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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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일은 후한 말, 삼국시대 오나라 시기에 활동한 인물이다. 독우로서 정궁을 보좌하고, 동탁에게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고향으로 도망가 합포태수로 임명되었다. 손권에게 편장군 도향후에 봉해졌으나, 사섭 사후 조카 사휘의 반란으로 아들들이 처형당했다. 이후 친오파로서 활동하다가, 교주 자사 여대에 반란이 일어나면서 관직을 박탈당하고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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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오 사씨 - 사휘
사휘는 오나라 손권 치하에서 교주를 다스리던 사섭의 아들로, 아버지 사섭 사후 손권의 조치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여대에게 항복한 후 형제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 창오 사씨 - 사광 (삼국지)
사광은 삼국시대 오나라 사람으로, 사촌 사휘 등의 반란에 가담하지 않고 여대의 부탁으로 그들을 설득하여 항복시켰으나, 사휘 등은 처형되고 사광은 관직을 박탈당해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 동오의 정치인 - 제갈근
제갈근은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 오나라의 무장으로 손권의 신임을 받았으며, 촉한의 제갈량과 조위의 제갈탄과 함께 삼국시대에 걸쳐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 동오의 정치인 - 위소
위소는 삼국시대 오나라의 학자이자 관료로서, 손량, 손휴, 손호 3대에 걸쳐 벼슬을 지냈으며 《오서》 편찬을 주도하고 손호에게 직언을 하다 처형당했지만, 《국어주》 등의 저서를 남겼다. - 후한의 정치인 - 응창
응창은 후한 말기에서 삼국시대 초기에 활동한 문장가이자 건안칠자의 일원으로, 조조에게 발탁되어 관직 생활을 했으며 조비의 총애를 받았으나 역병으로 요절하여 조비의 안타까움을 샀고, 그의 문학적 재능은 조비와 조식에게 인정받았으며 동생 응거와 아들 응정 또한 문장으로 이름을 알렸다. - 후한의 정치인 - 괴량
괴량은 후한 말 유표를 보좌하여 형주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한 인물로, 정사에서는 온건한 성격으로, 《삼국지연의》에서는 뛰어난 지략가로 묘사되며, 그의 동생은 괴월이고 손녀는 사마염의 측실이 되었다.
사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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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사일은 한나라 때 군의 독우(督郵, 행정관 감시역)를 지냈다. 교주 자사였던 정궁이 상서로 임명되어 수도인 낙양으로 불려가게 되자, 성대한 환송연을 베풀었고, 이에 감격한 정궁은 자신이 삼공이 되면 사일을 중앙으로 초빙하겠다고 약속했다. 정궁이 사도로 승진했을 때 사일은 부름을 받아 낙양으로 갔으나,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궁이 퇴관하고 황완이 후임으로 임명된 뒤였다. 하지만 황완은 사일을 중용하였다.[1]
동탁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후, 황완과 대립하던 동탁은 사일을 싫어하여 포고를 내려 승진 기회를 주지 않았다.[2]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한 후, 사일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교주 자사 주부가 사망한 후, 형제의 상소에 따라 형제와 그의 동생들은 교주 각지의 태수로 임명되었고, 이때 사일도 합포 태수로 임명되었다. 건안 15년(210년), 사씨는 교주에 파병해 온 손권의 지배를 받아들였다.
황무 5년(226년) 형 사섭이 죽자, 교주는 오나라 손권에 의해 광주와 교주로 분할되었다. 각 지역으로 분열된 사씨가 친오파와 반오파로 나뉘자, 사일은 친오파의 입장을 취했다.[3] 교주 자사 여대에 의해 조카들이 처형되자, 토호 환씨가 여대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사일은 자식들과 함께 관직을 박탈당하고 서민으로 떨어졌으며, 반란 수년 후 처형되었다.[4] 그 후, 광주는 곧 폐지되어 교주로 환원되었다.
2. 1. 후한 시기
후한 때 사일은 독우(督郵, 행정관 감시역)를 맡아 정궁(丁宮)을 보좌하였다. 정궁이 도읍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사일이 매우 공경하여 모셨기에, 감격한 정궁은 "내가 장차 삼공(三公)의 지위에 오르면, 꼭 자네를 중용하겠네"라고 약속하였다.[1]이후 정궁은 삼공 중 하나인 사도(司徒)에 올랐고, 사일은 정궁의 부름을 받아 도읍으로 갔다. 그러나 사일이 도착할 즈음에는 정궁이 이미 파직되고 황완(黃琬)이 임명된 후였다. 그럼에도 황완은 사일을 매우 예우하였다.[1]
동탁이 난을 일으키자, 사일은 황완과 함께 동탁에게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동탁은 사일을 파면하고, 사일을 임관시킨 자는 엄하게 다스리겠다는 포고령까지 내렸다. 이에 신변에 위협을 느낀 사일은 고향으로 도망갔으며, 형의 천거로 합포(合浦)태수에 임명되었다.[2]
2. 2. 교주에서의 활동
후한 때 사일은 독우(督郵, 행정관 감시역)로서 정궁(丁宮)이라는 인물을 보좌하였다. 정궁이 부름을 받아 도읍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사일이 매우 공경하여 모셨다. 이에 감격한 정궁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내가 장차 삼공(三公)의 지위에 오르면, 꼭 자네를 중용하겠네"'''
라고 약속하였다.
후에 정궁은 삼공 중 하나인 사도(司徒)의 직책에 올랐고, 사일은 정궁의 부름을 받아 도읍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사일이 도착할 즈음에 정궁은 이미 파직되어 있었고, 황완(黃琬)이란 자가 임명되어 있었다. 하지만 황완은 사일을 매우 예우하였다.[1] 후에 동탁(董卓)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자, 황완과 대립하던 동탁은 사일을 싫어하여 포고(布告)를 내려 승진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2] 동탁이 장안(長安)으로 천도(遷都)한 후, 사일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교주 자사(交州刺史) 주부(朱符)가 사망한 후, 령남(嶺南) 사회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형제의 상소에 따라, 형제와 그의 동생들은 교주 각지의 태수(太守)로 임명되었다. 이때 사일도 합포(合浦) 태수로 임명되었다.
2. 3. 오나라 시기
후한 때 사일은 독우(督郵, 행정관 감시역)로서 정궁(丁宮)이라는 인물을 보좌하였다. 정궁이 부름을 받아 도읍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사일이 매우 공경하여 모셨다. 이에 감격한 정궁은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내가 장차 삼공(三公)의 지위에 오르면, 꼭 자네를 중용하겠네"'''
후에 정궁은 삼공 중 하나인 사도(司徒)의 직책에 올랐고, 사일은 정궁의 부름을 받아 도읍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사일이 도착할 즈음에 정궁은 이미 파직되어 있었고, 황완(黃琬)이란 자가 임명되어 있었다. 하지만 황완은 사일을 매우 예우하였다.[1]
동탁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자, 황완과 대립하던 동탁은 사일을 싫어하여 포고(布告)를 내려 승진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2] 동탁이 난을 일으키자, 사일은 황완과 함께 동탁에게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동탁은 사일을 파면하고, 사일을 임관시킨 자는 엄하게 다스리겠다는 포고령까지 내렸다. 이에 신변에 위협을 느낀 사일은 고향으로 도망갔다. 동탁이 장안(長安)으로 천도(遷都)한 후, 사일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형의 천거에 의해 합포(合浦)태수로 임명되었다.
220년, 손권에 의해 편장군 도향후에 봉해졌으나, 사섭이 죽은 후, 조카 사휘가 반란을 일으켜 사섭의 아들들이 모두 처형당했다. 사일과 사유(士 黃+有) · 아들 사광은 죄를 용서받았으나, 몇 년 후 사일은 동생 사유와 함께 범법자로서 처형당했다.[4]
3. 사일의 친족관계
참조
[1]
서적
三国志 正史
[2]
서적
三国志 正史
[3]
서적
ベトナム救国抗争史
[4]
서적
ベトナム救国抗争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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