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2세 드 라 트레무아유
1. 개요
루이 2세 드 라 트레무아유는 푸아투 출신의 프랑스 귀족으로, 브르타뉴를 프랑스에 귀속시키기 위한 광기 전쟁에서 프랑스 왕실 군대를 지휘하여 생토뱅뒤코르미에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는 이탈리아 전쟁에 참전하여 포르노보 전투와 아냐델로 전투에 참여했으며, 노바라 전투에서는 패배했다. 이후 마리냐노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파비아 전투에서 아르카부스에 의한 부상으로 사망했다. 그는 가브리엘 드 부르봉과 결혼하여 샤를 1세를 낳았고, 루이사 보르자와 재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투아르 자작, 탈몽 공작 등의 작위를 받았으며, 파리 8구의 라 트레무아유 거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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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루이 2세 드 라 트레무아유 |
|---|---|
| 출생일 | 1460년 9월 29일 |
| 출생지 | 투아르, 푸아투, 프랑스 왕국 |
| 사망일 | 1525년 2월 24일 |
| 사망지 | 파비아 |
| 사망 원인 | 아르케부스 총상 |
| 아버지 | 루이 1세 드 라 트레무아유 |
| 배우자 | 가브리엘 드 부르봉 (1484년 7월 28일 결혼) 루이사 보르자 (1517년 4월 7일 결혼) |
| 자녀 | 샤를 1세 드 라 트레무아유 |
| 친척 | 루이 1세 드 몽팡시에 백작 프랑수아 2세 드 라 트레무아유 루이즈 드 코에티비 체사레 보르지아 |
| 작위 | 투아르 자작 塔尔蒙公 |
| 직함 | 탈몽 공 기네 백작 베농 백작 쉴리 남작 크라옹 남작 몽타귀 남작 몰레옹 남작 릴부샤르 남작 레 섬의 영주 로슈포르 영주 마랑 영주 국왕 수석 시종무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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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전 전투 | 광인 전쟁 생토뱅뒤코르미에 전투 이탈리아 전쟁 포르노보 전투 노바라 전투 (1500년) 아냐델로 전투 노바라 전투 (1513년) 마리냐노 전투 파비아 전투 (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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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0년 출생 -
방유령
방유령은 1460년에 태어나 1529년에 사망한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김종직의 문인이며 갑자사화로 파직되었으나 복귀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훈구파이면서 사림파를 두둔하는 등 복잡한 정치적 행보를 보였다. -
1460년 출생 -
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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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5년 사망 -
토마스 뮌처
토마스 뮌처는 독일의 급진적인 종교 개혁가이자 1525년 독일 농민 전쟁의 주요 지도자로, 종말론적이고 혁명적인 사회 변혁을 주장하며 농민들을 규합했으나 프랑켄하우젠 전투에서 패배 후 처형되었고, 그의 사상은 초기 공산주의 사상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
1525년 사망 -
무산군 (왕족)
무산군은 조선 성종의 서자이자 숙원 김씨 소생의 12남으로, 연산군 시절 안동 춘양으로 피신했으며 문필과 문장에 능했고 군부인 평산 신씨와의 사이에서 6남 2녀를 두었다. -
전사한 군인 -
앙투안 샤를 루이 드 라살
앙투안 샤를 루이 드 라살은 프랑스 혁명 및 나폴레옹 전쟁에서 활약한 기병 지휘관으로, 이탈리아, 이집트, 프로이센, 폴란드, 스페인 등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바그람 전투에서 전사했다. -
전사한 군인 -
골리앗
골리앗은 블레셋 출신의 거인으로, 다윗과의 대결로 유명하며, 이스라엘 군에게 일대일 대결을 제안했으나 다윗에게 죽임을 당한다.
2. 생애
루이 2세 드 라 트레무아유는 푸아투의 유력 귀족 가문 출신으로 투아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루이 1세 드 라 트레무아유와 마르그리트 당부아즈이다.
그는 프랑스 왕국을 위해 여러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광기 전쟁 당시 프랑스 왕실 군대를 지휘하여 브르타뉴 공국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후 이탈리아 전쟁에도 참전하여 활약했다.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국왕 프랑수아 1세를 보호하던 중 전사했다.
그는 1484년 가브리엘 드 부르봉과 결혼하여 외아들 샤를을 두었으나, 샤를은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이후 1517년 루이자 보르자와 재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그의 사후 가독은 손자인 프랑수아가 계승했다.
2.1. 군사 경력
루이 2세는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의 세력이 약화된 광기 전쟁 (La Guerre Folle프랑스어, 또는 도화 전쟁) 동안 프랑스 왕실 군대를 지휘하여 브르타뉴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488년 3월, 그는 샤를 8세에 의해 브르타뉴의 중장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7월 28일 생토뱅뒤코르미에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브르타뉴의 실질적인 독립을 종식시켰다.
이후 이탈리아 전쟁에도 여러 차례 참전했다. 주요 참전 전투는 다음과 같다.
* 포르노보 전투 (1495년)
* 아냐델로 전투 (1509년): 프랑스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 노바라 전투 (1513년): 프랑스군 사령관을 맡았으나, 10,000명의 병력으로 13,000명의 스위스 용병에게 매복 공격을 당해 큰 패배를 겪었다.
* 마리냐노 전투 (1515년): 프랑수아 1세의 지휘 아래 프랑스의 승리를 이끌었다.
1525년 2월 24일, 파비아 전투에서 전사했다. 전투 막바지에 프랑스군이 1,500명의 스페인 아르카부스 사수들에게 기습을 당했을 때, 라 트레무아유는 다른 고위 귀족들과 함께 국왕 프랑수아 1세를 보호하기 위해 싸웠다. 이 과정에서 심장에 아르카부스 총탄을 맞고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2.2. 혼인
1484년 7월 28일, 루이 2세는 루이 1세 드 몽팡시에의 딸인 가브리엘 드 부르봉(1447년–1516년)과 첫 번째 결혼을 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외아들 샤를 1세 드 라 트레무아유(1485년–1515년)가 태어났다. 샤를 1세는 루이즈 드 쿠아티비와 결혼하여 프랑수아 2세 드 라 트레무아유를 낳았다.
1517년 4월 7일, 루이 2세는 발렌티누아 공작 체사레 보르자와 그의 프랑스인 부인 샬로트 달브레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적녀인 16세의 루이사 보르자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이 결혼에서는 자녀가 없었다. 루이 2세가 사망한 지 5년 후, 루이사 보르자는 부르봉뷔세(Bourbon-Busset)의 영주 필리프 드 부르봉과 재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3. 작위
루이 2세 드 라 트레무아유는 생애 동안 다양한 작위를 얻었다. 그는 탈몽 공작(Prince de Talmont프랑스어), 투아르 자작(Vicomte de Thouars프랑스어), 기네 백작(Comte de Guînes프랑스어), 베농 백작(Comte de Bénon프랑스어), 쉴리 남작(Baron de Sully프랑스어), 크라옹 남작(Baron de Craon프랑스어), 몽타쥐 남작(Baron de Montagu프랑스어), 몰레옹 남작(Baron de Mauléon프랑스어), 일부샤르 남작(Baron de l'Ile-Bouchard프랑스어) 등의 귀족 작위를 보유했다. 또한 일드레 영주(Seigneur des Iles de Ré프랑스어), 로슈포르 영주(Seigneur de Rochefort프랑스어), 마랑 영주(Seigneur de Marans프랑스어)이기도 했다. 이와 함께 프랑스 국왕의 최고 시종(Premier Chambellan du Roi프랑스어)이라는 중요한 궁정 직위도 맡았다.
4. 유산
파리 8구에 있는 라 트레무아유 도로(Rue de La Trémoille)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