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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요시카쓰 (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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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 요시카쓰는 쓰시마 후추번의 12대 번주로, 1773년에 태어나 1813년에 사망했다. 1785년 형인 11대 번주 소 요시카쓰가 사망한 후, 가신단의 계략으로 동생인 후슈가 요시카쓰로 둔갑하여 번주직을 이었다. 그는 검약, 강무소 및 강학소 설치 등 번정 개혁을 시도했으나, 가신들의 파벌 싸움과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조선과의 관계에서 1796년 조선에 사절단이 파견되었고, 1811년에는 마지막 조선 통신사가 쓰시마를 방문했다. 1812년 차남 요시카타에게 번주직을 물려주고 은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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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요시카쓰 (후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소 요시카쓰의 영정(도쿄 요교인 소장)
소 요시카쓰의 영정(양옥원 소장)
씨명소 씨(宗氏)
이름소 요시카쓰(宗義功)
시대에도 시대(江戸時代) 중기 - 후기
출생안에이(安永) 2년 2월 29일(1773년3월 21일)
사망분카(文化) 10년 5월 17일(1813년6월 15일)
개명아명: 후슈(富寿)→이사자부로(猪三郎), 요시카쓰(義功)
계명조겐인(浄元院)
묘소일본 나가사키현(長崎県) 쓰시마시(対馬市) 고쿠분(国分)의 만쇼인(万松院)
관위종4위하・시종、쓰시마노카미(対馬守)、시키부다이스케(式部大輔)
막부에도 막부(江戸幕府)
주군도쿠가와 이에하루(徳川家治), 이에나리(家斉)
쓰시마후추 번(府中藩) 번주
아버지소 요시나가(宗義暢)
어머니나가도메 도우에몬(永留藤右衛門)의 딸 오리에(織江)
형제이사자부로(요시카쓰), 후슈(요시카쓰), 소슈(種寿) 등
아내정실: 오이노미카도 이에타카(大炊御門家孝)의 딸 쇼슌인(彰順院)
측실: 시케(오야마 씨), 구마(구마가이 씨), 무라카미 씨
자녀요시카타、노부마고 가타나오(暢孫質直)、쓰에 사젠(津江左善)、오우라 하키(大浦伯耆) 등
특이사항형의 요절로 바꿔치기되어 번주가 되어 아명을 형과 같은 이사자부로로 바꿈
경력
전임 직책쓰시마 후추번(対馬府中藩) 번주
재임 기간1785년 ~ 1812년
대수12대

2. 생애

안에이 2년(1773년) 2월 29일, 소 요시나가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에도 막부 기록에는 메이와 6년(1769년) 출생으로 기록되었다.[1] 덴메이 5년(1785년) 형 이사자부로 요시카쓰가 15세로 요절하자, 쓰시마 후추번 가신들은 번이 개역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막부와 협의하여 요시카쓰를 후슈(富寿)로, 동생 소슈(種寿)를 후슈로 바꿔치기하여 후슈가 가독을 잇게 하였다.[1]

덴메이 7년(1787년)부터 번주로써 친정을 시작했고, 검약령을 철저히 시행하고 강무소(講武所)와 강학소(講学所) 등을 설치했다.[1] 그러나 요시카쓰는 병약하고 나이가 어렸기에 가신단이 주도권을 놓고 파벌 싸움을 벌였고, 번은 재정난에 빠졌다.[1] 간세이 2년(1790년) 11월, 쓰시마 소 씨 당주 대대로 내려오던 종4위하 시종(侍従) ・ 쓰시마노카미(対馬守)와 식부대보(式部大輔) 관직에 서임되었다.[1]

조선과의 관계에서, 1796년 (조선 정조 20년)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세자(저군, 儲君) 사망 및 새로운 세자 책봉, 그리고 요시카쓰의 쓰시마 귀국을 조선에 통보하였고, 조선은 문위행 사절단을 쓰시마로 파견하였다.[1] 1811년(분나 8년, 조선 순조 11년)에는 에도 막부 쇼군 이에나리의 취임을 축하하는 제12차 조선 통신사가 쓰시마에 왔으나, 이 통신사는 에도로 가지 않고 쓰시마에서 국서만 전달하고 조선으로 돌아갔으며, '''역사상 마지막 조선 통신사'''였다.[1]

분나 9년(1812년) 10월 2일, 차남 요시카타(義質)에게 가독을 넘겨주고 은거하였으며, 이듬해인 1813년 5월 17일에 사망하였다. 향년 41세였다.[1]

2. 1. 번주 취임

안에이 2년(1773년) 2월 29일, 제10대 번주 소 요시나가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다만 에도 막부의 기록에서는 형과 생년을 합쳤기 때문에 메이와 6년(1769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고되었다.[1] 덴메이 5년(1785년)에 형인 11대 번주 이사자부로 요시카쓰가 15세의 나이로 요절했는데, 이사자부로는 당시 제10대 쇼군(将軍)인 도쿠가와 이에하루를 미처 알현하지 못한 상태였다.[1] 번주 사후에 양자를 들이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번주가 후손이 없을 경우 즉시 번이 개역될 수 있었기에, 이를 두려워한 쓰시마 후추번의 가신단은 막부의 지시도 있었던 바, 이사자부로의 동생인 후슈(富寿)와 소슈(種寿) 가운데 사망한 것은 소슈라고 하기로 하고 후슈를 요시카쓰, 소슈를 후슈로 각각 바꿔치기해서 후슈가 가독을 잇고 쓰시마 후추번의 번주가 되었다.[1] 다만 막부의 기록에는 형과 기록을 합쳤기에 안에이 7년(1778년)에 그대로 상속되었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1] 이는 조선측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1]

덴메이 7년(1787년)부터 요시카쓰는 친정을 시작했다.[1]

2. 2. 번정 개혁과 혼란

덴메이 7년(1787년)부터 요시카쓰는 친정을 시작했고, 검약령을 철저히 시행했다. 강무소(講武所)와 강학소(講学所) 등을 설치하는 데에도 힘을 쏟았다.[1] 그러나 요시카쓰는 원래 병약하고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가신단은 주도권을 놓고 파벌 싸움을 거듭했고, 쓰시마 후추번도 재정난에 빠지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다.[1] 간세이(寛政) 2년(1790년) 11월에는 쓰시마 소 씨 당주가 대대로 받아오던 관직인 종4위하 시종(侍従) ・ 쓰시마노카미(対馬守)와 식부대보(式部大輔) 관직에 서임되었다.[1]

2. 3. 조선과의 관계

1796년(조선 정조 20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세자(저군, 儲君) 사망 및 새로운 세자 책봉, 그리고 요시카쓰의 쓰시마 귀국을 조선에 통보하였다. 조선은 문위행 사절단 113명(《소씨 가보략》에는 111명)을 쓰시마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저군의 죽음에 대한 조문 사절(당상 박준한, 당하 임서무 등 68명)과 새로운 세자 책봉 및 도주 요시카쓰의 쓰시마 귀국을 축하하는 사절(당상 최창겸 등 45명)로 구성되었다. 사절단은 1802년 8월 18일 조선을 출발하여 8월 29일부터 11월 8일까지 후추에 머물렀고, 12월에 기장군을 거쳐 귀국하였다.[1]

1811년(분나 8년, 조선 순조 11년), 에도 막부 쇼군 이에나리의 취임을 축하하는 제12차 조선 통신사가 쓰시마에 왔다. 이 통신사는 에도로 가지 않고 쓰시마에서 국서만 전달하고 조선으로 돌아갔으며, '''역사상 마지막 조선 통신사'''였다.[1]

1818년(조선 순조 18년), 쇼군 이에나리의 손자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조선에 전해졌다. 조선은 당장 진동익과 현의온, 당하 이숙을 문위행 사절로 파견하였다. 조선 측 기록에는 11대 이사자부로 요시카쓰가 쓰시마 번주 지위를 이었던 1780년 이후 요시카쓰 사망에 대한 언급은 없고, 12대 당주 요시카쓰의 은거 소식만 전하고 있다.[1]

2. 4. 은거와 죽음

분나 9년(1812년) 10월 2일, 차남 요시카타(義質)에게 가독을 넘겨주고 은거하였다.[1] 《증정교린지》에 따르면, 순조 18년(1818년) 이에나리 쇼군의 손자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조선에 전해져, 조선에서는 진동익, 현의온, 이숙을 문위행 사절로 파견하였다. 《증정교린지》에는 11대 이사자부로 요시카쓰가 쓰시마 번주 지위를 이었던 정조 4년(1780년) 이후 요시카쓰 사망년도에도 사망 관련 언급 없이 12대 당주 요시카쓰의 은거 소식만 전하고 있어, 쓰시마 후추번에도 막부뿐 아니라 조선에도 요시카쓰의 바꿔치기를 알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요시카쓰는 은거 이듬해인 1813년 5월 17일에 사망하였다. 향년 41세였다.[1]

3. 가계

항목내용
아버지소 요시노부 (1741년 ~ 1778년)
어머니오리에(於里江), 즈이쇼인(瑞昌院) - 나가도메 도자에몬의 딸
정실쇼준인(昌順院) - 오노미카도 이에타카의 딸
측실시케 - 오야마 지부노조의 딸, 쿠마 - 쿠마오이 야고로쿠의 누나, 무라카미 신스케의 딸
차남소 요시카타 (1800년 ~ 1838년)
생모 불명의 자녀삼남: 요시노부 마사나오, 사남: 츠에 사젠, 오남: 오우라 호키, 딸: 토쿠 - 마츠다이라 나리카타의 정실, 이후 쿠죠 히사타다의 정실


4. 이름자를 받은 인물


  • 소 가쓰시게(宗功茂) - 소 요시카쓰의 차남이자 차기 번주로, 훗날 요시카타로 개명하였다.[1]
  • 스기무라 가쓰유키(杉村功如) - 소 씨의 가신으로, 훗날 요시카타 사후 그의 유언을 위조하여 정쟁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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