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터 (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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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센터는 농구에서 가장 키가 크고, 골대 근처에서 주로 활동하며, 득점, 리바운드, 수비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포지션이다. 1937년까지는 득점 후 점프볼을 통해 경기가 시작되어 키와 점프력이 좋은 선수가 유리했고, 이러한 선수들이 센터의 기원이 되었다. 1940년대 이후 2미터가 넘는 장신 센터들이 등장하면서 슛 블로킹과 골텐딩 규칙이 생겼고, 1960년대에는 빌 러셀과 윌트 체임벌린이, 1970년대에는 카림 압둘자바가 센터의 위상을 높였다. 1990년대에는 하킴 올라주원, 패트릭 유잉, 데이비드 로빈슨, 샤킬 오닐 등이 활약했고, 2000년대 이후에는 스트레치 5와 플레이메이킹 센터가 등장하며 센터의 역할이 변화했다. 여자 농구에서도 센터는 중요한 포지션이며, 울리아나 세묘노바, 리사 레슬리 등이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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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터 (농구) | |
---|---|
농구 포지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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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설명 | 농구에서 득점과 리바운드에 집중하는 포지션 |
신장 | 평균: (213cm) 범위: (193cm) ~ (231cm) |
역할 및 특징 | |
주요 역할 | 골밑 득점 리바운드 수비 |
일반적인 특징 | 큰 키와 힘 골밑 장악 능력 몸싸움에 능함 |
대표적인 선수 | |
선수 | 카림 압둘 자바 빌 러셀 샤킬 오닐 하킴 올라주원 드와이트 하워드 야오밍 A'ja Wilson |
전술적 중요성 | |
중요성 | 골밑 득점력으로 공격의 균형을 맞춤 리바운드로 공격 기회를 창출하고 수비를 강화 상대 팀의 득점을 저지하는 중요한 역할 수행 |
기타 | |
관련 용어 | 훅 슛 |
2. 역사
NBA에서는 초기부터 오랫동안 센터가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왔으며, 현재는 상상하기 어려운 개인 기록들 중 상당수가 센터 선수들에 의해 작성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가드나 포워드에게 주역 자리를 내주고 있다.[2]
최근에는 포지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경향도 있어, 포워드(스몰 포워드, 파워 포워드) 역할을 수행하거나 센터가 여러 명인 경우도 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골대 주변뿐만 아니라 외곽에서 슛을 던질 수 있는 유럽형 센터가 증가하고 있다.[2]
2. 1. 초창기 (1940년대~1950년대)
1937년까지 농구 규칙은 득점할 때마다 코트 중앙에서 점프볼을 하도록 규정했다. 이 때문에 키가 크고 점프력이 뛰어난 선수를 보유한 팀이 유리했다. 이 시대에 점프볼을 담당했던 선수가 현대 센터의 기원이다.[2]당시 농구에서는 가장 키가 큰 선수도 신장이 1.80미터, 기껏해야 1.90미터 정도였다. 이는 현대 프로 농구에서 포인트 가드의 신장이다. 1930년대 대학 농구에서 활약한 무스 크라우스는 1.90미터였고, 약간 후 시대에 "오리지널 셀틱스"의 선수였던 크리스 레너드와 조 랍칙은 1.92미터를 넘지 못했다. 이 시대에는 신장 2미터를 넘는 선수는 실질적으로 없었고, 그러한 선수는 농구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되었다.[2]
1940년대 이후에는 신장 2.10미터에 가까운 센터 선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지 마이칸(약 1.83m)이나 밥 커랜드(약 2.13m)와 같은 유력한 센터들은 상대 선수가 던진 슛 볼을 바스켓 바로 앞에서 쳐내 슛을 막았다. 커랜드는 프로에 진출하지 않았지만, 마이칸은 NBA의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에 입단하여 3연패를 포함한 5번의 우승에 기여했다.[2]

두 선수는 당시로서는 매우 유력한 선수였고, 대학 농구에서는 슛 블로킹에 제한을 가하기 위해 골텐딩 규칙을 마련해야 했다. 또한 NBA에서는 마이칸을 보유한 팀이 너무 유리해지지 않도록 골 밑의 제한 구역을 약 3.66m(약 3.6m)까지 확대했다. 이러한 규칙 변경은 이윽고 국제 농구에도 도입되었다.[2]
2. 2. 빌 러셀-윌트 체임벌린 시대 (1960년대)

1960년대, 빌 러셀과 윌트 체임벌린은 이전의 센터들보다 더 뛰어난 운동 능력을 결합하여 농구를 더욱 발전시켰다. 조지 미칸의 은퇴 이후, 이 두 거인의 경쟁은 NBA를 지배했다. 체임벌린과 러셀은 1958년부터 1969년까지 11년 동안 11개의 MVP 상 중 9개를 수상했고, 1959년부터 1969년까지 6번의 동부 컨퍼런스 결승과 2번의 NBA 파이널에서 서로 맞붙었다. 이 두 선수가 세운 많은 기록들은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특히, 체임벌린과 러셀은 역대 시즌별 리바운드 평균 상위 18개를 보유하고 있다.
빌 러셀은 샌프란시스코 대학교를 2년 연속 NCAA 선수권 대회 우승(1955, 1956)으로 이끌었다. 그는 보스턴 셀틱스에 합류하여 13년간의 선수 생활(1956–1969) 동안 11번의 우승과 5번의 MVP를 수상하며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조 중 하나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러셀은 슛 블로킹, 리바운드, 그리고 육체적인 맨투맨 수비로 수비 전략에 혁신을 가져왔다. 그는 셀틱스의 공격 중심은 아니었지만, 러셀이 수비 리바운드를 잡아 정확한 아웃렛 패스를 포인트 가드 봅 쿠지에게 주로 연결하여 속공을 시작했을 때 팀 득점의 상당 부분이 나왔다. NBA 최초의 흑인 슈퍼스타였던 러셀은 선수 생활 내내 보스턴 팬들로부터 인종 차별에 시달렸으며, 특히 1966–67 시즌 이후 그는 주요 스포츠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임명된 최초의 흑인이 되었다.[3]
그의 주요 경쟁자인 윌트 체임벌린은 키 2.15m, 몸무게 124kg로, 러셀만큼의 지원군을 갖지 못했다. 체임벌린은 캔자스 대학교에서 대학 농구를 했고, 1957년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와의 결승전으로 이끌었다. 제이호크스는 연장 3차전에서 1점 차로 졌지만, 체임벌린은 토너먼트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하렘 글로브트로터스에서 잠시 활동한 그는 1959년 NBA의 필라델피아 워리어스에 합류하기 전, 1967년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와 1972년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서 두 번의 우승을 차지했지만, 그의 팀은 동부 컨퍼런스와 NBA 파이널에서 셀틱스에게 반복적으로 패배했고, 1970년과 1973년에는 윌리스 리드의 뉴욕 닉스에게 NBA 파이널에서 두 번의 패배를 겪었다. 그는 또한 7번의 득점왕, 11번의 리바운드왕, 그리고 4번의 정규 시즌 최우수 선수 상을 수상했으며, 1960년에는 신인 선수로서 처음으로 이 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당시 어떤 선수보다 강력했던 그는 마음만 먹으면 득점과 리바운드를 할 수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더블 팀과 트리플 팀, 그리고 낮은 자유투 성공률을 이용한 파울 전술의 대상이었지만, 깨지지 않은 많은 기록들을 세웠다. 특히, 체임벌린은 NBA 역사상 한 시즌에 평균 50점 이상을 기록하고 한 경기에서 100점을 득점한 유일한 선수이다(둘 다 1961–62 시즌 필라델피아 워리어스 소속). 그는 또한 NBA 역대 리바운드 평균(27.2), 한 경기 최다 리바운드(55개),[4] 그리고 통산 리바운드 기록(23,924개)을 보유하고 있다.
이 시대에 덜 알려진 센터는 네이트 서먼드였는데, 그는 처음에는 샌프란시스코 워리어스에서 체임벌린과 함께 포워드 포지션을 맡았지만, 체임벌린이 필라델피아로 트레이드된 후 센터로 이동했다. 그는 우승을 한 번도 하지 못했지만, 서먼드는 리그 최고의 스크린 플레이를 하는 선수로 알려졌으며, 1966–67 시즌과 1967–68 시즌에 평균 21.3개와 22.0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했는데, 이는 체임벌린과 러셀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넘지 못하는 기록이다.
2. 3. 카림 압둘자바 시대 (1970년대~1980년대)
카림 압둘자바는 1970년대 NBA를 대표하는 센터였다. 밀워키 벅스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서 활약하며 NBA 역사상 최다 득점 기록(38,387점, 거의 39년 동안 유지)을 세웠다.[6] 그는 '스카이훅'이라는 독특한 슛을 개발하여 공격력을 극대화했고, 정규 시즌 MVP를 6번(1971, '72, '74, '76, '77, '80) 수상했다. 1973-74 시즌부터 블록슛 횟수를 기록하기 시작한 후 7년 동안 카림은 이 통계에서 리그를 이끌거나 2위를 기록했다.[7]
압둘자바는 대학 시절 존 우든 코치가 이끄는 UCLA 브루인스에서 뛰며 1967년부터 1969년까지 3년 연속 NCAA 챔피언십 우승을 이끌었고, 최초의 네이스미스 올해의 대학 선수 상을 수상했다. 그의 대학 경력 동안 NCAA는 주로 압둘자바(개명 전 이름은 루 앨신더)의 덩크슛이 워낙 압도적이여서 덩크슛 금지령을 제정하기도 했다.[5]
1969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밀워키 벅스에 지명된 그는 1971년 벅스를 NBA 챔피언십으로 이끌었고, 전설적인 포인트 가드 오스카 로버트슨과 팀을 이루었다. 이후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이름을 카림 압둘자바로 바꿨다. 1975년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로 트레이드된 후, 1980년 포인트 가드 매직 존슨과 함께 5번의 NBA 타이틀(1980, '82, '85, '87, '88)을 획득했다.
그는 키 7'2"(2.18m), 몸무게 235파운드(106 kg)였는데, 전성기 시절의 윌트 체임벌린만큼 힘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더 긴 윙스팬과 엄격한 신체 훈련 덕분에 20년 동안 선수 생활을 하며 NBA 역사상 가장 긴 경력을 기록했다.
2. 4. 하킴 올라주원-데이비드 로빈슨-샤킬 오닐 시대 (1990년대)
1984년, 1985년, 1987년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지명된 센터들은 모두 1990년대 NBA에서 큰 영향을 미쳤으며, 결국 농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나이지리아 출신의 하킴 올라주원은 1984년에 휴스턴 로키츠에 지명되어 파워 포워드 랄프 샘슨과 함께 '트윈 타워'를 이루었다. 1985-86 시즌, 로키츠는 서부 컨퍼런스 결승전에서 레이커스를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올라주원은 1994년과 1995년에 로키츠를 2년 연속 NBA 챔피언십으로 이끌며 지배적인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1993-94 시즌에는 NBA 역사상 유일하게 정규 시즌 MVP, 올해의 수비 선수, 파이널 MVP를 모두 수상하는 기록을 세웠다. 수비에서는 압둘자바의 통산 블록슛 기록을 깼으며, 공격에서는 현란한 발놀림 기술인 '드림 셰이크'로 유명했다.[9]
자메이카 출신으로 보스턴 지역에서 성장한 패트릭 유잉은 1985년 뉴욕 닉스에 지명되어 17시즌 중 15시즌을 닉스에서 뛰었다. 11번의 올스타에 선정된 유잉은 베이스라인 점프슛과 강력한 슛 블로킹, 리바운드 능력을 갖춘 NBA 역사상 최고의 슛 능력을 가진 센터 중 한 명이었다. 닉스는 동부 컨퍼런스 플레이오프에서 시카고 불스 왕조의 강력한 상대였다.
1987년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지명된 데이비드 로빈슨은 미국 해군 사관학교에서의 의무 복무 때문에 2년 후인 1989년에 NBA에 데뷔했다. 로빈슨은 즉시 스퍼스를 우승 경쟁팀으로 변모시켰으며, 10번의 올스타, MVP 및 올해의 수비 선수에 선정되었다. 그는 다른 센터들보다 날씬하면서도 더 근육질이었으며, 빠른 속도와 민첩성으로 상대를 압도했고, 왼손잡이 점프슛도 뛰어났다.
1992년 NBA 드래프트에서는 샤킬 오닐이 올랜도 매직에 지명되며 리그에 진출했다. 2.15m, 147kg의 오닐은 윌트 체임벌린과 비교되며 역대 가장 신체적으로 지배적인 선수로 평가받았다. 세 번째 시즌에 득점 선두를 차지하고 매직을 NBA 파이널로 이끌었지만, 휴스턴 로키츠에게 패했다. 1995-96 시즌 이후,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계약했다. 한편, 1992년에 지명된 알론조 모닝은 샬럿 호네츠와 마이애미 히트에서 뛰어난 슛 블로킹 능력을 바탕으로 2번의 올해의 수비 선수상을 수상하며 최고의 빅맨으로 자리 잡았다.
2. 5. 변화의 시대 (2000년대)
1990년대에 더 많은 해외 선수들이 NBA에 진출하면서 리그의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유고슬라비아의 블라데 디바치와 리투아니아의 아르비다스 사보니스는 각각 1989년과 1995년에 합류하여 새로운 플레이 스타일을 도입했다. 전통적인 포스트업 센터와 달리, 디바치와 사보니스는 플레이 메이킹과 외곽 슛에 더 집중했는데, 이는 유럽 스타일의 특징이었다.2000년대에는 샤킬 오닐과 이후 야오밍, 드와이트 하워드와 같은 전통적인 센터들이 계속해서 경기를 지배했지만, 센터의 중요성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는 더 많은 수의 작은 포워드, 특히 데니스 로드맨과 찰스 바클리가 리바운드, 슛 블로킹, 로우 포스트 수비와 같은 전통적인 센터의 역할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는데, 이는 2000년대에도 이어진 더 작고 빠른 포스트 선수들에게 의존하는 경향을 예견했다. 벤 월러스가 올해의 수비 선수에 선정된 것이 이를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다.
점점 더 많은 팀들이 속공 중심의 공격 스타일을 채택하면서 센터의 전통적인 역할은 줄어들거나 완전히 사라졌다. 많은 재능 있는 빅맨들은 더 다재다능한 파워 포워드 포지션을 선택하여 코트를 더 넓게 뛰고 페인트 존 밖에서 플레이할 수 있는 더 많은 공간을 확보했다. 유럽 농구의 영향으로 빅맨의 공격적인 역할은 디르크 노비츠키, 메멧 오쿠르, 안드레아 바르냐니, 채닝 프라이와 같은 3점슛을 던지는 빅맨과 같이 외곽 플레이에 더 많은 비중을 두도록 재정의되었다.
2. 6. 스트레치 5와 플레이메이킹 센터의 등장 (2010년대~현재)
스몰 볼 농구가 유행하면서 2010년대에 센터의 로우 포스트 역할은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여전히 전통적인 스타일로 플레이하는 센터들이 있지만, 일부 센터들은 외곽 경기에 적응하기 시작했다.마이애미 히트는 크리스 보쉬와 유도니스 하슬렘이 센터와 파워 포워드를 오가는 "포지션리스" 라인업으로 2012년과 2013년에 두 번의 NBA 챔피언십을 우승했다.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는 6'7" 포워드인 드레이먼드 그린을 센터로 기용하는 데스 라인업으로 2015년, 2017년, 2018년에 세 번의 챔피언십을 우승했다.
센터들이 3점 슛을 자신의 무기에 추가하면서 스트레치 5가 부상했다. 주목할 만한 현대의 스트레치 파이브에는 알 호포드, 조엘 엠비드, 칼-앤서니 타운스, 브룩 로페즈, 마크 가솔, 크리스탑스 포르징기스가 있다.
니콜라 요키치는 뛰어난 패스 능력으로 2010년대 후반과 2020년대 초반에 덴버 너게츠를 우승 후보로 만들었으며, 2023년에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NBA 챔피언십을 우승했다. 7'4"의 빅터 웸반야마는 2023 NBA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지명되었다.
2000년 샤킬 오닐 이후, 2021년부터 4명의 MVP 수상자는 센터였으며, 요키치가 2021년, 2022년, 2024년에 3번 수상했고, 엠비드가 2023년에 수상했다.

3. 여자 농구의 센터
여자 농구에서 센터는 중요한 포지션이다. 울리아나 세묘노바는 키 2.13m의 센터로, 소련 여자 농구팀을 이끌며 1976년과 1980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국제 경기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또한 소속팀 TTT 리가를 15번의 유럽 챔피언스컵 우승으로 이끌었다.[10]
앤 도노반은 키 2.03m의 센터로, 올드 도미니언 대학교 레이디 모나크스를 1979년 여대생 체육 협회 챔피언십으로 이끌었으며, 1983년 최초의 여성 네이스미스 대학 선수상 수상자였다. 이후 일본과 이탈리아에서 성공적인 프로 경력을 쌓았다.[10]
WNBA가 창설되면서, 리사 레슬리는 최고의 센터이자 리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선수로 자리 잡았다. WNBA에서 3,000점 득점에 도달한 최초의 선수인 그녀는 로스앤젤레스 스파크스를 2001년과 2002년에 연달아 우승으로 이끌었고, WNBA 경기에서 최초로 덩크슛을 성공시킨 선수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10]
여자 농구의 다른 주요 센터 선수로는 호주의 로렌 잭슨(시애틀 스톰)과 칼 말론의 딸인 체릴 포드(디트로이트 쇼크)가 있다. 잭슨은 뛰어난 외곽 슛 능력을 가지고 있어 한 시즌 동안 WNBA 3점슛 성공률 1위를 기록했기에 포워드-센터로도 간주될 수 있다.[10]
레베카 로보는 코네티컷 허스키스를 1995년 NCAA 여자 디비전 I 농구 챔피언십에서 우승으로 이끌었지만, 전방 십자 인대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실망스러운 프로 경력을 보냈다. 오클라호마 대학교에서 코트니 파리는 단일 시즌에 700득점, 500리바운드, 100블록을 기록한 유일한 NCAA 선수(남녀 불문)가 되면서 차세대 여자 농구의 지배적인 센터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녀는 실망스러운 WNBA 경력을 보였고, 2010년 두 번째 시즌을 시작하기 전에 방출되었다.[10]
WNBA에서 가장 키가 큰 센터였던 폴란드의 고 마고 디덱은 키가 218cm였으며, 은퇴하기 전까지 40경기 덜 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당 블록(2.72개)과 총 블록(877개)에서 레슬리를 훨씬 앞서며 리그 통산 1위를 기록하고 있다.[10]
참조
[1]
서적
SprawlBall: A Visual Tour of the New Era of the NBA
https://books.google[...]
Houghton Mifflin Harcourt
[2]
웹사이트
NBA.com: George Mikan vs. The Knicks
https://web.archive.[...]
2007-06-25
[3]
웹사이트
Boston Sports Review
https://web.archive.[...]
2007-07-14
[4]
웹사이트
NBA.com: Wilt Scores 100, Averages 50
https://web.archive.[...]
2017-11-21
[5]
잡지
Basketball: Lew's Still Loose
https://web.archive.[...]
1967-04-14
[6]
웹사이트
NBA.com: Kareem Abdul-Jabbar Bio
http://www.nba.com/h[...]
2017-11-21
[7]
웹사이트
Kareem Abdul-Jabbar Stats - Basketball-Reference.com
https://www.basketba[...]
2017-11-21
[8]
웹사이트
NBA.com: Artis Gilmore Summary
http://www.nba.com/h[...]
2017-11-21
[9]
웹사이트
It Was All A Dream
https://web.archive.[...]
2017-11-21
[10]
웹사이트
Statistics: All-time leaders: Blocks
http://www.wnba.com/[...]
2012-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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