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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라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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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바라 왕국은 서기 9세기부터 16세기까지 존재했던 이베리아 반도의 왕국이다. 팜플로나를 중심으로 바스크인들이 세웠으며, 어원은 바스크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에는 이니고 아리스타 왕조가 통치했으며, 이후 히메네스 왕조를 거쳐 11세기에는 산초 3세가 왕국을 확장했다. 산초 3세 사후 왕국은 분열되었지만, 카스티야와 아라곤과의 연합을 통해 재건되었다. 13세기에는 샴파뉴 가문이 왕위를 계승하며 프랑스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16세기 초 스페인에 정복되어 서부 지역을 상실했다. 피레네 산맥 북쪽의 하부 나바라는 독립을 유지하다가 17세기 프랑스에 병합되었다. 현재 나바라 지역은 스페인 자치주로 남아있으며, 바스크 문화의 중요한 거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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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 아라곤과 카스티야 왕국이 나바라 왕국을 점령한 사건으로, 프랑스의 야심과 아라곤의 침략 시도, 왕위 계승 갈등, 외부 세력 개입으로 혼란스러웠던 나바라는 결국 스페인에 병합되어 오랜 통치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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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라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1190년 유럽의 나바라 왕국
1190년 유럽의 나바라 왕국
기본 정보
공식 명칭



일반 명칭나바라
시대중세
정치 체제봉건 군주제
현재 국가스페인
프랑스
건국 년도824년 (전통적)
멸망 년도1841년
이전 국가가스코뉴 공국
중세 프랑스
어퍼 마치
코르도바 토후국
다음 국가근세 프랑스
카스티야 연합왕국
아라곤 연합왕국
스페인
나바라 왕국 국기
왕실 국기
나바라 왕국 문장
문장 (1234–1580)
수도팜플로나 ()
종교주요 종교: 로마 가톨릭교회 (공식)
소수 종교:
바스크 토착 신앙 (초기)
세파르딤 유대교 (1515년까지)
이슬람교 (1515년까지)
칼뱅주의 (왕실, 1560–1594)
공용어바스크어 (구어 및 문자어)
라틴어 (문자어)
나바라-아라곤어 (행정; 구어)
가스코뉴어 (구어 및 문자어)
카스티야 스페인어 (상부 나바라)
프랑스어 (하부 나바라)
중세 히브리어 (알하미아도 문자어)
안달루시아 아랍어 (문자어 또는 공식)
정치
군주 칭호군주
첫 번째 군주이니고 아리스타
첫 번째 군주 통치 기간824–851/2년
마지막 군주 (프랑스 왕국)루이 13세
마지막 군주 (프랑스 왕국) 통치 기간1610–1620년
마지막 군주 (스페인 왕국)이사벨 2세
마지막 군주 (스페인 왕국) 통치 기간1830–1841년
면적 및 인구
면적 (1300년경)10,000 평방킬로미터
인구 (1300년경)100,000명

2. 어원

라틴어 navarrosla가 처음 등장하는 기록[10]은 에긴하르트가 쓴 샤를마뉴 업적 관련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른 프랑크 왕국 연대기에는 ''nabarros''로 나온다. 여러 프랑크어 자료에는 ''nabarri/navarri'', ''Hispani wascones'', ''pampilonensi''가 언급되어 있다.[11]

Navarraes/Nafarroaeu/Naparroaeu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10]

2. 1. 바스크어 어원설

라틴어 navarrosla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기록[10]은 에긴하르트의 샤를마뉴 업적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른 프랑크 왕국 연대기에는 ''nabarros''로 나온다. 여러 프랑크어 자료에는 ''nabarri/navarri''와 ''Hispani wascones'', 그리고 ''pampilonensi''가 언급되어 있다.[11]

Navarraes/Nafarroaeu/Naparroaeu의 어원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다.[10]

  • 바스크어 nabareu (절대격 단수 nabarraeu): "갈색의", "다색의"를 의미하며, 나바라 백국 원래 지역 북쪽의 푸른 산악 지대와 대조를 이룬다.
  • 바스크어 nabaeu, 카스티야어 navaes ("계곡", "평원", 스페인 전역에 걸쳐 존재) + 바스크어 herrieu ("사람들", "땅").


언어학자 주앙 코로미네스는 ''naba''가 명확하게 바스크어 기원이 아니며, 더 넓은 로마 이전 기층어의 일부로 본다.

2. 2. 로마 이전 기층어 어원설

Navarraes/Nafarroaeu/Naparroaeu의 어원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다.[10]

  • 바스크어 nabareu (nabarraeu, "갈색의", "다색의")는 나바라 백국 원래 지역 북쪽의 푸른 산악 지대와 대조를 이룬다.
  • 바스크어 nabaeu, 카스티야어 navaes ("계곡", "평원", 스페인 전역에 걸쳐 존재)와 바스크어 herrieu ("사람들", "땅")의 결합.


언어학자 주앙 코로미네스는 ''naba''가 명확하게 바스크어 기원이 아니며, 더 넓은 로마 이전 기층어의 일부로 본다.

3. 역사적 배경

814년의 바스코뉴 공국


781년, 코르도바 에미르국은 이븐 발라스크와 모트민 알-아크라를 무찌르고 팜플로나와 그 주변 지역을 되찾았다. 799년, 친프랑크 세력에 의해 팜플로나 총독 무타리프 이븐 무사가 살해되었다.

이 시기 바스크인 영토는 서쪽으로 에브로 강 발원지까지 확장되었으며, 아인하르트는 에브로 강 발원지를 나바라 땅으로 지정했다.[13] 그러나 이 서쪽 지역은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영향을 받았다.

806년, 프랑크 왕국은 나바라를 다시 장악하려 했고, 812년 경건왕 루이는 팜플로나에 백작령을 설립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가스코뉴의 계속되는 반란으로 피레네 산맥 남쪽의 프랑크 통치는 불안정해졌다.[14] 816년 판코르보 전투에서 에미르국은 발라스크 알-얄라스키, 가르시아 이븐 룹, 산초, 솔탄을 물리치고 이 지역을 되찾았다.

같은 해, 경건왕 루이는 세긴을 해임했고, 이는 가르시아 히메네스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818년, 펩핀은 가스코뉴의 반란을 진압하고 팜플로나와 나바라로 피신한 추장들을 추격했다. 에블루스와 아즈나르 산체스가 이끄는 군대는 팜플로나에서 저항 없이 목표를 달성했지만, 돌아오는 길에 매복 공격을 받고 패배했다.

나바라 왕국은 피레네 산맥 서부 남쪽과 비스케이 만에 거주하던 바스크인과 가스코뉴인 등의 바스크인 지역 일부를 차지했다. 이 지역은 로마 제국, 서고트족, 아랍인에게 완전히 정복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6세기 중반, 바스크인들은 피레네 산맥 북쪽으로 이동하여 독립을 유지했다. 현재 스페인 나바라 북서부는 주로 바스크인이 차지하고 있다.

3. 1. 초기 역사

서쪽 피레네 산맥의 부족들


나바라 왕국은 서쪽 피레네 산맥 남쪽, 팜플로나 주변 평야 지대에서 기원했다. 플리니우스와 리비우스 같은 로마 지리학자들에 따르면, 이 지역에는 바스콘족과 다른 관련 바스코니아-아키타니아 부족들이 살았다. 이들은 피레네 산맥 남쪽 사면과 비스케이 만 해안 일부에 거주했던 인도유럽어족 이전의 민족 집단이었다.[12] 이 부족들은 원시 바스크어와 아키타니아어 같은 바스크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다.

로마 제국은 기원전 74년에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지만, 바스콘족은 다른 부족들과 달리 로마 제국 내에서 자치권을 협상했다. 이 지역은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의 일부를 거쳐 카이사라우구스타(현대 사라고사)의 콘벤투스 유리디쿠스la 관할하에 있었다.

로마 제국은 도시화, 언어, 기반 시설, 상업 및 산업 분야에서 이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세르토리우스 전쟁 동안 폼페이우스는 바스콘 영토에 도시를 건설하도록 명령했고, 이로 인해 "폼파엘로"(현대 팜플로나)가 탄생했다. 바스콘족은 로마화되었지만, 바스크어는 시골과 산악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서로마 제국 쇠퇴 후, 바스콘족은 서고트 왕국에 편입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서고트 왕국은 내전 중이었고, 이는 이베리아 반도의 우마이야 칼리파 정복의 기회를 제공했다. 바스크 지도자들은 코르도바 에미르국에 합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718년, 팜플로나는 코르도바에 조공을 바치는 대신 광범위한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메로빙거 왕조 프랑스와 아키텐 공국 가스콘과의 강력한 접촉을 보여주는 매장 장식, 이슬람 비문이 새겨진 물품, 팜플로나의 무슬림 묘지 등은 아랍 침략 이후 수십 년 동안 무슬림 주둔군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팜플로나 왕국의 기원과 건설은 메로빙거 왕조와 카롤링거 왕조 하 프랑크 왕국의 남쪽 확장과 관련이 있다. 601년경, 로마 노베엠포풀라니아를 중심으로 바스코뉴 공국(Wasconiaela)이 설립되었다. 최초의 바스코뉴 공작은 게니알이었다.

바스코뉴 공국은 국경 지역으로서 다양한 수준의 자치권을 가졌다. 카롤링거 왕조의 탄압은 가스코뉴의 루포 2세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짧은 펩핀은 아키텐 전쟁(760~768)을 통해 봉기를 진압했고, 공국은 툴루즈 통치하의 여러 백작령으로 분할되었다. 히스파니아 마르카는 카롤링거 제국과 코르도바 에미르국 사이의 완충국 역할을 했다.

샤를마뉴 치하의 프랑크족은 이베리아 반도 북쪽과 동쪽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장했다. 778년, 샤를마뉴는 사라고사 점령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철수했다. 철수 중 팜플로나 성벽을 파괴했는데, 이는 카롤링거 왕조가 기독교 도시에 사용했던 방법과 유사하다.

778년 8월 15일, 롤랑이 이끄는 프랑크 군대 후위는 롱소 전투에서 바스크 부족의 공격을 받았다. 롤랑은 죽었고 후위는 흩어졌다.

3. 2. 초기 국가와 왕국의 성립

프랑크 왕국과 코르도바의 이익이 경쟁하는 상황에서, 바스크족의 수장인 이니고 아리스타가 권력을 장악했다.[15] 전통에 따르면, 그는 824년 팜플로나의 왕으로 선출되어 80년 동안 지속될 팜플로나 왕조를 세웠다고 한다.

초기 나바라 왕국은 고니, 게살라스, 라나, 알린, 데이에리, 베루에사, 마녜루 계곡으로 구성되었을 수 있으며, 이후 에스텔라의 메린다드를 형성했다. 이니고 아리스타 치하에서 팜플로나는 코르도바에 대한 반란과 타협을 조정하는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그의 아들 가르시아 이니게스(851/2~882)와 손자 포르툰 가르세스(882-905) 시대에도 이어졌다. 그러나 포르툰 가르세스는 무능력하여, 결국 새로운 왕조에게 굴복하고 퇴위해야 했다.

나바라 왕 칭호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산초 2세로, 970년부터 994년까지 나바라 왕이자 아라곤 백작으로서 팜플로나를 다스렸다. 산초 3세(산초 대왕, 재위: 1000년 - 1035년)는 카스티야 백작령의 여상속인 무니아도나(Munia Dona)와 결혼하여, 레온에 속해 있던 피스엘가(Pisuerga)와 세아(Cea)를 정복하고 카스티야를 얻어, 갈리시아 국경에서 바르셀로나까지를 지배하며 최대 영토를 확보했다.

산초 대왕 사후, 영토는 네 명의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고, 다시 나바라, 카스티야, 아라곤으로 나뉘었지만, 각 지역은 나바라의 히메노 왕가가 다스렸다.

3. 2. 1. 이니고 아리스타 왕조

이니고 아리스타는 프랑크 왕국과 코르도바 칼리프국 양쪽의 이익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바스크족의 지도자로 부상했다.[15] 그는 824년에 팜플로나의 왕으로 추대되어 80년간 지속된 팜플로나 왕조를 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팜플로나 주변 지역은 이니고의 이복형제인 무사 이븐 무사 알카사위가 다스리는 코르도바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팜플로나는 기독교 신앙과 자치 행정을 유지했지만, 코르도바에 ''지즈야''를 포함한 조세를 납부해야 했다. 아랍 기록에서 이니고 아리스타는 바스크인(''bashkunish'')의 ''사히브''(영주) 또는 ''아미르''(군주)로 불렸는데, 이는 코르도바의 지배하에 있는 비무슬림(''울루지'')의 낮은 지위를 보여준다.[16] 841년, 이니고는 무사 이븐 무사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고, 무사는 결국 항복했지만 이니고는 851/2년 사망할 때까지 저항을 계속했다.

카롤링거 왕조의 연대기에는 팜플로나와 나바라 왕국이 구분되어 나타난다. 778년 팜플로나는 나바라의 요새로 언급되었고, 806년에는 나바라와 그 주요 도시가 구분되어 ''퐁텐블로 연대기''에 "''Induonis et Mitionis, ducum Navarrorum''"(이니고[이니고 아리스타]와 미시오[아마도 히메노], 나바라의 공작들)라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아랍 연대기 저자들은 이러한 구분을 하지 않고, 주민 대다수가 바스크인이었기 때문에 ''바스코네스''를 음역한 ''바스쿠니시''라고만 칭했다.[17] 초기 나바라 왕국은 고니, 게살라스, 라나, 알린, 데이에리, 베루에사, 마녜루 계곡으로 구성되었으며, 이후 에스텔라의 메린다드를 형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니고 아리스타의 아들 가르시아 이니게스(851/2~882)는 팜플로나를 중심으로 코르도바에 대한 저항과 타협을 조율하는 역할을 이어받았다. 그는 아스투리아스, 가스코뉴, 아라곤, 그리고 무사 이븐 무사에 반대하는 사라고사의 가문들과 동맹을 맺었다. 가르시아 이니게스의 아들 포르툰 가르세스(882-905)는 코르도바에 20년간 억류되었다가 풀려나 팜플로나의 봉신으로 왕위를 계승했다. 이들 두 왕은 영토를 크게 확장하지 못했다. 나바라의 불안정한 종속 시기는 코르도바 에미르국 내부의 반란으로 인해 피레네 산맥 서쪽의 세력을 진압할 여력이 없어지면서 막을 내렸다. 무능력한 포르툰은 나바라 동부의 강력한 반무슬림 세력에게 왕위를 내주고 물러나야 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알안달루스 기록에서는 팜플로나 통치자들을 '폭군'이라 칭하기 시작했고, 팜플로나는 코르도바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3. 2. 2. 히메네스 왕조

이니고 아리스타는 프랑크 왕국과 코르도바의 이익이 경쟁하는 상황에서 바스크족의 수장으로서 권력을 장악했다.[15] 그는 824년에 팜플로나의 왕으로 선출되어 80년 동안 지속될 팜플로나 왕조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팜플로나 주변 지역은 이니고의 이복형제인 무사 이븐 무사 알카사위가 통치하는 코르도바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팜플로나는 기독교를 유지하고 자체 행정을 유지했지만, 에미르국에 ''지즈야''를 포함한 전통적인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16]

팜플로나와 나바라 왕국은 카롤링거 연대기에 구분되어 나타난다. 팜플로나는 778년 나바라의 요새로 언급되며, 806년에는 나바라와 그 주요 도시가 구분되어 ''퐁텐블로 연대기''에 "''Induonis et Mitionis, ducum Navarrorum''"(인두오[이니고 아리스타]와 미시오[아마도 히메노], 나바라의 공작들)라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아랍 연대기 기록자들은 인구 대다수가 바스크인이었기 때문에 ''바스코네스''의 음역어인 ''바스쿠니시''라고만 언급했다.[17]

이니고 아리스타의 아들인 가르시아 이니게스(851/2~882)는 아스투리아스, 가스코뉴, 아라곤, 그리고 무사 이븐 무사에 반대하는 사라고사의 가문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의 아들 포르툰 가르세스(882-905)는 에미르국의 봉신으로 팜플로나를 계승하기 전에 20년 동안 코르도바에 억류되었다. 무능한 포르툰은 나바라 동부의 강력한 반무슬림 세력인 새로운 왕조에 굴복하여 퇴위해야 했다.

나바라 왕 칭호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산초 2세였다. 그는 970년부터 994년까지 나바라 왕이자 아라곤 백작으로서 팜플로나를 다스렸다. 아라곤 지역은 어머니로부터 상속받았다. 하이메 델 부르고(Jaime del Burgo)의 『나바라 개요사』에 따르면, 팜플로나 왕이 987년에 아라스투(Araschu)의 저택을 산 후안 데 라 페냐(San Juan de la Peña)에 기증할 당시 처음으로 나바라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고 한다.

산초 2세와 그 뒤를 잇는 왕들의 통치하에 나바라 왕국은 최대 영토에 도달했다. 산초 3세(산초 대왕, 재위: 1000년 - 1035년)는 카스티야 백작령의 여상속인 무니아도나(Munia Dona)와 결혼했다. 그 결과, 나바라 왕국은 레온에 속해 있던 피스엘가(Pisuerga)와 세아(Cea)를 정복하고 카스티야를 얻어, 갈리시아 국경에서 바르셀로나까지를 지배하게 되었다.

대왕의 사후, 영토는 네 명의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영토는 다시 나바라, 카스티야, 아라곤으로 나뉘었지만, 각 지역은 나바라의 히메노 왕가가 다스렸다.

4. 나바라 왕국의 분열과 재통합

910년경 팜플로나 왕국 (나바라, 주황색)


산초 1세 가르세스(905~925)는 코르도바 에미르국(Emirate of Córdoba)과의 동맹을 끊고 에가 강을 따라 남쪽으로 에브로 강(Ebro)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나헤라(Nájera)와 칼라오라(Calahorra) 지역을 차지했다.[18] 이에 압드 알라흐만 3세(Abd-ar-Rahman III)는 두 차례 원정을 통해 발데훈케라 전투(Battle of Valdejunquera)에서 승리하고 에브로 강 남쪽 땅을 되찾았으며, 924년에는 팜플로나를 공격했다. 산초 1세는 레온 왕 오르도뇨 2세와 결혼 동맹을 맺어 칼라오라 지역을 확보했다. 아라고 강과 갈레고 강 유역은 소브라르베(Sobrarbe)까지 팜플로나의 통제하에 들어갔으며, 서쪽으로는 왕국의 영토가 아스투리아스 왕국(Kingdom of Asturias)의 통제하에 있던 알라바와 카스티야 백작령에 이르렀다. 당시 왕국의 면적은 약 15000km2였다.

''알벨다 연대기(Chronicle of Albelda)''(976년에 마지막으로 업데이트됨)는 905년 팜플로나 왕국의 범위를 처음으로 개괄하고 있는데, 나헤라와 아르바(아마도 아라바(Araba))까지 확장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것이 서부 바스크 지방도 포함되었음을 시사한다고 믿는다.

산초 가르세스가 죽은 후, 그의 동생인 히메노 가르세스(925~931)가 왕위를 계승했고, 그의 마지막 해에는 산초의 미성년 아들인 가르시아 산체스(931~970)가 함께 통치했다. 가르시아는 어머니 토다 아스나레스(Toda Aznarez)의 보호 아래 통치를 계속했으며, 그녀는 이베리아 북부의 다른 기독교 왕국 및 백작령과 여러 정략 결혼을 주선했다. 우라카는 레온의 라미로 2세(Ramiro II of León)와 결혼했고, 산초의 다른 딸들은 카스티야, 알라바, 빅고르의 백작들과 결혼했다. 934년 가르시아 산체스는 압드 알라흐만 3세(Abd-ar-Rahman III)에게 왕국에 개입할 것을 요청했고, 이것은 팜플로나의 조공 지위와 코르도바의 잦은 처벌 원정의 시대를 시작했다.

가르시아 산체스의 상속자인 산초 2세(970~994)는 그의 이복형제인 비구에라의 라미로 가르세스(Ramiro Garcés of Viguera)를 단명한 비구에라 왕국(Kingdom of Viguera)을 통치하도록 세웠다. 10세기 후반 알 안달루스(Al Andalus)의 통치자 알만조르(Almanzor)는 기독교 왕국에 대한 습격을 자주 감행했고, 적어도 아홉 차례 팜플로나 지역을 공격했다. 966년 코르도바 칼리파국(Caliphate of Córdoba)과 왕국 간의 충돌로 칼라오라와 시다코스 강(Cidacos) 유역이 상실되었다. 산초 2세는 평화의 증표로 그의 딸과 아들 중 한 명을 넘겨주어야 했다. 산초 2세 사후 가르시아 산체스 2세 통치 기간 동안 팜플로나는 칼리파국에게 여러 차례 공격을 받았고, 999년에는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왕 자신은 1000년 습격 중 사망했다.

가르시아 산체스 2세 사후 왕위는 당시 여덟 살이었던 산초 3세에게 넘어갔다. 1002년 알만조르의 죽음과 1008년 그의 후계자 압드 알-말리크 이븐 마르완(Abd al-Malik ibn Marwan)의 죽음으로 코르도바 칼리파국이 쇠퇴하고 카스티야 백작령이 남쪽으로 진출하는 반면, 산초 3세가 이끄는 팜플로나는 사라고사 타이파(Taifa of Zaragoza)의 국경 지역에서 왕국의 지위를 강화했다.[19]

1000년 팜플로나 왕국 (진한 주황색)


1011년 산초 3세는 카스티야 백작 산초 가르시아의 딸인 카스티야의 무니아도나(Muniadona of Castile)와 결혼했다. 1016년 카스티야 백작령과 나바라 왕국은 미래 확장에 관한 조약을 맺었다. 1028년 카스티야의 가르시아 산체스 백작이 암살당하자 산초는 그의 막내아들 페르디난드를 백작으로 임명할 수 있었다. 그는 레온 왕국(Kingdom of León)에 속한 피수에르가(Pisuerga)와 세아(Cea) 지역을 장악하고 그 왕국의 중심부로 군대를 진격하여 레온 왕 레온의 베르무도 3세(Bermudo III of León)가 갈리시아로 피신하도록 강요했다. 따라서 산초는 갈리시아 국경에서 바르셀로나 백작령(County of Barcelona) 국경까지 이베리아 북부를 효과적으로 통치했다.

1035년 산초 3세가 죽었을 때 왕국은 역사상 가장 큰 규모에 달했으며, 이후 그의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4. 1. 산초 3세 사후의 분열

산초 3세 사후, 나바라 왕국은 그의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장남 가르시아 산체스 3세는 팜플로나를 중심으로 한 나바라 왕국의 본토를, 차남 페르난도 1세는 카스티야를, 서자 라미로 1세는 아라곤을 각각 상속받았다. 이로써 나바라 왕국은 나바라, 카스티야, 아라곤의 세 왕국으로 분열되었지만, 각 지역은 모두 나바라의 히메노 왕가 출신이 다스렸다.[19]

산초 3세는 카스티야의 무니아도나(Muniadona of Castile)와 결혼하여 카스티야 백작령과의 유대를 강화했고, 1016년에는 미래 확장에 관한 조약을 맺었다. 팜플로나는 남쪽과 동쪽, 소리아 동부 지역과 에브로 계곡으로 확장되었으며, 당시 사라고사의 일부였던 영토도 포함했다. 1028년 카스티야 백작이 암살당하자 산초 3세는 아들 페르난도를 백작으로 임명했고, 레온 왕국(Kingdom of León)에 속한 피수에르가(Pisuerga)와 세아(Cea) 지역을 장악하여 레온 왕 레온의 베르무도 3세(Bermudo III of León)가 갈리시아로 피신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산초 3세는 갈리시아 국경에서 바르셀로나 백작령(County of Barcelona) 국경까지 이베리아 북부를 효과적으로 통치했다.

그러나 산초 3세 사후, 그의 영토는 분할되었고, 이후 페르난도 2세 때까지 통합되지 못했다. 카스티야는 레온과 연합했고, 아라곤은 영토를 확장하고 정략결혼을 통해 카탈루냐와 연합했다.

4. 2. 카스티야와의 갈등과 아라곤과의 연합



산초 가르세스(Sancho Garcés)(905~925)는 코르도바 에미르국(Emirate of Córdoba)과의 동맹을 종식하고 에가 강을 따라 남쪽으로 에브로 강(Ebro)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나헤라(Nájera)와 칼라오라(Calahorra) 지역을 차지했다.[18] 이에 압드 알라흐만 3세(Abd-ar-Rahman III)는 두 차례 원정을 통해 발데훈케라 전투(Battle of Valdejunquera)에서 승리하고 에브로 강 남쪽 땅을 되찾았으며, 924년에는 팜플로나를 공격했다.[18] 산초 1세는 레온 왕 오르도뇨 2세와 결혼 동맹을 맺어 칼라오라 지역을 확보했다.[18] 아라고 강과 갈레고 강 유역은 소브라르베(Sobrarbe)까지 팜플로나의 통제하에 들어갔으며, 서쪽으로는 왕국의 영토가 아스투리아스 왕국(Kingdom of Asturias)의 통제하에 있던 알라바와 카스티야 백작령에 이르렀다. 당시 왕국의 면적은 약 15000km2였다.

산초 가르세스가 죽은 후, 그의 동생인 히메노 가르세스(Jimeno Garcés)(925~931)가 왕위를 계승했고, 그의 마지막 해에는 산초의 미성년 아들인 가르시아 산체스(García Sánchez)(931~970)가 함께 통치했다. 가르시아는 어머니 토다 아스나레스(Toda Aznarez)의 보호 아래 통치를 계속했으며, 그녀는 이베리아 북부의 다른 기독교 왕국 및 백작령과 여러 정략 결혼을 주선했다. 우라카(Urraca)는 레온의 라미로 2세(Ramiro II of León)와 결혼했고, 산초의 다른 딸들은 카스티야, 알라바, 빅고르의 백작들과 결혼했다. 934년 가르시아 산체스는 압드 알라흐만 3세(Abd-ar-Rahman III)에게 왕국에 개입할 것을 요청했고, 이는 팜플로나의 조공 지위와 코르도바의 잦은 처벌 원정의 시대를 시작했다.

가르시아 산체스의 상속자인 산초 2세(970~994)는 그의 이복형제인 비구에라의 라미로 가르세스(Ramiro Garcés of Viguera)를 비구에라 왕국(Kingdom of Viguera)을 통치하도록 세웠다. 10세기 후반 알 안달루스(Al Andalus)의 통치자 알만조르(Almanzor)는 기독교 왕국에 대한 습격을 자주 감행했고, 적어도 아홉 차례 팜플로나 지역을 공격했다. 966년 코르도바 칼리파국(Caliphate of Córdoba)과 왕국 간의 충돌로 칼라오라와 시다코스 강(Cidacos) 유역이 상실되었다. 산초 2세는 평화의 증표로 그의 딸과 아들 중 한 명을 넘겨주어야 했다. 산초 2세 사후 가르시아 산체스 2세 통치 기간 동안 팜플로나는 칼리파국에게 여러 차례 공격을 받았고, 999년에는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왕 자신은 1000년 습격 중 사망했다.

가르시아 산체스 2세 사후 왕위는 당시 여덟 살이었던 산초 3세에게 넘어갔다. 1002년 알만조르의 죽음과 1008년 그의 후계자 압드 알-말리크 이븐 마르완(Abd al-Malik ibn Marwan)의 죽음으로 코르도바 칼리파국이 쇠퇴하고 카스티야 백작령이 남쪽으로 진출하는 반면, 산초 3세가 이끄는 팜플로나는 사라고사 타이파(Taifa of Zaragoza)의 국경 지역에서 왕국의 지위를 강화하여 로아레(Loarre), 나바라의 푸네스(Funes, Navarra), 소스 델 레이 카톨리코(Sos del Rey Católico), 운카스티요(Uncastillo), 아를라스(Arlas), 카파로소(Caparroso), 볼타냐(Boltaña)의 영토를 통제했다.[19]

1011년 산초 3세는 카스티야 백작 산초 가르시아의 딸인 카스티야의 무니아도나(Muniadona of Castile)와 결혼했다. 1016년 카스티야 백작령과 나바라 왕국은 미래 확장에 관한 조약을 맺었다. 팜플로나는 남쪽과 동쪽, 소리아 동부 지역과 에브로 강 유역으로 확장되었고, 당시 사라고사의 일부였던 영토도 포함되었다. 따라서 팜플로나 왕국은 팜플로나, 나헤라, 아라고 사이에 15000km2의 영토를 포함했고, 팜플로나와 아라고 출신의 봉신들을 거느렸다.

1028년 카스티야의 가르시아 산체스 백작이 암살당하자 산초는 그의 막내아들 페르디난드를 백작으로 임명할 수 있었다. 그는 레온 왕국(Kingdom of León)에 속한 피수에르가(Pisuerga)와 세아(Cea) 지역을 장악하고 그 왕국의 중심부로 군대를 진격하여 레온 왕 레온의 베르무도 3세(Bermudo III of León)가 갈리시아로 피신하도록 강요했다. 따라서 산초는 갈리시아 국경에서 바르셀로나 백작령(County of Barcelona) 국경까지 이베리아 북부를 효과적으로 통치했다.

1035년 산초 3세가 죽었을 때 왕국은 역사상 가장 큰 규모에 달했다.

이후 나바라 왕국은 독립을 유지하기 어려워지며 주변 강대국에 의존하게 된다. 가르시아 5세(1035~1054) 이후, 자신의 동생에게 암살당한 산초 4세(1054~1076)가 통치하였고, 그 후 아라곤 왕이 나바라 왕국의 영토를 다스리게 된다. 카스티야 왕국은 나바라 왕국의 서부를 지배하였다. 12세기에는 카스티야 왕국이 점차 리오하와 아라바를 병합하였다. 나바라는 아라곤과 연합(1076~1234)함으로써 동부의 분쟁을 피할 수 있었지만, 서부는 카스티야에 빼앗긴 채로 남게 되었다. 1200년경에는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8세가 바스크 지방의 비스카이아와 기푸스코아를 병합하였다. 타라소나는 1134년 나바라의 재독립 이후에도 아라곤의 소유로 남았다.

산초 4세의 암살(1076년) 후, 카스티야 왕 알폰소 6세와 아라곤의 산초 라미레스는 공동으로 나바라를 통치하였다. 에브로 강 이남의 도시와 바스크 지방은 카스티야의 통치가 되고, 나머지는 아라곤의 통치가 되어 1134년까지 이어졌다. 아라곤 통치자 3대, 산초 라미레스(1076~1096)와 그의 아들 페드로 산체스(1094~1104)는 우에스카를 정복하였고, 페드로 산체스의 동생 알폰소 엘 바타라도르(전투왕, 1104~1134)는 왕국 최대의 영토 확장을 달성하였다. 그는 무어인들로부터 투델라를 탈환(1114년)하고, 1042년에 잃었던 브레바 전역을 탈환하고, 부르고스 주로 침공하였다. 더 나아가 로하, 나헤라, 로그로뇨, 칼라오라, 알파로는 그에게 복종하였고, 기푸스코아의 항구에 전함을 정박하는 동안 짧은 기간이었지만 바욘도 복종하였다.

1134년, 알폰소가 사망한 후, 나바라와 아라곤은 분리되었다. 아라곤에서는 성직자였던 알폰소의 동생 라미로 2세가 왕위에 올랐다. 나바라에서는 엘 시드의 손자이자 산초 대왕의 아들 가르시아 5세(나바라 왕으로서는 3세)의 서자(庶子)인 몬손 영주 가르시아 라미레스가 라미로 1세의 계통인 아라곤 왕가에게 빼앗겼던 나바라 왕위를 1134년에 되찾았다. 가르시아 라미레스는 1136년에는 리오하를 카스티야에 넘겨주었고, 1157년에는 타라고나를 아라곤에 넘겨주었으며, 심지어 카스티야의 알폰소 7세의 신하라고도 자칭하였다.

가르시아 라미레스의 아들 산초 가르시아 엘 사비오(현왕, 1150~1194)는 나바라를 내외적으로 굳건히 하였고, 많은 도시에 헌장을 제정하였으며, 전쟁에서도 패배하지 않았다. 현왕은 딸 베렌게라를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와 결혼시키는 데 동의한다.

4. 3. 나바라 왕국의 재건과 서부 나바라의 상실

산초 가르세스 1세(905년~925년)는 포르툰 가르세스로부터 정치 권력을 장악한 후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코르도바 에미르국(Emirate of Córdoba)과의 동맹을 끊었다. 에가 강을 따라 남쪽으로 에브로 강(Ebro)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나헤라(Nájera)와 칼라오라(Calahorra) 지역을 차지하면서 바누 카시(Banu Qasi) 가문의 쇠퇴를 이끌었다.[18] 이에 압드 알라흐만 3세(Abd-ar-Rahman III)는 두 차례 원정을 통해 발데훈케라 전투(Battle of Valdejunquera)에서 승리하고 에브로 강 남쪽 땅을 되찾았으며, 924년에는 팜플로나를 공격했다. 산초 가르세스의 딸 산차(Sancha)는 레온 왕 오르도뇨 2세와 결혼하여 레온 왕국과 동맹을 맺고 칼라오라 지역을 확보했다.[18] 아라고 강과 갈레고 강의 계곡은 소브라르베(Sobrarbe)까지 팜플로나의 통제하에 들어갔으며, 서쪽으로는 왕국의 영토가 아스투리아스 왕국(Kingdom of Asturias)의 통제하에 있던 알라바(Álava)와 카스티야(Castile) 백작령에 이르렀다. 당시 왕국의 면적은 약 15000km2였다.

''알벨다 연대기(Chronicle of Albelda)''(976년에 마지막으로 업데이트됨)는 905년 팜플로나 왕국의 범위를 처음으로 개괄하고 있는데, 나헤라와 아르바(아마도 아라바(Araba))까지 확장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것이 서부 바스크 지방도 포함되었음을 시사한다고 믿는다.

산초 가르세스가 죽은 후, 왕위는 그의 동생인 히메노 가르세스(Jimeno Garcés)(925~931)에게 넘어갔고, 그의 마지막 해에는 산초의 미성년 아들인 가르시아 산체스(García Sánchez)(931~970)가 함께 통치했다. 가르시아는 어머니이자 산초의 미망인인 토다 아스나레스(Toda Aznarez)의 보호 아래 통치를 계속했으며, 그녀는 이베리아 북부의 다른 기독교 왕국과 백작령과 여러 정략 결혼을 주선했다. 934년 가르시아 산체스 1세는 압드 알라흐만 3세(Abd-ar-Rahman III)에게 왕국에 개입할 것을 요청했고, 이것은 팜플로나의 조공 지위와 코르도바의 잦은 처벌 원정의 시대를 시작했다.

가르시아 산체스의 상속자인 산초 2세(970~994)는 그의 이복형제인 비구에라의 라미로 가르세스(Ramiro Garcés of Viguera)를 단명한 비구에라 왕국(Kingdom of Viguera)을 통치하도록 세웠다. 하이메 델 부르고(Jaime del Burgo)의 ''나바라 일반사(Historia General de Navarra)''에 따르면, 987년 팜플로나 왕이 산 후안 데 라 페냐(San Juan de la Peña) 수도원에 알라스투에(Alastue) 마을을 기증한 것을 계기로 그는 "나바라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는데, 이는 이 칭호가 처음으로 사용된 시점이다.

10세기 후반 알 안달루스(Al Andalus)의 통치자 알만조르(Almanzor)는 기독교 왕국에 대한 습격을 자주 감행했고, 적어도 아홉 차례 팜플로나 지역을 공격했다. 966년 코르도바 칼리파국(Caliphate of Córdoba)과 왕국 간의 충돌로 칼라오라와 시다코스 강(Cidacos) 계곡이 상실되었다. 산초 2세 사후 가르시아 산체스 2세 통치 기간 동안 팜플로나 칼리파국은 여러 차례 공격을 받았고, 999년에는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왕 자신은 1000년 습격 중 사망했다.

가르시아 산체스 2세 사후 왕위는 당시 여덟 살이었던 산초 3세에게 넘어갔다. 1002년 알만조르의 죽음과 1008년 그의 후계자 압드 알-말리크 이븐 마르완(Abd al-Malik ibn Marwan)의 죽음으로 코르도바 칼리파국이 쇠퇴하고 카스티야 백작령이 남쪽으로 진출하는 반면, 산초 가르세스 3세가 이끄는 팜플로나는 사라고사 타이파(Taifa of Zaragoza)의 국경 지역에서 왕국의 지위를 강화했다.

1011년 산초 3세는 카스티야 백작 산초 가르시아의 딸인 카스티야의 무니아도나(Muniadona of Castile)와 결혼했다. 1016년 카스티야 백작령과 나바라 왕국은 미래 확장에 관한 조약을 맺었다. 1028년 카스티야의 가르시아 산체스 백작이 암살당하자 산초는 그의 막내아들 페르디난드를 백작으로 임명할 수 있었다. 그는 또한 가스코뉴 공국(Duchy of Gascony)에 대한 보호령을 행사했다. 그는 레온 왕국(Kingdom of León)에 속한 피수에르가(Pisuerga)와 세아(Cea) 지역을 장악하고 그 왕국의 중심부로 군대를 진격하여 레온 왕 레온의 베르무도 3세(Bermudo III of León)가 갈리시아의 피난처로 도망치도록 강요했다. 따라서 산초는 갈리시아 국경에서 바르셀로나 백작령(County of Barcelona) 국경까지 이베리아 북부를 효과적으로 통치했다.

1035년 산초 3세가 죽었을 때 왕국은 역사상 가장 큰 규모에 달했다. 산초 3세는 문제가 있는 유언장을 남겼는데, 그 유언장에서 그는 자신의 영토를 세 개의 왕국으로 나누었다.

나바라 왕국은 이후 독립을 유지하기 어려워지며 주변 강대국에 의존하게 된다. 가르시아 5세(1035년 - 1054년) 이후, 자신의 동생에게 암살당한 산초 4세(1054년 - 1076년)가 통치하였고, 그 후 아라곤 왕이 나바라 왕국의 영토를 다스리게 된다. 카스티야 왕국은 나바라 왕국의 서부를 지배하였다. 12세기에는 카스티야 왕국이 점차 리오하와 아라바를 병합하였다. 나바라는 아라곤과 연합(1076년 - 1234년)함으로써 동부의 분쟁을 피할 수 있었지만, 서부는 카스티야에 빼앗긴 채로 남게 되었다. 1200년경에는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8세가 다른 바스크 지방의 2개 지역(현재는 주)인 비스카이아와 기푸스코아를 병합하였다. 타라소나는 1134년 나바라의 재독립 이후에도 아라곤의 소유로 남았다. 바스크 지방의 비스카이 통치는 카스티야의 보호하에 있었지만 독립에 가까운 상태가 계속되었고, 그 때문에 이들의 왕자들은 비스카이 통치 공(公)이라 불렸다.

산초 4세의 암살(1076년) 후, 카스티야 왕 알폰소 6세와 아라곤의 산초 라미레스는 공동으로 나바라를 통치하였다. 에브로 강 이남의 도시와 바스크 지방이 카스티야의 통치가 되고, 나머지가 아라곤의 통치가 되어 1134년까지 이어졌다. 아라곤 통치자 3대, 산초 라미레스(1076년 - 1096년)와 그의 아들 페드로 산체스(1094년 - 1104년)는 우에스카를 정복하였고, 페드로 산체스의 동생 알폰소 엘 바타라도르(전투왕, 1104년 - 1134년)는 왕국 최대의 영토 확장을 달성하였다. 무어인들로부터 투델라를 탈취(1114년)하고, 1042년에 잃었던 브레바 전역을 탈환하고, 부르고스 주로 침공하였다. 더 나아가 로하, 나헤라, 로그로뇨, 칼라오라, 알파로는 그에게 복종하였고, 기푸스코아의 항구에 전함을 정박하는 동안 짧은 기간이었지만 바욘도 복종하였다.

1134년, 특별한 일 없이 알폰소가 사망한 후, 나바라와 아라곤은 분리되었다. 아라곤에서는 성직자였던 알폰소의 동생 라미로 2세가 왕위에 올랐다. 나바라에서는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엘 시드)의 손자이자 산초 대왕의 아들 가르시아 5세(나바라 왕으로서는 3세)의 서자(庶子)인 몬손 영주 가르시아 라미레스가 대왕의 서자 라미로 1세의 계통인 아라곤 왕가에게 빼앗겼던 나바라 왕위를 1134년에 되찾았다. 가르시아 라미레스는 1136년에는 리오하를 카스티야에 넘겨주었고, 1157년에는 타라고나를 아라곤에 넘겨주었으며, 심지어 카스티야의 알폰소 7세의 신하라고도 자칭하였다. 그는 매우 무능하였고, 자주 교회나 수도원의 수입에 의존하였다.

가르시아 라미레스의 아들 산초 가르시아 엘 사비오(현왕, 1150년 - 1194년)는 학구열 끝에 정치가로서도 유능해져 나바라를 내외적으로 굳건히 하였고, 많은 도시에 헌장을 제정하였으며, 전쟁에서도 패배하지 않았다. 현왕은 딸 베렌게라를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와 결혼시키는 데 동의한다.

5. 중세 후기 나바라

산초 1세 대왕 통치 기간 동안 팜플로나 대교구의 수도였던 레이레 수도원을 중심으로 교회 생활 개혁이 이루어졌다. 1035년에는 무어인의 침략으로 황폐화되었던 팔렌시아 주교좌가 재건되었고, 1045년에는 300년 이상 무어인의 지배하에 있었던 칼라오라 시 탈환 후 그곳에도 주교좌가 설립되었다. 나헤라 주교구와 알라바 주교구도 흡수되었다.[11]

1134년 알폰소 1세가 사망한 후, 아라곤과 나바라는 템플 기사단에 영토를 유언으로 남긴 알폰소 1세의 결정을 거부하고 각각 다른 왕을 선택했다. 나바라의 첫 번째 왕은 가르시아 라미레스였다. 산초 6세는 여러 도시에 특권 문서를 부여하고, ''rex Navarrae'' 또는 ''rex Navarrorum''이라고 칭하는 왕실 문서를 발행한 최초의 왕이었다.[11]

1190년 나바라(연한 녹색)


1170년 알폰소 8세와 헨리 2세의 딸 엘레오노르의 결혼으로 카스티야는 가스코뉴를 지참금으로 주장했고, 이는 1173-1176년 나바라 침략의 구실이 되었다. 1177년 분쟁은 헨리 2세의 중재에 회부되었으나, 헨리는 법적 근거에 기반한 판결 대신 1158년 경계로 돌아가 7년간 휴전하도록 결정했다. 그러나 카스티야는 곧 타협을 위반하고 나바라를 괴롭혔다.[11]

산초 7세 "강한 왕"(1194-1234)은 교회와 수도원의 수입을 몰수하고 1198년 팜플로나 교구에 그의 궁전과 소유지를 헌납했다. 1199년 알폰소 8세는 나바라 해안 지역을 장악하려 했고, 첼레스티누스 3세가 개입하여 이를 좌절시켰다.[13] 비토리아와 트레비뇨는 카스티야의 공격에 저항했지만, 9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비토리아는 항복했고, 트레비뇨는 무력으로 정복되었다. 1200년까지 서부 나바라의 정복이 완료되었고, 카스티야는 이 지역들이 기존의 관습과 법률을 유지하도록 허용했다. 1207년 과달라하라 합의는 5년간의 휴전을 보장했지만, 카스티야는 여전히 사실상의 정책을 유지했다.[13] 산초 7세는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1212)에 참여하여 무함마드 안-나시르를 물리친 기독교 동맹에 소규모 병력을 추가했다. 그는 다리의 정맥류 궤양으로 고통받아 투델라로 은퇴하여 1234년 사망했다.

1441년 나바라의 블랑슈 1세 여왕의 죽음 이후, 나바라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지속적인 분쟁에 휘말렸다. 아라곤의 요한 2세는 아들 비아나 공작 샤를에게 총독 지위만을 부여했는데, 이는 블랑슈 1세의 뜻과 달랐다. 1450년 요한 2세는 후아나 엔리케스의 부추김으로 아들 페르난도 2세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려 했다. 1451년 나바라는 아그라몽트와 보몽트라는 두 개의 연합으로 분열되어 내전이 발발했다. 아그라몽트는 아라곤의 요한 2세를, 보몽트는 비아나 공작 샤를을 지지했다.[22] 샤를은 1451년 아이바르에서 아버지에게 패배하고 2년간 포로로 잡혀 ''나바라 연대기''를 저술했다. 1460년 계모의 선동으로 다시 투옥되었으나, 카탈루냐인 반란으로 해방되어 카탈루냐 총독이 되었다. 1461년 계모에게 독살되어 사망했고, 나바라의 블랑슈 2세를 상속인으로 지명했지만, 그녀는 요한 2세에게 투옥되어 1464년 사망했다.

1461년 샤를 사후, 나바라의 엘레오노르가 비아나 공주로 선포되었지만, 나바라 남서쪽 끝과 로스 아르코스는 카스티야의 엔리케 4세에게 점령되었다. 1463년 카스티야 합병은 루이 11세에 의해 지지되었다.[23] 요한 2세는 1479년까지 통치했고, 엘레오노르 여왕은 15일간 계승 후 사망, 나바라의 프랑수아 포뵈에게 왕관을 남겼지만, 또 다른 불안정 시대를 열었다. 나바라의 카트린 1세는 발루아의 마들렌 후견하에 있었고, 나르본의 푸아 백작 장이 왕위를 주장했다.

카트린 섭정 발루아의 마들렌은 알브레의 장과 어린 여왕을 결혼시키기로 결정했다.[22] 아라곤 페르난도 2세는 발렌시아 조약으로 무역을 회복했지만, 카스티야 군대를 주둔시키고 프랑스 군대를 금지했다.[22]

"성스러운 기름 부음의 성사가 완료되기 전에, 여러분의 이 복된 대관식을 위해, 여러분 이전의 나바라 군주들이 했던 것처럼, 백성에게 맹세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백성도 관습에 따라 여러분에게 맹세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 우리는 [...] 나바라 전역의 주교들, 귀족들 [...] 그리고 도시와 좋은 마을의 사람들과 나바라의 모든 백성에게 [...] 나바라 왕국 전역에서 [...] 모든 푸에로, 그리고 관습, 세금 면제, 자유, 여러분 각자가 가지고 있는 특권—여기에 있든 없든—을 맹세합니다."
카트린과 3세 장의 대관식(1494)에 앞서 나바라 왕국에 대해 의무적으로 해야 할 맹세와 그 맹세에 대한 지시 사항.



페르난도는 종교재판을 도입하려 했지만, 1510년 투델라 당국은 "자칭 종교재판관"을 추방했다. 카트린과 장 3세는 프랑스 왕실 지원이 부족했고, 프랑스의 샤를 8세와 프랑스의 루이 12세는 푸아의 장을 왕으로 선포하려 했다. 1494년 왕실 가족 대관식에서 카트린 1세와 장 3세는 나바라 자유 존중을 맹세했지만, 아라곤 주교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 외교관 뮌처는 나바라-베른 왕국을 스위스 같은 국가로 정의했다.[24] 페르난도는 카스티야로부터 전쟁을 포기했지만, 레린 백작 루이 드 보몽 저항에 부딪혔다.

1495년 발루아의 마들렌 사망 후, 알브레의 알랭 1세는 레린 백작이 그라나다에서 보상받는 조약에 서명했다. 페르난도는 올리테 주둔 권리 등 요새를 장악했다. 카트린 여왕 딸 마들렌은 카스티야에서 사망했다(1504).[22] 1500년 조약은 번복되었고, 페르난도와 타협하여 4년간 평화를 보장했다.

나바라 유대인들은 1498년 추방당하거나 개종해야 했다.[25]

마들렌 드 발루아, 1479년부터 1494년까지 나바라 섭정이자 카트린 1세 드 나바르 여왕 어머니


페르디난드 2세는 1506년 푸아의 제르맹과 재혼했지만, 아들은 곧 사망했다. 1508년 나바라 왕실 군대는 레린 백작 반란을 진압했다. 페르난도는 "절도, 기만, 협상"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509년 7월 23일).

나바라가 신성 동맹 가입을 거부하자, 페르디난드는 알브레 파문을 요청했다. 1512년 7월 21일 첫 교황령은 분열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을 꺼렸지만, 1513년 2월 18일 교황령은 카트린과 장 3세를 "이단자"로 규정했다. 1512년 7월 18일 돈 파드리케 데 톨레도는 캄브레 동맹 전쟁의 두 번째 단계의 맥락에서 나바라 침공을 명령받았다.

잔 달브레는 베른으로 도망쳤고, 팜플로나 등은 9월까지 함락되었다. 아그라몽트는 카트린 여왕을 지지했지만, 보몽트 영주 대부분은 점령군을 지지했다. 1512년 10월 장 3세는 팜플로나를 공격했지만 실패했고, 12월 말 카스티야 군대는 생장피에드포르에 있었다.

나바라 코르테스는 페르디난드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1513년 첫 카스티야 총독은 푸에로 존중을 선서했다. 스페인 종교 재판이 확대되었고, 나바라 유대인과 투델라 무슬림은 박해받았다.

잔 3세


폴버렐이 제시한 나바라 방어(1789)


1516년과 1521년에 해방을 위한 두 번의 시도가 있었는데, 특히 두 번째 시도는 인민 봉기의 지지를 받았다. 나바라가 독립을 되찾을 뻔했던 것은 1521년이었다. 아스파로스 장군이 이끄는 해방군이 팜플로나에 접근하자 시민들은 봉기하여 새로 지은 성에 있는 군사 총독 이니고 데 로욜라를 포위했다. 투델라와 다른 도시들도 알브레 가문에 대한 충성을 선언했다. 최근 코무네로스의 봉기를 진압한 직후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방해를 받았지만, 나바라-베른 군대는 왕국 전체를 해방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그 직후 아스파로스는 1521년 6월 30일 노아인 전투에서 대규모 카스티야 군대와 맞닥뜨렸다. 아스파로스는 포로로 잡혔고 군대는 완전히 패배했다.

5. 1. 샴파뉴 가문과 프랑스의 통치

산초 7세의 아들이 은둔 생활 후 1234년에 사망했을 때, 적장자가 없어 나바라계 히메노 가문의 남계는 단절되었다. 이에 산초의 여동생 블랑카의 아들이자 프랑스 귀족인 샹파뉴 백작 티보 4세가 테오발드 1세로 왕위에 올랐다. 테오발드 1세는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증손자였으며, 아들 테오발드 2세(티보 5세)는 루이 9세의 딸 이자벨과 결혼하는 등 프랑스 왕가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샹파뉴 백작가(블루아 가문)는 프랑스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귀족이었다. 그 때문에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보다는 프랑스에 관심이 집중되었고, 나바라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1274년 앙리 1세(앙리 3세)가 죽고 남자 후계자가 없어 어린 딸 후아나 1세(잔느)가 여왕이 되자 나바라는 주변 국가들의 표적이 되었다. 후아나의 어머니이자 프랑스 왕족인 블랑슈는 프랑스 왕 필리프 3세에게 보호를 요청했고, 왕세자 필리프(후의 필리프 4세)와 후아나의 결혼이 결정되었다. 필리프는 1284년 나바라 왕 필리페 1세가 되었고(이듬해 1285년 프랑스 왕위도 계승), 나바라는 프랑스로부터 총독을 통해 통치받게 되었다. 이후 카페 왕조가 단절될 때까지 프랑스와 나바라의 동군연합은 계속되었다.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6세의 즉위로 1328년 동군연합은 해소되었고, 루이 10세의 딸 잔느(후아나 2세)와 그녀의 남편이자 프랑스 왕족인 에브뢰 백작 필리프(필리페 3세)가 나바라 왕위에 올랐다.

에브뢰 가문의 나바라 왕은 후아나와 필리페의 손자 카를로스 3세(샤를 3세) 대에서 남계가 단절되었고, 1425년 카를로스의 딸 블랑카와 그녀의 남편인 아라곤 왕자 후안(후의 후안 2세)이 왕위를 계승했다.

5. 2. 푸아 가문과 알브레 가문의 통치

가르시아 라미레스는 "복수자"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나바라의 첫 번째 왕이었다. 그는 몽손의 영주였으며, 엘 시드의 손자이자 가르시아 산체스 3세의 서자 후손이었다. 학문의 후원자이자 능숙한 정치가였던 산초 6세 "현명한 왕"(1150-1194)은 나바라의 내부와 외부를 강화하고, 여러 도시에 푸에로를 부여했으며,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없었다. 그는 팜플로나와 관습적인 ''rex Pampilonensium''을 넘어서는 더 넓은 권력 기반에 호소하여 자신을 ''rex Navarrae'' 또는 ''rex Navarrorum''이라고 칭하는 왕실 문서를 발행한 최초의 왕이었다.[11] 산 세바스티안과 비토리아-가스테이스(1181)의 특권 문서에서 증명된 바와 같이, 원주민들은 페랄타 북쪽에 사는 사람들이 나바라 사람으로 정의된 것처럼 ''Navarri''라고 불렸다.

"복수자"와 산초 현명한 왕은 카스티야의 나바라 개입이 점점 증가하는 것에 직면했다. 1170년 알폰소 8세와 헨리 2세의 딸인 엘레오노르가 결혼했고, 카스티야 왕은 지참금의 일부로 가스코뉴를 주장했다. 이는 이후 몇 년(1173-1176) 동안 나바라 침략을 위한 필요한 구실이 되었으며, 해양 강국이 되기 위해 카스티야가 갈망했던 나바라의 해안 지구에 특히 초점을 맞추었다.[11] 1177년, 이 분쟁은 헨리 2세의 중재에 회부되었다. 나바라인들은 여러 가지 주장, 즉 "원주민의 입증된 의지"(''fide naturalium hominum suorum exhibita''), 카스티야인들에 의한 산초 가르세스 4세의 암살("강제로 추방당함", 1076), 그리고 법과 관습을 주장했고, 카스티야인들은 산초 가르세스 4세 사망 후 카스티야의 장악, 알폰소와 나바라의 왕조적 연관성, 그리고 톨레도 정복을 인용하여 주장을 펼쳤다.[11] 헨리는 양측이 제시한 법적 근거에 전적으로 기반한 판결을 내릴 용기가 없었고, 대신 1158년 통치 시작 당시 두 왕국이 보유했던 경계로 되돌아가도록 결정했으며, 7년간의 휴전에 동의했다. 따라서 나바라 사람들에게 부레바와 리오하 지역의 영구적 손실을 확인했다.[11] 그러나 곧 카스티야는 타협을 위반하고 외교적, 군사적 영역에서 나바라를 괴롭히기 위한 노력을 새롭게 시작했다.[11]

산초 6세 현명한 왕의 딸이자 블랑슈의 딸인 베렌가리아의 풍부한 지참금은 그녀를 리처드 1세에게 매력적인 신부로 만들었다. 그의 어머니인 엘레오노르 아키텐은 베렌가리아를 시칠리아로 호위하기 위해 피레네 산맥을 건너 1191년 5월 12일 키프로스에서 리처드와 결혼했다. 그녀는 통치 기간 동안 영국 땅을 밟지 않은 유일한 영국의 여왕으로 남아 있다. 산초 위대한 왕과 팜플로나 왕들의 남계 마지막 왕인 산초 현명한 왕의 후계자 산초 7세 "강한 왕"(''Sancho el Fuerte'', 1194-1234)의 통치는 더욱 어려웠다. 그는 중요한 특권을 부여하면서 교회와 수도원의 수입을 몰수했고, 1198년 팜플로나 교구에 그의 궁전과 소유지를 헌납했다. 이 기증은 1199년 1월 29일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확인되었다.

산초 7세 강한 왕의 인장


1199년 산초 3세와 블랑슈의 아들인 알폰소 8세는 카스티야가 유럽 양모 시장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하고 나바라를 고립시킬 전략적 지역인 나바라 해안 지역을 장악하려고 했다. 그는 나바라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시작했다. 산초 강한 왕은 카스티야의 공세에 맞서기 위해 제2 전선을 열고 틀렘센(현재 알제리)에서 지원을 구하고 있었다. 첼레스티누스 3세가 개입하여 동맹을 좌절시켰다.[13]

비토리아와 트레비뇨 마을은 카스티야의 공격에 저항했지만, 팜플로나 주교가 증원군이 도착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리기 위해 파견되었다. 9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비토리아는 항복했지만, 트레비뇨는 항복하지 않았고 무력으로 정복되어야 했다. 1200년까지 서부 나바라의 정복이 완료되었다. 카스티야는 이 지역들(카스티야에서 직접 통치된 트레비뇨와 오냐티를 제외하고)이 기존의 관습과 법률(''즉'', 나바라 법)을 유지할 권리를 허용했는데, 이는 푸에로로 알려지게 되었다. 아라바는 백작령이 되었고, 비스카이는 영주령이 되었고, 기푸스코아는 단순히 지방이 되었다. 1207년, 두 왕 사이의 과달라하라에서의 합의는 점령된 지역에 대한 5년간의 휴전을 보장했지만, 카스티야는 여전히 사실상의 정책을 유지했다.[13]

산초 강한 왕은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1212)에 참여하여 칼리프 무함마드 안-나시르를 물리친 기독교 동맹에 소규모 병력을 추가했다. 그는 다리의 정맥류 궤양으로 고통받아 투델라로 은퇴하여 1234년 사망했다. 그의 누이이자 영국의 여왕인 베렌가리아는 몇 년 전 자녀 없이 사망했다. 그의 사망한 여동생인 블랑카, 샴파뉴 백작부인은 아들 테오발드 4세를 남겼다. 따라서 아라곤 왕들이 여전히 왕위를 주장했지만, 나바라 왕국은 결혼을 통해[12] 샴파뉴와 브리 백작이었던 블랑카의 상속자, 나바라 의회(코르테스)의 지지하에 샴파뉴 가문으로 넘어갔다.

나바라 왕국의 군주 문장 (에브뢰 가문)과 왕실 문장


1360년 프랑스 내 나바라의 영토


1477년 프랑스와 피레네 산맥 지도. 나바라 왕국과 베아른 공국 표시


테오발드 1세는 샹파뉴 백작궁에서 발전한 트루바두르 시인들의 시를 환영하고 장려하는 중심지로 그의 궁정을 만들었으며, 그의 통치는 평화로웠다. 그의 아들, 테오발드 2세 (1253–1270) 국왕은 프랑스 루이 9세 국왕의 딸인 이사벨라와 결혼하여, 그의 성스러운 장인과 함께 튀니스 원정에 참여했다. 귀국길에 시칠리아 트라파니에서 사망했고, 그의 형인 앙리 1세 국왕이 그의 부재 중 이미 정부의 통치권을 맡았지만, 3년(1271–1274) 동안만 통치했다. 그의 딸인 잔 1세 여왕은 미성년자로 즉위했고, 나라는 다시 모든 방향에서 침략을 받았다. 여왕과 그녀의 어머니인 아르투아의 블랑슈는 필리프 3세 국왕의 궁정으로 피신했다. 그의 아들인 미래의 필리프 4세 국왕은 어린 여왕과 약혼하여 1284년에 결혼했다. 1276년, 이 결혼을 위한 협상 시점부터 나바라는 효과적으로 프랑스의 지배하에 들어갔지만, 1276-1277년 나바라 전쟁에서 프랑스가 토착 저항을 진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바라 왕국은 샤를 1세 (샤를 4세) 국왕이 1328년 사망할 때까지 프랑스 왕국과 인적 동군 연합을 유지했으며, 같은 해 3월 13일, 후안 마르티네스 데 메드라노와 후안 코르바란 데 레엣이 나바라 왕국의 섭정으로 임명되어 11개월(1329년 2월 27일) 동안 나바라 왕위 계승이 결정될 때까지 재임했다.[21] 샤를 국왕의 뒤를 이어 그의 조카인 잔 2세 여왕(루이 1세(루이 10세)의 딸)과 그의 조카 사위인 필리프 3세 국왕이 즉위했다. 잔 2세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샹파뉴와 브리 백작령 대신 앙굴렘, 롱귀유 백작령, 모르탱 백작령을 보상으로 받았다.

필리프 3세 국왕은 나라의 법 개선에 전념했고, 1343년 무어인들에 대항하는 전투에서 알폰소 11세 국왕과 함께 싸웠다. 그의 어머니가 사망한 후(1349년), 샤를 2세 국왕이 정부의 통치권을 맡았다(1349–1387). 그는 백년 전쟁과 당시 프랑스 내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의 기만과 잔혹함 때문에 '악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노르망디에서 영토를 얻고 잃었고, 그의 통치 후반에는 나바라 용병대가 비잔티움 제국에서 섬 영토를 획득했다.

반면 그의 장남인 샤를 3세 국왕(고귀한 샤를)은 다시 한번 나라를 평화롭고 행복한 통치로 되돌렸다(1387–1425). 그는 정부를 개혁하고 운하를 건설했으며, 나바라를 흐르는 에브로 강의 지류를 항해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의 적자 아들들을 모두 여생 동안 능가하여, 그의 딸인 블랑슈 1세 여왕(1425–1441)과 사위인 후안 2세 국왕(1398–1479)에게 왕위를 계승했다.

1441년 나바라의 블랑슈 1세 여왕의 죽음 이후, 나바라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지속적인 분쟁에 휘말렸다. 아라곤의 국왕 아라곤의 요한 2세는 그의 형제 아라곤의 알폰소 5세를 대신하여 아라곤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는 그의 아들 비아나 공작 샤를에게 단지 총독의 지위만을 부여했는데, 이는 블랑슈 1세 여왕이 관례에 따라 그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려 했던 것과는 달랐다. 1450년, 요한 2세 자신이 나바라로 돌아왔고, 야심 찬 그의 두 번째 부인 후아나 엔리케스의 부추김을 받아 그들의 아들 페르난도 2세에게 왕위 계승을 시키려고 노력했다.

나머지 바스크 지역의 피비린내 나는 밴드 전쟁 중에 일어났던 일족 간의 분쟁을 반영하여, 1451년 나바라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아그라몽트와 보몽트라는 두 개의 연합으로 분열되었고, 그 영향은 나바라 내부와 외부 모두에 미쳤다. 격렬한 내전이 발발하자, 아그라몽트는 아라곤의 요한 2세를 지지했고, 보몽트(그들의 지도자인 재상 장 드 보몽의 이름을 따서 명명됨)는 비아나 공작 샤를의 대의를 지지했다.[22] 이 전투에는 고위 귀족과 그들의 하위 계층이 참여했고, 그들은 상위 계층의 불화를 이어받았으며, 종종 부재하거나 약한 왕권을 이용해 번성했다.

불행한 샤를 왕자는 1451년 아이바르에서 그의 아버지에게 패배하여 2년 동안 포로로 잡혀 있었는데, 그 동안 그는 유명한 ''나바라 연대기''를 저술했고, 이는 그 시대의 주요 자료가 되었다. 석방된 후, 샤를은 프랑스의 샤를 7세와 그의 삼촌 알폰소 5세(나폴리에 거주)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헛수고였다. 1460년 그는 계모의 선동으로 다시 투옥되었지만, 이러한 부정에 대해 카탈루냐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는 다시 해방되어 카탈루냐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461년 계모 후아나 엔리케스에 의해 독살되어 나바라의 통치권을 되찾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는 그의 다음 여동생인 나바라의 블랑슈 2세를 상속인으로 지명했지만, 그녀는 요한 2세에 의해 즉시 투옥되었고 1464년 사망했다. 내전의 이 에피소드는 끝났지만, 스페인 정복(1512)까지 간헐적인 투쟁과 봉기의 불안정한 시대를 열었다.

1461년 샤를이 죽자, 푸아 백작이자 베른 백작인 나바라의 엘레오노르가 비아나 공주로 선포되었지만, 불안정은 큰 타격을 입혔다. 나바라의 남서쪽 끝 부분—손시에라(오용, 라과르디아, 현재 알라바), 그리고 로스 아르코스—는 카스티야의 엔리케 4세에 의해 점령되었다. 카스티야가 1463년 이 지역을 합병한 것은 1463년 4월 23일 바욘에서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에 의해 지지되었다.[23] 요한 2세는 1479년까지 국왕으로 통치했고, 엘레오노르 여왕이 15일 동안 그를 계승한 후 사망했다. 그녀는 왕관을 손자인 나바라의 프랑수아 포뵈에게 남겼지만, 이는 또 다른 불안정 시대를 열었다. 엘레오노르의 13세 손녀 나바라의 카트린 1세는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형제 프랑수아 포뵈를 계승했다(1483). 미성년자였던 그녀는 어머니 발루아의 마들렌의 후견하에 있었고, 페르난도 2세는 그녀를 신부로 맞이하려고 했다. 그러나 왕위 계승에 대한 또 다른 주장자가 그녀를 막으려고 완강하게 노력했는데, 그는 미래의 국왕 프랑스의 루이 12세의 매제인 나르본의 푸아 백작 장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살리카 법을 언급하며 자신을 나바라의 국왕이라고 칭하고 페르난도 2세에게 외교관을 파견했다.

카트린의 섭정인 발루아의 마들렌에게 압력이 가해졌고, 그녀는 프랑스령을 구하기 위해 결국 나바라 의회가 페르난도와 이사벨라의 아들 아스투리아스 공 잔을 선호했음에도 불구하고 7세의 알브레의 장과 어린 여왕을 결혼시키기로 결정했다.[22] 보몽트 당은 일어섰고, 아그라몽트는 결혼을 두고 분열되었다.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는 나바라에 대한 그의 외교 정책을 재고했다. 나바라의 왕관은 외교라는 기본 정책으로 돌아가 3월 21일 발렌시아 조약에 서명했는데, 그 조약에 따라 나바라와 아라곤-카스티야 연합 간의 무역이 회복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난도는 카트린을 인정하지 않았고 카스티야 군대를 나바라에 주둔시키고 왕국과 베른 백작령 모두에서 프랑스 군대를 금지했다.[22]

"성스러운 기름 부음의 성사가 완료되기 전에, 여러분의 이 복된 대관식을 위해, 여러분 이전의 나바라 군주들이 했던 것처럼, 백성에게 맹세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백성도 관습에 따라 여러분에게 맹세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 우리는 [...] 나바라 전역의 주교들, 귀족들 [...] 그리고 도시와 좋은 마을의 사람들과 나바라의 모든 백성에게 [...] 나바라 왕국 전역에서 [...] 모든 푸에로, 그리고 관습, 세금 면제, 자유, 여러분 각자가 가지고 있는 특권—여기에 있든 없든—을 맹세합니다."
카트린과 3세 장의 대관식(1494)에 앞서 나바라 왕국에 대해 의무적으로 해야 할 맹세와 그 맹세에 대한 지시 사항.



페르난도는 또한 나바라 사람들이 증오했던 강제적인 국경을 넘나드는 법정인 종교재판을 도입하려고 했지만, 아라곤 군주로부터 압력을 받아 나바라(투델라)의 문이 1486년과 1488년 사이에 아라곤 군주의 위협에 밀려 마침내 교회 기관에 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10년 투델라 당국은 "자칭 종교재판관"인 수도사의 추방을 선포했다. 카트린과 3세 장은 프랑스 왕실의 지원도 부족했다. 프랑스의 샤를 8세와 프랑스의 루이 12세 모두 푸아의 장을 왕으로 선포하기 위해 강력하게 압력을 가했다. 마침내 조약 체결 후 페르난도와 단기간의 평화를 유지한 후, 1494년 1월 왕실 가족의 대관식이 팜플로나에서 열렸다. 카트린 1세와 3세 장은 나바라의 자유를 존중할 것을 맹세했고, 선포는 일주일간의 축제로 기념되었지만, 그 의식에는 나바라 관할권을 가진 아라곤 주교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나바라-베른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외교관 뮌처에 의해 스위스와 같은 국가로 정의되었다.[24] 같은 조약에서 페르난도는 카스티야로부터 나바라 또는 베른에 대한 전쟁을 포기했지만, 왕권과 재산을 회복하려는 시도는 반항적인 레린 백작 루이 드 보몽의 저항에 부딪혔고, 그의 재산은 몰수되었다.

카트린과 3세 장의 섭정인 발루아의 마들렌은 1495년 사망했고, 장의 아버지 알브레의 알랭 1세는 레린 백작이 나바라를 버리고 최근 정복된 그라나다에서 부동산과 여러 점령지를 보상으로 받는 조약에 페르난도와 서명했다. 그 대가로 알랭은 고통스러운 양보를 했다. 페르난도는 레린 백작의 재산을 받았고 왕국 중심부에 있는 올리테에 주둔할 권리를 포함하여 나바라 전역의 중요한 요새를 장악했다. 또한 카트린 여왕의 1세 된 딸 마들렌은 카스티야로 보내져 양육될 예정이었고, 미래의 결혼 계획이 있었지만, 그녀는 카스티야에서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1504).[22] 프랑스의 발전에 따라 전체 조약은 1500년에 번복되었고 페르난도와 또 다른 타협이 이루어져 4년간의 평화를 보장했다.

나바라 유대인들은 1498년 추방당하거나 개종해야 했다.[25]

조약에도 불구하고, 페르디난드 2세 가톨릭왕은 나바라에 대한 오랜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1506년, 53세의 과부였던 그는 카트린의 삼촌인 푸아의 잔이 미성년인 조카의 나바라 왕위 계승을 주장했던 것에 맞서, 그의 딸인 푸아의 제르맹(16세)과 재혼했다. 하지만 그들의 아들은 출생 직후 사망하여 나바라 왕위 계승의 희망은 사라졌다. 페르디난드는 보몽 당파를 이용하여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나바라 내정에 계속 개입했다. 1508년, 나바라 왕실 군대는 긴 대치 끝에 마침내 레린 백작의 반란을 진압했다. 아라곤 국왕은 반란을 일으킨 백작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채를 하나씩 점령할 수 있지만 폭력 대신 "절도, 기만, 협상"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509년 7월 23일).

나바라가 프랑스에 반대하는 여러 신성 동맹에 가입하는 것을 거부하고 중립을 선언하자, 페르디난드는 알브레를 파문하도록 교황에게 요청했는데, 이는 공격을 정당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교황은 프랑스와 나바라에 대한 첫 번째 교황령(1512년 7월 21일)에서 나바라 왕관을 명시적으로 분열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을 꺼렸지만, 페르디난드의 압력은 (두 번째) 교황령에서 카트린과 3세 잔을 "이단자"로 규정함으로써 결실을 맺었다(1513년 2월 18일). 1512년 7월 18일, 돈 파드리케 데 톨레도는 캄브레 동맹 전쟁의 두 번째 단계의 맥락에서 나바라 침공을 명령받았다.

강력한 카스티야-아라곤 군대에 맞설 수 없었던 잔 달브레는 베른(오르테즈, 파우, 타르브)으로 도망쳤다. 팜플로나, 에스텔라, 올리테, 상게사, 투델라는 9월까지 함락되었다. 아그라몽트 당파는 카트린 여왕을 지지했지만, 보몽 당파 영주 대부분은 점령군을 지지했다. 1512년 10월, 합법적인 국왕인 3세 잔은 피레네 산맥 북쪽에서 모집한 군대와 함께 돌아와 팜플로나를 공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2월 말까지 카스티야 군대는 생장피에드포르에 있었다.

이 실패 후, 나바라 코르테스(의회)는 페르디난드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밖에 없었다. 1513년, 첫 번째 카스티야 총독은 나바라의 제도와 법률(푸에로)을 존중할 것을 공식적으로 선서했다. 스페인 종교 재판이 나바라로 확대되었다. 유대인들은 이미 카스티야와 아라곤에서 알람브라 칙령에 의해 개종하거나 추방당했고, 이제 나바라의 유대인 공동체와 투델라의 무슬림들은 박해를 받았다.

1516년과 1521년에 해방을 위한 두 번의 시도가 있었는데, 특히 두 번째 시도는 인민 봉기의 지지를 받았다. 나바라가 독립을 되찾을 뻔했던 것은 1521년이었다. 아스파로스 장군이 이끄는 해방군이 팜플로나에 접근하자 시민들은 봉기하여 새로 지은 성에 있는 군사 총독 이니고 데 로욜라를 포위했다. 투델라와 다른 도시들도 알브레 가문에 대한 충성을 선언했다. 최근 코무네로스의 봉기를 진압한 직후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방해를 받았지만, 나바라-베른 군대는 왕국 전체를 해방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그 직후 아스파로스는 1521년 6월 30일 노아인 전투에서 대규모 카스티야 군대와 맞닥뜨렸다. 아스파로스는 포로로 잡혔고 군대는 완전히 패배했다.

5. 3. 스페인의 나바라 정복

가르시아 라미레스는 "복수자"로 알려졌으며, 엘 시드의 손자이자 가르시아 산체스 3세의 서자 후손이었다. 산초 6세 "현명한 왕"(1150-1194)은 나바라를 안팎으로 강화하고 여러 도시에 특권 문서를 부여했으며,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rex Navarrae'' 또는 ''rex Navarrorum''이라고 칭한 최초의 왕이었다.

"복수자"와 산초 현명한 왕은 카스티야의 나바라 개입 증가에 직면했다. 1170년 알폰소 8세와 헨리 2세의 딸 엘레오노르의 결혼으로 카스티야는 가스코뉴를 지참금 일부로 주장했다. 이는 1173-1176년 나바라 침략의 구실이 되었고, 카스티야는 해양 강국이 되기 위해 나바라 해안 지구를 갈망했다. 1177년 분쟁은 헨리 2세의 중재에 회부되었으나, 헨리는 법적 근거에 기반한 판결 대신 1158년 경계로 돌아가 7년간 휴전하도록 결정했다. 그러나 카스티야는 곧 타협을 위반하고 나바라를 괴롭혔다.

산초 7세 "강한 왕"(1194-1234)은 교회와 수도원 수입을 몰수하고 1198년 팜플로나 교구에 궁전과 소유지를 헌납했다.[12] 1199년 알폰소 8세는 나바라 해안 지역을 장악하려 했고, 첼레스티누스 3세가 개입하여 이를 좌절시켰다.

비토리아와 트레비뇨는 카스티야 공격에 저항했지만, 9개월 공성전 끝에 비토리아는 항복했고 트레비뇨는 무력으로 정복되었다. 1200년 서부 나바라 정복이 완료되었고, 카스티야는 이 지역들이 기존 관습과 법률을 유지하도록 허용했다. 1207년 과달라하라 합의는 5년간 휴전을 보장했지만, 카스티야는 사실상 정책을 유지했다.

산초 강한 왕은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1212)에서 무함마드 안-나시르를 물리친 기독교 동맹에 소규모 병력을 추가했다. 1234년 그가 사망하자, 나바라 왕국은 샴파뉴와 브리 백작이었던 블랑카의 상속자 테오발드 4세에게 넘어갔다.

1441년 나바라의 블랑슈 1세 사후, 나바라는 왕위 계승 분쟁에 휘말렸다. 아라곤의 요한 2세는 아들 비아나 공작 샤를에게 총독 지위만 부여했는데, 이는 블랑슈 1세의 뜻과 달랐다. 1450년 요한 2세는 후아나 엔리케스의 부추김으로 아들 페르난도 2세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려 했다.

1451년 나바라는 아그라몽트와 보몽트 두 연합으로 분열되어 내전이 발발했다. 아그라몽트는 아라곤의 요한 2세를, 보몽트는 비아나 공작 샤를을 지지했다.[22] 샤를은 1451년 아이바르에서 아버지에게 패배하고 2년간 포로로 잡혀 ''나바라 연대기''를 저술했다. 1460년 계모의 선동으로 다시 투옥되었으나, 카탈루냐인 반란으로 해방되어 카탈루냐 총독이 되었다. 1461년 계모에게 독살되어 사망했고, 나바라의 블랑슈 2세를 상속인으로 지명했지만, 그녀는 요한 2세에게 투옥되어 1464년 사망했다.

1461년 샤를 사후, 나바라의 엘레오노르가 비아나 공주로 선포되었지만, 나바라 남서쪽 끝과 로스 아르코스는 카스티야의 엔리케 4세에게 점령되었다. 1463년 카스티야 합병은 루이 11세에 의해 지지되었다.[23] 요한 2세는 1479년까지 통치했고, 엘레오노르 여왕은 15일간 계승 후 사망, 나바라의 프랑수아 포뵈에게 왕관을 남겼지만, 또 다른 불안정 시대를 열었다. 나바라의 카트린 1세는 발루아의 마들렌 후견하에 있었고, 나르본의 푸아 백작 장이 왕위를 주장했다.

카트린 섭정 발루아의 마들렌은 알브레의 장과 어린 여왕을 결혼시키기로 결정했다.[22] 아라곤 페르난도 2세는 발렌시아 조약으로 무역을 회복했지만, 카스티야 군대를 주둔시키고 프랑스 군대를 금지했다.[22]

"성스러운 기름 부음의 성사가 완료되기 전에, 여러분의 이 복된 대관식을 위해, 여러분 이전의 나바라 군주들이 했던 것처럼, 백성에게 맹세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백성도 관습에 따라 여러분에게 맹세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 우리는 [...] 나바라 전역의 주교들, 귀족들 [...] 그리고 도시와 좋은 마을의 사람들과 나바라의 모든 백성에게 [...] 나바라 왕국 전역에서 [...] 모든 푸에로스, 그리고 관습, 세금 면제, 자유, 여러분 각자가 가지고 있는 특권—여기에 있든 없든—을 맹세합니다."
카트린과 3세 장의 대관식(1494)에 앞서 나바라 왕국에 대해 의무적으로 해야 할 맹세와 그 맹세에 대한 지시 사항.



페르난도는 종교재판을 도입하려 했지만, 1510년 투델라 당국은 "자칭 종교재판관"을 추방했다. 카트린과 3세 장은 프랑스 왕실 지원이 부족했고, 프랑스의 샤를 8세와 프랑스의 루이 12세는 푸아의 장을 왕으로 선포하려 했다. 1494년 왕실 가족 대관식에서 카트린 1세와 3세 장은 나바라 자유 존중을 맹세했지만, 아라곤 주교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 외교관 뮌처는 나바라-베른 왕국을 스위스 같은 국가로 정의했다.[24] 페르난도는 카스티야로부터 전쟁을 포기했지만, 레린 백작 루이 드 보몽 저항에 부딪혔다.

1495년 발루아의 마들렌 사망 후, 알브레의 알랭 1세는 레린 백작이 그라나다에서 보상받는 조약에 서명했다. 페르난도는 올리테 주둔 권리 등 요새를 장악했다. 카트린 여왕 딸 마들렌은 카스티야에서 사망했다(1504).[22] 1500년 조약은 번복되었고, 페르난도와 타협하여 4년간 평화를 보장했다.

나바라 유대인들은 1498년 추방당하거나 개종해야 했다.[25]

페르디난드 2세는 1506년 푸아의 제르맹과 재혼했지만, 아들은 곧 사망했다. 1508년 나바라 왕실 군대는 레린 백작 반란을 진압했다. 페르난도는 "절도, 기만, 협상"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509년 7월 23일).

나바라가 신성 동맹 가입을 거부하자, 페르디난드는 알브레 파문을 요청했다. 1512년 7월 21일 첫 교황령은 분열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을 꺼렸지만, 1513년 2월 18일 교황령은 카트린과 3세 잔을 "이단자"로 규정했다. 1512년 7월 18일 돈 파드리케 데 톨레도는 나바라 침공을 명령받았다.

잔 달브레는 베른으로 도망쳤고, 팜플로나 등은 9월까지 함락되었다. 아그라몽트는 카트린 여왕을 지지했지만, 보몽트 영주 대부분은 점령군을 지지했다. 1512년 10월 3세 잔은 팜플로나를 공격했지만 실패했고, 12월 말 카스티야 군대는 생장피에드포르에 있었다.

나바라 코르테스는 페르디난드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1513년 첫 카스티야 총독은 푸에로 존중을 선서했다. 스페인 종교 재판이 확대되었고, 나바라 유대인과 투델라 무슬림은 박해받았다.

1516년과 1521년 해방 시도가 있었고, 1521년 아스파로스 장군이 팜플로나에 접근하자 시민 봉기로 이니고 데 로욜라가 포위되었다. 투델라 등도 알브레 가문에 충성을 선언했다. 나바라-베른 군대는 왕국 전체를 해방시켰지만, 1521년 6월 30일 노아인 전투에서 패배했다.

6. 피레네 산맥 북쪽의 독립 나바라

하부 나바라는 이웃한 베아른 백작령과 함께 상속을 통해 전해지는 독립 왕국으로 남았다. 앙리 2세는 나바라에 대표 의회를 설립하였는데, 성직자는 바욘과 닥스의 주교, 그들의 총대리, 생장피에드포르의 본당 사제, 생팔레, 우지아트, 하람벨스(Haranbeltz)의 수도원장이 대표하였다.

잔느 3세는 1560년 칼뱅주의로 개종하여 바스크어로 된 신약 성서 번역을 의뢰했는데, 이는 이 언어로 출판된 최초의 책 중 하나였다. 잔느는 또한 칼뱅주의를 나바라의 공식 종교로 선포했다. 그녀와 아들인 앙리 3세는 프랑스 종교 전쟁에서 위그노 당을 이끌었다. 1589년 앙리는 프랑스 왕위의 유일한 합법적인 계승자가 되었지만, 4년 후 가톨릭으로 개종할 때까지 많은 신하들에게 그렇게 인정받지 못했다.

나바라의 마지막 독립 국왕인 앙리 3세(재위 1572~1610)는 1589년 앙리 4세로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여 부르봉 왕가를 창시했다. 1620년에서 1624년 사이에 앙리의 아들인 프랑스의 루이 13세(나바라의 루이 2세)는 하부 나바라와 베아른을 프랑스 본토에 편입시켰다. 포에 위치한 나바라 의회는 왕실 나바라 사무국과 베아른 최고 의회를 합병하여 설립되었다.

1659년 피레네 조약은 프랑스-스페인 국경의 확정과 스페인 나바라에 대한 프랑스-나바라 왕조의 주장에 종지부를 찍었다. 프랑스 국왕들은 1792년 프랑스 혁명까지 나바라 왕의 칭호를 계속 사용했고, 1814년부터 1830년까지 복고 왕정 기간에도 다시 부활했다. 나바라의 나머지 지역이 스페인의 손에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국왕들도 나바라 왕의 칭호를 사용했고, 계속해서 사용했다. 1789년 삼부회 동안 나바라 삼부회는 에티엔느 폴베렐을 파리로 파견하여 프랑스의 계획된 동질적인 행정 체계에 맞서 나바라의 독자성과 독립성을 옹호하게 했다.

7. 헌법적 기반과 자치

나바라 왕국은 초기에는 ''메린다드''라 불리는 여러 행정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각 구역은 왕을 대표하는 메리노(merino, "mayorino", 보안관)가 통치했다.[12] 이 구역들은 "울트라푸에르토스"(프랑스령 나바라), 팜플로나, 에스텔라, 투델라, 상귀에사였으며, 1407년에는 올리테 메린다드가 추가되었다. 나바라의 코르테스는 처음에는 왕의 교회 지도자와 귀족 자문회의로 시작되었지만, 14세기 동안 시민들이 추가되었다.[12] 시민들의 참여는 왕이 보조금과 원조를 통해 자금을 모으기 위해 그들의 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며, 이는 당시 잉글랜드에서도 유사하게 진행되던 발전이었다.

이후 코르테스는 교회 지도자, 귀족, 그리고 27개(후에 38개)의 "훌륭한 도시들"(봉건 영주로부터 자유롭고 따라서 왕이 직접 통치하는 도시)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었다.[12] 시민들의 독립성은 다른 스페인 의회보다 나바라에서 더 잘 보장되었는데, 그 이유는 코르테스의 모든 행위에 대해 ''각 계층''의 과반수 동의가 필요하다는 헌법 규칙 때문이었다.[12] 따라서 시민들은 다른 지역과 달리 귀족과 교회에 의해 표결에서 압도당할 수 없었다.[12] 심지어 18세기에도 나바라 주민들은 프랑스 국경에 관세청을 설립하려는 부르봉 왕가의 시도에 성공적으로 저항하며, 프랑스령 나바라와 스페인령 나바라를 분리했다.[12]

19세기까지 자치권을 유지한 나바라의 제도에는 코르테스(나바라 의회의 전신인 "삼부회"), 왕실 자문회, 대법원, 그리고 ''디푸타시온 델 레이노''(Diputacion del Reino)가 포함된다. 아라곤 연합왕국(아라곤, 카탈루냐, 발렌시아)에도 누에바 플란타 칙령까지 유사한 제도가 존재했다. 스페인 국왕은 나바라 지역에서 내려진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총독에 의해 대표되었다.

이 기간 동안 나바라는 스페인 왕국 내에서 특별한 지위를 누렸다. 나바라는 자체 코르테스, 조세 제도 및 별도의 관세법을 가지고 있었다. 1645년 1월 17일 가르시아 데 메드라노가 나바라의 섭정이 되었고, 페드로 안토니오 데 메드라노는 1702년 5월 9일 나바라의 섭정이 되었다.

8. 푸에로(Fueros)의 종말과 이후 역사

피레네 전쟁과 반도 전쟁 당시 나바라 왕국은 스페인 왕실 권력에 대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바스크 특권과 자치에 강력하게 반대하며 에브로 관세에서 나바라인과 바스크인 전체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한 스페인 총리 마누엘 고도이가 그 중심에 있었다. 나바라인들이 찾은 유일한 돌파구는 프랑스와의 무역 확대였고, 이는 시민 계급의 근대적인 사상 수입을 촉진했다. 하지만 팜플로나산세바스티안 등 다른 바스크 도시들에서 강력했던 진보적인 계몽주의 시민 계급 세력은 결국 위 전쟁들 동안 진압되었다.[26]

프랑스의 패배 후, 나바라 자치 정부를 지지하는 유일한 세력은 페르난도 7세였다. 왕은 자유주의적인 카디스 헌법(1812)과는 대조적으로 구체제(ancient régime)의 기치를 내세웠다. 카디스 헌법은 나바라와 바스크의 푸에로(fueros)와 스페인 내의 다른 정체성들을 무시했으며, 19세기까지 법적으로 간주되었던 "스페인들(Spains)"을 무시했다.[26]

나폴레옹 전쟁 동안 많은 나바라인들은 세금 징수와 프랑스, 영국, 스페인 군대의 재산 및 인명에 대한 학대를 피하기 위해 숲으로 들어갔다. 이러한 무장 세력들은 후일 카를리스트 전쟁의 민병대의 씨앗을 뿌렸는데, 대부분 카를리스트였지만 푸에로를 지지하는 자유주의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 당국에 의해 진압되고 점령 기간 동안 전제적인 프랑스 통치에 반발했던 지역 도시 기반의 계몽된 시민 계급이 억압되자, 가장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이 나바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강력한 성직자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26]

이러한 상황과 1833년 스페인에 편입되면서 자치권을 상실한 것에 대한 불만은 많은 나바라인들이 카를리스트 운동을 강력하게 지지하게 된 이유를 설명해준다.[26] 1833년 나바라와 스페인의 바스크 지역 전체는 카를리스트들의 주요 거점이 되었지만, 1837년 마드리드에서는 스페인 자유주의 중앙 집권적 헌법이 선포되었고 이사벨 2세가 여왕으로 인정받았다. 제1차 카를리스트 전쟁을 종식시킨 베르가라 협약(1839년 8월 31일 휴전) 이후 나바라의 상태는 불안정했다.[26]

그 해 10월 공포된 법률에서 나바라의 별도 지위가 인정되었지만, 발도메로 에스파르테로와 특권 반대 진보파가 마드리드에서 집권한 후 나바라 자유주의 협상가들과의 협상은 나바라의 스페인 주로의 거의 완전한 동화로 이어졌다. 나바라는 더 이상 왕국이 아니었고, 다른 스페인 주가 되었다. 자치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나바라인들은 1841년 세금, 행정 및 기타 특권을 포함한 "타협 법안"(Ley Paccionada|레이 파시오나다es)으로 보상을 받았는데, 이는 '두 평등한 측면 간의 타협'이라는 개념을 불러일으켰고, 부여된 특권이 아니었다.[26]

9. 현재의 나바라

옛 나바라 왕국의 영토는 현재 피레네 산맥의 남쪽과 북쪽에 따라 스페인프랑스 두 국가에 속해 있다.[12] 바스크어는 여전히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 나바라는 스페인의 자치주이며, 바스나바라는 프랑스의 피레네-아틀란티크 주의 일부이다. 다른 옛 나바라 영토는 현재 바스크 자치 지방, 라 리오하, 아라곤, 카스티야 이 레온 등 스페인의 여러 자치주에 속해 있다.[20]

10. 역사적 상징

산초 3세 대왕 시절 나바라 왕국은 최대 영토를 확보하여 현대 스페인의 모든 주, 프랑스 나바라, 스페인과 프랑스의 바스크 지방, 부레바, 에브로 강 상류 계곡의 리오하와 타라소나 등을 포함했다.[12] 산초 3세 사후 왕국은 분할되었고, 페르난도 2세 때까지 다시 통일되지 못했다.[12]

산초 3세의 장남 가르시아 산체스 3세는 팜플로나 왕국과 주변 영토를 상속받았다. 그의 형제 레온의 페르난도 1세는 카스티야 백작령 등을, 소브라르베와 리바고르사의 곤살로는 소브라르베와 리바고르사 백작령을, 서자 아라곤의 라미로 1세는 아라곤을 받았다.[20]

가르시아 산체스 3세는 형제들과 패권 다툼을 벌였고, 타마론 전투(1037)에서 베르무도 3세가 사망하며 페르난도 1세가 카스티야와 레온을 통합했다. 이후 가르시아와 라미로는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1세와 동맹을 맺고 사라고사 타이파를 견제, 칼라오라 점령(1044) 후 남쪽 국경에 평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가르시아와 페르난도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아타푸에르카 전투(1054)에서 가르시아가 사망하며 페르난도는 팜플로나 일부 지역을 차지했다.

나바라의 산초 4세는 아버지 사후 페르난도에게 왕으로 인정받았으나, 1076년 암살당했다. 이로 인해 레온과 카스티야의 알폰소 6세와 산초 라미레스가 영토를 분할 점령했다. 산초 라미레스는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 아르구에다스(1084)를 함락했다. 아라곤과 나바라의 페드로 1세는 사다바(1096), 밀라그로(1098)를 점령했다.

알폰소 1세는 투델라(1114)를 탈환하고 부레바 지역을 재정복, 라부르드를 병합했다. 1119년 투델라가 팜플로나에 통합되었고, 1127년 타마라 평화 조약으로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영토가 확정되었다.

1212년 이후 중세 나바라 군주들의 깃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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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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