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동독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동독(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DDR)은 1949년 10월부터 1990년 10월까지 존재했던 사회주의 국가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 점령 지역에 수립되었다. 독일 민주 공화국이라는 공식 명칭으로 불렸으며, 동독이라는 약칭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동독은 사회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이념으로 채택하고 소련의 영향을 받아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가입했다. 동독의 정치 체제는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SED)의 일당 독재였으며, 경제는 계획 경제 체제를 따랐다. 1961년에는 동서 베를린을 분리하는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어 냉전의 상징이 되었으며,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이어진 동유럽 혁명으로 인해 1990년 독일은 재통일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무신론 국가 - 소련
    소련은 1922년 결성되어 15개의 공화국으로 구성된 사회주의 연방 국가였으며,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 함께 초강대국으로 부상했으나, 1991년 해체되었다.
  • 무신론 국가 -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1948년 공산당 쿠데타로 수립되어 1960년 공식 명칭이 되었고, 1969년 연방제로 개편, 공산당 일당 독재와 중앙 계획 경제를 거쳐 1989년 벨벳 혁명으로 붕괴 후 1990년 연방 공화국으로,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었다.
  • 소련의 위성국 -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은 1978년 사우르 혁명으로 수립된 공산주의 국가로, 소련의 지원 아래 사회 개혁을 추진했으나 이슬람 세력의 반발과 내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1992년 붕괴되었다.
  • 소련의 위성국 -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의 영향으로 세워진 공산주의 국가로,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즈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독재 통치, 인권 침해, 경제적 긴축 정책을 겪었으며 1989년 혁명으로 몰락 후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되었으나 공산주의 시대에 대한 논란이 남아있다.
  • 동독 - 울브리히트 독트린
  • 동독 - 인민경찰
    인민경찰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동독에서 설립된 중앙 경찰 조직으로, 초기 어려움을 겪었으나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 당원 비율이 높아졌고, 일반 경찰 업무 외 국경 보호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다 1990년 독일 통일과 함께 해체되어 독일 연방경찰과 주 경찰에 의해 기능이 계승되었다.
동독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및 위치 정보
동독의 유럽 내 위치
유럽 내 동독 위치
동독 영토 (1956-1990)
동독 영토 (1956-1990)
기본 정보
일반 명칭동독
공식 명칭독일 민주 공화국
로마자 표기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도이체 데모크라티셰 레푸블리크)
약칭DDR (데데에르)
국가 표어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국가폐허에서 부활하여
수도동베를린
공용어독일어
소르브어 (드레스덴 및 코트부스 지역 일부)
종교"동독의 종교" 섹션 참조
통화동독 마르크 (1949–1990)
공식 명칭:
(1949–1964)
(1964–1967)
(1967–1990)
독일 마르크 (1990년 7월 1일부터)
시간대(UTC+1)
전화 코드+37
국가 도메인.dd
차량 통행 방향오른쪽
역사
건국1949년
해체1990년
시작 사건원래 헌법
시작 날짜1949년 10월 7일
종료 사건재통일
종료 날짜1990년 10월 3일
주요 사건 11953년 봉기
주요 사건 날짜 11953년 6월 16일
주요 사건 2바르샤바 조약 기구
주요 사건 날짜 21955년 5월 14일
주요 사건 3베를린 위기
주요 사건 날짜 31961년 6월 4일
주요 사건 4사회주의 헌법
주요 사건 날짜 41968년 4월 9일
주요 사건 5서독과의 기본 조약
주요 사건 날짜 51972년 12월 21일
주요 사건 6국제 연합 가입
주요 사건 날짜 61973년 9월 18일
주요 사건 7평화 혁명
주요 사건 날짜 71989년 10월 13일
주요 사건 8베를린 장벽 붕괴
주요 사건 날짜 81989년 11월 9일
주요 사건 9최종 해결
주요 사건 날짜 91990년 9월 12일
이전 국가독일의 소비에트 점령 지역
계승 국가독일
정치
정치 체제마르크스-레닌주의 일당 사회주의 공화국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 지도자빌헬름 피크오토 그로테볼 (공동 의장, 1946–1950)
발터 울브리히트 (1950–1971)
에리히 호네커 (1971–1989)
에곤 크렌츠 (1989년 10월–12월)
국가 원수빌헬름 피크 (1949–1960, 초대)
자비네 베르크만폴 (1990, 마지막)
정부 수반오토 그로테볼 (1949–1964, 초대)
로타어 데메지에르 (1990, 마지막)
입법부인민의회
상원국가평의회 (1958년 12월 8일 해산)
인구 및 면적
인구 (1950년)18,388,000명
인구 (1970년)17,068,000명
인구 (1990년)16,111,000명
인구 밀도149명/km²
면적108,875 km²
경제
GDP (PPP, 1989년)5252억9000만 달러
1인당 GDP (PPP, 1989년)26,631 달러
인간 개발 지수 (HDI, 1990년)0.953
기타 정보
ISO 3166 코드DD
현재독일
설명1949년에 채택된 동독 국기는 서독 국기와 동일했습니다. 1959년, 정부는 동독과 서독을 구별하기 위해 국장에 국가 문장을 추가한 새로운 국기를 발행했습니다.

2. 명칭

공식 명칭은 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de (독일 민주 공화국)이었으며, 일반적으로 'DDR'(동독)로 약칭되었다. 동독에서는 두 용어 모두 사용되었지만, 특히 1968년 제2차 헌법 공포 이후 서독인과 서베를린 시민을 외국인으로 간주하면서 약칭의 사용이 증가하였다. 서독인, 서구 언론 및 정치인들은 처음에는 공식 명칭과 약칭을 피하고, 'Ostzone'(동부 지역),[18] Sowjetische Besatzungszonede (소련 점령 지역, 종종 'SBZ'로 약칭), 그리고 sogenannte DDRde[19] 또는 "소위 동독"[20]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였다.

동베를린에 있는 정치 권력의 중심지는 서방에서는 '판코우'(독일 주둔 소련군 사령부는 베를린 동부의 칼스호르스트에 있었다)[18]로 불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DDR"이라는 약칭은 서독인과 서독 언론에서도 구어적으로 점점 더 많이 사용되었다. 서독에 대한 약칭 'BRD'(서독), Bundesrepublik Deutschlandde(''독일 연방 공화국'')는 정치적 발언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서독에서는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따라서 'BRD'(서독)는 동독인이나 친동독 성향의 서독인들이 사용하는 용어였다.

서독인들이 사용할 때, Westdeutschlandde(서독)는 거의 항상 서독의 지리적 지역을 가리키는 용어였지, 독일 연방 공화국 경계 내의 지역을 가리키는 용어는 아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Ostdeutschlandde(동독)가 엘베 강(동엘비아) 동쪽의 모든 영토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22]

3. 역사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포츠담 조약에 따라 프랑스, 영국, 미국, 소련독일을 4개로 분할하여 관리하기로 하였다. 오데르-나이세선 동쪽의 독일 영토 대부분은 소련이 지배하는 폴란드령으로 넘어갔다.

1945년 6월, 스탈린은 소련 점령 지역의 독일 공산주의 지도자들에게 영국 점령지에서 영국의 지위를 잠식하고, 미국이 1, 2년 내에 철수하며, 독일 전체가 소련의 영향권 아래 공산주의 통치로 들어올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1946년 초, 스탈린은 불가리아와 유고슬라비아 대표단에게 독일이 소비에트 공산주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소련은 공장, 장비, 기술자, 경영자, 숙련 노동자들을 강제로 소련으로 이전했다. 동독에서 집권 공산당의 주요 임무는 소련의 명령을 행정 기관에 전달하고, 다른 세력에게는 이를 자신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처럼 위장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소련 당국은 독일 공산당독일 사회민주당을 강제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으로 합병했다. 이 과정에서 이 당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지 않고, 소련 지향적이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1946년 독일의 소련 점령 지역 선거에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은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소련 당국은 반대 세력을 억압하고, 여러 경쟁 정당들이 농촌 지역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재산과 산업은 정부 소유가 되었다.[284] 정해진 선을 넘어서는 발언이나 행동을 한 사람은 처벌받았으며, 학교 교육에서도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 주입이 강제되었다.

1948년 초, 티토-스탈린 결렬 당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은 소련을 추종하는 독재 정당으로 변모했다. 중요한 결정은 소련 공산당 중앙 위원회나 스탈린 개인의 지시를 거쳐야 했다. 1949년 초, 소련식 정치국이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을 지배하게 되었다.

1949년 10월 7일,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 건국이 선포되었다. 소련 외무부는 동독 정부에 행정권을 부여했지만, 자치권은 주지 않았다. 점령 정권에 소련의 무제한적인 권한이 행사되었고, 내각, 군부, 비밀경찰 조직에 소련 세력이 침투했다.[285][286]

서독미국의 영향을 받아 나토에 가입하고 자본주의 체제가 된 반면, 동독은 소련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식 사상으로 채택하고 바르샤바 조약에 가입했다.

포츠담 회담을 바탕으로 연합국은 오데르-나이세 선 서쪽의 독일을 공동으로 점령했고, 나중에 이 점령 지역들을 두 개의 독립 국가로 형성했다. 밝은 회색: 폴란드와 소련이 합병한 지역, 어두운 회색: 서독(미국, 영국, 프랑스 점령 지역으로 형성됨, 서베를린 포함), 빨간색: 동독(소련 점령 지역으로 형성됨, 동베를린 포함).


장기적인 독일 역사의 관점에서 동독 정부의 내부적 영향을 설명하면서, 역사학자 게르하르트 아. 리터(2002)는 동독이 소련 공산주의와 전간기 독일 공산주의자들의 경험을 통해 걸러진 독일 전통, 이 두 가지 주요 세력에 의해 규정되었다고 주장했다.[27] 동독은 더 번영하는 서독의 영향력과 끊임없이 씨름했으며, 동독인들은 자신의 국가를 서독과 끊임없이 비교했다. 공산주의 정권은 자본주의 폐지, 산업 및 농업 부문 개편, 사회 군사화, 교육 시스템과 미디어의 정치적 방향 설정 등 주목할 만한 변혁을 실시했다.

반면에, 새로운 정권은 과학, 공학 분야,[28] 프로테스탄트 교회,[28] 그리고 많은 부르주아 생활 양식[28] 에서는 역사적으로 독립적인 영역에 비교적 적은 변화를 가져왔다. 리터에 따르면, 사회 정책은 마지막 수십 년 동안 중요한 정당성 확보 도구가 되었고, 사회주의적 요소와 전통적 요소를 거의 동등하게 혼합했다.[28]

1953년 동베를린 폭동이 일어났으나 소련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어 동서 냉전의 상징이 되었다. 1972년 동서독은 기본조약을 체결하여 국교를 수립하였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함께 동독의 독일 통일 과정이 시작되었다. 1990년 자유 선거에서 서독과의 통일을 주장하는 세력이 승리하였고, 1990년 10월 3일 동독은 서독에 흡수 통합되어 독일은 41년 만에 재통일되었다.

3. 1. 기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포츠담 조약에 따라 프랑스, 영국, 미국, 소련독일을 4개로 분할하여 관리하기로 합의했다. 오데르-나이세선 동쪽의 독일 영토 대부분은 소련이 지배하는 폴란드령으로 넘어갔다.

얄타 회담에서 미국, 영국, 소련 등 연합국은 패전한 나치 독일을 점령 지역으로 분할하고, 독일의 수도 베를린도 연합국 사이에 분할하기로 합의했다.[29] 초기에는 미국, 영국, 소련의 세 개 점령 지역이 형성되었고, 이후 미국과 영국의 점령 지역에서 프랑스 점령 지역이 만들어졌다.[30]

3. 2. 1949년 건국

1945년 포츠담 조약에 따라 독일제2차 세계 대전 승전국인 프랑스, 영국, 미국, 소련 4개국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오데르-나이세선 동쪽의 비옥한 독일 영토는 대부분 소련의 지배를 받는 폴란드령으로 넘어갔다.

1945년 6월, 스탈린은 소련 점령 지역의 독일 공산주의 지도자들에게 영국 점령지에서 영국의 지위를 잠식하고, 미국이 1~2년 안에 철수할 것이며, 독일 전체가 소련의 영향권 아래 공산주의 통치로 들어올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1946년 초, 스탈린은 불가리아와 유고슬라비아 대표단에게 독일이 소비에트 공산주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소련은 공장, 장비, 기술자, 경영자, 숙련 노동자들을 강제로 소련으로 이전했다. 동독에서 집권 공산당의 주요 임무는 소련의 명령을 행정 기관에 전달하고, 다른 세력에게는 이를 자신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처럼 위장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소련 당국은 독일 공산당독일 사회민주당을 강제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으로 합병했다. 이 과정에서 이 당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지 않고, 소련 지향적이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통일사회당 창립 당시 빌헬름 피크오토 그로테볼. 맞은편은 발터 울브리히트


1946년 독일의 소련 점령 지역 선거에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은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 당국은 반대 세력을 억압하고, 여러 경쟁 정당들이 농촌 지역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재산과 산업은 정부 소유가 되었다.[284] 정해진 선을 넘어서는 발언이나 행동을 한 사람은 처벌받았으며, 학교 교육에서도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 주입이 강제되었다.

1948년 초, 티토-스탈린 결렬 당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은 소련을 추종하는 독재 정당으로 변모했다. 중요한 결정은 소련 공산당 중앙 위원회나 스탈린 개인의 지시를 거쳐야 했다. 1949년 초, 소련식 정치국이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을 지배하게 되었다.

1949년 10월 7일,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 건국이 선포되었다. 소련 외무부는 동독 정부에 행정권을 부여했지만, 자치권은 주지 않았다. 점령 정권에 소련의 무제한적인 권한이 행사되었고, 내각, 군부, 비밀경찰 조직에 소련 세력이 침투했다.[285][286]

서독미국의 영향을 받아 나토에 가입하고 자본주의 체제가 된 반면, 동독은 소련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식 사상으로 채택하고 바르샤바 조약에 가입했다.

1952년 3월 10일, 스탈린은 중립 정책을 조건으로 독일 재통일을 제안했다. (일명 "스탈린 노트") 이 제안에는 경제 정책에 대한 조건 없이 "인간의 권리와 기본적 자유"를 보장하고, 민주적 정당과 단체의 자유로운 활동을 허용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34] 그러나 서독 지도부에게 재통일은 우선순위가 아니었고, 나토 국가들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그들은 독일이 나토에 가입할 수 있어야 하며, 소련과의 협상은 항복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9년 소련은 SED에 동독 통제권을 넘겼다. 빌헬름 피크가 동독 대통령이 되었고, 발터 울브리히트가 SED 총서기로서 대부분의 집행 권한을 행사했다. 사회주의 지도자 오토 그로테볼은 총리를 역임했다.[35]

동독 정부는 서독의 탈나치화 실패를 비난하고, 나치 과거와의 유대를 거부하며, 많은 전 나치들을 투옥하고 정부직을 맡는 것을 막았다. SED는 동독에서 나치즘의 흔적을 모두 없애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36]

3. 3. 점령 지역

1945년 얄타 회담포츠담 회담에서 연합국은 독일의 주권 회복까지 효력을 가지는 4개국(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군정 기구인 연합통제위원회(ACC)를 통해 독일의 공동 군사 점령 및 행정을 수립했다. 동독에서는 소련 점령 지역(SBZSowjetische Besatzungszonede)이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브란덴부르크, 작센, 작센-안할트, 튀링겐의 5개 주(''Länder'')를 포함했다.[38] 점령 지역에서 채택될 정책에 대한 의견 불일치는 곧 4개국 간의 협력 와해로 이어졌고, 소련은 다른 지역에서 시행된 정책에 관계없이 자국의 지역을 관리했다. 소련은 1948년 ACC에서 탈퇴했고, 이후 다른 세 지역이 점차 통합되고 자치권을 부여받자 소련 당국은 자국 지역에 별도의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했다.[39][40]

서독(파란색)은 분쟁 지역인 사르(보라색)을 제외한 서방 연합국의 지역을 포함했다. 소련 지역인 동독(빨간색)은 서베를린(노란색)을 둘러싸고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있는 서베를린과 동베를린


동독은 동베를린을 수도로 간주했고, 소련과 나머지 동구권 국가들은 동베를린을 수도로 외교적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서방 연합국은 이러한 인정에 이의를 제기하며 베를린 전체 도시를 연합통제위원회가 통치하는 점령 지역으로 간주했다. 마가레테 파인스타인에 따르면 동베를린의 수도 지위는 서방과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에 의해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42] 실제로 ACC의 권한은 냉전으로 무효화되었고, 동베를린의 점령 지역으로서의 지위는 대부분 법적 허구가 되었으며, 베를린의 소련 지역은 동독에 완전히 통합되었다.[43]

서방 열강과 소련 간의 미해결된 서베를린 지위를 둘러싼 심화되는 냉전 갈등은 베를린 봉쇄(1948년 6월 24일~1949년 5월 12일)로 이어졌다. 소련군은 서베를린과의 모든 연합군 철도, 도로 및 수상 교통을 중단시키는 봉쇄를 시작했다. 연합군은 베를린 공수작전(1948~1949)을 통해 서베를린에 식량, 연료 및 물자를 공급하며 소련에 맞섰다.[44]

3. 4. 분단

1949년 동독 지도자: 빌헬름 피크 대통령과 오토 그로테볼 총리


1946년 4월 21일, 독일 공산당(KPD)과 소련 점령 지역의 독일 사회민주당(SPD) 일부가 합쳐져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이 결성되었다.[45] 1948년 3월, 독일 경제 위원회(DWK)가 소련 점령 지역에서 행정 권한을 장악하여 동독 정부의 전신이 되었다.[45][46]

1949년 10월 7일, SED는 사회주의 정치 헌법을 기반으로 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de(독일 민주 공화국, 동독)을 수립하고, 빌헬름 피크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5] 그러나 1950년 이후 동독의 실질적인 권력은 SED 제1서기 발터 울브리히트가 장악하였다.[5]

1953년 6월 16일, 동베를린에서 노동자들이 생산 할당량 증가에 항의하는 시위를 일으켰고, 이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다음날, 소련군이 시위를 무력 진압하여 수백 명이 희생되었다. 이 사건으로 동독 시민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 가중되었고, 많은 동독 시민들이 서독으로 탈출했다.

소련의 전쟁 배상금 징수는 동독 경제를 약화시켰다.[49] 동독은 독일 내부 국경을 폐쇄하고, 1961년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여 서독으로의 탈출을 막았다.[50]

1971년~1989년 국가원수 에리히 호네커


1971년, 발터 울브리히트가 해임되고 에리히 호네커가 집권했다.[51] 새로운 헌법이 도입되어 동독을 "노동자와 농민의 공화국"으로 규정했다.[52]

초기에 동독은 서독을 괴뢰 국가로 간주하고 상호 인정을 거부했으며, 서독은 할슈타인 독트린에 따라 동독을 인정한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지 않았다.[53] 그러나 1970년대 초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동방 정책으로 관계가 정상화되기 시작했다.[53] 1972년 기본 조약이 체결되었고, 1973년 두 국가는 유엔에 가입했다.[53] 서독은 동독을 ''사실상'' 정부이자 ''법적으로'' 국가 조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54]

3. 5. 동독 정체성

동독은 초기부터 자체적인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노력했다.[58] 프로이센의 제국주의적이고 군사적인 유산을 부정했기 때문에,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은 프로이센과 동독 간의 연속성을 부정했다. 사회주의통일당은 융커 영지 저택, 베를린 시티 궁전, 프리드리히 대왕 기마상 등 이전 프로이센 귀족의 여러 상징적인 유물들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베를린 공화국 궁전을 건설했다.

대신 사회주의통일당은 독일 역사의 진보적인 유산에 초점을 맞추었다. 1524년에서 1525년까지의 독일 농민 전쟁에서 토마스 뮌처의 역할과 프로이센 산업화 과정에서 계급 투쟁의 영웅들이 수행한 역할을 포함했다. 하인리히 프리드리히 칼 폰 운트 춤 슈타인,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 빌헬름 폰 훔볼트,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와 같은 프로이센 역사의 개혁가들은 사회주의통일당에 의해 모범적인 인물로 옹호되었다.

3. 5. 1. 제3제국에 대한 기억

동독 공산주의 정권은 반파시스트 투사들의 투쟁에 정당성을 기반으로 했다.[59] 1958년 박물관 설립과 1945년 4월 19일 수감자들이 평화와 자유를 위해 싸울 것을 맹세한 부헨발트 선서의 매년 기념 행사를 통해 부헨발트 수용소 기념관에 일종의 저항 "숭배"가 자리 잡았다.[59] 1990년대에는 동독의 '국가 반파시즘'이 서독의 '국가 반공주의'로 자리를 내주었다. 그 이후 전체주의 개념에 기반한 동독 역사의 지배적인 해석은 공산주의와 나치즘을 동일시하게 만들었다.[59] 역사가 안네-카틀린 틸락-그라프는 노이에스 도이칠란트de를 통해 부헨발트, 작센하우젠, 라벤스브뤼크 등의 국가 기념관이 특히 수용소 해방 기념 행사 기간 동안 동독에서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는지를 보여준다.[60]

서독의 '파시스트 세계'에 대한 공식적인 반대 속에 건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54년 공공 행정 직원의 32%가 전 나치당원이었다. 그러나 1961년 동독 내무부 고위직 중 전 나치당 당원의 비율은 서독의 67%와 비교하여 10% 미만이었다.[61] 서독에서는 나치즘의 부활에 대한 기억 작업이 수행되었지만, 동독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예나 대학교 역사학 교수인 악셀 도스만이 언급했듯이, "이 현상은 완전히 은폐되었다. 동독의 건국이 반파시스트 국가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SED는 신나치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다. 슈타지가 그들을 감시했지만, 그들은 아웃사이더나 뻔뻔한 폭력배로 여겨졌다. 이 젊은이들은 이중적인 말을 들으며 자랐다. 학교에서는 제3제국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집에서는 조부모들이 히틀러 덕분에 우리가 최초의 자동차 전용도로를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62] 1987년 10월 17일, 30명 정도의 스킨헤드들이 경찰의 개입 없이 자이온스키르헤의 록 콘서트에서 2,000명의 군중 속으로 난폭하게 뛰어들었다.[62] 1990년 작가 프레이아 클리어는 동독의 반유대주의와 혐오에 관한 에세이를 썼다는 이유로 살해 협박을 받았다. SPDA 부회장 볼프강 티어제는 디 벨트de에서 전 동독 주민들의 일상생활에서 극우의 부상, 특히 NSU 테러 집단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으며, 독일 언론인 오딜 베냐이아-쿠이데르는 "신나치 정당 NPD가 동독을 통해 부활을 경험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63]

역사가 소니아 콤브는 1990년대까지 서독 역사가 대부분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침략"으로 묘사하고, 유대인 학살에 대한 베어마흐트de의 책임을 면제하며, "알지 못했다"는 외교 사절단의 신화를 만들어냈다고 지적한다. 반대로, 아우슈비츠는 동독에서 결코 금기시되지 않았다. 나치의 범죄는 광범위한 영화, 연극 및 문학 작품의 주제였다. 1991년 서독 인구의 16%, 동독 인구의 6%가 반유대주의적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1994년 서독인의 40%, 동독인의 22%가 유대인 학살에 너무 많은 비중이 두어진다고 생각했다.[61]

그러나 역사가 울리히 파일은 동독의 반파시즘 기념이 "성인화하고 세뇌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64] 독일 노동운동의 주인공들과 수용소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40년 동안의 정권 기간 동안 "연출되고, 검열되고, 명령되었으며", 정당성 확보, 억압, 권력 유지의 도구였다.[64]

3. 6. 디 벤데 (독일 재통일)

1989년 5월, 동독 지방 정부 선거 결과 조작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확산되었다. 많은 동독 시민들이 출국 비자를 신청하거나 국외로 탈출을 시도했다.[73] 1989년 5월 2일,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국경의 철조망이 제거되면서, 많은 동독인들이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해 헝가리로 입국한 후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이동했다.[73] 7월까지 2만 5천 명의 동독인들이 헝가리로 넘어왔다.[65]

1989년 8월 19일, 범유럽 피크닉에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국경 검문소가 개방되면서 동독의 종말과 동구권의 해체로 이어지는 연쇄 반응이 시작되었다.[66] 이는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 이후 동독에서 발생한 최대 규모의 집단 탈출이었다. 오토 폰 합스부르크와 헝가리 국무장관 임레 포즈가이는 이 행사를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국경 개방에 대한 반응을 시험하는 기회로 여겼다.[67][68][69] 범유럽 연합은 헝가리에 있는 동독 휴양객들에게 포스터와 전단을 통해 계획된 피크닉을 광고했다.[67][69][71][72]

1989년 9월 10일, 헝가리 외무장관 율라 혼은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로의 이동을 더 이상 제한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이틀 만에 2만 2천 명의 동독인들이 오스트리아로 넘어갔다.[73]

많은 동독 시민들은 집권당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특히 라이프치히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74] 라이프치히 시위는 매주 발생했으며, 10월 2일 첫 시위에는 1만 명이 참가했고, 그 달 말에는 약 30만 명으로 정점에 달했다.[74] 베를린에서는 50만 명의 시위대가 11월 4일 정권에 맞서 시위를 벌였다.[74] 쿠르트 마주어는 정부와 현지 협상을 주도하고 콘서트홀에서 시민회의를 개최했다.[75] 결국 이러한 시위로 에리히 호네커가 10월에 사임하고, 에곤 크렌츠가 그를 대신했다.[76]

1989년 11월 4일 동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 열린 시위


1989년 11월 4일, 동베를린에서 열린 대규모 시위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서독과의 국경을 공식적으로 개방한 것과 일치했다.[77]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의 일부 구역이 개방되어 수천 명의 동독인들이 서베를린과 서독으로 이동했다. 크렌츠는 한 달 후 사임했고, SED는 신생 민주 운동 지도자들과 자유 선거를 위한 일정을 잡고 민주화 과정을 시작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이 과정의 일환으로 SED는 동독 헌법에서 공산당의 국가 지도부를 보장하는 조항을 삭제했다.

서독 기독교민주연합(CDU)이 이끈 독일을 위한 연합(Alliance for Germany) 연합의 로고


동독은 1990년 3월 마지막 선거를 치렀다. 승자는 서독 기독교민주연합의 동독 지부가 이끄는 독일을 위한 연합 연합이었다. 두 독일 국가와 전 연합국이 참여한 협상(2+4 회담)이 진행되어 독일 통일 조건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1990년 8월 23일, 민중의회(Volkskammer)에서 독일 민주 공화국은 독일 연방 공화국에 가입을 선언했다. 1990년 10월 3일, 5개 주가 공식적으로 독일 연방 공화국에 합류했고,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은 통합되었다.

민중의회(Volkskammer)의 독일 연방 공화국 가입 선언이 재통일 과정을 시작했지만, 재통일 자체는 1990년 8월 31일 이후 통일 조약을 통해 헌법적으로 달성되었다.[78]

전 독일 간의 심각한 경제적, 사회 정치적 불평등으로 인해 동독의 독일 연방 공화국 완전 통합을 위해 정부 보조금이 필요했다. 이로 인해 전 동독에서 탈산업화가 발생했고, 통합 실패의 원인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일부 서방 논평가들은 침체된 동부 경제가 비효율적인 계획경제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많은 동독 비평가들은 충격 요법 방식의 민영화, 동독 마르크(Ostmark)에 대해 제공된 인위적으로 높은 환율 때문에 동독 기업이 적응할 여지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4. 정부와 정치

동독의 정치 체제는 소련식 사회주의를 표방했으며,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이 주도하는 일당제 국가였다. 1946년 독일 공산당(KPD)과 독일 사회민주당(SPD)이 합병하여 SED가 창당되었으나, 독자적인 사고를 가진 사회민주당원들이 밀려나면서 SED는 급속히 완전한 공산당으로 변모했다.[80]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소련 당국은 독일 공산당사회민주당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으로 강제 합병하였는데, 이 때 이 당이 마르크스-레닌주의도 아니고, 소비에트 지향도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포츠담 회담에서 소련은 독일에서 민주적 형태의 정부를 지원할 것을 약속했지만, 소련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서방과는 극명하게 달랐다.[81] 다른 소련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비공산주의 정당들이 허용되기는 했지만, 동독의 모든 정당은 민주독일민족전선에 가입해야 했다.

1949년 10월 7일 독일 민주 공화국 건국이 선포되었고, 소련 외무부는 동독 정부에 행정권을 부여했지만 자치권은 주지 않았다. 점령 정권에 소련의 무제한적인 권한이 행사되었고, 내각, 군부, 비밀경찰 조직에 소련 세력이 침투했다.[285][286]

동독 정치사에는 네 시기가 있다.[79] 사회주의 건설이 이루어진 1949년-1961년, 베를린 장벽 폐쇄 이후 탈출이 차단되어 안정과 통합의 시기였던 1961년-1970년, 서독과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진 에리히 호네커 시대였던 1971년-1985년, 그리고 동독의 쇠퇴와 멸망을 맞이한 1985년-1990년으로 구분된다.

1989년 11월 9일,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리고 12월 22일에는 브란덴부르크 문이 다시 개방되었고, 동독의 사회주의 체제는 무너졌다. 2+4 회담을 통해, 양 독일과 제2차 세계 대전 승전국들은 독일 통일에 동의했다.

1990년 10월 3일에는 동독 정부가 공식 해체되었고, 동독은 재통일된 독일 연방 공화국으로서 유럽 연합에 가입한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였다. 통일 이후 동독의 영토는 5개의 주로 다시 나뉘었다.

4. 1. 조직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SED)은 1946년 독일 공산당(KPD)과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합병으로 결성되었다.[31] 소련 점령 당국은 SPD 동부 지부에 KPD와의 합병에 큰 압력을 가했으며, 다수를 차지한 공산주의자들이 정책을 거의 전적으로 통제했다.[32] SED는 동독 기간 동안 집권당이었다.

SED 로고: 1946년 SED를 설립한 빌헬름 피크오토 그로테볼의 공산주의-사회민주주의 악수


SED는 소련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소련은 1991년 소련 체제 해체까지 동독에 군대를 주둔시켰다.[31] 이는 서독의 NATO 기지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1949년 소련은 SED에 동독 통제권을 넘겼다.[35]

포츠담 협정에서 소련은 독일에서 민주적 형태의 정부를 지원할 것을 약속했지만, 소련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서방과 달랐다.[81] 동독의 모든 정당은 민주독일민족전선(National Front of Democratic Germany)에 가입해야 했다. 민주독일민족전선은 여러 정당과 대중 정치 조직들의 광범위한 연합체였다.[80]

민주독일민족전선에 포함된 정당은 다음과 같다:

정당명약칭이념비고
기독교민주연합CDU기독교 민주주의통일 후 서독 CDU와 합병
독일민주농민당DBD농본주의통일 후 서독 CDU와 합병
독일자유민주당LDPD자유주의통일 후 서독 FDP와 합병
독일국민민주당NDPD민족주의통일 후 서독 FDP와 합병[80]



이 정당들은 SED에 종속되어 SED의 "선도적 역할"을 수용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인민의회(Volkskammer)에 대표를 파견했고 정부 내에서 일부 직책을 맡았다.[82]

인민의회 의사당이었던 베를린 공화국 궁전(Palast der Republik)


인민의회에는 자유독일청년단(FDJ), 자유독일노동조합연맹 같은 대중 조직 대표들도 포함되었다.[82] 독일민주여성연맹도 인민의회에 의석을 가졌다.

호네커 등 SED 간부와 회담하는 위성 정당 당수들(1982년)


동독에는 5개 정당이 존재했으며, "민주 블록(Demokratischer Block)"을 형성했다. 그러나 SED를 제외한 정당들은 SED의 지도를 인정하는 위성 정당이었고, 각 당 당수가 국가 평의회 부의장이 되는 등 체제 내에 흡수되어 "다당제"라는 명목을 유지하기 위한 장식적인 존재였다. 헤게모니 정당제의 전형적인 예이다.

독일 통일 이후, SED는 민주사회당(PDS, 현재는 좌파당)으로 개명하여 존속했고, 기독교민주연합과 민주농민당은 서독의 기독교민주연합에, 독일 자유민주당(LDPD)과 민족민주당은 서독의 자유민주당(FDP)에 합류했다.

사회주의 붕괴 후, SED는 "민주사회당(PDS)"으로 개명되었고, 통일 후 10년 동안 존속하다 서독의 WASG와 합쳐 좌파당을 결성했다. 좌파당은 SED보다 덜 강력하지만 독일 여러 지역에서 여전히 정치적 세력이다.[83]

4. 2. 국가 상징

(1949년 10월 7일 ~ 1959년 10월 1일)]]

동독 깃발
(1959년 10월 1일 ~ 1990년 10월 3일)


1990년 5월 31일, 동독 최초의 자유 선거로 뽑힌 인민의회는 동독 국장을 공공 건물 안팎에서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동독 국가(國歌)는 "폐허에서 부활한 조국"(Resurrected from Ruins)이며, 가사는 요하네스 R. 베허가, 멜로디는 한스 아이슬러가 작곡했다. 1970년대 초부터 1989년 말까지는 "독일 통일 조국" 부분 때문에 국가의 가사는 더 이상 불리지 않았다.

4. 2. 1. 대통령기

초대 대통령 깃발은 검정-빨강-금색의 직사각형 깃발 모양으로, 빨간색 줄무늬에는 노란색으로 "대통령"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고, 그 아래 줄무늬에는 검정색 글씨로 "D.D.R."(공식 약어와 달리 점이 없음)이 적혀 있었다. 깃발은 노란색 줄무늬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깃발 원본은 베를린의 독일 역사 박물관에 있다.[11]

4. 2. 2. 전쟁 및 복무 깃발과 상징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군사 조직은 국민인민군(National People's Army), 인민해군(Volksmarine), 국경수비대 등이 있었으며, 각 조직은 고유의 깃발과 문장을 사용했다.

동독 국가보안부(슈타지) (1990년까지) 깃발


동독 국가보안부(MfS)(슈타지) (1990년까지) 문장


독일민주공화국 국민인민군(National People's Army) 문장 (1956년부터 1990년까지)


국민인민군(National People's Army) 육군 문장 (1956–1990)

  • 국민인민군 깃발: 흑적금 삼색기 바탕에 두 개의 올리브 가지로 둘러싸인 국장이 새겨져 있었다.
  • 인민해군 깃발: 붉은 바탕에 올리브 가지로 둘러싼 국장이 새겨진 깃발(전투함 및 보트)과 파란색 천에 좁고 가운데에 위치한 흑적금색 띠와 국장이 새겨진 깃발(보조함 및 보트)을 사용했다.
  • 국경수비대 깃발: 녹색 띠를 달고 있었다. 발트해 연안 경계여단의 함선과 보트, 엘베 강과 오데르 강의 국경수비대 보트도 동일한 깃발을 사용했다.

4. 2. 3. 정치 및 사회적 상징

에른스트 텔만 선구자 조직 깃발 (1948년 12월 13일 – 1990년 8월)


동독의 주요 정치 및 사회 단체의 상징은 다음과 같다.

4. 3. 영 파이오니어 프로그램



동독의 청소년 조직은 6세에서 14세 사이의 학생들을 위한 '젊은 선구자'와 '텔만 선구자'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독일 공산당의 전 지도자이자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에서 처형된 에른스트 텔만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84] 1948년 12월 13일에 설립되어 독일 통일이 이루어진 1989년에 해체되었다.[87]

이 조직은 자유 독일 청년단(FDJ)의 하부 조직으로서, 스카우트 운동과 유사하지만 사회주의 이념을 가르치고 FDJ를 위한 준비를 시키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87]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거의 모든 동독 학생들이 이 조직에 가입했으며, 1975년에는 약 200만 명의 어린이가 소속되어 있었다.[87]

이들의 슬로건은 Für Frieden und Sozialismus seid bereit – Immer bereit|평화와 사회주의를 위해 준비하라 – 항상 준비하라de였으며, 보통 "준비하라 – 항상 준비하라"로 줄여 사용되었다. 깃발 게양식에서 선구자 지도자나 교사가 "준비하라!"라고 외치면, 선구자들은 오른손을 이마에 대고 "항상 준비하라"고 답했다.[87] 이들은 국가의 사회주의적 성공을 기념하는 대규모 사열을 벌이기도 했다.

14세에서 25세 사이의 청소년들은 자유 독일 청년단(FDJ)에 가입했으며, 1981-82년에는 230만 명의 회원을 보유하여 동독 청소년 인구의 약 75%를 차지했다.[89][90] FDJ는 점차 공산주의 통치의 도구로 발전했으며, 1950년에는 '민주주의 진영'의 일원이 되었다.[88]

4. 3. 1. 에른스트 텔만 파이오니어 조직

1948년 12월 13일 설립된 에른스트 텔만 선구자 조직


동독의 6세에서 14세 사이의 학생들을 위한 청소년 조직인 '젊은 선구자'와 '탈만 선구자'는 독일 공산당의 전 지도자였으며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에서 처형된 에른스트 텔만(Ernst Thälmann)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84]

이 단체는 동독의 청소년 운동인 '자유 독일 청년'(FDJ, 자유 독일 청년(Freie Deutsche Jugend))의 하부 조직이었다.[86] 1948년 12월 13일에 설립되어 독일 통일이 이루어진 1989년에 해체되었다.[87]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거의 모든 6세에서 14세 사이의 학생들이 젊은 선구자 또는 탈만 선구자 단체에 조직되었으며, 1975년에는 이 조직들이 총 "약 200만 명의 어린이"를 보유하고 있었다.[87]

선구자 단체는 스카우트 운동을 느슨하게 기반으로 했지만, 6세에서 14세 사이의 학생들에게 사회주의 이념을 가르치고 자유 독일 청년(Freie Deutsche Jugend)(FDJ)을 위한 준비를 시키는 방식으로 조직되었다.[87]

이 프로그램은 소련 선구자 프로그램인 블라디미르 레닌 전연방 선구자 조직을 따랐다. 선구자들의 슬로건은 Für Frieden und Sozialismus seid bereit – Immer bereit|평화와 사회주의를 위해 준비하라 – 항상 준비하라de였다. 이것은 보통 "준비하라 – 항상 준비하라"로 줄여서 사용되었다. 이 구호는 깃발 게양 시에 외쳤다. 한 사람이 첫 번째 부분인 "준비하라!"라고 외쳤는데, 이는 보통 선구자 지도자, 교사 또는 지역 선구자 단체의 책임자였다. 선구자들은 모두 "항상 준비하라"고 대답하면서 오른손을 뻣뻣하게 하고 엄지손가락을 가장 가까이 하고 새끼손가락을 하늘쪽으로 향하게 하여 이마에 대었다.[87]

1953년 에른스트 텔만 선구자 조직 사열


두 선구자 단체는 종종 국가의 사회주의적 성공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대규모 사열을 벌였다.

4. 3. 2. 자유 독일 청소년

upright


자유독일청년단(FDJ)은 14세에서 25세 사이의 남녀 청소년을 위한 단체였으며, 전 동독 청소년 인구의 약 75%를 차지했다.[89] 1981년에서 1982년 사이에는 230만 명의 회원이 있었다.[90] 동독의 청소년들은 보통 6세에서 14세까지 에른스트 탈만 선구자 조직 회원이 된 후 FDJ에 가입했다.[91]

1969년 FDJ 조직 사열


FDJ는 점차 공산주의 통치의 도구로 발전하여 1950년 '민주주의 진영'의 일원이 되었다.[88] 1952년 7월 발터 울브리히트가 제4차 의회에서 '사회주의의 가속화된 건설'을 강조하고 SED 정책이 과격화됨에 따라, 1940년대를 특징지었던 FDJ의 '즐거운 청년 생활'에 대한 초점은 점차 주변화되었다.[92] 그 결과, 교회 청년들의 활동을 방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더욱 강력한 반종교적 의제가 FDJ 내에서 성장했다. 1953년 4월 중순 FDJ 신문 Junge Weltde가 '불법' Junge Gemeindende의 '범죄' 활동에 대한 세부 사항을 보도했을 때 이러한 반종교적 의제는 정점에 달했다. FDJ 갱단은 교회 모임에 가서 내부 사람들을 야유했고, 학교 재판은 종교적 이유로 FDJ에 가입하기를 거부한 학생들을 심문하거나 퇴학시켰다.[93]

1985년 동베를린 베를린 공화국궁전 대강당에서 열린 FDJ 제12차 의회 개막식

4. 4. 행정 구역

1952년 7월 25일에 실시된 행정 구역 개편으로 기존의 5개 주(브란덴부르크 주,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 작센 주, 작센안할트 주, 튀링겐 주)가 폐지되고 14개의 구(Bezirkde)가 신설되었다.[259]

새로 신설된 14개 구는 다음과 같다:

  • 게라 구
  • 노이브란덴부르크 구
  • 드레스덴 구
  • 라이프치히 구
  • 로스토크 구
  • 마그데부르크 구
  • 슈베린 구
  • 에르푸르트 구
  • 줄 구
  • 카를마르크스슈타트 구
  • 콧부스 구
  • 포츠담 구
  • 프랑크푸르트 (오데르) 구
  • 할레 구


이 구들은 하위 행정 구역인 군(Kreisede)과 시(Stadtkreisde)로 나뉘었으며, 각 구의 이름은 구청 소재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동베를린은 1961년에 구와 동등한 행정 구역으로 승격되었다.[259]

1990년 7월 22일 인민의회 법률에 따라 14개 구가 폐지되고, 1952년 이전의 5개 주(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 브란덴부르크 주, 작센 주, 작센안할트 주, 튀링겐 주)가 복원되었다. 이 법률은 1990년 10월 3일 독일의 재통일과 함께 시행되었으며, 1990년 10월 14일에 주 정부가 신설되었다.[259]

4. 5. 외교 관계

동독은 건국 초기에는 전독일 통일을 목표로 했으며, 서독과의 분단은 서독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서독은 할슈타인 원칙에 따라 동독과 국교를 맺는 국가와는 국교를 맺지 않는다는 방침을 취했다. 동독은 국영철도의 명칭을 전쟁 이전 독일 국영철도의 명칭을 의도적으로 계승하고, 서독에 대항하여 루프트한자 독일항공을 설립하기도 했다. 또한, 동독과 서독은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는 선전 방송을 주고받았다.[249]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로 상호 승인과 이듬해 동서독의 유엔 가입으로 동독이 국제적으로 국가 승인을 받게 되자, 동독은 “독일민주공화국은 사회주의적 민족 국가이며, 자본주의적 민족 국가인 서독과는 다르다”는 주장으로 이중 국가 공존 상태를 정당화하게 되었다.[250]

이처럼 정치적으로는 서독과 대립하여 분단 국가의 고착화를 추진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서독과의 교역을 진행했고, 동독 국민의 소비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서독으로부터 은행 보증이 붙은 차관을 받았다. 또한 서독이 로마 조약 체결 시 동독과의 무역은 “국내 거래”이며 무관세·무과세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유럽 공동체(EC) 회원과 동일한 조건으로 무역할 수 있었다. 동독이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보다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측면도 작용했다.[251]

일본은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이 체결되어 동독과의 국교 수립 장벽이 제거됨에 따라, 1973년 공식적인 국교를 수립했다.[252] 1976년부터 1978년에 걸쳐 가시마건설에 의해 동베를린 중심부에 국제무역센터 빌딩이 건설되었고, 일본 기업들도 다수 입주하였으며, 1981년에는 국가원수 에리히 호네커 서기장이 일본을 방문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주일 독일민주공화국 대사관은 도쿄도 미나토구 아카사카에 있었다. 독일의 재통일 이후에는 구 서독 대사관이 그대로 독일대사관이 되었다.

1945년 6월 회담에서 스탈린은 소련 점령 지역의 독일인 공산주의 지도자에게 영국과 미국의 점령지에서 그들의 위치를 점차 잠식하고, 독일 전체가 소비에트권의 공산주의 통치하에 들어올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1946년 초, 스탈린은 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 대표단과의 만남에서 독일이 소비에트 공산주의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련은 공장, 장비, 기술자, 경영진, 숙련 인력 등을 강제로 이전했다. 동독 내 집권 공산당은 소련의 명령을 행정 기관에 전달하고, 이를 자신의 주도로 위장하는 역할을 했다.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소련 당국은 독일 공산당사회민주당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으로 강제 합병했다. 이 과정에서 해당 당이 마르크스-레닌주의나 소비에트 지향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1946년 선거에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은 반대 세력 억압과 농촌 지역 참여 제한에도 불구하고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이후 재산과 산업은 정부 소유로 전환되었다.[284]

선을 넘는 발언이나 행동은 견책, 심문, 고문, 처형 등의 처벌을 받았다. 학교 교육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 주입이 강제되면서 교수와 학생들의 서방 탈주가 이어졌다. 정부, 사법 기관, 학교 임직 지원자는 사상 검증을 받아야 했다.

소련의 스메르시 비밀 경찰 등 정교한 정치 경찰 조직이 인민을 감시했으며, 엄격한 검열 제도로 출판과 방송 접근이 제한되었다.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내 비공산주의 반대 세력에게는 첩자가 잠입하여 소련 통합을 지원하고, 서방 점령 지역 내 "부르주아" 세력과의 관계를 이용했다. 한편으로는 독일 국가민주당(NDPD)을 창설하여 과거 나치 세력과 전문 군 장교를 규합했다. 1948년 티토-스탈린 결렬 당시 사회주의통일당은 소련을 추종하는 독재 정당으로 변화했다.

중요한 결정은 소련 공산당 중앙 위원회나 스탈린 개인의 지시를 거쳤다. 1949년 초, 소련식 정치국이 사회주의통일당을 지배하게 되었다. 1949년 10월 7일, 독일 민주 공화국 건국이 선포되었고, 소련 외무부는 동독 정부에 행정권을 부여했지만 자치권은 주지 않았다. 점령 정권에 소련의 무제한적인 권한이 행사되었고, 내각, 군부, 비밀경찰 조직에 소련 세력이 침투했다.[285][286]

4. 5. 1. 제3세계 사회주의 국가 지원

동독은 1972~1973년 국제적으로 외교적 인정을 받게 된 후, 제3세계 사회주의 정부 및 민족 해방 운동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했다.[94] 소련이 전반적인 전략을 통제하고 쿠바군이 실제 전투(주로 앙골라 인민 공화국과 사회주의 에티오피아에서)에 참여했지만, 동독은 군사 장비 정비와 인력 훈련을 위한 전문가를 제공했고, 자체 국가보안부(슈타지) 모델을 기반으로 한 비밀 보안 기관 설립을 감독했다.[94]

1960년대에 이미 앙골라의 MPLA, 모잠비크의 FRELIMO, 기니비사우와 카보베르데의 PAIGC와 접촉이 이루어졌다.[94] 1970년대에는 콩고 인민 공화국, 예멘 인민 민주 공화국, 소말리아 민주 공화국, 리비아, 베냉 인민 공화국과 같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 공식적인 협력이 이루어졌다.[94]

최초의 군사 협정은 1973년 콩고 인민 공화국과 체결되었다.[94] 1979년에는 앙골라, 모잠비크, 에티오피아와 친선 조약을 체결했다.[94]

전체적으로 2,000~4,000명의 동독 군사 및 보안 전문가가 아프리카에 파견된 것으로 추산된다.[94] 또한 아프리카와 아랍 국가 및 해방 운동 대표들이 동독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94]

앙골라의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의 동베를린 방문

4. 5. 2. 동독과 중동 분쟁

동독은 반시온주의 정책을 추구했으며, 제프리 허프(Jeffrey Herf)는 동독이 이스라엘에 대해 비공식적인 전쟁을 벌였다고 주장한다.[95] 허프에 따르면, "중동은 소련과 서방 간의 세계적 냉전의 핵심 전장 중 하나였으며, 동독은 소련 진영의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 행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지역이기도 했다."[96] 동독은 자신을 "반파시스트 국가"로 여겼지만, 이스라엘을 "파시스트 국가"[97]로 간주했으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강력히 지지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 투쟁을 지원했다. 1974년, 동독 정부는 PLO를 "팔레스타인 인민의 유일한 합법적 대표자"로 인정했다.[98] 1988년 11월 15일, PLO는 제1차 인티파다 기간 중 팔레스타인 국가를 선포했고, 동독은 통일 전에 이 국가를 인정했다.[99] 동독은 UN 회원국이 된 후 "UN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정치적 공격을 훌륭하게 수행했으며, 총회의 반이스라엘 다수파의 열렬하고, 높은 프로필을 가진, 활발한 회원이었다."[95]

미개발 천연자원이 풍부한 바트당 이라크는 동독의 동맹국으로 여겨졌으며, 이라크는 1969년 5월 10일 동독을 인정한 최초의 아랍 국가가 되어 다른 아랍 연맹 국가들이 나중에 동독을 인정하는 길을 열었다. 동독은 이라크 공산당과 바트당 간의 갈등 조정에 힘썼으며, 이라크 국민진보전선(National Progressive Front)의 창설을 지지했다. 동독 정부는 하페즈 알 아사드 정권 초기에 그의 바트당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려고 시도했으며, 이라크에서처럼 시리아 공산당과 바트당 정권 간의 긴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했다.[100]

4. 5. 3. 서유럽

동독은 냉전 시대, 특히 초기에는 아이슬란드와의 외교 및 무역 관계 강화를 시도했다. 1950년대까지 동독은 아이슬란드의 5번째로 큰 무역 파트너였다.[101]

그러나 1960년대 아이슬란드가 자유 시장 경제 개혁을 시행하고, 프라하의 봄을 둘러싼 독일 사회주의통일당과 아이슬란드 사회당 간의 불화로 인해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동독의 아이슬란드 내 영향력은 상당히 감소했다.[101]

4. 5. 4. 소련 군사 점령

1945년 6월 회담에서 스탈린은 소련 점령 지역의 독일인 공산주의 지도자에게 영국과 미국의 점령지에서 그들의 위치를 점차 잠식하고, 독일 전체가 소비에트권의 공산주의 통치하에 들어올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1946년 초, 스탈린은 불가리아와 유고슬라비아 대표단과의 만남에서 독일이 소비에트 공산주의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련은 공장, 장비, 기술자, 경영진, 숙련 인력 등을 강제로 이전했다. 동독 내 집권 공산당은 소련의 명령을 행정 기관에 전달하고, 이를 자신의 주도로 위장하는 역할을 했다.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소련 당국은 독일 공산당사회민주당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으로 강제 합병했다. 이 과정에서 해당 당이 마르크스-레닌주의나 소비에트 지향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1946년 선거에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은 반대 세력 억압과 농촌 지역 참여 제한에도 불구하고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이후 재산과 산업은 정부 소유로 전환되었다.[284]

선을 넘는 발언이나 행동은 견책, 심문, 고문, 처형 등의 처벌을 받았다. 학교 교육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 주입이 강제되면서 교수와 학생들의 서방 탈주가 이어졌다. 정부, 사법 기관, 학교 임직 지원자는 사상 검증을 받아야 했다.

소련의 스메르시 비밀 경찰 등 정교한 정치 경찰 조직이 인민을 감시했으며, 엄격한 검열 제도로 출판과 방송 접근이 제한되었다.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내 비공산주의 반대 세력에게는 첩자가 잠입하여 소련 통합을 지원하고, 서방 점령 지역 내 "부르주아" 세력과의 관계를 이용했다. 한편으로는 독일 국가민주당(NDPD)을 창설하여 과거 나치 세력과 전문 군 장교를 규합했다. 1948년 티토-스탈린 결렬 당시 사회주의통일당은 소련을 추종하는 독재 정당으로 변화했다.

중요한 결정은 소련 공산당 중앙 위원회나 스탈린 개인의 지시를 거쳤다. 1949년 초, 소련식 정치국이 사회주의통일당을 지배하게 되었다. 1949년 10월 7일, 독일 민주 공화국 건국이 선포되었고, 소련 외무부는 동독 정부에 행정권을 부여했지만 자치권은 주지 않았다. 점령 정권에 소련의 무제한적인 권한이 행사되었고, 내각, 군부, 비밀경찰 조직에 소련 세력이 침투했다.[285][286]

4. 6. 군사

동독 정부는 여러 부처를 통해 다수의 군사 및 준군사 조직을 통제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국방부였다. 냉전(1945~1992) 기간 동안 서방과의 근접성으로 인해 동독의 군대는 바르샤바 조약군 중 가장 발전된 군대 중 하나였다. 주요 군사 조직은 다음과 같다.

  • '''국가인민군''' (Nationale Volksarmeede, NVA): 1956년 창설되었다. 국가인민군 육군, 인민해군(해군), 국가인민군 공군으로 구성되었다.
  • '''동독 국경수비대''': 1973년 국가인민군에서 분리되었다.
  • '''인민경찰 준비대''' (Volkspolizei-Bereitschaftende, VPB): 내무부 소속의 주둔 예비대였다.
  • '''슈타지''' (국가보안부): 펠릭스 드제르진스키 경비 연대를 포함했다.
  • '''노동계급 전투단''' (Kampfgruppen der Arbeiterklassede):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통제를 받는 민병대였다.


동독에서는 모든 남성이 18개월의 의무 군 복무를 해야 했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는 건설 부대 등에서 대체 복무를 할 수 있었다.

4. 6. 1. 국가인민군

국가인민군(Nationale Volksarmee|나치오날레 폴크스아르미de, NVA)은 1956년 동독이 바르샤바 조약에 가입하면서 정규 경찰(Volkspolizei|폴크스폴리차이de)의 군사 부대인 주둔 인민경찰(Kasernierte Volkspolizei|카제르니어르테 폴크스폴리차이de)에서 창설되었다.[102] 창설 초기에는 지원병으로만 구성되었으나, 1962년 18개월의 징병 제도가 도입되었다.[103] NATO 장교들은 NVA를 바르샤바 조약군에서 가장 우수한 군대로 평가했다.[104]

NVA는 다음과 같은 부대로 구성되었다.

동베를린에서 동독 인민군의 근무 교대식


동독 정부는 국방부를 통해 NVA를 통제했다. 냉전 기간 동안 동독은 서방과 가까웠기 때문에 동독의 군대는 바르샤바 조약군 중 가장 발전된 군대 중 하나였다.

4. 6. 2. 국경 부대

동독 지역의 국경수비대는 서독의 연방국경경비대(Bundesgrenzschutz)와 유사하게, 처음에는 Deutsche Grenzpolizei|독일 국경경찰대de라는 경찰 조직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내무부의 통제를 받았다. 1956년 동독의 재군사화 이후, Deutsche Grenzpolizei|독일 국경경찰대de는 1961년에 소련 국경군을 모델로 한 군사 조직으로 개편되었고, 국가인민군(NVA)의 일부로서 국방부로 이관되었다. 1973년에는 국가인민군(NVA)에서 분리되었지만, 동일한 부처의 지휘를 받았다. 최대 규모는 약 47,000명에 달했다.

4. 6. 3. 폴크스폴리제이-베레시프트샤프트

1956년 국가인민군(NVA)이 인민경찰(Volkspolizei)에서 분리된 후, 내무부는 자체적인 공공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주둔 예비대를 유지했는데, 이것을 인민경찰 준비대(Volkspolizei-Bereitschaften, VPB)라고 불렀다. 이 부대들은 카세르니어르테 인민경찰(Kasernierte Volkspolizei)과 마찬가지로 기계화 보병으로 무장했으며, 1만 2천 명에서 1만 5천 명에 달했다.

4. 6. 4. 슈타지

국가보안부(슈타지, Stasi)에는 주로 시설 경비와 사복 경비에 종사했던 펠릭스 드제르진스키 경비 연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슈타지의 유일한 대외 활동 부대였다. 슈타지는 약 9만 명으로 구성되었고, 경비 연대는 약 1만 1천~1만 2천 명으로 구성되었다.[105][106]

4. 6. 5. 노동계급의 전투 그룹

노동계급 전투단(Kampfgruppen der Arbeiterklassede)은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의 "당의 군대"로서, 공장을 중심으로 조직된 약 400,000명 규모의 민병대였다. 모든 지시와 결정은 SED 중앙위원회(ZK)의 정치국에서 이루어졌으며, 인민경찰(Volkspolizei)과 내무부로부터 훈련을 받았다. 가입은 자발적이었지만, SED 당원들은 당원 의무의 일환으로 가입해야 했다.[105]

4. 6. 6. 양심적 반대

동독에서는 모든 남성이 18개월의 의무 군 복무를 해야 했다. 신체적으로 부적격하거나 양심적 병역 거부자의 경우, 1964년 징병제 도입 2년 후 국가 루터파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동독 정부에 대한 정치적 압력에 대한 대응으로 설립된 Baueinheiten|건설 부대de 또는 Volkshygienedienst|국민 위생 서비스de에서 복무할 수 있었다. 1970년대에 동독 지도자들은 전직 건설병과 위생 서비스 병사들이 민간 영역에 복귀할 때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음을 인정했다.[102][103]

4. 7. 전체주의와 억압

학계에서는 동독이 전체주의 국가로 간주될 수 있는 대부분의 기준을 충족했다는 데 일반적인 합의가 있다.[107] 역사학자 메리 풀브룩(Mary Fulbrook)에 따르면 동독은 단일 정당 지배, 경제 통제, 미디어 검열,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 공포와 억압 사용 등 전체주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108]

국가 보안 서비스(SSD), 일반적으로 슈타지(Stasi)는 사회주의 지도부가 역사적 목표를 달성하려는 시도에 있어 근본적이었다. 동독에서 슈타지는 사람들의 편지를 읽고 전화 통화를 도청했으며,[109] 비공식 정보원의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고용하여 사람들을 감시하고 보고하도록 했다.[110] 1990년 동독이 종식될 당시 모든 계급에 약 10만 9천 명의 정보원이 활동하고 있었다.[110]

역사가 네심 구아스(Nessim Ghouas)에 따르면, 1971년 에리히 호네커 집권하에 슈타지의 운영 방식이 바뀌었다. 스탈린 시대의 잔혹한 억압(고문, 처형 등)은 권력의 더욱 선택적인 사용으로 변화했다.[111] 슈타지는 '적대적-부정적'[112] 세력(내부의 적)을 마비시키고 와해시킬 필요가 있었다. 작가, 예술가, 청소년 하위 문화, 교회 신자들은 종종 표적이 되었다.[113] 슈타지가 개인에 대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작전 사건'[113]을 개시했다. 각 사건에 대해 두 가지 바람직한 결과가 있었는데, 정당한 이유로 체포, 재판, 투옥되거나, 이것이 달성될 수 없다면 Zersetzung(분해) 방법의 적용을 통해 무력화되는 것이다.[114] 호네커 시대에 Zersetzung은 부당한 체포로 인한 정치적 후폭풍을 피하려는 야망으로 인해 슈타지 억압의 주요 방법이 되었다.

Zersetzung 방법은 다양했으며 표적이 되는 개인에 따라 맞춤화되었다. 불쾌한 편지, 악의적인 소문, 여행 금지, 직업 파괴, 가택 침입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행위는 종종 실업, 사회적 고립, 심각한 정신 건강 문제로 이어졌다.[115] 약 13만 5천 명의 어린이들이 특수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그중 최악의 곳은 토르가우 교정 시설(1975년까지)이었다.[116] 고문 피해자 국제 재활 위원회는 슈타지로 인해 직접적인 신체적 고문, Zersetzung 및 중대한 인권 침해의 피해자가 30만 명에서 50만 명 사이라고 생각한다.[117]

5. 경제

1990년 8월 동독 경제 지도


동독에서 생산된 트라반트 자동차


동독 경제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막대한 피해, 젊은 병사들의 손실, 사업 및 교통의 혼란, 도시를 초토화시킨 연합군의 폭격, 그리고 소련에 대한 배상금으로 인해 매우 어려운 출발을 했다.[49] 소련군은 소련 점령 지역의 기반 시설과 공장들을 해체하여 러시아로 이송했다. 1950년대 초, 배상금은 농산물과 공산품으로 지불되었고, 석탄 광산이 있는 하부 실레시아와 중요한 자연 항구인 슈체친포츠담 협정에 따라 폴란드에 할양되었다.[49]

동독의 사회주의 중앙 계획 경제는 소련과 유사했다. 1950년, 동독은 코메콘 무역 블록에 가입했다. 1984년 1인당 소득은 9,800달러(2015년 달러 기준 22,600달러)로 추산되었는데, 이는 비현실적인 공식 환율에 근거한 것이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독 경제는 1990년 통일될 때까지 모든 소련권 국가 중 가장 부유한 국가였다.[7]

동독 정부는 돈과 가격을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여 광범위한 기본 상품과 서비스에 대해 높은 수준의 보조금을 제공했다.[119] 이러한 인위적인 가격은 생산 수준에서 반(半)물물교환과 자원 축적 시스템을 만들었고, 소비자에게는 동독 마르크를 시간, 물물교환 및 경화로 대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회주의 경제는 서독으로부터의 경화 대출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고, 동독인들은 자국의 연화를 서독 마르크(DM)에 비해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120] 이러한 경제적 문제는 동서독 통일 후에도 동독에서 지속되었다.

5. 1. 소비 및 일자리

동독과 서독은 정부 지출과 소비 체계에서 경쟁을 벌였다. 동독에서는 여성이 노동 시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동독 경제에서는 정치적 성향이 기술 전문성보다 우선시되는 경우가 많았다.[124] 낮은 출산율과 높은 이탈률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동독 정부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 미숙련 노동자들을 유치하는 정책을 펼쳤다.[125]

동독의 사회주의 계획 경제는 소련과 유사했다. 1950년, 동독은 경제상호원조회의(코메콘)에 가입했다. 1985년 통계에 따르면, 사회협동기업의 수입이 국가 전체 수입의 96.7%를 차지했다. 동독 경제 당국은 재화와 서비스 가격 안정을 위해 예산 지출의 80%를 사용했다. 1976년 동독의 GDP 성장률은 5%대였다.

동독의 주요 수출품은 프락티카(Praktica) 브랜드의 사진기, IFA에서 제조한 트라반트(Trabant) 브랜드의 소형 승용차, 바르트부르크(Wartburg) 브랜드의 중대형 승용차, 사냥용 소총, 육분의, 손목시계 등이었다.

1960년대까지 동독은 설탕이나 커피와 같은 식료품 부족을 겪었다. 동독 경제 당국은 서독과의 교역과 서방 국가의 외환을 확보하기 위해 동독 주민들이 동독 국립은행(Staatsbank)을 통해 서독 은행에 외환 계좌를 개설하고, 특별 외환상점(Intershop)에서 외환으로 서방 국가 물품이나 동독 제조 수출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했다. 동독 주민들은 우편 제도를 이용해 외국에서 다양한 소비재를 구입하거나, 야우어푸드(Jauerfood) 사를 통해 동독 화폐로 외국 식료품을 구입할 수 있었다.

동독 정부는 통화와 시장 가격을 정치적 도구로 사용했다. 정규 급여 외에 여러 상품과 서비스를 구입할 수 있는 보조 급여를 지급했는데, 이는 "제2의 급여"라고 불렸다. 이러한 정책은 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미쳤고, 서독과 동독의 경제 차이를 만들었다. 인위적인 가격 조절은 비효율적인 생산을 유발했고, 물물교환이나 사재기 같은 비경제적인 활동이 나타났다. 이 때문에 많은 소비자들이 동독 화폐의 가치를 신뢰하지 못하고 서방 국가 화폐로 교환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동독 경제는 서독에서 제공하는 서방 국가 화폐 대부에 의존했고, 동독 주민들은 서독 마르크에 비해 동독 마르크의 가치를 낮게 평가했다.

기간동독 1인당 GDP 성장률서독 1인당 GDP 성장률
1945–19606.210.9
1950–19606.78.0
1960–19702.74.4
1970–19802.62.8
1980–19890.31.9
총계 1950–19893.14.3

[123]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에 대한 충성도는 좋은 직업을 얻는 주요 기준이었고, 전문성은 부차적인 요소였다.[124]

1963년부터 동독은 비밀 국제 협정을 통해 폴란드, 헝가리, 쿠바, 알바니아, 모잠비크, 앙골라, 베트남 등에서 노동자들을 모집했다. 1989년까지 그 수는 10만 명이 넘었다. 제카 샬(Zeca Schall)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변혁(Wende) 이후에도 독일에 남았다.[125]

5. 2. 운송

동독의 주요 운송 체계로는 독일 국영 철도와 인터플루그가 있었다.

5. 3. 통신

동독의 통신 시스템은 독일민주공화국 우정청(Deutsche Post)이 운영했으며, 전화와 텔렉스 서비스를 제공했다.[284] 장거리 통화는 특이하게도 수동으로 연결해야 했다.[285]

독일 통일 이후에는 동독의 통신 네트워크를 서독과 동일한 표준으로 만들기 위한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졌다.[286]

1955년에는 퓌르스텐발데에 지상 기반 라디오 방송국이 개설되었고, 1976년에는 인터스푸트니크 시스템에 가입하여 국제 통신 능력을 향상시켰다.[284]

6. 인구 통계

동독의 인구는 1948년 1900만 명에서 1990년 1600만 명으로 300만 명 감소했다.[126] 이는 독일인 추방으로 인해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 지역이 폴란드와 소련 영토가 된 것과 관련이 있다.[126] 1961년 베를린 장벽 완공 전까지 많은 동독인들이 국가를 떠났고,[127] 이후 동독은 매우 낮은 출산율을 보였다.[128] 다만, 1980년대에는 여성이 직장과 가정 양쪽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 더 나은 모성 정책 덕분에 동독의 출산율이 서독보다 상당히 높았다.[129]

1988년 기준 동독의 주요 도시는 다음과 같다.[134]

도시인구
동베를린1,200,000
라이프치히[132]556,000
드레스덴[133]520,000
카를마르크스슈타트[134] (1953년까지 켐니츠, 1990년 원래 이름으로 복귀)314,437
마그데부르크[134]290,579
로스토크[134]253,990
할레[134]236,044
에르푸르트[134]220,016
포츠담[134]142,862
게라[134]134,834
슈베린[134]130,685
콧부스[134]128,639
츠비카우[134]121,749
예나[134]108,010
데사우[134]103,867



1986년 9월, 당시 동독 최대의 해안 및 항구 도시이자 동독에서 여섯 번째로 큰 도시였던 로스토크 시내의 한자 동맹풍 플라텐바우


동독에서 종교는 논쟁의 대상이었다. SED은 국가무신론을 장려했지만, 일부 사람들은 기독교 공동체에 남아 있었다.[135] 1957년, 국가 당국은 정부와 교회 및 종교 단체 간의 관계를 담당하는 교회 문제 담당 국무성을 설립했다.[136]

1950년 동독 시민의 85%는 프로테스탄트였고, 10%는 가톨릭 신자였다. 그러나 1989년에는 기독교 신자 수가 크게 감소하여 프로테스탄트는 인구의 25%, 가톨릭은 5%를 차지했다. 스스로를 비종교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비율은 1950년 5%에서 1989년 70%로 증가했다.

학교 교육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을 주입하는 것이 강제되어 교수들과 학생들이 서방으로 탈주하였다. 정부나 사법 기관, 학교에 임직하려는 지원자는 사상 검증을 받아야 했다.

6. 1. 생명 통계

1946년부터 1990년까지 동독의 생명 통계[130][131]
연도출생아 수 (천 명)사망자 수 (천 명)자연 증감 (천 명)조출생률 (1,000명당)조사망률 (1,000명당)자연 증감률 (1,000명당)합계출산율
1946211.7315.0-103.311.216.7-5.5
1947275.7261.014.714.613.80.8
1948285.1248.836.315.013.11.9
1949287.1235.052.115.212.42.8
1950298.7228.170.616.212.43.82.37
1951312.9224.888.117.112.34.82.50
1952306.6232.574.117.012.94.12.46
1953290.8235.255.616.513.33.22.31
1954295.6221.274.416.912.74.22.37
1955292.9226.666.316.913.13.82.36
1956295.7216.379.417.212.64.62.40
1957296.6219.976.717.312.94.42.42
1958294.8219.175.717.312.94.42.42
1959297.6218.179.517.412.84.62.46
1960299.8224.675.217.413.14.32.49
1961291.1225.365.817.013.13.92.43
1962289.9223.066.916.913.03.92.44
1963295.7221.074.717.312.94.42.51
1964286.5218.967.616.812.93.92.45
1965273.9224.649.316.113.22.92.34
1966265.1218.846.315.612.92.72.26
1967260.1216.743.415.312.72.62.21
1968255.6224.131.515.013.11.92.17
1969258.6225.433.215.213.22.02.21
1970257.4231.625.815.113.61.52.21
1971248.6231.916.714.613.61.02.13
1972235.5238.3-2.813.914.0-0.11.99
1973217.6235.5-17.912.913.9-1.01.82
1974198.9234.7-35.811.914.0-2.11.64
1975182.6236.7-54.110.914.2-3.31.49
1976193.8230.6-36.811.613.8-2.21.59
1977209.9228.4-18.512.613.7-1.11.74
1978223.2227.6-4.413.413.6-0.21.87
1979234.8227.27.614.113.60.51.98
1980245.1228.117.014.613.61.02.09
1981240.3221.019.314.413.21.22.05
1982238.8217.321.514.313.01.32.04
1983234.8217.817.014.013.01.02.02
1984234.8214.720.114.012.81.22.04
1985230.4217.712.713.813.00.82.00
1986224.5207.517.013.512.41.11.95
1987224.2207.916.313.512.51.01.95
1988221.5205.416.113.412.41.01.93
1989208.0201.76.312.912.50.41.81
1990186.9192.6-5.711.712.0-0.31.59



1980년대에는 동독의 출산율이 서독보다 상당히 높았다.[129] 동독에서는 여성이 직장과 가정 양쪽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 더 나은 모성 정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6. 2. 주요 도시

1988년 기준으로 동독의 주요 도시는 다음과 같다:[134]

도시인구
동베를린1,200,000
라이프치히[132]556,000
드레스덴[133]520,000
카를마르크스슈타트[134] (1953년까지 켐니츠, 1990년 원래 이름으로 복귀)314,437
마그데부르크[134]290,579
로스토크[134]253,990
할레[134]236,044
에르푸르트[134]220,016
포츠담[134]142,862
게라[134]134,834
슈베린[134]130,685
콧부스[134]128,639
츠비카우[134]121,749
예나[134]108,010
데사우[134]103,867



6. 3. 종교

동독에서 종교는 논쟁의 대상이었다. SED은 국가무신론을 장려했지만, 일부 사람들은 기독교 공동체에 남아 있었다.[135] 1957년, 국가 당국은 정부와 교회 및 종교 단체 간의 관계를 담당하는 교회 문제 담당 국무성을 설립했다.[136]

1950년 동독 시민의 85%는 프로테스탄트였고, 10%는 가톨릭 신자였다. 그러나 1989년에는 기독교 신자 수가 크게 감소하여 프로테스탄트는 인구의 25%, 가톨릭은 5%를 차지했다. 스스로를 비종교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비율은 1950년 5%에서 1989년 70%로 증가했다.

6. 3. 1. 국가 무신론

초기 집권 당시, 공산당은 기독교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양립 가능성을 주장하고 사회주의 건설에 기독교인의 참여를 추구했다.[139] 처음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 무신론 장려가 공식적으로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1950년대 중반, 냉전이 고조되면서 무신론은 국내외적으로 국가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과학적 무신론 연구에 전념하는 대학 교수직과 학과가 설립되었고, 이 주제에 관한 많은 문헌(학술적 및 대중적)이 제작되었다. 이러한 활동은 1960년대 후반, 역효과를 내기 시작했다는 인식 속에 감소했다. 무신론에 대한 공식적이고 학술적인 관심은 1973년부터 다시 시작되었지만, 이번에는 선전보다는 학문과 간부 훈련에 더 중점을 두었다.[139]

6. 3. 2. 개신교

동독은 종교개혁 초기부터 주로 루터교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가 다수였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140] 1948년, 나치즘에 편향된 독일 기독교(German Christians)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일 대부분 지역의 루터교, 개혁교회, 연합교회들이 아이제나흐 회의(Kirchenversammlung von Eisenach)에서 독일 복음주의 교회(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 EKD)로 통합되었다.

1969년, 동독과 동베를린의 지역 복음주의 교회들은 EKD에서 분리되었고, 1970년에는 모라비아 교회(Herrnhuter Brüdergemeinde)도 합류하여 "동독의 복음주의 교회 연합"(Bund der Evangelischen Kirchen in der DDR|deBEK)을 결성했다. 1991년 6월 독일 재통일 이후, BEK 교회들은 다시 EKD와 합병되었다.

1980년 BEK 대표들과 에리히 호네커 간 회의


1956년부터 1971년 사이, 동독 루터교 교회 지도부는 국가와의 관계를 적대적에서 협력적으로 점진적으로 변화시켰다.[140] 1949년 동독 건국 이후, 사회주의 통일당은 교회의 젊은 세대에 대한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교회는 국가에 대해 대립적이고 거리를 두는 태도를 취했다. 1956년경부터 이러한 태도는 조건부 충성을 수용하는 보다 중립적인 입장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정부를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교회 지도자들은 당국을 하나님이 세운 것으로 보고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순종해야 할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가가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을 요구할 경우, 교회는 거부할 권리를 유보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구조적, 의도적 원인이 모두 있었다. 구조적 원인으로는 1950년대 중반 유럽에서 냉전 긴장이 고조되어 동독 국가가 일시적인 것이 아님이 명확해진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교인 감소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국가와 어떤 형태의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태도 변화의 의도는 전통적인 자유주의 루터교의 세속 권력 수용에서부터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까지 다양했다.[141]

만프레드 슈톨페는 1959년 브란덴부르크 복음주의 교회 변호사가 된 후 베를린 교회 본부에서 일했다. 1969년 그는 Bund der Evangelischen Kirchen in der DDRde (BEK) 설립에 참여하여 정부와 협상하면서 동시에 이 프로테스탄트 단체의 제도 내에서 활동했다. 그는 1990년 SPD 명단을 이끌고 브란덴부르크 주의회 지역 선거에서 승리했다. 슈톨페는 2002년 연방 정부에 합류할 때까지 브란덴부르크 주 정부에 남아 있었다.[142][143]

EKD/BEK에 통합된 프로테스탄트 주교회(Landeskirchen|de)와 가톨릭교회 외에도 동독의 자유 복음주의 교회 연합(Federation of the Free Protestant Churches in the German Democratic Republic)과 독일 자유 복음주의 교회 연합(Federation of the Free Protestant Churches in Germany)에 통합된 자유교회(Evangelische Freikirchen|de), 자유 루터 교회, 구 루터 교회, 동독 개혁 교회 연합 등 여러 소규모 프로테스탄트 단체가 있었다. 모라비아 형제단도 Herrnhuter Brüdergemeine|de로 존재했다. 감리교, 재림교, 메노나이트, 퀘이커 등 다른 개신교 교파도 있었다.

6. 3. 3. 가톨릭교

동독의 소규모 가톨릭 교회는 바티칸과 완전히 일치하는 기능적인 주교 서열을 갖추고 있었다. 전후 초기, 가톨릭 교회는 동쪽 지역에서 온 가톨릭 망명자들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했다.[284] 1980년대 초, 주교단의 세대가 교체되면서 정부는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새로운 주교들은 이전보다 정치적이지 않은 활동을 펼쳤다.[285]

다음은 동독 내 가톨릭 교회의 사도좌서리 주교 목록이다.

관할 구역주교
에르푸르트-마이닝겐
괴를리츠
마그데부르크
슈베린

[286]

6. 4. 교육

학교 교육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을 주입하는 것이 강제되어 교수들과 학생들이 서방으로 탈주하였다. 정부나 사법 기관, 학교에 임직하려는 지원자는 사상 검증을 받아야 했다.

6. 4. 1. 보육 시스템

동독의 보육 시스템은 광범위하게 조직되어 있었다. 약 60만 명의 아동 및 청소년이 공동생활 아동 보육 시스템에 속해 있었다.[87]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거의 모든 6세에서 14세 사이의 학생들이 '젊은 선구자' 또는 '탈만 선구자' 단체에 조직되었으며, 1975년에는 이 조직들이 총 "약 200만 명의 어린이"를 보유하고 있었다.[87] 이러한 단체들은 스카우트 운동을 느슨하게 기반으로 했지만, 6세에서 14세 사이의 학생들에게 사회주의 이념을 가르치고 자유 독일 청년(FDJ)을 위한 준비를 시키는 방식으로 조직되었다.[87]

선구자 단체는 소련의 선구자 프로그램을 따랐다. 선구자들의 슬로건은 Für Frieden und Sozialismus seid bereit – Immer bereitde("평화와 사회주의를 위해 준비하라 – 항상 준비하라")였으며, 보통 "준비하라 – 항상 준비하라"로 줄여서 사용되었다. 이 구호는 깃발 게양 시에 외쳤다. 한 사람이 첫 번째 부분인 "준비하라!"라고 외치면(보통 선구자 지도자, 교사 또는 지역 선구자 단체의 책임자), 선구자들은 모두 "항상 준비하라"고 대답하면서 오른손을 뻣뻣하게 하고 엄지손가락을 가장 가까이, 새끼손가락을 하늘쪽으로 향하게 하여 이마에 대었다.[87]

두 선구자 단체는 종종 국가의 사회주의적 성공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대규모 사열을 벌였다.

자유독일청년단(FDJ)은 14세에서 25세 사이의 남녀 청소년을 위한 단체였으며, 전 동독 청소년 인구의 약 75%를 차지했다.[89] 1981년에서 1982년 사이에는 230만 명의 회원이 있었다.[90] 동독의 청소년들은 보통 6세에서 14세까지 탈만 선구자 조직 회원이 된 후 FDJ에 가입했다.[91]

FDJ는 점차 공산주의 통치의 도구로 발전하여 1950년 '민주주의 진영'의 일원이 되었다.[88] 그러나 1940년대를 특징지었던 FDJ의 '즐거운 청년 생활'에 대한 초점은 울브리히트가 제4차 의회에서 '사회주의의 가속화된 건설'을 강조하고 1952년 7월 SED 정책이 과격화됨에 따라 점차 주변화되었다.[92] 그 결과, 교회 청년들의 활동을 방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더욱 강력한 반종교적 의제가 FDJ 내에서 성장했다. 1953년 4월 중순 FDJ 신문 Junge Weltde이 '불법' Junge Gemeindende의 '범죄' 활동에 대한 세부 사항을 보도했을 때 정점에 달했으며, FDJ 갱단은 교회 모임에 가서 내부 사람들을 야유하고, 학교 재판은 종교적 이유로 FDJ에 가입하기를 거부한 학생들을 심문하거나 퇴학시켰다.[93]

7. 문화

동독의 문화는 소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사회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식 사상으로 채택했다. 학교 교육에서도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 주입이 의무화되었고, 이로 인해 교수들과 학생들이 서방으로 탈주하기도 했다. 정부, 사법 기관, 학교 등에 임직하려는 지원자는 사상 검증을 받아야 했다. 스메르시 비밀 경찰 등 정치 경찰 조직이 인민을 감시했으며, 엄격한 검열로 출판과 방송 접근에도 제한이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동독은 서독과 대립하는 정체성을 확립하려 했다. 그러나 동독의 문화와 정치는 엄격한 검열로 제약을 받았으며, 예술의 자유가 제한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7. 1. 음악

동독의 음악계는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푸디스(Puhdys), 카라트(Karat), 시티(City), 실리(Silly), 판코우(Pankow) 등 다양한 독일 록 밴드들이 활동하며 독자적인 음악 문화를 형성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국영 음반사 아미가(Amiga)를 통해 음반을 발매하며 동독 문화의 특징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다른 하나는 한스 아이슬러(Hanns Eisler), 파울 데사우(Paul Dessau) 등 주요 작곡가들을 중심으로 독일 고전 음악 전통을 증진하려는 동독 정부의 노력이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기념 박물관과 라이프치히 바흐 아카이브가 설립되었고,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토마너 합창단, 작센 국립 오페라단, 베를린 심포니 오케스트라, 베를린 국립 오페라 등 공공 자금 지원을 받는 콘서트 및 오페라 오케스트라가 활발히 활동했다.

동독의 텔레비전과 라디오는 국가가 운영했지만, 많은 지역에서 서방 방송 수신이 가능했기 때문에 서독의 영향을 받았다. 슈라거 음악(게르트 크리스티안, 우베 옌센, 하르트무트 슐체-게를라흐 등)이 인기를 얻었고, 국제 슈라거 축제가 개최되기도 했다. 폴란드의 체르보네 기타리, 체코의 카렐 고트, 헝가리의 오메가, 유고슬라비아의 코르니 그루파 등 다른 사회주의 국가 출신 밴드와 가수들도 인기를 얻었다.

1980년대에는 서구 지향적인 사운드를 가진 "언더그라운드" 그룹(디 스켑티커, 디 아트, 필링 B 등)이 등장하고 힙합 문화가 유입되는 등 변화가 나타났다.

7. 1. 1. 음악 부문의 검열

동독에서는 모든 공연이 검열 대상이었으며, 가사 제출 및 승인, 공연 감시 등이 이루어졌다.[272] 하인츠 케르만과 타마라 단츠는 검열을 피하기 위한 전략을 사용했으며, "녹색 코끼리"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1960년대 초 비틀즈의 영향으로 라이프치히 비트 반란이 일어났고, 밴드 금지 및 통제가 강화되었다. 볼프 비어만은 추방되었고, 이에 대한 항의가 일어났다. 만프레드 크루그와 니나 하겐 등은 강제 국외 추방되었다. 우도 위르겐스우도 린덴베르크 등 서독 작품도 검열되었으며, 1980년대에는 검열 완화 조짐이 나타났다.

7. 2. 극장

동독 극장계는 초기에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는 1949년 쉬프바우어담 극장에서 자신의 작품인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을 공연하며 극장을 재개장했고, 자신의 극단인 베를리너 앙상블을 창단했다.[272]

브레히트는 "노동 계급 극장" 설립을 시도했으나, 그의 사후 그의 유산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했다. 베노 베손은 브레히트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하이너 뮐러와 같은 새로운 작가들과 협업했다. 특히 베를린의 폴크스뷔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0년대에는 주류 극장계와 병행하는 새로운 극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베를린 외부" 극장의 설립 사례도 나타났다.

동독에서 극장과 카바레는 높은 지위를 누렸지만, 국가와의 갈등 관계에 놓이기도 했다. 프리드리히슈타트 팔라스트는 건축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주요 극장으로는 베를리너 앙상블, 독일 극장, 막심 고리키 극장, 폴크스뷔네 등이 있었다.

7. 3. 텔레비전 및 라디오

동독의 텔레비전 및 라디오 방송은 국가가 운영하는 산업이었다. 주요 방송 기관은 동독 라디오 방송 (Rundfunk der DDR)과 독일 텔레비전 방송 (Deutscher Fernsehfunk)이었다.[277] 1980년대 중반에는 대부분의 가정에 라디오(99%)와 텔레비전(93%)이 보급되어 있었다.[274]

250px


동독의 많은 지역에서 서독의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 수신이 가능했다.[273] 법적으로는 서방 국가의 방송 수신이 금지되었고, 적발되면 처벌을 받았지만, 당국은 재밍을 하는 대응은 하지 않았다.[278] 이 때문에 많은 동독 국민은 당국의 감시를 피해 서방 방송을 시청했다.[278] 라이프치히 중앙 청소년 연구소에 따르면, 1976년부터 1988년 사이에 매일 서독 텔레비전만 시청하는 청소년의 수는 14%에서 56%로 증가했다.[278] 작센 지방 등 일부 지역에서는 서독 전파가 도달하지 않았지만, 드레스덴 시민 중에는 서독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여러 단체의 협력을 받아 위성 방송 수신 장치를 설치한 사람도 있었다.[278]

7. 4. 영화

동독의 영화 산업은 1946년 설립된 DEFA(Deutsche Film AG, 독일 영화 주식회사)가 주도했다.[284] DEFA는 약 900편의 장편 영화, 800편의 애니메이션 영화, 3000편 이상의 다큐멘터리와 뉴스 영화를 제작했다.

DEFA는 특히 어린이 영화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차가운 심장》(Das kalte Herz, 1950), 《학교 유령》(Spuk unterm Riesenrad, 1979) 등이 있다.

프랑크 바이어 감독의 《거짓말쟁이 야곱》(Jakob der Lügner, 1975)과 《5개의 탄피》(Fünf Patronenhülsen, 1960)는 국제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하이너 카로의 《폴과 파울라의 전설》(Die Legende von Paul und Paula, 1973), 콘라트 볼프와 볼프강 콜하제의 《솔로 써니》(Solo Sunny, 1980) 등 일상생활을 다룬 영화들도 인기를 끌었다.

동독은 서부극 스타일의 영화도 제작했는데, 이 영화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긍정적으로 묘사하여 주목받았다. 대표적인 배우로는 고이코 미티치가 있으며, 딘 리드도 출연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에는 동독의 삶을 다룬 영화들이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굿바이 레닌!》(Good Bye, Lenin!, 2003), 《타인의 삶》(Das Leben der Anderen, 2006), 《슈가(Zucker!, 2004) 등이 있다.

7. 5. 스포츠

동독은 다른 소련식 사회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위신을 걸고 선수 강화책을 시행했다. 소위 "스테이트 아마추어" 선수들은 사이클, 역도, 수영, 체조, 육상, 복싱, 피겨 스케이팅, 동계 스포츠 등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다수 획득하여, 특히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에는 미국을 제치고 세계 2위의 스포츠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의 이면에는 인권과 인격을 무시한 선수 육성, 스테로이드를 중심으로 한 조직적인 도핑, 슈타지에 의한 스포츠 관계자 감시 및 협력 요원화 등의 문제가 존재했다. 특히, 국가 주도의 약물 프로그램은 합성 스테로이드 검출 빈도를 높였고, 청소년 육성 시스템을 통해 국제적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종목의 스포츠 클럽을 지원했다. 통일 이후 이러한 문제들이 드러나면서 동독 스포츠의 경기력은 저하되었다.

축구는 동독에서 인기 있는 스포츠였으며, 마티아스 자머울프 키르스텐 등은 통일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동독과 서독 간의 스포츠 경쟁도 치열했는데, 1974년 FIFA 월드컵에서는 동독이 서독을 1-0으로 이기기도 했다.

동독은 팽창실 기술을 개발하여 모터사이클 경주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에른스트 데그너의 망명으로 인해 이 기술이 일본으로 유출되기도 했다.

  • 동독 오베르리가
  • 동독 축구 국가대표팀
  • 1. FC 디나모 드레스덴(1. FC Dynamo Dresden)
  • 베를리너 FC 디나모(Berliner FC Dynamo)
  • 디나모(Dynamo) (민중국가보안부 계열 스포츠 클럽)
  • SV 디나모(SV Dynamo) (Sportvereinigung Dynamo) - 슈타지(Stasi) 내 스포츠 클럽들

7. 6. 공식 및 공휴일

날짜한국어 표기현지어 표기비고
1월 1일신정Neujahrde
3월 1일국가인민군 기념일Tag der Nationalen Volksarmeede
3월 8일국제부녀절Tag der Fraude
이동절성금요일Karfreitagde
이동절부활절Ostersonntagde
이동절부활절 다음 날Ostermontagde
5월 1일메이데이Tag der Arbeitde
이동절아버지의 날/주님 승천일Vatertag / Christi Himmelfahrtde부활절 후 다섯 번째 일요일 후 목요일
이동절성령강림절Pfingstmontagde부활절 후 50일 후
10월 7일공화국 기념일Tag der Republikde건국기념일
12월 25일크리스마스1. Weihnachtsfeiertagde
12월 26일성탄절 다음 날2. Weihnachtsfeiertagde


8. 유산

1990년 독일의 재통일 이후, 구 동독 지역은 여러 가지 변화와 문제점을 겪었다.

통일 당시 동독의 고속도로, 철도, 하수 시스템 및 공공 건물 대부분은 낙후된 상태였다.[256] 동독 지역의 방치와 침체를 만회하기 위해 통일 독일이 투입해야 했던 막대한 공공 지출 규모가 컸다. 그라이프스발트 원자력 발전소는 사고 위험과 서방 안전 기준 미달로 인해 폐쇄되었다.[256]

동독은 위르겐 코카(Jürgen Kocka)와 같은 역사학자들에 의해 독재 국가로 간주된다.[284] 학교 교육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 주입이 의무화되었고, 정부, 사법 기관, 학교 임직 지원자들은 사상 검증을 받아야 했다. 스메르시와 같은 비밀경찰 조직이 인민을 감시했고, 엄격한 검열로 출판과 방송 접근이 제한되었다.

1948년 티토-스탈린 결렬 당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은 소련을 추종하는 독재 정당으로 변모했다. 중요한 결정은 소련 공산당 중앙 위원회나 스탈린의 지시를 거쳐야 했다. 1949년 초, 소련식 정치국이 SED를 지배하게 되었고, 같은 해 10월 7일, 독일 민주 공화국 건국이 선포되었으나, 소련은 동독 정부에 행정권만 부여하고 자치권은 주지 않았다.

통일 이후 구 동독 지역 주민들의 삶은 급격한 변화를 겪었고, "오스탈기(Ostalgie)"라는 동독 시절의 문화와 상품에 대한 향수 현상도 나타났다.

동서독 간 경제적, 사회적 격차는 현대 독일 선거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구 동독 지역에서는 좌파당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나는 경향을 보인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1950년 동독 시민의 85%는 프로테스탄트였고, 10%는 가톨릭 신자였으나,[138] 1989년에는 프로테스탄트 25%, 가톨릭 5%, 무종교 70%로 변화했다.[138] 이는 동독 정부의 국가무신론 정책의 영향으로 분석된다.

1950년 동독의 종교 구성비[138]
종교비율
프로테스탄트85%
가톨릭10%
무종교5%



1989년 동독의 종교[138]
종교비율
프로테스탄트25%
가톨릭5%
무종교70%


8. 1. 낡은 인프라

통일 당시 동독의 고속도로, 철도, 하수 시스템 및 공공 건물 대부분은 낙후된 상태였다.[256] 동독 지역의 방치와 침체를 만회하기 위해 통일 독일이 투입해야 했던 막대한 공공 지출 규모가 컸다. 그라이프스발트 원자력 발전소는 사고 위험과 서방 안전 기준 미달로 인해 폐쇄되었다.[256]

8. 2. 권위주의

동독은 위르겐 코카(Jürgen Kocka)와 같은 역사학자들에 의해 독재 국가로 간주된다. 코카는 동독이 독재 국가로 간주될 수 있는 이유와 그 의미에 대한 학계의 합의를 이끌어 냈다.[284] 동독에서는 학교 교육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 주입이 의무화되었고, 교수들과 학생들은 서방으로 탈주하기도 했다. 정부, 사법 기관, 학교 임직 지원자들은 사상 검증을 받아야 했다. 스메르시와 같은 비밀경찰 조직이 인민을 감시했고, 엄격한 검열로 출판과 방송 접근이 제한되었다.

1948년 티토-스탈린 결렬 당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은 소련을 추종하는 독재 정당으로 변모했다. 중요한 결정은 소련 공산당 중앙 위원회나 스탈린의 지시를 거쳐야 했다. 1949년 초, 소련식 정치국이 SED를 지배하게 되었다. 1949년 10월 7일, 독일 민주 공화국 건국이 선포되었고, 소련은 동독 정부에 행정권은 부여했지만 자치권은 주지 않았다.

8. 3. 오스탈기

1990년 독일 재통일 이후, 구 동독 지역 주민들의 삶은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통일 초기에는 동독 체제가 붕괴하고 서독의 발전된 체제가 도입되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는 부분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뀌었다.

서독인들은 동독인들을 "오시(Ossi)"라고 부르고, 동독인들은 서독인들을 "베시(Wessi)"라고 부르며 서로를 구분짓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구분은 단순한 지역 차이를 넘어, 서로 다른 체제에서 살아온 경험과 가치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을 반영했다.

특히, 동독 여성들은 서독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서독의 더 나은 경제적 기회와 자유로운 분위기를 찾아 떠난 결과였다. 반면, 교육 수준이 낮고 실업 상태에 놓인 남성들은 동독 지역에 잔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현상은 동서독 간의 사회적, 경제적 격차를 심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일부 사람들은 동독 시절을 옹호하며, 당시의 사회적 안정성과 공동체 의식을 그리워했다. 이러한 경향은 "오스탈기(Ostalgie)"라는 현상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동독 시절의 문화와 상품에 대한 향수를 의미한다. 오스탈기는 단순한 추억을 넘어, 통일 이후 급격한 변화에 대한 불만과 소외감을 반영하는 사회적 현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클라우스 슈뢰더(Klaus Schroeder)와 같은 학자는 오스탈기에 대해 경고하며, 동독 시절의 억압적인 체제와 인권 침해를 미화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오스탈기가 과거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미래를 건설적으로 논의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2023년 여론 조사에 따르면, 구 동독 지역 주민들의 상당수는 자신들을 "동독인"으로 인식하며, 통일 독일 내에서 여전히 차별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통일 이후에도 동서독 간의 사회적, 문화적 통합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 차이는 독일 사회 내에서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8. 4. 선거 결과

동서독 간 경제적, 사회적 격차는 현대 독일 선거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구 동독 지역에서는 좌파당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극우 정당인 독일 국가민주당(NPD)은 2000년대에 작센주 의회와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 의회에서 의석을 확보하기도 했다.[251]

8. 5. 인구 통계

1950년 동독 시민의 85%는 프로테스탄트였고, 10%는 가톨릭 신자였다.[138] 1989년까지 기독교 교회의 회원 수는 크게 감소하여, 프로테스탄트는 인구의 25%, 가톨릭은 5%를 차지했다. 자신을 비종교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비율은 1950년 5%에서 1989년 70%로 증가했다.

1950년 동독의 종교 구성비[138]
종교비율
프로테스탄트85%
가톨릭10%
무종교5%



1989년 동독의 종교[138]
종교비율
프로테스탄트25%
가톨릭5%
무종교70%


8. 6. 종교

1949년 당시 동독 국민의 92%가 어떤 형태로든 기독교 교회에 속해 있었으나, 1988년에는 그 비율이 약 40% (약 660만 명)로 감소했다.[239] 이는 동독 정부가 신앙의 자유를 헌법으로 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영향력을 억제하고 특히 젊은이들을 종교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240]

동독 정부는 통일 이전 동독 지역의 교회 청년 조직을 자유독일청년단의 경쟁 상대로 간주하여 탄압했다.[241] 1953년에는 교회 청년단 활동이 범죄로 규정되어 학교나 대학에서 제적되거나 체포되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다.[242] 비록 이 조치는 같은 해 6월에 철회되었지만, 신앙을 공개적으로 밝힌 기독교인은 대학 진학이나 국가 주요 직책에 임명될 기회가 제한되었다.[243]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동독 지역은 독일 내에서도 무신론자 비율이 서독보다 높게 나타났으며, 이는 국가무신론 정책의 영향으로 분석된다. 무종교는 특히 젊은 독일인들 사이에서 흔하게 나타난다.

동독에는 개신교 교회가 가장 큰 종교 조직이었으며, 1969년부터 정치적인 이유로 8개의 지방 교회가 독일복음주의교회에서 분리되어 동독복음교회 연맹으로 통합되었다.[244] 가톨릭교회 외에도 동독 복음주의 자유교회 연맹, 독일 자유복음주의교회 연맹, 감리교회, 모라비아 형제단,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메노나이트, 퀘이커 등 다양한 자유교회들이 존재했다.[245] 복음 루터파 자유교회, 구 루터 교회, 동독 복음 개혁 교회 등도 있었다.[246]

유대교 교회도 존재했으며, 1980년대 이후에는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신앙 단체도 산발적으로 나타났다.[247]

신자 수는 현저히 감소했지만, 동독 정치는 기독교회의 독자성을 완전히 억누르지 못했다.[248]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반쯤 공개된 모임 장소로 여겼고, 신앙과 무관하게 교회 공간을 활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동독의 평화 혁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249]

9. 설명 참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포츠담 조약에 따라 독일은 프랑스, 영국, 미국, 소련 4개국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오데르-나이세선 동쪽의 비옥한 독일 영토는 대부분 소련의 지배를 받는 폴란드령이 되었다. 소련군 장군들은 동독 지역에서 조직적인 약탈과 성폭력을 자행했고, 이에 대한 정치적 반대가 일어났다.[281][282][283]

1945년 6월, 스탈린은 소련 점령 지역의 독일 공산주의 지도자들에게 영국 점령지에서의 영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미국이 철수하면 독일 전체를 소비에트 세력권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1946년 초, 스탈린은 불가리아와 유고슬라비아 대표단에게 독일이 소비에트 공산주의화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공장, 장비, 기술자, 경영자 등은 강제로 소련으로 이전되었다.

동독에서 집권 공산당의 주요 임무는 소련의 명령을 행정 기관에 전달하고, 이를 자체적인 주도로 위장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소련 당국은 독일 공산당독일 사회민주당을 강제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으로 합병했다. 1946년 독일의 소련 점령 지역 선거에서 SED는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는데, 이는 소련 당국이 반대 세력을 억압하고 경쟁 정당들의 농촌 지역 참가를 막았기 때문이다. 재산과 산업은 국유화되었다.[284]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 주입이 학교 교육 과정에서 강제되었고, 교수와 학생들은 서방으로 탈주했다. 정부, 사법 기관, 학교 임직 지원자들은 사상 검증을 받아야 했다. 스메르시 등 정치 경찰 조직이 인민을 감시했고, 엄격한 검열로 출판과 방송 접근이 제한되었다.

1948년 티토-스탈린 결렬 당시 SED는 소련을 추종하는 독재 정당으로 변화했다. 중요 결정은 소련 공산당 중앙 위원회나 스탈린 개인의 지시를 거쳤다. 1949년 초, 소련식 정치국이 SED를 지배하게 되었다.

1949년 10월 7일, 독일 민주 공화국 건국이 선포되었고, 소련 외무부는 동독 정부에 행정권을 부여했으나 자치권은 주지 않았다.[285][286] 서독미국의 영향을 받아 나토에 가입하고 자본주의 체제가 된 반면, 동독은 소련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식 사상으로 채택하고 바르샤바 조약에 가입했다.

동독 초대 공산당 서기장은 발터 울브리히트였으며, 동독을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공화국"으로 규정했다. 울브리히트는 농업 집단화, 시장과 이윤제 개념 도입 등 신경제 정책을 채택했다. 그의 사망 후 빌리 슈토프를 거쳐 에리히 호네커가 권력을 계승하였다.

1953년 6월 17일, 동베를린에서 노동자들이 생산량 증가 명령에 항의하는 시위를 일으켰고, 이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다음날, 소련군이 무력 진압하여 수백 명이 희생되었다. 많은 동독 시민들이 서독으로 탈출했고, 동독 정부는 1961년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여 국경을 폐쇄했다. 비밀경찰 슈타지는 시민들을 감시하고 동독 탈출 계획을 밀고하게 했다.

1989년 8월, 헝가리가 국경을 개방하자 많은 동독 시민들이 헝가리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탈출했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평화적 시위가 라이프치히 광장에서 시작되어 에리히 호네커[290]를 사임하게 만들었고, 10월에는 에곤 크렌츠가 서기장이 되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2월 22일 브란덴부르크 문이 개방되면서 동독의 사회주의 체제는 붕괴되었다. 2+4 회담을 통해 양 독일과 제2차 세계 대전 승전국들은 독일 통일에 동의했다.

1990년 10월 3일, 동독 정부는 공식 해체되었고, 동독은 재통일된 독일 연방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9. 1. 일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포츠담 조약에 따라 프랑스, 영국, 미국, 소련독일을 4개로 분할하여 관리하기로 하였다. 독일의 비옥한 지역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오데르-나이세선 동쪽의 독일 영토 대부분은 소비에트가 지배하는 폴란드령으로 넘어갔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소련 군대 장군들이 분할된 독일의 소련 통치 지역에서 조직적으로 강탈과 성폭력(성폭력 희생자 수는 만 명에서 2백만 명에 이른다.[281][282][283])을 일삼자 곧 정치적 반대가 일어났다.

독일의 동서 분할


1945년 6월 회담에서 스탈린은 소련 점령 지역의 독일인 공산주의 지도자에게 영국 점령지에서 영국의 위치를 점차 잠식하고, 미국이 1, 2년 내에 철수하며, 독일 전체가 소비에트권의 공산주의자 통치로 들어올 수 있도록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1946년 초 스탈린과 다른 지도자들은 불가리아와 유고슬라비아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 독일이 소비에트 공산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공장, 장비, 기술자, 경영자, 능력있는 요인들이 강제로 소련으로 이전되었다. 소비에트의 간섭을 받는 여타 중앙유럽과 마찬가지로 동독에서의 집권 공산당의 주요 임무는 소련의 명령을 행정 기관에 하달하고, 블록의 다른 세력에게는 이를 자신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위장하는 일이었다.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소비에트 당국은 강제로 독일 공산당사회민주당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으로 합병하였는데, 이 때 이 당이 마르크스-레닌주의도 아니고, 소비에트 지향도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은 1946년 독일의 소련 점령 지역 선거에서 - 소비에트 당국은 반대 세력을 억압하고 여러 경쟁 정당들이 농촌 지역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막았지만 - 겨우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였다. 재산과 산업은 정부 소유로 되었다.[284] 정해진 선을 넘어서는 발언이나 행동을 한 사람은 견책을 당하고, 여러 사람들이 보지 않는 데서 심문, 고문 심지어 처형 등 처벌이 따랐다. 학교 교육에서도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을 주입하는 것이 학교 교육 과정에서 강제 사항이 되어 교수들과 학생들이 서방으로 탈주하였다. 정부나 사법 기관 혹은 학교에 임직하려는 지원자는 사상 검증을 받아야 하였다. 스메르시 등 정교한 정치 경찰 조직이 면밀하게 인민을 감시하였다. 엄격한 검열 제도 때문에 출판과 방송을 접하는 데도 제한이 따랐다.

공산주의자가 아닌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반대 세력에게도 첩자가 잠입하여 소비에트의 통합을 지원하기 위하여 이들과 서방 점령 지역 내 "부르주아" 세력의 관계를 이용하였는데, 그러면서도 한편 사회주의통일당의 배후에서 과거 나치 세력과 전문 군 장교를 규합하기 위하여 독일 국가민주당(NDPD)이 창설되었다. 1948년 초 티토-스탈린 결렬 당시 사회주의통일당은 소련을 추종하는 어용 독재 정당으로 변화하였다. 중요한 결정은 소련 공산당 중앙 위원회 기관이나 혹은 심지어 스탈린 한 사람의 지시를 거쳐야 하였다. 1949년 초 사실상 내부에서 자신들이 스스로 선출하는 소수 집단인 소련식 정치국이 사회주의통일당을 지배하게 되었다. 1949년 10월 7일 독일 민주공화국의 건국이 선포되었으며, 이때 소련 외무부에서 동독 정부에 행정권을 부여하였으나, 자치권은 주지 않았으며, 점령 정권에 소련의 무제한적인 권한이 행사되며, 내각, 군부, 비밀경찰 조직에 소비에트 세력을 심어놓았다.[285][286]

서독미국의 영향을 받아 나토에 가입하고 자본주의 체제가 되었다면, 동독은 소련의 영향을 받아 공식적인 사상으로 사회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받아들였고, 바르샤바 조약에 가입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 동서로 분할된 독일이 재통일하는 것은 사실상 곤란하게 여겨졌다. 동독의 공산당은 1946년 사회민주당과 합병해서 사회주의통일당을 결성하고, 이의 지도에 의하여 기독교민주동맹 등 4개 정당이 국민통일전선으로 결집했다. 소련군 점령 밑에 있었던 동독은 1949년 10월에 독일 민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동독 초대 공산당 서기장은 스탈린주의자 발터 울브리히트였으며, 동독을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공화국"으로 규정했다. 울브리히트는 농업집단화, 시장과 이윤제의 개념 도입 등의 신경제정책을 채용했다. 그의 사망 후 슈토프에 이어 호네커가 권력을 계승하였다. 마셜플랜의 결과로 서독 경제가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게 되자, 동독도 이의 영향을 받아 1953년 6월 17일, 모든 생산량을 10%로 늘리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노동자들이 이에 항의, 동베를린에서 노동자들이 시위를 일으켰다. 이 시위는 전국을 휩쓸었다. 다음날, 소련군보병포병을 이끌고 시위를 무력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시위에 참가한 수백 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동독의 동독 시민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 가중됨에 따라, 많은 숫자의 동독 시민들이 동독을 벗어나 서독으로 탈출했다. 이로 인해 동독의 경제건설이 곤란을 받게 되자 동독 정부는 국경을 철조망, 포탑, 군견들과 1961년 건설된 베를린 장벽을 포함한 거대한 벽으로 폐쇄하였다. 비밀경찰이었던 슈타지는 시민들 사이에 첩보원을 심어 동독 탈출 계획 등을 밀고하게 하였다.

한국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북한은 독일민주공화국에 유학생들을 보내어 공업을 배우도록 했으며, 고아들도 독일민주공화국에 가서 공장에서 일함으로써 기술을 익혔다.[287] 슈타지는 도청과 감시로 악명높았으며,[288] 통일 직전까지 약 10만 명의 슈타지 요원들이 활동하였다. 통일 직전에는 슈타지 요원이 동독 시민들에게 거리에서 맞는 일도 있었으며, 슈타지 본부가 시민들에게 점령당한 사건도 발생하였다. 당시 슈타지에서는 독일 재통일이 임박하자, 문서를 제거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시민들에게 문서 자루를 뺏겼다. 독일 정부는 과거사 조사 목적으로 슈타지가 옛 동독 시민들에게 뺏긴 옛 슈타지 문서들을 컴퓨터로 복원할 계획이다.[289]

1989년 8월, 헝가리가 국경을 개방하자 많은 동독 시민들이 같은 사회주의 국가라 다른 나라들보다 통행의 자유가 있던 헝가리와 중립국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탈출했다. 다른 많은 시민들은 집권당이었던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에 대해 민주주의를 요구하면서 평화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라이프치히 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시작으로 마침내 이 시위는 독일 민주공화국 정권 수립 40주년을 성대하게 기념하면서 동독 사회주의 체제의 건재함을 선보이던 에리히 호네커[290]를 사임하게 만들었고, 10월에는 동독의 서기장이 에곤 크렌츠로 바뀌었다.

1989년 11월 9일,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리고 12월 22일에는 브란덴부르크 문이 다시 개방되었고, 동독의 사회주의 체제는 무너졌다. 2+4 회담을 통해, 양 독일과 제2차 세계 대전 승전국들은 독일 통일에 동의했다.

1990년 10월 3일에는 동독 정부가 공식 해체되었고, 동독은 재통일된 독일 연방공화국으로서 유럽 연합에 가입한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였다. 통일 이후 동독의 영토는 5개의 주로 다시 나뉘었다. 주민은 독일인으로, 독일어를 사용하였다. 동독 지역에서도 러시아인, 폴란드인 등 여러 민족들이 섞였고, 1994년까지 소련군이 동독에 주둔해 있었다.

동독의 인민경찰


동독의 제1집권당은 ''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SED)이었다. 1946년에 독일 공산당(KPD)과 독일 사회민주당(SPD)이 통합된 형태이다. 통일 이후에도 SED는 민주사회당(PDS)으로 이름을 바꾸고 현재는 좌파당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다.

다른 정당들은 SED에 의해 통제되는 국가 전선 연합에 소속되어 있었고, 동독 국회 선거를 위해 세워졌다.

# ''Christlich-Demokratische Union Deutschlands'' (기독교 민주연합, CDU), 통일 후 서독의 CDU와 통합

# ''Liber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독일 자유민주당, LDPD), 통일 후 서독의 FDP와 통합

# ''Nation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독일 국가민주당, NDPD)

# ''Demokratische Bauernpartei Deutschlands'' (독일 민주 농업인당, DBD)

1949년부터 1952년까지는 5개 주(브란덴부르크주,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 작센주, 작센안할트주, 튀링겐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52년 7월 25일에 실시된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5개 주가 폐지되었으며 14개 구(Bezirkde)가 신설되었다. 이 때에 신설된 14개 구는 게라 구, 노이브란덴부르크 구, 드레스덴 구, 라이프치히 구, 로스토크 구, 마그데부르크 구, 슈베린 구, 에르푸르트 구, 줄 구, 카를마르크스슈타트 구, 콧부스 구, 포츠담 구, 프랑크푸르트 구, 할레 구였다. 이들 구는 하위 행정 구역인 군(Kreisede)과 시(Stadtkreisde)로 나뉘었으며 구의 이름은 각 구의 구청 소재지에서 유래된 이름이었다. 수도 동베를린1961년에 구와 동등한 행정 구역으로 승격되었다.

1990년 7월 22일 인민의회가 채택한 법률에 따라 14개 구가 폐지되었으며 5개 주(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 브란덴부르크 주, 작센 주, 작센안할트 주, 튀링겐 주)가 신설되었다. 이 법률은 1990년 10월 3일 독일의 재통일과 함께 시행되었으며 1990년 10월 14일을 기해 주 정부가 신설되었다.

돼지를 사육하고 있는 동독의 한 농가


동독의 광부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동독의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다. 수많은 젊은이를 전쟁으로 잃었고, 산업과 교통이 파괴되어 많은 피난민이 발생했다. 동독이 소련에 대한 배상금을 지급할 수 없게 되자, 소련이 동독의 경제정책을 장악하게 되었다. 소련의 붉은 군대는 기존의 산업기반을 해체하고 소련으로부터 산업기반시설과 산업설비를 들여와 동독의 산업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동독의 경제는 소련 경제에 예속되게 되었다. 1950년대 초반에 소련에 대한 배상금이 각종 곡물과 소비재 공업생산품으로 지급되었다. 또,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독일이 영유하고 있었던 남부 슐레지엔과 슈테틴에 걸쳐있는 탄전지대와 부동항이 스탈린의 결정에 의해 폴란드로 귀속되게 되었다.

동독의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형태는 소련의 형태와 유사했다. 동독은 1950년에 경제상호원조회의(코메콘)에 가입하였다. 1985년의 동독의 경제 통계에 의하면 사회협동기업의 수입이 국가 전체 수입의 96.7%를 차지하였다. 동독 경제당국은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 안정화를 보장하기 위하여 예산 지출의 80%를 사용하였다. 1976년의 동독의 GDP 성장률은 5%대였다.

동독의 주요 수출품은 프락티카(Praktica)브랜드의 사진기 및 IFA에서 제조한 트라반트(Trabant) 브랜드의 소형 승용차, 바르트부르크(Wartburg) 브랜드의 중대형 승용차와 사냥용 소총, 육분의, 손목시계 등 이었다.

1960년대까지 동독은 설탕이나 커피와 같은 식료공업품의 부족을 경험하였다. 동독 경제당국은 서독과의 교역과 서방 국가의 외환을 획득하기 위해, 동독 인민들이 동독 국립은행(Staatsbank)을 통해 서독의 은행에 외환 계좌를 개설할 수 있도록 하였고, 특별 외환상점(Intershop)에서 외환을 주고 서방 국가의 물품이나 동독에서 제조된 수출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독 인민들은 우편제도를 이용하여 외국에서 다양한 소비재를 구입할 수 있었으며, 야우어푸드(Jauerfood) 사를 통해 동독 화폐로 외국의 식료품을 구입할 수도 있었다.

동독 정부는 통화와 시장가격을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였다. 동독 정부는 정규 급여 이외에 여러 상품과 서비스를 구입할 수 있는 여러 보조급여를 지급했으며, 이는 "제2의 급여"라고 불렸다. 이러한 동독의 정책은 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미쳤고, 서독과 동독의 경제 차이를 발생시켰다. 인위적인 가격 조절은 비효율적인 생산을 불러왔고, 물물교환이나 사재기 등의 비경제적인 경제활동이 나타나게 하였다. 이 때문에 많은 소비자들은 동독 화폐의 가치를 신뢰하지 못했으며, 동독 화폐를 서방 국가의 화폐로 교환하려는 경향을 나타냈다. 동독의 경제는 서독에서 제공하는 서방 국가의 화폐 대부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동독 인민들은 서독 마르크에 비해 동독 마르크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게 되었다.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은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했다.[212] 정치 체제는 소련식 사회주의였으며, 전형적인 일당제가 아닌 반파시즘을 최대 공약으로 한 다수 정당에 의한 의회 민주주의(인민 민주주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이 과두 정당으로서 지도권을 가지고 있었다.[213] SED 외에 4개의 정당이 존재를 허용되었지만, 위성 정당적인 성격이 강했다(헤게모니 정당제). 다수의 소비에트 연방군이 주둔하는 냉전 최전선이기도 했으며, 정치적·군사적으로는 소련의 위성국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제2차 세계 대전의 피해와 소련에 의한 배상금 징수를 극복하고, 1970년대까지 중앙·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서 가장 발전했다. 일반 가정에 대한 자동차 보급은 진전되지 않았고,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가전제품도 서구 제품에 비해 구식이었지만, 텔레비전에서는 다수의 광고가 방영되는 등 공산권에서는 보기 드문 소비 사회에 도달할 수 있는 생활 수준을 실현했다고 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동유럽 경제에서의 우등생”, “동유럽의 일본”이라고도 불렸다. 서구로의 유출로 심각해진 노동력 부족을 보완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여성의 사회 진출도 진전되어, 인민 의회 의원의 3분의 1, 교장은 5분의 1, 교사는 3분의 2, 시장은 5분의 1의 비율이 여성이었다.

그러나 국가보안성(슈타지)이라는 비밀경찰에 의한 국민 감시가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제한되었다. 슈타지는 직장이나 가정 내에 비공식 협력자(IM)를 배치하여 상호 감시의 그물을 펼쳤다. 또한 일정 기간 실직 상태로 있으면 체포되어(실업 죄) 직종 선택권이 없는 강제 노동이 부과되었다.

1970년대 이후에는 공공 투자가 진행되고, 일본 기업도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사회주의의 쇼윈도”였던 동베를린에는 고층 빌딩도 건설되었고, 생활 수준도 어느 정도 상승했지만, 서독에는 크게 뒤처졌고, 소비 재료 등의 공급이 적고, 중화학 공업 생산이 우선되었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신청하고 나서 7~8년 이상 기다리지 않으면 납차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부 소련 차량을 제외하고 수입차는 사실상 입수가 불가능했다. 한편, 경제 성장에 치우친 나머지 심각한 환경 문제 등을 일으켰다.

1980년대에는 재판에서 배심원 제도도 도입되어, 체제에 대한 불만에 대한 가스빼기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또한, 국가인민군에서 징병제 도입 직후 병역 거부자가 속출했기 때문에, 서독에 인권 존중의 면에서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을 국제적으로 어필하기 위해 양심적 병역 거부가 법적으로 인정되었고, 대체 복무가 제도화되었다. 1987년에는 사형을 폐지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전과 그에 따른 독일의 멸망으로 독일은 , , , 소 4개국에 의한 독일 점령 하에 놓였다. 하지만 전후 냉전 구조가 고착화되면서 4개국의 협조는 곧 어려워졌다. 1948년부터 미·영·불의 점령 지역에서 실시된 통화 개혁을 시작으로 정치·경제 양면에서 분단 국가 형성의 움직임이 나타났고, 소련 측도 베를린 봉쇄로 대응하여 동서독 분단은 결정적이 되었다. 1949년 9월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 건국을 받아 다음 해 10월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의 건국이 선포되었다.

명목상으로는 다당제가 채택되었지만, 실제로는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SED)의 일당 독재였으며, 계획 경제하에 1951년부터 제1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되었다. 계획 실행을 위해 중앙 집권화가 추진되었고, 연방제에 기반한 주는 폐지되어 14개의 현(Bezirk)으로 재편되었다.

1953년 3월 소련의 요시프 스탈린 사망은 동독 지도부를 동요시켰다. 또한 억압적인 정부의 태도에 반발하여 동베를린 노동자들의 시위가 발생하고, 이를 계기로 동독 각지에서 시민들이 반소 폭동을 일으켰다(6월 17일 사건). 그러나 소련군의 개입으로 진압되었고 60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융통성이 부족한 계획 경제·집단 농장화는 동독 경제를 마비시켰고, 조국의 미래를 비관한 사람들은 유일하게 국경이 열려 있던 베를린을 통해 서측으로 탈출하였다. 이에 젊은이, 지식인, 숙련 노동자 등의 유출이 심각해지자 정부는 1961년 8월 서베를린과의 경계를 완전히 봉쇄하고, 이 경계에는 곧 베를린 장벽이라고 불리는 벽이 건설되어 동서 냉전의 상징이 되었다. 이렇게 노동력 유출을 강제적으로 막은 덕분에 경제는 발전하여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에 "사회주의의 우등생"이라고 불릴 정도로 성장하였고, 1972년에는 서독과 기본조약을 체결하여 국교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1973년의 석유 파동 등으로 동구권 전체의 경제가 침체되는 가운데, 에리히 호네커 정권 하의 정치·경제도 침체·경직되었다. 1980년대 후반이 되면서 서독과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고, 국민들의 불만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 1989년 5월에 실시된 지방 선거에서 개표 부정이 드러나면서 국민들은 정부에 대한 불신을 더욱 강하게 품게 되었다. 더욱이 일련의 동유럽 혁명에 따라 다른 중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이 잇따라 민주화되자,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한 헝가리 등을 경유하여 국민들이 서독으로 대량 탈출하였다(판유럽 피크닉). 10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의 반정부 운동인 월요 시위에서 당국은 무력 진압을 피했고, 곧 호네커는 실각했다. 날마다 높아지는 국민의 민주화 요구에 동독 정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고, 마침내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의 개방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인 1990년에는 최초의 자유 선거에서 서독과의 통일을 주장하는 세력이 승리를 거두었고, 7월에는 통화 통합, 그리고 10월 3일에는 서독에 합병되는 형태로 동독은 소멸하고, 독일은 41년 만에 재통일되었다.

동독은 1948년 10월에 독일민주주의공화국 헌법을 초안하고, 1949년 10월 7일 (공화국의 날)에 건국되었다. 제2차 독일인민평의회가 잠정적인 인민의회로 성립되었고, 오토 그로테볼이 수상으로서 정부 수립을 담당했다.[216] 10월 11일, 그로테볼의 동료인 SED 의장 빌헬름 피크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동독은 현실 사회주의의 인민 공화국이었지만, SED뿐만 아니라 자유민주당이나 기독교민주연합(CDU)과 같은 "중도우파" 정당의 활동도 허용되었다. 하지만 CDU나 민주농민당, 자유민주당, 국가민주당은 위성 정당으로서 SED와 함께 국민전선을 구성했다. 공식적으로는 각료평의회가 동독 정부였지만, 실제로는 SED 중앙위원회 정치국이 권력 중추였다. 발터 울브리히트는 정치국 위원이었고, 1950년 이후에는 SED 중앙위원회의 서기장이 되었다. 더욱이 주독소련군 총사령부 육군 대장이었던 바실리 추이코프의 소련관리위원회는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217]

소련 정부는 1954년 3월 25일에 "소련은 다른 주권 국가와 마찬가지로 동독과도 평등한 관계"를 원한다고 설명했지만, 동독의 주권은 제한된 채로 남아 있었다. 사회사학자 한스-울리히 벨러는 당시 동독은 "소련 제국의 서부 전선 사트라프(지방 총독)"이었다고 말했다.[219][220]



Flag of Germany.svg|1949년-1959년 독일민주주의공화국의 국기. 당초에는 동서 양쪽 모두 같은 국기를 사용했다.

Bundesarchiv Bild 183-19000-3301, Berlin, DDR-Gründung, Wahl Pieck, Grotewohl.jpg|동독 건국 당시의 빌헬름 피크오토 그로테볼 (촬영: 1949년 10월 7일)

Bundesarchiv Bild 183-S90339, Berlin, DDR-Gründung, Regierung bei Tschuikow.jpg|소련 관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육군 대장 추이코프가 동독 정부 요인들을 맞이하고 있다 (촬영: 1949년 11월 11일)



인민의회의 첫 선거는 1950년 10월 15일에 결정되었고, 단일 명부에 기초하여 실시되었다. 헌법 발효 후 1년 이상 지나서야 날짜와 선거 방식이 결정된 것에 대해 CDU나 LDPD의 중도우파 정치인들은 반발했지만, 대신 신정부에서 높은 직위를 얻는 것으로 결착을 보았다.

9. 2. 역사 및 기억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포츠담 조약에 따라 독일은 프랑스, 영국, 미국, 소련 4개국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오데르-나이세선 동쪽의 비옥한 독일 영토는 대부분 소련의 지배를 받는 폴란드령이 되었다. 소련군 장군들은 동독 지역에서 조직적인 약탈과 성폭력을 자행했고, 이에 대한 정치적 반대가 일어났다.[281][282][283]

1945년 6월, 스탈린은 소련 점령 지역의 독일 공산주의 지도자들에게 영국 점령지에서의 영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미국이 철수하면 독일 전체를 소비에트 세력권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1946년 초, 스탈린은 불가리아와 유고슬라비아 대표단에게 독일이 소비에트 공산주의화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공장, 장비, 기술자, 경영자 등은 강제로 소련으로 이전되었다.

동독에서 집권 공산당의 주요 임무는 소련의 명령을 행정 기관에 전달하고, 이를 자체적인 주도로 위장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소련 당국은 독일 공산당독일 사회민주당을 강제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으로 합병했다. 1946년 독일의 소련 점령 지역 선거에서 SED는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는데, 이는 소련 당국이 반대 세력을 억압하고 경쟁 정당들의 농촌 지역 참가를 막았기 때문이다. 재산과 산업은 국유화되었다.[284]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 주입이 학교 교육 과정에서 강제되었고, 교수와 학생들은 서방으로 탈주했다. 정부, 사법 기관, 학교 임직 지원자들은 사상 검증을 받아야 했다. 소련의 스메르시 비밀 경찰 등 정치 경찰 조직이 인민을 감시했고, 엄격한 검열로 출판과 방송 접근이 제한되었다.

1948년 티토-스탈린 결렬 당시 SED는 소련을 추종하는 독재 정당으로 변화했다. 중요 결정은 소련 공산당 중앙 위원회나 스탈린 개인의 지시를 거쳤다. 1949년 초, 소련식 정치국이 SED를 지배하게 되었다.

1949년 10월 7일, 독일 민주 공화국 건국이 선포되었고, 소련 외무부는 동독 정부에 행정권을 부여했으나 자치권은 주지 않았다.[285][286] 서독미국의 영향을 받아 나토에 가입하고 자본주의 체제가 된 반면, 동독은 소련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식 사상으로 채택하고 바르샤바 조약에 가입했다.

동독 초대 공산당 서기장은 발터 울브리히트였으며, 동독을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공화국"으로 규정했다. 울브리히트는 농업 집단화, 시장과 이윤제 개념 도입 등 신경제 정책을 채택했다. 그의 사망 후 빌리 슈토프를 거쳐 에리히 호네커가 권력을 계승하였다.

1953년 6월 17일, 동베를린에서 노동자들이 생산량 증가 명령에 항의하는 시위를 일으켰고, 이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다음날, 소련군이 무력 진압하여 수백 명이 희생되었다. 많은 동독 시민들이 서독으로 탈출했고, 동독 정부는 1961년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여 국경을 폐쇄했다. 비밀경찰 슈타지는 시민들을 감시하고 동독 탈출 계획을 밀고하게 했다.

1989년 8월, 헝가리가 국경을 개방하자 많은 동독 시민들이 헝가리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탈출했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평화적 시위가 라이프치히 광장에서 시작되어 에리히 호네커[290]를 사임하게 만들었고, 10월에는 에곤 크렌츠가 서기장이 되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2월 22일 브란덴부르크 문이 개방되면서 동독의 사회주의 체제는 붕괴되었다. 2+4 회담을 통해 양 독일과 제2차 세계 대전 승전국들은 독일 통일에 동의했다.

1990년 10월 3일, 동독 정부는 공식 해체되었고, 동독은 재통일된 독일 연방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Bevölkerungsstand https://www.destatis[...] Statistisches Bundesamt
[2] 웹사이트 GDR https://wid.world/wo[...] World Inequality Database
[3] 간행물 Human Development Report 1990 http://hdr.undp.org/[...] 1990-01-01
[4] 웹사이트 Top-Level-Domain .DD http://internet.robe[...]
[5] 서적 The Workers' and Peasants' State: Communism and Society in East Germany Under Ulbricht 1945–71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02
[6] 서적 The Imperfect Union: Constitutional Structures of German Unificati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2
[7] 뉴스 Business America. (27 February 1989). German Democratic Republic: long history of sustained economic growth continues; 1989 may be an advantageous year to consider this marketBusiness Outlook Abroad: Current Reports from the Foreign Service. http://findarticles.[...] 1989-02-27
[8] 서적 Towards a Global Community of Historians: the International Historical Congresses and the International Committee of Historical Sciences 1898–2000 Berghahn Books 2005
[9] 서적 Civil Society & Dictatorship in Modern German History https://books.google[...] UPNE
[10] 학술지 The Wall You Will Never Know https://www.academia[...] MIT Press
[11] 뉴스 Three Top Commies Flee East Germany https://news.google.[...] 1953-01-23
[12] 뉴스 5 Flee East Germany https://news.google.[...] 1963-05-31
[13] 웹사이트 Eugene Register-Guard – Google News Archive Search https://news.google.[...]
[14] 뉴스 Files: 350 dies trying to flee East Germany https://news.google.[...] 1992-07-28
[15] 서적 Democratization in Eastern Europe Routledge
[16] 뉴스 Repeal the racist asylum laws http://www.newworker[...] 1997-08-29
[17] 뉴스 Krenz, Schabowski und Kleiber hatten sich nichts mehr zu sagen http://www.berlinonl[...] 2000-09-07
[18] 뉴스 Nationale Front in der Ostzone http://www.zeit.de/1[...] 1949-06-01
[19] 뉴스 Vom Sogenannten https://www.spiegel.[...] 1968-10-21
[20] 서적 Facts about Germany: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1959 – Germany (West) https://books.google[...]
[21] 서적 The Language of Human Rights in West Germany
[22] 서적 Worlds of Work: Building an International Sociology of Work Springer 2002
[23] 학술지 Ein Text in seinem Kontext https://www.research[...]
[24] 서적 The Sanctity of Rural Life: Nobility, Protestantism, and Nazism in Weimar Prussia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5] 서적 Political Romanticism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7
[26] 서적 The Stronghold of Junkerdom Fatherland Corporation 1918
[27] 학술지 Die DDR in der deutschen Geschichte https://www.ifz-muen[...] 2002-04-01
[28] 학술지 Die DDR in der deutschen Geschichte https://www.ifz-muen[...] 2002-04-01
[29] 웹사이트 Yalta Conference http://www.spartacus[...]
[30] 웹사이트 Allied Occupation of Germany, 1945-52 https://2001-2009.st[...] 2008-07-18
[31] 학술지 Entscheidung für die SED 1946 – ein Verrat an sozialdemokratischen Idealen?
[32] 웹사이트 LeMO Kapitel: Zwangsvereinigung zur SED http://www.hdg.de/le[...]
[33] 웹사이트 History 557 Lecture Notes http://web.ku.edu/~e[...]
[34] 서적 The German Question: The Stalin Note of 1952 and the Problem of Reunification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0
[35] 웹사이트 Review of Hoffmann, Dierk: ''Otto Grotewohl (1894–1964): Eine politische Biographie'' https://www.h-net.or[...] 2010-11-01
[36] 서적 Socialist Unity Party of Germany St. James Press
[37] 웹사이트 Political prisoners in the German Democratic Republic https://communistcri[...] 2020-11-24
[38] 서적 Russian Commands and German Resistance: The Soviet Occupation, 1945–1949 https://www.worldcat[...] P. Lang
[39] 서적 Russian Commands and German Resistance: The Soviet Occupation, 1945–1949 https://www.worldcat[...] P. Lang
[40] 서적 Constructing Socialism: Technology and Change in East Germany 1945–1990 https://www.worldcat[...]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41] 학술지 The 1952 Stalin Note on German Unification: The Ongoing Debate https://www.jstor.or[...]
[42] 서적 State Symbols: The Quest for Legitimacy in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and the German Democratic Republic, 1949–1959 Brill Academic Publishers
[43] 서적 Becoming East German: Socialist Structures and Sensibilities after Hitler Berghahn Books
[44] 서적 City Under Siege: The Berlin Blockade and Airlift, 1948–1949
[45] 서적
[46] 서적
[47] 웹사이트 East Berlin 17 June 1953: Stones Against Tanks http://www.dw-world.[...] 2007-05-16
[48] 학술지 Beria's Fall and Ulbricht's Survival
[49] 서적 The Russians in Germany: A History of the Soviet Zone of Occupation, 1945–1949 Harvard University Press
[50] 서적 Berlin Wall: A World Divided, 1961–1989 HarperCollins
[51] 서적 Contemporary Germany: Essays and Texts on Politics, Economics & Society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21-08-10
[52] 학술지 Soviet-GDR Relations in the Honecker Era
[53] 잡지 East Germany: The Price of Recognition https://web.archive.[...] 2011-10-21
[54] 서적 The Imperfect Union; Constitutional Structures for German Unificati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55] 서적 The Constitutional Jursiprudence of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Duke University Press
[56] 웹사이트 Texas Law: Foreign Law Translations 1973 https://law.utexas.e[...] University of Texas 2016-12-07
[57] 서적 Touring Beyond the Nation: A Transnational Approach to European Tourism History Ashgate Publishing
[58] 서적 Red Flag: A History of Communism Grove Press
[59] 웹사이트 À Buchenwald, les antifascistes ont perdu la guerre mémorielle https://www.monde-di[...]
[60] 서적 Erinnerungspolitik der DDR. Dargestellt an der Berichterstattung der Tageszeitung 'Neues Deutschland' über die Nationalen Mahn- und Gedenkstätten Buchenwald, Ravensbrück und Sachsenhausen Peter Lang
[61] 웹사이트 Antisémite, l'Allemagne de l'Est ? https://www.monde-di[...]
[62] 서적 L'Allemagne paiera
[63] 서적 L'Allemagne paiera
[64] 웹사이트 Die DDR als Zankapfel in Forschung und Politik https://www.bpb.de/t[...]
[65] 웹사이트 The Berlin Wall (1961–89) http://www.germannot[...] 2006-10-24
[66] 인터뷰 Interview, Austrian TV – ORF "Report" 2019-06-25
[67] 뉴스 Die Berliner Mauer begann im Burgenland zu bröckeln https://www.wienerze[...]
[68] 잡지 Paneuropäisches Picknick: Die Generalprobe für den Mauerfall
[69] 뉴스 Und dann ging das Tor auf https://www.zeit.de/[...]
[70] 잡지 Eiserner Vorhang: Picknick an der Grenze
[71] 뉴스 DDR-Massenflucht: Ein Picknick hebt die Welt aus den Angeln https://www.diepress[...] 2014-08-17
[72] 뉴스 Paneuropäisches Picknick – Mit dem Picknickkorb in die Freiheit https://www.sueddeut[...] 2010-05-17
[73] harvnb
[74] harvnb
[75] 서적 Berlin Journal W. W. Norton & Company 1992
[76] 서적 Collapse: The Accidental Opening of the Berlin Wall Basic Books 2014
[77] harvnb
[78] 서적 The Constitutional Jursiprudence of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Duke University Press
[79] 서적 The German Polity 2008
[80] harvnb
[81] 웹사이트 The Potsdam Conference, 1945 https://history.stat[...] 2024-10-06
[82] 웹사이트 1949-89: Volkskammer of the GDR (East-Germany) https://webarchiv.bu[...] 2024-10-06
[83] 서적 1989: The Struggle to Create Post-Cold War Europ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4
[84] 서적 Repainting the Little Red Schoolhouse: A History of Eastern German education, 1945–1995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85] 서적 Power and Society in the GDR, 1961–1979: The 'Normalisation of Rule'? Berghahn Books 2013-07
[86] 학술지 In the Shadow of the Third Reich: The 'Jugendstunde' and the Legitimation of Anti-Fascist Heroes for East German Youth 1996-02
[87] 논문 Antifascism & the Historical Identity of East German Youth, 1961–1989 2005-02-11
[88] 서적 Anatomy of a Dictatorship: Inside the GDR 1949–1989 Oxford University Press 1995
[89] 웹사이트 Free German Youth 1949–1990 (East Germany) http://flagspot.net/[...] Flagspot.net 2013-02-09
[90] 서적 Staatssozialismus und gesellschaftliche Differenzierung: eine empirische Studie LIT Verlag Münster 2006
[91] 웹사이트 The Rules of the Thälmann Pioneers http://www.calvin.ed[...] Calvin.edu 2013-02-09
[92] 서적 Youth Politics in East Germany: The Free German Youth Movement, 1946–1968 Clarendon Press 2004
[93] 서적 Youth Politics in East Germany: The Free German Youth Movement, 1946–1968 Clarendon Press 2004
[94] 서적 Moscow's Third World Strategy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7-08-26
[95] 서적 Undeclared Wars with Israel: East Germany and the West German Far Left, 1967–1989 Cambridge University Press
[96] 학술지 'At War with Israel': East Germany's Key Role in Soviet Policy in the Middle East
[97] 서적 The Road to Jerusalem: The Origins of the Arab-Israeli Conflict https://archive.org/[...] Macmillan
[98] 문서 Israel's struggle in the UN
[99] 웹사이트 The GDR and the PLO: East Germany's Palestine Policy https://www.berliner[...] 2018-04-28
[100] 학술지 'Tough negotiations'. The two Germanys in Syria and Iraq, 1963–74 https://www.tandfonl[...] 2023-02-14
[101] 학술지 Targeting the Periphery: The Role of Iceland in East German Foreign Policy, 1949–89 https://www.tandfonl[...] 2023-02-13
[102] 서적 Comrades in Arms: Military Masculinities in East German Culture https://books.google[...] Berghahn Books 2021-08-10
[103] 서적 Germany: A country study https://www.loc.gov/[...] Library of Congress. Federal Research Division
[104] 뉴스 East German Military: Warsaw Pact's Finest https://www.nytimes.[...] 2018-07-31
[105] 뉴스 The Stasi files: Germany's 600-million-piece puzzle https://www.cnn.com/[...] 2014-11-07
[106] 웹사이트 Stasi: The Untold Story of the East German Secret Police https://archive.nyti[...]
[107] 서적 Becoming East German: Socialist Structures and Sensibilities After Hitler Berghahn books 2015
[108] 서적 Becoming East German: Socialist Structures and Sensibilities After Hitler Berghahn books 2015
[109] 서적 The Conditions, Means and Methods of the MfS in the GDR: An Analysis of the Post and Telephone Control Cuvillier Verlag 2004
[110] 학술지 Power/Knowledge Failure: Epistemic Practices and Ideologies of the Secret Police in Former East Germany 2003
[111] 서적 The Conditions, Means and Methods of the MfS in the GDR: An Analysis of the Post and Telephone Control Cuvillier Verlag 2004
[112] 서적 The Stasi: Myth and Reality Pearson Education Limited 2003
[113] 서적 The Stasi: Myth and Reality Pearson Education Limited 2003
[114] 서적 Political Epistemics: The Secret Police, the Opposition, and the End of East German Socialism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1
[115] 서적 The People's State: East German Society from Hitler to Honecker Yale University Press 2008
[116] 웹사이트 The East German penal system in Torgau from 1950 to 1990 https://en.stsg.de/c[...]
[117] 웹사이트 After the fall: The hidden trauma behind the Berlin Wall https://irct.org/med[...] IRCT 2021-09-09
[118] 뉴스 'I've been shafted twice': Stasi victims and their quest for compensation https://www.theguard[...] 2019-11-06
[119] 학술지 Social policy as an institutional transformation problem 1996
[120] 서적 The Currency of Socialism: Money and Political Culture in East Germany 2007
[121] 웹사이트 Probleme der inneren Einigung https://www.bpb.de/t[...] 2009-03-26
[122] 서적 The Shortest History of Germany: From Roman Frontier to the Heart of Europe - A Retelling for Our Times https://books.google[...] The Experiment, LLC
[123] 서적 High Growth of an Underachiever? Walter de Gruyter GmbH & Co KG
[124] 서적 Oppression and Scarcity: The History and Institutional Structure of the Marxist-Leninist Government of East Germany and Some Perspectives on Life in a Socialist System https://books.google[...] Greenwood Publishing Group
[125] 뉴스 Ich liebe Thüringen, ich liebe Deutschland http://www.tagesspie[...]
[126] 웹사이트 East Germany: country population http://www.populstat[...] Populstat.info
[127] 웹사이트 The Power of Freedom: Central and Eastern Europe After 1945 http://www.poweroffr[...] Centre for European Studies 2010
[128] 웹사이트 Germany Population – Historical Background http://www.country-s[...] Country-studies.com
[129] 웹사이트 Destatis.de http://www.destatis.[...]
[130] 웹사이트 Population by area in 1,000 https://www.destatis[...]
[131] 웹사이트 Zusammenfassende Übersichten – Eheschließungen, Geborene und Gestorbene 1946 bis 2015 https://www.destatis[...] DESTATIS – Statistisches Bundesamt
[132] 웹사이트 Leipzig, Germany Population 1950–2019 https://www.macrotre[...]
[133] 웹사이트 Dresden, Germany Population 1950–2019 https://www.macrotre[...]
[134] 서적 The Statesman's Year-Book 1990–91 https://books.google[...] Springer 2016
[135] 학술지 The Limits Of Totalitarianism: God, State and Society in the GDR 1957-01
[136] 웹사이트 Dialogue as a Strategy of Struggle: Religious Politics in East Germany, 1957–1968 https://www.cambridg[...] Cambridge University Press
[137] 서적 East Germany: Continuity and Change https://books.google[...] Rodopi B.V.
[138] 서적 Christianity and the Encounter of the World Religions Columbia University Press 1963
[139] 문서 The Limits Of Totalitarianism: God, State and Society in the GDR
[140] 학술지 Konflikt und Kompromiss: Die Haltung der evangelischen Kirchen zu den gesellschaftlichen Veränderungen in der DDR am Anfang der fünfziger Jahre 1990
[141] 논문 Private Institutions in Service to the State: The German Democratic Republic's Church in Socialism 1982-03-01
[142] 웹사이트 Startseite - Manfred Stolpe https://manfred-stol[...] 2024-10-07
[143] 논문 The Impact of Two Reunification-Era Debates on the East German Sense of Identity https://www.jstor.or[...] 2004-01-01
[144] 서적 The East German State and the Catholic Church, 1945–1989 https://books.google[...] Berghahn Books 2015-10-14
[145] 서적 Routledge Companion to Central and Eastern Europe since 1919 https://books.google[...] Routledge, Taylor & Francis 2015-10-14
[146] 서적 Socialist modern: East German everyday culture and politics
[147] 웹사이트 The Secret of East German Censorship – Who's Watching Who? http://www.blogs.hss[...] 2017-12-15
[148] 웹사이트 Bericht auf wdr4.de vom 22. Juli 2007 http://www.wdr4.de/m[...] 2014-09-30
[149] 서적 Rocklexikon der DDR Schwarzkopf & Schwarzkopf
[150] 웹사이트 Informationen zu Chris Doerk http://www.aus-der-d[...] 2010-12-23
[151] 웹사이트 ROTE GITARREN – Die Offizielle Homepage http://www.rote-gita[...] 2017-12-15
[152] 웹사이트 Rote Gitarren http://www.deutsche-[...] 2017-12-15
[153] 웹사이트 Karel Gott http://www.ddr-tanzm[...] 2017-12-15
[154] 웹사이트 Omega http://www.deutsche-[...] 2017-12-15
[155] 웹사이트 Biografija: Muzičar Dado Topić http://www.opusteno.[...] 2017-12-19
[156] 서적 'Keeping it Real' in a Different 'Hood: (African-) Americanization and Hip-hop in Germany London
[157] 논문 From Krauts with Attitudes to Turks with Attitudes: Some Aspects of Hip-Hop History in German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10-01
[158] 서적 Theatre for the People: The Story of the Volksbühne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77-01-01
[159] 서적 Virtual Walls?: Political Unification and Cultural Difference in Contemporary Germany https://books.google[...] Boydell & Brewer 2017-01-01
[160] 뉴스 Interview With Conductor Kurt Masur: 'The Spirit of 1989 Has Been Exhausted' http://www.spiegel.d[...] 2010-10-12
[161] 웹사이트 Brecht Would Not Applaud His Theater Today https://www.nytimes.[...] 1976-01-11
[162] 서적 The Triumph of the Ordinary: Depictions of Daily Life in the East German Cinema, 1949–1989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63] 서적 Brecht and the GDR: Politics, Culture, Posterity Camden House 2011-01-01
[164] 서적 Brecht, Turkish Theater, and Turkish-German Literature: Reception, Adaptation, and Innovation After 1960 Boydell & Brewer 2018-01-01
[165] 서적 Daring to Play: A Brecht Companion Routledge 2012-01-01
[166] 서적 Brecht and Political Theatre: The Mother on Stage Clarendon Press 2006-01-01
[167] 뉴스 Benno Besson, 83, Director of Plays and Brecht Disciple, Is Dead https://www.nytimes.[...] 2006-02-25
[168] 웹사이트 Berlin East germany http://www.berlinsto[...]
[169] 웹사이트 Friedrichstadt-Palast https://www.palast.b[...]
[170] 웹사이트 Das BE{{snd}}ein Theater für Zeitgenossen http://www.berliner-[...] Berliner-ensemble.de
[171] 웹사이트 Deutsches Theater: Home http://www.deutsches[...] Deutsches-theater.de
[172] 웹사이트 Gorki.de http://www.gorki.de Gorki.de
[173] 웹사이트 Volksbühne Berlin http://www.volksbueh[...] Volksbuehne-berlin.de
[174] 서적 Representing East Germany Since Unification: From Colonization to Nostalgia https://books.google[...] Berg Publishers 2005-01-01
[175] 웹사이트 DEFA{{snd}}Stiftung{{snd}}Home http://www.defa-stif[...] Defa-stiftung.de
[176] 웹사이트 Filmdatenbank {{!}} Das Schulgespenst {{!}} Inhalt https://www.filmerns[...] 2022-10-07
[177] 서적 Stasi-Zensur-Machtdiskurse: Publikationsgeschichten und Materialien zu Jurek Beckers Werk Max Niemeyer Verlag 200
[178] 서적 The Women's Film, Konrad Wolf, and Defa After the "Biermann Affair": Solo Sunny (Konrad Wolf, 1980) https://doi.org/10.1[...] Palgrave Macmillan 2022-01-21
[179] 뉴스 Films And The Fall Of The Berlin Wall: A Cinematic History, Post-1989 https://www.forbes.c[...] 2019-11-05
[180] 간행물 Good Bye, Lenin!: Free-Market Nostalgia for Socialist Consumerism 2007-06-28
[181] 웹사이트 2006 Academy Award for "The Lives of Others" https://www.imdb.com[...] 2011-10-10
[182] 간행물 The politics of Ostalgie: post-socialist nostalgia in recent German film Oxford University Press 2007-12-01
[183] 뉴스 East German Doping Trial https://www.theglobe[...] 2019-09-05
[184] 문서 Hartgens and Kuipers (2004), p. 515
[185] 간행물 Anabolic steroids in sport: biochemical, clinical and analytical perspectives http://acb.rsmjourna[...] 2003-07
[186] 뉴스 Political Pressure Dismantles East German Sports Machine https://www.nytimes.[...] 2018-10-16
[186] 뉴스 Olympics; Coaches Concede That Steroids Fueled East Germany's Success in Swimming https://www.nytimes.[...] 2018-10-16
[186] 웹사이트 East German Dope Still Leaves Tracks http://www.rediff.co[...] 2008-05-12
[186] 서적 Faust's Gold: Inside the East German doping machine https://archive.org/[...] Thomas Dunne Books/St. Martin's Press 2001
[186] 웹사이트 Sports Doping Statistics Reach Plateau in Germany https://www.dw.com/e[...] Deutsche Welle 2018-10-16
[186] 뉴스 Drug Testing; East German Steroids' Toll: 'They Killed Heidi' https://www.nytimes.[...] 2018-10-16
[187] 웹사이트 1974 FIFA World Cup Germany, Germany FR https://www.fifa.com[...] 2017-01-27
[188] 웹사이트 30 years after the fall of the Berlin Wall, Germany recalls the economic gulf between East and West https://www.marketpl[...] NPR/Marketplace 2019-11-04
[189] 뉴스 '76 E. German Nuclear Incident Described https://www.latimes.[...] 1990-01-21
[190] 뉴스 East German nuclear plant demolition proves challenging https://www.dw.com/e[...] 2010-01-13
[191] 간행물 Remaking the East German Past: 'Ostalgie,' Identity, and Material Culture 2000-12
[192] 서적 That Was the Wild East: Film Culture, Unification, and the 'New' Germany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2015-10-14
[193] 서적 Fallen Elites: The Military Other in Post-Unification Germany https://books.goo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5-10-14
[194] 서적 The Transparent State: Architecture and Politics in Postwar Germany https://books.google[...] Psychology Press 2015-10-14
[195] 뉴스 Educated women leave east German men behind https://www.theguard[...] 2018-11-16
[196] 뉴스 Homesick for a Dictatorship: Majority of Eastern Germans Feel Life Better under Communism https://www.spiegel.[...] 2009-07-03
[197] 웹사이트 Rewriting ideal history: The Ostalgie expression in ''Goodbye, Lenin'' (2003) https://generic.word[...] 2020-07-09
[198] 뉴스 Ostalgia: Romanticizing the GDR https://www.dw.com/e[...] 2021-03-19
[199] 웹사이트 33 Jahre Wiedervereinigung https://www.infrates[...]
[200] 뉴스 What's 'wrong' with east Germany? Look to its long neglect by the wealthy west https://www.theguard[...] 2024-03-07
[201] 뉴스 Why is everyone in Germany talking about Thuringia and AfD? https://www.dw.com/e[...] 2021-03-18
[202] 웹사이트 Die Rechten ziehen in den Osten, Ausländer in den Westen https://katapult-mag[...] 2023-06-29
[203] 웹사이트 Ausländische Bevölkerung nach Ländern – bpb https://www.bpb.de/n[...] Bundeszentrale für politische Bildung 2017-11-12
[204] 웹사이트 Ausländeranteil in Deutschland nach Bundesländern http://www.laenderda[...] 2017-11-12
[205] 잡지 Only the Old Embrace God in Former East Germany http://www.spiegel.d[...] 2012-07-02
[206] 웹사이트 East Germany world's most godless area https://www.thelocal[...] 2021-12-31
[207] 뉴스 Why Eastern Germany is the Most Godless Place On Earth http://www.worldcrun[...] 2009-05-24
[208] 웹사이트 East Germany the 'most atheistic' of any region http://www.dialogint[...] Dialog International 2009-05-24
[209] 웹사이트 Eastern Germany: the most godless place on Earth http://www.worldcrun[...] 2009-05-24
[210] 뉴스 Only the Old embrace God in former East-Germany http://www.spiegel.d[...] 2009-05-24
[211] 문서 ベルリン、ドイツ民主共和国の首都 (Berlin, Hauptstadt der Deutschen Demokratischen Republik (DDR))
[212] 웹사이트 東ドイツ憲法第1条 http://www.documenta[...]
[213] 웹사이트 東ドイツ憲法第1条 http://www.documenta[...]
[214] 서적 社会主義の20世紀 第1巻 日本放送出版協会
[215] 서적 ニセドイツ〈1〉 ≒東ドイツ製工業品
[216] 서적 近代日本総合年表 第四版 岩波書店
[217] 웹사이트 Erklärung des Vorsitzenden der Sowjetischen Kontrollkommission zur Übergabe von Verwaltungsfunktionen an deutsche Behörden vom 11. November 1949 http://www.krr-faq.n[...]
[218] 웹사이트 Erklärung der Regierung der UdSSR über die Gewährung der Souveränität an die 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vom 25. März 1954 http://www.krr-faq.n[...]
[219] 서적 Deutsche Gesellschaftsgeschichte. Bd. 5: Bundesrepublik und DDR 1949–1990 https://books.google[...] C.H. Beck
[220] 서적 Deutschland auf dem Weg zu sich selbst. Eine Jahrhundertgeschichte. Hohenheim-Verlag
[221] 웹사이트 Vergessene Opfer an der Grenze http://www.focus.de/[...] 2012-01-15
[222] 웹사이트 Tote des 17. Juni 1953 http://www.17juni53.[...] 2008-11-12
[223] 서적 Der SED-Staat. Partei, Staat und Gesellschaft 1949–1990. München
[224] 서적 DDR. Grundriß der Geschichte 1945–1990. Hannover
[225] 서적 DDR. Grundriß der Geschichte 1945–1990. Hannover
[226] 서적 Der SED-Staat. Partei, Staat und Gesellschaft 1949–1990. München
[227] 서적 Der SED-Staat. Partei, Staat und Gesellschaft 1949–1990. München
[228] 서적 Kleine Geschichte der DDR. München
[229] 웹사이트 Milliardenspritze für den Mauerbauer http://einestages.sp[...]
[230] 서적 Kultur und Politik in der DDR 1945–1990. Köln
[231] 서적 DDR. Grundriß der Geschichte 1945–1990. Hannover
[232] 서적 Der lange Weg nach Westen. Bd. 2: Deutsche Geschichte vom „Dritten Reich“ bis zur Wiedervereinigung C.H. Beck
[233] 서적 Der SED-Staat. Partei, Staat und Gesellschaft 1949–1990. München
[234] 서적 Kultur und Politik in der DDR 1945–1990. Köln
[235] 웹사이트 Die Energiepolitik der DDR – Mängelverwaltung zwischen Kernkraft und Braunkohle http://epub.ub.uni-m[...]
[236] 웹사이트 Honecker: „Er meint die Mauer“ http://www.focus.de/[...]
[237] 서적 Der SED-Staat. Partei, Staat und Gesellschaft 1949–1990. München
[238] 서적 Kleine Geschichte der DDR. München
[239] 서적 Der SED-Staat. Partei, Staat und Gesellschaft 1949–1990. München
[240] 웹사이트 Ganz spitze Finger. http://www.spiegel.d[...]
[241] 웹사이트 Der Zorn wird täglich größer. http://www.spiegel.d[...] 1989-12-11
[242] 서적 Kleine Geschichte der DDR. München
[243] 서적 ヨーロッパ史入門 二つのドイツ1945-1990
[244] 서적 自由と統一への長い道 II 〜ドイツ近現代史 1933-1990年〜
[245] 서적 ’89・東欧改革―何がどう変わったか 講談社現代新書
[246] 서적 ベルリンの壁
[247] 서적 自由と統一への長い道 II 〜ドイツ近現代史 1933-1990年〜
[248] 서적 社会主義の20世紀 第1巻 日本放送出版協会
[249] 서적 ニセドイツ〈1〉 ≒東ドイツ製工業品 社会評論社
[250] 서적 もうひとつのドイツ 朝日新聞社
[251] 서적 もうひとつのドイツ
[252] 웹사이트 日本とドイツ民主共和国との外交関係設定についての外務省情報文化局発表 https://worldjpn.net[...]
[253] 서적 Ein ganz normales Leben. Alltag und Gesellschaft in der DDR. Darmstadt
[254] 서적 Ein ganz normales Leben. Alltag und Gesellschaft in der DDR. Darmstadt
[255] 서적 Ein ganz normales Leben. Alltag und Gesellschaft in der DDR. Darmstadt
[256] 웹사이트 20 Jahre nach dem Mauerfall – eine Wohlstandsbilanz http://www.insm.de/d[...]
[257] 서적 Geschäfte mit dem Klassenfeind. Die DDR im innerdeutschen Handel 1949–1989. Trier
[258] 간행물 Kraftfahrzeugtechnik
[259] 서적 ドイツ憲法集【第6版】 信山社
[260] 서적 ドイツ憲法集【第6版】 信山社
[261] 서적 ニセドイツ〈2〉 ≒東ドイツ製生活用品
[262] 서적 二つのドイツ 1945-1990
[263] 서적 二つのドイツ 1945-1990
[264] 서적 二つのドイツ 1945-1990
[265] 웹사이트 Asia’s largest BWE System in Operation - Success for Tenova TAKRAF’s Bucket Wheel Excavator System at Zhahanaoer Mine in China http://www.e-mj.com/[...]
[266] 서적 私は東ドイツに生まれた 東洋書店
[267] 웹사이트 Freikirchen in der ehemaligen DDR http://www.kas.de/wf[...]
[268] 서적 Der SED-Staat. Geschichte und Strukturen der DDR. München
[269] 서적 Theologische Realenzyklopädie. (TRE) DeGruyter, Berlin
[270] 서적 Kirchenpolitik von SED und Staat Vandenhoeck und Ruprecht, Göttingen
[271] 웹사이트 Mythos: „Die Kirchen waren in das System der SED-Diktatur integriert“ http://www.kas.de/wf[...]
[272] 서적 二つのドイツ 1945-1990
[273] 서적 ニセドイツ〈1〉 ≒東ドイツ製工業品
[274] 웹사이트 Blick über die Mauer: Medien in der DDR http://www.bpb.de/iz[...] 2013-02-17
[275] 웹사이트 In der DDR gab es keine freien und unabhängigen Medien, es herrschten staatliche Kontrolle und Genehmigungspflicht http://www.kas.de/wf[...] 2013-02-17
[276] 서적 ニセドイツ〈2〉 ≒東ドイツ製生活用品
[277] 서적 行ってみたい東ドイツ サイマル出版会
[278] 서적 ニセドイツ〈1〉 ≒東ドイツ製工業品 社会評論社
[279] 웹사이트 http://www.newsdiges[...]
[280] 웹사이트 동독의 1인당 GDP http://www.theodora.[...]
[281] 서적 The Miracle Years: A Cultural History of West Germany, 1949–1968
[282] 서적 Child of the Revolution Pathfinder Press 1979
[283] 서적 The Russians in Germany: A History of the Soviet Zone of Occupation, 1945–1949 Harvard University Press 1995
[284] 서적 The Two Germanies Since 1945: East and West Yale University Press 1987
[285] 서적 Stalin and the Cold War in Europe Rowman & Littlefield 2008
[286] 문서 동구권
[287] 뉴스 이동기의 현대사 스틸컷, 잔인하게 길었던 긴 이별 한겨레21 2015-06-26
[288] 웹사이트 독일서 ‘옛동독 추억 호텔’ 인기 http://www.hani.co.k[...] 한겨레 2007-08-14
[289] 웹사이트 ‘슈타지’ 비밀문서는 퍼즐? http://www.hani.co.k[...] 한겨레 2007-05-11
[290] 서적 먼나라 이웃나라 도이칠란트 편 김영사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