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미할코프
1. 개요
세르게이 미할코프는 러시아의 아동 문학 작가이자 소련 및 러시아의 국가 가사를 작사한 인물이다. 1930년대부터 아동 문학 작가로 활동하며 '스툽 삼촌'과 같은 작품으로 인기를 얻었다.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요시프 스탈린의 의뢰를 받아 소련 국가의 가사를 썼으며, 이 가사는 이후 수정 및 개정을 거쳐 러시아의 국가로 채택되었다. 그는 또한 KGB와 협력한 의혹을 받기도 했으며, 다양한 훈장을 수여받았다. 2009년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소련의 시인 -
이오시프 스탈린
이오시프 스탈린은 소비에트 연방의 독재자이자 소련 공산당 지도자로서, 소련의 산업화와 2차 세계 대전 승리를 이끌었지만 대숙청과 공포 정치로 수백만 명의 희생을 초래했으며, 그의 통치와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논쟁의 대상이다. -
소련의 시인 -
라술 감자토프
다게스탄 공화국 출신 아바르인 시인 라술 감자토프는 캅카스 산맥의 자연과 풍속, 사랑, 우정을 소재로 시를 썼으며, 소련과 러시아에서 여러 훈장을 받으며 문학적 업적과 사회적 공로를 인정받았다. -
1급 조국전쟁 훈장 수훈자 -
바실리 자이체프
바실리 자이체프는 제2차 세계 대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활약하며 225명 이상의 독일군을 사살하고 독자적인 저격 전술을 개발한 소련군 저격수로,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고 그의 활약상은 선전에 활용되었으며 일부 기록에 대한 논쟁이 존재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여러 대중문화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
1급 조국전쟁 훈장 수훈자 -
에리히 밀케
에리히 밀케는 독일 공산당 당원, NKVD 활동, 스페인 내전 참전을 거쳐 1957년부터 1989년까지 동독 국가보안부 수장으로 재임하며 동독 사회를 감시하다가, 베를린 장벽 붕괴 후 살인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2000년 사망한 슈타지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
국가 작사가 -
톈한
톈한은 중국의 극작가이자 시나리오 작가, 가사 작가, 영화 제작자로, '의용군행진곡'을 작사하고 남국사와 남국예술학원을 설립하여 중국 연극계에 영향을 미쳤으나 문화대혁명으로 투옥되어 사망 후 명예 회복되었다. -
국가 작사가 -
프란체 프레셰렌
프란체 프레셰렌은 슬로베니아의 시인이자 변호사로, 슬로베니아 문학의 선구자이자 국민 시인으로 인정받으며, 그의 작품은 슬로베니아 국민 정체성 형성에 기여하여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2. 생애와 경력
세르게이 미할코프는 모스크바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1930년대부터 코르네이 추코프스키, 사무일 마르샤크, 아그니야 바르토 등과 함께 러시아 아동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활동했다. 특히 그의 작품 중 키가 큰 경찰관 '스툽 삼촌'(Дядя Стёпа)에 관한 시는 큰 인기를 얻었다.
1942년, 이오시프 스탈린의 의뢰로 작곡가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프의 음악에 맞춰 작가 엘-레기스탄과 함께 소련 국가의 가사를 썼다. 이 곡은 1944년 1월 1일 소련의 새로운 국가로 채택되었다. 1953년 스탈린 사후, 스탈린 격하 과정에서 그의 이름을 언급한 가사는 삭제되었고, 이후 가사 없이 국가가 사용되었다. 미할코프는 1970년 새로운 가사를 썼고, 이는 1977년 9월 1일 승인되어 소비에트 헌법에 공식화되었다.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1991년 보리스 옐친 대통령에 의해 소련 국가는 폐지되었다. 하지만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알렉산드로프의 곡을 복원하려 했고, 미할코프는 이에 맞춰 새로운 가사를 썼다. 그 결과 2000년 12월 30일 《러시아의 국가》가 공식 채택되었다.
미할코프는 국가 외에도 많은 풍자극과 코미디 각본을 썼으며, 우화 장르를 부활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는 스탈린상 3회(1941, 1942, 1950)를 포함한 많은 상을 받았다.
2003년, 푸틴 대통령은 미할코프의 90세 생일을 맞아 그의 모스크바 자택을 방문하여 2등급 조국 공헌 훈장을 수여했다. 미할코프는 2009년 8월 27일 96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한편, 미할코프와 그의 아내는 국가보안위원회(KGB)를 위해 일했다는 논란이 있다.
2.1. 초기 생애
세르게이 미할코프는 1913년 3월 13일 모스크바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미할코프이고 어머니는 올가 미하일로브나 미할코바 (결혼 전 성은 글레보바)였다.
1930년대부터 코르네이 추코프스키, 사무일 마르샤크, 아그니야 바르토와 함께 러시아 아동 문학 작가로 활동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특히 키가 큰 경찰관 '스툽 삼촌'(Дядя Стёпа)에 관한 시는 아이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스툽 삼촌은 나무에 오른 고양이를 구출하는 등 어려운 이웃을 돕는 친절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2.2. 문학 활동
1930년대부터 그는 러시아어 사용 아동을 위한 가장 인기 있는 시인으로 코르네이 추코프스키, 사무일 마르샤크, 아그니야 바르토와 경쟁해왔다. 특히 키가 매우 큰 "스툽 삼촌"(Дядя Стёпа, Uncle Styopa영어)에 관한 그의 시는 큰 인기를 얻었다. 스툽 삼촌은 나무에 오른 고양이를 구출하고 다른 도움이 필요한 일들을 하는 친절한 경찰관이다. 영어로는 Uncle Steeple영어로 번역된다.
1942년, 29세의 미할코프의 작품은 소비에트 연방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관심을 끌었고, 스탈린은 그에게 새로운 국가 의례곡의 가사를 쓸 것을 의뢰했다. 당시 국가는 제2차 세계 대전에 깊이 휘말려 있었고, 스탈린은 《인터나쇼날》을 대체할 더욱 애국적인 주제의 국가 의례곡을 원했다.
미할코프는 작곡가 알렉산더 알렉산드로프의 음악에 맞춰 작가 엘-레기스탄과 함께 가사를 썼고, 이것은 《소비에트 연방 국가 의례곡》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새로운 국가 의례곡은 1943년 여름 스탈린에게 제출되었고, 1944년 1월 1일에 국가의 새로운 국가 의례곡으로 채택되었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 후, 그의 이름을 언급한 가사는 스탈린 격하 과정에서 버려졌고, 국가 의례곡은 가사 없이 계속 사용되었다. 미할코프는 1970년 새로운 가사를 썼지만, 1977년 5월 27일까지 최고 소비에트 의장단에 제출되지 않았다. 스탈린에 대한 언급을 제거한 새로운 가사는 9월 1일에 승인되었고, 1977년 10월 새로운 소비에트 헌법이 인쇄되면서 공식화되었다.
미할코프의 가사가 들어간 소비에트 국가 의례곡은 소비에트 연방 해체 후 1991년 보리스 옐친 대통령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그러나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이 옐친의 뒤를 이었을 때, 그는 옐친이 선택한 것 대신 알렉산드로프의 음악을 복원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이때 미할코프는 87세였고 이미 은퇴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푸틴이 오래된 국가 의례곡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탄력을 받기 시작하자, 미할코프는 알렉산드로프의 음악에 맞는 새로운 가사를 쓰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2000년 12월 30일 공식적으로 채택된 《러시아의 국가》가 탄생했다.
국가 의례곡 외에도 미할코프는 많은 풍자극을 제작하고 여러 소비에트 코미디의 각본을 제공했다. 그는 또한 오랫동안 쇠퇴했던 풍자적인 우화 장르를 성공적으로 부활시켰다. 그는 세 차례의 스탈린상(1941, 1942, 1950)과 많은 다른 상들을 수상했다.
2.3. 소련 국가 작사
1942년, 29세의 미할코프의 작품은 요셉 스탈린의 관심을 끌었고, 스탈린은 그에게 새로운 국가의 가사를 쓸 것을 의뢰했다. 당시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에 깊이 휘말려 있었고, 스탈린은 《인터나쇼날》을 대체할 더욱 애국적인 주제의 국가를 원했다.
미할코프는 작곡가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프의 음악에 맞춰 작가 엘-레기스탄과 함께 가사를 썼고, 이것은 《소련 국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새로운 국가는 1943년 여름 스탈린에게 제출되었고, 1944년 1월 1일에 소련의 새로운 국가로 채택되었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 후, 그의 이름을 언급한 가사는 스탈린 격하 과정에서 버려졌고, 국가는 가사 없이 계속 사용되었다. 미할코프는 1970년 새로운 가사를 썼지만, 1977년 5월 27일까지 최고 소비에트 의장단에 제출되지 않았다. 스탈린에 대한 언급을 제거한 새로운 가사는 1977년 9월 1일에 승인되었고, 같은 해 10월 새로운 소비에트 헌법이 인쇄되면서 공식화되었다.
미할코프의 가사가 들어간 소련 국가는 소련 해체 후 1991년 보리스 옐친 대통령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그러나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이 옐친의 뒤를 이었을 때, 그는 옐친이 선택한 것 대신 알렉산드로프의 음악을 복원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이때 미할코프는 87세였고 이미 은퇴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푸틴이 소련 국가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탄력을 받기 시작하자, 미할코프는 알렉산드로프의 음악에 맞는 새로운 가사를 쓰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2000년 12월 30일 공식적으로 채택된 《러시아의 국가》가 탄생했다.
2.4. 스탈린 격하와 가사 수정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자(Death and state funeral of Joseph Stalin), 그의 이름을 언급한 가사는 스탈린 격하 과정에서 버려졌다. 국가는 가사 없이 계속 사용되었다. 미할코프는 1970년 새로운 가사를 썼지만, 1977년 5월 27일까지 최고 소비에트 의장단에 제출되지 않았다. 스탈린에 대한 언급을 제거한 새로운 가사는 9월 1일에 승인되었고, 1977년 10월 새로운 소비에트 헌법이 인쇄되면서 공식화되었다.
2.5. KGB 협력 논란
세르게이 미할코프와 그의 아내 나탈리아 콘찰로프스카야는 소비에트 연방 시절 국가보안위원회(KGB)를 위해 일했다는 논란이 있다. 이들은 1950년대 프랑스 대사 모리스 드장 사건에서처럼, 외국 외교관들에게 KGB 요원을 소개하는 등의 방식으로 협력했다. 미할코프의 남동생 미하일 미할코프 역시 KGB 요원으로 활동하며 작가로도 활동했다.
2.6. 러시아 연방 국가 작사
1942년, 29세의 미할코프의 작품은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관심을 끌었고, 스탈린은 그에게 새로운 국가 의례곡의 가사를 쓸 것을 의뢰했다. 당시 국가는 제2차 세계 대전에 깊이 휘말려 있었고, 스탈린은 《인터내쇼날》을 대체할 더욱 애국적인 주제의 국가 의례곡을 원했다.
미할코프는 작곡가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프의 음악에 맞춰 작가 엘-레기스탄과 함께 가사를 썼고, 이것은 《소비에트 연방 국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새로운 국가 의례곡은 1943년 여름 스탈린에게 제출되었고, 1944년 1월 1일에 국가의 새로운 국가 의례곡으로 채택되었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 후, 그의 이름을 언급한 가사는 스탈린 격하 과정에서 버려졌고, 국가 의례곡은 가사 없이 계속 사용되었다. 미할코프는 1970년 새로운 가사를 썼지만, 1977년 5월 27일까지 최고 소비에트 의장단에 제출되지 않았다. 스탈린에 대한 언급을 제거한 새로운 가사는 9월 1일에 승인되었고, 1977년 10월 새로운 소비에트 헌법이 인쇄되면서 공식화되었다.
미할코프의 가사가 들어간 소비에트 국가는 소비에트 연방 해체 후 1991년 보리스 옐친 대통령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그러나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이 옐친의 뒤를 이었을 때, 그는 옐친이 선택한 것 대신 알렉산드로프의 음악을 복원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이때 미할코프는 87세였고 이미 은퇴한 지 오래였다. 푸틴이 오래된 국가 의례곡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탄력을 받자, 미할코프는 알렉산드로프의 음악에 맞는 새로운 가사를 썼다. 그 결과 2000년 12월 30일 공식적으로 채택된 《러시아의 국가》가 탄생했다.
2000년에 소련 국가 가사를 전면적으로 고쳐 쓰고, 2001년에 같은 멜로디로 러시아 연방 국가로 채택되었다. 한편, 코러스 부분의 "Славься, Отечество наше свободное"("찬양하라, 우리의 자유로운 조국이여")는 소련 국가 그대로 남아있다.
2.7. 말년과 사망
미할코프는 87세에 은퇴한 지 오래였지만,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선택한 국가 대신 알렉산드로프의 음악을 복원하려 하자, 새로운 가사를 쓰기로 결심했다. 그 결과 2000년 12월 30일 《러시아 국가 의례곡》이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미할코프는 국가 외에도 많은 풍자극을 제작하고 여러 소비에트 코미디의 각본을 제공했으며, 오랫동안 쇠퇴했던 풍자적인 우화 장르를 성공적으로 부활시켰다. 그는 세 차례의 스탈린상(1941, 1942, 1950)과 많은 다른 상들을 수상했다.
2003년 미할코프의 90번째 생일에 푸틴은 모스크바 그의 집을 직접 방문하여 러시아 문화에 대한 공헌을 인정하며 그에게 2등급 조국 공헌 훈장을 수여했다. 미할코프는 소비에트 시대 그의 업적으로 사회주의 노동 영웅과 레닌 훈장 등으로 훈장을 받았다.
미할코프는 2009년 8월 27일 96세의 나이로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그리스도 구세주 대성당에서 열렸으며 가족, 친구, 정부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그는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묘지에 군사 예우를 받으며 매장되었다.
3. 가족 관계
1936년, Наталья Петровна Кончаловская러시아어(1903~1988)와 결혼하여 53년간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그녀는 바실리 수리코프의 손녀였다. 1997년에는 물리학 교수인 Юлия Валерьевна Субботина러시아어와 재혼했다.
그의 아내는 시인이었다. 장남 안드레이 콘찰롭스키와 차남 니키타 미할코프는 모두 영화 감독이다.
4. 수상 경력
세르게이 미할코프는 소비에트 연방과 러시아 연방으로부터 많은 상과 훈장을 받았다.
| 구분 | 훈장 및 상 |
|---|---|
| 소비에트 연방 | |
| 러시아 연방 | |
| 해외 |
4.1. 러시아 연방
4.2. 소비에트 연방
| 훈장 및 상 | 수여 년도 | 비고 |
|---|---|---|
| 사회주의 노동 영웅 | 1973 | |
| 레닌 훈장 | 1939, 1963, 1973, 1983 | |
| 10월 혁명 훈장 | 1971 | |
| 적기훈장 | 1945년 2월 28일 | 나치 침략자들과의 싸움에서 전선 사령부 임무 수행에 대한 모범적인 공적과 용기와 영웅심 발휘 |
| 애국 전쟁 훈장 1등급 | 1985 | |
| 노동 적기 훈장 | 1967, 1988 | |
| 적성훈장 | 1943년 3월 7일 | 나치 침략자들과의 싸움에서 전선 사령부 임무 수행에 대한 모범적인 공적과 용기와 영웅심 발휘 |
| 인민 우정 훈장 | ||
| 오데사 방어 훈장 | ||
| 세바스토폴 방어 훈장 | ||
| 부다페스트 점령 훈장 | ||
| 빈 점령 훈장 | ||
| 프라하 해방 훈장 | ||
| 1941~1945년 대애국전쟁에서의 독일 승리 훈장 | ||
| 1941~1945년 대애국전쟁에서의 용감한 노동 훈장 | ||
| 노동 베테랑 훈장 | ||
| 1941~1945년 대애국전쟁 승리 20주년 기념 훈장 | ||
| 1941~1945년 대애국전쟁 승리 30주년 기념 훈장 | ||
| 1941~1945년 대애국전쟁 승리 40주년 기념 훈장 | ||
|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탄생 100주년 기념 훈장 | ||
| 소련군 창설 50주년 기념 훈장 | ||
| 소련군 창설 60주년 기념 훈장 | ||
| 소련군 창설 70주년 기념 훈장 | ||
| 모스크바 800주년 기념 훈장 | ||
| 레닌상 | 1970 | 초등학생을 위한 최근 몇 년간의 시 |
| 소련 국가상 | 1978 | 러시아 풍자 뉴스릴 "심지"(최신판) |
| 스탈린상 2등급 | 1941 | 어린이를 위한 시 |
| 스탈린상 2등급 | 1942 | 영화 각본 "전선의 여자 친구" |
| 스탈린상 2등급 | 1950 | 희곡 "일리아 골로빈"과 "집으로 가고 싶어" |
| 러시아 SFSR 국가상 스타니슬랍스키 상 | 1977 | 모스크바 풍자극장에서 공연된 풍자극 "거품" |
|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메달 | ||
| 콘스탄틴 우신스키 메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