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라 요리사다
1. 개요
사가라 요리사다는 1749년 우림가의 와시노오 타카히로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1762년 히토요시번의 9대 번주 사가라 아키나가의 사망 후 극비리에 가독을 이어받았다. 요리사다는 사가라 가문과 인척 관계였으며, 조정에는 아키나가가 완쾌되어 요리사다로 개명했다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1765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를 알현하고 종5위하 오미노카미에 서임되었으나, 메이와 시대의 천재지변으로 번 재정에 어려움을 겪었다. 1767년 1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양자 사가라 토미모치가 가문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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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 | 에도 시대 중기 |
|---|---|
| 출생 | 간엔 2년 (1749년) |
| 사망 | 메이와 4년 1월 17일 (1767년 2월 15일) |
| 아명 | 이소마루 (五十丸) |
| 아명 | 사가라 나가지로 (相良長次郎) |
| 이름 | 요리사다 (頼完) |
| 시호 | 고가쿠인덴 에이간 료슌 (高嶽院殿英巌良俊) |
| 묘소 | 구마모토현 히토요시시 간세이지 (願成寺) |
| 관위 | 종5위하 도토미노카미 (遠江守) |
| 막부 | 에도 막부 |
| 주군 | 도쿠가와 이에하루 |
| 번 | 히고 히토요시번 번주 |
| 씨족 | 와시오가 → 사가라씨 |
| 아버지 | 와시오 타카히로 |
| 양아버지 | 사가라 요리히사 |
| 형제 | 와시오 타카타테 |
| 형제 | 요리사다 |
| 배우자 | (미상) |
| 양자 | 토미모치 |
| 특기 사항 | 사가라 미쓰나가의 사후에 대리로 번주가 되었지만, 공식적으로는 동일 인물로 여겨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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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9년 출생 -
알렉산드르 라디셰프
알렉산드르 라디셰프는 18세기 러시아 계몽주의 사상가이자 작가로, 농노제와 전제정치를 비판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까지의 여행』을 출판하여 사형 선고 후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으나, 귀환 후 잠시 법 개정에 참여하다 자살했으며, 그의 저서는 러시아 사회 개혁과 후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
1749년 출생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1749년 독일에서 태어난 시인, 소설가, 극작가, 과학자, 정치가로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 등의 작품을 남기고 자연과학 연구와 정무 활동을 하였으며, 독일 고전주의 문학 확립에 기여하였다. -
1767년 사망 -
찰스 타운젠드
18세기 영국 정치인이자 재무장관이었던 찰스 타운젠드는 미국 독립혁명의 계기가 된 타운젠드 법을 제정하고 해군卿 위원회 위원, 왕실 회계장관, 무역위원회 제1卿 등 다양한 직책을 수행했으며, 미국 식민지에 대한 과세 정책으로 식민지 반발을 야기했다. -
1767년 사망 -
계황후
청나라 건륭제의 황후인 계황후는 휘발나랍씨로, 황귀비에서 황후가 되었으나 강남 순행 중 머리를 자른 사건으로 폐위되어 시호도 받지 못했으며, 그녀의 성씨, 생년, 폐위 경위 등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
히토요시번주 -
사가라 나가쓰네 (1574년)
사가라 나가쓰네는 1574년에 태어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문을 계승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투항, 임진왜란에 참전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투항하여 히토요시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고, 에도 시대에 다양한 활동을 하다 1636년에 사망했다. -
히토요시번주 -
사가라 요리모토
에도 시대 히토요시 번의 15대 번주 사가라 요리모토는 군제 개혁 추진 중 번내 갈등을 겪었으나, 보신 전쟁에서 사쓰마 번과 협력, 폐번치현 후에는 히토요시현 현령을 지냈다.
2. 생애
사가라 요리사다는 번주 재임 시절 메이와 시기의 천재지변으로 번 재정이 어려움에 처했다. 메이와 4년(1767년) 1월 17일, 1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양자인 토미모치 (토오야마 토모아키라의 차남)가 가독을 이었다.
2.1. 출생과 가독 상속
간엔 2년 (1749년), 우림가 다이나곤 와시노오 타카히로(오이노미카도 츠네나리의 차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이소마루(五十丸)였으며, 한때 오사카 절에 맡겨져 있었지만, 사가라 가문의 양자 이야기가 제기되었을 무렵 우연히 와시노오가에 돌아와 있었다.
호레키 12년 (1762년) (원래) 9대 번주 사가라 미츠나가가 사망했다. 와시노오가와 사가라씨는 친척 관계였기 때문에, 그 후임으로 번주에 옹립되어 히토요시번 내에서 극비리에 호레키 12년 (1762년) 12월 15일에 가독을 이었다. 친척이라고는 하지만, 공가에서 후계자를 선택하게 된 데는 극비리에 일을 진행시킬 필요가 있었지만, 다른 다이묘 가문이나 하타모토의 자제는 무가 사회에서 얼굴이 알려져 있고, 또 노출되면 누가 해를 입을 수 있다는 사정과, 사가라 씨가 후지와라 남가의 흐름을 이어간다는 사정이 있었다. 이 양자 이야기도, 번주 일문인 사가라 오리베의 데릴사위라는 명목으로 후보자를 찾은 것이다.
10세에 사망한 미츠나가에게 말기양자를 들이는 것은 어려웠고(17세 이하에서는 사후 양자가 인정되지 않았다), 게다가 요리사다는 미츠나가보다 3살 연상이어서 막부에 인정받지 못하고 후계자 단절로 개역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를 두려워한 번의 중신들이 막부에는 미츠나가가 완쾌되어 요리사다로 개명했다고 설명했기 때문에, 미츠나가와 동일인으로 처리되었으므로, 공적 기록으로는 호레키 9년 (1759년) 12월 11일에 가독을 이은 것으로 되어 있다.
메이와 2년 (1765년) 2월 15일, 10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를 알현했다. 같은 해 12월 18일, 종5위하 오우미노카미에 서임되었다.
2.2. 번주 재임과 사망
호레키 12년(1762년) (원래) 9대 번주 사가라 미츠나가가 사망하자, 와시노오가와 사가라씨는 친척 관계였기 때문에 그 후임으로 번주에 옹립되어 히토요시번 내에서 극비리에 가독을 이었다. 친척이긴 하지만, 공가에서 후계자를 선택한 것은 극비리에 일을 진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른 다이묘 가문이나 하타모토의 자제는 무가 사회에서 이미 알려져 있어 발각되면 위험이 있었고, 사가라씨가 후지와라 남가의 혈통을 잇는다는 사정도 있었다. 이 양자 이야기는 번주 일문인 사가라 오리베의 데릴사위 후보자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진행되었다.
10세에 사망한 미츠나가에게 사후 양자를 들이는 것은 어려웠고 (당시 17세 이하는 사후 양자가 인정되지 않았다), 요리사다는 미츠나가보다 3살 연상이어서 막부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후계자 단절로 개역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를 두려워한 번의 중신들은 막부에 미츠나가가 완쾌되어 요리사다로 개명했다고 설명했고, 미츠나가와 동일인으로 처리했기 때문에, 공적 기록으로는 호레키 9년(1759년) 12월 11일에 가독을 이은 것으로 되어 있다.
메이와 2년(1765년) 2월 15일, 10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를 알현했다. 같은 해 12월 18일, 종5위하 오우미노카미에 서임되었다. 번정에서는 메이와 시기의 천재지변으로 번 재정이 어려움에 처했다.
메이와 4년(1767년) 1월 17일, 1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가독은 양자 토미모치 (토오야마 토모아키라의 차남)가 이었다.
3. 가계
* 아버지: 와시오 다카히로(鷲尾隆熙)
* 양아버지: 사가라 요리히사
* 양자: 사가라 토미모치 - 토오야마 토모아키라의 차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