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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초 3세 (카스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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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초 3세는 레온-카스티야의 알폰소 7세와 바르셀로나의 베렝게라의 장남으로, 카스티야의 왕이었다. 그는 나바라의 블랑슈와 결혼하여 알폰소 8세를 낳았다. 1152년 나헤라 왕국을 하사받았고, 1157년 부왕 사후 카스티야와 톨레도 왕국을 상속받았다. 1158년 급사하며, 아들 알폰소 8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칼라트라바 기사단이 창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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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초 3세 (카스티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산초 3세
카스티야 필사본 "왕들의 연대기 모음집(...)"에 나오는 산초 3세 (1312-1325년경). 현재 스페인 국립도서관 소장
이름산초 3세
직함카스티야와 톨레도의 왕
통치 기간1157년 8월 21일 - 1158년 8월 31일
즉위식해당사항 없음
이전 통치자알폰소 7세
다음 통치자알폰소 8세
다른 칭호의 왕
다른 통치 기간1153년–1157년
다른 이전 통치자우라카 아스투리아스
다른 다음 통치자산초 6세
출생일1134년경
출생지톨레도
사망일1158년 8월 31일
사망지톨레도
매장지톨레도 대성당
결혼과 자녀
배우자블랑카 데 나바라 (1151년 결혼, 1156년 사망)
자녀알폰소 8세, 가르시아 왕자
가문
왕가카스티야 이브레아 가문
아버지알폰소 7세
어머니베렌게라 데 바르셀로나

2. 가족

산초 3세는 레온, 카스티야, 갈리시아의 왕 알폰소 7세와 바르셀로나의 베렌구엘라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151년에 가르시아 라미레스의 딸인 나바라의 블랑슈와 결혼하여 알폰소 8세를 낳았다.

2. 1. 자녀

산초 3세는 1151년에 가르시아 라미레스의 딸인 나바라의 블랑슈와 결혼하여[3] 다음의 자녀를 두었다.

  • 알폰소 8세: 산초 3세의 뒤를 이어 카스티야의 왕이 되었다.[3]
  • 인판테 가르시아: 1156년에 태어났으나 곧 사망하였다. 왕비 블랑슈 또한 가르시아를 낳다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3]

3. 생애

알폰소 7세가 사망하자 그의 왕국은 두 아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알폰소 7세와 바르셀로나의 베렝게라의 장남인 산초 3세는 카스티야톨레도를 상속받았고,[4] 페르난도 2세레온 왕국을 상속받았다.[4]

1152년에 산초는 "나헤라 왕국"을 하사받았으나, 문서상에서 "나헤라의 왕"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는 또한 아르타호나 왕국의 통치자인 아스투리아의 우라카를 계승했다.[1]

산초 3세의 통치 기간 동안, 칼라트라바-라-비에하 성은 피테로 수도원의 수도원장 레이몬드 세라트에게 양도되었다. 레이몬드 세라트는 수도원의 평신도 형제들을 기사로 활용하여 이 성을 방어할 것을 제안했고, 이는 칼라트라바 기사단의 기원이 되었다. 칼라트라바 기사단은 1164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 의해 승인되었다.

1158년 5월, 사군 조약을 통해 레온 왕국과 카스티야는 알-안달루스 정복 범위를 명시했다. 그러나 포르투갈 왕국을 알폰소 7세의 두 아들 사이에서 분할하려던 계획은 산초 3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무산되었다.

1157년 부왕 알폰소 7세가 사망하고, 산초 3세는 카스티야 왕위에, 페르난도 2세는 레온 왕위에 각각 즉위했다.[3] 그러나 산초 3세는 즉위 후 1년도 채 안 된 1158년 8월 31일에 급사했고, 블랑카(나바라 가르시아 6세의 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 알폰소 8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참조

[1] 서적 Historia de Euskal Herria: Los vascos de ayer https://books.google[...] Txalaparta 1995
[2] 서적
[3] 서적
[4] 웹사이트 두산백과 - 산초 3세 https://term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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