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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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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섭은 후한 말 ~ 삼국 시대에 교주(현재 베트남 북부)를 지배한 군벌로, 90세에 사망했다. 그는 184년 교지 태수로 임명된 후, 동생들을 주변 지역 태수로 임명하여 교주 일대를 장악했다. 이후 한나라의 혼란 속에서 사실상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 손권에게 귀순하여 좌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아들을 인질로 보내 충성을 맹세했다. 사섭은 학문과 문화를 장려하고, 교주를 번성시키는 등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사후 그의 일족은 몰락했다. 그는 베트남에서 '사왕'으로 숭배받았으나, 민족 독립 관점에서는 압제자로 폄하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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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섭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사섭
본관창오군 창오현
시대후한 ~ 삼국 시대
출생137년
사망226년 (향년 89세)
위언 (威彥)
작위용편후 (龍編侯)
관직교지태수 (交趾太守)
수남중랑장 (綏南中郎將)
안원장군 (安遠將軍)
좌장군 (左將軍)
위장군 (衛將軍)
묘호가응선감영무대왕 (嘉應善感靈武大王) 쩐 왕조 추증
가족참조
생애
초기 생애 및 임관사섭은 사사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다. 영제 때 효렴으로 천거되어 상서랑이 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임하고 귀향했다.
교지 태수187년, 교지태수로 임명되어 이후 수십 년간 교지를 다스렸다.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 사실상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오나라에 귀순손권합포군을 공격하자, 사섭은 동생 사일(士壹)을 보내 항복 의사를 전했다. 손권은 사섭을 수남중랑장(綏南中郎將)에 임명하고 용편후(龍編侯)에 봉했다.
사망과 그 후226년, 사섭이 사망하자 손권은 여대(呂岱)를 파견하여 교지를 접수하려 했다. 이에 사섭의 아들 사휘(士徽)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했다.
평가
긍정적 평가사섭은 학문을 숭상하고 백성을 어루만져 교지 지역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된 시기에 교지 지역을 안정적으로 다스려 백성들의 삶을 보호했다.
부정적 평가사섭은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고 사실상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또한 아들 사휘가 반란을 일으켜 지역을 혼란에 빠뜨린 책임도 있다.
가족
아버지사자
형제사일 (士壹)
사지 (士祗)
사융 (士䵋)
아들사휘 (士徽)
기타
칭호사왕(士王), 사왕선(士王僊)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2. 생애

사섭은 본래 문양 출신으로, 왕망의 난을 피해 교주로 이주해왔다.[31] 젊은 시절 낙양에서 유학하며 영천의 유도에게서 《춘추좌씨전》을 배웠고, 《춘추경》을 저술했다.[32] 원휘는 순욱에게 사섭을 학식과 정치에 정통하다고 칭찬했다. 부친상 후 무현의 현령을 거쳐 교지 태수가 되었다.

광화 7년(184년)경[4][5] 교주자사 가총의 추천으로 교지 태수가 된 사섭은,[4] 건안 원년(196년) 교주자사 주부가 이민족에게 살해당하자,[2] 동생 사일합포태수, 사유를 구진태수, 사무를 남해태수에 임명하여 교주 전체를 장악했다.[7][8]

사섭의 통치 아래 교주는 크게 번성했다. 그의 권세는 대단하여, 외출 시에는 종과 악대가 따르고, 거리는 수레와 말로 가득 찼으며, 호인들이 향을 피우고, 아내들은 전용 수레를 이용했으며, 이민족들이 복종했다. 사섭은 난세를 피해 온 원충, 원휘, 환소, 허정, 유파, 정병, 설종 등 수많은 지식인들을 우대했다.

건안 5년(200년), 형주유표가 교주 진출을 꾀하자,[9] 조조는 사섭에게 수남중랑장 지위를 주어 교주 7군을 감독하게 했다. 사섭은 조정에 공납을 계속하며 관계를 유지했다.[9] 건안 15년(210년), 손권보즐을 보내자 사섭은 항복하고 아들 사휼을 인질로 보냈다. 손권은 사휼을 무창 태수로 임명하고, 사섭과 사일의 아들들을 중랑장에 임명했다. 사섭은 유비 휘하 익주옹개를 손권에게 귀순시키는 역할을 했고,[10] 위장군으로 승진하여 용편후에 봉해졌다.

황무 5년(226년) 11월, 사섭은 90세로 사망했다.[11][12] 사후 여대가 교주 북부를 광주(廣州)로 분리하고, 사휘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어 사섭의 일족은 몰살되거나 귀양 갔다.[31]

사섭은 베트남에서 '사왕'(士王)으로 칭송받지만, 민족 독립 관점에서는 압제자로 평가받기도 한다.[31]

2. 1. 가문 배경과 초기 생애

사섭의 선조는 본래 문양 사람인데, 왕망의 난을 피해 교주로 내려와 살기 시작하였다.[31]

젊은 시절 사섭은 낙양에서 지식인들과 교류를 가졌고, 영천의 劉陶 (東漢)|유도중국어에게서 학문을 배워 《춘추좌씨전》에 주석을 달아 《춘추경》을 지었다.[32] 원휘는 순욱에게 "사섭은 학식이 풍부하고 정치에 정통하다"라고 칭찬할 정도로 그의 지식과 교양은 뛰어났다.

부친상을 치른 후, 사섭은 무재(茂才)로 천거되어 무현의 현령을 지내다가 교지 태수가 되었다.

2. 2. 교지 태수 부임과 통치

낙양에서 유학한 사섭은 영천의 유도(劉陶)에게서 학문을 배워 《춘추좌씨전》에 주석을 달아 《춘추경》(春秋經)을 지었다.[32] 그의 지식과 교양은 상당한 수준이었으며, 원휘는 순욱에게 "사섭은 학식이 풍부하고 정치에 정통하다"라고 평했다. 부친상을 치른 후, 무재(茂才)로 천거되어 무양령(巫陽令)을 지냈으며, 광화 7년(184년)경[4][5]에 교주자사 가총의 추천으로 교지태수(交趾太守)가 되었다.[4]

건안 원년(196년), 교주자사 주부(朱符)가 이민족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2] 사섭은 조정에 표를 올려 동생 사일합포태수, 사유는 구진태수, 사무는 남해태수를 맡도록 하여 교주 전체를 차지하였다.[7][8] 이후 교지는 사섭의 통치로 크게 번성하게 된다. 당시 사섭의 권세는 형제의 권세는 견줄 자가 없을 정도였다. 외출이나 귀가를 할 때는 종이 울렸고, 악대가 뒤따랐으며, 거리는 수레와 말들로 가득했다. 좌우에는 향을 피우는 호인(胡人)들이 수십 명이었고, 아내들은 전용 수레를 사용하였으며, 보병과 기병들이 아이들을 따랐고, 이민족(원주민)들이 복종하였다.

사섭은 성품이 온후하고 겸손하여 수백 명의 사람들이 난세를 피해 교지로 왔고, 문인을 우대하여 원충·원휘·환소· 허정·유파·정병·설종 등 수많은 지식인들이 난을 피해 사섭에게 의지하였다.

건안 15년(210년), 손권보즐을 교주자사로 임명하자 사섭은 손권에게 종속하였다. 건안 25년(220년), 사섭은 아들 사흠을 손권에게 인질로 보냈다. 손권은 사흠을 무창태수(武昌太守)에 임명하는 한편 사섭과 사일의 아들들을 모두 중랑장에 임명하였다.

사섭은 손권에게 사자를 보내 알현할 때마다 진귀한 보물들을 한 해도 빠짐없이 바쳐 손권의 총애를 받았고, 손권 또한 항상 편지를 보내고 후한 상을 내려 보답하였다.

황무 5년(226년) 11월, 사섭은 9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11][12]

2. 3. 후한 말 군벌 할거와 오나라 귀부

건안 원년(196년), 교주자사 주부(朱符)가 이민족들에게 살해당했다. 사섭은 조정에 표를 올려 동생 사일합포태수, 사유를 구진태수, 사무를 남해태수로 삼아 교주 전체를 차지하게 했다.[7][8]

건안 5년(200년), 형주유표는 교주로 진출하고자 뢰공을 교주 자사, 오거를 창오 태수로 임명했다.[9] 유표와 대립하던 조조는 사섭에게 수남중랑장 지위를 주어 교주 7군의 감독을 명했고, 사섭은 조정에 공납을 계속하며 관계를 유지했다.[9]

건안 15년(210년), 강동의 손권보즐을 교주로 보내자 사섭은 손권에게 항복했다. 아들 사휼을 인질로 보내자, 손권은 사휼을 무창 태수로 삼고, 사섭의 다른 아들과 사광 등 사일의 아들에게도 중랑장 지위를 주었다. 사섭은 유비 휘하 익주옹개를 손권에게 귀순시키는 중개 역할을 했고,[10] 위장군으로 승진하여 용편후에 봉해졌다.

2. 4. 사망과 사후

황무 5년(226년) 11월, 사섭은 9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31]

사섭 사후, 손권이 임명한 교주자사 여대는 손권의 승인을 받아 교주 북부를 나누어 광주(廣州)를 설치하여 스스로 그 자사가 되었고, 교주자사에는 장군 대량(戴良)을 임명했다. 사섭의 아들 사휘를 안원장군(安遠將軍)에 봉하는 한편 구진태수에 임명하고, 교지는 진시(陳時)를 보내 다스리게 하였다. 이에 사휘와 그의 형 사지는 손권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여대는 평소 친분이 있었던, 사일의 아들 사광을 보내어 목숨을 보장하며 항복을 권고하였고, 사지와 사휘, 그리고 그의 동생들은 항복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모두 여대에 의하여 목숨을 잃었고, 이후 사섭의 일족은 몰살되거나 귀양을 갔다.[31]

오늘날 사섭은 베트남의 역사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으며, '''사왕'''(士王)이라고 불리며 칭송받고 있다. 그러나, 민족 독립의 관점에서는 "베트남 민족을 괴롭힌 압제자"로 폄하되기도 한다.[31]

사섭은 40년 동안 자치적인 군벌로서 베트남을 통치했으며, 후대 베트남 군주에 의해 사후에 신격화되었다. 스티븐 오해로우는 사섭이 본질적으로 "최초의 베트남인"이었다고 평가했다.[1] 홀름그렌에 따르면, 사섭의 통치는 "통킹에서 두 개의 새로운 사회 집단, 즉 중국화된 베트남 집단과 베트남화된 중국 집단의 발전과 융합의 이정표 중 하나"였다. 후자는 점차 중국 제국보다는 삼각주의 이익과 동일시하게 되었다. 테일러(1983)는 그의 제국 임명이 "지역 사회와 강한 유대 관계를 가진 지역 지배 계급의 출현"에 공식적인 정당성을 부여했다고 평가했다. 그의 사후 사건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그는 "사병을 배치할 수 있는 거대한 한-월 가문을 기반으로 한 변칙적인 지역 권력 배치를 주재"했다. 중국의 관점에서 사섭은 "변방 수호자"였고, 베트남 측에서는 지역 지배 계급 사회의 수장이었다. 이러한 두 관점 사이를 오가는 것은 비교적 쉬웠다. 따라서 혼혈 또는 혼혈 혈통의 사람이 혼합된 역할, 또는 어떤 경우에는 명백한 베트남 역할을 하는 것은 초기 베트남 역사에서 흔한 인물이다. "그는 중국 문명의 맥락에서 지역 사회를 육성한 강력한 지역 지도자로 등장한 많은 사람들 중 첫 번째였다." 이 시기에 베트남 지도자로 등장한 사람들은 혼혈 혈통이었다. 그들 대부분의 가족은 이미 여러 세대 동안 베트남에 있었고, 의심할 여지 없이 베트남어를 사용했으며, 그들의 정치적 관점은 베트남 사회의 지역적 이익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사섭은 오늘날 일부 베트남 사원에서 여전히 "사왕"(Sĩ Vươngvi)으로 숭배받고 있다. 베트남 역사서인 ''월전유령집''(; 1400)은 중국 기록의 전통에 베트남 지역의 전통을 더하여 내용을 크게 추가했다.

사섭의 묘는 현재 창오현과 박닌성투언타인의 2곳에 세워졌으며, 투언타인에 건립된 사왕사에서는 사섭의 제사가 행해지고 있다.[11][12]

3. 정책과 평가

사섭은 𨏩𨻻|륭루이중국어에 수부를 두고 통치했다.[13] 교주에 토착화된 사씨 정권은 현지인들의 지지를 받아 장기간 지배를 유지했다.[14] 사섭은 남해 무역으로 얻은 이익으로 교주의 특산품과 수입품을 조정과 손권에게 바쳤다.[15]

사섭의 관대한 통치는 교주 백성들에게 받아들여졌고,[17] 안정된 정세는 전란을 피해 많은 사람들을 교지로 이끌었다.[8] 이주민 중에는 원충, 등의, 원휘, 환소, 정병, 설종, 허정, 유파 등의 명사들도 있었다. 사섭은 이들을 보호하고 현지인 교육에 힘써 베트남에 중국 문화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11][18] 그러나 이러한 교화 정책이 후세 사료에만 나타난다는 점에서, 사섭을 베트남 교화자로 보는 관점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11]

3. 1. 후대의 평가와 논란

사섭은 후대에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베트남에서는 '사왕'(士王, Sĩ Vươngvi)으로 불리며 칭송받았고, 일부 사원에서는 여전히 숭배받고 있다.[1] 쩐 왕조 시대에는 왕으로 추봉되기도 했다.[23] 13세기 쩐 왕조의 인종은 '가응선감대왕'으로, 영종은 1313년(흥륭 21년)에 '가응선감령무대왕'으로 추봉하였다.[23]

오사련 등 대월사기전서 편찬자들은 18세기까지 사섭을 베트남의 정통 왕으로 여겼다.[3] 그러나 후 레 왕조 시대 사관 오시사는 사섭을 '왕'으로 특별시하지 않고 『대월사기전서』에서 '사왕기'를 삭제했다.[25][26]

사섭은 베트남 문자를 창시했다는 설도 있지만, 사섭 시대 이전에 한자가 이미 사용되었다는 의견이 많다.[17] 20세기까지 한문 교육용 교과서에는 베트남 교화자로서의 사섭이 기술되어 있었으나,[27] 국어 보급과 한문 교육 쇠퇴로 교과서에서 사라졌고, 2005년 개정된 역사 교과서에는 정책에 대한 기술이 없다.[28]

스티븐 오해로우는 사섭을 본질적으로 "최초의 베트남인"이라고 평가했다.[1] 홀름그렌은 사섭의 통치를 "통킹에서 중국화된 베트남 집단과 베트남화된 중국 집단, 이 두 새로운 사회 집단의 발전과 융합의 이정표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테일러는 그의 제국 임명이 "지역 사회와 강한 유대 관계를 가진 지역 지배 계급의 출현"에 공식적인 정당성을 부여했다고 보았다.

사섭은 남월의 건국자 조타와 비교되기도 하는데, 진수는 사섭을 조타 이상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9][20] 4세기 갈홍신선전에는 사섭이 동봉의 환약으로 소생하는 일화가, 14세기 쩐 왕조의 월전유령집에는 사섭의 유해가 생전과 다름없었다는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21]

원휘는 순욱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섭의 학식과 통치 수완을 두융을 능가하는 인물이라고 칭찬했다.[19]

4. 사섭을 섬긴 사람들

이름기타
설종경문(敬文)
원충정보(正甫)
원휘
유파자초(子初)
장민
정병덕추(德樞)
허정문휴(文休)
환소
환린
환치
환발
감례


5. 사섭의 친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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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섭은 적어도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순서대로 사신(士廞), 사지(士祗), 사휘(士徽), 사간(士幹), 사송(士頌)이다.[29]

『삼국지』 사섭전에 따르면, 사씨 가문은 원래 노국 문양현(현재 산둥성 타이안시 부근)에 본적을 두고 있었다. 신나라 시대의 혼란을 피해 교주의 창오군 광신현(현재 광시 좡족 자치구 우저우시 창우현)에 정착하여 본적을 옮겼다. 창오 토착 호족으로서 힘을 축적했고, 사섭의 아버지 사인은 교주에 본적을 둔 자로서는 처음으로 일남태수에 임명되었다.[4]

226년 사섭이 죽은 후, 그의 셋째 아들 사휘가 동오 정권 아래 교지군 태수를 계승했다. 그 무렵, 오 황제 손권교주를 분할하여 광주(廣州)를 설치하려 했다. 손권은 대량(戴良)과 여대를 각각 교주와 광주의 자사로 임명했고, 측근인 진시(陳時)를 사휘 대신 교지군 태수로 임명하려 했다.

227년, 사휘는 이 계획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부하 환린(桓鄰)의 간청을 거절하고 그를 죽였다. 환린의 조카 환발(桓發)이 사휘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수개월 동안 전투를 벌이다 화해했다.

한편, 여대는 사휘의 사촌 사광(士匡; 사섭의 형제 사일 士壹의 아들)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사휘와 그의 형제들은 항복했지만, 여대는 연회 중에 이들을 체포하여 처형하고 그들의 머리를 무창 (武昌; 현재 어주, 호북)에 있던 손권에게 보냈다.[29]

사섭의 형제 사일(士壹)과 사위(士䵋)는 가족들과 함께 죽음을 면했지만 평민 신분으로 강등되었다. 몇 년 후, 사일과 사위는 범죄를 저질러 처형되었다.

220년대 초, 사섭은 맏아들 사신(士廞)을 손권에게 인질로 보냈었다. 사신은 227년 여대에 의해 처형된 사휘와 다른 형제들과 달리 살아남았지만, 형제들의 죽음 이후 평민 신분으로 강등되었다. 그는 얼마 후 병으로 죽었고, 아들이 없었다.

참조

[1] 서적 Generals of the South: The Foundation and Early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State of Wu Faculty of Asian Studies, The 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 2016-09-22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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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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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21] 서적
[22] 서적
[23] 서적
[24] 서적
[25] 서적
[26] 서적
[27] 서적
[28] 서적
[29] 서적
[30] 서적 건강실록(建康實錄)
[31] 서적 대월사기전서
[32] 서적 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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