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사의 사자상
1. 개요
빈사의 사자상은 1792년 프랑스 혁명 당시 튈르리 궁전 방어를 위해 싸우다 사망한 스위스 용병 근위대를 기리는 기념물이다. 스위스 루체른에 위치하며, 덴마크 조각가 베르텔 토르발센이 설계하고, 1820년부터 1821년까지 조각가 루카스 아호른이 제작했다. 이 기념비는 창에 찔린 채 죽어가는 사자 조각상으로, 프랑스 왕실의 문장과 스위스 문장을 함께 표현하고 있다. 건립 당시 정치적 논란이 있었으며, 마크 트웨인 등 여러 작가들의 작품에 등장하며 문화적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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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조각품 -
종교개혁기념비
종교개혁기념비는 2019년 7월 15일 성소수자 단체의 기물 파손 공격으로 벽이 훼손되고 동상에 페인트가 뿌려지는 피해를 입었다. -
루체른주의 국가중요문화재 -
메겐호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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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체른주의 국가중요문화재 -
슈프로이어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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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 -
베히스툰 비문
다리우스 1세가 자신의 혈통, 통치, 반란 진압을 기록한 베히스툰 비문은 고대 페르시아어, 엘람어, 바빌로니아어로 작성되어 고대 페르시아 설형 문자를 해독하고 아케메네스 제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며, 2006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부조 -
진실의 입
진실의 입은 로마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 입구 벽면에 있는 둥근 얼굴 모양의 석판으로, 고대 로마 시대 하수도 덮개 또는 강의 신 조각상으로 추정되며, 중세 시대에는 진실을 시험하는 신탁으로 여겨졌고, 영화 《로마의 휴일》로 유명해져 진실과 정의를 상징하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2. 배경
17세기 초부터 스위스 근위대 연대는 프랑스 왕실의 중요한 구성원이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루이 16세와 왕실 가족은 파리의 튈르리 궁전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1791년 6월, 루이 16세는 왕당파 군대가 집결한 국경 근처 몽메디로 도주를 시도하기도 했다(바렌으로의 도주).
1792년 8월 10일, 혁명군이 튈르리 궁을 습격하면서 스위스 근위대와 전투가 벌어졌다.( 8월 10일 사건) 스위스 근위대는 수적으로 열세였고, 탄약도 부족한 상황에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많은 희생자를 내고 패배했다. 전투 중, 그리고 항복 후 학살당한 스위스 근위대원은 760명에 달하며, 추가로 200여 명이 감옥에서 사망하거나 9월 학살로 희생되었다. 튈르리 궁에서 탈출한 약 100명을 제외하면, 연대의 유일한 생존자는 노르망디로 곡물 수송대를 호위하기 위해 파견된 300명뿐이었다. 당시 지휘관이었던 카를 요제프 폰 바흐만 소령은 재판 후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지만, 살아남은 두 명의 스위스 장교는 훗날 나폴레옹 휘하에서 고위 장교가 되었다.
이후 생존한 스위스 근위대원 중 일부는 프랑스 혁명군에 합류했고, 일부는 방데 전쟁에서 반혁명군으로 가담했다. 1817년 스위스 연방 의회는 생존자 389명에게 "충성과 명예"(Treue und Ehre) 훈장을 수여했다.
2.1. 8월 10일 사건
1792년 8월 10일, 프랑스 혁명 중 파리 시민혁명군이 튈르리 궁전을 습격했다. 루이 16세와 왕실 가족은 입법 의회로 피신했으나, 이 과정에서 튈르리 궁전을 지키던 스위스 근위대와 시민혁명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스위스 근위대는 탄약이 부족하고 수적으로도 열세였다. 전투 시작 30분 후, 루이 16세는 스위스 근위대에게 퇴각하여 병영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 명령은 이미 근위대가 더 이상 방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후에야 전달되었다.
튈르리 궁전을 지키던 760여 명의 스위스 근위대는 전투 중 사망하거나 항복 후 학살당했다. 살아남은 근위대원 중 약 200명은 감옥에서 부상으로 사망하거나 9월 학살 때 추가로 희생되었다. 튈르리 궁전에서 탈출한 약 100명을 제외하면, 연대의 유일한 생존자는 8월 10일 며칠 전 국왕의 허가를 받아 노르망디로 곡물 수송대를 호위하기 위해 파견된 300명의 병력이었다.
스위스 장교들은 대부분 학살되었지만, 당시 튈르리 궁전의 지휘관이었던 카를 요제프 폰 바흐만 소령은 9월에 정식 재판을 받고 근위대의 붉은 제복을 입은 채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그러나 생존한 두 명의 스위스 장교는 나폴레옹 시대에 고위직에 오르기도 했다.
반란에서 살아남은 프랑스 주둔 스위스 근위대와 해산된 11개 스위스 보병 연대 병사들 중 약 350명은 훗날 프랑스 공화국의 혁명군에 합류했고, 일부는 방데 전쟁에서 가톨릭 왕당파에 가담했다. 1817년 스위스 연방 의회는 생존자 389명에게 "충성심과 명예"를 뜻하는 기념 메달을 수여했다.
3. 기념비 건립
1792년 튈르리 궁전 습격 당시 전사한 스위스 근위대를 기리기 위해 기념비 건립이 추진되었다. 이 기념비 건립은 당시 루체른에서 휴가 중이던 스위스 근위대 장교 카를 파이퍼 폰 알티쇼펜이 주도했다. 그는 1818년부터 유럽 왕실의 지원을 받아 모금 활동을 시작했다. 베르텔 토르발센이 설계를 맡았고, 1820년부터 1821년까지 루체른 인근 채석장에서 석공 루카스 아호른이 조각했다.
기념비 조각 당시, 외국 군주를 위해 죽은 스위스 시민들을 위한 기념비라는 사실에 대한 불만과 스위스 자유주의자들의 항의도 있었다.
3.1. 디자인
이 기념물은 “스위스의 충성과 용맹”(Helvetiorum Fidei ac Virtuti)을 기리는 것이다. 절벽 안쪽 면에 새겨진 이 비석은 길이가 10m, 높이가 6m이다. 창에 찔려 죽어가는 사자는 프랑스 왕실의 플뢰르 드 리(백합)이 새겨진 방패를 덮고 있으며, 그 옆에는 스위스 문장이 새겨진 방패가 있다. 조각상 아래에는 장교들의 이름과 전사자(760명)와 생존자(350명)의 대략적인 숫자가 적혀 있다.
4. 정치적 논란
기념비는 건립 이전부터 구체제를 미화한다는 정치적 논란에 휩싸였다. 조각상은 국가적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며 칭송받았지만, 동시에 대중의 비판도 받았다. 외국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스위스 시민들을 기리는 기념비 건립에 대한 불만도 제기되었다. 스위스 자유주의자들은 스위스를 사자로 의인화한 것이 보수적이고 반혁명적인 사고방식을 미화한다고 느꼈으며, 심지어 사자의 발 중 하나를 잘라 항의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