 남자』)가 출간되었다.

르완다 전문가이자 1994년 르완다 집단학살을 제노사이드로 규정한 초기 인물 중 한 명인 앨리슨 데 포르제스(Alison Des Forgeseng)는 1999년 보고서 ''Leave None to Tell the Story: Genocide in Rwanda''를 출판했다.[354] 국경 없는 의사회 대표자 중 한 명으로 르완다 집단학살을 겪은 제임스 올빈스키(James Orbinskieng)는 ''An Imperfect Offering: Humanitarian Action in the Twenty-first Century''를 집필했다. 2006년에는 집단학살 생존자인 이마큘리 일리바기자(Immaculée Ilibagizaeng)가 자신의 경험을 담은 수기 ''Left to Tell: Discovering God Amidst the Rwandan Holocaust'' (한국어판 제목 『살아남아서』)를 출간했다.

집단 학살의 개인적, 정치적 비용을 다룬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유리로 만든 지구'' (Earth Made of Glasseng, 2010)는 르완다 대통령 폴 카가메와 집단 학살 생존자 장 피에르 사가후투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2010년 트라이베카 영화제에서 초연되었다.[147] 이 작품은 당시 정부가 집단학살을 치밀하게 준비했고 프랑스가 이를 지원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전직 언론인이자 유엔 주재 미국 대사를 역임한 사만다 파워는 역사 속 여러 집단 학살과 국제법 문제를 다룬 에디트 벨즈버그 감독의 다큐멘터리 ''하늘의 감시자들''(2014)에서 르완다 집단 학살에 대해 인터뷰했다.[143][144][145]

HBO Films는 2005년에 텔레비전 영화이자 역사 드라마 영화인 ''4월의 어느 날'' (Sometimes in Aprileng)을 개봉했다. 다른 관련 영화로는 ''100일 (2001년 영화)'' (100 Dayseng, 2001), ''사랑의 외침 ~운명의 100일~'' (A Sunday in Kigalieng), ''르완다 유혈의 4월'' (Sometimes in Aprileng) 등이 있으며, 다큐멘터리 ''기억의 수호자들'' (Keepers of Memoryeng)도 제작되었다.

펑크 록 밴드 랜시드는 2000년 앨범 ''Rancid (2000년 음반)''에 르완다 집단학살을 소재로 한 곡 ''Rwanda''를 수록했다. 벨기에-르완다 출신 가수 스트로마에의 아버지 피에르 루타레는 투치족으로, 1994년 르완다 집단 학살 당시 살해되었다.

이러한 미디어 작품들은 르완다 집단학살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앨리슨 데 포르제스(Alison Des Forgeseng)는 2005년, 관련 영화들이 "50만 명 이상의 투치족 목숨을 앗아간 공포에 대한 광범위한 인식을 크게 증가시켰다"고 평가했다.[148][206] 2007년, 미디어 싱크탱크 POLIS의 책임자인 찰리 베켓(Charlie Becketteng)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화 ''호텔 르완다''를 보았는가?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재 르완다와 관련을 맺는 방식이다"라고 언급하며 영화의 파급력을 지적했다.[149][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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