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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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휘는 오나라 손권 치하에서 교주를 다스리던 사섭의 아들로, 아버지 사섭 사후 손권의 조치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손권은 사휘를 안원장군과 구진태수로 임명하고, 교주 태수에는 진시를 임명하는 등, 교주 지역을 분할하려 했다. 이에 사휘는 대량과 진시의 부임을 막고, 여대의 공격에 저항했으나, 결국 항복했다. 그러나 사휘는 항복 후 여대에 의해 형제들과 함께 처형되었으며,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사휘에 대해 혹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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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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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사휘 |
원어 이름 | 士徽 |
로마자 표기 | Si Hui |
베트남어 표기 | Sĩ Huy |
출생 | 생년 미상 |
사망 | 227년 |
출신지 | 교주창오군 광신현 |
직업 | 안원장군, 구진군태수 |
소속 국가 | 오 |
주군 | 손권 |
아버지 | 사섭 |
2. 생애
사섭이 죽은 후, 손권은 사휘를 안원장군(安遠將軍) 및 구진태수(九眞太守)로 임명했으나, 사휘는 이에 불만을 품었다.
손권이 대량(戴良)을 교주자사(交州刺史)로, 진시(陳時)를 후임 교지태수(交趾太守)로 보내자, 사휘는 이에 반발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손권은 여대(呂岱)를 보내 진압하려 했으나, 사휘의 저항이 완강하여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후 사휘는 형 사지(士祗)의 권고로 목숨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항복했으나, 다음날 형제들과 함께 여대에게 죽임을 당하였다.[2]
2. 1. 아버지 사섭의 사망과 손권의 개입
황무 5년(226년), 오의 손권 휘하에서 교주를 지배하고 있던 아버지 사섭이 사망했다.[2] 손권은 그의 지역을 직접 지배할 계획을 세우고, 사휘를 안원장군·구진 태수로 임명하는 한편, 사섭의 후임 교지 태수로는 진시를 임명했다. 또한 교주 북부를 광주로 분할하고, 여대를 광주 자사, 대량을 교주 자사로 파견했다.사휘는 이러한 조치에 반발하여 거병하고, 대량과 진시의 부임을 저지했다. 사섭 때부터의 부하인 환린은 그들을 맞이할 것을 간언했으나, 사휘는 이에 분노하여 환린을 살해했다. 게다가 이에 반발한 환린의 친족인 환치와 환발이 병사를 모아 사휘를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싸움은 사휘가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킨 지 수개월 만에 화목이 성립되었다.
그 사이, 사휘를 주살하라는 명령을 받은 여대는 교지로 급행하는 한편, 친교가 있던 사광(사휘의 종제)을 설득을 위해 파견했다. 태수의 관직을 잃을 뿐 다른 걱정거리는 없다는 사광의 보장을 받은 사휘는 곧 교지에 도착한 여대에게 항복했다. 형 사지, 동생 사간·사송 등 형제 6명은 육탄[3]하여 여대를 맞이했다. 여대는 그 자리에서는 위로의 말을 하는 등, 사휘 등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였으나, 다음 날 아침에 다시 그들 형제를 소집하여 사휘의 죄를 나열하고, 전원을 처형했다. 그 머리는 도읍 무창으로 보내졌다.
2. 2. 사휘의 반란과 진압
226년 (황무 5년), 오의 손권 휘하에서 교주를 지배하고 있던 아버지 사섭이 사망했다. 손권은 그의 지역을 직접 지배할 계획을 세우고, 사휘를 안원장군·구진 태수로 임명[2]하는 한편, 사섭의 후임으로 교지 태수에는 따로 진시를 임명했다. 게다가 교주 북부를 광주로 분할하고, 여대를 광주 자사, 대량을 교주 자사로 파견했다.사휘는 이러한 조치에 반발하여 거병하고, 대량과 진시의 부임을 저지했다. 사섭 때부터의 부하인 환린은 그들을 맞이할 것을 간언했으나, 사휘는 이에 분노하여 환린을 살해했다. 게다가 이에 반발한 환린의 친족인 환치와 환발이 병사를 모아 사휘를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싸움은 사휘가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킨 지 수개월 만에 화목이 성립되었다.
그 사이에, 사휘를 주살하라는 명령을 받은 여대는 교지로 급행하는 한편, 친교가 있던 사광(사휘의 종제)을 설득을 위해 파견했다. 태수의 관직을 잃을 뿐 다른 걱정거리는 없다는 사광의 보장을 받은 사휘는 곧 교지에 도착한 여대에게 항복했다. 형 사지, 동생 사간·사송 등 형제 6명은 육탄[3]하여 여대를 맞이했다. 여대는 그 자리에서는 위로의 말을 하는 등, 사휘 등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였으나, 다음 날 아침에 다시 그들 형제를 소집하여 사휘의 죄를 나열하고, 전원을 처형했다. 그 머리는 도읍 무창으로 보내졌다.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는, 열전의 평에서 사휘에 대해, "신중함이 없고 스스로 재앙에 빠졌다. 범용한 재능밖에 없으면서, 험한 지세를 의지하여 부귀를 추구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에 이르렀다"고 혹평을 내렸다.
2. 3. 평가
진수는 삼국지 열전에서 사휘에 대해 "신중함이 없고 스스로 재앙에 빠졌다. 범용한 재능밖에 없으면서, 험한 지세를 의지하여 부귀를 추구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에 이르렀다"고 혹평했다.[2]3. 사휘의 친족 관계
4. 사휘를 섬긴 사람들
- 감례
- 환치
참조
[1]
서적
삼국지
오서
[2]
서적
삼국지
오서 여대(呂岱)전
[3]
웹사이트
肉袒(にくたん)とは? 意味や使い方 - コトバンク
https://kotobank.jp/[...]
2024-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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