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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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분청사기는 15세기 조선 시대에 고려청자의 기법을 계승하여 발전한 한국 전통 도자기의 한 유형이다. 고려청자와 달리 자연스럽고 소박하며 실용적인 디자인이 특징이며, 백토를 바르고 조각, 찍기, 필획 등의 기법으로 장식했다. 100년 넘게 유행했으며, 전성기에는 일본 다도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16세기 백자의 등장과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쇠퇴했지만, 한국인의 심성과 미의식을 담아낸 가장 한국적인 도자기라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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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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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개요 | |
종류 | 한국 전통 도자기 |
특징 | 회청색 바탕에 백토로 분장 다양한 장식 기법 사용 (상감, 박지, 인화, 철화, 귀얄) |
시대 | 고려 말 ~ 조선 초기 |
명칭 | |
다른 이름 |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 분장자기(粉粧磁器) 회청사기(灰靑沙器) 덤벙이 |
역사 | |
발생 시기 | 14세기 후반 고려 말 |
발전 시기 | 15세기 조선 초기 |
쇠퇴 시기 | 16세기 |
영향 | 조선 백자 발달에 영향 |
제작 기법 | |
분장 기법 | 덤벙분장(백토 물에 담갔다 꺼내는 방법) 귀얄분장(귀얄로 백토를 펴 바르는 방법) |
장식 기법 | 상감(象嵌): 문양을 파내고 백토를 넣어 장식 박지(剝地): 바탕을 긁어내고 무늬를 남기는 기법 인화(印花): 도장으로 무늬를 찍어 장식 철화(鐵畵): 철사로 그림을 그려 넣는 기법 음각(陰刻): 선으로 무늬를 새겨 넣는 기법 |
특징 및 종류 | |
색상 | 회색 바탕에 흰색 분장 |
문양 | 추상적인 문양 자연을 소재로 한 문양 |
형태 | 매병, 항아리, 접시, 제기 등 다양 |
종류 | 상감분청사기 인화분청사기 박지분청사기 철화분청사기 귀얄분청사기 덤벙분청사기 |
주요 유적지 | |
가마터 | 전라북도 고창 용산리 전라남도 해남 진산리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일대 충청남도 공주 학봉리 |
문화재 | |
국보 | 분청사기 상감 연화문 매병 (국보 제259호) 분청사기 박지 모란문 자라병 (국보 제178호) |
보물 | 분청사기 상감 모란당초문 항아리 (보물 제786호) 분청사기 상감 연화문 장고 (보물 제1067호) |
참고 문헌 | |
서적 | "한국 도자사" 강경숙 저 "분청사기 연구" 윤용이 저 |
외부 링크 | |
관련 링크 | 국립중앙박물관 분청사기 국립박물관 분청사기 특별전 |
2. 역사
분청사기는 조선 시대에 고려청자의 기법과 소재가 발전하면서 만들어진 한국 전통 도자기의 한 유형이다.[6] 고려청자와는 달리, 분청사기는 자연스럽고 소박하며 실용적인 디자인을 특징으로 한다.[3] 분청사기 양식은 15세기부터 약 100여 년간 유행하였으며, 전성기에는 일본 다도(茶道) 종사자들에 의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6]
1930년경 미술사학자 고유섭이 "분장회청사기"라는 명칭을 제창하였고, 이를 줄인 "분청사기"라는 명칭이 자리 잡았다. 이 기물이 제작되던 당시에는 "자기"라고 불렸다.[8]
일본에서는 고려청자의 일종으로 귀하게 여겨졌으며, 제작 기법에 따라 "삼섬(三島)", "붓목(刷毛目)", "분인(粉引)" 등으로 불렸다. "삼섬"은 오늘날의 "인화문", "붓목"은 붓 자국이 남는 기법, "분인"은 "덤벙"에 해당한다.[9] 1370년대에는 고려청자를 생산하던 강진의 관요가 기능을 상실하고 도공들이 각지로 흩어지면서, 청자의 형태, 유약 색깔, 문양에 변화가 생겼다. 분청사기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탄생한 것이다.[11]
분청사기는 20세기에 들어 한국에서 부활하였고, 버나드 리치, 하마다 쇼지 등을 통해 유럽과 미국에 전파되었다.[6] 오늘날에도 일본과 한국의 예술가들이 분청 기법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6] 국립중앙박물관과 서울의 리움, 삼성미술관에 많은 분청사기가 소장되어 있으며,[4] 강경숙은 분청사기를 가장 한국적인 도자기라고 평가했다.[16]
2. 1. 조선 초기 분청사기의 발전 (15세기)
분청사기는 조선 시대(15세기)에 고려청자 기법과 소재가 발전하면서 만들어진 한국 전통 도자기의 한 유형이다.[6] 고려청자의 상감 기법에서 발전하여 빠르게 독자적인 특징을 갖추었다.[1] 고려청자의 정교하고 우아한 아름다움과는 달리, 분청은 자연스럽고 소박하며 실용적인 디자인을 특징으로 한다.[3] 밝은 청록색과 조형 후 백토(slip)를 바르고 조각, 찍기, 필획 등의 기법으로 장식하는 것이 특징이다.[5][6]국립중앙박물관에는 “공안부” 명문이 새겨진 분청사기 인화국문(印花菊文) 발이 있는데, 공안부는 정종 시대인 1400년부터 1420년 사이에 설치되었던 임시 관청이므로, 이 발의 제작 시기도 그 기간으로 한정되며, 초기 분청사기의 정확한 시대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12]
조선왕조 역대의 『실록』 중 세종실록에는 “지리지”가 포함되어 있으며, 당시(15세기 전반) 국내의 토산물과 진상품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는 당시 국내에 있던 324곳의 가마터(“도기소” 185곳과 “자기소” 139곳)가 기록되어 있다. “도기소”에서는 발효식품의 저장 등에 사용하는 토기와 항아리(옹기), “자기소”에서는 백자와 분청사기를 구웠으며, 이러한 가마들은 한반도 각지에 산재해 있었다.[13]
2. 2. 분청사기의 쇠퇴와 백자의 부상 (16세기)
16세기 이후 조선 백자의 인기에 힘입어 한국에서는 분청사기가 거의 사라졌다.[4] 1469년, 경기도 광주(廣州)의 관요에서 백자를 제작하는 것이 법제화되었다. 그전까지 왕실에서는 각지에서 자기를 납품받았으나, 이때 이후로는 왕실에서 사용하는 자기는 관요에서 직접 제작하게 되었고, 왕조의 통치 이념인 유교 정신에 부합하는 순백의 백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분청사기의 제작은 쇠퇴해 가서 16세기 전반에는 자취를 감추었다.[14][15]임진왜란은 조선 시대 한국의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고, 도자기 산업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5] 수많은 한국 도공들이 살해당하거나 납치되어 일본인들에게 자기 제작 기술을 가르쳤고, 이는 한국 전통 도자기의 단순화와 쇠퇴를 초래했다.[5] 한국에서 분청사기 생산이 감소하고 자기가 대체되었지만, 분청에서 유래한 미적 요소를 지닌 도자기는 일본에서 계속 생산되었으며, 미시마(Mishima) 도자기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는 자기와 동시에 존재하였다. 일본에서는 이 두 가지가 서로 대체되지 않는 별개의 표현 형식으로 여겨졌다.[6]
3. 특징
분청사기는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와는 다른 미학과 정서를 보여준다. 청자의 우아함이나 백자의 단순함과는 구별되는 독창적인 한국적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5] 한국 도자기는 주된 안료를 하나만 사용하고, 중국이나 일본보다 미묘한 표현을 선호했다. 분청사기의 소재와 구성은 기발하고 서정적이며, 자유분방한 장식은 현대 추상 작품을 연상시킨다.[5] 모란, 국화, 연꽃, 동물 등은 중요한 디자인 요소이자 유교 등 신앙 체계와 관련된 상징이었다.[6]
명나라의 공물 요구로 금속이 부족해지자, 금속 그릇을 대체하기 위해 점토로 제작되었으며, 원래 금속 그릇의 형태와 미학을 모방했다. 표면 장식은 고려 시대의 섬세하고 정교한 장식에서 지역 고객 중심으로 변화하면서 자유롭고 추상적인 스타일로 바뀌었다.[6]
3. 1. 다양한 장식 기법
분청사기는 어두운 철분 함유 점토 위에 흰 분장토를 바르고 투명 유약을 씌운 것이 특징이다. 분장토 위에 장식과 안료를 바르거나, 분장토를 파내어 그 아래의 어두운 점토를 드러내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장식할 수 있다.[5]분청사기는 조각과 압인을 장식 요소로 사용했고, 분장토 박힌 기법, 긁어내기 기법, 필선, 철화, 그리고 후대에는 흰 분장토를 덧칠하고 뿌리는 기법을 사용했다.[6] 지역에 따른 스타일과 기법의 차이가 빠르게 발전했다.[5]
분청사기에는 귀얄, 인화, 박지, 상감, 철화, 담금의 여섯 가지 주요 기법이 있다.
기법 | 설명 | 이미지 |
---|---|---|
귀얄 기법 | 솔로 흰 분장토를 발라 솔 자국이 남는 기법 | ![]() |
인화 기법 | 스탬프를 이용해 미세한 문양을 찍고, 움푹 들어간 부분에 상감하는 기법 | ![]() |
박지 기법 | 분장토를 바른 후 부분적으로 긁어내어 태토를 드러내 문양을 표현하는 기법 | ![]() |
상감 기법 | 그릇 표면을 파내어 다른 색 흙을 끼워 넣는 기법 | ![]() |
철화 기법 | 철안료로 문양을 그리는 기법 | ![]() |
담금 기법 | 액체 상태의 흰 분장토에 그릇을 담그는 기법 |
분청사기의 세부 문양 표현 기법은 다음과 같다.[10]
- 분청사기 상감: 고려 청자의 상감 청자와 같은 기법이다.
- 분청사기 인화: 스탬프를 이용하여 미세한 문양을 찍는 기법이다.
- 분청사기 조화: 선각으로 문양을 표현한다.
- 분청사기 박지: 분장토를 긁어내어 태토를 드러낸다.
- 분청사기 철화: 철안료로 문양을 그린다.
- 분청사기 솔문: 솔로 흰 분장토를 발라 솔 자국을 남긴다.
- 분청사기 분장: 액체 상태의 흰 분장토에 그릇을 담근다.
3. 2. 자연스럽고 소박한 미감
분청사기는 어두운 철분 함유 점토 위에 흰 분장토를 바르고 투명 유약을 씌우는 것이 특징이다. 분장토 위에 장식과 안료를 바르거나, 분장토를 파내어 그 아래의 어두운 점토를 드러내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장식을 할 수 있다.분청사기는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와 같은 다른 형태의 한국 도자기와는 미학과 근저에 깔린 정서 측면에서 여러 가지 차이를 보인다. 그 독특한 아름다움은 청자의 우아함이나 백자의 단순함과는 쉽게 구별되며, 독창적인 한국적 스타일로 자리매김한다.[5] 한국 도자기는 일반적으로 주된 안료를 하나만 사용했고, 중국이나 일본보다 더 미묘한 표현을 선호했다. 분청사기의 소재와 구성은 더 기발하고 서정적이며, 자유분방한 장식 모티브를 가진 현대 추상 작품을 연상시킨다.[5] 이러한 모티브는 원래 고려 시대 청자에서 유래되었지만, 15세기와 16세기를 거치면서 분청사기가 발전함에 따라 극적으로 변화했다. 모란, 국화, 연꽃과 같은 꽃과 실제 동물과 상상 속 동물 모두 분청사기의 중요한 디자인 요소이자 모티브였으며, 유교와 같은 신앙 체계와 관련된 중요한 상징이었다.[6]
분청사기는 조각과 압인을 장식 요소로 사용했고, 분장토 박힌 기법, 긁어내기 기법, 필선, 철화, 그리고 후대에는 흰 분장토를 덧칠하고 뿌리는 기법을 사용했다.[6] 인화(인화문), 철화(철화문), 조화(조화문)와 같이 디자인을 표면에 찍어내고 흰 분장토로 덮는 기법, 흰 분장토로 덮은 조각에 갈색 안료를 사용하여 디자인을 하는 기법, 흰 분장토로 덮은 조각에 디자인을 새기는 긁어내기 기법 등 지역에 따른 스타일과 기법의 차이가 빠르게 발전했다.[5] 스타일에 따라 주변 문화의 변화를 반영했다. 명나라 중국의 공물 요구로 금, 은, 청동과 같은 금속이 부족해지자, 이러한 금속으로 만들어졌던 의식용 그릇을 점토로 대신 제작하여 원래 금속 그릇의 형태와 미학을 모방했다. 표면 장식의 특징은 고려 시대의 특징이었던 더 섬세하고 정교한 장식에서 정부가 아닌 지역 고객으로 후원이 바뀌면서 더욱 자유롭고 추상적인 스타일로 변화했다. 이는 더 활기차고 비공식적이며 실험적인 것이었다.[6]
4. 일본으로의 전래와 영향
분청 양식은 한국에서 100년 조금 넘게 유행하였다. 전성기에는 일본 다도(茶道) 종사자들에 의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6] 1590년대 임진왜란은 조선 시대 한국의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고, 도자기 산업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5] 수많은 한국 도공들이 살해당하거나 납치되어 일본인들에게 자기 제작 기술을 가르쳤고, 이는 한국 전통 도자기의 단순화와 쇠퇴를 초래했다.[5] 16세기 이후 조선 백자의 인기에 힘입어 한국에서는 거의 사라졌다.[4] 한국에서 분청사기 생산이 감소하고 백자로 대체되었지만, 분청에서 유래한 미적 요소를 지닌 도자기는 일본에서 계속 생산되었으며 미시마(Mishima) 도자기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백자와 동시에 존재하였으며, 일본에서는 이 두 가지가 서로 대체되지 않는 별개의 표현 형식으로 여겨졌다.[6]
5. 현대적 의의
분청사기는 고려청자의 상감 기법에서 발전하여 빠르게 독자적인 특징을 갖추었다.[1] 고려청자의 정교하고 우아한 아름다움과는 달리, 분청은 자연스럽고 소박하며 실용적인 디자인을 특징으로 한다.[3]
분청 양식은 한국에서 100년 조금 넘게 유행하였고, 전성기에는 일본 다도 종사자들에 의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6] 1590년대의 임진왜란은 조선 시대 한국의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고, 도자기 산업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5] 수많은 한국 도공들이 살해당하거나 납치되어 일본인들에게 자기 제작 기술을 가르쳤고, 이는 한국 전통 도자기의 단순화와 쇠퇴를 초래했다.[5] 16세기 이후 조선 백자의 인기에 힘입어 한국에서는 거의 사라졌다.[4] 한국에서 분청사기 생산이 감소하고 자기가 대체되었지만, 분청에서 유래한 미적 요소를 지닌 도자기는 일본에서 계속 생산되었으며, 미시마 도자기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는 자기와 동시에 존재하였다.[6]
분청 양식은 일본에서는 다도 용기로 계속 사용되었지만, 한국에서는 20세기에 들어서야 부활하였다. 또한 20세기에는 버나드 리치, 하마다 쇼지 등 아시아 도자기 전통에 정통한 예술가들을 통해 분청의 미적 요소가 유럽과 미국에 전파되었다.[6] 분청은 오늘날에도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으며, 일본과 한국의 예술가들이 분청 기법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6]
국립중앙박물관과 서울의 리움, 삼성미술관에 많은 분청사기가 소장되어 있다.[4]
참조
[1]
서적
Korean Ceramics: The Beauty of Natural Forms
https://books.google[...]
Seoul Selection
2017-03-29
[2]
웹사이트
punch'ong pottery Korean art
https://www.britanni[...]
2017-03-30
[3]
서적
Korean Ceramics: The Beauty of Natural Forms
https://books.google[...]
Seoul Selection
2017-03-29
[4]
웹사이트
Joseon Buncheong Ware: Between Celadon and Porcelain Essay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Heilbrunn Timeline of Art History
https://www.metmuseu[...]
2024-10-23
[5]
웹사이트
Koreana Summer 2005 (English) by The Korea Foundation - Issuu
https://issuu.com/th[...]
2024-10-23
[6]
웹사이트
January 2012
https://ceramicartsn[...]
2024-10-23
[7]
서적
2010
[8]
서적
2010
[9]
서적
2010
[10]
서적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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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2010
[12]
서적
2010
[13]
서적
2010
[14]
서적
2010
[15]
서적
2006
[16]
서적
2010
[17]
간행물
고려 陶磁와 李朝 陶磁
조선일보사
1941
[18]
기타
[19]
간행물
조선 15세기 중국 북방 자기 문화의 유입과 분청사기에 미친 영향
한국미술사학회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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