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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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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단두대는 사형 집행 도구로, 1792년 프랑스 혁명 시기에 처음 사용되었다. 계급에 상관없이 모든 사형수에게 적용할 수 있는 인도적인 처형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개발되었으며, 2개의 기둥 사이에 비스듬한 칼날을 매달아 죄수의 목을 자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프랑스에서는 1981년 사형제 폐지 시까지 사용되었으며, 나치 독일, 베트남 등 여러 국가에서도 사용되었다. 단두대는 초기 모델이 존재했으며, 프랑스 혁명 이후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단두대가 고통을 최소화하는지에 대한 논란과, 처형 후 의식 잔존 가능성에 대한 논쟁이 있었으며, 대중문화에서도 공포, 공정, 죽음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스포츠 경기에서 패배하면 탈락하는 경기를 비유적으로 '단두대 매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역사

프랑스 혁명 시기인 1791년, 국민의회는 계급에 상관없이 모든 사형수에게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처형 방법을 찾았다. 이전의 도끼을 이용한 참수형은 사형 집행인의 숙련도에 따라 결과가 달라져 사형수에게 큰 고통을 줄 수 있었고, 교수형은 인도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받았다. 1788년에는 바퀴형 공개 처형 현장에서 민중이 사형수를 돕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잔혹한 형벌 대신 고통을 줄이는 처형법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11]

이에 조제프이냐스 기요탱 박사를 비롯한 위원회가 구성되어 이탈리아의 “만나이아”, 스코틀랜드의 “메이든”, “핼리팩스 지빗” 등의 참수 기구에서 영향을 받아 새로운 처형 기구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기요탱은 이 기구를 통해 사형수들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실제 단두대 설계는 앙투안 루이 박사가 주도했으며, 초기에는 '루이종' 또는 '루이세트'로 불렸으나, 언론에 의해 기요탱 박사의 이름을 따서 '단두대'로 불리게 되었다.[11] 기요탱 박사는 이 명칭에 항의했지만, 결국 이름은 바뀌지 않았고 그의 가족은 성을 바꾸어야 했다.

단두대는 길게 세워진 두 기둥 사이에 비스듬한 무쇠 칼날이 밧줄로 매달린 구조였다. 사형수의 목을 칼날 바로 밑에 고정하고 밧줄을 끊으면 칼날이 떨어져 목을 자르는 방식이었다.[12]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 조르주 당통, 로베스피에르 등 프랑스 혁명의 주요 인물들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프랑스에서 단두대는 1977년 9월 10일까지 사용되었으며, 1981년 사형제가 폐지되면서 사용이 중단되었다.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은 단두대를 이용해 반대파를 학살했으며,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 정권도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단두대를 사용했다. 그 외에도 벨기에, 스웨덴, 룩셈부르크 등에서도 단두대를 사용한 바 있다.

단두대 사용 및 폐지 국가:

국가내용
프랑스사형제 폐지까지 사용
독일사형제 폐지까지 사용
스웨덴1회만 사용
벨기에사형제 폐지까지 사용
스위스사형제 폐지까지 사용
베트남1975년까지 베트남 공화국에서 사용


2. 1. 초기 모델

사진
핼리팩스 기브](Halifax Gibbet)]의 복제품이 2008년 웨스트 요크셔 핼리팩스(Halifax, West Yorkshire)의 원래 부지에 설치되어 있다.
1564년에 도입되어 1716년까지 사용된 오리지널 메이든으로, 현재 스코틀랜드 국립 박물관(National Museum of Scotland) 에든버러(Edinburgh)에 전시되어 있다.


유럽에서 참수 기계의 사용은 1792년 프랑스 혁명 시기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 이 원리의 초기 사례는 121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프랑스의 ''성배의 고대 역사''에서 발견된다. 이 장치는 상상이지만, 그 기능은 명확하다.[6]

영국의 핼리팩스 기브](Halifax Gibbet)]는 높이가 4.5m인 두 개의 나무 기둥과 수평 빔으로 구성된 나무 구조물이었다. 칼날은 무게가 3.5kg인 도끼 머리였으며, 기둥의 홈을 따라 위아래로 미끄러지는 거대한 나무 블록의 바닥에 부착되었다. 이 장치는 높이 1.25m의 큰 사각형 플랫폼에 설치되었다. 핼리팩스 기브가 언제 처음 사용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2. 2. 프랑스 혁명과 단두대

프랑스 혁명 시기, 국민의회는 계급에 상관없이 모든 사형수에게 적용할 수 있는 인도적인 처형 방법을 모색했다. 조제프이냐스 기요탱 박사는 고통 없이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기구를 제안했지만, 실제 단두대 설계는 앙투안 루이 박사가 주도했다.[11] 초기에는 '루이종' 또는 '루이세트'로 불렸으나, 언론에 의해 기요탱 박사의 이름을 따서 '단두대'로 불리게 되었다.

단두대는 2개의 기둥 사이에 무거운 무쇠 칼날이 밧줄로 매달린 구조로, 사형수의 목을 칼날 밑에 고정하고 밧줄을 끊어 처형하는 방식이다.[12]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 조르주 당통, 로베스피에르 등 프랑스 혁명의 주요 인물들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18]

루이 16세의 처형


1793년 10월 16일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의 처형; 이 그림에서 막 처형된 사람은 조르주 쿠통이다. 로베스피에르는 부서진 턱에 손수건을 대고 사형수 호송 마차에 "10"으로 표시된 인물이다.


1789년 10월 10일, 조제프-이냐스 기요탱은 국민의회사형이 "단순한 기계 장치"를 통한 참수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제안했다.[13] 루이 16세는 바퀴형 벌거벗기형의 사용을 금지했고,[14] 1791년 국민의회는 사형의 목적이 불필요한 고통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끝내는 것이라는 생각과 일치하는 새로운 방법을 연구했다.[14]

앙투안 루이와 기요탱 등이 위원회를 구성하여, 스코틀랜드 메이든과 같은 참수 장치에 영향을 받아 단두대를 개발했다.[15] 스트라스부르 형사 법원의 관리인 라키앙트는 참수 기계를 설계했고,[16] 독일 엔지니어이자 쳄발로 제작자인 토비아스 슈미트가 시제품을 제작했다.[17] 샤를 앙리 상송의 회고록에 따르면, 루이 16세는 사선형 칼날을 사용할 것을 권고했다.[18]

단두대에 의한 첫 번째 처형은 1792년 4월 25일 니콜라 자크 펠르티에라는 강도에게 집행되었다.[19][20][21][22] 단두대는 혁명 이전의 잔혹한 방법에 비해 인도적인 처형 방법으로 여겨졌으며, 계급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처형 방법이라는 점에서 혁명적 이상을 상징했다.

조제프 기요탱 박사


프랑스에서는 기요틴이 채택되기 전에는 평민교수형이 적용되었고, 참수형은 귀족 계급에게만 집행되었다. 당시 참수에는 도끼이 사용되었지만, 사형 집행인의 숙련도에 따라 한 번에 참수하지 못하고 죄수의 목에 여러 번 칼질을 하는 등 잔혹한 광경이 펼쳐져 사형수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반면 숙련된 기술을 가진 사형 집행인을 고용할 수 있는 사형수는 부유한 자에 한정되었다. 1788년 혁명 전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바퀴형의 공개 처형 현장에서, 민중이 무죄를 외치는 사형수에 동조하여 그를 도망치게 하고 처형대를 파괴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사형 집행인의 직무에 대한 기피의 금기가 깨졌다. 이를 계기로 바퀴형은 폐지되었고, 잔혹한 형벌 대신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 처형법을 요구하는 흐름이 일어났다.

프랑스 혁명 발발 후, 내과 의사이자 제헌 의회 의원이었던 조제프 기요탱은 죄수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주지 않고, 신분이나 빈부에 관계없이 명예로운 참수형을 적용할 수 있는, '단순한 기계 장치의 작용'에 의한 '인도적인' 처형을 할 것을 의회에 제안했다. 기요탱의 제안은 처음에는 조롱을 받았지만, 그의 재차 제안과 설득으로 그 안이 채택되었고, 기요틴은 1792년 4월 25일 의회에서 정식으로 사형 도구로 인정되었다.

루이 16세의 처형


설계를 의뢰받은 사람은 외과 아카데미의 서기였던 외과 의사 앙투안 루이였다. 그는 스코틀랜드 처녀나 핼리팩스 단두대 등의 각 지역의 목 자르는 장치를 연구하여, 칼날을 초승달 모양으로 하고, 사형수의 목을 판자로 고정하는 등의 개량을 가한 단두대를 설계했다. 시제품 제작은 독일의 하프시코드 제작자 토비아스 슈미트가 했다. '단두대의 설계도를 본 루이 16세가, 칼날을 초승달 모양이 아닌 사선 형태로 하면 어떤 두께의 목이라도 절단할 수 있다고 제안하여 그에 따라 개량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슈미트가 고안했다는 설도 있다. 기요틴은 전체 높이가 약 5미터 정도였고, 목을 끼우는 곳은 지면에서 37cm 정도의 높이에 있었으며, 4미터 높이에서 40kg의 칼날이 자유 낙하함으로써 목을 절단하는 장치였다.

장치의 정식 명칭은 '보아 드 쥐스티스'(Bois de Justice프랑스어/ '정의의 기둥'이라는 뜻)였지만, 처음에는 앙투안 루이의 이름을 따서 ''''루이종''' (Louison프랑스어) 또는 '루이세트 (Louisette프랑스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러나 이 장치의 인도성과 평등성을 크게 선전한 기요탱이 유명해지면서, '기요틴' (Guillotine프랑스어)이라는 이름이 정착되었다. 기요탱 박사는 이 명칭에 항의했지만, 이후에도 고쳐지지 않아, 가족은 성을 바꾸었다.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다른 평민 사형수들과 마찬가지로 단두대에 의해 처형되었다. 또한 혁명의 지도자 조르주 당통, 공포 정치를 주도한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와 사형수를 기요틴에 계속 보낸 검사 푸키에-탱빌도 최후에는 기요틴으로 참수되었다.

1793년 6월 13일에 단두대를 각 현에 1대씩 배치하는 것이 정령으로 결정되었고, 당시 프랑스의 행정 구분에 따라 83대의 단두대가 슈미트에 1대당 812리브르로 발주되었다.

2. 3.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 혁명 이후, 처형은 시내 중심부에서 재개되었다. 1832년 2월 4일, 단두대는 생 자크 드 라 부셰리 교회 뒤로 옮겨졌고, 1851년 11월 29일 그랑드 로케트 감옥으로 옮겨졌다.[28] 1909년 8월 6일에는 라 산테 감옥 뒤, 아라고 대로와 산테 거리의 교차로에서 사용되었다.[28]

1939년 6월 17일, 오이겐 바이디만의 사형 집행이 마지막 공개 처형이었다. 이 처형은 도촬되어 영화관에서 공개되었다. 이에 문제를 느낀 법무성은 이후의 사형 집행을 비공개로 전환하게 된다.[29] 비시 정권 하에서는 레지스탕스 삐라를 배포했다는 이유만으로 단두대 처형을 받은 자가 있었다. 또한 낙태죄로 체포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1943년 처형된 Marie-Louise Giraud|마리루이즈 지로영어도 있었다.

단두대는 겉보기에는 잔혹한 이미지지만, 도입 경위 및 교수형과의 비교를 통해 유럽에서는 오히려 인도적인 사형 장치로 여겨졌다. 프랑스에서는 사형 제도 자체가 폐지된 1981년 9월까지 단두대가 현역으로 가동되었다.[4] 프랑스에서 마지막으로 단두대에 의해 처형된 것은 여성을 살해한 죄로 기소된 하미다 잔두비라는 튀니지인 노동자였으며, 1977년 9월 10일 프랑스 마지막 사형 집행인(무슈 드 파리)인 마르셀 슈발리에에 의해 형이 집행되었다. 이것이 프랑스에서 단두대가 공식적으로 사용된 마지막 사례이다.

2. 4. 다른 국가에서의 사용

독일에서는 ''Fallbeil''(떨어지는 도끼) 또는 ''Köpfmaschine''(참수 기계)라고 불렸으며, 19세기부터 여러 독일 국가에서 사용되었고, 나폴레옹 시대에는 많은 지역에서 선호되는 처형 방법이 되었다.[32] 초기 독일 단두대는 프랑스식 Berger 1872 모델과 유사했지만, 더 튼튼하고 효과적인 기계로 발전했다. 주로 나무 대신 금속으로 만들어졌고, 더 무거운 칼날을 사용하여 수직대를 짧게 만들었다. 또한, 칼날 회수 시스템과 기울어지는 판(바스큘) 제거로 여러 번의 처형을 빠르게 수행할 수 있었다. 저항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처형 전에 단두대를 보지 못하도록 커튼 뒤에서 접근하게 했고, 금속 스크린으로 칼날을 가렸다.

나치 독일은 1933년과 1945년 사이에 단두대를 사용하여 16,500명의 죄수를 처형했으며, 그 중 10,000명은 1944년과 1945년에 처형했다.[33][34] 마리누스 판 데르 뤼베(국회의사당 방화 범인으로 지목된 네덜란드 공산주의자), 백장미 단원 소피 숄, 한스 숄 등이 단두대로 처형된 대표적인 정치적 희생자들이다.[35]

서독에서는 1949년 리하르트 슈의 처형에서 마지막으로 사용되었고,[36] 동독에서는 1967년 9월 살인자 파울 바이라우와 귄터 헤르츠펠트가 처형될 때 마지막으로 사용되었다.[37] 슈타지는 1950년에서 1966년 사이에 동독에서 비밀 처형에 단두대를 사용했다.[38]

벨기에 앤트워프에서는 강도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프란시스 콜이 1856년 5월 8일 마지막으로 처형되었다. 1798년 3월 19일부터 1856년 3월 30일까지 앤트워프에서 19건의 참수형이 집행되었다.[39]

스위스에서는 1940년 살인자 한스 폴렌바이더를 처형하면서 옵발덴주에서 마지막으로 사용되었다.

스웨덴에서는 1866년에 참수형이 의무적인 처형 방식이 되었다. 1903년에 수동 참수형을 대체했으며, 1910년 스톡홀름 롱홀멘 감옥에서 살인자 알프레드 안데르를 처형하는 데 한 번 사용되었다. 안데르는 1921년 사형 제도가 폐지되기 전 스웨덴에서 처형된 마지막 사람이었다.[40][41]

남베트남에서는 응오딘지엠 정권이 1959년 10/59 법령을 제정하고, 이동식 특별 군사 법원을 통해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참수기를 사용하여 사형을 집행했다.[42] 호치민 시의 전쟁 증거 박물관에 당시 사용된 참수기 중 하나가 전시되어 있다.[43]

일본에서는 형법 제정 후 원칙적으로 교수형으로 제한되었지만, 1930년대부터 1945년까지 나치 독일의 영향을 받아 단두대 기반의 참수형 도입이 검토되었다.

다음은 단두대를 사용했거나 사용을 중단한 국가들을 정리한 표이다.

국가내용
프랑스사형제 폐지까지 사용
독일사형제 폐지까지 사용
스웨덴1회만 사용
벨기에사형제 폐지까지 사용
스위스사형제 폐지까지 사용
베트남1975년까지 베트남 공화국에서 사용


3. 구조 및 작동 원리

단두대는 2개의 긴 기둥 사이에 무거운 무쇠 칼날이 밧줄에 매달려 있는 형태이다. 사형수는 틀 아래쪽에 목을 칼날 바로 밑에 오도록 고정된다. 사형 집행인이 밧줄을 끊으면 칼날이 떨어져 목을 자르게 된다.[3]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 당통, 라부아지에, 로베스피에르 등 프랑스 혁명기의 주요 인물들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3]

1791년 6월 3일, 입법의회에서 사형 방법을 참수만으로 결정한 후, 샤를-앙리 상송은 법무대신에게 참수의 어려움을 담은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 의견서는 국회에 제출되었고, 앙투안 루이에게 참수 연구를 의뢰하면서 단두대 개발이 시작되었다.[6] 상송의 회고록에 따르면, 상송, 루이, 루이 16세 3명이 비공식 검토회를 열었고, 이 자리에서 루이 16세가 칼날을 직각삼각형 모양으로 비스듬하게 만들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6]

1792년 3월 17일, 루이는 국회에 보고서를 제출했고, 국회는 이를 채택했다. 쳄발로 제조업자 토비아스 슈미트에게 960리브르에 시제품 제작을 발주했다.[7] 당시 일반 시민의 평균 연봉은 400리브르 정도였다.[7] 슈미트 공방은 단두대 제조 독점권을 얻어 프랑스뿐만 아니라 독일 등 주변 국가에도 단두대를 수출했다.[7]

1872년에는 알퐁스 레옹 베르제가 단두대를 개량하여 두 대의 새로운 단두대를 제작했다. 이 단두대는 사형 폐지 때까지 사용되었다.[13] 개량점은 다음과 같다.[13]


  • 칼날 낙하 충격 완화: 세로 틀 하부에 스프링을 부착하여 충격을 완화했다. 나중에는 스프링 대신 원통형 고무를 부착했다.
  • 칼날 고정 장치 변경: 칼날을 부착한 추 상부에 족제비 모양 금속 돌기를 부착하고, 단두대 최상부에 부착된 개폐 장치에 끼워 넣는 방식으로 변경했다. 작은 레버(또는 버튼)로 개폐 장치를 열면 칼날이 낙하하는 구조였다.
  • 칼날 작동 기구 윤활화: 세로 틀 홈을 미끄러지는 추에 캐스터를 부착하여 부드럽게 낙하하고 레일 마모를 방지했다.
  • 집행 후 처리 신속화: 높은 대를 없애고 단두대를 땅 위에 놓인 두꺼운 판 위에 설치했다. 참수 후 사형수의 머리와 몸통을 넣을 수 있도록 아연과 오일 천으로 덮인 버드나무 바구니를 옆에 두었다.


독일에서는 프랑스 단두대를 바탕으로 개량형을 만들었다. 주요 개량점은 기둥을 금속제로 만들고, 사형수 구속을 위한 가동식 대를 설치한 것이다. 독일 단두대는 프랑스식보다 소형으로, 230cm 높이에서 칼날을 낙하시켜 낙하 높이가 160cm 정도였다.[14]

프랑스 혁명 당시 단두대는 조립 운반식이었다. 사용하지 않을 때는 사형 집행인의 집에 분해된 상태로 보관했고, 사형 집행 통보를 받으면 조수들이 지정된 장소로 운반해 조립했다. 사형 집행 후에는 다시 분해하여 보관했다.[15]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마차나 트럭 짐칸에 설치한 이동식 단두대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15]

4. 논란

기요탱이 죄수의 고통을 최소화한다고 주장한 단두대는 도입 초기부터 인도주의적 측면에서 논란이 있었다. 과거 사형 방법보다 고통이 덜하다는 데에는 대체로 동의했지만, '인도주의적'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사형수의 고통 여부가 쟁점이 되었다.[60] 또한, 단두대의 신속함이 오히려 죄수의 고통을 연장시킬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기요틴 처형은 두개골에 큰 충격을 주지 않아 교수형 등 다른 방법에 비해 죄수의 의식이 더 오래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60][61]

일부에서는 참수 후에도 의식이 남아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에 대한 과학적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4. 1. 인도주의적 논쟁

1905년 랑길의 처형 사진을 수정한 사진, 원본 사진 위에 전경 인물들이 덧칠되어 있다


단두대가 처음 사용된 이후로, 단두대가 길로틴이 희망했던 것처럼 빠르고 고통 없는 죽음을 제공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어왔다. 이전의 고통을 주기 위한 처형 방식에서는 그들이 가하는 고통의 정도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단두대는 특별히 더 인도적이기 위해 발명되었기 때문에, 사형수가 고통을 느끼는지 여부에 대한 문제가 철저히 검토되었고,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제로 남아있다. 단두대 처형의 특정 목격자 증언은 일화적으로 참수 후 순간적으로 의식이 남아있을 수 있음을 시사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과학적 합의는 없다.[1]

4. 2. 의식 잔존 가능성

단두대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부터, 이 사형도구가 죄수의 고통을 최소화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과거의 사형 방법과 비교하면 고통이 덜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적었으나, '인도주의적' 차원으로 논의할 경우 사형수의 고통 여부가 논쟁거리가 되었다. 게다가 단두대의 신속함이 죄수의 고통을 더 지속시킨다는 주장도 있었다. 기요틴 처형방법은 두개골에 충격을 별로 주지 않기 때문에, 교수형이나 다른 과격한 사형 방법과는 달리 죄수의 의식이 오랫동안 유지된다는 것이다.[60][61]

단두대 처형에 대해 대중들은 절단된 머리가 눈을 깜빡였다든지, 말을 했다든지, 눈동자를 움직였다든지, 입을 움직였다고 이야기해 왔다. 여러 국가의 해부학자들과 과학자들은 1956년 전까지 잘린 사람 머리에 대한 명료한 실험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불가피하게 결과물들은 이야깃거리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죄수의 이름을 부르니 대답했다든지, 바늘로 찌르자 고통을 느끼는 모습을 보였다는 등의 진술은 의식이 수반된 행위가 아닌, 근육이 무작위적으로 움직였거나 자동 반사 행동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대뇌 혈액이 대량으로 유출될 경우 수 초 내로 인간의 두뇌는 의식을 잃을 수 있다.[60][61]

1905년 6월 28일, 보히유 박사는 사형수 앙리 랑기유(Henri Languille|앙리 랑기유프랑스어)의 머리를 관찰하고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했다.[60][61]

> 이것이 내가 참수 이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죄수의 눈꺼풀과 입술은 5~6초간 불규칙적이며 리드미컬하게 수축했다. 이 현상은 목의 절단 후 관찰에 대한 같은 환경의 다른 연구 결과에서도 확인되었다...

>

> 나는 몇 초간 기다렸다. 경련이 멈췄다. [...] 나는 강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랑기유!" 나는 눈꺼풀이 경련 없이, 천천히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 기이한 현상에 대해 심사숙고하여 주장하려고 한다. 눈꺼풀은 분명히 차분하게, 정상적으로, 마치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는 듯이 움직였다.

>

> 다음으로 랑기유의 눈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으며 동공은 집중되었다. 그때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죽어가는 사람의 감정이 담기지 않은 흐릿하고 희미한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부정할 수 없이 살아있는 눈을 마주하고 있던 것이다. 몇 초 뒤, 눈꺼풀은 다시 닫혔다[...].

>

> 나는 다시 한번 그를 불렀고, 눈꺼풀은 다시 천천히 열렸다. 그 부정할 수 없이 살아있는 눈은 나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첫 번째보다도 더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리고 눈꺼풀은 다시 닫혔지만, 완전히 닫히지는 않았다.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그리고 멍한, 죽은 사람의 눈이 되었다.

이처럼 단두대가 사용될 동안 참수 이후 의식이 살아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계속해서 논란이 되어 왔다.

5. 문화적 영향

프랑스에서 단두대는 사용 기간 동안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으며, 그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52][53]

별명의미유래
라 몽테-아-르그레(La Monte-à-regret)후회의 등반[52][53]
르 라조르 나시오날(Le Rasoir National)국가의 면도칼[53]
르 바시스타 또는 라 루카르느(Le Vasistas or La Lucarne)채광창[53][54]
라 뵈브(La Veuve)과부[53]
르 물랭 아 실랑스(Le Moulin à Silence)침묵의 방앗간[53]
루이세트 또는 루이송(Louisette or Louison)앙투안 루이의 이름에서 유래[53]
마담 라 기요틴(Madame La Guillotine)[55]
미라벨(Mirabelle)미라보의 이름에서 유래[53]
라 베칸(La Bécane)기계[53]
르 마시코(Le Massicot)종이 트리머[54]
라 크라바트 아 카페(La Cravate à Capet)카페의 넥타이, 카페는 루이 16세[54]
라 라쿠르시스 르 파트리오티크(La Raccourcisseuse Patriotique)애국의 단축기[54]
라 드미-룬(La demi-lune)반달[54]
레 보아 드 쥐스티스(Les Bois de Justice)정의의 나무[54]
라 바스퀼 아 샤를로(La Bascule à Charlot)샤를로의 흔들의자[54]
르 프리 콩쿠르 데 자상(Le 콩쿠르 상 (Prix Goncourt) 살인자들을 위한)[54]



프랑스 혁명 발발 후, 조제프 기요탱은 제헌 의회에 단두대를 이용한 인도적인 처형을 제안했다. 처음에는 조롱을 받았지만, 그의 계속된 제안과 설득으로 1792년 4월 25일 의회에서 정식 사형 도구로 인정되었다.[53]

단두대의 정식 명칭은 '보아 드 쥐스티스'(Bois de Justice프랑스어/ '정의의 기둥'이라는 뜻)였지만, 처음에는 설계자 앙투안 루이의 이름을 따서 ''''루이종''' (Louison프랑스어)' 또는 '루이세트 (Louisette프랑스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러나 단두대의 인도성과 평등성을 선전한 조제프 기요탱이 유명해지면서, ''''기요틴''' (Guillotine프랑스어)이라는 이름이 정착되었다. 기요탱은 이 이름에 항의했지만, 고쳐지지 않아 가족은 성을 바꾸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포함하여, 조르주 당통,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푸키에-탱빌 등 혁명 지도자들도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5. 1. 대중문화

프랑스 혁명 시기부터 사용된 단두대는 여러 별명으로 불렸다.[53] 그 중에는 '국가의 면도칼',[53] '과부',[53] '침묵의 방앗간' 등이 있다.[53]

19세기 프랑스에서는 단두대에 의한 공개 처형이 오락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단두대 미니어처가 장난감으로 판매되어 아이들이 새나 쥐를 잡아 목을 자르는 놀이를 하기도 했다.[54] 괴테가 5살 아이를 위해 단두대 장난감을 사달라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낸 기록이 있지만, 괴테의 어머니는 이를 거절했다.

테이블 매직 중에는 '손가락 단두대'라는 마술 도구가 있다. 미니어처 단두대에 손가락과 담배를 넣고 칼날을 내리면 담배만 잘리는 마술이다.

TBS의 프로그램 『8시! 전원 집합』에서는 1981년 6월 27일 방송에서 이카리야 초스케가 단두대로 시무라 켄과 똑같이 생긴 인형의 목을 자르는 장면이 방송되어 항의 전화가 빗발치기도 했다.[57] 하지만, 어린이 대상 조사에서는 82%가 재미있었다고 답했다.[57]

단두대는 여러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문학 작품에 등장한다.

  • 영화
  • 무방비 도시(1945)
  • 빠삐용(1974)
  • 당통(1982)
  • 마리 앙투아네트의 목걸이(2001)
  • 나폴레옹(2023)
  • 드라마
  • 신・형사 콜롬보 / 더러워진 초능력(1989)
  • 다・카포하지 않겠습니까? 제6화 (2023)
  • 애니메이션
  • 기동전사 V 건담(1993) - 잔스칼 제국의 공포 정치 상징으로 묘사되었다.
  • 톰과 제리
  • 문학
  • 『반짝반짝 기요초(ピカピカのぎろちょん)』 (사노 미츠오(佐野美津男) 작, 나카무라 히로시(中村宏) 그림, 아카네 서방(あかね書房), 1968) - 어린이들이 만든 장난감 기요틴 '기요초'로 채소를 써는 내용이 나온다.

5. 2. 상징적 의미

프랑스 혁명 당시 단두대는 단순한 처형 도구를 넘어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지녔다. 혁명 이전 귀족에게만 허용되었던 참수형을 평민에게도 적용하고, 고통을 최소화한 '인도적인' 처형을 표방한 단두대는 평등과 인도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53] 하지만 공포 정치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단두대에서 처형되면서, 단두대는 공포와 억압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단두대는 여러 별명으로 불렸는데, '국가의 면도칼',[53] '과부',[53] '침묵의 방앗간',[53] '정의의 나무',[54] '애국의 단축기'[54] 등은 단두대의 위협적인 이미지를 드러낸다. 반면, 설계자 앙투안 루이의 이름을 딴 '루이세트'나 '루이종',[53] 미라보의 이름에서 유래한 '미라벨'[53] 같은 별명은 단두대에 대한 친근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단두대와 관련된 다양한 속설과 이야깃거리도 존재한다. 단두대 도입을 제안한 조제프 기요탱이 단두대로 처형되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그는 1814년에 자연사했다. 단두대 미니어처는 장난감으로 판매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으며, 괴테가 아들을 위해 단두대 장난감을 구해달라고 요청한 편지가 남아있을 정도다.

테이블 매직의 일종인 "손가락 단두대"는 단두대의 원리를 이용한 마술 도구이다. 또한, 일본 메이지 대학 박물관에는 단두대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어 단두대의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6. 단두대 매치

스포츠 경기에서 패하면 탈락하는 중요한 경기를 '''단두대 매치'''라고 부른다.[62] 주로 야구, 축구프로 스포츠 경기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FIFA 월드컵 등 국제대회에서 패하면 무조건 탈락하는 경기 또한 단두대 매치라고 하며, 플레이오프는 전부 단두대 매치에 해당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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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서적 だめだこりゃ いかりや長介自伝 新潮社
[59] 서적 開拓者の時代 ―70年代バラエティというフロンティア 青弓社
[60] 웹사이트 Report From 1905 http://www.guillotin[...]
[61] 서적 Clinical Journal https://books.google[...] Medical Publishing Company
[62] 뉴스 강등 탈출 단두대매치 '승점 6짜리 전쟁' 웃은 건 인천 http://www.sportsseo[...] 2018-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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