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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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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풍납토성은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에 위치한 토성으로, 백제 초기 왕성으로 추정되는 유적이다. 1916년 처음 기록되었으며,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유적의 성격이 드러났다. 이후 여러 차례 발굴 조사를 통해 백제 시대 유물과 삼한 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고, 1963년 사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풍납토성은 한반도 내 최대 규모의 토성으로 추정되며, 백제의 위례성 또는 삼한 시대 소국의 중심지로 추정된다. 현재는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며, 주변에는 몽촌토성, 석촌동고분군, 한성백제박물관 등이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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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개요
풍납토성
풍납토성 토성(2004년 5월)
기본 정보
명칭서울 풍납동 토성
한자 표기서울 風納洞 土城
로마자 표기Seoul Pungnap-dong Toseong
문화재 지정 명칭서울 풍납동 토성
영어 명칭Earthen Fortification in Pungnap-dong, Seoul
상세 정보
위치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1동 72-1번지 외
종류사적
지정 번호11
지정일1963년 1월 21일
시대삼국시대
면적1,428필지 399,005.8m²
추가 정보
웹사이트문화재청
역사
축조 시기 추정백제 초기
추정 수도위례성 (추정)
발굴 성과풍납토성 동쪽 성벽 발굴 성과 공개 (2014년 12월 3일)
특징
설명백제의 국가 탄생과 관련된 중요한 유적

2. 발굴 과정과 출토 유물

풍납토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916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실시된 고적조사이다. 이 조사는 유적이 있다는 정도만 파악한 간단한 조사였다.[11] 이 유적의 구체적인 성격은 1925년 7월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밝혀졌다. 당시 한강이 범람하여 토성의 서벽 인근이 쓸려나갔고, 한달 뒤인 8월 세키노 다다시에 의한 조사 결과 청동제 자루솥, 금제 귀걸이와 허리띠, 백동거울, 유리구슬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12] 1934년에는 아유카이 후사노신이 백제 초기 도읍으로 추정했다.[12]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져 1936년에는 조선총독부가 조선 고적 27호로 지정했다. 1939년 이병도는 이 성을 왕성이 아닌 군사적 목적의 사성(蛇城)으로 보았다.[13]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1963년 성벽만이 사적 11호로 지정되었고, 성의 내부는 사유지로 남아있었다. 1964년 서울대학교 박물관이 시행한 시굴조사에서 삼국 시대 건국 초기의 철기시대 유물이 발굴되었다. 이 때 발굴을 주도한 김원룡 교수는 1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보았다. 1975년에 김원룡은 이병도의 견해를 받아들여 "반민반군(半民半軍)의 읍성"이라 보았다.

1996년 한양대학교 박물관의 구제발굴조사에서 유물층이 확인되었고, 1997년 1월 이형구 교수의 조사에서 백제토기가 발견되었다. 이에 풍납지구 긴급발굴조사단이 구성되어 주거지 19기와 3중환호를 확인했다. 1999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동성벽 단면 절개조사를 실시했고, 한신대학교 박물관이 경당지구를 발굴했다. 경당지구에서는 백제의 각 지역에서 올라온 토기들과, 중국에서 만들어진 토기들이 다량 발굴되어 해당 유적의 특별한 지위가 확인되었다. 제사유적과 제사 후 폐기된 도구와 음식을 버리는 구덩이 유구, 기와와 건물 바닥에 까는 전, 토기, 유리구슬 조각, 제물로 보이는 12마리의 말머리 등이 나왔다. 경당지구의 제사 유적 주 건물은 길이 13.5m, 폭 7m, 길이 3m의 궁(弓)자형 가옥이었다.

발굴 조사에 따르면, 토성 축조 이전인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 중엽( 원삼국시대 )까지 토성 지역에는 3중 환호취락과 수혈주택이 존재했다.[3] 이후 토성은 늦어도 3세기 전후에는 완성되었고, 삼국시대 백제 초기까지 사용되었다.[3] 백제 시대 유적으로는 제사와 관련된 대형 건물 유적과 수혈주택 등 다수의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다량의 백제 토기·와기·철기, 중국 남조의 도자기가 출토되었다.[3]

3. 성의 규모와 성격

풍납토성은 동벽 1.5km, 남벽 200m, 북벽 300m로 둘레 약 2.7km가 남아있으나 조사 결과 둘레가 4km가 넘고 부지 26만 평 이상으로 한반도 내 최대 규모 토성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탄소연대 측정 결과 이 성은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7] 성벽이 축조된 지점은 한강 지천의 자연제방 윤곽을 이어받은 것으로 판단된다.[20]

성의 성격을 두고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는 백제위례성으로 보는 견해와 삼국 시대 국경의 방어성이었다는 견해, 또는 삼한의 소국이었다는 세 가지 의견이 존재한다. 성을 짓는 데에 연인원 100만 명 정도가 동원됐을 것으로 추정하여 도성의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18] 기원전 1세기 낙랑의 인구수가 40만 6748명이었다는 한서 지리지(漢書 地理志)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19] 인구 40만의 낙랑에게 밀리던 백제 초기 때 토성 축조에 100만 명을 동원하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서로 대립하는 상황이다.

같은 곳에서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여러 시대의 유물들이 출토되는 점과, 과거 백제 지역에서는 확인되지 않던 중국에서 유래된 판축(版築) 기술이 적용된[21]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삼한 시대 어떤 소국의 중심지였다가 3세기 중후반~4세기 초반[7][22] 삼국 세력 중 하나에게 흡수되어 새로운 축성 기술이 도입된 것으로 추측된다.

발굴 조사에 따르면, 토성 축조 이전인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 중엽(원삼국시대)까지 토성 지역에는 3중 환호취락과 수혈주택이 존재했다. 이후 토성은 늦어도 3세기 전후에는 완성되었고, 삼국시대 백제 초기까지 사용되었다. 백제 시대 유적으로는 제사와 관련된 대형 건물 유적과 수혈주택 등 다수의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다량의 백제 토기·와기·철기, 중국 남조의 도자기가 출토되었다. 이러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풍납토성을 중심으로 남쪽의 몽촌토성과 함께 백제의 한산성(하남 위례성, 475년 함락)을 구성했다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3] 주변에는 백제 왕릉으로 추정되는 석촌동고분군이 있다.

백제는 4세기 중엽까지 한성에 왕도를 두었고, 이때의 왕성으로 여겨지는 것이 한강 남안에 축조된 풍납토성이다. 풍납토성이 ‘토성’이라고 불리는 것은 둘레 3.5km 정도의 장방형 토루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을 장방형 성벽으로 둘러싼 형태는 중국 왕조가 채택했던 방식이므로, 풍납토성 또한 원래는 대방군에 속한 현의 성으로 여겨진다.[4] 고구려의 대방군 정벌 이후 고구려의 속성이 되었고, 점차 고구려로부터 독립을 추진한 백제의 왕성이 된 것으로 보인다.[4]

4. 복원 사업과 갈등

송파구청과 서울특별시청은 풍납토성 복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이 지역의 땅을 확보하여 공원화하고 있다. 그러나 문화재청과 사업자, 거주 주민들 사이에 보상비 갈등이 존재한다.[15] 2000년 5월 13일에는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주민들이 굴삭기로 발굴 현장을 훼손하는 사건도 있었다.[15] 삼표 풍납레미콘공장 부지 이전 협상도 진행되었지만 소송으로 이어졌고, 대법원은 이전 판결을 내려 해당 부지는 송파구로 넘어갈 예정이다.

2015년 5월 17일, 박원순 서울시장은 꿈에 백제왕이 나타났다며 풍납토성 발굴 의지를 밝혔다. 박원순 시장은 페이스북에 “어제 밤 백제왕이 꿈에 나타나 소스라치게 놀랐다”며 “한성백제박물관과 풍납토성 일대를 둘러보고 제대로 보상, 발굴하여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밝혔다.[16][17]

5. 역사적 의의와 과제

풍납토성은 백제가 4세기 중엽까지 한성에 왕도를 두었을 때의 왕성으로 여겨진다. 둘레 3.5km 정도의 장방형 토루로 둘러싸여 있어 '토성'이라고 불리지만, 이러한 형태는 중국 왕조가 채택했던 방식이므로, 원래는 대방군에 속한 현의 성으로 여겨진다.[4] 고구려의 대방군 정벌 이후 고구려의 속성이 되었고, 점차 고구려로부터 독립을 추진한 백제의 왕성이 된 것으로 보인다.[4] 과거에는 대방군의 군아로 비정하는 설도 있었으나,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유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1963년 1월 21일 "광주 풍납리 토성"으로 대한민국 사적 제11호로 지정되었고,[5] 2011년 7월 28일 지정 명칭이 "서울 풍납동 토성"으로 변경되었다.[5]

6. 주변 유적


  • 몽촌토성 - 백제 초기의 도성 추정지 중 하나이다.
  • 석촌동고분군 - 백제 시대의 고분군이다.
  • 가락동고분군 - 백제 시대의 고분군이다.
  • 방이동고분군 - 백제 시대라는 설이 있었으나, 현재는 6세기 후반 이후 신라 시대 고분으로 추정된다.
  • 한성백제박물관

7. 사진

토루 비탈면

8. 관련 홈페이지

참조

[1] 웹사이트 광주풍납리토성(廣州風納里土城) http://www.encyber.c[...] Doosan Encyclopedia 2008-04-16
[2] 웹사이트 Pungnap-toseong (Earthen Ramparts) http://m.visitseoul.[...] Seoul Metropolitan Government 2014-02-07
[3] 서적 概説 韓国考古学 同成社 2013-09-25
[4] 서적 朝鮮三国志 高句麗・百済・新羅の300年戦争 新紀元社 2012-07-24
[5] 웹사이트 서울 풍납동 토성(서울 風納洞 土城) http://www.cha.go.kr[...] 대韓民国文化財庁
[6] 간행물 문화재청고시제2020-3호(서울 풍납동 토성 사적 추가지정) http://gwanbo.mois.g[...] 관보 2020-01-15
[7] 뉴스 ‘풍납토성, BC 2세기 축조’ 탄소 연대 측정도 무시 https://www.hani.co.[...] 한겨레
[8] 뉴스 돈먹는 하마 풍납토성 발굴 해법은 https://m.mk.co.kr/n[...] 매일경제
[9] 웹인용 "백제의 국가 탄생과 화성 마하리 무덤떼" https://ggc.ggcf.kr/[...] 2024-06-14
[10] 웹인용 "국립문화재硏, 풍납토성 동쪽 성벽 발굴성과 공개" https://www.mk.co.kr[...] 2024-06-14
[11] 웹인용 백제왕성 발굴 계기된 1925년 대홍수 https://www.seouland[...] 2023-12-23
[12] 저널 百濟古都案內記
[13] 저널 광주 풍납리토성과 백제의 사성
[14] 간행물 문화재청고시제2011-116호(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명칭 변경 및 지정·해제) http://gwanbo.mois.g[...] 관보 2011-07-28
[15] 뉴스 풍납토성 발굴 현장 ''문화 대참사'' 전모, 풍납토성 발굴 현장 분규 전말/문화재청·문광부 ‘모르쇠’ 일관… "발굴 팀과 주민만 벌거벗고 싸웠다" http://www.sisapress[...] 2012-10-10
[16] 뉴스 박원순 서울시장 “백제왕이 꿈에 나타나…풍납토성 백제 왕성 발굴 추진” https://www.hankooki[...] 2015-05-19
[17] 뉴스 박원순 “백제왕이 꿈에…” 풍납토성 복원 의지 밝혀 https://n.news.naver[...] 네이버 뉴스 2015-05-20
[18] 뉴스 [풍납토성 미스터리]②풍납토성 복원 대체 어디까지…인구 4만 아파트촌 다 없애나? http://www.asiae.co.[...] 2017-10-20
[19] 웹사이트 기획, 역사로 살펴본 한반도 인구 추이 http://edu.chosun.co[...] 조선에듀
[20] 간행물 풍납토성 축성기술의 비밀을 풀다 https://www.cha.go.k[...] 문화재청
[21] 뉴스 中 판축기술로 쌓은 풍납토성… 백제 최초 외래기술 적용 https://www.segye.co[...] 세계일보
[22] 웹사이트 토성축조 https://www.songpa.g[...] 송파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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