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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티야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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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스티야 왕국은 8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이베리아 반도에 존재했던 왕국으로, 이슬람 세력의 침략에 맞서 기독교 세력이 세운 여러 왕국 중 하나이다. 카스티야 백작령으로 시작하여 레온 왕국과의 통합을 거쳐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했으며, 레콩키스타를 통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3세기에는 페르난도 3세에 의해 레온과 통합되었고, 알폰소 10세의 개혁과 문화 발전을 거쳐 번성했다. 15세기에는 아라곤 왕국과의 결혼 동맹을 통해 스페인 왕국의 기틀을 마련했으나, 16세기에 스페인 왕국에 흡수되며 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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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티야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기본 정보
공식 명칭스페인어:
라틴어:
스페인어 (옛 명칭):
라틴어 (옛 명칭):
국왕산초 2세 (최초)
마지막 국왕페르난도 3세
국가 표어없음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국교), 유대교, 이슬람교
공용어스페인어, 바스크어, 모사라베어, 안달루시아 아랍어
수도확립된 수도 없음
부르고스, 바야돌리드, 톨레도는 왕국의 중심지였음
존속 기간1065년 ~ 1833년
성립1065년
카스티야와 레온의 영구 통합1230년 9월 23일
멸망1833년 스페인 영토 분할
정치
정부 형태봉건군주제 (1065년 ~ 1230년)
국왕
역사
건국 이전레온 왕국에서 분리
변천
1065년독립
1469년아라곤 왕국카스티야 왕국 동군 연합 성립
1715년멸망
현재 국가
현재 국가스페인
국기 및 국장
카스티야 왕국 국기
왕실 표준기
카스티야 왕국 문장
카스티야 왕국 문장
지도
1210년 카스티야 왕국 지도
1210년 카스티야 왕국.

2. 카스티야 백작령의 성립 (8세기-11세기)

8세기 초,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침략하면서 기독교 세력은 북쪽으로 밀려났다. 칸타브리아산맥 북쪽에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이후 레온 왕국이 성립되어 이슬람 세력과 대립했다. 레온 왕국 동부 지역은 이슬람 세력의 침공 경로였기에, 주민들은 방어를 위해 성채를 쌓았고, 이 지역은 '카스티야'라고 불리게 되었다. '카스티야'는 스페인어로 성을 의미하는 '카스티료(castillo)'에서 유래했다.[3]

932년, 군사력 강화를 위해 여러 백작령이 통합되어 카스티야 백작령이 성립되었다. 961년, 카스티야 백작 페르난 곤살레스는 레온 왕국의 지배를 벗어나 사실상 독립했다.[4]

1029년, 카스티야 백작 가르시아 산체스가 암살되자 나바라 왕국의 산초 3세가 백작령을 계승하여 나바라 왕국에 병합했다. 이 시기 이슬람권에서는 우마이야 왕조가 쇠퇴하고, "타이파"라 불리는 소국들이 난립하는 혼란기가 시작되었다.

2. 1. 이슬람 세력의 침입과 기독교 세력의 저항

8세기 초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침략하여, 기독교 세력은 반도 북단의 칸타브리아산맥 이북과 북동부의 피레네산맥 기슭 주변으로 몰렸다. 칸타브리아산맥 북쪽에서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성립하여 이슬람 세력과 충돌하면서도 서서히 남쪽으로 영역을 넓혀 갔으며, 914년 레온으로 천도하였다(이후 레온 왕국). 레온 왕국의 동부 지역은 메세타라는 주위 산들에 둘러싸인 고원이 펼쳐지므로, 항상 이슬람 세력의 침공 루트로 사용되어 전투가 반복되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방어를 위해 대부분 성채를 건설하였다. 이 지역이 카스티야로 불리게 된 것은 스페인어로 성을 의미하는 카스티료(castillo)에서 유래한다. 당초 이 땅은 여러 백작령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최전선의 군사력 강화를 목적으로 932년 카스티야 백작령으로 통합되었다. 카스티야 백작 페르난 곤살레스는 레온 왕국 내 입지를 강화하고, 백작령에 대한 왕국의 지배력을 배척하고 961년에는 사실상 독립했다.

1029년 카스티야 백작 가르시아 산체스가 암살되자 그의 여동생을 왕비로 맞이한 나바라 왕국의 산초 3세가 백작령을 계승하여 나바라 왕국에 병합되었다. 이 무렵, 이베리아 반도 중부 및 남부의 이슬람권(알안달루스)에서는 우마이야 왕조가 내분으로 쇠퇴하면서 "타이파"로 불리는 이슬람 소국이 난립하는 군웅할거 시대가 시작되었다.

2. 2. 카스티야 백작령의 등장과 성장

레온 왕국 동부 지역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고원 지대인 메세타(Meseta)가 펼쳐져 있어, 항상 이슬람 세력의 침공 경로로 사용되어 전투가 반복되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방어를 위해 많은 성채(카스티요, Castillo)를 건설했는데, 이것이 카스티야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3]

아스투리아스 왕 알폰소 3세의 연대기에 따르면, "카스티야"라는 명칭은 서기 800년에 작성된 문서에서 처음 언급되었다.[3] 알안달루스 연대기에서는 이 지역을 알-킬라(Al-Qila), 즉 "성이 있는 고원 지대"로 언급하며, 알라바 영토 남쪽에 위치하고 사라고사에서 출발한 원정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지역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초기에는 여러 백작령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최전선의 군사력 강화를 위해 932년 카스티야 백작령으로 통합되었다. 961년, 카스티야 백작 페르난 곤살레스는 레온 왕국에 대한 지배력을 배척하고 사실상 독립했다.[4]

2. 3. 카스티야 백작령의 초기 발전과 특징

칸타브리아산맥 북쪽에서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이슬람 세력과 충돌하며 성장했고, 914년 레온으로 천도하면서 레온 왕국으로 불리게 되었다. 레온 왕국 동부 지역은 이슬람 세력의 침공 루트였고, 주민들은 방어를 위해 성채를 만들었다. 이 지역이 '카스티야'로 불린 것은 스페인어로 성을 의미하는 '카스티료(castillo)'에서 유래했다.[3]

카스티야 백작령은 칸타브리아인, 아스투리아스인, 바스콘인, 서고트인, 무사라베인 출신 주민들이 재정착하여 고유한 로망스 방언과 관습법을 가지고 있었다.

9세기 전반부터 레온 군주들에 의해 통치되었고, 코르도바 에미르국의 침략이 증가했다. 초기 재정착은 트라스미에라, 프리모리아스, 메나, 엔카르타시오네스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비툴루스 수도원장과 헤르비히 백작의 주도로 800년대 초 이주가 이루어졌다.[4]

로드리고 백작은 850년 아마야를 요새화하여 무슬림 군대로부터 방어하고 주요 간선도로를 통제했다. 이후 지역은 분할되었고, 931년 페르난 곤살레스 백작이 반란을 일으켜 자치권을 얻었다.[4]

3. 카스티야-레온 왕국 (11세기-13세기)

1035년 산초 3세가 사망하면서 나바라 왕국은 4명의 왕자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이 중 차남 페르난도 1세는 카스티야를 상속받아 왕을 칭했고, 1037년에는 레온 왕국의 베르무도 3세를 물리치고 레온 왕위를 획득하여 카스티야-레온 왕국이 탄생하였다.[5]

1065년 페르난도 1세가 사망하면서 왕국은 아들들에게 분할되었다. 카스티야의 산초 2세는 카스티야, 알폰소 6세는 레온, 가르시아는 갈리시아의 왕이 되었다. 산초 2세는 알폰소 6세와 동맹을 맺고 갈리시아를 정복, 분할했으나 이후 알폰소 6세를 공격하여 레온을 침략, 그를 몰아내고 세 왕국을 재통합했다. 그러나 1072년 산초 2세가 암살당하면서 알폰소 6세가 레온 왕국을 회복하고 카스티야와 갈리시아의 왕이 되어 두 번째 동군연합이 이루어졌다.[16]

알폰소 6세는 1085년 이슬람 국가 톨레도를 점령했다. 타이파 국가들은 알모라비드 왕조에 지원을 요청했고, 1086년 사그라하스 전투에서 알폰소 6세는 패배했지만, 타호 강 유역 이북 지역을 기독교 세력권으로 확보했다. 1143년 알폰소 7세 시대에는 포르투갈 왕국이 독립했다. 1157년 알폰소 7세가 사망하면서 왕국은 다시 산초 3세의 카스티야 왕국과 페르난도 2세의 레온 왕국으로 분할되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기독교 국가들에게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여 연합할 것을 촉구했다. 알폰소 8세의 지휘 아래 카스티야, 레온, 포르투갈, 아라곤, 나바라 군대와 기사 수도회 등이 모였다.[16] 1212년 7월 16일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에서 벌어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기독교 연합군은 알모하드 왕조의 칼리프 무함마드 나시르가 이끄는 이슬람 군대를 격파했다.[16] 이 전투로 알모하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지배력을 잃었고, 이슬람 세력은 분열되었다. 이후 그라나다를 중심으로 나스르 왕조 그라나다 왕국이 건국되었다.[16]

3. 1.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과 레온과의 통합

나바라 왕국의 산초 3세는 레온 왕국의 베르무도 3세의 누이인 산차 공주와 결혼한 가르시아 산체스 백작이 1028년 암살당하자, 그의 막내아들이자 가르시아의 조카인 페르난도를 카스티야 백작으로 임명하고 레온의 산차와 결혼시켰다. 1035년 산초 3세가 사망하자 카스티야는 명목상 레온의 지배하에 놓였지만, 페르난도는 형제인 나바라의 가르시아 산체스 3세와 동맹을 맺고 매부인 베르무도 3세와 전쟁을 벌였다. 타마론 전투에서 베르무도 3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5] 페르난도 1세는 아내의 권리로 레온과 카스티야의 왕 칭호를 사용했고, 이는 카스티야 통치에 왕위라는 칭호가 결합된 최초의 사건이었다.[5] 이렇게 1037년 카스티야-레온 왕국이 탄생하였다.

3. 2.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분열과 재통합

1035년 산초 3세가 사망하자, 카스티야는 명목상 레온의 지배를 받았지만, 페르난도 1세는 나바라의 가르시아 산체스 3세(García Sánchez III of Navarre)와 동맹을 맺고 그의 매부인 베르무도 3세와 전쟁을 벌였다. 타마론 전투(Battle of Tamarón)에서 베르무도 3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5] 페르난도 1세는 그의 아내 산차의 권리로 레온과 카스티야의 왕위를 차지했다.[5]

1065년 페르난도 1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왕국은 아들들에게 분할되었다. 산초 2세는 카스티야의 왕이 되었고, 알폰소 6세는 레온의 왕, 가르시아는 갈리시아의 왕이 되었다. 산초 2세는 알폰소 6세와 동맹을 맺고 갈리시아를 정복, 분할했으나 이후 알폰소 6세를 공격하고 엘 시드(El Cid)의 도움을 받아 레온을 침략하여 알폰소 6세를 몰아내고 세 왕국을 재통합했다. 그러나 우라카가 사모라(Zamora) 도시로 레온 군대의 피신을 허용하면서 산초 2세는 사모라를 포위했고, 1072년 갈리시아 귀족 벨리도 돌포스(Bellido Dolfos)에게 암살당했다.[16] 그 결과 알폰소 6세는 레온 왕국을 회복하고 카스티야와 갈리시아의 왕이 되었다. 이로써 레온과 카스티야는 두 번째로 통합되었지만, 두 왕국은 동군연합(personal union) 상태로 유지되었다. 엘 시드가 부르고스의 산타 가데아(Santa Gadea de Burgos)에서 알폰소 6세에게 그의 형제 살해와 무관함을 맹세한 사건은 유명하다.

12세기 초, 알폰소 6세는 외아들 산초의 사망으로 딸들만 남게 되자 프랑스 등 다른 유럽 왕국들과는 다른 접근법을 취했다.[4] 그는 딸들을 각각 툴루즈의 레이몽, 부르고뉴의 레이몽, 부르고뉴의 앙리와 결혼시켰다.

3. 3. 레콩키스타의 진전과 이슬람 세력의 약화

1072년 산초 2세가 암살당한 후, 그의 동생 알폰소 6세가 카스티야와 레온의 왕위를 모두 차지하며 두 왕국은 다시 동군연합을 이루었다.[16] 알폰소 6세는 1085년 이슬람 국가 톨레도를 점령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타이파 국가들은 아프리카의 알모라비드 왕조에 지원을 요청했고, 알모라비드 군대는 1086년 사그라하스 전투에서 알폰소 6세의 군대를 격파했다. 알폰소 6세는 패배 후 톨레도까지 후퇴했지만, 타호 강 유역 이북 지역을 기독교 세력권으로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알모라비드 왕조는 알안달루스의 타이파 국가들을 통합했다.

알폰소 7세 시대인 1143년, 포르투갈 왕국이 카스티야 왕국에서 독립했다. 이베리아 반도 남부에서는 알모라비드 왕조를 대신하여 알모하드 왕조가 통치하게 되었다. 1157년 알폰소 7세가 사망하면서 카스티야-레온 왕국은 다시 산초 3세의 카스티야 왕국과 페르난도 2세의 레온 왕국으로 분할되었다. 카스티야는 동쪽의 아라곤 연합 왕국과는 조약을 통해 국경을 확정했지만, 서쪽의 레온, 포르투갈과는 국경 분쟁이 계속되었다. 알모하드 왕조와의 전투 역시 진전 없이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3. 4. 기독교 세력의 결집과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기독교 국가들 간의 분쟁을 멈추고 알폰소 8세의 지휘 아래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여 연합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카스티야에는 레온, 포르투갈, 아라곤, 나바라의 군대와 템플 기사단을 비롯한 기사 수도회, 그리고 프랑스 주교가 이끄는 기사들이 모였다.[16]

알모하드 왕조의 칼리프 무함마드 나시르는 10만 명이 넘는 군대를 동원하여 기독교 연합군에 맞서 북쪽으로 진군했다. 양측 군대는 1212년 7월 16일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에서 격돌했고, 이 전투에서 기독교 연합군이 승리했다(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16]

이 전투의 결과로 알모하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지배력을 상실했고, 이슬람 세력권은 다시 여러 소국으로 분열되었다. 이 소국들 대부분은 내부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거나, 기독교 국가들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그라나다를 중심으로 나스르 왕조 그라나다 왕국이 건국되었다.[16]

4. 카스티야 왕국 통일 (13세기-15세기)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카스티야 왕국은 레온 왕국과의 통합, 레콩키스타의 진전, 그리고 왕위 계승 분쟁을 거치며 발전했다.

페르난도 3세는 1217년 어머니로부터 카스티야 왕위를, 1230년 아버지로부터 레온 왕위를 물려받아 두 왕국을 통합했다. 이후 카스티야 왕국은 레콩키스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1236년 코르도바, 1248년 세비야를 함락하고 나스르 왕조를 복속시켰다. 이로써 이베리아 반도에는 그라나다 왕국만이 이슬람 세력으로 남게 되었다.[1]

알폰소 10세는 카스티야와 레온의 제도, 법률, 화폐 등을 통일하고 7권 법전을 편찬하는 등 개혁을 추진했다. 또한 톨레도 번역 학파를 지원하여 아랍어 문헌을 라틴어로 번역, 유럽에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1]

카스티야의 엔리케 2세가 트라스타마라 가문을 통해 왕위에 오른 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이어졌다. 엔리케 3세의 동생 페르난도는 1410년 그라나다 전쟁을 시작하여 안테케라를 함락시켰고, 1412년 카스페의 타협을 통해 아라곤 왕으로 선출되기도 했다.[13] 엔리케 4세는 1468년 트로스 데 기산트 협정을 통해 이복 여동생 이사벨 1세를 후계자로 정했다.

1469년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결혼으로 두 왕국의 통합이 시작되었다. 1474년 이사벨 1세 즉위 후 페르난도 5세를 공동 통치자로 삼고, 1479년에는 포르투갈 왕국이 이사벨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면서, 같은 해 페르난도가 아라곤 왕에 즉위하여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동군연합을 이루었다.[14] 이후 1492년 그라나다 함락으로 레콩키스타가 완료되면서, 카스티야 왕국은 스페인 왕국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카스티야 왕관의 변화

4. 1. 페르난도 3세의 레온-카스티야 재통합

레온 왕 알폰소 9세와 카스티야 왕 알폰소 8세의 딸인 베렌가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페르난도 3세는 1217년 어머니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카스티야 왕이 되었고, 1230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레온 왕위도 계승하였다. 레온과 카스티야는 다시 동군연합이 되었지만, 이후 두 나라가 분리되는 일은 없었기에 단순히 카스티야 왕국이라고 불린다.[1]

4. 2. 레콩키스타의 완성과 그라나다 왕국 복속

페르난도 3세는 1236년 코르도바를 함락하고, 1246년에는 나스르 왕조를 복속시켰다. 1248년 세비야 공략에는 나스르 왕조로부터 병력을 지원받아 장기전 끝에 함락시켰다. 이로써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국가는 그라나다 왕국만 남게 되었다.

4. 3. 알폰소 10세의 개혁과 문화 발전

알폰소 10세는 카스티야와 레온의 정치 제도, 법률, 화폐, 세제, 도량형 등을 통일하고자 하였다. 그는 로마법을 바탕으로 7권 법전을 편찬하였다. 수도 톨레도에서는 톨레도 번역 학파라 불리는 학자 집단의 노력과 알폰소 10세의 지원으로 아랍어로 쓰인 의학, 수학, 천문학 저술이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에 전파되었다.[1]

4. 4. 트라스타마라 왕조의 성립과 왕위 계승 분쟁

트라스타마라 가문은 1369년부터 1504년까지 카스티야, 1412년부터 1516년까지 아라곤, 1425년부터 1479년까지 나바라, 1442년부터 1501년까지 나폴리를 지배한 왕가이다.

트라스타마라 가문의 이름은 트라스타마라 백작(혹은 공작)에서 유래했다.[13] 이 칭호는 카스티야의 엔리케 2세가 그의 친형이자 왕인 카스티야의 페드로와의 내전 중인 1369년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사용했다.

엔리케 3세가 사망하자 아들 후안 2세가 즉위했고, 엔리케 3세의 동생 페르난도가 섭정이 되었다. 페르난도는 1410년 그라나다 전쟁을 시작하여 안테케라를 함락시켰다. 페르난도는 1412년 아라곤 왕으로 선출되었고(카스페의 타협) 페르난도 1세가 되었지만, 그 후에도 카스티야 궁정에 계속 영향력을 행사했다. 페르난도 1세 사후에도 그의 아들들이 권세를 휘둘렀으나, 성인이 된 후안 2세와 카스티야 귀족들은 이들을 추방했고, 아라곤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엔리케 4세는 유력 귀족들과 다툼을 벌였으나, 1468년 트로스 데 기산트 협정을 맺고, 왕위 계승자를 딸 후아나 라 베르트라네하가 아닌, 귀족들이 지지하는 이복 여동생 이사벨 1세로 정했다.

4. 5.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의 성립

트라스타마라 가문은 1369년부터 1504년까지 카스티야, 1412년부터 1516년까지 아라곤 왕국, 1425년부터 1479년까지 나바라 왕국, 1442년부터 1501년까지 나폴리 왕국을 지배한 왕가이다.

1469년 바야돌리드의 비베로 궁전에서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1세의 결혼으로 두 왕국의 가족적 통합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가톨릭 왕 부부(los Reyes Católicos)로 알려졌다. 이사벨라는 오빠 엔리케 4세의 뒤를 이어 카스티야 여왕이 되었고, 페르난도는 1474년 배우자를 통해 카스티야 국왕이 되었다.[14] 1479년 페르난도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라곤 국왕이 되면서, 카스티야 왕관과 아라곤 왕관의 여러 영토가 동군연합으로 통합되어 8세기 이후 처음으로 에스파냐(España, Spain)라 불리는 단일 정치 단위가 만들어졌다.

엔리케 3세 사후, 아들 후안 2세가 즉위했고, 엔리케 3세의 동생 페르난도가 섭정이 되었다. 페르난도는 1410년 그라나다 전쟁을 시작하여 안테케라를 함락시켰다. 1412년 카스페의 타협으로 페르난도는 아라곤 왕 (페르난도 1세)으로 선출되었지만, 이후에도 카스티야 궁정에 계속 영향력을 행사했다.

엔리케 4세는 유력 귀족들과 갈등을 겪었으나, 1468년 트로스 데 기산트 협정을 맺고, 왕위 계승자를 딸 후아나 라 베르트라네하가 아닌, 귀족들이 지지하는 이복 여동생 이사벨 1세로 정했다. 1474년 이사벨 1세 즉위 후, 아라곤 왕세자이자 남편인 페르난도 5세를 공동 통치자로 삼았다. 한편, 포르투갈 왕비가 된 후아나 라 베르트라네하도 카스티야 여왕 즉위를 선포하여, 카스티야는 이사벨 지지파와 후아나 지지파로 분열되었다. 후아나 지지파와 포르투갈 왕국 연합군에 대항하여 이사벨 지지파와 아라곤 연합군이 승리했고, 1479년 포르투갈은 이사벨의 왕위 계승을 승인했다. 같은 해 페르난도도 아라곤 왕에 즉위하여(아라곤 왕으로서는 페르난도 2세),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동군연합을 이루었다.

4. 6. 레콩키스타의 종결과 스페인 왕국의 기틀 마련

엔리케 4세는 유력 귀족들과 갈등을 겪었으나, 1468년 트로스 데 기산트 협정을 통해 자신의 이복 여동생 이사벨 1세를 왕위 계승자로 정했다. 1474년 이사벨 1세가 즉위하면서 남편인 아라곤 왕세자 페르난도 5세를 공동 통치자로 삼았다. 한편, 포르투갈 왕비가 된 후아나 라 베르트라네하도 카스티야 여왕 즉위를 선포하면서 카스티야는 이사벨 지지파와 후아나 지지파로 나뉘었다. 이사벨 지지파와 아라곤 연합군은 후아나 지지파와 포르투갈 연합군에 맞서 승리했고, 1479년 포르투갈은 이사벨의 왕위 계승을 인정했다. 같은 해 페르난도는 아라곤 왕위에 올라(아라곤 왕으로서는 페르난도 2세)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동군연합이 이루어졌다.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국내 반대 세력을 진압한 후, 1482년 그라나다 전쟁을 시작했다. 1492년 그라나다가 함락되면서 레콩키스타는 막을 내렸다.

5. 카스티야 왕국의 멸망과 스페인 왕국의 성립

1504년 이사벨 1세가 사망하자 그녀의 딸인 후아나 1세가 (명목상) 여왕이 되었고, 남편인 필리페 1세가 (실권을 가진) 국왕이 되었다.[15] 필리페 1세가 사망한 후에는 후아나 1세의 정신 질환이 문제가 되어 그녀의 아들 카를로스 1세가 겨우 여섯 살이었기에, 그녀의 아버지 페르난도 2세가 섭정을 맡았다. 1516년 페르난도 2세가 사망하자 카를 1세가 어머니 후아나 1세(명목상 카스티야 여왕)와 함께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국왕(실권을 가진)으로 선포되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통치한 최초의 군주로서 카를 1세는 최초의 실질적인 스페인 국왕으로 간주될 수 있다. 카를 1세는 1519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가 되기도 했다.

카를로스 1세가 아라곤과 카스티야 양국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합스부르크 왕가 스페인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카스티야 왕국은 스페인을 구성하는 국가 중 하나로서 정치적으로 독자성을 유지했다. 카스티야 왕국이 스페인 왕국에 통합되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은 스페인이 몰락하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거쳐 부르봉 왕가 스페인이 성립된 후, 펠리페 5세 시대에 뒤늦게 국내 중앙 집권화가 실시되었을 때였다.

6. 카스티야의 사회와 문화

알폰소 8세 치세 동안, 카스티야 왕국은 기사 문장을 문장과 깃발의 상징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빨간색 바탕에 검은색 박공으로 된 파란색 창살이 있는 금색의 세 탑 성채였다.[1]

6. 1. 카스티야의 정치와 행정

모든 중세 왕국과 마찬가지로 최고 권력은 법률 공식에서 설명하듯이 군주에게 "하느님의 은총으로"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촌과 도시 공동체는 일상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규정을 발표하기 위해 의회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의회는 ''ayuntamientos'' 또는 ''cabildos''로 알려진 지방 의회로 발전했으며, 일부 주민, 즉 토지 소유 가구주(베시노s)가 나머지를 대표했다. 14세기까지 이러한 의회는 지방 행정관 및 관리 (''알칼데s'', 의장, 서기 등)와 의회 (''코르테스'') 대표를 선출할 권리와 같은 더 많은 권한을 얻었다.

지방 의회의 권력 증가와 이들과 국왕 간의 의사소통 필요성으로 인해 레온 왕국에서는 1188년, 카스티야에서는 1250년에 코르테스가 설립되었다. 다른 왕국과 달리 카스티야에는 영구적인 수도가 없었다(스페인도 16세기까지 영구적인 수도가 없었다). 따라서 코르테스는 국왕이 머물기로 선택한 어떤 도시에서든 개최되었다. 초기 레온과 카스티야 코르테스에서 도시 거주자("laboratores"로 알려짐)는 대표자의 작은 그룹을 형성했으며 입법권은 없었지만, 국왕과 일반 대중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이는 카스티야와 레온 왕국이 개척한 것이다. 결국 도시 대표들은 코르테스에서 투표권을 얻었고, 종종 대귀족에 맞서 군주와 동맹을 맺었다.

6. 2. 카스티야의 문장

알폰소 8세 치세 동안, 국왕은 카스티야의 기사 문장을 문장과 깃발의 상징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빨간색 바탕에 검은색 박공으로 된 파란색 창살이 있는 금색의 세 탑 성채였다.[1]

참조

[1] 논문 A kingdom without a capital? Itineration and spaces of royal power in Castile, c. 1252–1350 http://www.tandfonli[...] 2013
[2] 서적 Orientation: A Journey: Trip Through Europe Asia And Africa University of Pittsburgh Press
[3] 웹사이트 Castile https://www.britanni[...] 2020-11-26
[4] 서적 Dictionary of the Middle Ages American Council of Learned Societies
[5] 서적 The Contest of Christian and Muslim Spain 1031–1157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1996
[6] 간행물 The face of Europe on the eve of the great discoveries 1957
[7] 서적 The Classical Heritage in Islam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5
[8] 서적 Science in the Middle Ages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9] 서적 Arabic Thought and its Place in History https://archive.org/[...]
[10] 논문 The Meeting of East and West in Educational History 1961-10
[11] 서적 The Queen's Hand : Power and Authority in the Reign of Berenguela of Castile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2] 서적 The learned king : the reign of Alfonso X of Castile Philadelphia :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3] 서적 Spain's Centuries of Crisis: 1300–1474 Blackwell Publishing
[14] 서적 Legitimizing the Queen : Propaganda and Ideology in the Reign of Isabel I of Castile Bucknell University Press 2010
[15] 웹사이트 Estudio documental de la Moneda Castilian de Carlos I fabricada en los Países Bajos (1517) http://www.ucm.es/BU[...]
[16] 서적 世界戦争事典 改訂第2版 河出書房新社
[17] 논문 A kingdom without a capital? Itineration and spaces of royal power in Castile, c.1252–1350 http://www.tandfonli[...] 2013
[18] 서적 Orientation: A Journey: Trip Through Europe Asia And Africa University of Pittsburgh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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