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호암산성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서울 호암산성은 호암산 정상에 있는 한우물을 중심으로 하는 유적이다. 한우물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었으며, 가뭄 시 기우제, 전시 군용으로 활용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석축지와 조선시대 석축지가 확인되었으며, 2011년 '한우물및주변산성지'에서 현재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1972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1991년 해지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서울 금천구의 지리 - 관악산
관악산은 서울과 경기도에 걸쳐 있는 높이 629m의 산으로, 험준한 봉우리와 기암절벽, 깊은 계곡으로 유명하며 효령대군과 관련된 연주대와 연주암이 있고,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풍수지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방송 송신 시설이 위치해 있다. - 서울 금천구의 지리 - 호암산
호암산은 서울 금천구, 관악구와 경기 안양시에 걸쳐 있는 산으로, 과거 시지산이나 별장산으로도 불렸으며 삼성산, 관악산 등산로의 일부이고, 풍수지리적으로 한양의 재앙을 막기 위해 태조가 호랑이 형상 바위 앞에 궁교와 사자암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안양시의 지리 - 관악산
관악산은 서울과 경기도에 걸쳐 있는 높이 629m의 산으로, 험준한 봉우리와 기암절벽, 깊은 계곡으로 유명하며 효령대군과 관련된 연주대와 연주암이 있고,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풍수지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방송 송신 시설이 위치해 있다. - 안양시의 지리 - 평촌신도시
평촌신도시는 1980년대 후반 주택난 해결을 위해 건설된 1기 신도시 중 하나로, '주택 200만 호 건설 계획'에 따라 안양시 일대에 조성되었으며, 수도권 대규모 택지개발지구 사업의 중요한 부분이다. - 서울특별시의 성 - 북한산성
북한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양 도성을 방어하는 요충지였으며, 백제 시대에 처음 축조된 후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숙종 때 대대적으로 개축되어 석성으로 완공되었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훼손되었으나 현재는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인 유적이다. - 서울특별시의 성 - 풍납토성
풍납토성은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백제 초기 왕성으로 추정되는 한반도 최대 규모의 토성으로, 사적 제11호로 지정되어 백제 시대 유물과 삼한 시대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서울 호암산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서울 호암산성 |
한자 표기 | 서울 虎巖山城 |
유형 | 사적 |
지정 번호 | 343 |
지정일 | 1991년 2월 26일 |
주소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산83-1번지 외 |
면적 | 133,790m2 |
관리 | 금천구 |
꼬리표 | 서울 시흥동 |
문화재청 정보 | |
문화재청 ID | 13,03430000,11 |
2. 역사
2. 1. 삼국시대 ~ 통일신라
한우물은 호암산 정상에 있는 길이 22m, 폭 12m의 작은 연못 규모의 우물로, 주변은 화강암으로 쌓여 있다. 산 정상에 있음에도 물의 양이 일정하고 항상 맑은 상태를 유지하여 신비로움을 더한다. 한우물은 용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으며, 가뭄 때에는 기우제를 지내고 전시에는 군용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한우물의 기원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발굴 조사 결과, 현재의 한우물 밑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석축지가 존재한다. 통일신라시대 석축지는 동서 17.8m, 남북 13.6m, 깊이 2.5m 규모이며, 출토된 유물의 중심 연대는 7~8세기로 추정된다. 석축 구조는 안압지의 축조 수법과 동일한 방식으로, 아래단을 앞으로 내어 쌓고 위로 가면서 들여 쌓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제2우물지에서는 ‘잉벌내력지내미(仍伐內力只內未)’라는 글이 있는 청동 숟가락이 출토되었다.
2. 2.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한우물은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의 장방형 석축지로, 그 아래에 통일신라시대 석축지가 어긋나게 축석되어 있다. 한우물은 '큰 우물' 또는 '하늘 못(天井)'이라는 뜻으로, '용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가뭄 때에는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로, 전시에는 군사용으로 활용되었다. 우물지 근처에서 발견된 석수상(개 모양 동물상)은 조선시대 한양에 화재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설화와 관련이 있다. '석구지(石拘池)'라고 새겨진 돌은 이 연못이 석수상과 관련되어 석구지라고 불렸음을 시사한다.3. 구조 및 특징
한우물(天井)은 호암산 정상에 있는 작은 연못 규모의 우물이다. 네 주변을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산 정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물의 양이 변함없고, 항상 맑은 상태로 고여있어 신비로움을 더해 주고 있다. 한우물은 용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으며, 가뭄 때에는 기우제를 지내고 전시에는 군용에 대비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석축지는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의 장방형이고, 그 아래에서 동서 17.8m, 남북 13.6m, 깊이 2.5m의 통일신라시대의 석축지가 확인되었다. 우물은 지표 밑 30cm까지는 백자편을 비롯한 조선시대 유물이 출토되고, 그 아래에는 유물이 거의 없는 굵은 모래층이 있고, 이 모래층 아래에서 교란되지 않은 뻘층이 계속되고 여기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발굴된 유물의 중심연대는 7∼8세기로 추정되고 있다. 우물의 석축구조는 남동 모서리의 경우 모두 13단으로 쌓여져 있고, 석축의 제일 아랫단은 약 20cm가량 앞으로 내어 쌓고, 위로 가면서 들여 쌓는 방법을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축조방법은 안압지의 축조수법과 동일하다. 또한 한우물에서 남쪽으로 약 300m로 떨어진 곳에서도 남북 18.5m, 동서 10m, 깊이 2m로 석축된 제 2우물지가 확인되었다.
4. 명칭 변경
5. 문화재 지정 및 해지
한우물은 1972년 8월 30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었다가, 1991년 2월 26일 해지되었다.
6. 현대적 의의
호암산성과 한우물은 서울 지역의 중요한 역사 유적이며,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생활상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한우물 주변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당시의 신앙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한우물은 호암산 정상에 있는 길이 22m, 폭 12m의 작은 연못 규모의 우물로, 네 주변을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산 정상에 있으면서도 늘 물의 양이 변함없고, 항상 맑은 상태로 고여있어 신비로움을 더해 주고 있다. 한우물은 용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으며, 가뭄 때에는 기우제를 지내고 전시에는 군용에 대비하였다 한다.
참조
[1]
간행물
안양문화유적총람
안양시
[2]
간행물
대한민국 관보 제11756호
http://theme.archive[...]
1991-02-26
[3]
간행물
문화재청고시 제2011-116호
http://gwanbo.mois.g[...]
2011-07-28
[4]
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