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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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순개는 서진 시대의 인물로, 사마의의 외손자이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사마의로부터 기대를 받았다. 촉 정벌에 참여하여 장빈이 지키는 한성을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효기장군, 시중 등을 역임했으며, 권력을 이용하여 정적을 제거하고 양태후 폐위에 앞장섰다. 정서대장군까지 올랐으며, 삼국지연의에도 등장한다.
순개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외조부 사마의가 '호자(虎子)'라는 자를 지어주었다.[14] 사마의는 "(순개가) 커서 함께 천하를 다스리고 싶다"라고 말하기도 했다.[1] 순개는 순익(荀霬)과 사마씨(司馬氏)의 차남으로,[15] 아버지가 죽자 그 뒤를 이었다.[16] 함희 연간(264년~265년) 오등작 제도가 시행되면서 아버지의 공로로 남돈자(南頓子)에 봉해졌다.[16]
wikitext
순개는 위나라 병사로, 삼국지연의 제116회에 등장한다. 남정관을 지키는 촉나라 장수 노손과의 전투에서 종회의 말발굽이 다리에 빠져 위기에 처했을 때, 순개는 단 한 발의 화살로 노손을 낙마시켜 남정관을 탈취하는데 기여했다. 이러한 공으로 순개는 호군에 임명되었고, 안장과 갑옷도 하사받았다. 이후 한성을 포위했다.
[1]
서적
荀氏家傳
2. 행적
경원 3년(263년) 촉 정벌에 종회 휘하의 호군(護軍)으로 참전했다.[17] 경원 4년(263년) 9월, 종회가 한중에 이르자, 순개는 장빈이 지키는 한성(면양현)을 1만 명의 군사로 포위했다.[2][3][17] 그러나 성을 함락하지는 못했고, 장빈은 촉한 조정이 등애에게 항복한 후에야 종회를 찾아가 항복했다.[4][18]
전후, 산도의 추천으로 효기장군이 되었고, 숙영 통어 솜씨가 뛰어났다.[5] 부친 사후 작위를 이었고, 함희 연간(264년~265년)에 오등작 제도가 시작되자 남돈자(여남군)에 봉해졌다. 사마염 시대(266년~290년)에는 시중을 역임했다.[6]
사예교위 시절, 왕개의 이간질로 견수를 무고하여 면직시켰다.[7]
영희 원년(290년), 사마충 즉위 후 양준이 정권을 잡자, 순개는 종형의 상중에 양준을 방문하여 탄핵받았으나, 양준의 비호로 무사했다.[9] 상서 시절, 울림태수 개등의 처벌에 대해 상서랑 이중과 대립했다.[10]
원강 원년(291년), 양준이 주살될 때, 배개와 무무를 모함하여 처형하려 했으나, 배개는 부지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9][11] 같은 해, 가남풍의 명으로 양태후를 폐위하는 데 앞장섰다.[12]
이후 기록은 없으나, 정서대장군까지 올랐다고 한다.[13]
2. 1. 초기 생애와 촉 정벌
순개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외조부 사마의가 '호자(虎子)'라는 자를 지어주었다.[14] 사마의는 "(순개가) 커서 함께 천하를 다스리고 싶다"라고 말하기도 했다.[1] 순개는 순익(荀霬)과 사마씨(司馬氏)의 차남으로,[15] 아버지가 죽자 그 뒤를 이었다.[16] 함희 연간(264년~265년) 오등작 제도가 시행되면서 아버지의 공로로 남돈자(南頓子)에 봉해졌다.[16]
경원 3년(263년) 촉 정벌에 종회 휘하의 호군(護軍)으로 참전했다.[17] 경원 4년(263년) 9월, 종회가 한중에 이르자, 순개는 장빈이 지키는 한성(면양현)을 1만 명의 군사로 포위했다.[2][3][17] 그러나 성을 함락하지는 못했고, 장빈은 촉한 조정이 등애에게 항복한 후에야 종회를 찾아가 항복했다.[4][18]
2. 2. 서진 건국 이후
순개는 어릴 때부터 이름이 알려졌으며, 외조부인 사마의로부터 "호자(虎子)"라는 자를 받고 "커서 함께 천하를 다스리고 싶다"라는 평가를 받았다.[1] 경원 4년(263년) 정촉이 시작되자 종회의 휘하로 참전하여 장빈이 지키는 한성(면양현)을 1만 명의 군사로 포위했다.[2][3] 촉한의 유선이 항복한 후, 장빈은 종회에게 항복했다.[4]
전후, 산도의 추천으로 효기장군이 되었고, 숙영 통어 솜씨가 뛰어났다.[5] 부친 사후 작위를 이었고, 함희 연간(264년~265년)에 오등작 제도가 시작되자 남돈자(여남군)에 봉해졌다. 사마염 시대(266년~290년)에는 시중을 역임했다.[6]
사예교위 시절, 왕개의 이간질로 견수를 무고하여 면직시켰다.[7]
영희 원년(290년), 사마충 즉위 후 양준이 정권을 잡자, 순개는 종형의 상중에 양준을 방문하여 탄핵받았으나, 양준의 비호로 무사했다.[9] 상서 시절, 울림태수 개등의 처벌에 대해 상서랑 이중과 대립했다.[10]
원강 원년(291년), 양준이 주살될 때, 배개와 무무를 모함하여 처형하려 했으나, 배개는 부지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9][11] 같은 해, 가남풍의 명으로 양태후를 폐위하는 데 앞장섰다.[12]
이후 기록은 없으나, 정서대장군까지 올랐다고 한다.[13]
2. 3. 권력 남용과 정적 제거
순개(荀愷)는 어릴 때부터 명성이 높았으며, 외조부 사마의로부터 "호자(虎子)"라는 자(字)를 받을 정도로 촉망받았다.[1] 사마의는 순개가 커서 함께 천하를 다스리기를 바랐다.[1]
263년 정촉(정벌)에서 종회의 휘하로 참전하여 장빈이 지키는 한성(면양현)을 1만 명의 병력으로 포위하였다.[2][3]
이후 산도의 추천으로 효기장군(중군의 하나)이 되었으며, 총명하고 명민하여 숙영을 통솔하는 능력이 전임자 왕제에 뒤지지 않았다.[5] 사마염 시대(266년~290년)에는 시중을 역임했다.[6]
순개는 사예교위 시절, 평소 왕개와 견수가 서로를 경멸하는 것을 이용하여 견수를 모함하여 면직시켰다.[7]
290년 사마충이 즉위하고 양준이 정권을 잡았을 때, 순개는 종형의 상중에 양준을 방문하여 탄핵을 받았으나, 양준의 비호로 무사했다.[9] 또한, 상서로서 울림태수 개등의 파면 문제에 대해, 상서랑 이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등의 녹봉을 삭감하고 태수 자리에 머물게 하는 의견을 내세웠다.[10]
291년 양준이 주살될 때, 순개는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배개를 양준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모함하여 정위에 넘겼으나, 부지가 배개의 무죄를 증명하여 사면되었다.[9] 또한, 무무가 자신과의 교우를 거절한 것에 앙심을 품고, 양준의 외손자라는 이유로 함정에 빠뜨려 처형했다.[11]
같은 해, 황후 가남풍의 명으로 양태후를 영녕궁으로 이송시키고, 양태후가 서신으로 외부에 구원을 요청했다는 소문을 빌미로 태후의 폐위를 주장하여 관철시켰다.[12]
이후 순개의 관위는 정서대장군까지 올랐다.[13]
3. 친척 관계
4. 삼국지연의에서의 등장
5. 평가
참조
[2]
서적
晋書
[3]
서적
三國志 鍾会伝
[4]
문서
[5]
서적
通典 注
[6]
문서
[7]
서적
晋書 牽秀伝
[8]
문서
[9]
서적
晋書 傅咸伝
[10]
서적
晋書 李重伝
[11]
서적
晋書 武陔伝
[12]
서적
資治通鑑 巻82
[13]
서적
三國志 注『荀氏家傳』
[14]
서적
순씨가전(荀氏家傳)
[15]
문서
[16]
서적
삼국지 권10 순욱순유가후전
[17]
서적
삼국지 권28 왕관구제갈등종전
[18]
서적
삼국지 권44 장완비의강유전
[19]
서적
순씨가전
[20]
서적
진기
[21]
서적
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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