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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드 방돔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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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샤를 드 방돔 공작은 부르봉 가문의 방계 출신으로, 프랑수아 1세 치세에 군인으로 활약하며 방돔 백작에서 공작으로 승격되었다. 그는 루이 12세와 프랑수아 1세 아래에서 군사적 경험을 쌓았으며, 프랑수아 1세 시기에는 파리 총독과 피카르디 총독을 역임했다. 1527년 부르봉 가문의 당주가 되었으며, 1513년 알랑송의 프랑수아즈와 결혼하여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1537년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앙투안은 나바라의 왕이 되어 앙리 4세의 아버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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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드 방돔 공작
기본 정보
18세기 초상화
작위ヴァンドーム 공작
전체 이름Charles de Bourbon
출생일1489년 6월 2일
출생지Vendôme, France
사망일1537년 3월 25일
사망지Amiens, France
배우자Françoise d'Alençon
가문Bourbon-Vendôme
아버지François de Bourbon, Count of Vendôme
어머니Marie de Luxembourg
결혼과 자녀
배우자Françoise d'Alençon
자녀Marie
Marguerite
Antoine
François
Charles
Jean
Louis
작위
ヴァンドーム 백작1495년 - 1514년

2. 생애

샤를 드 방돔은 부르봉 가문 방계 출신으로, 프랑수아와 마리 드 뤼크상부르의 장남으로 방돔 성에서 태어났다. 프랑수아 1세 치하에서 군인으로 활약하여 방돔 백작에서 방돔 공작으로 승작되었다.

1513년 프랑수아즈 다랑송과 결혼하여 13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에는 앙리 4세의 아버지인 앙투안과 콩데 공 루이 등이 있다.

1527년 샤를 3세가 사망하면서 부르봉 가문의 적통이 단절되자, 샤를 드 방돔이 부르봉 가문의 당주를 계승했다.

2. 1. 초기 생애와 가족

샤를의 아버지, 프랑수아 드 부르봉)
]
샤를의 어머니, 마리 드 룩셈부르크의 추정 초상화


샤를 드 부르봉은 1489년 6월 2일에 프랑수아 드 부르봉과 마리 드 룩셈부르크의 아들로 태어났다. 마리 드 룩셈부르크는 생폴 백국의 상속녀였다.

부르봉 가문은 루이 9세의 여섯 번째 아들인 클레르몽 백작 로베르에서 시작되었다. 방돔은 클레르몽을 통해 루이 9세의 직계 부계 후손이었다. 그의 어머니 마리는 1475년에 처형된 ''콩네타블'' 드 생폴의 손녀이자 상속녀였다. 룩셈부르크 ''콩네타블''이 소유했던 토지는 몰수되었지만, 1487년 마리의 결혼을 계기로 그녀에게 반환되었다. 따라서 샤를은 어머니로부터 라 페르, 함, 콩데앙브리를 포함한 많은 피카르디 지역의 토지를 상속받았다. 그녀는 또한 그에게 엥기앵을 포함한 플랑드르 봉토를 가져왔지만, 이 수입은 신성 로마 황제에 의해 몰수되었다. 피카르디에 있는 부르봉 영토는 La Fère|라 페르프랑스어 성에서 관리되었다. 샤를이 피카르디에서 물려받은 강력한 지위는 부르봉-방돔 가문을 피카르디에서 확고한 위치에 올려놓았으며, 다른 영주가 감히 도전할 수 없었다. 그들은 ''프랭스 뒤 상'' 지위를 누렸으며, 이는 샤를 드 부르봉과 그의 아들이 총독직을 차지하는 기반이 되었다. 프랑수아와 마리의 결혼은 샤를 8세의 지시로 1488년 2월에 거행되었으며, 국왕은 이 결혼을 통해 룩셈부르크 가문과 부르봉 가문의 이익을 결합시키고자 했다.

샤를에게는 4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 두 형제는 다음과 같다.

이름출생-사망비고
프랑수아 드 부르봉1491년–1545년생폴 백작, 도피네 총독 역임
루이 드 부르봉1493년–1553년부르봉 추기경



샤를의 여동생 안투아네트 드 부르봉은 기즈 백작과 결혼했는데 ( 로렌 가문의 일원), 1524년 샹파뉴의 총독이 되었고, 1527년에는 초대 기즈 공작이자 ''프랑스 귀족''이 되었다. 샤를의 다른 여동생은 퐁트브로의 원장이었다.

1495년 프랑수아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마리는 자신의 영지와 남편의 ''방돔 백국''을 관리해야 했다. 그녀는 1546년 사망할 때까지 과부로 지내며 피카르디에 있는 자신의 영지를 적극적으로 관리했다.

방돔 백작령(comté)이자 공작령(duché) 지도. Hrabstwo Vendôme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2. 2. 루이 12세 치하의 군사 경력

방돔 백작은 루이 12세의 원정에서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1507년 제노바 포위전에 참여했다.



1509년 베네치아와의 아냐델로 전투에서 승리한 방돔 백작은 이 전투에서 루이 12세에게 기사 작위를 받았다.

아냐델로 전투에서 루이 12세 국왕에게 기사 작위를 받은 방돔 백작


1514년 1월 9일, 프랑스 여왕 안이 사망하자 루이 12세는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고자 했다. 상중에 루이는 밀라노 공작의 약점을 틈타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원정을 준비했다.

같은 해 5월, 루이 12세의 딸 클로드와 앙굴렘 백작 간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동시에 루이 12세는 잉글랜드와 평화를 협상하려 했으며, 이 협정의 조건 중 하나는 루이 12세와 잉글랜드 공주 메리의 결혼이었다. 결혼은 8월 7일에 성사되었고, 메리는 10월 3일 칼레에 도착했다. 투아르 자작과 오르발 영주가 메리를 맞이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국왕을 대신하여 그녀를 맞이한 사람은 방돔 백작이었다. 메리는 2천 명의 기병과 2천 명의 궁수로 구성된 화려한 수행원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서퍽 공작을 포함한 잉글랜드의 주요 귀족들도 그녀와 함께했다. 10월 11일,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2. 3. 프랑수아 1세 치하의 역할

프랑수아 1세


1515년 1월 1일, 루이 12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사촌이자 사위인 프랑수아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프랭스 뒤 상의 일원이었던 방돔 백작은 루이 12세의 임종과 장례식에 참석했다.

프랑수아 1세는 즉위 후 급격한 궁정 개편보다는 연속성을 택했다. 방돔 백작을 포함하여 루이 12세 시대의 많은 인물들이 왕실 회의에 그대로 참여했다. 방돔은 국왕으로부터 'Monsieur'라는 칭호로 불리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1520년대에는 부르주아 출신 관료들이 점차 귀족 가문 출신으로 교체되었는데, 방돔 공작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기즈 백작, 몽모렌시 남작 등과 함께 왕실 업무를 담당했다. 방돔 공작은 왕자로서 왕실 자문 위원회에 자주 소집되었으나, 실제 정치적 영향력은 크지 않았고 주로 결정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 1525-1526년의 위기 기간을 제외하고는 비밀 자문 위원회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프랑수아 1세는 즉위 초, 방돔 백작에게 파리 총독과 일 드 프랑스 총독이라는 두 가지 영예로운 직책을 부여했다. 1515년 2월 18일, 방돔은 일 드 프랑스 총독직을 맡았다. 파리 시장으로서 방돔 공작은 도시 방어와 질서 유지를 담당했으며, 왕실 명령을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2. 3. 1. 고위 관료 및 군사령관

방돔과 그의 형제 생폴 백작은 모두 왕실 군대의 기본 구성 요소였던 ''compagnies d'ordonnance''(주로 귀족으로 구성된 중기병대)의 ''capitaines''(대장)으로 복무했다. 방돔은 베르뱅 영주(이탈리아에서 방돔이 복무하는 동안 그의 ''compagnie''와 합류), 카니 영주(1523), 모이 영주, 토르시 영주를 연이어 부관으로 두었다. 모이 영주는 방돔의 어머니 마리의 영지였다. 한편 토르시는 1526년 마드리드 조약에 따라 재산을 반환하는 등 방돔으로부터 다양한 특별 임무를 위임받았다.

2. 3. 2. 피카르디 총독

방돔과 그의 형제 생폴 백작은 모두 왕실 군대의 기본 구성 요소였던 ''compagnies d'ordonnance''(주로 귀족으로 구성된 중기병대)의 ''capitaines''(대장)으로 복무했다. 방돔은 베르뱅 영주, 1523년 카니 영주, 모이 영주, 토르시 영주를 연이어 부관으로 두었다. 모이 영주는 방돔의 어머니 마리의 영지였다. 한편 토르시는 1526년 마드리드 조약에 따라 재산을 반환하는 등 방돔으로부터 다양한 특별 임무를 위임받았다.

1515년 1월 1일, 루이 12세가 사망하자 그의 사촌이자 사위인 발루아 공작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의 즉위는 급격한 궁정 개편이 아닌 연속성을 나타냈고, 왕실 회의는 루이 통치 기간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로 채워졌는데, 방돔 백작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방돔은 새로운 국왕으로부터 'Monsieur'로 부르는 것을 허락받았다. 브랑톰에 따르면, 방돔의 형제인 생 폴 백작이 국왕에게 마찬가지로 호칭을 사용하려 하자, 그는 이 칭호가 방돔에게만 해당되고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2. 3. 3. 왕실 의회 의장

방돔과 그의 형제 생폴은 모두 왕실 군대의 기본 구성 요소였던 ''compagnies d'ordonnance''(주로 귀족으로 구성된 중기병대)의 ''capitaines''(대장)으로 복무했다. 방돔은 베르뱅 영주(이탈리아에서 방돔이 복무하는 동안 그의 ''compagnie''와 합류), 카니 영주(1523), 모이 영주, 토르시 영주를 연이어 부관으로 두었다. 모이 영주는 방돔의 어머니 마리의 영지였다. 한편 토르시는 1526년 마드리드 조약에 따라 재산을 반환하는 등 방돔으로부터 다양한 특별 임무를 위임받았다.

2. 3. 4. 프랑수아 1세 석방 이후

방돔과 그의 형제 생폴 백작은 모두 왕실 군대의 기본 구성 요소였던 ''compagnies d'ordonnance''(주로 귀족으로 구성된 중기병대)의 ''capitaines''(대장)으로 복무했다. 방돔은 베르뱅 영주(이탈리아에서 방돔이 복무하는 동안 그의 ''compagnie''와 합류), 카니 영주(1523), 모이 영주, 토르시 영주를 연이어 부관으로 두었다. 모이 영주는 방돔의 어머니 마리의 영지였다. 한편 토르시는 1526년 마드리드 조약에 따라 재산을 반환하는 등 방돔으로부터 다양한 특별 임무를 위임받았다.

루이 12세 통치 기간에는 에티엔 드 퐁셰, 장 드 가네, 자크 드 본, 기욤 브리소네(각각 주교, 재상, 두 명의 ''généraux des finances'' - 재정 장관)와 같은 부르주아 출신들이 ''conseil du roi''(왕의 자문위원회)에서 영향력 있는 자리에 올랐다. 1520년대가 지나면서, 방돔 공작을 포함한 명망 있는 가문의 프랑스 귀족들이 기즈 백작, 몽모렌시 남작, 투르농 추기경 등과 함께 왕실 업무에서 그들의 자리를 빼앗기 시작했다.

프랑수아 1세 통치 기간 동안 방돔 백작과 같은 왕자들은 총 33명의 ''noblesse d'épée''(검귀족 - 군 복무와 계급을 연관시킨 옛 귀족)의 약 15%를 차지했다.

역사가 미숑은 방돔 공작, 로렌 공작, ''connétable'' 드 부르봉(connétable, 즉 프랑스 대원수, 왕국에서 가장 높은 군사 직위로, 부르봉 공작이라는 칭호로도 불림)과 같은 인물들이 왕실 자문 위원회에 존재한 것은 주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주장한다. 미숑은 방돔 공작을 왕자로서, 나중에는 공작으로서 왕관의 고문으로 분류한다. 따라서 알랑송 공작, 나바라 왕, 부르봉 공작, 부르봉 추기경과 같은 다른 이들과 함께 이들은 정치적 영향력이 없더라도 자주 자문 위원회에 소집되었다. 이러한 고위 인물들의 유명한 서명은 정치적 영향력이나 주요한 관여가 부족했던 결정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방돔 공작은 1525-1526년의 위기 기간을 제외하고는 더욱 배타적인 ''conseil privé''(비밀 자문 위원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역사가 렌테와 미숑은 프랑수아 1세 통치 기간 동안 왕실 자문 위원회에 참석한 인물들을 목록화하여, 위원회의 주요 구성원과 함께 참석한 인물로 구분했다. 방돔 공작은 1515-1516년, 1518년, 1524년, 1527-1528년, 1530년, 1534년, 1537년에 위원회에 참석했으며, 그들은 1525년의 위기 동안 그를 위원회의 주요 인물로 격상시켰다고 평가한다.

프랑수아는 젊은 시절부터 자신과 가까웠던 사람들에게 빠르게 호의를 베풀기 시작했다. 투아르 자작은 기옌브르타뉴의 해군 제독 직을 받았고, 부아시 영주는 ''Grand Maître''(왕실의 최고 관직이자 다양한 특권을 가진 왕실의 수장)가 되었으며, 방돔 백작은 파리 총독과 일 드 프랑스(파리 주변 지역) 총독이라는 두 가지 영예를 얻었다. 그는 2월 18일에 후자의 직책을 맡았다.

파리 시장으로서 방돔 공작은 도시 방어를 책임졌다. 그는 수도의 질서를 유지하는 당국 중 하나였다(''parlement''와 ''bureau de la Ville''와 함께). ''parlement''와 함께 방돔 공작은 왕실 명령을 전달하는 통로였다.

2. 4. 죽음과 유산

1515년 3월, 프랑수아 1세는 군사적 공헌에 대한 보상으로 방돔 백작령을 공작령으로 승격시켰다. 이로써 방돔은 앙주 공작령에 종속된 지위에서 벗어나 귀족(pair)이 되었다.

같은 해, 방돔은 미래의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와 연락하기 위해 플랑드르로 외교 임무를 수행했으며, 외교관 랑게 영주와 동행했다.

1515년 가을, 프랑스는 이탈리아 진출에 성공했다. 마리냐노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방돔은 국왕과 함께 참전하여 말이 창에 찔리는 부상을 입었다. 방돔은 국왕에게 다소 이류 지휘관으로 여겨졌지만, 그의 형제 생 폴 백작은 용맹함으로 특별한 칭찬을 받았다.

3. 자녀

샤를의 아내 알랑송의 프랑수아


샤를의 아들 나바라의 앙투안, 잔 다르브레와 결혼하여 나바라 왕이 되었고, 앙리 4세의 아버지가 되었다.


1513년 5월 16일, 샤를 드 방돔은 샤토당에서 알랑송 공작 르네 드 발루아와 로렌의 마르그리트의 딸이자 알랑송 공작 샤를 4세의 여동생인 알랑송의 프랑수아와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왕가의 두 하위 분파가 연결되었다. 방돔의 아내는 결혼과 함께 샤토-공티에, 라 플레슈, 보몽-쉬르-사르트의 남작령을 가져왔다.

샤를은 프랑수아즈 드 알랑송과의 사이에서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3. 1. 자녀 목록

이름출생사망비고
루이1514년 2월 23일1516년 4월 7일마를 백작
부르봉의 마리1515년 10월 29일1538년 9월 28일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와 결혼이 예정됨
마르그리트 드 부르봉1516년 10월 26일1559년 10월 20일뇌베르 공작 프랑수아 1세와 결혼, 자녀를 둠
나바라의 앙투안1518년 4월 22일1562년 11월 17일방돔 공작, 나바라의 잔 다르브레와 결혼하여 나바라 왕이 됨. 아들 앙리 4세는 1589년 프랑스 왕위에 오름
앙기앵 백작 프랑수아 드 부르봉1519년 9월 23일1545년 2월 23일앙기앵 백작
마들렌 드 부르봉1520년 2월 3일(불명)푸아티에 생트-크루아 수도원의 수녀원장
루이 드 부르봉1522년 5월 3일1525년 6월 25일
부르봉의 샤를1523년 12월 22일1590년 5월 9일부르봉 추기경, 1589년부터 1590년까지 가톨릭 동맹의 왕 샤를 10세
카트린 드 부르봉1525년 9월 18일1594년 4월 27일수아송 노트르담 수도원의 수녀원장
르네 드 부르봉1527년 2월 6일1583년 2월 9일셸 수도원의 수녀원장
수아송 및 앙기앵 백작 장 드 부르봉1528년 7월 6일1557년 8월 10일수아송 백작, 이후 에투트빌 공작, 에투트빌 공작 부인 마리 드 부르봉과 결혼
콩데 공 루이 1세1530년 5월 7일1569년 3월 13일콩데 공, 엘레오노르 드 로이(1564년 사망)와 1551년 결혼, 오를레앙-롱그빌의 프랑수아즈(1601년 사망)와 1565년 재혼. 첫 부인에게서 8명, 둘째 부인에게서 3명의 자녀를 둠.
엘레오노르 드 부르봉1532년 1월 18일1611년 3월 26일퐁트브로 수도원의 수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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