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타케 요시마사 (1728년)
1. 개요
사타케 요시마사 (1728년)는 에도 시대 중기의 다이묘로, 구보타 신덴 번주 사타케 요시카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749년 조부 사타케 요시미네의 사망으로 가독을 상속받았으며, 1753년 2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인은 종기로 알려졌으나, 독살설도 존재한다. 정실은 마에다 요시노리의 딸 아게이며, 자녀는 없었다. 사후에는 이와사키 번주 사타케 요시미치의 장남 사타케 요시아키가 양자로 가독을 이었다.
| 씨명 | 사타케 씨 |
|---|---|
| 이름 | 사타케 요시마사 |
| 다른 이름 | 좌길 도쿠주마루 (유명) 요시마사 |
| 통칭 | 지로 |
| 시호 | 해당사항 없음 |
| 계명 | 해당사항 없음 |
| 신호 | 해당사항 없음 |
| 묘소 | 해당사항 없음 |
| 시대 | 에도 시대 중기 |
| 생일 | 교호 17년 8월 4일 (1732년9월 22일) |
| 사망일 | 호레키 3년 8월 20일 (1753년9월 17일) |
| 관위 | 종4위하・시종, 좌병위독 |
| 막부 | 에도 막부 |
| 주군 | 도쿠가와 이에시게 |
| 번 | 데와구보타번 번주 |
| 아버지 | 사타케 요시카타 |
|---|---|
| 어머니 | 노구치 씨 |
| 양아버지 | 사타케 요시미네 |
| 형제자매 | 요시마사, 여자 |
| 배우자 | 마에다 요시노리의 3녀 '요우' |
| 자녀 | 요시아키라(양자) |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직책 | 구보타 번 번주 |
|---|---|
| 대수 | 6 |
| 임기 | 1749년 ~ 1753년 |
| 이전 | 사타케 요시미네 |
| 이후 | 사타케 요시하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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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타번주 (데와국) -
사타케 요시타다 (1695년)
사타케 요시타다는 에도 시대 구보타 번의 4대 번주로, 재정 재건을 위해 노력했으나 재해와 자신의 사망으로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 양자가 뒤를 이었다. -
구보타번주 (데와국) -
사타케 요시즈미 (1637년)
사타케 요시즈미는 1672년 구보타 번주가 되어 번의 재정 개혁을 추진하고 이와사키 번과 구보타-신덴 번을 분할 설치했으며, 장남의 사망으로 첩의 아들인 사타케 요시타다가 후계자가 되었다. -
1753년 사망 -
조지 버클리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라는 명제로 유명한 아일랜드 철학자이자 성공회 주교인 조지 버클리는 극단적인 경험주의와 관념론을 주장하며 물질의 존재를 부정하고 정신, 관념, 신만이 실재한다고 보았다. -
1753년 사망 -
심육
조선 후기 소론 산림 학자이자 문신인 심육은 정제두의 문인으로 강화학파의 중심 인물이며, 세자시강원 찬선, 성균관 좨주, 형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
1728년 출생 -
제임스 쿡
제임스 쿡은 18세기 영국의 탐험가이자 해군 장교로서, 세 차례의 태평양 탐험을 통해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 동부 해안을 탐사하고 지도를 제작하는 등 지리적 발견에 기여했으며 남극권에 진입하고 하와이 제도를 기록했으나, 하와이에서 원주민과의 충돌로 사망했다. -
1728년 출생 -
요한 하인리히 람베르트
요한 하인리히 람베르트는 스위스 태생의 독일 과학자, 수학자, 철학자, 천문학자로, 원주율의 무리수성 증명, 쌍곡선 함수 삼각법 도입, 비유클리드 기하학 추측 제시 등 수학과 과학 분야는 물론 '현상학' 용어 사용과 칸트와의 서신 교환 등 철학 분야에도 기여했다.
2. 약력
교호 17년(1732년) 8월 4일, 구보타 신덴 번주 사타케 요시카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노구치 씨이다. 어릴 적 이름은 사키치(佐吉)였으나 후에 도쿠주마루(徳寿丸)로 바꾸었다.
겐분 3년(1738년) 5월 7일, 막부에 장부계를 제출하면서 실제 나이보다 4살 많은 것으로 기록했다. 이때 어릴 적 이름도 사타케 가문의 적자를 나타내는 도쿠주마루로 고쳤다. 같은 해 4월 11일에는 아버지 요시카타의 적자임을 막부에 신고했다. 간포 2년(1742년) 4월 19일, 할아버지인 구보타 번주 사타케 요시미네의 후계자가 되었다. 요시미네는 후계자가 없어 분가에서 요시마사의 아버지 요시카타를 양자로 들였으나, 요시카타는 가독을 잇지 못하고 사망했기 때문이다. 엔교 원년(1744년) 8월 25일, 통칭을 지로(次郎)로 바꾸고, 같은 해 9월 1일에는 제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를 처음으로 알현(오메미)했다. 엔교 3년(1746년) 12월 18일, 종4위하 좌병위독(左兵衛督)에 서임되었다.
간엔 2년(1749년) 10월 16일, 할아버지 요시미네가 사망하자 가독을 상속받았다. 같은 해 12월 18일에는 시종(侍従)으로 승진했다. 호레키 원년(1751년) 4월 15일, 처음으로 영지에 들어가는 것(오쿠니이리)을 허가받아 같은 해 5월 8일 구보타 성에 도착했다. 호레키 2년(1752년) 7월 1일에는 가가 번주 마에다 요시노리의 딸 아게(阿下)와 결혼했다.
호레키 3년(1753년) 8월 20일, 구보타 성에서 22세(장부계상으로는 2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인은 온몸에 생긴 종기로 인해 다리가 마비되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지나, 에도 시대의 강담 등에서는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정식 부인은 마에다 요시노리의 셋째 딸 아게(1737년 ~ 1762년)였으나, 둘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요시마사 사후 구보타 번 사타케 가문의 가독은 데와 이와사키 번주 사타케 요시미치의 장남인 요시아키가 이었다.
3. 가계
사타케 요시마사는 친아버지 사타케 요시카타가 구보타 번 번주 사타케 요시미네의 양자였으나 일찍 사망하여, 조부이자 양아버지인 요시미네의 뒤를 이어 번주가 되었다. 그러나 요시마사 또한 자녀 없이 일찍 사망하면서 분가인 이와사키 번에서 사타케 요시아키를 양자로 맞이하여 가계를 이었다.
3.1. 상속 과정
사타케 요시마사의 아버지 사타케 요시카타는 본가인 구보타 번의 5대 번주 사타케 요시미네의 양자였다. 요시미네는 후계자가 없어 분가 출신인 요시카타를 양자로 들였으나, 요시카타는 가독을 잇기 전인 1742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따라 1742년 4월 19일, 요시카타의 장남인 요시마사가 조부 요시미네의 세습자로 지정되었다. 이후 1749년 10월 16일, 요시미네가 사망하자 요시마사가 정식으로 가독을 상속하여 구보타 번의 6대 번주가 되었다.
요시마사는 마에다 요시노리의 딸 아게와 혼인하였으나 자녀를 두지 못했다. 1753년 요시마사가 22세(관례상 26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다시 분가인 이와사키 번 번주 사타케 요시미치의 장남 사타케 요시아키가 양자로 들어와 가문을 계승하였다. 이처럼 구보타 번 사타케 가문은 요시마사를 전후하여 여러 차례 양자를 통해 가계를 이어가는 복잡한 과정을 겪었다.
4. 죽음에 대한 의혹
호레키 3년(1753년) 8월 20일, 사타케 요시마사는 구보타 성에서 향년 22세(관례상 26세)로 사망했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사인은 온몸에 종기가 퍼져 다리가 마비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에도 시대의 강담(講談, 이야기꾼이 군담이나 무용담 등을 들려주던 대중 예능)에서는 요시마사가 독살되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는 요시마사가 젊은 나이에 급작스럽게 사망한 점, 그리고 당시 사타케 가문 내의 권력 다툼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추측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독살설을 뒷받침할 만한 명확한 역사적 증거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